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랴
가이사랴
카이사리아(Caesarea) (이하 글,사진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카이사리아(Caesarea)는 이스라엘의 텔아비브(45km 북쪽)와 하이파의 중간쯤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팔레스
타인 고대 항구이자 행정도시이다.
카이사리아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었던 요르단 강 상류의 카이사리아 필리피와 구분하기 위해 카이사리아
팔레스티나(Caesarea Palaestina) 또는 카이사리아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라고도 하였다.
우리들에게는 ‘지중해 카이사리아’라는 이름이 쉽게 기억할 수 있는 명칭이다.
이곳은 고대 페니키아인들의 정착지로서 ‘스트라톤(Straton)의 탑’이라고 불렸는데, 로마의 통치하에 황제 아우
구스투스(Caesar Augustus, 기원전 63-기원후 14)는 이것을 헤로데 대왕에게 하사하였고, 헤로데 대왕은 기원
전 25년에서 기원전 13년까지 12년 동안 대대적인 공사를 하여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에게 아름다운 도시와 항
구를 지어 헌정하면서 황제의 이름으로 명명한 명칭이다.
헤로데에 의하여 카이사리아에 지어진 항구는 기원전 22년에서 기원전 9년 사이에 지어졌는데 당시 세계 최고
의 토목공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콘크리트를 이용한 최초의 수중 공법이었다.
남쪽 방파제의 길이는 500m 이었고, 북쪽 방파제의 길이는 200m이었다.
방파제에 사용된 가장 큰 돌덩어리는 5.5m x 1.25m x 1.25m의 크기로 무게는 20톤이 넘었다.
가장 큰 콘크리트 덩어리는 11.5m x 15m x 2.4m이었다.
콘크리트 덩어리는 물위에 틀을 부양시켜 그 안에 콘크리트를 채워 가라앉히는 방법을 사용했다.
헤로데는 자기 영토에 수많은 요새와 화려한 도시들을 건설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두 도시는 훗날 로마령 팔레스타인의 수도가 된 ‘카이사리아’와 다른 하나는 고대 사마리아
의 옛 터에 세워진 ‘세바스티예’였다.
가이사랴 전경
옛 로마항구 유적이 바닷속에도 남아있다.
헤롯의 항 표시도, 헤롯 아그립바의 공관이 있었다.
카르멜 산 자락에서부터 카이사리아로 연결된 수로. 16km 거리
카이사리아로 향하는 수로
수도교, 지중해 연안 백사장 위로 지어진 수로
지중해 연안 백사장 위로 지어진 수로
망루
망루
카이사리아 북쪽 지역의 지중해
카이사리아 북쪽 지역의 지중해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요새, 요새와 육지 사이에 물이 흐르도록
카이사리아 북쪽 지역에 있는 고대 카이사리아 시나고가 터
카이사리아 국립공원 북쪽 입구
가이사랴 성
로마군영, 주후 66년에 유대반란을 진압하기위해 세웠다.
카이사리아는 1세기의 로마·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37/38 예루살렘~100경 로마)에 의해 ‘유대고사’와 ‘유대
전쟁’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기원전 13년경부터 카이사리아는 유대를 통치하는 로마제국의 총독과 군대의 주둔지가 되었으며 본시오 빌
라도[Pontius Pilatus, ?~기원후 36 이후,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 로마의 유대 총독(26~36)]와 안토니우스 펠
릭스(Antonius Felix, 기원 후 52-60년에 유대지역 로마 총독)도 이곳 카이사리아에 머물렀다.
기원 후 32년경에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폭동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예루살렘 대성전 옆에 지은 안토니우스 요
새에 머물고 있을 때 예수님을 심문하고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로마·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다 제1차 항쟁은(66-70) 카이사리아에서 발생한 유다인과 이방인간
의 분쟁이 그 발단이 되었다고 한다.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면서 항쟁은 진압이 되었고 유다는 모든 특권이 박탈되
게 되었다.
티투스의 승리를 축하하며 항쟁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카이사리아로 데려와 검투사 경기로 2500여명을 살해
하였다고 한다.
또한 전승에 의하면 바르 코흐바의 유다 제2차 항쟁(132~135) 때 로마는 랍비 아키바를 비롯한 10명의 팔레스
티나 유다인 지도자와 현인을 카이사리아에서 고문해 죽였다고 한다.
에우세비우스는 「교회사」에서 유다계 그리스도교 ‘예루살렘 원공동체’는 야고보가 처형되고 66년 유다 독립
전쟁이 발발하기 전 예루살렘을 떠나 요르단 강 동쪽 지역 펠라로 이주했다고 전한다.
유다인들은 또다시 로마와 전쟁을 벌여 135년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 되었으며 모든 유다인들이 추방되고 예
루살렘은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그와 함께 예루살렘의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종말에 이르렀다.
제2차 유대 항쟁이 진압된 후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고 로마의 속주가 되는 반면 카이사리아
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로마 제국 팔레스티나 관구의 수도가 되었으며 약 500여 년간 행정 수도의 구실
을 하게 된다.
가이사랴 성 해자, 요새와 육지 사이에 물이 흐르도록 설계하여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게 한 십자군 시대 요새
이 도시는 비잔틴 후기와 아랍의 통치를 받으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614년 페르시아의 수중에 넘어갔고 다시 638년에는 이슬람에게 점령되는 대 변혁의 시기에 최대 규모의 도서관도
파괴되었다. 페르시아 역사가에 의하면 이슬람에게 점령되기 전에 이 도시에는 2만 명의 유다인과 3만 명의 사마
리아인들이 살았지만 이슬람의 통치시기에 모두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1101/2년, 첫 번째 십자군 동안 카이사리아는 볼드윈 1세(Baldwin I)에 의해 회복되어 2세기 동안 다시금 번영을
누리면서 도시는 강력한 성채로 요새화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 살라딘에게 1187년 다시 빼앗겼고, 1191년 십자군은 다시 되찾았다.
그리고 마멜룩크의 시대인 1265년에 결정적으로 빼앗긴 후 이곳에서 더 이상의 전투는 없었다.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성벽 누대의 내부
고고학 발굴 지역...주거지역 쪽
고고학 발굴 지역...주거지역 쪽
현재의 항구
십자군 유적과 이슬람사원
첫댓글 제가 카페에 매번 들어와서 느낀것은 전문적으로 신학을 하지 않은 모리아님의 올린자료가 방대하고 성경적으로 풍부한 지식을 어떻게 소유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사실 이해력이 부족하지만 성경적인가 아닌가는 알거든요 하나님의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저도 남을 가르치는 사역을 위해 노력해 보았지만 이젠 포기했습니다. 아무튼 이시대의 선지자이십니다
성경의 앞선 선진들의 예를 보면 매 시대마다 당신께서 택하시고 세우시고 사역하게 하시는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이 창조주 그 지혜자의 권능이시리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