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이 러 스
Clancy
아파트 3층인 내집의 깨어진 안방 유리창을 통해 나는 조심스레 바깥을 바라본다. 이미 길에서 인적이 사라진것은 꽤 오래전 일이다. 사람이 사라진
아파트 앞 도로에는 이곳을 떠나며 그들이 버린 수많은 가전제품들 만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처음에는 거대한 산을 이룰 정도로 쌓여있었던 버려진
가전기기들의 덩어리는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어 이제는 마으만 먹으면 내
시야에 있는 것들을 모두 세어볼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깜빡 잠이들었던
지난밤 사이에도 눈에 띌정도로 그 양이 줄어들었음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이 모든일이 처음 시작되었던 것이 언제인지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적어도 내가 처음으로 ‘그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지난 봄 TV뉴스를 통해서였다. 그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하여튼
내 경우엔 그것이 처음이였다는 얘기다. 뉴스 전반부에 배치된 주요소식들이 끝나고 시청률을 위한 흥미성 뉴스로 방송된 그 이야기는 조금은 황당한
것이였다. 그것은 자신의 집에서 공포에 질린채 죽어있는 사람에 대한 소식이였다. 주택가에서 밤새 울려대는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주민들이 항의를
하며 당사자의 집으로 결국 쳐들어갔을 때는 이미 집주인이 사망하고 난 뒤였다. 그는 집 한켠에 마련된 홈씨어터 시설가운데에 놓인 전동식 안마 의자에 앉은채 귀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있었다. 부검 결과 그의 뇌는 어떤 강한 파동에 의해 녹아내린 상태였다고 한다(예를 들어 굉장한 압력의 음파
같은 것 말이다). 괴상한 일이였지만 사람들은 그리 심각하게 느끼지는 않았다. 사건이 있고 얼마 뒤 출입이 통제된 현장에서 홈씨어터와 안마의자가
감쪽같이 사라진것도 그저 좀도둑의 소행이라고만 생각했던 것도 사태의 심각성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그 뒤로 뉴스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괴이한 사건들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서 동사한 노인이라던지 믹서기에 손과 발이 갈린 상태로 미친채 발견된 어느 백수, 밤사이 홀연히 사라진 쌍둥이 아이가 냉장고
냉동칸에 우겨넣어진 채 죽어있는 모습을 발견한 어머니, 안전장치가 작동되지 않은 전자레인지에 얼굴을 넣고선 해동 버튼이 눌려 머릿속까지 익어버린 20대 여자 등, 개중에서도 양치질을 하다 전동칫솔에 기도가 막혀 죽은 남자 얘기는 어이가 없다 못해 우습기까지 한 것이였다. 이렇듯 많은 사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났지만 거기엔 두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는 이성적으로 이해할수 없을 정도로 괴이한 사건이란 점이고, 다른 하나는
언제나 가전제품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대중들의 이성은 애써 그러한 공통점으로 부터의 성급한 결론을 회피했고 선견지명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다들 강도나 정신질환, 우연한
사고와 연관되어 벌어진 괴상한 일이려니 하고 넘겨 버렸다.
결국 사람들이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이른 오후 도심 한복판을 세탁전문점에서 사용하는 대용량 세탁기들이 덜컹거리며 활보하면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세탁통 안에 집어넣는 모습이 TV화면을 통해 중계된 후부터 였다
(세탁기의 탈수구에서는 연신 붉은색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 역시도 그 충격적인 장면이 계속해서 방영되는 모습을 공포에 떨며 바라본 기억이 있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것이 일종의 악령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빠르게 전국 가정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집 가전기기들에게 불시의 공격을 받아 죽거나 다쳤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련의 과학자와 영능력자들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으나 이렇다할 성과는 거두지 못했고 몇몇은 조사도중 자신들이 희생양이 되어 처참하게 죽어나갔다. 결국 조사단이 결론내린 것은 그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전기를 통해서 기계들에게 전염되고 있다는 점이였고 그증거로 전기가 쓰이지 않는 제품들의 경우에는 어떠한 피해 보고도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해결이나 대안이 될수는 없었다. 이미 대한민국이라면 어떤 오지라도 전기는 들어가 있었고 마치 거미줄처럼 얽혀진 송전망을
통해서 그 괴이한 악령인지 바이러슨지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고 콘센트와 연결된 것은 무엇이든지 집어들고 길밖으로 내팽개치기 시작했다. 수 많은 고가의 가전기기들이 길에 내버려졌고 그렇게 버려진 기계들은 어느 틈엔가 하나둘씩 살아 움직이며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이를 저지하려 군부대가 동원되었으나 그들 역시도
전기가 없이 활동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였다. 무전기는 먹통이였고 자동차는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병력을 실은 기차의 조종실이 감염이 되면서 민간인을 실은 다른 기차와 전력으로 마주 달려 충돌하는 장면을 멋대로
살아 움직이며 촬영을 하는 방송용 카메라가 보낸 화면을 통해 전국민은 괴로워하며 봐야했다. 한편으로는 전기식 뇌관을 가진 지뢰들이 전국 곳곳에서 군부대와 관공서를 습격하여 사상자를 냈고 수천기의 미사일들 역시 예외가 아니였다. 금새 전국은 전쟁터처럼 번해버렸고 사람들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산이나 시골로 도망치기 시작했으나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못했다. 산속은 도시에서 올라온 가전기기들이 여기저기 숨어서 사람들을 노리고 있었고 시골에는 미쳐 날뛰는 농기계들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여대고
있었던 것이다. 개중에는 직접 만든 뗏목이나 고무보트를 이용해 바다로 도망친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 역시도 허사였다. 이미 수백척의 배들이 모든
항로를 봉쇄한 채 다가오는 인간들을 마구잡이로 치어 죽이는 장면을 나는
우리집 TV가 화면 가득 프레디 크루거의 얼굴을 주사하면서 창문을 깨고 달아나기 직전에 볼수 있었다.
순간 갑작스럽게 현관문에 무엇인가가 부딛히며 커다란 소리를 냈다. 그러자 이미 부숴버렸다고 생각한 초인종이 나를 비웃듯이 마구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나는 무슨일인가 싶어 조심스럽게 문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밖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커다란 복사기가 복사지를 마구 내뱉으면서 현관앞을 서성이는 모습이 보였다. 종이를 복사할때마다 나는 기계음은 마치 사람의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그때 놈이 복사한
종이 하나가 문아래의 틈을 통하여 밀려들어왔고 나는 순간 눈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아파트 앞 상가에서 문구점을 운영하는 젊은 아가씨의 퉁퉁 불어터진 얼굴이였다. 놀라서 다시 살펴보니 복사기 사이에 그녀의
주검이 끼어진채 덜렁덜렁 움직이는 것을 볼수 있었다.
나는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현관문을 주먹으로 거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엄청난 통증이 오른손을 타고 전해졌다. 일주일 전 창문으로
날아들어온 R/C 비행기와 사투를 벌이다 날아가버린 엄지손가락이 있던 자리의 상처가 벌어지면서 피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손을 감싸 쥐면서 바닥에 주저 앉고 말았다. 아제 다 말랐다고 생각한 눈물이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이제 이 아파트에 남은 사람이 몇이나 될지 생각해봤다. 상당수는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이미 도망치고 난
뒤였지만 동작이 굼떴거나 나처럼 애초에 도망을 포기한 몇몇은 아직 집에
숨어있었다. 몇일 전에도 건너편 아파트의 5층에서 어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베란다로 뛰어내리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그가 왜 그랬는지 확실히
알수는 없었다. 외로움 때문이였을 수도.. 아니면 결국 놈들이 집안으로 쳐들어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기 때문일수도 있었다. 아무튼 꽤나 먼거리에서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였음에도 나는 남자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확실히 볼수 있었다. 대체 무엇이 그 사람을 자살로까지 몰고 갔을까…
순간 나는 질겁을 하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상당한
오른손이 앞으로 뻗어지며 굳게 걸어잠근 현관문을 열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놀라 왼손으로 부여잡은 오른손을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결국 나도 미쳐가고 있는 건가? 순간 나는 그 R/C
비행기를 부숴버리던 순간이 떠올랐다. 엄지손가락을 프로펠러에 날려버리면서 간신히 그것을 바닥에 내리누른 나는 정신없이 손으로 기계를 해체시켜 버리기 시작했다. 외장을 뜯어내고 연료를 사용하는 모터를 박살내버린
순간 오른손에 무엇인가 찌릿한 느낌이 전해졌다. 무언가 싶어 살펴 봤더니
배터리에서 나온 전선이 손가락이 잘린 절단면에 꼽혀 있었다. 얼른 그것을
잡아빼버리고 마져 부숴버린 비행기를 창밖으로 내던지긴 했으나 그 후로
종종 오른손에 마비 같은 증세가 올때가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예전에 보았던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그 영화에선 인간을 지배한 기계가 자신들의 동력원으로 인간의 생체전기를 이용한다는 설정이 나온다. 생체전기… 그렇다 인간의 몸에도 미약하나마 전기가 흐르고 있다. 모든 근육과 신경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그 생체전기인 것이다. 그리고 가전기기들을 미쳐
날뛰게 하던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는 전기를 통해 감염된다고 했다.
나의 오른팔이 다시 멋대로 움직이며 자물쇠를 풀려한다. 나는 왼손을 뻗어
오른손을 저지하며 깨어진 창이 있는 안방을 향해 달려갔다. 앞동에 살던
남자도 나와 같은 이유로 자살을 택한 것일까?
나는 창밖으로 몸을 내던지며 생각했다. 그 남자 역시도 자신이 감염되었다는 것을 알아챘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