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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영공원의 비림(비석의 숲)에는 현재 29기의 선정비가 있다.이 비석들은 대구 향교를 비롯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선정비를 이곳에 모았다. 선정비는 백성에게 덕을 베푼 관원(경상도 관찰사, 대구도호부사, 대구판관 등)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경상감영에 근무한 관찰사들이 백성을 위해 목민관의 태도를 엄정하게 지키며 업무를 수행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 자료이다.
전래놀이 중에 비석 치기가 있다. 납작한 돌멩이를 가지고 하는 놀이로 비석 치기는 비석 만들기에 동원된 일꾼들이 힘에 겨워 비석을 치는 놀이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비림에 있는 선정비에는 돌 맞은 자국이 없는 걸로 봐서 강제로 동원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하는 고마움에 만들어진 비석인 듯하다,
비림의 비석에는 거사비, 선정비, 불망비, 승도비, 송덕비, 애민비, 혜민비 등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관찰사 이경여, 구봉서, 민시중, 이인기, 홍우녕, 김시경, 민응수(2기), 이기진, 윤광안, 정만석, 김회연, 홍재철, 김학성, 김세균, 이근필, 조강하, 남일우, 김명진, 조한국, 대구도호부사 정경세, 대구 판곤 한배주, 김기현, 조면하, 조필영, 이성열, 대구 군수 김영호, 대구 판관 유명악, 관찰사 유척기 순으로 나란히 서 있어 오늘도 대구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
관찰사 유척기 공에 대해서 알아본다
비림에 있는 유척기 비석. 안영선 기자
유척기공의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 유성증(兪省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유철(兪㯙)이다. 아버지는 목사 유명악(兪命岳)이다
.유척기공은 1714년(숙종 40)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된 후 정언(正言)·수찬·이조정랑·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세제(世弟)를 책립하자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신임사화 때 소론의 언관 이거원(李巨源)의 탄핵을 받고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1725년(영조 1) 노론의 집권으로 풀려나서 이조참의·대사간을 역임하고, 이듬해 승지로 참찬관을 겸하다가 경상도관찰사·양주목사·함경도관찰사·도승지·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세자시강원빈객(世子侍講院賓客)·평안도관찰사·호조판서 등을 두루 지냈다.
척기공은 정사년(1737년) 한성부윤에 발탁되고, 경상도관찰사에 보임되었다. 11년 뒤에 다시 관찰사가 되어 무너진 기강을 진흥시키고 의열을 숭상하며 교화를 선양하기에 힘썼다.이 공을 기리기 위해 비석이 만들어졌고 또 상덕사(대구시 중구 남산동)에도 유척기와 이숙을 기리는 비석이 있고 제도 올리고 있다.1739년 우의정에 오르자, 신임사화 때 세자 책봉 문제로 연좌되어 죽은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 두 대신의 복관(復官)을 건의해 신원(伸寃)시켰다.
그러나
신임사화의 중심 인물인 유봉휘(柳鳳輝)·조태구(趙泰耉) 등의 죄를 공정히 다스릴 것을 주청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그 때 평소 가깝게 지내던 당시의 명류(名流) 조관빈(趙觀彬)·김진상(金鎭商)·이기진(李箕鎭) 등도 벼슬을 그만두었다.그 뒤 몇 차례 임관(任官)에 불응해 마침내 삭직당해 전리(田里)에 방축되었다. 만년에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 등이 영조와 그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 사이를 이간시키자 이를 깊이 우려했고, 이천보(李天輔)가 영의정에서 물러나자 영조에 의해 중용되어 영상으로 임명되었다.
벽파 김상로를 조정에서 대할 때 항상 싫어하는 기색이었으나 김상로는 감히 말을 못하였다. 1760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고, 이어서 봉조하(奉朝賀)를 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기국(器局)이 중후하고 고금의 일에 박통했으며, 대신의 기풍을 지닌 노론 중의 온건파에 속하였다. 당대의 명필가요 금석학(金石學)의 권위자이기도 하였다.
글씨로는 경주의 「신라시조왕비(新羅始祖王碑)」, 청주의 「만동묘비(萬東廟碑)」 등을 남겼고, 저서로는 『지수재집』 15권이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유척기 공은 숙종17년(1691년) 윤칠월 초하루 갑인날에 서울 외가에서 출생했다. 어머니 용인이씨가 임신할 무렵 이상한 범을 보았는데 공이 태어나자 골상이 보통 아이와는 달랐고, 총명함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척기공이 13세 때 종형 최기 공과 같이 김창집 선생에게 배우고, 14세 때 김창집의 추천으로 한죽당 신임 선생에게 사사하게 되었으며 18세 때 스승의 손녀와 결혼하였다. 척기 공이 결혼할 때 한죽당은 예조참의 벼슬에 있었으며 학덕이 높은 당대의 명사였지만, 외아들이 손녀 하나만 남기고 일찍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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