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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문경새재 아래의 영남대로,차령아래 삼남대로, 충청수영. 통영 좌, 우대로, 대관령의 관동대로를 다니며 나름의 생각하는 길을 걸었는데 이번 걸음은 조선에 살았던 영남 선비들께서 한양으로 올랐다가 다시금 내려오는 왕복길을 체험해 보는 걸음이다
전체 왕복길이는 약 900km이며 경상 문경새재, 충청, 경기, 한양 경복궁 다시 경기, 충청,괘방령 경상으로 돌아 집으로 가는 길
길이란 누군가 열심히 다녀야 만들어진다.
단군 이후에 고구려는 주몽이 나라를 세워 평안, 함경. 황해,
백제 온조왕은 호남과 충청 일부를 거점으로
경상도 일부와 충청 일부를 거점으로 나라를 세운 혁거세,
경남 남해의 수로왕, 고려의 왕건, 조선의 이성계에 이르기까지 각 고을마다 이어지는 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남아있는 흔적은 대부분 아스팔트 아래로 사라졌지만 책갈피 넘기듯 파헤치면 그 길이 보일 듯하니 어느 길을 걷던 상상하면 보이지 않던 그 길이 보인다
대구 반월당의 순교 기념관 관덕정에서
2025년 7월 26일 새벽 01시 34분 시작
8월 8일 오전 11시 3분까지 879km 13일 반나절 322시간 기록
하루 평균 65km진행
도심의 밤공기는 한낮의 열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식을 줄 모르고 가마솥뚜껑처럼 뜨겁기만 하다.
출발도 하기 전에 땀이 비 오듯 흐르니 뜨거운 보약 한 첩 먹는다는 생각과 살아있는 걸음으로 서울로 걸어야 할 것 같다
이 길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코스는 대구 반월당ㅡ칠곡향교ㅡ다부동ㅡ구미 장천ㅡ의성 단밀면ㅡ낙단보ㅡ상주(함창)ㅡ문경(새재)ㅡ충북 괴산(연풍)ㅡ충주ㅡ수안보ㅡ충주 살미면ㅡ단월동 ㅡ대소원면ㅡ주덕ㅡ신니ㅡ음성군 생극면ㅡ일죽ㅡ백암ㅡ원삼ㅡ한남정맥 문수산ㅡ용인시청ㅡ신갈ㅡ경부고속도로 옆ㅡ양재동ㅡ강남역ㅡ신사역ㅡ한남대교ㅡ이태원ㅡ용산ㅡ서울역ㅡ숭례문ㅡ경복궁ㅡ312km 전반전의 주요 지명들이고 후반전은 대간길 괘방령을 중심으로 부산까지 다시 부산에서 대구까지가 연장전 879km이다
대구 반월당과 동아쇼핑
전반전은 서울 경복궁까지 4일 반 정도 잡고 지나는 각 고을마다 평균기온 35도를 자랑하며 마을에서는 연신 외부 활동을 자제하란 재난 방송과 문자가 날아온다
온몸의 땀을 모두 짜내야 하는 머나먼 길 철새가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가듯 그렇게 길을 북쪽으로 향해 걸어야 할 것 같다
지나간 경로
차타고 가면 금방인데 ...
백두대간 문경새재와 괘방령을 넘어서는 곳을 기점으로
과거길
958년 고려 광종때 중국 후주 사람인 쌍기가 고려에 귀화하여 광종에게 과거제도를 실시하게 한 뒤로부터 약 900년간 유교 경전 사서,삼경(七書)을 비롯한 춘추, 예기, 효경 47만 자를 달달 외우는 것도 부족해 정치, 경제, 역사, 철학, 살아가면서 알아야 할 것들을 공부하게 만든 시험이며 그러한 것들을 논술이란 이름으로 풀어내야 하는 머리 터지는 능력을 검증하는 시험이다. 세상에는 실력으로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이러함에도 1천 년간 문과 급제자 2만 명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부산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과거길에서
과거길
길을 걸으며 많은 사람들이 질문한다
이 더운데 왜 걷느냐? 고
여행은 때로는 계절과 날씨와 무관하게 찾는 도전이고 행복이며 선택
내 가장 젊은 날인 오늘은 두 번 다시 안 온다
그래서 먼 길을 떠난다
가장 뜨거운 날을 선택하고 그 길 위에 오롯이 서서 태양아래 붉은 고추 말리듯 몸을 맡긴다
가다 보면 고통이 바람처럼 소리 없이 파고 들것이고,
비록 즐겁지 않은 고통이건만 걷는 길에 아픔과 고통을 뺀 즐거움은 결코 있을 수 없겠다
생각을 무디게 만드는 고통은 나를 힘들게 하려는 걸 수 있고 아니면 어릴적 성장통처럼 스스로 이겨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일 수도 있다
13일간 걷는 도중에 물과 떨어질 수 없었으니
각얼음 하루 7개(새벽에 1kg, 그다음 3kg까지)
생수 하루 0,5리터 10개, 음료 7개, 바나나 우유 3개
식사량 하루 한 끼, 두 끼 (밥값은 많이 아낌)
목구멍까지만 시원한 아이스크림 5개
매일 이렇게 준비하지 않으면 몸이 열을 받아 폭발할 것 같았다
다행이라면 전국 10만㎢ 안에 약 6만 개의 편의점이 주, 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다음으로 10만 개의 커피숍이 촘촘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대령하고 대기한다
그리고 내 비록 닭이란 녀석의 치킨을 좋아하지 않지만 새벽까지 장사하는 치킨집 또한 5만개가 여기저기 각고을마다 흩어져 내가 지날 때를 기다린다
이제 막강한 21만 지원군단을 소개했으니 배수진을 치고 걷기만 하면 되는데 이건 내 생각일 뿐이고 그렇게 녹록지 않은 게 현실이다
각얼음은 목덜미에 올려가는데 정확히 2시간 전에 다 녹고 미지근해진다 그다음에는 마시거나 머리를 감거나 무릎부터 발을 씻거나...
지금과 예전의 서울 올라가서 내려오기를 비교한다면 비교불가이며 대적불가한 길이니 대단하다는 말은 거추장 스럽고 불필요하다
예전에는 길도 그렇지만 고개마다 산냥이와 산적들 그리고 배고픔과 불편한 잠자리가 나그네의 발목을 잡았고 비 오는 장마철과 한겨울 건너야 할 수백개의 하천들, 비포장길 지금의 길과는 비교가 안되기에 단순 수치로 보면 대적이 불가하다
지금도 불편한 길이나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꽃길이니 그 왕복 꽃길이 어떤지...
올라 가는길에 역사는 그렇게 따지지 않으니 지난날 썼던 영남대로편 참고하면 좋겠다
경상 감영의 선화당
경상감영의 정청(政廳)으로서 대구에 경상감영이 정착하게 된 선조 34년에 이곳에 세운 건물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큰 화재로 불탔으나 순조 때 들어와 새로 지었고 70년대에 중수하였다
경상감영 조선 초기에는 경상부윤이 경상도 관찰사를 겸했는데 그 감영은 경주에 있었고
3대 임금이시던 태종 때 경상도가 다른 8도에 비해서 커서 낙동강을 중심으로 좌측인 경주에 좌윤
우측인 상주에 목사를 두어 각각 관찰사를 맡도록 했다.
이후에 조세체계에 따른 문제점과 부작용이 있어 감영을 경주에서 상주로 옮기고 상주목사가 관찰사를 겸했다
그 뒤 11대 임금이던 중종 때 다시 경주와 상주로 각각 감영을 두었다가 같은 해 다시 원상태로 옮겼다가
성주에 감영을 두었고 그 뒤 달성(대구 달성공원)에 두었다가 정유재란 때 안동에 두었다가 다시 지금의 대구로 옮겼는데 여기저기 이사를 많이 했던 감영이다.
달성공원 앞을 지나 북비산 4거리의 원고개
역이나 원은 조선 초기에는 관리들만 이용 가능했으나 후기로 들어서면서 선비나 장사꾼들 모두 묵을 수 있었고, 주막은 조선 중기까지 주막은 찾아보기 힘들었으나 이후 조선말까지 전국에 주막이 12만 개 정도 있었다
그 이전에는 주막과 같은 편의 시설이 없어 17세기까지 술은 팔아도 밥은 팔지 않아서 짐을 싸서 다녀야만 했는데 관리들이 이용하는 역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30리마다 하나씩 전국에 507개에서 537개 정도였다고 한다
경상좌도 즉 이 길에는 대략 70개 정도이다
덥기로는 아프리카와 비슷하다는 대프리카 도심의 바람은 몹시 거만하다
한낮이나 새벽이나 다를게 없이 한결같이 초심을 유지한 채 뜨거운 열기를 품는다
뜨거운 바람도 어디까지 견디는지 이 바람도 입추를 전후로 해서 달라질 것이라 생각해 보며
팔달시장과 금호강을 건너
칠곡도호부
칠곡은 천년의 세월을 간직하였으며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영남대로의 중심으로 한양으로 올라갈 때 꼭 거쳐야 했던 곳이다.
한때는 칠곡 도호부(조선말 순조 때)로 불렀을 정도로 유명했던 곳 인근 팔거천을 중심으로 하천이 일곱 개 있다는 뜻으로 칠곡(七谷)으로 불렀다가 조선시대 때 들어와 칠곡(漆谷)으로 바뀌었다.
또, 신라시대 때는 팔거리현으로 고려 시대 때는 팔거현으로 조선 인조 때부터 칠곡으로 불렀고 임진왜란 때 3년 동안 경상감영으로 사용했을 정도로 명품 도시로 성장했다
칠곡 향교의 명륜당
칠곡향교의 하마비
소야고개에 도착
사장님께 이 길을 지나니 새벽 일찍 문 열고 기다리시라 했건만 정작 내가 늦었다
김밥 두 줄과 박카스 그리고 곰 쓸개즙이 담긴 알약까지 챙겨주시며 서울까지 차 태워 줄까 하신다
늘 고마운 분으로 팔공산 종주길에 만날 수 있는 분이다.
이곳의 김밥은 전국 어느집의 김밥보다 맛있는데 하루에 100줄 팔며 아침 9시쯤이면 다 팔고 없다.이길을 지나는분들께서는 참고 하시면 좋겠다.
다부동 5번 국도 따라 어둠은 저만치 물러갔고 날이 밝자 온몸에서 열기를 식히느라 땀이 비 오듯 흐른다.
그늘 없는 길을 걸으며 찾은 곳은 5번 국도변의 다부동 전승비 앞이고 잠시 낯선 땅에서 목숨 바친 분들께 묵념하며, 이곳 전승비는 미 보병 27 연대 장병들의 공헌을 길이 남기고자 만든 비(碑)이며 1950년 8월 미 제27 연대와 한국군 1사단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곳이다.
이곳에 수십 번 와봤지만 아직 찾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대부분 다부동 전투 승전비가 있는 곳으로 가기 때문이다
천평에서 구미시 장천방향으로 가며
걸치고 있는 건 모두 무장해제 시키는 아스길
인생은 물길 여행과 다르지 않으니 가던 길을 버리고 다시 되 돌아갈 수 없다
이미 활시위는 경복궁이나 부산의 동래읍성을 돌아 대구로 향하고 있으니
삶거나 찜하거나 아스길 위에 빨래가 된 듯 온몸이 타들어 가는듯한 찜통 같은 날이다.
조선시대 여인들이 사랑했던 능소화 꽃이 반기기는 한데 왜 담장 안에 조신하게 있지 못하고 도로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는지
집보다 지나가는 사람이 더 좋은듯한 삶을 사는 능소화다
멀리 선산땅의 냉산이 보이고
이번 걸음에는 온전한 무장해제 이며
겨울이라면 덕지덕지 껴입어야 하겠지만
여름에는 걸치고 있는 건 모두 벗어도 덥다
그래서 더 덥다
두꺼운 피부가 갑옷이라면 이것 마저도 한 겹 벗어던지고 싶을 정도이니
지나온길이며
무슨 문제든 많이 풀수록 쉬워지는데
걷는 문제는 갈수록 더 어렵다.
이유라면 마음이 정하는 길이 갈수록 늘어나기 때문이다.
갑장산 방향
하늘에 보이는 구름이 제발 내 머리 위에까지 지나오기를 천지신명 산천초목에 간절하게 빌어 보건만
움직임이 전혀 없어 보이고
해평땅에 들어와
마트에 들어가 각얼음 하나와 얼음병 음료수 각각 두 개 사서 나온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집에 와서 잠시 쉬었다 가란다
지하수가 정말 시원했는데 머리 감고 다리와 발도 씻고
옷도 빨고 나온다.
해평 연못지에 도착해서 역사가 아주 오래된 연못인데 신라최초의 가람인 도리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이 연못에 연꽃이 길이 피거든 나의 정신이 살아 있음을 알아 달라고 했다고 전한다
정자에 올라 잠시 쉬는데 바람이 참 좋다. 오후 1시 40분 무렵 기온 36도 도로길 체감온도는?
몸은 가기 싫어하고 마음은 여기에 눌러있다가 해 질 무렵에 가자하고 하지만 더 있다가는 게을러질 것 같아 미련을 버리고 일어선다
해평에서 사 온 각얼음 3kg는 벌써 다 녹아 미지근하다.
저 끝에 편의점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냉산 아래 아도화상이 창건한 도리사 앞을 지나고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창건한 신라 최초의 사찰로써 아도화상이 겨울인데도 복숭아꽃이 만발하게 피어있는 걸 보고 그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 칭했다고 한다.
해평 신양리 마을 앞을 지나니 마을 어르신들께서 음료수 한잔하고 가라며 부르신다.,
시원한 켄맥주 하나를 건네주셨지만 낮술 마시고 도로길을 걷다가 골로 갈 것 같아 사이다만 연신 두 컵 마시고 일어선다.
청량음료는 딱 목구명까지만 시원하니 뱃속까지 연결 동작이 안된다.
그래서 돌아서면 갈증이 더 심하다
배롱나무가 반기는 아스길 가야 할 2km 직선길
어디 소달구지라도 느릿느릿 간다면 얻어 타고 가겠지만 요즘 세상에 그런 것이 있을 리 만무하고
쳐다보면 나만 손해 고개 숙이고 바닥에 뭐 떨어진 것 없나 살펴보며 걸으니 그래도 걸을만하다
구미보가 보이고
지나온길
거위털처럼 따듯함이 느껴지고
시골집 온돌방처럼 드러눕고 싶고
포근한 이불 깔고 자고 싶고
이런 생각이라면 아마도 정신 나간 사람일 텐데
그런데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가야 할 길
그늘이라고는 전깃줄이 만든 일자그늘인데 저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포복하며 가고 싶다
오늘 흘린 땀은 최근 1년간 흘린 땀과 비슷할 것 같다.
땀은 99%의 물과 0,1%의 요소 그리고 0,8%의 염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온몸에서 지린내가 나는 건 0,1%의 요소 때문이란다
그런데 물 마시고 땀을 흘리다보니 지린내보다 맹물 향이 느껴진다.
오후 3시 40분 무렵
기온 35도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그냥 뜨겁다
몸속의 물이 1%만 부족해도 갈증을 느끼는데 마셔도 그때뿐이니 이러다 몸속의 물 때문에 빠져 죽는 건 아닌지 그리고 야전에서 장시간 걸으며 수분을 보충하지 않으면 콩팥에 이상이 생겨 급성신부전이 생기며 심하면 사망에 이른다 하니 물을 부지런히 마셔야겠다
31도 이상 온도의 햇볕에 시간당 4ㅡ5km를 걷는 병사에게 한시간당 물 1리터를 공급해야 한다는 야전 표준 교범도 있고 하니 소변을 통해서 물을 과하게 마시면 흰색이고 부족하면 노란색에 가깝다니 참고하면 좋겠다
구미시 낙산리 고갯길에 만나는 고분군
낙동강 동쪽 언덕에 250기 정도의 옛 무덤군이 조성되어 있다.
잠시 그늘에 누웠다가 간다
의구총(義狗塚)
주인을 구한 의로운 개 무덤
선산해평 산양에 사는 김성원 혹은 노성원으로 전하는 이의 집에 황구를 한 마리 길렀는데 하루는 주인인 이웃 마을에서 술을 거하게 마시고 월파정 북쪽 길가에 잠이 들고 말았다
이때 불이 나서 주인이 위험하게 되자 개가 낙동강에 뛰어가 몸에 물을 적셔 주인을 구하고, 죽고 말았는데 개 때문에 살아난 주인이 감동하여 관을 갖추고 매장하고 무덤을 만들었다 전라도 임실의 오수의 개(고려시대 때 김개인) 이야기와 너무나 닮아있다.
구미시 도계면 어느 식당에서
식당에 혼자 들어가면 늘 미안한데
막무가내식으로 찾는 건 마음에서 용서가 안되기에 늘 주인분께 공손하게 인사하고 양해를 구하는 편이다
여주인께서 웃으며 "국토종주 하시느냐" 묻는다
"그렇다"고 말씀드리고
선풍기 두대를 한꺼번에 틀어 주시며 혼자 먹기에 많은 양인데 그것도 모자라 별도로 또 담아주셨다.
더운 날에는 잔치국수가 최고다
만원 드리며 거스름돈 3천원은 주인분께 아이스커피 값이라 말씀드리고 나온다
부처고개
고향땅 의성에 들어서서
고향땅이건만 부모님 생각보다 에어컨 선생이 더 생각나고
무지막지했던 태양이 결국 서산으로 넘어가고
오늘 하루가 참 길게 느껴졌는데 내일은 또 어떨지
낙동강가에 관수루란 정자가 있어 그곳에서 원앙금침 깔고 오늘 밤 잠잘까 했으나
밤을 잊은 사람들이 있어 자는 건 포기하고 강 건너 상주땅에 들어간다.
낙단보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며 영남인들의 젖줄인 낙동강
발원지인 강원도 태백부터 수많은 고을과 수없이 휘어져 흐르며 제 갈길인 바다로 흐르는 살아있는 강이다
낙동강을 건너 오늘은 75km를 걸어와
인근 모텔에 들어가 자는데 에어선생이 고장인지 바람도 별로고 소리가 덜덜 거리는게 금방 고장이 날것 같다.
씻고 빨래하고 ...
누워있는 동안 덜덜 거리는 소리가 점차 잊혀졌고 27일 02시에 밖으로 나온다.
헐
죽었나 싶어 살금살금 가보니 코까지 골며 주무신다.
예전 같으면 산냥이가 냉큼 물어갔을 일
"어르신"하며 깨웠지만 움직이지 않으셨고
단잠 주무시는데 더 이상 깨우다가 욕먹을 것 같아 돌아서지만
예나 지금이나 한잔술은 누구에게나 웅장한 용기를 주고 무서움도 사라지게 하니 진정 노숙의 달인으로 만들기 부족함이 없다
예전에 상주와 의성 구미로 이어지는 나루터가 있던 곳인가 보다
날씨는 새벽이나 한낮이나 별로 다를 바 없으니
땀이 벌써 비 오듯 흐른다.
낙동면 편의점에 들러 필요한 것들 사서 나와
어라!~ 밤하늘에 은하수가 아주 맑게 보인다. 도로 따라가며 은하수가 곱게 뿌려진 밤하늘을 걷다 보니 옛 생각이 난다
시골의 저녁 무렵 외양간에 모기들이 극성이어서 아버지께서는 일찌 감치 생쑥과 보릿단을 함께 넣고 모깃불을 만들어 온마당에 연기를 피우셨고 집 앞 길가에 멍석을 깔고 누워 밤하늘은 올려다보며 맑은 은하수에 견우와 직녀가 소 타고 만나는 걸 상상했는데 어느덧 나이는 들고 견우와 직녀가 하늘에서 뭘 하던 상관없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함에도 뿌연 은하수는 너무 아름답기만 하다
호랭이와 곶감
어느 불 꺼진 편의점 앞 나무의자에 모자란 잠을 잘까 하고 누웠더니 이 새벽에 노총각 한분이 지나가다가 저를 보고 찾아와 고아로 자란 이야기며 신세 한탄을 한다.
들어주고 맞장구쳐주고 30분간 듣다 보니 노총각이 잠 깨워 미안하다며 고개너머 마을로 걸어간다
잠자다가 마빡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 드는데 잠이 확 달아났다
해가 밝아지려나
맑은 병천을 건너며
경상 제일문을 호기롭게 지나
옛 경상 감영이 있던 자리에
관찰사의 임기는 대부분 1년이며 도내 여기 순회하였기에 감영에 살지는 않았다
경주에 있던 감영을 태종 8년에 상주로 옮겨와 선조 26년에 성주로 옮겨갔는데 거의 200년동안 상주에 있었고 감영은 일제강점기 때 상주읍성과 함께 대부분 철거되었고 지금은 복원을 해놓은 상태다
경상감영을 지나며
이른 아침에 운동 나오신 마을 분들
땀에 젖은 사람은 나뿐인 듯
오늘은 문경새재까지 가야 잘 수 있기에 대략 60km만 걸으면
대간길 지기재 인근에서 흘러온 북천을 건너며
편의점에 들러 각얼음과 얼음물병 4개
음료수 우유 사서 나온다.
목 뒤에 각얼음을 하지 않으면 피가 뜨거워져 도로길가에 소리 없이 쓰러질지 몰라서...
시원함 그리고 축축함이 좋다
뜨신 길이라
이 정도는 돼야 한다며 걸으니
차가 지날 때마다 바람이 일어난다
상주에서 사 온 음료
이런 건 수시로 사서 마셔야
남산 위의 철갑을 뜯어와 만들었다는 전설의 튼실한 신발
천리마처럼 천리를 가볍게 달릴 것 같은 신발도 뜨거운 열기에 억장이 무너지는지 주인을 보호해야 할 막중한 의무를 저버리고 발바닥이 뜨겁게 만들고 있다
공검 저수지와 멀리 남산- 작약산 방향
공검지 고인 물이다. 고인 물은
늪소(沼) 못이란 말이고
못지 (池) 저수지란 말이고
못택(澤) 마른땅에 물이 들어온다는 말이고
호수호(湖) 큰 호수를 뜻하고
못담(潭) 깊이 있는 연못이란 말이고
못연(淵) 깊은 연못을 뜻한다.
오늘도 바둑돌처럼 작은 구름이 찌는듯한 무더위에 어쩔 줄 몰라하고
아침 8시 32분경
아스팔트가 말한다
"나는 누군가 내 몸 위를 걸어 줄 때가 가장 좋다"라고
아스팔트가 다시 말한다
"내가 가장 기분 좋을 때 누군가 땀방울로 나를 적셔 줄 때가 가장 기분 좋다고..."
그래! 그래! 내가 흘린 땀방울로 너의 등짝을 오롯이 흠뻑 적셔 주마
내가 흘린 땀방울
14일간 매일 어제나 오늘처럼 흘린다면 누군가는 목욕할 물이 될 것이며 누군가는 빠져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모든 땀구멍이 장마철 국내 최고의 댐인 소양강 수문을 활짝 열어 놓은 듯 개방상태다
가야 할 아스길
사막이 아름다운 건 맑은 물이 있는 오아시스도 낙타도 아닌 뜨거운 태양 아래에 모래가 끝없이 있어 아름답다.
태양은 뜨겁고 알싸한 맛이 일품이니
자연이 내게 주는 미친 맛이란 바로 이런 맛이 아닌지
동래정씨 열녀각
때는 연산군 때 교리의 벼슬을 하던 권달수 선생께서 연산군께 직언을 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의 부인 동래정씨께서 남편의 시신이 돌아올 때까지 60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빈소를 차리고 상식(上食)을 지내며 울다가 어느 날 시신이 돌아오자 문 앞에서 영접하고 그 자리에서 남편 따라 운명했다고 한다.
정 씨 부인의 위대한 사랑을 생각해 보며
속리산에서 흘러온 이안천을 건너며
퐁당퐁당 징검다리의 그늘이 있어 좋고
10톤짜리 물통
하루 1리터 마신다면 약 30년간 마실 수 있는 물통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평하게 죽기전에 3통씩은 마시고 죽어야 할것으로 보인다.
저놈을 배낭대신에 등짝에 매달고 다녀야 하나
9시 44분 함창읍에 들어와
각얼음 사고 시원한 얼음물병 서너 개 사서 나오는데 눈에 보이는 편의점이 있다면 다 들어간다
이유는 시원해서
사지 않아도 일단은 들어간다
한 바퀴 돌아보고 목구멍까지 시원하다는 쭈쭈바 하나 사고 나온다
매일 에어 선생과 함께 사는 분들은 모른다
에어 선생이 얼마나 위대한지
편의점 들어갔다 나오면 수박향기가 혀끝에 전해지는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입만 시원하다
함창읍이요~
문경(聞慶)땅은 경사스런동네란 뜻인데
한양에서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가장 먼저들어서 생긴동네로 보인다
지난날 지났던 밥집인데 집밥처럼 맛있는 뷔페집이다.
여주인께서 알아보시고 반가워 하셨고
다음에 이길 지날 때 또 오라신다
ㅎㅎㅎ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뜨거운 길을 걷는다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지만 결국은 이 길을 지나는 자가 승리를 하며 펜을 쥘 권리까지 갖기에 주인공은 결국 나다
파란 바둑판에 구름이 몇 개 보이는 하늘이 좋다
이제 점심 무렵이다 뜨거운 열기는 35도를 가리키고 있으며... 아스길 열기에 하늘이 노래질 지경이다
한낮이라 지나가는 차도 없는데
걷는 이에게는 차가 필요 없다.
산이건 하천이건 두발이 허공에 떠 있으면 안 되고
한 발을 들면 한 발은 땅과 함께 있어야 한다.
더운 날은
그저 시원함을 간절하게 생각할뿐이인데
사계절 중 겨울 보다 여름이 더 극혐이다
겨울에는 추우면 방구석에 들어가면 되지만 여름에는 벗어도 덥고 방구석은 더 덥다.
이런 날 방구석 일인자 들은 뭘 하고 지낼까 생각해 보니 에어선생을 생각하며 지낼 것 같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인 에어컨을 만드신 윌리스 캐리어 선생
안개가 공기 중의 습기를 흡수하면서 온도를 낮추는 걸 본 후 만든 에어컨
이 여름에 세상 어떤 위인도 생각이 안 나지만 한국에서 만큼은 천상천하 유아독존 캐리어 선생이 생각난다.
캐리어 산생께서 열사병으로 돌아가셨을 세상의 수많은 사람을 살리셨고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을 살릴 것이다.
우리는 캐리어 선생을 부채신(神) 보다 더 숭배하며 우러러보며 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위대한 캐리어 선생을 매우 그리워한다고 하니
장승이 "말 같지 않는 말" 말라며 아스길 가운데에서 비바람 세상의 온갖 풍상을 이겨냈노라며 웃기지 말라고 하는데 딱밤이라도 한대 주고 가던 길 가야 하나 싶다
유곡지
조선왕실에 에어컨 한대 놔 드렸다면 왕께서는 어떤 벼슬을 내리셨을까
한 사람 아래 만 사람 위라는 벼슬의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영의정까지 내려 줬을지 모를 일이다.
에어컨의 시원함이란 어릴 적 엎드려 궁댕이 높이 들고 아치형을 만들어 등목 할 때와 같은 시원함이니
매일 캐리어 선생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결코 모를 땡볕아래 걷는 사람은 위대한 캐리어 선생을 매일 흠모할 뿐이다.
문경시 유곡동 유곡면의 비석거리 12시 30분 36도 뜨겁다
유곡역과 관련한 비석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곳으로 모두 19기가 있다
주변의 여러 곳에 흩어져 방치되어 있던 비석을 현재의 자리에 모아 놓았고
유곡역은 고려시대 개경을 중심으로 역도 체계에서도 상주도가 으뜸이었고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각지로 뻗은 9대 간선도로도 가장 큰 찰방역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객사만 40여 채에 역리 469명, 노비 83명 다수의 마필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인근 여덟 고을을 걸쳐 200여 리에 19개의 역을 관장했다고 한다.
고려 때는 역과 객사
조선시대 때는 역과 원이 있었는데 전국에 537개나 존재했었고
역의 기능은 관에서 관리를 하거나 지방의 유지들이 관리하는 곳으로 공문서, 세공의 수송과 마필공급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숙식 제공이었다.
광해군 때 대동법으로 쌀로 세금을 내던 것을 공인들이 특산품을 사러 갈 때 화폐로 사고팔면서
본격적인 주막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해 원이나 역의 역할도 차츰 줄어든다.
주막은 민간사업으로 조선후기부터 장사 밑천이 크게 들지 않아 쉽게 돈 벌 수 있어 마을마다 고개마다 생김
문경시 불정동으로 넘어가는 옛길에
아름드리 나무가 즐비하여 길가 공터에 잠시 앉아 있으니 매미란 녀석들이 내짝 찾아달라며 야단이다.
인간으로서 미물의 민원을 들어주고 싶다만 그럴 수도 없고 그럴 자신도 없어 시끄러움을 뒤로하고
일어선다
영강 물속으로 아주머니들께서 다슬기 잡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슬기는 하루에 1리터의 물을 정화시키는데 잡지말지 그리고 요즘은 다슬기 사고로 다슬기가 사람을 잡는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좌측의 비석은 영남의 이름있는 유생의 비석(碑石)으로 추정하며 정욱재 송덕불망비다.
낚시하는 분도 계시고
진남 휴게소 도착
휴게소 옆의 폭포인데 1분만 늦었어도 못 볼 뻔
사진부터 한 장 담고 매점으로 들어간다
매점에서 필요한 것들 사서 나오니 폭포는 언제 그랬냐는듯 시침이 떼고 서있다
생사를 가르는 절망적인 순간에 돌 하나, 하나 쌓아 올렸을 위대한 유산
구멍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구멍이니
저 구멍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학자들과 상인들이 다녔을지
고모산성이 있는 곳이며 우리 선조들께서 이고개를 넘어 하늘재(신라 제8대 왕 156년 무렵)나 문경새재(태종 14년인 1,414년 개통)를 넘어 한양으로 발걸음을 옮겨간 곳
그 옛날에도 이곳을 지나는 이는 꼭 성황당에 들어 무사안녕을 빌었을 터이다.
아주 오래전 이고개를 지나는 길손에게 떡을 팔던 부녀가 살았는데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와 딸이 어찌해서 꽁냥 꽁냥 연을 맺고 선비가 올 때까지 기다렸으나 젊은 선비가 오지 않아 상심하여 병이 나서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어딜 가나 남정네들이 스치고 지나가면 여인들만 불쌍하게 기다린다는 애틋한 전설
새재 관광지구까지 갈길이 멀지만
더워도 너무 더워 원두막에 시원한 각얼음을 베고 누워 낮잠이란 걸 자본다.
머리가 시원하고 바람 좋고 잠이 스르르
꿀떡고개를 내려오면 북쪽으로 멋진 조령산과 주흘산이 지척에 있고
마성면 신현리 마을에 들어와
전국이 인구 소멸지역인데 애기낳은 부부는 나라에 애국하는 분이라 그냥 갈 수 없어 마을 원두막에 들러 축하인사도 해드리고 지난다
7월 27일 오후 4시 무렵 그래도 기온은 33도다
주흘산이 고개를 빼꼼 내밀지만 아직도 거리는 멀고
진남휴게소에서 사 온 각얼음이 다 녹아 새로 하나 더 사 왔지만 뜨거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많이 녹았다
주흘산
오래전 자기가 태어난 땅이 한양인 줄 알았는데 그곳에는 북한산이라는 더 아름다운 산이 있어 한양을 등지고 서 있다는 전설 있을 정도로 문경시 마성면에서 보면 주흘산의 당찬 기운이 느껴진다.
왜군들이 고모산성을 너무 쉽게 통과한 후 이 길을 지나 조령이나 주흘을 지나며 각 고을을 도륙했으나
명산들 중 강원도 오대산, 단양 소백, 합천 가야는 왜적이 이르지 못해 삼재가 들지 않은 곳으로 알려졌고
강원도 금강, 경남 지리, 덕유, 충청 속리산은 왜적이 침입한 걸로 알려졌다.
직선길 1,5KM 구간에서 그늘이라고는 전봇대 그늘뿐이고
지나온 오정산 방향
나를 지켜주던 각얼음 병사들은 모두 전사했는지 미지근하다
문경읍에 들러
그동안 연락하던 하늘재 스님을 만나 인사드리고 들깨 칼국수와 팥빙수 공양받아 봅니다.
스님께서 고루고루 썩어 주셨고
가끔 연락하고 안부를 여쭈어 보는데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시고 성품이 참 정갈한 분이라 배울 점이 많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스님과 다음에 또 만날 것을 약속드리며 문경읍을 뒤로하고 새재로 향한다
백두대간 이화령과 조봉으로 해는 넘어가고
오늘 중으로 새재를 넘어가도 되지만 가까운 민박집에 가서 얼마냐 하니 성수기라며 10만 원이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가격인지 그리고 성수기라고 하나 손님이라고는 나밖에 없는데 하니 그래도 10만 원이라고, 다른 집에 가도 10만 원이란다 그래서 가격 절충하여 5만 원에 들어가니 방에서는 얄궂은 냄새가 난다
일단은 씻고 나와 에어컨을 켜고 누워있는데...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가 결국은 배낭을 다시 꾸려 밖으로 나온다.
아~~ 내 돈 5만 원
불 꺼진 상가들을 뒤로하고
제1 관문을 지나고
임진왜란 이후에 만들어진 1 관문인 주흘관 그리고 2 관문인 조령관 마지막 대간길 높은 곳에 3 관문인 조곡관을 설치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조령원터
고려때와 조선시대 때 출장 가는 관리들이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공익시설물이다.
한양이나 영남으로 오고 가는 길손들의 중요한 이동 통로였으며 이곳 조령과 주흘산 사이에는 이곳과 신혜원 그리고 동화원 같은 원터가 전해진다
역의 유래를 살펴보면 신라 소지왕 9년에 서방에 우역을 두고 소사에 명하여 관도를 수리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만큼 역이나 원의 역사는 꽤 깊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관(官) 주도로 하는 숙박시설인 만큼 일반인들이 이용하기에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설의 고향에 나오던 집으로
아담한 초가집 마루에 누워 잠을 청하고 다시 일어나 걷고
교귀정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 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수 인계하던 교인처로 1470년 경이니 성종 때 건립되었는데 1896년 고종이 경복궁을 버리고 아라시 공사관으로 피신할 무렵인 때 의병전쟁 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99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2 관문 조곡관을 지나고
정자가 있는 곳에는 모두 다 들어 누웠다가
울창한 숲이어서 밤하늘이 보이지 않고 조용해서 좋다
3 관문
부산에서 272km 지점인 백두대간의 새재 조곡관 한양까지 150 km정도
백두대간길이며 수많은 대간꾼들이 이 길을 통해서 남으로 북으로 올라갔던 길이다
이제 저 문만 지나면 한양을 지척에 둔 마음일것이며
느리지만 여유가 넘친다는 충청도 땅이다.
서울,경기,충청.경상.전라,강원도 사람들이 모인다면 충청도가 그중심이니 여유가 생길수밖에 없다
전라도.경상도 사람에게는 "니가 올라온나"
강원,경기,서울 사람에게는 "너가 내려 온나"
살기 좋은곳이나 지금은 전국 어딜가나 인구소멸로 가기에 큰 의미는 없겠다
고사리 마을의 원두막에서 몇 시간 자고 일어나
영조 때 이중환 선생이 쓴 택리지에 보면 조선 선비의 반은 영남에서 나왔다 적었는데, 새재를 넘어오니 충청도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지며 괴산군 연풍면 고사리 마을에 도착한다.
고사리 마을의 유래는 문경과 괴산 고사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고사리 마을이라고 부른다는 설과
예전부터 3 관문 주위로 모래가 많이 난다는 뜻의 고사리(古沙里)란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위의 고사이가 더 친근감이 있고 그럴듯한 설이라 생각해 본다.
고사리 마을에서 본 신선봉 방향
7월 28일 세쨋날 아침 04시 58분
대안보 마을의 선정비
신라 소지왕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대규모로 정비된 마패는 관품에 차이가 있는데 병조에서 마문을 발급하면 상서원에서 마패를 내주었다.
이곳 안부역참은 충주 연역원 14개 중 하나였으며 대마와 기마, 복마가 15마리, 역노 106명, 역비 28명, 역리 25명을 뒀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수안보 직전에 만나는 돌고개 위의 마을을 보호하는 서낭신을 모시는 서낭당이다.
지금은 도로 공사로 많이 파헤쳐있으며 잠시 올라가 합장하고 지난다
과거객이나 조선의 관리들이 왕래하던 길이었지만 길이 너무 질어 바닥에 돌을 깔고 다닌 데서 유래가 된 돌고개
깊은 산속이라 산짐승이 자주 출몰해 아래 동네인 안보역이 있던 안보리 마을에서 액운을 막고, 지나가는 이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차원에서 서낭당을 지은 것이다.
수안보
용은 물을 관장하는 신(神) 답게 용비어천가에도 등장하는데 농업의 기본이 물이니
수안보에도 물을 관장하는 용답게 잘해보자며 의기투합한 모습을 보이며 마주보고 있다.
돌이 사람의 웃는 형상을 하고 있음에도 찡그린 얼굴이 없~~...우는듯한 얼굴이 하나 있네 조짝에
오늘 하루도 웃으며 걸음하란 뜻으로 받아들이며 지난다.
2부는 다음에

첫댓글
존경스럽습니다!
늘 행복한 여정이시길 ᆢ
글 감사합니다.
캐리어선생이라... 남들이 제 방에도 에어컨 없다고 하면 놀라는데...
저는 아직 캐리어선생이 간절하진 않지만, 그래도 시원한 곳은 좋죠.
13일 반나절동안 880km이라.. 하루 평균 65km정도의 걸음
물집 여간해서 안잡히는 방장님의 신의 발에도 물집을 드리운 뜨거운 날씨 아스길
암튼 1편 후기...
전봇대 그늘, 전선 그늘... 그 그늘이라도 찾아 들어가고픈 절대적인 마음
그 옛날 땡볕에 걸음하며 편의점에 들렀다가
감히 밖으로 나설 엄두가 안나서
한참 머물었던 그 때가 생각이 나며...
홀로 그 길을 어찌 감당해내셨을지
암튼 무탈하게 잘 끝나서 다행이고
이렇게 캐선생그늘아래서 후기 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깽이님도 캐리어 선생을 존경 하시나 봅니다.
한여름에 그늘 만들기 전봇대 그늘도 그늘이라고 ...
그 곁에서서 숨을 헐떡 거리던 모습이 생각나는군요
글 감사합니다.
강력한 후원자셨던 우의정 채제공 선생이 돌아가시고 정조까지 승하한 1800년, 서인 노론들에게 눈엣가시였던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는 그분의 조카 사위였던 황서영이 천주교인임을 들어 드디어 유배길을 떠나게 됩니다. 결정적인 증거도 없이 천주교인으로 몰아 제거하려고 한 일입니다.
처음에는 함경도 국경 끝, 경원으로 유배지가 정해져서 한양에서 함경도까지 걸어가 경원에 거의 당도할 즈음인 1800년 한여름, 다시 포항으로 유배지가 바뀌지요. 포항에 당도한 다산 선생께 1801년으로 넘어가는 한겨울, 이번에는 포항에서 전남 강진으로 이배 명령이 떨어집니다.
어쩌면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길에서 객사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강진에 도착하여 눈길에 코를 박고 선생께서 쓰러지시자 호송하던 관군들이 그대로 물러나버리고 주막집 노파가 살아있음을 확인하여 불도 안 들어가는 웃방으로 옮겨 살리지요. 거기서 4년 넘게 주방서빙을 보시고...
(이건 예전에 '여유당전서'를 읽은 독서 경험에 따라서 쓴 것이어서 약간의 착오가 있을 수도 있는 얘깁니다.)
방장님의 걸음도 이처럼 위대한 의미를 지닌 걸음이시리라 믿습니다.
예전 사람들의 천리 길 걷기 요즘과 단순 비교할 수 없지만
누구는 먹고살기 위해
누구는 입신양명을 위해
누구는 가문을 위해
누구는 죄를 짓고 유배지로
그리고 요즘은 국토종주란 이름으로 죠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이름은 국토종주 인가 생각됩니다.
무엇인가을
한다는 것이 모두 쉅지는
않을 것이고요
그러나 그것이라는 것을
행하는 자만이 그것을 알수
있기에 님이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기나긴 여정 수고하셨습니다
길을 걸으며 누군가 생각날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진정 감사인사드리며 이달 말에 다시 뵙겠습니다.
산행하다가도 중간에 편의점을 만나면 그야말로 오아시스이죠.
땡볕에 아스팔트는 복사열까지 더해 용광로 같을 것인데 양산이라도 쓰시고 분무기로 가끔 얼굴과 몸에 물을 뿌리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구미시에서 드신 국수는 양도 많고 꽤 맛있어 보입니다.
만취해 골아 떨어진 취객 때문에 놀라셨을 듯요.
여름이라 괜찮지만 겨울이면~
우리나라에도 호랑이 표범이 살았다는 것이 참 신기하고 지금도 있다면 절대 혼산은 못 할듯 합니다.
멍석 얘기 하시니 저도 어릴때 마당에 멍석깔고 밤하늘 별을 보면 옥수수 먹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어릴때 선풍기 있는 집이 부러웠던 적도 있고 선풍기 하나로 온 가족이 여름을 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에어선생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을 듯 합니다.
1부 재밌게 잘 읽었고 또 땡볕 걸으실 일 있으실때 양산모자 추천드립니다.
즐거운 고생 수고하셨습니다
지난는길에 시원한곳에서 달달한 음료와 짧은 이야기들 감사드리며 이번 주왕지맥길에서 살아 돌아오심을 감사히 생각합니다.
늘 조심해서 진행 하시기 바랍니다.
감히 댓글을 달수도 없게….
왜에?
하다
가장 젊은 오늘의 도전이며 행복이고 선택이라는 것에서 아하 가 옵니다.
법복을 두를분이 등산복 걸치시니
생각의 고요가 발을 통해 오는듯요^^
어제도 오늘도 가장 젊을때 뭐든 해 보는거죠
입추가 지나니 바람이 한결 시원해 졌는데 걷기 좋은 계절에
집 밖으로 나가보시기 바랍니다.
항상 苦生의 도를 넘으면 樂生인가. 방장님의 고생을 항상 응원합니다^^
저 방대하고 정교한 지식은 어디서 나올꼬... 글쟁이분들 보다도 더 박식한 것 같아 ㅎㅎ
이제는 쉬엄쉬엄하시죠^^ ㅎㅎㅎ
나두고사리마을원두막에서노숙해봣찌요ㅋ
ㅎㅎㅎ 고사리 마을의 원두막에서 짧은 잠은 보약 보다 더 좋았습니다
밀양에서 시원하게 잠자게 해주셨어 감사드려요
모임때 뵙겠습니다
새로음을 도전한다면 우리클럽에서
단연 방장님이 만든 모든 그길이 모범이되어 후답자들이 그길을
걸으면서 힘들고 어려음을 몸소 체험할수 있을것입니다
힘든만큼 느낌과 만족감도 있을것
봅니다
제일 뜨거웠던 그시기에 힘든걸음
하셨습니다
많은 지난 역사적인 사실에다 현장에서
느꼈던 사실을 많은 새로운 사실을 접하고 하고싶은 열정이 생깁니다
긴거리 긴시간 수고많이 하셨습니다
참 뜨거운 날의 추억이었습니다.
김천에서 새벽에 나오니 밤하늘에 50번도 더 넘게 번개가 번쩍이더군요
대장님이 다녀가신 이후에 벌어진 일이라 진짜 멋진 새벽 밤하늘이었습니다.
오늘도 좋은날 되십시요
존경합니다~먼길걸으시면서 많은생각을 하셨을듯~~언제나 최고인 방장님~^^
ㅎㅎㅎ 한번 가보실까요
글 감사드리고 냉장고 고장나서 새로 샀는데 이것 저것 청소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잠을 창하지는 못하신듯 보입니다.ㅠㅠ 비라고는 내릴 마음도 없는 하늘이 원망 스럽습니다.ㅎㅎ 아이스팩은 한번도 사질 않았는데~ 나중에 도전 해보겠습니다.
주흘산이 멀리서 보니 울퉁불퉁 하게 멋지게 생겼는데 멀리서 봐서는 돌산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대간길을 지도에서 볼 때 3관문을 본적이 있지만 아무 생각 없었는데... 선조들께서 3단계로 관문을 만들어 적을 방비한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이 듭니다.ㅎㅎ
후기보며! 다부동 편의점 김밥하고 국수는 꼭 맛보고 싶습니다.^^
다음 후기 기대하겠습니다.ㅎㅎ
자전거 타고 가면 딱 좋을 길인데
걸어가시다니...ㅠㅠ
저는 1985년 봄에 수원~부산 왕복 900km를 자전거 타고 3박4일 만에 왕복했던 기억이 나네요.
수원~부산은 중앙선 철도를 따라서,
부산~수원은 경부선 철도를 따라서
달렸습니다.
그 때도 참 힘들었는데
그만한 거리를 걸어간다니...어휴~~
산길 900km는 걸어도
아스팔트길 900km는 걷기 싫어요.
물집 때문에 매 걸음걸음
발바닥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