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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죽음의 고개를 넘어야 하리 |
“학문은, 마음으로 깨닫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마음에 비추어 보아 옳지 않다면 설혹 공자(孔子)의 말일지라도 옳다고 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공자보다 못한 사람이 한 말임에랴.” 이렇게 불경한(?) 발언을 조선조의 한 선비가 발언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물론 친구들을 잃고 탄핵을 받아 이단으로 몰리고 결국 죽음을 면키 어려웠을 것입니다. 누구의 발언이냐고요? 다행히도 조선조 선비는 아닙니다. 이 말의 주인공은 바로 양명학의 태두 왕양명(王陽明, 1472-1528)입니다. 왕양명은 명나라 제일의 학자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며, 그 사람의 학문을 일컬어 양명학(陽明學)이라고 합니다. 마치 주자학(朱子學)이 송대(宋代) 제일의 학자인 주자(朱子)의 이름을 본 따 지어진 것과 같습니다. 왕양명은 주자보다 250년이나 후대 사람으로, 주자의 학문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학문체계를 세우게 됩니다. 주자학(朱子學)이 ‘성즉리(性卽理)’, 즉 ‘인간의 본성[性]과 하늘의 이치[理]가 일치한다’는 생각 아래 본성(본질)을 궁구하는 사변론적(思辨論的) 체계를 수립하는 데 집중했다면, 양명학은 이러한 주자학의 사변론적 학문방법을 거짓 학문[僞學]이라고 비판하면서,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였습니다. “마음은 텅 비고 신령하고 밝아, 뭇 이치가 갖추어져 있으며 만 가지 일이 그로부터 나온다. 마음 바깥에 별도의 이치가 있지 않으며, 마음 바깥에 별도의 일이 있지 않다.”는 왕양명의 말은 이러한 입장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양명학에서 말하는 학문의 본질은 바로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왕양명은 인간의 마음속에는 도덕적인 의식이 담겨있다고 보았는데, 그러한 의식을 ‘양지(良知)’라 불렀으며, ‘양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앎과 실천이 일치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했습니다. “앎은 실천의 시작이요, 실천은 앎의 완성이다. 앎과 실천은 둘로 나눌 수 없다.” 그래서 양명학의 핵심을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양명학은 당시 중국의 사변론적인 학문 풍토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실천론적인 학문방법과 현실에 대한 개혁방안을 마련하는 커다란 학문적 흐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조선조의 선비들은 명나라와 우호적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해왔을 뿐 아니라, 청나라가 명나라를 물리치고 중국을 장악하자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며 이름뿐인 명나라를 섬길 정도로 존명(尊明)해 왔지만, 정작 명나라의 최고 학문인 양명학(陽明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쏟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양명학은 관심조선 사회에서 이단시(異端視)되었습니다. 학문의 후진성을 학문 성립의 선후관계로 따질 수는 없지만, 송대의 주자학(성리학)을 최고 이념으로 여기면서, 이를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학문체계를 수립한 명대의 양명학에 대해서는 도외시했다는 것은, 학문의 종주국인 중국의 개방적 태도와는 다른 조선 학문계의 극단적 폐쇄성을 드러내는 사례라 할 것입니다. 또한 조선의 성리학이 얼마나 현실과는 동떨어진 사변론적 입장을 고수했는가를 보여주는 방증(傍證)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 사회에서 양명학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11대손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 1649-1736)가 바로 조선조의 대표적인 양명학자입니다. 그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학문에 몰두합니다. 10여 차례가 넘게 조정에서는 그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퇴합니다. 관직에 관심이 없었으니 당파 싸움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대의 선비들은 정제두가 양명학에 몰두해 있음을 알고 끊임없이 정제두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처벌을 요구합니다. 심지어는 그의 친구들조차도 정제두를 변명하다가 그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당시에 양명학을 공부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그의 스승인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1631-1695)가 양명학을 그만두라고 편지에서 충고하자, 그에게 답장을 보내어 이렇게 답했습니다. “제 마음속에 진실로 할말이 있습니다. 대체로 제두가 왕씨(왕양명)의 설을 항상 생각하는 이유가 행여나 사사로움을 이루고자 하는 데 있다면 벌써 제거해버렸을 것입니다. 성인의 학문의 정당한 길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 마당에 일생을 그르치지나 않나 하는 두려움이 마음 가운데 절실하여 이 석연치 않은 생각을 그대로 방치해둘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오래도록 생각해왔습니다. 슬픕니다. 천하에 현철(賢哲)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것을 살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원컨대 문하를 너그러이 용납하소서.” 정제두의 양명학에 대한 연구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학문의 정당한 길을 가려는 주체적 결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친구와 가족과 스승보다도 일생을 두고 정진해야할 정직한 학문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정제두 역시 성리학을 두루 연구했으나 한계를 느끼고 고심하던 차 양명학을 접하고 눈앞이 확 트이는 경험을 하게됩니다. 정제두 이전에도 양명학을 몰래 공부했던 선비는 많았으나, 대부분이 속으로는 양명학을 인정하면서도 겉으로는 주자학을 숭상하는 외주내왕(外朱內王)의 이중적인 태도를 가집니다. 왜냐하면 성리학의 거두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양명학을 공식적으로 비판한 이후부터는 양명학이 이단으로 굳혀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제두는 이러한 이중적 태도야말로 가장 비열한 행위이며, 자신의 학문적 태도를 떳떳이 드러내는 것이 올바른 학자의 입장이라고 믿었기에 결코 자신의 입장을 숨기거나 합리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제두야말로 조선조의 학문적 풍토에서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었던 최초의 학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자유로움에 대한 대가는 컸지만 말입니다. 그는 학문의 자유를 위한 벼슬을 버렸고, 친구들과 헤어졌으며, 가족들의 외면도 감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정제두의 태도가 반드시 나쁘게만 작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61세에 완전히 세상과 인연을 끊은 채 강화도로 내려와 학문에만 몰두했기에 당시에 치열했던 당쟁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 당시의 당쟁의 화를 면했던 선비는 이황과 정제두 뿐이었습니다. - 척박한 조선의 학문 풍토에 양명학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양명학에 심취하여 양명학이 뿌리내릴 수 없는 조선의 풍토를 이렇게 한탄하기도 합니다. “ 이 이치는 원래 온누리에 가득 차 밝고 밝아서 일찍이 천고에 쉼이 없었다. 다만 바른 길을 따르는 자가 없었기 때문일 뿐. (……) 진리는 언제나 죽음과 같이 있다. 그러니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죽음의 고개를 넘어야 하리. 세상의 부귀영화에 깊이 잠든 사람에게 아무리 깨우친들 그 귀에 이 진리가 들리기나 할까.” 정제두는 서로 뜯고 싸우고 부귀영화를 좇아 살아가는 조선의 현실을 한탄하며, 그러한 현실을 낳은 이원론적이고 관념론적인 성리학을 비판하며, 그 모든 것을 하나의 ‘마음’으로 해결할 일원론적이고 실천론적인 양명학에 몰두했던 것입니다. 이런 정제두의 양명학은 후대에 주자학을 비판하고 주체적인 학풍을 세우려는 조선 후기의 실학파들과 개화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며 오늘날에까지 계승되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인이므로. 희랍인 조르바의 작가로 우리에게 알려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입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이 묘비명을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에게 바칩니다. ■ |
출처: http://cafe.daum.net/realist100/DVRh/26 글쓴이: 김경윤 |
첫댓글 “ 이 이치는 원래 온누리에 가득 차 밝고 밝아서 일찍이 천고에 쉼이 없었다. 다만 바른 길을 따르는 자가 없었기 때문일 뿐. (……) 진리는 언제나 죽음과 같이 있다. 그러니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죽음의 고개를 넘어야 하리. 세상의 부귀영화에 깊이 잠든 사람에게 아무리 깨우친들 그 귀에 이 진리가 들리기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