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0일 밀양 희망버스를 타다.
1. 12시에 조은 플라자 앞에서 버스를 타다.
20명 정도가 모였다.
주말에 시간을 내어 동호회의 산행이나 여행이 아니라 당면한 사회적인 이슈를 중심으로 함께 일박 2일의 원정 희망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그 의식과 관심이 남다르다고 하겠다. 이름도 성도 모르고, 어디살고 무엇을 하는 지도 모르지만 이 시대의 중요한 과제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함께 탄 모든 낯선 이들에게서 반가움과 고마움을 느꼈다. 이 색다른 동행이 서로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으리라. 버스에 타고서 간단하게 서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멀리 해남에서 올라온 얼마 전 귀촌한 분, 장흥에 4년 전 귀농해서 살고 있는 젊은 부부, 초등학교 4학년 아들에게 사회적 연대의 체험을 시켜주려 데리고 온 곡성 엄마, 해양환경감시단 활동을 하고 있는 광양분 등 인근 지역 여러 분들이 함께 동승했다.
2. 산 봉우리 송전탑 공사장을 향해 오르다.
전국 각지에서 수 십대의 버스, 봉고, 승용차로 밀양에 도착한 동지들은 각기 노선을 따라 112번 송전탑 건설장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안내에 따라 낯선 어느 동네 뒤의 야산을 올라가는 것이다.
사람이 산 속에 들어가고 나면 방향과 위치를 알기가 어렵다. 몸이 산 속에 있어 시야가 막히니 말이다.
오직 앞 사람의 대열을 따라 오를 뿐이다. 굽이 굽이 골짜기를 건너고 무덤가를 지나고 능선을 따라 오르고 내려가고 하였다. 남. 녀. 노.소가 함께 하는 산행이다 보니 행진의 속도는 느리다.
등산복이 아닌 평상의복을 입고, 산에 오를 준비나 연습이 전혀 안된 어린 여자들이 많아서 더욱 느렸다.
저기 산 정상 어느 곳엔가 세워질 송전탑 공사장을 향해서 산 비탈, 돌맹이 사이, 가시 밭 길을 걸어 갔다. 어느 무덤가에 이르자 안내하는 청년이 “ 일부는 먼저 올라갔으나, 시간이 너무 늦었으므로 여기계신 분들은 이곳에서 모어 있다가 하산하는 것이 좋겠다.” 고 하여, 뒤에 사람들이 다 오기를 기다렸다가 하산 길을 걸었다.
내려가는 길에 한 떼의 경찰들과 만났다. 경찰들은 먼저 올라간 사람들을 저지하러 가는 것이었고,
우리는 내려가다가 그들과 만난 것이다. 결찰들의 산행을 저지하는 것이 먼저 올라간 동지들을 돕는 일이라고 판단해서, 경찰들과 약간의 몸싸움을 하였다. 날은 어두어지고, 산비탈 길에서 서로 밀고 당기고 넘어지고 아우성이 들리고,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얼마 후 양쪽은 몸싸움을 자제하고 우리는 내려가고 경찰은 길을 터주었고, 어두운 밤 길에 전등을 비춰주어 고맙게 무사히 평지 길로 내려왔다.
3. 역전광장 문화행사를 하다.
사방이 어두워 알 수 없고 방 공기는 칼날처럼 싸늘했다. 어느 마을 앞에 대중이 모였다. 거기서 앞서 송전탑 공사장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온 한 떼의 사람들을 다시 만났다.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하고 거기서 캄캄한 밤길을 걸어 상당히 가니 버스가 대기하는 곳에 이르렀다. 버스를 타고 밀양역전 문화공연장을 향해서 달렸다.
공연장에는 벌써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차가운 겨울 밤이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찼다.
약 7시부터 10시 까지 문화공연이 계속 되었다. 백기완 선생님의 발언, 쌍용, 용산, 강정 등 최근의 정권의 탄압과 포악으로 고통과 시련을 받은 여러 지역 대표들이 함께 나와 연대의 발언을 하였다.
여러 팀의 가수, 연주, 합창 들이 이어졌다.
아마 모르긴 해도 밀양 생긴 이래 전국 각지에서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인 경우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4. 보라마을 이장님댁에서 숙박하다.
문화행사가 끝나고 모인 참가자들은 각 마을별로 숙소를 분배받아 이동하였다.
우리 팀은 감자탕집에 가서 늦은 저녘식사를 하였다.
장시간 추위로 떨었던 몸에 뜨거운 감자탕은 더없이 반가웠다.
식사 후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 30분쯤 이었다. 전남, 광주, 우리 팀을 숙박할 마을은 보라마을이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이장님이 마을 어구에서 우리를 맞아주셨다. 기다리다 사람들이 더 이상 오지 않아서 이미 여러 집에 인원배정을 끝내버렸다고 한다. 뒤 늦게 도착한 우리를 위해 집 배정이 다시 이루어졌다. 우리는 약 10명이 이장님댁으로 들어갔다. 거실과 작은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대강 자리를 잡고 누었다. 같은 방에 다수가 자니 유난히 크게 코를 고는 분이 있어서 여러 번 깨었다.
5.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하다
본래 6시경 기상하기도 계획되었으나 늦게 자고 잠자리가 다소 불편했던 관계로 일어나는 시간이 늧추어 졌다. 우리는 일어나기 전인데 거실에서는 벌써 떠들썩하니 말과 웃음소리가 요란하다. 많이 모이면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기 마련이다.
이장님 내외 분과 아드님이 드나들며 문안 인사를 하고 아침 차와 과일 등을 대접해 주셨다.
밥을 먹겠다는 사람들은 다른 집으로 가서 먹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준비 중인 라면을 끓여 대충 아침을 때웠다. 오랜 만에 여럿이 함께 먹는 라면 맛이 그만이었다.
6. 보라마을 회관 앞에서 약식 집회를 하다.
이 마을에서 하루 밤을 지낸 광주, 전남 팀들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마을 회관 앞에 모여 우리들만의 약식 행사를 가졌다. 광주, 별교 보성, 해남, 순천 등 팀의 대표들이 나와 인사와 함께 발언을 하였다.
광주 지혜학교, 담양 한빛교, 평화학교(?) 등 대안학교 학생들이 나와 인사와 함께 참여 소감을 말했다.
무안 배종렬선생님, 전태일열사 동생분도 발언을 하셨다.
간간히 구호를 외쳤다. “ 우리 모두 밀양이다.” “밀양이 희망이다.” “ 우리가 희망이다.” “ 밀양이 승리한다.” “ 송전탑건설 백지화하라.”
어떤 부인의 발언이 기억난다. “ 오늘은 주일 날이다. 내가 여기 밀양 희망버스를 타고 온다고 했더니
주변 신자들이 예배안보고 어디를 가느냐고 했다. 나는 내 아이에게 사회적인 책임과 연대의식을 체험케하려고 현장에 아이를 데리고 이 자리에 왔다. 어찌 이 일이 교회의 예배보다 못하단 말인가? “
참 인상적인 말이었고, “ 아, 저 분의 자녀사랑법은 참 독특하구나!” 하고 느꼈다.
광주에서 오신 또 다른 여성 분의 발언, 노래, 춤, 퍼포먼스는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일제 말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피해자였으며, 자신을 포함한 세 형제 자매의 자녀들이
암환자, 무뇌아, 지적장애아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가슴아픈 사연이었다. 한 풀이 노래와 춤이 이어졌다.
마을 대책위 중심활동가였던 할아버지의 말씀도 인상적이었다.
“ 언론이 우리를 왜곡 비난하기를 외부세력에 부화뇌동하고 보상금을 노린다고 한다. 참 기가 막힌다!
처음에 공사 시작 할 때 주민들과 소통하고 험심탄회하게 토론하였더라면 우리도 이해하고 협조했을지도 모른다. 저들은 처음부터 돈과 권력에 의한 강압, 거짓, 회유의 방법을 동원했으며 상호간의 신뢰와 협조를 깨트려버렸다. 그리고 노선도 그렇다. 마을 뒷산 길을 따라 송전탑 계획이 되었다면, 거기는 인가도 없고 길이도 짧아서 피해도 적고 훨씬 더 효과적일 터인데, 꼭 마을 앞을 지나려고 고집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어떤 권세가의 개인적인 이익이 작용했다고 한다. 이제는 물러설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듣고 나니 사태의 전말이 보이는 듯하다. 왜 권력과 자본은 폭압과 강제로 백성을 대하는가? 이 나라, 이 강산의 주인은 누구인가?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루었을지 몰라도, 실제 사회적 실천과 행위에 있어서 민주주의는 아직 멀었다.
7. 희망! 희망! 희망!
우리는 줄곧 희망을 말하고 외치고 노래했다. “ 밀양이 희망이다.” “ 우리가 희망이다.” “ 사람들이 희망이다.” “ 데모가 희망이다.” 줄곧 희망을 외쳤다. 그 만큼 희망이 절실하다는 뜻일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 보니 희망은 어디에 있으며 어디서 올까? 희망은 하늘에서, 땅 끝에서, 저쪽 산 너머 남촌에서 오늘 것이 아니다. 인간사회의 희망은 서로에 대한 배려, 인정, 연대에 있다. 희망은 우리가 함께 동행하는 데서 있다. 힘센 권력과 자본이 겸손하고 자신을 낮추어 나라의 주인인 백성을 인정하고 대접할 때 희망이 거기 있다. 강자가 독점하고 배제하고 통제하려 할 때 희망은 없고 대립과 갈등만이 고조된다. 한국사회의 특징은 공권력이 국민을 향해 폭압적인 탄압의 정도를 극단적으로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용산, 쌍룡차, 한진중공업, 강정마을이 그 사례다. 이곳 밀양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가?
8. 마치면서
밀양 사태는 신고리- 북경남 송전선 건설을 위해 밀양 4개면에 76만 5천볼트의 54기송전탑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그간 전체 상황을 돌이켜 보면 다음과 같은 면들이 들어 난다.
첫째, 공사 시작 전 주민들과의 충분한 소통과 공감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둘째, 주민들의 협조을 못 받자 공사 강행과정에서 온갖 모욕과 폭력 등 공권력의 횡포가 자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2012년 1월 “ 내가 죽어야 이 문제가 해결 되겠다” 면서 이치우 어르신의 분신자결이 이루어졌다.
셋째, 한전은 일부 마을 주민들을 회유 협박하여 수 백년 지속되어온 마을공동체를 분열시켰다.
평화로웠던 농촌 마을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생긴 것이다.
넷째, 정부와 한전은 신고리 3, 4호기 가동을 위한 선로로 송전탑 건설을 고집하고 있다.
이것은 탈핵이라는 시대적, 민족적 대의를 전면 거스리는 행위다.
“ 송전탑공사 지금 당장 고마해라!”
밀양 어르신들의 절규가 9년동안 메아리치고 있다.
대한민국에 살아 있는 보통 사람들도 더 이상 이것을 외면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는 정부와 한전이 나라의 주인인 백성의 소리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일 때가 되었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