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행복주기♧ 원문보기 글쓴이: 김귀춘의 행복주기
글/ 김귀춘 교수(세계사이버대학)
복음주의 영성의 신학적 뿌리는 16세기 종교개혁이라 할 수 있다. 종교개혁 당시에 성경의 중요성이 재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루터와 칼빈은 그런 의미에서 복음주의 운동을 태동케 한 중요한 인물이다. 17세기의 청교도 운동 또한 복음주의 영성의 중요한 연장선이다. 청교도운동은 루터와 칼빈이 주장한 하나님의 절대주권, 성경중심의 사상을 삶에 깊이 적용시킴으로써 종교개혁을 완성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8세기 합리주의와 이성주의가 판을 치는 위기 속에서 조지 휫필드와 존 웨슬리를 중심으로 복음주의 부흥운동이 임했다. 이들은 회심과 영적 갱신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당대 영국과 미국에 엄청난 영적 각성을 일으켰다. 교회사적 관점에서 위의 3가지 신학적 맥락은 복음주의 영성의 진수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루터처럼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된 인물은 없었다. 별명도 참 여러 가지다. ‘교회의 통일을 파괴한 반란자’ ‘주님의 포도원을 짓밟은 산돼지’ ‘수도원주의의 기초를 파괴한 반항심에 가득 찬 수도사’. 이와는 달리 ‘순수한 복음의 전파를 다시 가능케 한 위대한 영웅’ ‘성경적 진리의 수호자’ ‘부패했던 배교 교회의 개혁가’ 등 양극단의 소리를 들어야 했던 그! 인간이 뭐라든지 하나님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셨다. 성경의 권위가 되찾아졌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되살아났다. 종교개혁은 루터 개인의 일을 넘어서서 그 시대에 꼭 필요한 하나님의 일이었다.
1. 종교개혁의 준비 - 루터의 생애
회의와 혼돈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97년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서 1년 동안 공동생활 형제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며 신비주의적 영성교육을 받았고, 1498년부터 3년 동안 아이제나하(Eisenach)의 성 조지(St. George) 학교에서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배웠다.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당에 나가곤 했다. 당시 성당 안에는 성화를 그려 장식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곳에서 그의 생을 뒤흔들 두 개의 그림을 만난다. 그중 한 개는 어느 나라의 왕이 죽은 다음 천국으로 들어가고 싶어 기도하느라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뼈와 가죽만 남은 채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 모습이었다. 몸에는 걸레조각을 걸치고 어깨에는 동냥 바가지를 매었는데 그 모습은 거지보다 훨씬 비참한 것이었다.
“천국을 가기 위해 저렇게 참혹한 고생을 일부러 만들어 겪어야 한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아니 천국은 꼭 저런 고생을 겪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인가?”
또 하나의 그림은 큰 배 한 척이 천국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뱃머리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교황이 교회 감독들을 거느리고 서 있었고, 사제들은 양쪽 뱃전에서 노를 젓고 있었다. 이중 루터의 관심을 크게 끈 것은 일반 신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모두 배를 둘러싸고 험난한 물결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지쳐서 물속으로 거의 빠져들어 가기도 하였고, 사제가 던져 준 밧줄에 매달려서 배와 함께 천국으로 가려고 죽을 힘을 다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뒤에는 벌써 죽어서 물위로 둥둥 떠내려가는 사람도 있었다.
이 그림 역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교황과 사제가 이끄는 교회를 잘 따라야만 천국을 갈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 그림이었다.
루터는 혼돈스러웠다. “교황과 사제들은 배 안에서 저토록 안전하게 천국을 향해 갈 수 있는데, 일반 신자들은 물속에서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고통을 무릅쓰면서 사제가 던져준 밧줄을 붙잡아야만 겨우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림이 되려면 배 안에 있는 사람들과 배 밖에서 헤엄치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신자들을 배 안에다 안전하게 태우고 교황과 사제들이 그 배를 밧줄로 매어 끌고 가는 것이 옳지 않는가! 그것이 신앙을 지도하는 사람과 지도를 받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나타내는 그림이 아니겠는가!”
교황과 사제들이 성경의 참 뜻을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루터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찾아내리라 다짐한다. 이 결심이 후에 교회개혁이라는 커다란 불씨가 되리라고는 그 자신도 미처 모른 채….
성경발견
그는 18세가 되던 1501년에 에르푸르트(Erfurt) 대학 문과에 입학했는데, 2학년이던 1503년 어느 날 대학교 도서관에서 성경을 발견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해보는 성경이었다. 그는 성경에 교회 예배용 본문들보다 훨씬 많은 내용이 실려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영혼 속에 한 줄기 빛이 번득이며 그의 지성을 흔들어 놓았다. 한걸음에 기숙사로 가져온 그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대학교내에서도 많은 책을 읽었지만 성경처럼 깊은 감동과 교훈을 주는 책은 없었다. 지금까지 많은 사제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한결같이 교황의 지도를 잘 따르라는 것뿐이었지 성경을 소개하진 않았다. 성경 발견! 그것은 연약한 인간 루터를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를 지닌,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루터 한 사람이 변화되자 루터의 주변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1505년 5월에 법학부에 입학하기로 작정되어 있었는데, 그 당시 법학을 공부하는 것은 출세를 보장받는 길이었으며 명예와 재력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던 어느날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스토테른하임(Stotternheim)이라는 촌락을 향하여 가던 중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해 나무 밑에 있다가 낙뢰로 인해 동행하던 친구는 죽고 자신은 땅바닥에 쓰러지는 사고를 당하였다. 이때 공포에 질린 루터는 카톨릭 교회에서 가르친 광부들의 수호 성자인 성 안나에게 기도하였다. “성 안나시여, 저를 구해주시면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심사숙고한 결단이 아닌 큰 위기의 순간에 행한 서원이었는데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노력에 의한 구원 추구
찾아간 곳은 어거스틴회에 속한 수도원이었다. 1년 동안 견습기간이었는데, 수도원의 규칙은 매우 엄격하였다. 세평 남짓한 방안에는 책상과 의자, 램프와 침대가 전부였다. 잠자는 시간은 오후 8시. 일어나는 시간은 오전 3시. 일어나는 즉시 곧 성당으로 가서 기도를 드린다. 기도가 끝나면 묵상시간인데, 이 시간에는 성경이나 수양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책, 가령 어거스틴의 참회록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다. 오전 7시에는 아침 식사하고 낮동안은 주로 노동이나 공부를 한다. 수도사 가운데는 라틴어나 그리스어, 그리고 신학이나 철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가 있으므로 원하는대로 배울 수도 있었다. 루터는 라틴어를 배웠으니까 그리이스말을 배워 그리이스어로 된 신약성경을 읽고 싶었다. 견습수도사가 된 루터는 매우 철저하게 규칙들을 지켰다. 온갖 천한 일들을 시키는대로 복종했다. 식당에서 설거지하고, 물을 긷고, 수도원 주변을 청소하고, 때로는 다른 수도사들의 세탁까지도 도맡아 했다. 그러면서 먹는 것이라곤 아침엔 빵 한 조각과 무가 둥둥 뜬 수프뿐이었고, 다른 끼니 역시 겨우 굶주림을 면하는 정도였다. 정식수도사가 되어서는 규칙을 더욱 엄격히 실천했다. 서원했던 그때부터 정결과 가난과 복종의 삶을 살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다했다. 어느 때는 빵은커녕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사흘 이상을 버틴 일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런 고통을 즐겁게 참으려고 무척 노력하였다. 예배시간에 동료 수도사의 발을 잘못하여 밟은 조그마한 일까지도 철저히 회개코자 피가 터지도록 자기 발등을 회초리로 내리쳤다. 기도할 때 여자를 생각한 음란한 자신을 향해 얼마나 심하게 쳤던지 기절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내면의 죄들은 그를 더욱 짓눌렀다. 하나님의 복음대로 철저하게 살고싶은 열망이 강한 만큼 죄의 세력이 강하게 그를 옥죄었다. 그리곤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몸소 깨닫고 이렇게 부르짖는다. “아, 복음이 명하는대로 의롭고 정결하게 살고 싶지만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구나! 무력함뿐인 나를 발견할 뿐이구나!”
루터는 성경 읽는 것을 금지 당한 채 자신의 죄를 찾아서 고백하기 시작했다. 고해 사재는 더 이상 루터의 고백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지겹게 느꼈는데, 수도원의 가벼운 규율을 어긴 데에 이르기까지 루터는 모든 죄를 찾아서 고백하고 또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의 소망에 대하여 거의 절망하게 되었고 육체의 힘도 날로 쇠약해졌다. 또한 그는 매일 아침 기도 시간마다 3명씩 21명의 성인들에게 호소하였지만 별 효력이 없었다. 루터의 씨름은 주로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죄악성’에 대한 문제였다. 그는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죄와 죄인을 미워하시는 그 분의 영원한 속성이라고 확신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게 하고 그 거룩함을 획득할 것인가? 였다.
빌라도의 계단
1510년 11월부터 1511년 4월까지 어거스틴 수도회의 규칙을 강화하고 재정비하는 일을 위해 루터는 불과 27세의 나이에 대표로 뽑혀 로마 교황청을 방문한다. 그는 큰 기대를 가졌고 자기에게 부여된 임무를 기뻐했다. 왜냐하면 이때까지만 해도 로마 카톨릭교회가 참된 교회이고 교황은 땅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대리자이며 ‘영원한 도성’인 로마는 거룩한 보좌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덕을 쌓아 자신의 괴로운 영혼에 평안을 얻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그 거룩한 도성에 가까워질수록 루터는 그 도시 사방에 널려있는 죄악들을 목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여러 수도원을 다니면서 사제들이 너무나 무지하고 터무니없는 미신에 빠져 있음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루터는 고행을 함으로써 속죄권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거룩한 계단’을 방문하였다. 이것은 ‘빌라도의 계단’(Pilate's staircase)이라고도 불리어지는데, 이는 예수님이 심문 받기 위해서 끌려나오실 때 빌라도가 서 있었던 곳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 계단이 기적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졌으며, 누구든지 맨 무릎으로 그 28계단을 오르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루터는 자기의 할아버지를 연옥에서 건져내려고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주기도문을 외웠다. 그것은 루터가 기도함으로 할아버지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성경구절이 쟁쟁하게 울려왔다. 이때에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고, 놀라고 의아해 하는 다른 고행자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그 계단에서 뛰어내려오고 말았다.
오직 믿음!
고민하던 중 스승 슈타우피츠(Johnn Von Staupitz, ?-1524)를 찾는다. 죄를 지었을 때 회초리를 의지하지 말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계시는 예수님을 쳐다보라는 말에 그는 부지런히 로마서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때 깨달은 것이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 믿음으로써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루터의 가슴에선 기쁨이 샘솟듯 솟구쳐 올랐다. 사도 바울이 말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성귀가 그의 전 존재를 뒤흔들었다.
그렇다면 루터의 수도원 생활은 헛된 것이었을까? 아니다. 거룩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 복음대로 살고픈 애절한 열망 또한 그의 힘이 아니었다. 루터가 진정한 복음을 깨닫기까지의 과정이었다. 철저한 율법적인 삶을 통해 루터가 발견한 것은 인간의 ‘무력함’이었다. 17년간의 방탕생활을 통해 어거스틴이 발견한 진리. “인간의 힘으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 믿음만이 구원에로 인도한다는 그 진리”는 루터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철저한 수도생활을 통해 루터의 갈증은 더해갔다. 복음에 대한 갈망이 불타올랐고, 하나님은 이를 통해 복음의 진수를 깨닫게 하신 것이다. 진리에 대한 갈망, 복음에 대한 열망이 철저한 율법적 생활로 이어졌고, 그것은 곧 참 복음을 알게 하는 열쇠가 되었던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성경연구와 진리의 추구-종교개혁의 불씨
1507년 슈타우비츠의 권면으로 루터는 사제가 되었으며,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루터는 신학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하여 1509년에는 신학사 학위를 받았고 이때부터 어거스틴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1512년 에르푸르트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서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 대해 연속적 강해를 한다. 여기서 루터는 고행이나 수도원 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특히 1512년부터 1513년에 이르는 겨울 동안에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수도원 탑 속에서 신비한 하나님의 계시를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1514-1517년에 이르기까지 4년간 바울 서신들과 어거스틴의 저서들, 독일 신비주의를 더욱 깊이 연구하면서 확실한 믿음에 견고히 서게 된다.
특히 로마서를 연구하는 동안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는 다음 구절에 부딪치게 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이 성경구절이 루터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모두에 대한 구원의 이중적 본질을 총체적으로 확신케 했다. 루터는 후에 여기에 대하여 “밤낮으로 나는 이 구절을 묵상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태어난 듯하였으며, 마치 낙원을 향해 활짝 열린 문을 통과한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루터는 이제 확실한 구원의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믿음이란 단지 시작일 뿐이고 성도 각자가 공로를 쌓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로마교회의 가르침과 이 성경 구절은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로마교회가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공로란 교회에서 명하는 각종 선행과 로마교회의 교리와 명령, 각종 종교의식과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포함한다.
2. 타락의 극치, 면죄부 판매
교회개혁의 원인이며 개혁을 가능케 했던 직접적인 요인은 중세교회의 부패였다. 소위 ‘돈 만드는 천재’로 알려진 교황 요한 22세(John XXII, 1316-1334)는 각종 징세제도를 창안하여 돈을 모았고 성직을 매매하고 면죄부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가 창안한 징세제도는 교회질서를 극도로 문란시켰고 교황청의 사치를 가중시켰다. 교회개혁 직전의 교황인 알렉산더 6세(Alexander VI, 1492-1503)는 방종한 생을 살았던 악명 높은 교황이었다. 그는 교황이 되기 전에 이미 몇 사람의 정부와 4자녀를 두었고, 그후 7명의 자녀들을 더 얻었다. 1492년에 교황이 되었을 때 그는 경쟁자들을 금품으로 매수하였다. 그의 폭식, 음란은 극에 달했고 일단 파티를 열면 녹초가 되기까지 먹고 마시고 즐겼으므로 그의 ‘살인적 파티’는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15세기 말 이탈리아의 콘스탄츠 교구의 경우 연간 1500명에 이르는 사제(신부)들의 사생아가 태어났고, 당시 교회는 사생아를 둔 성직자들에게 취첩과 아이 양육을 위한다는 명목아래 세금을 물게 하여 성직자들의 비행을 묵과하는 동시에 부를 축척하였다. 루터가 95개조를 게재할 당시의 교황인 레오 10세(Leo X, 1513-1521)는 사냥과 오락을 즐겼던 매우 세속적인 인물로서 교황권을 남용하여 면죄부를 발행 판매케 함으로써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발단을 제공하였다.
면죄부- 허울좋은 명분
면죄부는 십자군 시대에 생겨났다. 11세기 이후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참회의 고행을 면제해 주기 위해 속죄장이 발급되었다. 그러나 12세기 이후에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도 돈으로 면죄부를 살 수 있었으며, 1393년 교황 보니화티우스(BonifatiusⅨ)가 속죄장을 대대적으로 발매하면서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면죄부는 13세기 스콜라 철학의 “공덕의 창고” 교리를 통하여 더 크게 왜곡되었다. 즉 예수님과 마리아가 선행을 통해 이룩한 공덕이 하늘에 닿았고 성자들도 큰 공덕을 가지고 있는데, 이 공덕은 자신의 구원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1476년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Ⅳ)는 면죄부를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까지 확대하여 1500년대 교황청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만들었다. 그 당시 고위 성직자들은 면죄부를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하여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종교개혁의 촉발점이 된 알브레히트(Albrecht, 1490-1545)의 교구에서 면죄부를 판매했던 일도 당시 타락한 교회의 실상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1513년 알브레히트는 마그델버그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다음 해에 마인츠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때 그는 23세로 대주교의 자격 연령에 미달되는 나이였고, 1교구 이상의 겸임이 금지되었지만 3교구를 담당하고 있었다. 교황은 이러한 불법적인 일을 묵인해 주는 대가로 많은 돈을 요구하였다. 그는 이 거액의 돈을 대부분 고리 대본가인 퓨거로부터 빌렸는데 그의 정규수입을 가지고는 거액의 채무를 갚을 수 없었다. 푸거가는 거의 모든 사업에 독점권을 가지고 상인들의 활동을 제약하며 횡포를 부렸다. 이 푸거가의 특권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교황의 비호 아래서 비롯되었다. 그 당시 푸거가는 교황청에서 베드로 성당을 중축할 때 면죄부를 팔아주는 대가로 이익의 1/3을 챙기고 있었다.
그래서 면죄부 판매로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교황에게 청원하였고, 교황은 판매대금을 반분하기로 하고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알브레히트는 그 흉악한 내막은 숨기고 단지 베드로 사원을 보수해야 한다는 허울좋은 구실을 내세워 면죄부를 판매했던 것이다.
통탄할 무지와 왜곡
1517년 알브레히트는 면죄부 판매에 대한 능숙한 수단을 가진 도미니칸 수도사 테첼(Johannan Tetzel, 1465-1519)을 채용하였다. 그는 뛰어난 웅변술을 가지고 신도들의 마음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며 연옥에서 받을 형벌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 면죄부를 사면 과거에 지은 죄는 물론 장차 범할 죄도 용서받고, 연옥에 있는 영혼들까지도 구원할 수 있다고 설교했다. “돈이 궤짝 속에 들어가 짤랑 소리가 나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해방되어 뛰쳐나온다. 그대들은 적은 돈으로 그대들의 부모를 무서운 연옥 불에서 건져낼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비통 중에 있는 부모를 구출하지 않고 배은망덕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설교로써 면죄부 매상고를 올렸다.
이와 같이 연옥교리는 면죄부로 인해 성경을 완전히 왜곡하여 인간의 탐심을 위한 도구로써 전락하였다. 그리고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면제부가 교회의 주요 수입원이 되면서 그 효과를 극대화함으로써, 무지한 신도들은 면죄부를 사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처럼 혼동하게 되었다.
3. 루터의 종교개혁-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는 생명 운동
95개조 항의문-종교개혁의 시작
루터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테첼과 그의 상품(면죄부)을 맹렬하게 공격하면서 면죄부의 죄악성을 간결하게 열거한 95개조 항의문을 발표한다. 이러한 면죄부 남용으로 루터는 연옥과 면죄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자 1517년 10월 31일 정오에 루터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성곽교회(Castle Church)의 문에다 그것을 붙였다. 종교개혁의 불씨가 당겨진 것이다. 루터의 주장은 면죄부가 결코 죄를 사하지 못하며 연옥에 있는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은 만성절(All Saint's Day)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항의문을 보았다. 교황청에서는 어거스틴파 은둔 수도회 원장을 통하여 루터에게 조용히 입을 다물도록 명령을 내렸지만 별 효용이 없었다. 1518년 교황청은 루터에게 출두명령을 내렸지만 소환에 응하지 않고 버텼다.
초조함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교황에게 반항했던 인물, 존 위클리프와 체코의 후스가 쫓기고 순교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탈리아에서는 사보나롤라가 교황에게 반기를 들어 1498년 두 사람의 동지와 함께 죽음당하지 않았는가! 그때 그는 비장한 각오를 한다.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열백번 죽음당하더라도 마땅히 진리로 사람들의 영혼을 해방시켜야 한다.” 선언문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독일말로 인쇄되었기에 부인들은 물론 어린아이들까지도 쉽게 읽을 수가 있었다. 한 사본이 인쇄업자의 손에 들어왔고, 이 반박문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독일 전 지역이 분개했다.
치열한 공방- 라이프찌히 논쟁
테첼은 루터를 반박하는 선언문을 써서 수만부나 인쇄하여 사방에다 뿌렸다. “교황의 권리와 명예에 대하여 경솔하게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없는 일이다.” 1518년 8월 루터는 이단자 혐의로 교황의 소환장을 받게 된다. 루터에게 선언문을 취소하라고 다그쳤지만 그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황의 권한이 아닙니다. 모든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따라야 하고 당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며칠후 추기경 카이탄이 루터를 체포할 것이라는 계획과 아울러 이단자로서의 험난한 여정이 그를 따랐다.
드디어 1519년 라이프찌히(Leipzig)에서 잉골슈타트의 신학부 교수로 있었던 요한 엑크(Johann Eck, 1486-1543)와 논쟁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루터는 한 때 자신의 친구였던 엑크를 상대로 18일간이나 라이프찌히에서 논쟁을 계속하였다. 에크는 신학교수로서 철학과 윤리학에도 통달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토론의 제목은 ‘교황의 권한에 대하여’이었다. 에크의 질문과 루터의 답변이 계속된다. “하나님은 교황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그에게 복종해야 마땅합니다.”
“천국의 열쇠는 교황 한 사람에게만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에게 다 주셨습니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저 농부나 광부에게도 빠짐없이 주셨습니다.” “교황은 예수님의 유일한 후계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가령 당신의 말이 옳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우리를 지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황이 참으로 예수님의 후계자라면 지배가 아니라 섬겨주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가 모든 사람을 지배하려 든단 말입니까. 그건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태도입니다.”
“교황의 권한에 반대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에 반기를 드는 것과 꼭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바른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교황의 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대신 죽으셨는데 교황은 도리어 자기를 위하여 우리를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적은 교황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분명히 이단자입니다.”
“내가 교황의 이단자라면 당신은 예수님의 이단자입니다.” 이런 치열한 공방이 루터와 에크 사이에 다섯 차례나 계속되었지만 서로 자기주장만 고집하는 바람에 아무런 결말이 날 수가 없었다.
결국 이에 대하여 요한 엑크는 1415년 화형을 당한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후스(John Huss,1369-1415)와 연계시켜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하도록 교황청에 고발했다. 이 라이프찌히 신학 논쟁은 최초로 독일교회가 로마교회로부터 단절되어 가는 출발점이었고, 모든 것을 성령과 하나님 말씀의 조명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는 기준이 설정된 시점이었다. 이 논쟁 때부터 비텐베르크 대학의 젊은 희랍어 교수였던 멜랑히톤(Melanchton, 1479-1560)이 루터와 함께 하였다. 그는 루터의 열렬한 추종자였고 평생의 친구요 후계자가 되었다.
종교개혁의 3대 논문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1520년 종교개혁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3대 논문을 발표한다: ①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에서 루터는 이 논문에서 교회의 3가지 장애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첫째는 교회의 세속에 대한 영적 권한의 남용, 둘째는 교황의 성경 해석권 남용, 셋째는 교황의 회의 소집권 남용 등. 이 3가지 남용이 교회를 특권층화했고 부패시키는 요인이라 지적하였다.
그러면에서 루터는 종교개혁의 원리 중에 하나인 ‘만인사제직’(priesthood of all believers)을 주창했다. ②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하여」에서 중세의 공로 중심적인 율법주의적 구원론을 반대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을 언급하였다. ③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루터는 카톨릭교회의 성례전이 교인들을 포로로 잡고 있다고 전제하며, 7성례전 가운데 성찬과 세례만을 인정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보름스 국회-종교개혁의 투쟁
루터의 소환: 교황 레오 10세는 1520년에 루터를 정죄하였고, 당시 열렬한 카톨릭 신자였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 5세(Charles Ⅴ, 1500-1558)가 루터에게 그의 저술에 관해 보름스에서 열리는 제국 회의에 출석하여 해명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1521년 4월 2일 루터는 의회를 향해 출발하면서 멜랑히톤에게 “내 사랑하는 형제여, 만일 내가 돌아오지 못하고 내 원수들에 의해 죽거든 자네가 가르침을 계속하고 진리에 바로 서 주게나. 자네가 살아 있다면 나의 죽음은 큰 문제가 아니네”라는 비장한 말을 남겼다.
4월 17일 루터가 보름스에 도착하여 회의장 안에 들어섰을 때 그 앞에는 선제후들과 공작들 대주교를 포함한 206명이 모였다.
루터의 잘못된 신앙관에 대해 철회할 것을 질문 받았을 때 잠시 시간의 여유를 요청하였다. 루터는 숙소로 돌아와서 온 밤을 새워 기도하였다: “오, 나의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며 세상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나를 지켜 주소서! 오직 주님만이 나를 보호하실 수 있나이다. 나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이번 일에는 나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가 달려있습니다. 나는 헛된 인간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오,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주님의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으므로 이제 나의 곁에 오소서! 나의 보호자시요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하옵나이다”. 1521년 4월 18일 온 세상을 흔들만한 연설을 루터는 하였다. 처음에는 라틴어로 다음에는 독일어로 했다: “저는 성경과 이성에 의해서 본인의 주장이 틀렸다고 증명되지 않는다면, 저로서는 취소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저는 교회회의나 교황의 결정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전율을 느끼며, 이러한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정직하거나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서있습니다. 저는 달리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종교개혁의 확산- 개신교 탄생
두 번째 출석이후 루터의 파문건이 논의되는 도중, 그의 담대한 증언에 감동 받은 프레데릭 선제후는 자신의 고성(古城)인 발트부르크(Wartburg)에 납치를 가장하고 루터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여 그의 체포와 죽음을 면하게 해 준다. 루터는 이곳에서 약 1년을 머무르며, 고전에 속하는 교부들을 더욱 열심히 연구하였고, 그곳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하나님은 루터를 통해 중요한 일을 하신다.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헬라어 신약성경(1516)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전에도 독일어로 번역된 성경이 몇 가지가 있긴 했었다. 그러나 모두가 라틴어에서 번역한 것이어서 정확하지 않았고, 문장이 어려워 누구나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루터가 번역한 성경은 정확한 그리이스어판의 번역이었을 뿐 아니라 문장이 아주 쉽고 간결했다. 따라서 독일어만 알면 어린이들까지도 재미있게 읽을 수가 있어 대단한 호평을 받게 되었다. 성경이 출판되자 각처에서 성경 읽는 운동이 일어났고, 그것이 그대로 개혁운동으로 이어졌다.
성경번역으로 인해 새로운 설교자들이 생겼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한 채 화려함과 대형화로 치닫는 육중한 건물들이 외면되었다. 형식과 의식을 모두 쓸어버리고 거리로 나가 설교하거나 심지어 나무 밑에서 설교하는 이들도 있었다. 형식만 남은 빈껍질 같은 의식은 일소하고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자는 취지였다. 이때부터 비텐베르크는 종교개혁운동 곧 복음주의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개혁운동이 확산되어가자 사방에서 속히 복음주의 설교자들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당시 큰 도시들인 뉴른베르크, 아이제나흐, 알텐부르크, 푸랑크푸르트 등지에서도 속속 복음주의 설교자들을 받아들였다. 독일안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은 오래지 않아 유럽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다.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리, 프랑스에서는 존 칼빈 등이 주도하였다.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 등지로 퍼져갔고, 칼빈의 개혁운동은 스위스를 비롯하여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 등지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1522년 독일 서점에서 루터의 성경이 날개돋친 듯이 팔리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에는 1534년에 구약성경을 번역한다. 루터는 1546년 2월 27일 63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루터가 죽자 1547년부터 신구교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드러나 1552년 휴전을 선언하고 양측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Peace of Augsburg)을 맺어 독일 내에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그 주요내용은 각 영주들이 자기 영토내의 종교를 결정하되, 루터파 외의 일체 프로테스탄트주의를 인정치 않을 것과 루터파로 개종하는 카톨릭 사제들은 모든 재산을 포기할 것을 담고 있었다.
글/ 김귀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