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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獨立運動史에서의 佛敎界의 位相
金 昌 洙 (東國大 명예교수, 한국사)
차례
1. 머리말
2. 3․1獨立運動과 佛敎界의 두 흐름
1) 反寺刹令운동과 불교계의 혁신운동
2) 3․1독립운동과 불교계의 활동
3. 3․1獨立運動 이후 佛敎界의 獨立運動
4. 맺음말
1. 머리말
우리 겨례가 日帝의 植民地統治에 항거하여 獨立을 쟁취함으로써 國權을 회복하려고 투쟁한 독립운동은 庚戌國恥 이후의 1910년대와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에서 1945년의 민족해방 때까지의 크게 두 흐름을 이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하나의 큰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것은 3․1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3․1독립운동은 일제의 武斷統治 아래 유린된 우리 민족이 거족적으로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함으로써 이 땅에 새로운 民主․共和․人道主義에 의한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독립운동이었으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한국독립운동이라는 큰 흐름속에서 오직 불교계의 운동만을 별개의 주제로 설정하여 다룬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며, 독립운동의 전체상을 혼란으로 몰아 넣을 우려마저 없지 않다. 그러나 한편 유독 불교계가 주목되는 것은 다른 종교와 다른 특수성, 특히 세속세계와 유리된 환경속에서 항일독립운동전선에 동참하고 또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까지 한국독립운동사에서의 불교계의 역할에 대하여는 그 연구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다만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일제의 식민지 종교정책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 불교계에 대한 일본 식민지 불교의 침투라는 타율적,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하여 우리 불교의 자주적 측면이 매몰되기 쉽다. 다른 하나는 일제에 의한 식민지화의 과정 속에서 한국 불교계의 움직임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함으로써 사실 이상의 역할 강조와 더불어 과대평가 내지 예찬론에 기울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두 시각과는 별개로 이 분야의 資料 정리가 아직 미흡한 상태에 있다는 점이고, 다른 또 하나는 佛敎라는 종교적 성격이 지니는 出世間的 은둔적인 경향 때문에 그 특수성 아래서의 역사인식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위에서 지적한 몇 가지 사실 외에도 식민지시대 불교계의 움직임을 한국 근현대불교사라는 좁은 틀 속에 매몰시키지 않고 한국 근현대사의 큰 흐름속에서 맥락지우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이 글에서는 주로 3․1독립운동과 3․1독립운동 이후에 전개된 독립운동을 불교계의 동향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려고 한다.
2. 3․1獨立運動과 佛敎界의 두 흐름
3․1독립운동에서의 불교계의 움직임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3․1독립운동의 준비 및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불교계를 대표한 민족지도자 韓龍雲과 白龍城이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다. 더욱이 3․1독립운동에 있어서 불교계의 독립운동에 대하여는 이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회고록과 함께 이를 다룬 계몽적인 글들이 많이 발표되어 있다. 그러나 이 밖에도 불교계의 많은 인물들이 3․1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따라서 현재까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들이 많으므로 이들을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한편 3․1독립운동을 전후하여 불교계의 움직임중 주목되는 것은 한국불교의 고유한 전통을 수호하기 위한 혁신운동이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전개되었으며, 또한 직접적인 항일독립운동이라는 두 흐름을 결집시키면서 전개되었다는 점이 불교계 독립운동의 특수성을 말해 준다.
1) 反寺刹令운동과 불교계의 혁신운동
그 첫 번째 흐름은 일제가 한국에 대한 植民地政策의 추진과정에서 한국불교를 통제할 목적으로 그 總督支配에의 예속화를 뜻하는 이른바 ‘寺刹令’ 7개조를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1911년 6월 3일 朝鮮總督府制令 제7호에 따라 반포된 寺刹令과 7월에 반포된 ‘制令 제84호’의 ‘施行規則’은 9월 1부터 시행되었는데, 이로부터 한국의 모든 사찰은 직접 조선총독에 완전히 장악되고 통제되기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찰령과 이어서 1911년 7월 8일 반포된 ‘사찰령 시행규칙’ 제8조에 의하여 한국 불교는 30本山과 本末寺관계를 지니게 되었고 조선총독부는 사찰 재산권과 인사권을 장악함으로써 정치적 지배관계와 궤를 같이하여 한국불교에 대한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禪敎양종의 단일종으로 통일되어 오랜 전통을 지니고 내려오던 한국불교는 일제 식민지 체제 내에 완전히 흡수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결국 사찰령의 시행은 한국사찰과 승려의 전통 및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불교계의 저항이 예상되었다. 특히 총독에 의하여 임명된 本山 住持들은 세속화에 따라 타락하는 경우가 많아 불교교단 내에서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게 되었고 末寺에 편입된 사찰의 승려들의 불만과 함께 사찰령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져 갔다. 그리하여 타락의 길을 걷던 일부 친일승을 제외하고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수호하려는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사찰내부의 혁신과 사찰령의 폐지를 통해 식민지통치에 대항한 민족지도자로서는 韓龍雲, 朴漢永, 白龍城, 白初月 등이 있었다.
특히 1919년의 3․1독립운동을 겪으면서 불교교단 내에서는 사찰령에 따른 일제의 불교탄압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면서 이에 대한 폐지운동과 함께 불교계의 혁신운동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용운 등을 중심으로 政敎分離와 사찰령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佛敎靑年會 운동이 일어났다. 이 단체는 1920년 6월 20일 서울 수송동의 覺皇寺에서 한용운의 지도로 金尙昊․都鎭浩 등이 조직한 것인데, 이로부터 본격적인 불교혁신운동이 항일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전개되게 된다. 이 운동은 그 연속선상에서 이듬해인 1921년 12월 20일 한용운의 지도 아래 김법린․김상호 등이 중심이 되어 朝鮮佛敎維新會를 조직하고 본사 주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를 대상으로 한 정교분리, 사찰자치를 요구하는 건의서를 제출하는 등의 청원운동을 펴 나갔다. 1922년 1월에는 2백여 명의 대표가 모여 정교분리를 결의하고 2,700명 연서의 건의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였다.
이 건의서에는 하루 속히 사찰령을 폐지하여 불교교단의 자치에 일임할것과 이의 실시 이후의 혼란과 폐단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반응은 처음부터 냉담하였고 더욱이 일부 본산 주지들의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여기에 일부 친일적 본사주지들에 대한 청년승들의 불평은 날로 높아졌다. 드디어 1922년 3월 19일 서울 각황사에서 열린 불교유신회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김상호 등 청년승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친일주지의 대표적인 인물인 姜大蓮을 성토하고, 다시 그의 등에 북을 지우고 종로거리를 행진한 이른바 鳴鼓事件을 일으켰다. 이에 일제당국은 이 사건을 단순히 친일 주지 강대련에 대한 모욕과 규탄으로 보지 않고 항일운동으로 여겨 이 사건의 주동자 김상호 등을 체포하여 투옥하였다. 이와같이 불교청년운동은 전통적인 山中公議會의 부활을 인정하고 본산주지의 전권을 어느정도 제한하는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운동은 이로부터 항일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전개되어 1930년에는 한용운을 당수로 하는 항일비밀결사인 卍黨을 결성하고 김법린․김상호․이용조 등이 중심이 되어 정교분리․사찰령폐지 등을 내걸고 투쟁을 벌여나갔다. 또한 같은 해, 불교계 지도자의 한 분인 方漢岩 등이 중심이 되어 사찰령 이전의 전통불교의 결속을 목표로 하는 사찰령 반대운동을 벌여 단순한 종교운동의 차원을 뛰어 넘어 항일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고 전개된다.
한편 사찰령 반대운동은 불교 청년들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계의 선각자 가운데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본산 주지 가운데는 친일승도 있었지만 그 중에는 민족의식에 투철했던 宋滿空 같은 뛰어난 걸승도 마곡사 주지로 있었다. 그는 本山住持會議 석상에서 총독에게 직언하여 불교정책을 공격하고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려고 애쓴 불교계 지도자의 한 분이었다.
2) 3․1독립운동과 불교계의 활동
3․1독립운동에서 불교계의 전면에 서서 활동하고 이를 주도해 나간 이는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한용운과 백용성이었다. 특히 한용운은 독립운동의 계획과 준비과정, 그리고 전개과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는 33인의 민족지도자 가운데 불교계를 대표하여 백용성과 함께 참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이후의 항일민족운동에서 항상 선두에 서서 투쟁한 비타협적 민족운동의 전형적인 독립운동가였다. 이와같이 한국독립운동에서 불교계의 독립운동에 직접적으로 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일반인과는 구별되는 出世間的인 생활환경 속에서 世俗과 단절하면서 修道에만 정진하는 禪僧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3․1독립운동의 전개과정에서 한용운, 백용성 등이 불교계를 지도하여 전국의 사찰을 중심으로 전개된 항일투쟁의 軌跡은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고 필자도 다른 곳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따라서 비교적 알려져 있지 않은 불교계의 동향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3․1독립운동 때 사찰의 승려들이 지도하여 군중을 이끌고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한 것은 그 규모가 크든, 작든 간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 중에서도 일제 재판기록에 전해지는 楊州 광천시장의 시위운동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물론 우리의 주목을 끄는 매우 인상적이고 유니크한 항일민족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奉先寺의 승려 李淳載․金星淑(일명 星岩)․姜完洙 등은 3․1독립운동의 만세의 함성과 함께 승려의 몸으로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가 3월 29일에는 ‘조선독립임시사무소’ 이름의 전단 2백 매를 만들어 인근 마을에 살포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위의 3인 가운데 김성숙은 4월 2일, 경기도 양주군 광천시장에서 군중을 이끌고 앞장서서 시위운동을 벌여 일경에게 주모자로 지목되어 체포, 검거되었다. 그는 재판에 회부되어 같은 해 5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2개월의 판결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9월에는 복심법원에서 8개월의 형이 확정되어 복역 후 석방되면서 그는 생애를 항일민족운동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의 생애는 오직 우리나라의 광복과 민족해방을 위해 보낸 파란만장의 드라마틱한 역정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이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는 뒤에 중국에 망명하면서 환속했지만 이 무렵 승려의 몸으로 승복을 입고 3․1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베스트셀러의 실록 다큐멘터리로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님웨일즈․김산 공저의 『아리랑의 노래』에 나오는 한국인 혁명가인 주인공 金山(본명 張志樂)이 가장 많은 감화를 받았다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독립운동의 동지인 金忠昌의 본명은 金星淑(1898~1969)으로 알려져 있어서 그가 광천시장의 3․1독립운동 시위를 주도한 승려였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위의 책에 나오는 김충창의 경력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김성숙의 그것과 대부분 일치하고 그의 회고록과도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는 1898년 3월 10일 平北 鐵山郡 西林面 江岩洞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업에 종사하면서 한문을 배웠으며 19세때인 1917년 만주 신흥학교로 가기 위하여 가출한 것이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님웨일즈는 그가 출가 입산한 사찰이 金剛山 楡岾寺라고 하였으나 그의 회고록에는 楊平 龍門寺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 후자의 경우가 옳을 듯하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에는 봉선사로 옮겨 불경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때 손병희․한용운 등을 알게 되고 이를 인연으로 3․1독립시위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봉선사를 거점으로 당시 3백 명의 회원을 가지고 조선독립선언을 공표한 바 있는 ‘佛敎獨立黨’에 입당함으로써 승복을 입고 양주에서의 시위운동에 참가한 것은 앞서 본 바와 같다. 그는 이를 계기로 항일민족운동에 투신하여 1922년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구하여 금강산에서 온 다른 5명의 청년 승려와 더불어 중국 북경행을 결행하게 된다. 이로부터 그의 파란만장한 중국에서의 항일민족운동이 시작되며 혁명가로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는 항일민족해방운동의 방법에 있어서 적극적이고 과격한 투쟁노선을 걸어 무정부주의 운동에도 참가하면서 주로 민족주의 좌파 내지 혁신파의 노선에 따른 항일운동을 벌여나갔다.
3. 3․1獨立運動 이후 佛敎界의 獨立運動
한편 3․1독립운동을 거치면서 불교계의 움직임은 이때까지의 출세간적 은둔적 전통을 지양하고 민족의 해방과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세속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운동으로 이어갔다.
그리하여 3․1독립운동 직후 중국 上海에서 수립된 大韓民國 臨時政府에서는 1919년 4월 11일 孫貞道 등의 제의에 따라 각 지방 대표회를 개최하고 臨時議政院을 조직하였다. 4월 13일 지방선거회에서 의원을 투표로써 선출하였는데, 여기서 3․1독립운동때 불교계 대표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던 月精寺 住持 宋世浩가 李駜珪․金聲根 등과 함께 강원도 대표로 선출된 바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김법린․白性郁․申尙玩․金大容 등은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요인들과 불교계의 민족운동지도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고 돌아와 이로부터 독립운동자금 및 불교비밀결사조직 등 본격적인 활동에 착수하였다. 또한 같은 해 4월 국내에서 漢城臨時政府가 조직되었을 때 朴漢永․李鍾郁 등이 불교계를 대표하여 13도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 5월 경에는 김상호․이종욱 등이 28인독립선언서 사건에 관련되어 일경에게 체포되었으며, 1919년 9월에는 大同團사건에 이종욱․송세호․鄭南用 등의 승려가 연루되어 있는데, 이 거사의 관계자 20명 가운데 3명의 승려 중 정남용은 全協과 함께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이러한 불교 승려들의 항일민족운동은 3․1독립운동 직후만 하더라도 끊임없이 이어져 이후에 항일독립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불교계의 항일민족운동은 1919년 11월 15일 상해에서 梵魚社 住持 吳卍光(惺月)을 비롯한 12인의 불교계 대표이름으로 발표된 ‘大韓僧侶聯合會宣言書’이다. 이 선언서는 불교계가 淨財를 모아 독립운동자금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할 목적으로 상해로 갔을 때 그곳에서 발표한 것으로 1960년대 프랑스 파리에서 그 원본이 발견되었는데, 韓․漢․英 3개 국어로 인쇄되어 있다. 표지에 홍재하 및 인찬환의 서명이 보이는데, 이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리講和會議에 파견되어 외교활동을 펴고 있던 金奎植의 수행원이 인찬환이라는 점으로 보아 상해주재 외교사절에게도 전해졌겠지만, 파리의 외교무대에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선언서의 내용은 첫머리에 “韓土의 수천 승려는 2천만 동포 및 세계에 대하여 절대로 韓土에서의 일본의 통치를 배척하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주장한다는 것을 이에 선언한다”고 전제한 다음, “평등과 자비는 佛法의 宗旨이며 따라서 이를 위반하는 자는 佛法의 敵”이라고 하면서, 3․1독립운동때는 전민족의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발표하자 우리 佛徒 중에서 한용운․백용성 등 두 승려가 이에 참가하였으며, 이후 佛徒 중에서 身命과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자가 많은 것은 佛道의 자비에 어긋나는 일제의 침략과 폭정을 규탄하면서 임진왜란 등 위기의 시대마다 분연히 궐기하여 나라와 겨레를 지킨 護國佛敎의 전통을 이어받아 血戰을 결의한다는 비장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선언서의 말미에는 “이로써 我等은 起하노니 대한의 국민으로서 대한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완성하기 위하여 2천년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진 大韓佛敎를 日本化와 滅溶에서 구하기 위하여, 我 7천의 大韓 僧尼는 결속하고 起하였노니 죽음으로써 報國한다는 發願과 義를 중히 여기고 生을 輕하는 義氣 뉘가 이를 막겠는가. 한 번 결속하여 분기하는 我等은 大願을 성취하기까지 오직 전진과 혈전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여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는 불교 승려들의 피맺힌 각오와 절규가 담겨져 있다. 이 선언서는 불교인의 적극적이고 과격한 직접투쟁의 독립의지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독립선언서와 비교해 볼 때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다.
이로써 보아 오직 항일독립투쟁을 위해 불교교단 전체가 투쟁의 대열에 나서고 있다는 점에서 이로부터 비롯되는 불교계의 항일운동은 보다 적극적인 투쟁노선을 걷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3․1독립운동을 분수령으로 하면서 이로부터 불교계의 항일독립운동은 보다 적극성을 띠게 된다. 1920년 5월 일경에게 검거된 승려들의 활동상황을 일제관헌문서는 자세히 전해주고 있어서 이를 통해 이때까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불교계의 항일운동의 일단을 살펴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가장 주목되는 것이 ‘義勇僧軍’의 조직과 ‘東亞佛敎會’의 설립을 통해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의용승군은 승려로서 조직된 비밀결사로서 독립군의 조직으로 편제를 갖추고 전통적인 의승군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 의용승군은 ‘臨時義勇僧軍憲制’를 정하여 임시정부의 작전계획에 부응하여 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서로 연락을 갖도록 조직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조직은 총령부에 대한 승려연합회장을 총장으로 하는 승군의 최고본부를 두고, 그 아래 비서국, 참모국, 군무국, 군수국, 사령국 등이 있어서 각각 군정을 관장케 하는 등 상당히 짜임새있는 편제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의승군제는 그의 실행 여부를 막론하고 불교계의 항일민족운동이 전선상의 조직화를 통해 적극 투쟁의 노선을 지향하고 있음을 뜻한다.
한편 3․1독립운동을 겪고 난 불교계는 직접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불교계의 지도자는 물론, 개별적인 항일투쟁을 벌여 나가기도 했으나 교단적 차원에서 불교단체를 결성하고 이를 통해 국내 항일민족운동을 이끌어 나가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1920년 5월 일경에 탐지되어 관계자가 검거된 ‘동아불교회’ 사건도 그 중의 하나였다. 이 사건을 일경이 단순한 불교의 포교를 위한 단체가 아니라 항일단체로 보아 탄압을 가한 것은 이 단체의 설립에 관여한 승려들의 대부분이 항일운동에 참가하고 있던 불교계의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동아불교회’의 설립에는 경남 양산 통도사 주지 鄭在華․金九河․曺奉承을 비롯하여 40여명의 불교계 지도급 승려들이 발기인이 되어 계획된 것이다. 1920년 4월 28일 서울시내 諫洞 능인포교당 내에서 앞의 정재화 등 9명이 모여 발기인회를 열고 ‘眞理敎化’, ‘人志向上發展’, ‘慈善普及’, ‘衆生感化 遷道’를 설립목적으로 한 취지 아래 출범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단체는 결국 일경의 탄압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나 불교인의 대동단결을 통해 한국 불교의 자주적인 정통성을 회복하고 나아가 일제의 식민지지배, 그리고 식민지 종교정책에 반발하여 불교단체의 결성을 기도했다는 점에서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 밖에도 3․1독립운동 이후 전개된 불교계의 항일독립운동은 주로 한용운․이종욱․김상호․백초월․백용성․백성욱․김법린․박한영․김대용․신상완․오성월 등의 불교계 지도급 승려들이 주도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1930년에는 한용운을 당수로 하는 불교계의 항일비밀결사 卍黨을 결성하여 항일민족운동을 벌여 나갔으며, 또한 3․1독립운동 33인의 지도자의 한 사람인 백용성은 1921년 3월 출옥한 후 대각교운동을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는 三藏譯會를 조직하여 譯經과 著述에 힘쓰는 한편 한국불교가 일제의 사찰령에 의하여 그 독자성이 상실된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일제의 감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쓰고 포교와 함께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새로운 근거지로서 중국 동북지방의 龍井에 농장을 마련하고 아울러 大覺敎의 敎堂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밖에도 이종욱은 임시정부의 의정원의원으로서 1921년 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투탄의거에 관계되는 항일민족운동비밀결사에 참여하고 있고, 백초월은 3․1독립운동으로부터 민족해방 직전인 1944년 6월까지 승려의 신분으로 생애를 일관되게 일제에의 저항의 자세를 굽히지 않고 항일독립운동을 벌여 나간 유니크한 존재였다. 그는 일제가 멸망을 앞두고 최후의 발악을 하던 1941년에도 임시정부와의 연락과 독립자금조달혐의로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옥중투쟁을 전개하다가 민족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6월 청주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그는 승려라는 특수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조국광복을 위해 일제와의 투쟁을 끈질기게 전개하다가 순국하였다.
불교계는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직후부터 ‘사찰령寺刹令’으로 상징되는 식민지 불교정책에 구속되었다. 이에 따라 일제는 일찍부터 불교계를 통제·관리하였다. 그 결과로 불교계는 사찰령의 억압과 구속을 받게 되었다. 이는 한국인의 정신과 사상에 불교가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불교계의 역량이 독립운동에 투입될 것을 차단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일제는 불교의 민족운동·독립운동 기반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를 추진하였다. 물론 조선후기 이래 불교계의 나약한 사회의식과 무종단 상태가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사찰령은 1911년 6월 3일 제정되었고, 시행규칙은 같은 해 7월 8일 발표되었다. 사찰령 전문 註1)의 요체는 사찰과 승려로 대변되는 불교계 활동에 대한 통제였다. 이는 불교계의 인사권·재산권·운영권 등으로 요약된다. 각 본사는 개별적으로 사법寺法을 제정하여 조선총독에게 인가를 받도록 하였다. 사법 제정도 일제가 정한 기본틀에 의거하여 본사는 이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사법에는 일본의 축제일과 역대 천황제일
을 법식에 포함시키는 등 승려와 신도들을 황국신민화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이러한 사찰령체제는 불교계 운용의 핵심이었다. 그리하여 불교계의 기존관행은 차단되고 새로운 변화를 야기시켰다. 우선 전국 사찰은 본말사本末寺구도로 재편하였다. 전국의 주요사찰인 본사는 30개로 설정하고, 그 주위의 사찰을 말사로 정하여 본사에 예속케 하였다. 본말사 구도는 불교계에 새롭게 등장한 운영의 틀이었다. 조선후기에 사격이 큰 절인 각처의 수首사찰, 즉 주사主寺를 중심으로 운용되었던 것과 1902년 원흥사元興寺의 사사관리서에서 제정한 국내사찰 현행세칙의 16개 중법산中法山이 역사적 연원이었다. 거기에 일본불교의 제도가 일정 부문 개입되었다. 이와 같은 본말사제는 본사와 말사의 수직적 관계를 야기하였고, 본사 주지가 해당 본말사 전체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는 본산 주지의 전횡, 말사 억압, 주지계층의 타락 등을 야기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본말사제 모순과 함께 나타난 부정적인 변화는 기존의 산중공의제라는 원융적인 운영의 퇴색되었다. 대신 사찰령 실행의 주체이면서, 사법 제정과 개정의 허가자인 조선총독부는 전체 불교계 운영의 핵심기관으로 등장하였다. 본말사 주지는 조선총독과 각 도지사의 지시·명령에 휘둘렀다. 전체 대중승려의 의견보다 총독과 도지사의 눈치를 보게 됨에따라 불교계의 의타성·식민성이 불거지게 되었다. ‘주지 전횡시대’에 주지의 자의성과 판단은 불교계 운영의 기제나 다름없었다.
사찰령은 한국불교계의 자율적인 운영을 저해·억제하는 등 불교계가 스스로 운영하는 틀로 자리잡은 종단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일상적인 활동은 본산별 사법에 따라 운영되고, 그 이상은 일제 당국자의 지침에 의해 움직여 나갔다. 세부적인 사항은 본말사 주지의 판단에 의해 전개되었다. 당시 사찰령에 의해 나온 종명은 조선불교 선교양종禪敎兩宗이었다. 종명은 있었지만, 하부적인 조직체인 종단은 존재할 수 없었다.
선교양종이라는 기형적이며 애매한 명칭도 한국불교의 구성원이 정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행정편의적인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불교계의 자율적인 운용 불허는 일제의 사찰령체제였다. 자율적 운영 규약인 종헌이 부재하였으며, 종헌에 의거한 불교계를 대표하는 조직체도 부재하였다. 즉 종단은 애초부터 없었다. 다만 일제의 지침을 불교계에 전달하는 연락사무소격인 30본산주지회의소와 본산 연합으로 강학과 포교사업을 추진한 30본산연합사무소만이 존재하였다.
사찰령체제에 대하여 일부 사찰과 승려가 저항하였지만 대부분의 불교인들은 이를 수용하였다. 이는 조선후기 이래 불교를 억압하였던 정치·사회적인 분위기가 점차 해소되면서 이를 주도한 주체가 일본불교였다는 우호적인 인식이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에 대한 억압의 상징인 승려 도성출입금지 해제령을 건의·해금케 한 것이 일본불교였다. 한말 정치적 혼란기에 토호와 일부 개신교도는 불교재산을 자의적으로 강탈하고, 불교계 내부에서도 자율적으로 재산 망실을 막을 수 없었던 것도 사찰령에 대한 우호성을 증대시켰다.
사찰령체제는 다양한 방면에서 변화를 강제하고, 위에서 지적한 여러 문제를 잉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정면으로 비판·대응한 경우는 매우 희소하였다. 이러한 모순을 비로소 자각·저항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였다.
일제강점 직후에 한국불교의 자존성을 지키고 한국불교가 일본불교에게 예속당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던 움직임은 바로 임제종臨濟宗운동으로 나타났다. 이는 1911년 초반부터 1912년 8월경까지 전개되었다. 임제종운동은 불교의 전통과 자율성을 담보하기 위한 보종운동이었다. 일제가 임제종운동을 억압·강제하였기에 독립운동의 성격도 지닌다.
임제종운동은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의 일개 종파인 조동종에 매각하려는 원종圓宗과 조동종曹洞宗간의 맹약을 저지하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원종은 한말 자생적인 종단건설을 염원한 전국 각처의 유지급 승려들 발의에 의해 1908년 3월에 설립되었다. 물론 원종은 한국정부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지 못했다. 원종의 종정인 이회광李晦光을 비롯한 원종 간부들은 친일파 송병준宋秉畯과 일본승려들의 도움으로 이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노력도 인가를 받을 수 없었다. 난관에 처한 원종은 본부와 포교당 기능으로 활용하기 위한 사찰을 서울에 건설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조계사曹溪寺의 전신인 각황사覺皇寺였다.
원종이 등장하였으나 인가를 받지 못한 시점에, 일제는 국권을 강탈하고, 민족은 일제강점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원종의 불행은 이때부터 더욱 본격화되었다. 국권이 상실되자 각처에서는 일제에 저항하는 항일투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원종의 종정인 해인사海印寺승려 이회광은 1910년 9월경 일본으로 건너가 원종의 인가를 얻을 방책을 강구했다. 그는 1910년 10월 6일 일본의 유력한 종파인 조동종과 비밀리에 원종의 인가와 불교발전을 강구하기 위한 협약을 체결하였다. 협약은 외형적으로 ‘연합’이었지만, 실상은 한국불교인 원종을 일본불교의 일개 종파인 조동종에게 매종하였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였다. 즉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존심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였다. 원종의 인가를 위한 고육지책이었지만 불교의 자주성·전통 등을 고려한다면, 이는 반민족적·반한국불교적인 행위였다.
이 같은 비밀협약을 맺고 귀국한 이회광은 체결내용을 알리지 않고, 본산 주지들에게 연합의 체결을 추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우연한 계기로 협약내용이 전 불교계에 알려지자, 각처에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불교계는 이 협약을 민족불교의 전통에서 이탈한 것으로 간주하고 반대운동을 추진하였다. 중심인물은 한용운韓龍雲·박한영朴漢永·도진호都鎭鎬·송종헌宋宗憲·김종래金鍾來·장기림張基林등 지리산 일대의 승려들이었다. 처음에는 전라도에서 시작되어 경상도로 파급된 이후에는 중앙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저항은 1910년 12월경 註2)광주 증심사證心寺에서 시작되었으나 참가자가 적어 1911년 1월 15일 註3)송광사松廣寺에서 조동종 맹약규탄대회로 구체화되었다. 운동의 초기를 주도한 인물은 한용운이었다. 그는 백담사百潭寺에서 『조선불교유신론』 집필의 초고를 마치고 수행
을 하다가 맹약의 소식을 듣고 전라도로 내려와 운동에 나섰다.
송광사 집회에 참가한 승려들은 조동종 맹약이 한국불교의 존재를 부인한다면서 원종과 조동종이 체결한 협약을 전면 부인했다. 한국불교의 역사적인 전통은 선종 중 임제종에 법맥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참가 승려들은 원종을 부인하면서 이를 대치할 새로운 조직체를 표방하였거니와 그것이 바로 임제종이었다. 이들은 임제종 종무원을 만들었다. 그 결과로 임제종 임시종무원을 송광사에 두고, 임제종을 대표할 수 있는 승려인 종정으로 선암사의 고승인 김경운을 선출하였다. 그는 연로함을 구실로 취임을 거절하여 한용운이 임시로 직책을 맡아 실천에 옮겼다.
임제종을 내세운 운동의 주체들은 임제종의 정체성을 정비하고, 운동의 이념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다양한 작업을 전개하였다. 우선 임제종지를 정비하고, 이를 널리 알릴 포교당을 신설하는 가운데 임제종 차원의 사법과 승규를 제정하려고 시도했다. 또 임제종의 본산은 송광사·통도사·해인사로 정하였다. 1911년 10월경에는 조직을 일층 강화하기 위하여 임시종무원을 범어사로 이전했다. 종무원 이전은 새로운 선풍을 구가하면서 선찰 대본산으로서 위상을 강화한 범어사의 사격을 임제종의 발전에 활용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임제종의 전국화는 1912년 초반에 구체화되었다. 일제는 불교계의 원종과 임제종을 부정하면서 사찰령체제로 불교를 통합·관리하려고
하였다. 불교계는 원종을 북당, 임제종을 남당으로 칭했다. 이는 양 종단이 서로 대치하는 국면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형세에 직면한 임제종 주도자들은 임제종을 중앙차원으로 이끌고자 하였다. 이를 단행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조선불교 임제종 중앙포교당을 서울 인사동에 건설하는 문제였다. 1912년 3월경부터 시작된 사업은 범어사를 비롯한 임제종과 연고가 있는 사찰들의 후원에 힘입어 같은 해 5월 26일에 개교식을 갖기에 이르렀다. 포교당 건설과 개교식의 총괄 진행은 한용운에 의해 추진되었다.
개교의 상징적인 인물은 백용성이었다. 백용성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한 승려로, 그는 1911년에 상경하여 독자적으로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상경하기 이전 치열한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은 선사禪師였다. 개교식은 성황리에 개최되어 임제종 홍보에 크게 기여하였다.
일제는 임제종의 대중화 노선을 좌시하지 않았다. 우선 임제종의 핵심인물인 한용운에게 포교당 건립 비용 마련을 위한 모금을 일체 허가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한용운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압송했다. 임제종에 대한 강압은 1911년 6월 초순에 본격화되었다. 일제는 1912년 6월 21일 원종 종무원과 임제종 종무원 책임자를 소환하여 양 종의 문패 철거를 명하였다. 이런 압제로 임제종은 간판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임제종 간판은 내려졌지만, 한용운은 임제종의 정신을 지속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종단 명칭과 포교당 간판
에서 내세운 임제종을 선종으로 변경했다. 곧이어 30본산 주지의 범위 밖에서 독자적인 포교활동을 기획하였다. 그것이 조선불교회였다. 일제는 그의 활동을 파악한 후 대대적인 제재를 가했다. 경성 북부경찰서 고등계에서는 한용운에게 조선불교회를 조직하지 못하도록 압박하였다. 註4)그는 조선불교회가 일제탄압으로 그 목적을 구현하지 못하자, 이번에는 학생·청년승려·신도들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조직체인 불교동맹회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이 동맹회도 일제탄압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백용성은 한용운이 머물던 선종 포교당과는 별개로 선종 임제파 강구소講究所를 설립하여 강연활동에 진력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한용운의 노선과 유사한 것이었다.
임제종운동은 1912년 8월경에 이르러 거의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운동이 지향한 노선은 결코 가볍게 볼 것이 아니다. 이는 민족불교 지향, 한국불교 전통의 고수, 불교개혁운동·불교청년운동의 이념적인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당시 운동의 중심부에 있었던 당사자의 회고는 이 운동의 역사·이념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초기 운동을 이끌었던 박한영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와 같은 맹약을 맺어서 맹약으로 조선불교를 전부 조동종에게 부속케 하려고 하였소. 그러나 그때는 한국이 일본에 처음으로 합병되는 때라 조선 사람은 무슨 말을 할 수도 없을 만치 시세 형편이 흉흉하였소. 그러나 이와 같은 중대문제를 그대로 둘 수 없어서 지금 사십칠인의 한 사람으로 서대문감옥에 들어가 있는 한용운과 나와 두 사람이 경상도, 전라도에 있는 각 사찰에 통문을 내어 반대운동을 하는데 물론 우리의 주의는 역사적 생명을 가진 우리 불교를 일본에 부속케 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그리하는 것이었으나 그때 형편으로는 도저히 그
러한 사상을 발표할 수 없음으로 조선불교의 연원이 임제종서 발하였은즉 일본 조동종과 연합할 수 없다는 취지로 반대하였었소. 註5)
그는 임제종운동을 불교계의 민족운동이었다고 강조하였다. 운동의 주역인 한용운은 이 운동이 불교청년운동의 연원임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26년 전 조선불교의 역사적 페이지를 달라 놓는 유명한 임제종운동 때에 그 기치가 호남 일우로부터 영남 일대에 날리면서 점점 전 조선의 불교계를 풍미하매 전국사찰에서는 크게 초목개병草木皆兵의 세가 있어서 불교청년은 누구든지 피가 뛰고 주먹이 쥐어져서 일호一呼백락百諾일파만파로 보종保宗운동의 예비병으로 대기의 자세를 취하게 되었든 것이다. 註6)
임제종운동은 당시 불교청년들이 일선에 나서서 한국불교를 되살리고자 했던 보종운동이었다. 이러한 역사와 이념으로 임제종운동은 한국불교계의 존립 근거를 마련하였다. 승려인 강유문은 이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이렇튼 노약한 조선불교가 기추機墜에서 만회挽回된 동시에 잠자든 근세조선 불교사상에 일대 경종적警鐘的혈약血躍의 막幕이 열리었든 것이다. 註7)
이상과 같은 분석으로 임제종운동은 민족운동 속에서 전개된 불교계의 독립운동이었다. 항일정신·항일의식 심화는 한국불교계의 자립
심·자존심을 불러 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10년대 불교계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제주도 법정사의 항일투쟁은 1918년 10월에 전개되었다. 1918년 10월 7일 제주도 중문의 법정사에는 일제를 처단·구축하려는 승려·불교도·선도교도·농민 등 수십 명이 모였다. 이들은 일본인과 식민기관 등을 제주도에서 내몰고 국권회복을 하기 위해 항일투쟁을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화승총·곤봉을 들고 서귀포로 향했다. 중문지역의 농민들도 대열에 참가하면서 시위대는 700여 명으로 급증하였다. 시위대는 중문지역의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하고 일본인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일제에 구금되었던 농민 13명을 석방시켰다. 그러나 법정사 항일투쟁은 일제의 무차별적인 진압으로 중도에 실패하고 말았다. 법정사 항일투쟁의 주체세력이 퇴각하는 가운데 주도자들이 대거 체포되었고, 일부는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제에 피체되어 검거된 인원은 66명이었으며,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받은 대상자는 31명이었다. 註8)
법정사는 현재 제주도 국립공원 한라산 내 서귀포 자연휴양림으로 지정된 곳에 소재하고 있었다. 행정지명은 서귀포시 도순동 산 1번지이다. 지금은 성역화 사업으로 사찰이 일부 복구되었지만 법정사는 항일투쟁 여파로 일제에 의해 불태워졌고, 이후 일제 감시로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법정사는 1911년 안봉려관이라는 승려에 의해 창건되었다. 그는 근대 제주도 불교를 개척한 승려로 관음사를 1908년에 창
건한 이후 제주도 각처에 사찰을 설립하는 과정에 법정사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법정사 창건 이후 연고를 맺고 거주한 승려인 강창규·김석윤·방동화는 민족의식에 충만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법정사 창건 이전부터 사상적 교류를 통해 같은 행보를 걸었다. 법정사에 머물면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동질적인 현실인식을 갖게 되었다. 동질적인 행보에는 이들의 은사인 박만하가 정점에 있었다. 위봉사 계열의 강창규와 김석윤 그리고 기림사 계열의 방동화와 김연일이라는 두 흐름이 법정사에서 합류케 되었다. 이들은 법정사에 합류하기 이전에 이미 의병전쟁·농민전쟁의 경험을 거친 인물들이었다. 그런 만큼 어떠한 계기만 오면 이에 반응할 수 있는 체질의 소유자였다.
항일투쟁에 동참한 민중들도 국권강탈 이후 일제의 경제침략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즉 일제가 제주도에서 자행한 토지저당 고리대사업, 토지조사사업, 제주도 일주도로 강제부역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제주도는 1898년 방성칠난, 1901년 이재수난, 1909년 의병항쟁 등으로 제주도민의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이러한 배경이 항일투쟁 이전의 정황이었다.
항일투쟁의 발단은 1914년경 기림사에서 법정사 주지로 이전한 김연일의 항일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법정사에 머물면서 승려·신도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면서 항일투쟁을 준비하였다. 마침내 항일투쟁은 1918년 4월에 본격적인 거사준비 단계로 접어들었다. 주도세력인 김연일은 강창규·방동화·강민수·정구용·김용충·장임호 등 법정사 내외에 거주하는 승려와 불교도들에게 거사합의와 무기준비 등 구체적인 준비를 지시했다. 나아가 신도들에게도 거사의 뜻을 알리고 참여를 권유하였다.
이에 따라 1918년 7~8월경에는 법정사 불교도와 인근 농민들을 중
심으로 조직체를 구성할 수 있었다. 연후에는 법정사 신도회장 격인 박주석을 초빙하여 운동에 동참케 하였다. 이러한 배경과 준비하에 1918년 9월 14일에는 법정사에 거주하지 않는 대상자들까지 법정사로 불러서 거사를 설명하는 등 동참자 규합에 나섰다. 이날 김연일은 자신이 ‘불무황제佛務皇帝’임을 입증하는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는 곤봉·총기·격문 등을 준비했다. 조직체로 모사·선봉·중군·후군을 정한 후 책임자도 각각 선정하였다. 9월 19일에는 법정사를 참배하던 불교신도 30여 명에게 거사의 목적이 조선독립과 불교포교에 있음을 개진하였다. 그는 항쟁이 전개되면 일본인 관리와 일본상인들을 타도해야 함을 역설했다.
1908년 10월 7일 새벽, 법정사 무장항일투쟁이 단행되었다. 6개월간의 철저한 준비를 거친 항일투쟁은 이날 새벽에 출정식을 갖고 법정사에서 중문지역으로 향하면서 시작되었다. 승려와 불교도들은 깃발과 무기를 들었다. 일부는 화승총과 몽둥이를 갖고 있었다. 마을로 내려간 선봉대는 4~5명씩 조를 짜서 참여자를 모집하였다. 혹은 마을 구장에게 민적부를 받아 장정들을 행동대원으로 참여시켰다. 시위대는 중문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기 위해, 가는 도중 전선·전주를 절단하였다. 당시 동참한 농민들은 4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대단한 규모였다.
이들은 길에서 만난 일본인을 몽둥이와 돌멩이로 구타하고, 일본인과 동행한 한국인도 구타하였다.
중문지역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군중이 무려 700여 명에 달하였다. 중문주재소에 도착한 시위대는 주재소의 물건들을 부수고 문서를 불태웠다. 오전 11시경 서귀포경찰관과 기마순사대는 총으로 무장하고 시위대를 공격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항일투쟁에 참여한 주도자와 농민들은 검거되고 법정사는 불태워졌다.
법정사 항일투쟁의 주도자들은 항일투쟁 이후 대부분 체포되었다. 체포된 대상자들은 항일투쟁을 준비·추진한 핵심세력과 함께 항일투쟁에 적극 가담한 농민들이었다. 일제측 기록인 『형사사건부』에는 66명의 체포자 명단이 전한다. 『수형인명부』에는 체포된 대상자 중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된 18명과 재판 전에 옥사한 2명을 註9)제외한 46명이 기록되어 있다. 재판을 받은 46명은 징역형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항일투쟁을 주도한 김연일은 징역 10년, 항일투쟁의 선두에 있었던 강창규는 징역 8년, 박주석은 징역 7년, 방동화는 징역 6년이었다. 이러한 형량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가 3년 이내의 형을 받은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과중한 것이었다. 이렇게 과중한 형량을 부과한 것은 일제가 항일투쟁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항일투쟁을 ‘보천교의 난’ 혹은 ‘사교의 난’으로 변질·축소시킨 것은 항일투쟁이 내륙지방으로 전파되는 것을 막으려는 일제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한편 항일투쟁의 핵심주체들 중 일부는 상당 기간 체포되지 않았다. 김연일은 1920년 3월, 강창규는 1922년 12월 27일, 방동화는 1918년 11월 12일, 정구용은 1923년 2월 13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각각 일제에
체포되었다. 이렇게 장기간 피신할 수 있었던 것은 지역주민들과 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항일투쟁의 주체들은 일제에 체포되어 복역을 하였지만, 출옥 후에도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상호간에 혼인을 통한 인척관계를 형성하는 등 돈독한 유대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항일투쟁을 주도한 핵심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농민들도 혼인을 통한 특수관계를 갖고 있었다. 註10)이처럼 법정사 항일투쟁은 1910년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이었다.
국내민족운동의 정점이며 분수령으로 이해되는 3·1운동에 불교계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등 호국불교·민족불교의 정체성을 구현하였다. 민족대표 33인으로 한용운韓龍雲·백용성白龍城참여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용운·백용성이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된 배경에는 1911~12년 한국불교를 수호하기 위해 전개된 임제종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불교 원종과 일본불교 조동종의 맹약이 한국불교의 역사와 정체성을 저버린 것으로 판단한 전라도의 승려들은 저지·반대운동에 나섰다. 이후 경상도로 파급된 이 운동은 점차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1912년 봄에는 서울 인사동에 임제종 중앙포교당을 만들면서 운동의 대중화로 나갔다. 이러한 운동을 추동하고 전면에서 이끌던 주역이 한용운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불교계를 대표하는 지성인, 저항적인 승려, 민족의식이 투철한 승려로 불교계에 분명하게 각인되었다.
또한 백용성은 1910년 이전에는 수행에만 힘을 쏟았던 선사였다. 그
는 서양문명의 도래, 일본침략의 노골화라는 새로운 시대적 변화를 직면하면서 산중을 뛰어나와 1911년 상경하여 포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 참선을 토대로 일반 대중들에게 다가갔다. 바로 그 즈음에 임제종운동의 전국화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임제종 포교당이 준공되고, 개교행사가 거행되었다. 백용성은 개교식의 정신적 책임자인 개교사장이 되었다. 이는 한용운과 백용성이 결합을 의미한다.
임제종 포교당은 외압으로 임제종이라는 간판을 쓰지 못하게 되자, 조선불교 선종포교당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한용운은 일제의 외압에 굴하지 않고 독자적인 불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불교회·불교동맹회는 그것이었다. 이는 사찰령의 구도에 들지 않으면서 포교활동을 하려는 것이었으나, 일제가 그를 좌시하지 않아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결국 한용운은 독자적인 불교활동을 차단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울을 떠나 심신을 달래면서 『정선강의 채근담』 집필에 정진하였다. 이후 상경한 그는 선종포교당 포교사 자격으로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그는 보다 큰 의문을 풀기 위해 백담사로 들어갔다. 백담사의 산내 암자인 오세암에서 선수행은 근원적인 의문을 푸는 계기가 되었다. 1917년 12월 3일 밤 10시 그는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한용운은 자신, 민족의 현실, 존재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1918년 4월경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민족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의 교양증진을 위한 계몽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유심惟心』지의 발간이었다. 비록 『유심』은 3호까지 밖에 나오지 못하였지만, 이는 3·1운동 직전 폭풍전야의 분위기에서 나왔다는 자체만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국내외 정세를 파악한 후 민족적인 차원의 의사표시·행동이 필요하다는 자각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에 1908년 일본 유학시절부터 알게 된 최린崔麟을 만난 그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마침 천도교측도 민족운동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
게 3·1운동과 접목될 수 있었다.
백용성은 임제종 포교당을 나와 독자적인 포교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선종 임제파 강구소의 설립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불교 강연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불교대중화에 필요한 자금의 확보가 절실함을 깨닫은 그는 함경북도 북청으로 가서 금광사업을 추진했다. 그 사업은 여의치 않아 다시 상경할 수밖에 없었다. 귀경한 그는 예전에 설립한 강구소 인근인 지금의 대각사 터에 교당을 새로 창건하여 지속적인 포교활동에 노력했다. 바로 이때 한용운을 다시 만나 거족적인 3·1운동의 중심부에 참가할 수 있었다.
불교계의 3·1운동 참가에는 한용운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는 『유심』지를 발간하면서 문명 변동과 세계정세 변화에 대하여 나름의 식견을 갖고 있었다. 바로 그때에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파리강화회의 개최, 민족자결주의 등장 등 국제사회는 크게 요동치는 상황이었다. 한용운은 최린에게 이러한 국제변동을 설명하면서 이를 조선독립의 기회로 활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당시 천도교는 민족자결주의라는 변수를 활용하여 독립운동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재일유학생을 통한 국내 학생층과 연계, 중국 상해지역의 망명 독립운동가와 기독교계의 연계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분위기는 성숙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민족대표 33인이 정해졌다. 불교계는 한용운·백용성이 포함되었다. 백용성은 한용운을 통해 전달받은 국제정세와 3·1운동에 대한 전모를 이해하고 즉석에서 이를 승낙하였다. 한용운은 유교도 이번 운동에 동참시켜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유림의 거목인 곽종석郭鍾錫
을 만나기 위해 경남 거창까지 직접 내려갔다. 한용운의 뜻을 전해 들은 곽종석은 유림들의 동참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들을 통해 자신의 도장을 전달하려고 하였으나 한용운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독립선언서」 인쇄가 비밀리에 추진되었던 정황과 겹치면서 유교계 참여는 성사될 수 없었다.
한편 한용운은 유교를 가담시키려는 노력을 하면서 동시에 다수의 승려들을 민족대표에 추가시키려 하였다. 한용운이 고려한 대상자는 송만공宋滿空·박한영朴漢永·진진응陳震應·백초월白初月·오성월吳惺月등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산간의 사찰에 거주하였던 사정과 교통 불편 등으로 추가 포함되지 않았다.
불교계의 3·1운동 참여 의의는 「독립선언서」 공약3장을 한용운이 추가시킨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용운은 3·1운동 준비의 최일선에서 선언서 작성·인쇄에 대하여 지켜볼 수 있었다. 그는 선언서를 자신이 직접 쓰겠다는 의사를 개진하였다. 그러나 운동을 주관하였던 천도교측이 최남선崔南善에게 선언서 작성을 이미 의뢰한 상황에서 한용운은 공약3장을 추가하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선언서 작성을 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은 최남선이 운동에는 가담치 않고 선언서만 작성하겠다는 나약한 행동을 보인 것에 대한 반발의 성격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한용운이 추가하였다는 공약3장은 다음과 같다.
-. 금일 오인의 차거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이 공약3장은 「독립선언서」의 눈동자임과 동시에 한용운 독립사상의 축약판이다. 여기에서 민족자존을 위한 자유정신의 발휘, 최후까지 정당한 의사 발표, 민족의 주장을 광명정대하게 하라는 주장은 한용운 사상을 그대로 대변한다. 그는 불교의 해탈, 불살생, 박해, 보편적 도덕정신을 갖고 있었기에 그것이 자유·비폭력·세계주의로 나타났다.
이렇게 결전을 맞이하기 직전 한용운은 평소 그를 따르던 중앙학림의 학인승려들을 자신의 집인 유심사로 불러 들였다. 그는 학인승려들에게 민족적 거사에 참여하는 사정과 경과를 알리고, 불교계도 적극 참여해야 할 당위성을 강조했다. 자신의 자택에 보관하고 있는 「독립선언서」 3,000매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각처로 배부하도록 요청하였다. 당시 한용운이 학인승려들에게 한 발언은 다음과 같다.
여러 달을 두고 궁금히 여기던 제군들에게 쾌소식을 전하겠다. 유구한 역사, 찬란한 문화를 가진 우리 민족이 자주독립을 중외에 선언함은 당연한 일이다.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결연
히 나선 우리는 아무 장애도 없고 포외怖畏도 없다. 군 등은 우리 뜻을 동포 제위에게 널리 알려 독립완성에 매진하라. 특히 군 등은 서산, 사명의 법손임을 굳게 기억하여 불교청년의 역량을 잘 발휘하여라. 註1)
한용운의 발언을 감격스럽게 들은 중앙학림의 학인승려들은 그의 집을 나와 귀가하지 않고, 인사동 중앙포교당으로 갔다. 이들은 늦은 밤이었지만 선언서 배포, 거사 이후에 각자가 할 일, 불교계 독립운동본부 개설 등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드디어 3·1운동의 그날이 왔다. 한용운은 오후 1시경 태화관으로 갔다. 그곳에는 민족대표들이 모여 선언서를 낭독하기로 되어 있었다. 백용성도 참석하였다. 당초에는 종로의 탑골공원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기로 되었으나, 불상사 예방차원에서 태화관으로 장소를 변경하였다. 민족대표들은 선언서를 간단히 읽고, 한용운은 인사 겸 개식사를 선언하였다.
오늘의 이 모임은 곧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장 서고 민중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명을 바쳐 자주 독립국이 될 것을 기약하고자 여기 모인 것이니 정정당당한 최후의 1인까지 독립쟁취를 위해 싸웁시다. 註2)
이렇게 짤막한 기념사를 한 한용운은 민족대표 각자의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의 축배를 제의하였다. 그 후에는 한용운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삼창이 있었다.
불교계의 3·1운동은 청년 학인승려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계기는 한용운의 영향을 받은 중앙학림 학인승려들이 각자의 연고 사찰로 돌아가면서 만세운동의 중심에 선 것이 기본 흐름이었다. 중앙학림 학인승려와 연결이 없으면서도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자생적으로 만세운동을 기획·주도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불교의 만세운동을 정리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註3)
범어사 : 중앙학림의 김법린·김상헌 등이 내려가 범어사 지방학림·명정학교 학생들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하여 동래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 기획, 註4)만세운동이 전개되면서 경찰서를 습격하다가 헌병 출동으로 학인승려 34명 체포.
해인사 : 김봉신 등이 파견되어, 해인사 지방학림 학인승려 23명이 합작하여 만세 시위 준비. 대구까지 가서 선언서 수천 매를 인쇄하고, 시위대를 조직하여 다수 지역을 담당하여 시위 전개.
- 강재호·기상섭 : 경주·양산·부산·김해
- 송복만·최범술 : 합천·초계·의령·진주·사천·곤양·하동
- 박달준·김초윤 : 거창·함양·안의·산청·남원
- 우경조 : 공주·마곡사 등
- 박윤성 : 선산·상주
- 김도운 : 김천·성주
- 신철휴 : 고령·영천
- 권청학 : 달성·영천
- 박근섭 : 쌍계사·화엄사·송광사·선암사
- 홍태현 : 해주·황주·사리원
- 김대용 : 동화사·대구
- 정병헌·오택언 : 호남·양산
- 박창두 : 석왕사
봉선사 : 김성숙·이순재(지월)·현일성·강완수·김성암·김석로·김석호 등
만세시위 주도 600여 명 참가, 조선독립 임시사무소 명의로 전단 배포.
신륵사 : 영봉·권중만·윤경옥·조규선·조석영·조근수 등 만세시위 주도 200여 명 참가.
표충사 : 이장옥·이찰수·오학성·손영식·김성흡·구연운·오웅석
단장 장터에서 만세시위 주도 1,500여 명 참가. 註5)
통도사 : 오택언·김상문 등 신평장터 시위 주도 50여 명 참가.
동화사 : 김대용·윤학조·권청학·김문옥·이성근·김종만·이보식·박창호·이용석 註6)등 주도로 대구 남문시장에서 시위 3,000여 명 참가.
청암사 : 김도운·이봉정·남성엽
도리사 : 김경환
김룡사 : 김룡사 지방학림 학인승려 27명이 만세 기획하였으나 일제에 구속, 만세시위는 일제 경찰의 사전 구속으로 불발, 중앙학림 학인승려(전장헌)의 선언서 전달, 만세시위 전개 註7)
대흥사 : 대흥사 불교 강원 학인승려 30여 명
법주사 : 박윤성
석왕사 : 인근 부락민 시위, 석왕사에서 추도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일제가 억압
이상과 같은 불교계 만세시위와 관련된 내용과 특징을 대별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앙학림 학인승려들의 자극·접촉·권유에 의해 대부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측면에서 중앙학림의 민족운동사에서 위상은 재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앙학림의 영향은 곧 한용운의 위상·영향력·지도력 등을 가늠하는 잣대로 검토되어야 한다.
둘째, 불교계 만세시위는 준비·추진 단계에서 학인승려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학인승려들이 수학을 하였던 지방학림에 대한 민족교육의 의미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온 자료에 의거하면 지방학림의 교사·사찰의 중견승려가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는 정황은 찾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승가 내부의 이원적인 현실인식·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다.
셋째, 불교계 시위는 인근 지역의 주민들과 결합된 정황에서 주로 장날을 이용하여 註8)전개되었다. 여타 종교에서 간혹 나오는 종교간 유대와 공동시위는 찾기가 어려웠다. 이는 불교의 보수적인 체질, 혹은 산중불교적인 성격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넷째, 만세운동에 참여한 배경과 관련해서 청년 학인승려들의 식민지불교에 대한 저항의식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저항의식 배경과 추이를 주목하고 만세운동의 동참이 갖고 있는 불교사상과 연계를 조망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저항의식을 민족의식으로 볼 경우, 불교의 보살사상과 대승불교와 동질성·차별성에 대한 검토가 요망된다.
불교계 민족대표로 참여한 한용운·백용성은 일제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들은 옥중에 수감되어 있으면서도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고민하였다. 이는 감옥에서 나온 이후 실천한 민족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용운·백용성의 옥중투쟁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용운은 3월 1일 민족대표가 모인 태화관에서 민족운동에 대한 강한 소신을 개진했다. 이는 그의 옥중투쟁의 저변을 알 수 있는 단서이다.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의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그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협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註9)
한용운은 이러한 소신을 갖고 체포·수감되었다. 그에게 일제에 의한 감옥 구금은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육체적 고통과 말 못할 정신적인 쓰라림이 있었다. 더욱이 옥중에 수감되면서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취조·회유를 받으면서 재판을 받는 것과 일제의 구형에 의한 옥중생활은 견디기 어려웠다. 이는 그의 회고에서 명쾌하게 파악할 수 있다.
벌써 십년이로구만 우리들 삼십삼인이 기미년 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 같쳐 있든 것이. 나는 그때 수 년 옥중생활을 하는 사이에 정서적으로 충동을 받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마음대로 못 되는 생활이므로 말하자면 이 정서조차 쪼각쪼각 부수어져 버리는 때가 어떻게 많았는지 모른다. 註10)
이처럼 한용운은 정서적인 충동을 받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옥중생활은 괴로움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인간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처절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좌절·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그도 다른 민족대표들과 같이 독방에 수감되어 마루바닥에서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고, 콩과 보리로 뭉친 덩어리 밥과 소금국물을 먹어야만 했다. 註11)
한용운은 역경을 이겨내며 독립정신을 과감하게 펼쳤다. 그는 옥중에 들어오기 전 민족대표들과 함께 한 약속을 지켰다. 그는 독립선언 후에 일제에 피체될 경우를 대비하여 사전에 정한 옥중투쟁 3대원칙이 있었다. 즉 ①변호사를 대지 말 것, ②사식을 취하지 말 것, ③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일부 민족대표들은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고, 민족대표들을 극형에 처한다는 소문을 듣고 대성통곡하는 인사도 나타났다. 한용운은 이렇게 나약하고, 좌절하는 민
족대표들을 보고 질책을 가하였다.
우리 대표들을 다루는 것이 점점 포악해짐을 느낄 수 있다. 이제야말로 올 것이 온 것이 아닐까. 마음의 결심이 서지 않고서는 그들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듣건대 고문이 점차 극심해져서 그 정도가 이를데 없이 가혹하다. 이 같은 일 때문에 변절자가 계속해서 나온다고 한다. 한심스러운 일이다. … 그래서 한용운이 공포에 떨고 있는 몇몇 사람에게 인분세례를 퍼부은 게 아닐까. 통곡하는 자 머리에 인분을 쏟아 부었던 사실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통쾌무비한 일이다. 우리 민족대표가 공포에 떨거나 비열한 행동을 자행한다면 그를 따르는 우리의 민중은 장차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내가 그 같은 어리석은 자의 행동을 목격했다 해도 인분세례를 퍼붓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다. 역시 한용운은 과격하고 선사다운 풍모가 잘 나타나는 젊은이다. 註12)
이종일李鍾一의 회고에 나오는 바와 같이 그는 일제의 위협에 벌벌 떠는 민족대표들에게 인분을 머리에 퍼부었다. 註13)이러한 그의 행위는 바로 독립정신이나 마찬가지였다. 註14)한용운은 옥중에서도 독립정신을 철저하게 구현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1일에 3·1운동을 주동한 이유로 일제에 체포되어 그날부터 일제 경찰의 취조를 받았다. 당시 일제가 독립선언을 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즉각적으로 “독립목적을 관철하기 위
하여”라고 답하였다. 3월 2일 취조에서도 일본정부와 일본 제국의회에 제출한 문건의 취지를 묻는 질문에 아래와 같이 답하였다.
동양평화는 조선독립이 되고 안되는 데 관계가 크기 때문에 조선이 독립해야 좋겠다고 하였다. 만일 독립이 안되면 도리어 일본이 해를 받을 것인 바, 5천 년을 유지하여 온 조선민족은 일본과 영원히 동화할 수 없으니 속히 독립을 하는 것이 평화의 제일 조건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註15)
일제 검사가 “피고는 금번의 운동으로 독립이 될 줄로 아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독립의 당위성을 아래와 같이 개진하였다.
그렇다. 독립이 될 줄로 안다. 그 이유는 목하 세계 평화회의가 개최되고 있는데, 장래에 영원한 평화가 유지되려면 각 민족이 자결하여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민족자결이란 것이 강화회의의 조건으로서 윌슨 대통령에 의하여 제창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상태로 보면 제국주의나 침략주의는 각국에서 배격하여 약소민족의 독립이 진행되고 있다. 조선의 독립에 대하여서도 물론 각국에서 승인할 것이고 일본서도 허용할 의무가 있다. 그 이유는 이곳에서 압수하고 있는 서면에 기재된 바와 같다.
만세운동으로 조선이 독립이 된다는 확신, 민족자결주의 등장과 침략주의 퇴조라는 세계정세의 관점에서 독립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하였다. 나아가 추후에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를 묻는 질문에도 “그렇다. 계속하여 어디까지든지 할 것이다. 반드시 독립은 성취될 것이며, 일본에는 중僧월조月照가 있고, 조선에는 중 한용운이가 있을 것이
다”라면서 독립은 성취된다고 확언하였다. 이는 한용운의 독립에 대한 자부심·확신에 찬 옥중 항일투쟁이었다.
한용운이 경무총감부 심문에서 개진한 민족정신, 독립선언의 자부심, 독립할 수 있다는 자존심은 1919년 5월 8일의 경성지방법원 예심의 답변에서도 지속되었다. 註16)
문 : 이 선언서에는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폭동을 선동한 것이 아닌가?
답 :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선사람은 한 사람이 남더라도 독립을 하라는 것이다.
문 : 피고는 금번 계획으로 처벌될 줄 알았는가?
답 : 나는 내 나라를 세우는데 힘을 다한 것이니 벌을 받을 리 없을 줄 안다.
문 : 피고는 금후도 조선독립을 할 것인가?
답 :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문답에 극명하게 나오듯 한용운은 조선사람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취지를 밝혔다. 그리고 자신은 나라를 세우는데 힘을 썼기에 처벌받지 않으리라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마지막으로는 독립운동을 지속하겠다는 항일투쟁의 의지를 전혀 늦추지 않았다. 몸이 없어지면, 정신만이라도 독립의 의지를 영세토록 갖고 있겠다는 발언에서는 무서우리 만치 강한 지조를 느낄 수 있다.
한용운의 이런 민족의식은 1920년 9월의 고등법원 공판에서도 지속되었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일제가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을 묻는 질
문에 답한 한용운의 발언이 전한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국가의 흥망은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 아니오, 어떠한 나라든지 제가 스스로 망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가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요. … 원래 이 세상의 개인과 국가를 물론하고 개인은 개인의 자존심이 있고 국가는 국가의 자존심이 있나니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나라의 간섭을 절대 받지 아니하오. 금번의 독립운동이 총독정치의 압박으로 생긴 줄 알지 말라.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압박만 받지 아니 하고자 할 뿐 아니라 행복의 증진도 받지 않고자 하느니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라. 사천년이나 장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언제까지든지 남의 노예가 될 것은 아니다. 그 말을 다하자면 심히 장황하므로 이곳에서 다 말할 수 없으니 그것을 자세히 알려면 내가 지방법원 검사정의 부탁으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라는 것을 감옥에서 지은 것이 있으니 그것을 갖다가 보면 다 알 듯 하오. 註17)
즉 한용운은 개인·국가에는 자존심이 있다고 보면서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절대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고 단언하였다. 때문에 3·1운동은 조선민족이 단순히 일본의 총독정치의 압박이라는 피상적인 요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렇듯 한용운은 재판장에서 자신의 독립 의지를 적극적으로 피력하였다. 이러한 피력 자체가 민족의식 구현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용운은 일제로부터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지만, 註18) 그는 차디찬 옥중에서
항일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러한 항일투쟁은 민족대표로서 자존심이자 자신의 항일운동이었다.
한용운이 옥중에서 전개한 또 다른 항일활동은 「조선독립의 서이하 독립의 서」 註19)집필이었다. 현재 만해가 옥중에서 쓴 이 「독립의 서」의 1차 원본과 출옥 후 썼다는 2차 원본의 소재는 불분명하다. 즉 한용운이 옥중에서 쓴 원본은 일인 검사에게 제출되었으며, 일제말기에 심우장에서 쓴 2차 원본의 소재도 알 수 없다. 「독립의 서」는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수록되어 있다. 註20)이는 국외 독립운동계에 알려졌으나 국내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독립의 서」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개론
2. 조선독립선언의 동기
(1) 조선민족의 실력
(2) 세계대세의 변천
(3) 민족자결 조건
3. 조선독립선언의 이유
(1) 민족자존성
(2) 조국사상
(3) 자유주의
(4) 대세계의 의무
4. 조선 총독정책에 대하여
5. 조선독립의 자신
그러면 「독립의 서」는 한용운이 언제·어디에서 작성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한용운전집』 2권의 도입부 화보에 수록된 「조선독립의 서」 사진 속에 보이는 문장이 그를 말해 준다.
기미년 양력 칠월 십일에 서대문 감옥에서 지방법원 검사장 촉탁에 응하여 작함
여기에 의하면 1919년 7월 10일, 서대문감옥에서 작성하였음이 분명하다. 「독립의 서」는 당시 한용운이 일제의 재판에 회부되어 3·1운동의 주도 목적·배경·독립운동에 대한 생각을 집중적으로 취조받을 무렵의 소신·판단을 정리한 글이다. 그는 개인이 만세운동에 참가한 차원이 아니라 조선민족이 3·1운동을 일으킨 차원에서 당위성을 개진할 필요에 따라 「독립의 서」를 기술하였다.
이 같은 목적에서 기술된 「독립의 서」에서 한용운은 자유·평화가 인류와 조선민족이 지향할 근본 가치임을 천명한 이후 조선독립 선언의 동기를 조선민족의 실력, 세계대세의 변천, 민족자결이라는 측면에서 제시했다. 이후에는 조선독립 선언의 이유를 민족자존성, 조국사상, 세계에 대한 의무로 구분·설명하였다. 그는 일제의 총독정치를 근원적으로 거부하고, 극복하기 위해 조선민족이 독립선언에 나선 것과 아울러 조선이 독립될 수밖에 없음을 밝혔다.
그러면 「독립의 서」가 어떻게 일제의 삼엄한 감시가 있었음에도 상해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게재되었는가. 『독립신문』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차서此書는 옥중에 계신 아我대표자가 일인 검사총장의 요구에 응하여 저술한 자者중中의 일一인데 비밀리에 옥외屋外로 송출送出한 단편斷片을 집합集合한 자者라.
옥중에 있는 조선민족 대표자한용운가 저술한 것인데, 그를 비밀리에 옥밖으로 내보낸 조각문장을 모아 게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관련된 사정은 1971년에 간행된 『나라사랑』 2집에 편집자가 「조선독립의 서」를 설명하는 내용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 당시 선생은 옥중에서 기초한 이 글의 전문을 작은 글씨로 휴지에 적어, 접고 접어서 종이 노끈을 만들어, 형무소로부터 차출되는 의복 갈피에 삽입, 간수의 감시를 피해 형무소 밖으로 유출시킨 것이 원문 그대로 등사되어 만주방면의 우리 겨레에까지 전해졌었다 한다. 원문이 기재된 원고는 선생이 별세한 해인 1944년에 유씨 부인과 김관호金觀鎬님이 선생의 문집을 열고 유고를 정리하다가, 찢어진 봉투 속에 26년간 보존된 그대로의 원고가 들어 있는 것이 발견된 것인데, 그 후 다른 종이에 배접해서 현재는 다솔사多率寺의 최범술崔凡述님이 소장하고 있다.
한용운은 일인 검사에게 제출하기 이전 휴지에 작은 글씨로 옮겨 적고, 이를 접어 형무소 밖으로 나가는 의복의 갈피에 집어 넣었다. 이렇게 외부로 나온 「독립의 서」는 상해까지 전달되었다. 그러면 이 원고를 받은 인물은 누구인가. 대상자는 한용운의 제자인 승려 이춘성의 회고가 주목된다.
그때 나는 주로 그 분의 사식 따위가 아니라 바깥의 공기라든지 그 분이 몰래 써 준 글을 밖으로 가져오는 일이 중요했어요. 「조선독립의 서」를 끈을 똘똘말려서 내 손으로 받아 왔지. 註21)
이를 주목하면 한용운의 옥바라지를 하였던 시봉 이춘성이 이를 받았다고 보여진다. 그러면 원고는 이춘성에 의하여 상해임시정부로 전달된 것일까. 「독립의 서」 전달은 한용운을 따르던 불교청년 김상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김상호는 3·1운동 직후 학승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임시정부와 연계하에 군자금 전달, 불교계와 임시정부의 연결을 시도한 승려이다. 註22)그는 원고 전달에 관여한 회고는 한용운의 제자로 다솔사 주지를 역임한 승려였던 최범술을 통하여 확인된다.
이 청년운동의 선봉 김상호에 대하여 한 마디 할 필요를 느낀다. 이 분은 기미년을 전후하여 그 당시 청년운동 각 방면에 연계 연락되어 활동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용운 선생이 우리 민족대표들과 같이 서대문감옥에 갇혀 있을 때 차입하는 의복을 이용, 저 유명한 「조선독립의 서」를 받아내 이를 국내외에 유포하였던 것이다. 註23)
위의 내용에 의하면 김상호가 「독립의 서」를 국내외에 유포하였음이 분명하다. 이런 배경에서 나오게 되었던 「독립의 서」를 받아 본 일본인 검사도 경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구전은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이 글월은 고 한용운 선사가 기미년 3·1운동 사건으로 투옥되어 옥중에서 일인 검사의 심문에 말로는 다 대답할 수 없다고 옥중에서 글로 대답한 옥중답서獄中答書로서 일인 검사에게 수교手交하였던 글입니다. 일인 검사는 선사의 답변서를 보고 탁월한 인격과 고매한 사상에 감복하고 경의를 표하면서 답변은 정당하나 일본제국주의 방침이니 어찌할 수 없다고 밝힌 유명한 이야기가 전문轉聞되고 있습니다. 이 「조선독립의 서」는 독립선언문보다 그 내용이 더욱 심각하고 일본제국주의 침략 근성을 정곡으로 찔러주는 글월입니다. 註24)
해방 이후 한용운의 독립운동·독립사상을 언급할 경우에는 누구나 이 글을 주목하였다. 조지훈 같은 경우는 최남선의 「독립선언서」에 비해 시문時文으로 한 걸음 더 나갔고, 조리가 기백하고 기세가 웅건하다고 평하였다. 註25)그럼에도 이에 대한 관련 연구자들의 전문연구는 미흡한 편이었다. 다만 최근에 접어 들면서 연구의 첫 걸음이 시작되었다. 註26)
이처럼 한용운은 옥중에서 3·1운동사,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주목할만한 선언서인 「독립의 서」를 작성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용운의 옥중투쟁의 치열함과 함께 그가 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우연이 아니고 자신이 갖고 있었던 독립사상에서 배태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한용운이 옥중에서 직접적인 저항·투쟁을 전개한 데에 반하여 백용성은 간접적인 저항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백용성은 일제에 타협·굴복하지 않고 다만 종교적인 체험을 극대화하여 불교개혁, 민중을 위한 불교로 지향을 위한 고뇌를 하였다. 즉 그의 민중을 위한 역경불교가 구현되었다. 민족의식의 확대·변용이 되었거니와 그는 민중불교로 전향이었다. 백용성의 민중불교, 민중을 위한 역경사업에 대한 포부를 갖게 된 것은 옥중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 각 종교신자로서 동일한 국사범으로 들어온 자의 수효는 모를 정도로 많았다. 각각 자기들의 신앙하는 종교서적을 청구하며 기도하더라. 그 때에 내가 열람하여 보니 모다 조선글로 번역된 것이오 한문으로 된 그저 있는 서적은 별로 없더라. 그것을 보고 즉시 통탄한 것을 이기지 못하여 이렇게 크고 큰 원력을 세운 것이다. 내가 만일 출옥하면 즉시 동지를 모아서 경 번역하는 사업에 전력하여 이것으로 진리의 나침반을 지으리라. 이렇게 결정하고 세월을 지내다가 신유년 삼월에 출옥하여 모모인과 협의하였으나 한 사람도 찬동하는 사람은 없고 도리어 비방하는 자가 많았다. 註27)
여기에서 우리는 백용성이 옥중에서 다른 종교의 서적 대부분이 한글로 되어 있음에서 큰 충격을 받았음을 확인한다. 백용성은 나아가서 한문에 대한 소용, 민중들의 한문에 대한 이해도, 시대사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 마침내 역경에 나설 결심을 하였다. 출옥 직후부터 그
는 자신의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제반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뜻을 널리 알리고 동참자를 구하였으나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오히려 반대의 목소리만 듣게 되었을 뿐이다.
여余가 차此로 인하여 장래를 우려타가 부득이 역회譯會를 설립하고 그 진행방법을 연구하여 전선全鮮사찰에 선전하였으나 수포水泡종귀終歸할 따름이로다. 註28)
반대의 목소리란 승려만이 아는 불교를 왜 한글로 번역하여 승려의 권위를 하락시키는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 승려들은 역경에 나서야 하는 당위성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대부분 승려들은 세상사조에만 정신이 팔리고, 거의 결혼을 하여 처자식 봉양에만 유의하고, 사미 학승들은 세간의 학문에만 정신이 나가고, 주지들은 사찰재산을 탕진하기만 하면서 경전번역에는 전혀 뜻이 없었다고 백용성은 평가하였다.
백용성은 자신이 홀로 고독하게 직접 역경사업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백용성이 역경을 위해 조직한 것은 삼장역회三藏譯會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도 註29)백용성의 삼장역회의 등장을 ‘불교의 민중화운동’이라는 취지로 긍정적 의미로 평가하였다. 삼장역회는 그가 출옥한 이후 거주한 서울 봉익동의 대각교당에 두었다. 그는 자신의 구상을 서서히 그리고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역경의 출발기에 그는 자신이 역경을 하고 성과물을 보급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신을 개진하였다.
불기 이천구백사십팔년 시월 이십오일에
삼장역회 백용성은 서하다
또 다시 한말로 우리 불교를 믿는 사람에게 선전코저 합니다. 우리는 오직 불심만 믿어 나의 억천겁에 어두운 마음을 타파하고 청정도덕과 마음이 편안하고 참 즐거운 락을 수용합시다. 빈도가 재조 없고 지혜가 짧으며 눈이 어둡고 손이 떨리나 오는 세상이 다하도록 모든 중생이 정법을 깨달아 가치 성불하기를 원하고 이 경을 번역합니다. 註30)
중생들이 불법을 깨달아 함께 성불하자는 원력이 배어 있었으니, 이는 보살정신 그 자체였다. 그는 보살정신으로 경전번역을 하였거니와 이는 나라 잃은 백성들에 대한 뜨거운 보살핌이었다. 이는 곧 민족의식 표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보살정신·민족의식으로 경전번역과 동시에 불교사상의 요체도 집필·간행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짧은 기간에 후원도 없이 오히려 비판만 받으면서도 다양한 경전을 번역하였다. 그럼에도 그가 번역한 불경은 출옥 후 4년 간 무려 2만여 권에 달하였다. 당시 백용성의 속세 나이가 60살이 넘었다. 이렇게 노년의 몸으로 역경을 한 것에서 그의 집념, 민족의식이 견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백용성의 역경은 그 이후에도 『화엄경』·『능엄경』의 한글번역으로 이어졌다. 바로 이 같은 백용성의 민중을 위한 역경불교가 옥중체험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3·1운동 이후에도 불교계의 독립운동은 지속되었다. 대체적인 흐름은 우선 상해임시정부를 배경으로 전개되었고 註31)이어 만주지역의 독립단체 가담·후원으로 나타났다.
3·1운동에 참가하여 그 일선에 섰던 청년승려들은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하여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4월 중순 이후 출범했다. 임시정부에는 국내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던 중앙학림 출신의 승려가 참여하였다. 백성욱白性郁·김법린金法隣·신상완·김대용 등은 3·1운동 직후 서울 신상완의 집에서 모여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이들은 상해에 임시정부가 출범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륭양행怡隆洋行의 안내를 받아 상해로 들어갔다. 그 밖에도 월정사 출신의 이종욱李鍾郁·송세호宋世浩도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로 간 청년승려들은 임정 요인들과 상의하여 국내 불교계를 독
립운동으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청년승려들은 국내의 불교계 인사를 상해로 망명시키고, 불교계의 자금을 군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한 다각적인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종욱·신상완은 임시정부의 국내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국내의 김상호·김상헌·박민오·김봉신과 협력하여 『혁신공보』라는 비밀의 항일신문을 만들어 해외의 독립운동 소식을 국내에 보급하였다. 신상완은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불교계 대표로 김포광을 밀파시켰다.
이러한 상해임시정부를 무대로 한 불교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을 무렵 국내에서는 한성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4월 2일 인천에서 개최된 한성임시정부의 발기 모임에는 월정사 승려 이종욱이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가하였다. 4월 16일 서울의 비밀회합에는 박한영·이종욱이 13도 대표 25명과 함께 회동했다. 4월 23일 한성임시정부의 국민대회 취지서를 발표할 때에는 국민대표 25명에 박한영·이종욱이 포함되었다.
이종욱은 상해와 국내를 연결하는 주요 임무를 수행하면서 불교 독
립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1919년 5월경에 창립된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의 특파원으로도 활동했다. 이 외교단에는 이종욱·송세호·용창은 등 월정사 승려가 대거 포함되었는 바, 이 점은 특이한 사례이다. 이종욱은 임시정부의 국내 연락망인 연통제의 특파원이었다. 그는 대한적십자사 국내지부의 설치에도 관여하였고, 1919년 10월 제2회 독립선언서 배포 및 만세시위를 전개하려는 운동에도 관련되었다. 이종욱은 상해로 망명하기 이전인 1919년 3월 의열단체인 27결사대의 일원으로 일제와 항쟁을 거친 이력을 갖고 있었다. 27결사대는 이탁이 중심이 되어 만주에서 결성된 의열단체였는데, 을사5적과 고종양위를 강요한 친일파 처단을 목적으로 표방하였다. 이들은 1919년 3월 3일과 5월 5일 두 차례의 거사를 준비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결과적으로 주모자가 일제에 체포되었다.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계하려는 움직임에 불교계인사들이 다양하게 관여된 것의 대표적인 운동은 대동단사건이었다. 대동단은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였다. 여기에는 건봉사 출신의 정남용이 깊숙이 개입했다. 대동단은 국내의 주요 인사를 상해로 망명시켜 일제의 기선을 제압하고 대동단의 위상을 증진시키려는 차원에서 김가진金嘉鎭과 영친왕 이강을 망명시키려고 하였다. 1919년 10월 김가진의 망명은 성공하였으나, 이강의 탈출계획은 실패하였다. 이강의 망명실패로 정남용·송세호는 일제에 피체되었다.
불교계와 임시정부를 연결시키면서 불교의 민족의식을 임시정부에 유입시키려는 노력은 불교계의 자금을 임시정부 독립자금으로 전환시켰던 것에서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으로 범어사의 김상호·김상헌·김석두가 범어사 원로인 이담해·오성월·김경산·오리산이 모아 준 거금을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하였던 것을 들 수 있다. 이에 임시정부는 이담해·
오성월·김경산을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했다.
이외에도 불교계의 군자금 전달을 말해주는 사례는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내용을 전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최근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김구하가 수년간 임시정부에 제공하였다는 거금 13,000원에 대한 물증이 나왔다. 註32)김구하는 안창호安昌浩의 밀사, 불교계의 항일승려인 이종욱과 백초월, 그리고 다수의 독립운동가에게 군자금을 주었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상해임시정부 지원, 그리고 군자금 제공과 관련된 인물은 항일승려인 백초월이다. 그는 3·1운동 이전에는 지리산 영원사 주지를 역임하였던 강백이었지만, 3·1운동 직후 서울로 올라와 중앙학림에 독립운동단체인 민단본부를 결성하였다. 그는 중앙학림 학인이었던 정병헌·신상완·백성욱을 천은사·화엄사·쌍계사 등의 사찰 승려들에게 보내어 자금을 수금케 하였다. 그는 이를 불교계 루트를 통하여 임시정부로 전달했다. 註33)
이처럼 불교계는 임시정부를 배경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주목할 부분은 국내 불교계를 독립운동 조직으로 총괄하려고 한 의용승군 조직 시도였다. 이는 성사되지 못하였지만 그것이 기획·입안되었다는 자체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기획은 신상완·백초월·이종욱·백성욱 등 임시정부를 배경으로 치열한 항쟁을 하였던 불교의 투쟁이라는 기반에서 나온 것은 분명하다.
의용승군제는 전국 사찰의 승려를 대한승려연합회 산하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계하에 항일투쟁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승군을 총괄하는 충령부를 두고, 내부에 비서국·참모국·군무국·군수국·사령국을 각각 두었다. 전국적으로는 조직 거점으로 도·군·산이라는 기관을 대별하여 두었다. 이러한 조직을 추동하기 위해 석왕사·해인사·통도사 등 15개 본산에 기밀부를 설치하여 임시정부와 유기적인 연락을 시도할 수 있는 장치도 강구하였다. 註34)이러한 배경에서 1919년 11월 상해에서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한토韓土의 수천 승려는 이천만 동포 급及세계에 대하여 절대로 한토에 재한 일본의 통치를 배척하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주장함을 자에 선언하노라.
평등과 자비는 불법의 종지宗旨니 무릇 차此에 위반하는 자는 불법의 적이라. 그러하거늘 일본은 표면 불법을 숭崇한다 칭하면서 전세기의 유물인 침략주의 군국주의에 탐닉하여 자조 무명無名의 사師를 기起하여 인류의 평화를 요란騷亂하며, 한갓 그 강폭함만 시恃하고 교화의 은恩을 수受한 인국隣國을 침侵하여 그 국國을 멸滅하며 그 자유를 탈하며, 그 민을 학虐하여 이천만 생령生靈의 원성冤聲이 오오嗷嗷하며, 특히 금년 삼월 일일 이래로 대한민족은 극히 평화로운 수단으로 극히 정당한 요구를 규호叫號할 새, 일본은 도리혀 더욱 포학暴虐을 사행肆行하여 수만의 무고無辜한 남녀를 학살하니, 일본의 죄악이 사斯에 극한지라 아등我等은 이미 더 침묵하고 더 방관할 수 없도다.
일즉 전민족 대표 삼십삼인이 독립선언을 발표할 세, 아 불도佛徒중에서도
한용운 백용성 양 승려 차에 참가하였고, 그 후에도 아 불도 중에서 신身과 재財를 헌獻하여 독립운동에 분주한 자 다多하거니와 일본은 일향一向전과를 참회하는 양樣이 무無할 뿐더러 혹은 경관을 증가하고 군대를 증파하여 더욱 억압정책을 취하고, 일변一邊부정한 수단으로 적자배賊子輩를 구사하여 일일一日이라도 그 악과 이천만 생령의 고뇌를 더 깊게 하려 하니, 이제 아등은 더 인견忍見할 수 없도다. 불의가 의를 염厭하고 창생蒼生이 도탄塗炭에 고苦할 때에 검劍을 장仗하고 기起함은 아 역대 고조古祖제덕諸德의 유풍遺風이라. 하물며 신이 대한의 국민으로 생生한 아등이리오.
원컨대 불법이 한토에 입入한지 우금于今이천년에 이조李朝에 지하여 다소의 압박을 수함이 유하였다 하더라도 기타의 역대 국가는 모다 차를 옹호하여 그 발달의 융성함이 세계불교사상에 관절冠絶하였나니, 피彼일본인을 불타의 자비 중에 인도한 자도 실로 아 대한불교라. 임진왜란 기타 위급의 시時에 여러 조사와 불도가 신身을 희생하여 국가를 옹호함은 역사에 소상昭詳한 바이어니와, 이는 다만 국민으로 국가에 대한 의무를 진盡할 뿐이라. 국가와 불교의 깊고 오랜 인연을 인因함이니라. 일본이 강폭하고 그 궤휼詭譎한 수단으로써 한국을 합병한 이래로 한국의 역사와 민족적 전통 급及문화를 전혀 무시하고 각 방면에 대하여 일본화정책 급 압박정책으로써 한족韓族을 전멸全滅하려할 세, 아 불도도 그 독수毒手의 희생이 되여 강제의 일본화와 가혹한 법령의 속박束縛하에 이천년래 한토의 국가의 보호로 누리던 자유를 실失하고 미기未幾에 특유한 아 역대 조사祖師의 유풍이 인멸湮滅하여 영광있던 대한불교는 멸절滅絶의 참경에 함陷하려 하도다.
이에 아등은 기起하였노라. 대한의 국민으로서 대한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완성하기 위하여 이천년래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진 대한불교를 일본화日本化와 멸절滅絶에 구하기 위하야 아我칠천의 대한 승니僧尼는 결속結束하고 기起하였노니, 시사보국矢死報國의 이 발원과 중의경생重義輕生의 이 의기意氣를 뉘 막으며 무엇이 막으리오. 한 번 결속하고 분기奮起한 아등은 대원大願을 성취하기까지 오직
전진하고 혈전血戰할 뿐인저.
대한민국 원년 십일월 십오일
대한승려연합회
대표자 오만광·이법인·김취산·강풍담·최경파·박법림안호산·오동일·지경산·정운봉·배상우·김동호
이 선언서는 불교가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면 부정하면서 독립운동에 혈전으로 나설 수밖에 없음을 선언한 것이다. 이는 민족불교를 지향한 사실을 자명하게 보여준다.
선언서는 한글·한문·영문으로 작성되어 상해를 중심으로 한 국내외에 널리 전달되었다. 상해의 『독립신문』에는 「불교선언서」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註35)또한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승려연합대회선언서」로 수록되어 있다. 註36)애국동지회에서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사』에는 「승려연합회의 선언서」라고 하였다. 승려연합회가 어떤 단체인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없다. 추측건대 임시정부와 국내 불교계를 연결하였던 승려들이 의용승군을 조직하는 가운데 불교계의 독립정신을 국내외에 선언하면서 임의적으로 내세운 단체가 아닌가 한다.
선언서의 발표자로 나온 12명 승려의 전모도 알 수 없다. 모든 승려의 이름은 가명으로 이해된다. 다만 여러 사정을 종합하여 오만광은 오성월, 김축산은 김구하, 지경산은 김경산, 김동호는 김상호로 추정된다. 선언서 작성자도 모두 알 수 없는 형편이다. 연구자들은 백초월·이종욱·신상완을 작성자로 비정하고 있으나, 그에 관한 결정적인 자료가 없기에 확정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이와 같은 상해를 중심으로 한 불교의 독립운동 이외에는 불교의 군자금 모집·전달과 만주지역의 독립군에 승려들이 가담한 경우도 나타난다. 이러한 군자금 모집과 독립군 가담은 상호 연결구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1919년 5월 해인사 승려인 김봉율·박달준·강재호·송복만·손덕주·박덕윤·이창욱·김장윤, 그리고 대흥사 승려인 박영희는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침투하였다. 이들은 남만주 서로군정서 영수증을 갖고 김룡사·고운사·범어사에서 군자금을 모금했다. 함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던 이범대는 군자금 모금과 동지포섭을 위한 해동불교청년회를 결성하여 만주의 대한독립단과 연계되어 활동하였다. 김상헌은 상해를 배경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19년 8월에는 군자금 모집의 임무를 띠고 국내로 와서 철원애국단을 조직하고 함남에서 모금한 자금을 임시성부 안창호에게 송금했다. 이외에도 불교계의 군자금 모집·전달은 수없이 많았으리라고 추정된다.
불교계의 독립운동은 교단과는 별개로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수행되
었다. 승려 출신으로 중국과 만주지역의 독립군에 가담한 김성숙·이운허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김성숙은 3·1운동 당시 봉선사에서 만세시위를 하다 중국의 민국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그는 민국대학 재학시부터 조선민족전선연맹·조선의용대·임시정부 등의 간부로서 활동하였다. 이운허는 승려가 되기 이전에 만주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활동하다가 승려가 되었다. 개운사에서 강원 공부를 마친 이후에는 다시 만주로 가 국민부·조선혁명당에서 활동하였다. 김법린은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일제의 한국침략 부당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개진했다. 註37)
이후에도 불교인의 독립운동은 각처에서 자생적으로 지속되었다. 예컨대 한용운의 신간회 참여와 창씨개명 반대, 개별 학교에서의 저항은 그 단적인 예증이다. 통도사에서 경영한 통도중학교 교사로 근무한 조용명은 1939년 이후 창씨개명 반대, 일본어 및 일본연호 사용금지, 일본역사 부인, 애국지사 순방을 전개하였다. 註38)그리고 경북 5본산 사찰이 세운 오산학교에서는 일본군 입대 거부, 독립운동가와 연락 도모를 결의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註39)그밖에 증거가 불충분하지만 1944년 3월경 무장봉기를 준비하였다는 이종욱의 활동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註40)
3·1운동 이후 불교계 민족의식은 고양되었다. 이는 3·1운동에 참가한경험과 사회 전반에 파급된 민족의식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찰령체제에서 모순을 직접 경험하고, 불교계의 제반 문제점에 대한 성찰은 이러한 분위기로 이어졌다. 불교계의 사찰령 철폐는 이를 반증한다.
사찰령 철폐운동은 조선불교청년회의 청년승려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불교청년회의 행동대인 조선불교유신회는 이를 담당하였다. 조선불교청년회는 1920년 6월 20일 각황사에서 창립했다. 이 청년회는 1911년 임제종운동 당시 등장한 영·호남 중심의 불교청년회를 계승한 단체였다. 전국적인 조직의 성격을 갖고 등장한 조선불교청년회는 간사제를 채택하고 각 사찰에 지회를 조직하였다. 청년회는 토론회·강연회·순회강연회·운동경기 등을 통한 친목을 다지면서 불교의 개혁활동에 나섰다.
조선불교청년회는 친일승려 해인사 주지 이회광이 한국불교를 일본
불교인 임제종에 부속시키려는 책동을 저지하는 사업을 벌이면서 불교혁신사업을 전개하였다. 이후에는 불교계 내부의 혁신을 교단에 제출하면서 불교개혁의 입장을 분명히 표방했다. 이들은 조선불교는 만사를 공의에 부칠 것, 연합 제규를 수정할 것, 재정의 통일, 교육의 주의·제도의 혁신, 포교방법의 개선, 의식개신, 포교조직체인 홍교원 설립, 인쇄소 설치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비록 불교계 내의 제도적인 개혁을 중심으로 한 것이지만, 자연불교의 근본틀인 사찰령에 대한 문제를 공론화할 예비적인 단계에 와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청년들이 이 의안을 받았던 주지총회는 이 의견을 배척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불교청년들은 불교개혁을 본격화하기 위한 산하 단체를 1921년 12월에 결성하였는데, 그것이 불교유신회였다. 회원 모집을 강화로 회원은 2,000여 명에 달하였다.
조직을 정비하고 회원 확충에 주력한 불교청년들은 1922년 1월의 30본산주지총회에 참가하여 불교유신의 주장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불교청년들의 불교개혁에 대한 강렬한 도전에 대하여 당시 주지들은 반대적인 입장을 갖게 되었다. 마침내 회의는 승려대회로 확대하여 불교의 근본문제를 논의하자는 방향을 전환되어 불교 통일기관인 총무원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불교청년들은 기존 제도인 30본산 제도를 부정하며, 사찰령을 철폐하는 방향을 수립하였다. 나아가서 불교유신을 위한 건의안을 총독부에 제출하고 불교도 총회를 개최하여 교육·포교를 강화하겠다는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하였다.
본산 주지들은 이 같은 불교청년들의 노선을 거부하고 별도의 조직체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불교정책을 인정하고, 일제가 인정하는 기관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교무원이었다. 이렇게 조선불교청년회가 후원·주도하는 총무원과 일제가 옹호하는 본산이 대치하면서 양측은 대립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대립
구도에서 조선불교청년회·조선불교유신회는 1922년 3월 24일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조선총독부 당국에 사찰령을 부인하는 건백서를 제출하였다. 당시 2,284명의 승려들이 동의하는 연서를 첨부한 건백서는 사찰령을 철폐를 역설했다. 『동아일보』는 이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조선불교의 쇠퇴한 것을 분개하야 조선 전국에 널려 있는 불교청년들이 유신회를 조직한 후 여러 가지로 불교유신을 운동중이라 함은 이미 누차 보도한 바이어니와, 그 회에서는 회원 유석규씨 외 이천이백팔십사명의 연서로 장문의 건백서를 조선총독에게 제출하였는데, 그 요지는 먼저 조선불교의 이천여 년 동안의 역사를 들어 그 간난한 경로를 말하고 그와 같은 그 시대에는 각각 자유가 있었음으로 교화상에 큰 공헌이 있었으나 총독부에서 조선을 통치하게 된 이후로 사찰령을 발표하여 삼십본산의 제도를 만들었는데, 그 후로 본산주지 사이에는 각각 같은 권리를 믿고 서로 지위를 다투기에 골몰할뿐 아니라 본산주지는 말사주지를 압박하여 부질없이 서로 다투고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는 폐단이 생기었으며, 이에 따라서 불교의 사업이라는 것이 말이 못되게 황폐되었은즉, 당국에서는 속히 본산과 말사의 제도를 폐지하고 금후부터는 각 사찰에 자유를 주어 경성에 통일기관을 두고 모든 일을 하여 나가도록 하게 하여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더라. 註1)
이렇케 불교유신회에서는 장문의 건백서를 통하여 註2)사찰령에서 정한 본말사 제도를 부정하고 자립자치하는 새로운 통일기관이 제정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는 곧 사찰령의 부정·철폐를 요구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청년회·유신회의 주장을 일축하고 새로운 대안을 강구하였다. 다만 불교계 내부의 갈등 당사자인 총무원과 온건적인 본산
주지와 화해를 시도했다. 그러면서도 은연중에 유화적인 본산주지를 후원하고, 새로운 조직체를 만들려는 준비를 하였다. 요컨대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은 폐지할 수는 없고, 다만 부적절한 사법은 개정해 줄 수 있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나아가 본산간의 사업추진을 위한 연합제규는 없애고, 대신 새로운 기관은 조선총독부가 주관하여 설립하려고 하였다. 즉 근본적인 사찰령은 유지시키면서 불교청년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연합사무소만 새롭게 하겠다는 정책이었다.
이처럼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을 철폐하고 새로운 통일기관을 만들라는 요구를 거부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온건적인 27개 본산을 규합하여 연합사무소를 대치하는 재단법인 교무원을 1922년 12월에는 출범시켰다. 이에 불교유신회는 1923년 1월 6~7일 정기총회를 갖고 사찰령 철폐운동을 재추진하기로 하였다. 청년회에서는 위원 7인을 선발하여 조선총독부에 사찰령 철폐를 다시 건의했다. 조선총독부는 이에 대하여 묵살하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일제는 새롭게 등장한 재단법인 교무원을 지원하는 형태로 그에 대처하였다. 조선불교청년회가 1922년 9월 30일에 개최할 예정이었던 전조선불교청년대회를 일제가 불허한 것을 보면 사찰령 철폐운동은 중도 퇴진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불교청년회·불교유신회 노선에 서 있었던 총무원이 1924년 4월 온건적인 교무원으로 합류는 註3)불교개혁 및 사
찰령 철폐의 흐름은 퇴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찰령 철폐운동은 승려들의 자각·민족의식의 고양에 나온 것으로 스스로 자신의 문제점과 정체성을 재정비하려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불교정책, 일본불교의 침투로 인하여 한국불교는 서서히 전통이 말살되어 갔다. 그에 비례하여 한국불교 전통의 상징인 청정성이 후퇴하면서 수행승려의 터전인 선방, 수좌에 대한 중요성도 함께 퇴보하였다. 3·1운동 이후 새롭게 등장한 민족의식의 흐름, 일제 문화정치라는 구도에 의해 한국불교의 전통을 정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선학원이었다. 註4)선학원은 1921년 12월 서울 안국동 40번지에 창건되었다.
선학원의 창건은 수좌들의 본부, 일제 불교정책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사건이었다. 선학원 설립배경에는 사찰령 구도에 대한 저항정신, 전통불교 수호정신, 선수행을 치열하게 하자는 수행정신, 현실의 문제를 자각하는 정신 등이 어우러져 있었다. 이어 수좌들의 수행 조직체인 선우공제회는 1922년 3월에 창립되었다. 오성월·백학명을 비롯한 82명의 수좌는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발기인들은 선풍진작·자립자애를 통한 중생구제를 피력했다. 선우공제회는 본부를 선학원에 두고 중앙조직으로 서무부·수도부·재정부를 두었다. 지방
의 지부는 전국 선원 19처에 두었다. 공제회의 경비는 수좌들의 의연금·희사금으로 충당하기로 정하였다. 그 밖에도 각 지부 선량의 2할과 매년 예산의 잉여금을 저축하여 공제회의 기본재산으로 설정하여 각 선원을 진흥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조직을 정비한 1924년에는 통상회원 203명, 특별회원 162명으로 365명의 회원이 등록되었다.
선학원·선우공제회는 1925년부터 재정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본부가 직지사로 이전하는 등 문을 닫고 말았다. 이에 선학원은 범어사 경성포교당으로 전환되었다. 재기한 시점은 1931년 1월이었다. 김적음의 헌신에 의해 재건된 선학원은 재정확립, 선의 대중화에 기하면서 이전의 전통을 수립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1934년 12월에는 재단법인 조선불교 선리참구원으로 발족하였다.
선우공제회를 선리참구원으로 전환시킨 수좌들은 이를 이용하여 선종의 전통을 확립시키기 위한 또 다른 활동을 추진하였다. 그것은 1935년 3월 7~8일 선학원에서 개최된 조선불교 선종수좌대회였다. 註5)이 대회에서 수좌들은 선종의 자립, 선원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목적에서 조선불교 선종을 창립시켰다. 그리고 선원 및 수좌의 중앙기관인 종무원을 설립하였다. 종정으로 송만공·방한암·신혜월을 선출하고 종무원 간부, 이사진도 선출하였다. 이는 선종 종규 및 각종 규약을 제정하고 이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선종의 출범은 수좌들이 일제강점기 불교체제를 극복하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의식은 민족의식·전통불교 수호정신이라 볼 수 있다. 이후 선리참구원과 선종 종무원은 선원간의 연락과 통제, 선리참구, 선방 증설, 수좌 대우개선, 설법 포교를 통한 선종의 독자적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註6)그리하여 선수행의 철저가 기해지면서 한국
선전통이 계승되었다. 이와 같은 선리참구원과 선종은 해방되는 그날까지 지속되었다.
일제강점기 불교·일본불교의 침투로 나타난 한국불교의 저항은 선학원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수좌들이 주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독자적인 활동을 한 경우도 적지 않은데, 그 대표적인 승려가 백용성이었다. 백용성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에 포함되었던 승려였다. 그는 출옥 후에는 삼장역회를 결성하여 역경을 통한 불교대중화·민중화를 정열적으로 추진하였다.
이후에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수호하기 위한 독자노선을 걸었다. 그것이 처음으로 가시화된 것은 1925년 10월 망월사에 등장한 만일참선결사회였다. 註7)이 결사회는 일제강점기 불교체제로 인하여 선수행의 나약성·형식성을 타파하고 참선수행을 철저하게 하자는 모임이었다. 결사회의 목적으로 활구참선活口參禪·견성성불見性成佛·광도중생廣度衆生을 내세운 것은 이를 단적으로 말한다. 이면에는 일본불교의 부정, 일제강점기 불교체제에 좌절한 수좌들의 수행풍토를 근원적으로 개선하려는 목적이 개입되어 있었다. 이에 그 실천을 기하기 위한 방법으로 오후불식午後不食·장시묵언長時默言·동구불출洞口不出을 내세웠다.
나아가서는 선율禪律을 균형적으로 고려하였음을 보면 엄격한 결사공동체, 계율의 철저성을 강조하였다고 보인다. 이 결사회는 망월사에서 사정이 생겨 통도사 내원암으로 이전시켰지만 결사회는 중도 퇴진하였다. 註8)백용성의 결사회 추진은 민족의식뿐만 아니라 일본불교를 극복하
여 전통불교를 수호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백용성의 일본불교 부정, 전통불교 수호에 대한 극단적인 대응은 1926년 5월 승려의 대처식육帶妻食肉을 반대하는 건백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註9)그는 건백서에서 대처식육은 불교 교리에 어긋난 것이며, 불교를 망치게 하는 장본인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대처식육을 감행하는 무리들을 불가의 대적大賊으로 단언하였다. 백용성은 대처식육이라는 파계가 보편화되면서 사찰 원융살림의 파탄, 수행승려의 파멸 등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는 곧 한국불교에서 ‘난亂’이 초래될 것임을 경고하였다.
당시 불교계의 대처식육은 개항기 일본불교 유입, 국권강탈 이후 일제강점기 불교침투, 일본유학을 갔다 온 승려의 결혼 등으로 인하여 점차 증대하였다. 그러다가 1925년 가을 유학생 출신의 대처자를 본산주지에 임명하기 위한 사법개정을 검토할 때, 대처식육의 허용문제가 본격화되었다. 이에 대처식육을 찬성·반대하는 본산이 서로 나뉘어져 불교계에서는 논란이 거세게 일어났다.
백용성은 대처식육을 반대하는 입장을 지지하는 승려 127명의 연서를 받아 자신의 소신을 적은 건백서를 일제 당국에 제출하였다. 조선총독부와 보수적인 교단은 대처식육을 허용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에 백용성은 1926년 9월 두번째의 건백서를 다시 제출하였다. 2차 건백서는 1차 건백서와 거의 같은 논지를 펴면서 탄력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무처승려와 유처승려를 구분하고, 승려들이 거주하는 사찰을 구분하여 거주케 하자는 것이다. 즉 청정 수좌 전용으로 몇 개의 본산을 할당하라는 요청이었다.
일제는 백용성의 1~2차 건백서를 전혀 검토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
처자도 본산주지에 취인할 수 있는 사법의 개정을 권유하였다. 그 결과 1926년 10월경에는 10여 본산이 사법개정을 완료하였고, 1920년대 후반에 가서는 거의 모든 본산이 그 추세에 합류하였다.
마침내 백용성은 대처식육의 금지 촉구가 수용되지 않자, 이제는 교단을 탈퇴하고 자신의 본연의 길로 나갔다. 그는 기존 교단의 승적을 버린다는 통고를 하고, 자신의 강구한 새로운 교단을 창립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대각교이었다. 그는 기존 교단, 일제강점기 불교체제와 결별하였다. 백용성은 1927년 대각교를 선언하면서 기존 대각교당은 대각교 중앙본부로 전환시켰다. 대각교를 선언한 직후 그는 경남 함양에 화과원이라는 과수원을 세워 자신의 사상에 의거한 수행 및 선농일치의 공동체를 세우고, 그곳을 대각교 지부로 삼았다. 또한 만주의 용정에도 선농일치의 사상을 구현할수 있는 대각교당을 세워 역시 대각교 지부로 삼았다.
이렇게 그는 만일참선결사회, 대처식육 반대 건백서, 대각교 선언 등 일관적으로 일제강점기 불교의 모순을 극복하고 전통불교를 수호하기 위한 행보를 걸어 갔다. 註10)
일제강점기 불교에 대한 저항과 극복의 움직임은 당시 강원 학인들에게서도 나왔다. 당시 전국 강원의 대표들은 1928년 3월 14~17일 중앙의 각황사에 모여 신학문에 경도되면서 나온 불교교육의 문제점을 토의하고, 그 대안을 강구하는 집회를 가졌다. 그 모임은 조선불교학인대회이었다. 註11)
학인대회는 1927~28년 불교 중흥의 배경에서 가시화되었다. 1927년 10월경부터 시작된 대회의 준비는 신학문, 대처승 중심의 불교에서 시행된 불교교육제도에 대한 비판과 우려에서 시작되었다. 대회를 준비 하였던 주도자들은 당시 불교계가 자멸하고 배교역법背敎逆法하는 상황을 개탄하고, 불교계 발전을 위해서는 학인들이 출가 초심으로 반성하고, 중지를 회향하는 승가정신 회복을 강조하였다.
이에 1927년 10월 29일 개운사에서 학인대회 발기준비회를 열었고, 1928년 2월 5일에는 발기인 총회가 열렸다. 학인대회는 전국 강원대표 44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대회에서는 학인들의 기본방향·수학문제·일상생활·조직체 등을 토의하였다. 그 결과 학인의 강령을 정하고, 학인들의 기관인 학인연맹의 제정과 기관지 『회광』 발간 등을 결의하였다. 그중 학인들의 강령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불타적 구제의 중심자로 홍임弘任과 건행健行을 가지자.
2. 우리는 시대에 적응한 교화방법을 만들자.
3. 우리는 불교조선의 건립에 필요한 모든 자량資糧을 통일적으로 준비하자.
4. 우리는 불타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불지佛智를 체인體認키 위하여 불교교육 제도의 확립을 기하자.
이러한 강령은 수학 중에 있는 학인들이 당시 불교계 상황을 직시하고, 그 모순과 문제점을 개혁하면서 불교정신에 투철한 불교교육제도의 확립을 기하려는 의식에 충만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학인들은 불교 교육제도를 선교후선禪敎後禪의 입장에서 초등과 3년, 중등과 3년, 고등과 3년의 틀을 정하고 각 강원의 교과목도 계정혜戒定慧삼학의 입장에서 정하였다.
대회종료 후 학인들은 대회에서 결의한 제반 내용을 실천해 나갔다.
강원제도 개선안 일부 내용은 수용되었다. 개운사 강원에 교단의 보조비를 받아 고등연구원을 설립한 것은 그 예증이다. 그러나 학인들이 대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인식한 강원제도의 개선안의 구도는 교단에 수용되지 못하였다. 교단은 교육제도 개선안을 놓고 수차의 논의 속에 1933년 강원규칙으로 정립했다. 그러나 강원규칙은 종헌 추진세력과 반종헌세력간 갈등으로 인하여 자연 해소되었다. 註12)
학인대회는 단순하게 보면 학인 차원의 교육제도 개선을 위한 모임으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저변에 흐르고 있었던 정신은 불교의 재정립, 전통불교로 회귀, 일제강점기 불교에 대한 비판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에서 불교의 미래를 담보하는 교육자 및 교육제도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이는 자연 불교교육제도의 틀을 개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불교정화·불교개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
다. 운동의 주동자인 이청담은 당시 그 대회에서는 ‘조선불교의 현상’을 좌시할 수 없고, 불교가 쇠미부진하며, 교육자 대부분이 지도정신이 부재하여 학인대회를 열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였다.
내 나이 27세 되던 해이던가 나는 근세조선 5백년 동안 천대받던 불교를 정화, 중흥시키자는 정통 불법수호의 기치를 들고 전국학인대회를 열고 전국의 40여 개나 되는 강원을 찾아 행각의 길에 올랐다. 어제도 그랬듯이 오늘도 결코 우리들 수행자들의 행가은 세속의 뭇 인간들이 생각하던 만큼 평탄하지는 못했다.
그토록 많은 삼보정재가 일인 독재의 착취와 억압 앞에 이름도 자취도 흔적없이 사라질 때 아니 3천년 정법과 불조의 혜명마저 깡그리 파괴될 때 나의 의분은 용솟음쳐 방관할수 가 없어 난 많은 학인들을 거느리고 정법수호를 부르짖었다. 註13)
학인대회는 단순한 개혁·교육제도 개선을 위한 것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 저변에는 일제강점기 불교의 비판과 부정, 그리고 불교의 정법을 수호하겠다는 신념이 있었다. 註14)그 신념은 곧 전통불교 수호로 이어졌으며, 그는 민족불교의 수호자였다.
일제의 불교정책은 사찰령을 통한 직접적인 장악이었다. 반면 한국 불교계는 전체를 총괄하는 단일적인 종무기관이 부재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불교발전 후퇴로 이어졌다. 산중공의제와 같은 원융적인 살림 부정과 개별 본산 중심의 군웅할거의 양상 노정은 본말사 주지들 타락의 가속화로 직결되었다. 종무기관 부재, 불교계 모순의 근원은 사찰령과 일제 당국의 탄압에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 한국불교에는 주지회의소·연합사무소·재단법인 교무원 등이 있었지만, 이는 종단 차원의 종무기관이 아니었다. 1920년대 전반기 불교청년들이 사찰령을 부정하며 단일적인 통일기관을 만들려고 노력하였지만, 일제의 외압과 보수적인 주지들 반대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불교의 단일적인 규율을 제정하고, 중앙기관을 만들려는 움직임은 1928년에 대두되었다. 이런 움직임은 불교청년운동의 재기, 과거 불교개혁세력의 중앙집결, 불교청년들의 성장 등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불교의 종헌 제정, 중앙교무원의 설립, 승려법규 제정을 위한 전 불교계의
의사를 집결하는 대회가 열렸는데, 그것은 1929년 1월 3~5일 각황사에서 개최된 승려대회였다. 註15)
승려대회는 본말사 사찰의 대표 156명 중 107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대회에서는 종헌, 교무원 원칙, 교정회 규약, 법규위원회 규칙, 종회법 등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교정 7인과 교무원의 간부도 선출하였다. 불교의 단일적인 규약·기관의 내용·성격을 담은 것은 종헌宗憲이었다. 종헌은 불교계 통일운동의 기반을 구축하였다고 볼 수 있다. 승려대회의 성공적인 개최와 종헌 제정은 불교사적·교단사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불교계에서도 이를 ‘교정전회敎政轉廻의 운동’, 불교계 ‘전원적全員的공책功策’, ‘전조선불교도의 총의總意’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는 일제하 불교계의 자주적 확립과 전체적 통일을 기하였던 불교 통일운동의 극치였다. 승려대회와 종헌의 의의는 당시 불교계가 모순을 스스로 인식함과 동시에 그를 극복하여 통일적인 종단을 완성한 것이다. 여기에서 근대 불교계의 자주적인 정신사의 구현을 찾을 수 있다. 이는 불교의 민족운동·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는 단서이다.
대회가 종료된 후 불교계는 종헌에서 규정한 각종 기관·단체를 출범시키면서 종헌실행에 매진하였다. 즉 통일·입법기관인 종회와 집행기관인 교무원이 등장하였다. 물론 통일적인 종단 활동을 처음으로 하였던 관계로 여러 측면에서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문제점의 저변에는 일제의 눈치를 보면서 사찰령 체제에 안주하려는 분위기였다. 1930년대 초반에는 종헌 실행세력과 종헌 반대세력간 치열한 갈등이 노정되었다. 종헌을 추진하여 종단 정상화, 불교자주화를 이루려는 세력은 사법개정운동, 종헌 반포기념일 제정, 종헌의 홍보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
다. 종헌 추진에는 사찰령 반대의 정신을 갖고 있었기에 일부 본산과 본산주지들의 비협조로 종헌실행의 정상화는 간단치 않았다.
종헌실행의 부진에는 승려들의 자각 부족과 각 본산을 통일시킬 실질적인 권한이 종헌에 미약한 것, 일제의 은근한 압력 등이 작용한 결과였다. 이에 시간이 지날수록 종헌 반대세력의 저항은 더욱 강렬하였다. 종단 자체가 뒤흔들리는 정황도 나타났다. 1934년 무렵 통일적인 종단체제는 유명무실하였다. 즉 종헌 소멸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불교계는 종헌을 추진하기 위한 대안이 강구되었다. 대안은 통일기관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였다. 다시 말하자면 통일기관의 내용·권한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문제이었다. 대안에는 우선 총본산제와 교무소안이 제기되었다. 총본산안은 불교계 31개 본산 위에 별도의 본산이나 사찰을 두어 그 본산본사이 모든 본산을 지도·감독하자는 안이었다. 교무소안은 본산의 저항을 고려하여 중앙에 불교를 대표하는 별도의 기관을 두어 그 기관의 행정적인 지도를 받게 하는 문제였다. 총본산안과 교무소안은 주지의 임명권·행정 감독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검토되었다.
통일기관 수립 대안은 종헌부진의 상황에서 노정되었지만 공론에 그치고 말았다. 1935년 심전개발운동의 추진과 동화정책의 구도에서 불교계의 통제·장악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연락기관 등장이 촉구되었다. 그러나 불교계에서는 막연하게 종무원을 만들겠다는 기획을 수립하였지만, 1936년 말까지도 구체적인 이행은 되지 않았다. 이에 일제 당국과 일본불교측은 불교를 직접 장악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불교계 일각에서는 일제측의 한국불교 장악에 대한 움직임을 파악하고, 이를 이용하여 불교의 통일운동을 성사시키려는 노력을 기하게 되었다. 이들은 한국불교 장악을 저지시키기 위한 노력을 비밀리에 전개했다. 당시 등장한 경북5본산, 전남5본산, 전북5본산, 경남3본산 등
의 조직을 활용하여 일제의 정책을 이겨내기 위한 방안도 강구하였다. 이는 바로 이전 통일기관 대안으로 나온 총본산 수립이었다. 1937년 1~2월 각 본산 대표들은 대구에서 회합을 갖고 총본산을 수립하는 것으로 일제의 정책을 극복하자는 방향을 결정하였다.
한편 1937년 2월말 조선총독부는 31본산주지총회를 소집하여 일제의 의도를 피력하였다. 모임을 전후로 한국측 주지들은 일제의 의도를 순응하는 가운데 한국불교의 통일운동을 수용하겠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일제의 의도와 한국측의 통일운동이 기묘하게 결합된 형태로 총본산 운동은 전개되었다. 이에 1930년대 전반 일제의 눈치만을 보던 전국의 본말사 주지층도 점차 총본산 건설운동에 자연 합류케 되었다.
이런 구도하에 총본산 건설운동은 본격화되었다. 註16)우선 총본산을 상징하는 건물 재건축 방안은 기존 각황사를 현재 조계사 터로 이전·신축이었다. 註17)1938년 10월 25일에 총본산 각황사의 대웅전 공사는 완료되었다. 이어 총본사의 명칭은 한국불교의 태고국사 계승의식에 의거 북한사의 태고를 현재 조계사로 이전하는 방법을 취하여 태고사로 명명했다. 불교계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일제가 정한 종명을 개신하겠다는 강력한 의사를 표시하였다. 이른바 종명 개정작업이다. 1940년 11월 28일 주지회에서 조계종으로 개종을 결의하고, 조선불교 조계종 태고사법을 완성했다. 註18)일제는 사찰령의 시행규칙을 개정함과 동시에 태고사법을 인가하였다.
이처럼 한국불교는 사찰령 극복, 불교계 통일운동 차원에서 전개된 종헌 제정, 총본산 건설운동을 완성하였다. 이는 일제의 일정한 협조가
작용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태고사법에는 일제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내용이 많았다. 註19)태고사법 제정 이후 불교계는 통일기관인 종무원을 출범시키고 종정과 종무총장을 선출하면서 본격적인 종단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때이어서 불교활동은 매우 지난하였다.
만당卍黨은 일제하 불교계의 대표적인 항일 비밀결사단체이다. 1930년 5월경 비밀리에 창립된 만당은 만해 한용운을 따르던 항일의식이 투철한 불교청년들이 정교분립·교정확립·불교대중화라는 강령을 내세우면서 일제의 불교정책 저항과 민족불교의 지향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 불교 유신활동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던 조선불교청년회·조선불교유신회는 1925년경에 스스로 해소되었다. 그러나 1928년 초반 조선불교청년회는 재기하였다. 청년회를 재기시킨 불교청년들은 불교청년운동 부진을 극복하면서 불교계 전반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움직임은 1929년 1월 자주적으로 불교 교정을 확립하기 위한 승려대회에 주도적인 참여로 나타났다. 1930년 하와이에서 개최된 범태평양불교청년대회 도진호 파견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불교청년운동은 완전 정상화되지 못하였다. 청년회의 조직과 자금문제가 주된 요인이었다. 이에 조학유·김상호·김법린·이용조 등은 불교청년운동을 강화하고 불교계 전반의 정상적인 운용을 실천하기 위한 비밀결사체를 조직하였으니, 그것이 만당이었다. 만당 당원은
비밀엄수, 당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는 서약을 하고 생명을 바친다는 각오로 활동하였다.
보라! 3천년 법성法城이 허물어져 가는 꼴을. 들으라! 2천만 동포가 헐떡이는 소리를.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의분에서 감연히 일어선다. 이 법성을 지키기 위하여,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향자向者는 동지요, 배자背者는 마권魔眷이다. 단결과 박멸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안으로 교정敎政을 확립하고 밖으로 대중불교를 건설하기 위하여 신명을 도賭하고 과감히 전진할 것을 선언한다. 註20)
만당은 교단 안정과 민족불교 지향을 기하기 위한 강령을 정하고 교단개혁에 적극적으로 뛰어 들었다. 이에 자주적으로 종헌을 제정하기 위해 개최된 승려대회를 비롯한 불교계 신흥의 배경과 청년들의 개혁의지가 결합되면서 만당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당시 당원의 입회는 기존 당원들의 만장일치 찬동으로 가능하였는데, 전국적으로는 80여 명에 달하고 지주조직을 갖출 정도이었다. 만당 당원은 초창기에 18명이었는데 점차 증가했다. 이들은 민족의식·항일의식을 소유하고 불교대중화에 관심이 많았던 불교청년운동의 핵심세력이었다. 만당은 불교계 전체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불교청년운동을 진일보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총동맹으로 전환시켰다. 이는 청년회의 지방의식으로 인한 동지간의 연결의 느슨함, 즉 통일정신 부재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만당의 전략에 의해 창립된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은 불교청년운동의 중심단체로서 기능하였다. 만당 당원들이 자연 그 총동맹의 간부를 담
당하였기에 만당은 총동맹을 움직이는 이면단체의 역할도 하였다. 총동맹과 만당은 불교계 교정을 확립하여 불교를 자주적·민족적인 방향으로 유도했다. 일제강점기 불교정책에 기생하는 주지층, 종헌실행 반대세력이 있어 그들과 치열한 대립도 전개하였다. 당시 불교계의 종헌실행 운동, 사법 개정운동, 종헌 반포 기념일 제정, 교정연구회 창립에는 만당 당원이 깊숙이 개입하였음은 그 예증이다.
하지만 만당은 1932년경에 이르러 내분에 직면하였다. 이는 당원간에 교단 운영에 대한 상이한 현실인식에서 비롯되었다. 만당 내부에서는 이를 해소시키면서 조직을 재건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급기야는 1933년 4월경 자진 해소하는 노선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 불교총동맹에게도 미쳐 총동맹도 1934년경 뚜렷한 활동을 하지 못하는 침체의 상태로 전락하였다.
이렇게 만당은 외형적으로는 해소되었지만 항일 저항의식을 갖고 있었던 당원들은 각처에서 일제강점기 불교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지속하였다. 대표적인 거점이 경남 사천의 다솔사였다. 다솔사에는 불교청년운동의 주역이자 만당 당원이었던 최범술이 주지로 재직하였다. 최범술은 만당의 해소를 주장하여 관철시킨 당사자였지만, 그 해소는 전략적 차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만당 당원을 다솔사로 모이게 하여 그들 생계와 활동을 지원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법린이었다. 그리하여 점차 다솔사는 만당 당원들의 집합처가 되어 갔다. 만당의 상징적인 인
물인 한용운도 다솔사를 찾기도 하였다. 이렇게 다솔사는 1930년대 중후반 만당 당원들의 집합처 성격을 띠면서 결과적으로는 배일·항일의 근거처가 되었다. 다솔사에는 만당 당원·항일인사·민족지사·의열단원·사회주의자 등이 왕래하게 되었다.
1938년에 접어들면서 만당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만당의 당원이었던 박근섭·장도환·김법린·정맹일 등이 진주경찰서에 구속되고, 그해 10월에는 김범부·노기용·최범술이 경기도경찰부에 구속되었다. 한편 출옥한 최범술은 한용운과 상의하여 다솔사에서 신채호 유고를 수집하여 전집을 만들려고 하였다. 이 작업은 1942년 9월경 일제 경찰에 의해 최범술이 구속되면서 중단되었다. 註21)
한편 1942년 겨울 해인사 강원의 원장인 임환경, 강사 이고경 등 다수의 학인들이 체포·구금된 사건인 해인사사건도 註22)이면에는 만당과 연계되어 있었다. 즉 한용운, 만당과 연계된 최범술과 친근한 항일의식이 있는 승려들을 체포하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고경 강백은 고문 후유증으로 입적을 하고, 끌려간 승려와 학인들은 일제의 가혹한 고문·구속이라는 만행을 겪어야만 되었다. 註23)
이렇듯이 항일비밀결사체인 만당은 불교교단의 정상화와 불교대중화를 기하면서 동시에 일제의 일제강점기 불교를 극복하기 위해 활동하였다. 비밀결사운동이라 그 전모를 알기는 어렵지만 불교자주화를 추구한 것은 분명하였다. 이에 그 저변에는 민족불교 지향, 일제강점기 불교에 대한 저항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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