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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생사관 /최 준 식 (이화여대, 종교학)
2. 한국인의 생사관에 대한 전통적 이해
가) 철리(哲理)적 이해
ㄱ) 불교적 이해
생사관에 관한 한 불교는 기본적으로 윤회개념에 기초되어 있다. 불교의 윤회관은 복잡하게 설명을 시작하면 아마도 한 권의 책으로도 가능치 않을 것이다. 각 부파마다 다른 이론이 있는가 하면 (교리발달) 시기별로도 각기 다른 이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이 이론들을 모두 거론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이론의 복합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론을 관통하는 하나의 기본적 구조가 있어 본고에서는 모든 불교교파이론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이 구조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삼세윤회와 같은 불교의 생사관에 관한 교리는 다음의 책을 주로 참고하였다. 오형근, ?심령과 윤회의 세계?, 불교사상사, 1978, pp.39-101.
불교의 교리는 널리 알려진 대로 윤회를 주장한다. 개인이 죽게 되면 그 영혼은 계속 남아 다시 다른 몸을 받아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 그 이론의 기본 골격으로서 깨닫지 못하는 한은 이러한 탄생과 죽음의 과정을 수없이 되풀이 해야 한다고 한다. 이때 개개 영혼은 전 생애동안 스스로 행했던 행위가 얼마나 선했고 악했는가 여부에 따라서 그 다음 생에 태어날 때 6가지의 다른 길 -전통적으로는 천상(天上), 인간, 수라, 아귀, 축생, 지옥 등 여섯- 가운데 한가지 길을 반강제적으로 택해야만 한다. 불교에서는 이 6가지 길 가운데 어디에 태어나든 태어나는 자체가 고통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 6가지 길에서 탈출, 해방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불교의 목표보다 윤회의 주체에 대한 것이다. 원시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사실상 ‘나’라고 주장할 만한 실체가 없다고 하는데 유명한 무아론(無我論)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개개 영혼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혼이 없다면 무엇이 윤회를 하면서 전생의 업보를 현세에 받게 하고 내생의 출생을 결정하게 하는가? 이를 위해 초기불교의 논가(論家)들은 무아론을 유지하면서도 -셈족의 종교에서 말하는 것 같은- 자아라는 실체성은 띠지 않는 대체자아개념을 만들어내는 데에 부심하게 된다. 이 노력의 일환으로 많은 대체 개념이 원시불교이론가들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나 세의식(細意識) 등의 개념을 들 수 있다. 위의 책, pp. 41-51.
이에 대한 복잡한 설명은 약하지만 이러한 원시불교의 대체자아개념들은 계속 발전을 거듭해 오다 대승불교의 가장 커다란 종파의 하나인 유식종(唯識宗)에서 알라야(Alaya)식(識)이라는 개념으로 집대성되게 된다. 유식불교철학은 불교의 스콜라철학이라 불릴 정도로 그 이론이 번쇄하기 이를 데 없어 중심개념인 알라야식에 대한 설명도 상상을 불허할 만큼 복잡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가장 근간이 되는 개념만을 보기로 한다.
유식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전체의식을 여덟개의 층으로 나누는데 앞의 여섯계층의 의식은 표층(表層)의식에 해당되고 뒤의 두 계층은 심층의식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알라야식은 가장 심층부에 있는 의식으로 제8식 혹은 장식(藏識)으로도 불린다. 이때 제8식이라는 이름은 모든 의식의 의지처가 되는 가장 마지막 의식이라는 면에서 불리는 이름이고 장식은 ‘저장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용어로 전생과 현생에서 행했던 -직접적인 행동이든 생각으로만 가졌던 것이든- 모든 행위와 생각이 발현가능태로 혹은 씨앗(bija)의 형태로 저장된다는 면에서 불리는 이름이다. 다시 말하면 한 인간이 행했던 모든 것은 이 알라야식에 그대로 간직되어 인간의 육체는 죽음을 맞이해도 그대로 존속하게 되어 그 안에 저장되어 있는 수많은 업인(業因)에 상응하는 다음 생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죽음 뒤의 상태를 중유(中有) 혹은 중음신(中陰身)이라는 독특한 용어를 사용하여 묘사한다. 또 이때의 세상은 중음계라고 표현된다. 사자(死者)는 죽음신의 상태로 중음계를 떠돌아 다니며 자기 업에 맞는 다음 생의 부모를 찾아다닌다. 이 때 떠돌아 다니는 기간은 경에 따라 설이 다르기 때문에 일정치 않다. 짧게는 7일, 길게는 수십, 수백년이 되기도 한다. 한편 통속적 불교교리에 따르면 저승에는 명부(冥府, 즉 중음계)가 있어 여기에 염라왕을 포함한 칠(七)왕 혹은 시(十)왕이 주석하고 있으면서 죽어 들어오는 영혼을 생전의 업에 따라 심판하여 다음 생에서 받을 몸을 지정해준다고 한다.
바로 이 교리에 따른 건물이 대부분의 사찰에서 발견되는 명부전이다. 사실상 불교의 원래 교리에 충실하면, 죽은 자는 스스로 지은 바에 따라 다음 몸을 받지 외재자가 있어 심판과 명령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불필요한 교리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대중교화를 위한 방편으로서 다른 종교에서 차용해서 만들어 낸 속설이 아닌지 모르겠다. 어찌 됐든 불교도에게 있어 죽음은 다만 현신(現身)에서 중음신으로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죽은 자를 보낼 때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중음(신)계에서 제 갈 길을 제대로 찾게 해주고 다음 몸을 올바르게 받게 도와주는 일이다. 천도재 혹은 49재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고안된 것으로 중음신 상태에서 -즉 육체가 없는 좀 더 순수한 상태에서- 불교의 높은 법설을 잘 알아들을 수 있다는 가정아래 승려가 불교교리를 설해주는 것이 이 제사의 기본목적이다. 이때 꼭 언급되어야 할 책은 티벳불교도가 죽은 영혼의 천도를 위해 제시하는 ?사자(死者)의 서(書)?이다. 이 책은 죽은 뒤의 상태가 단계별로 잘 묘사되어 있어 죽은 영혼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각각 다르게 펼쳐지는 중음계의 세계에 잘 적응하여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도와주는 교육적인 의미를 가진 책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수준높은 불교철학이 거개의 우리나라의 보통불교도들이나 비불교도들의 일상적 생활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선 불교의 윤회설을 실제로 믿는 일반 국민들의 백분율을 보면 20%에 불과하고 불교도 가운데에도 그 비율은 30%에 그치고 있다. 한국갤럽조사연구소,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제2차 비교조사 (1989년), p.99.
이것은 이 땅에서의 역사가 1600년 이상된 불교전통의 유구성에 비한다면 그리 큰 수치는 아니다. 이 수치로만 본다면 불교의 생사관념이 한국인들의 생사관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기본적인 윤회설의 영향이 미미하다면 알라야식과 같은 불교의 수준높은 교리는 더 더욱이 설 자리가 약해진다. 사실 불교도들이 죽은 이를 위해 지내는 천도재나 49재도 불교의 윤회설에 입각해서 행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죽은이를 위로하는 유교의 제사와 크게 다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ㄴ) 유교적 이해
한국인의 생사관에 대한 철리적 이해 가운데 현재까지도 부분적이지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유교의 생사관일 것이다. 유교도 불교만큼이나 복잡한 생사관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 한국인의 제사나 장례의식에 영향을 미쳤던 이론은 대단히 간단하다. 여기서는 우선 전통적으로 유교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귀신관이나 혼백 등과 관련된 생사관에 대해 검토해보기로 한다.
앞에서 유교가 복잡한 생사관을 가졌다고 했지만 이것은 후대의 신유교에나 해당되는 말이지 원시유교와는 별 관계없는 이야기이다. 공자는 죽음이나 귀신에 대해 언급을 피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죽음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삶도 모르면서 죽음을 알려한다고 핀잔을 주었고 귀신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하는 제자의 질문에 살아있는 사람도 제대로 못섬기는 주제에 귀신 섬기는 걱정을 한다고 가볍게 질책하면서 항상 관심의 초점을 현실로 되돌리곤 했다. 공자가 죽음과 귀신에 대해 언급한 위의 발언은 ?논어? 권 11, 先進편에 나온다.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敢向死, 曰 未知生, 焉知死”. 그런가 하면 앎(知)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해서 공자는 귀신과 연관시켜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는데 이것도 참고가 될 만하다. “攀遲問知, 子曰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논어? 권 6, 雍也편)
그런가하면 유교의 죽음의례라 할 수 있는 제사에 대해서도 공자는 초월적인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은 발언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즉 제사를 지낼 때 귀신이 있는 것처럼만 하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祭如在 祭神如神在” (?논어? 八佾편)
이 뒤의 유교에서의 죽음에 대한 논의는 교조인 공자의 이 발언을 절대로 넘어서려 하지 않고 신유학의 복잡한 이론도 위의 교설을 합리화시키려는 방향에서 모든 구조가 짜여지게 된다.
귀신에 대한 동양의 고전적 해석에 의하면 원래 귀(鬼)는 돌아간다(歸)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설문(說文)?에서는 “사람이 돌아간 바 鬼가 된다(人所歸爲鬼)”라 하고 ?석언(釋言)?에서는 “귀라고 하는 것은 歸를 말하는 것이다(鬼之爲言歸也)”라고 한다. 유인희, “동양인의 영혼관” ?한국사상?, 16호, p.200에서 재인용.
그래서 옛사람들은 사인(死人)을 귀인(歸人)이라고 했다. 한편 신(神)은 신(伸)과 같은 것으로 펴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생겨남은 우주의 원기(元氣)가 음양의 법칙에 의해 응취하여 펴나오는 것(神, 伸)이고 죽음은 돌아가는 것(鬼, 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때의 신은 사람이나 자연이 펴나오게 되는, 헤아리기 어려운 신묘한 작용을 가리킬 뿐이지 천신과 같은 실체의 개념으로는 보지 않는다. 귀도 마찬가지로 돌아가서 수렴하는 것 뿐이지 그 뒤에도 생전의 정신체가 실체 개념으로 존속한다는 뜻이 아니다. 유인희, “인간적 문화에서의 영생”, ?죽음이란 무엇인가?, 창출판사, 1991, p.146.
귀신은 독립하는 실체가 아니라 두가지 기운으로서 변화하는 양태 혹은 작용을 이르는 것 뿐이다.
여기에 혼백개념과 정기신(精氣神)개념이 가미되어 신유가의 주밀한 인간론은 완성되게 된다. 이것을 간단하게 보면, 원래의 일기(一氣)가 음양으로 분화되면서 사람이 되는데 이때 처음에 생겨나는 기초물은 정(精)과 기(氣)이다. 다시 말해 음의 성질을 가진 정과 양의 성질을 가진 기가 합해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때 정은 “형체적 존재기”가 되고 기는 “유동적 생명기”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지각하는 기능이 없어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여기에 지각, 사려 등 정신작용을 나타내는 주체인 신(神)의 요소가 보태지면서 이성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두 결합체로 나타낼 때는 혼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혼백의 모습을 갖추어야 비로소 사람일 수 있게 하는 도덕성이 자라나게 된다. 다시 말해 사람은 기의 응취과정에서 생겨나는 정기신이나 그 결합체인 혼백으로 이루어지게 되고 이 상태로 일정기간 -즉 한 생애동안- 존속하다가 그 기운이 다하게 되면 양의 기운인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음의 기운인 백은 땅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것을 바로 죽음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죽음을 이와같이 일기에서 와서 다시 일기로 돌아가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개개물의 입장에서는 죽음이 있지만 일기의 측면에서는 단지 개체기가 모아졌다가 흩어지는 과정에 지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죽은 뒤 개체인(人)은 영원히 허공속으로 없어진다. 위의 논문, pp.152-154.
이것을 그림으로 간단하게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鬼 --> 精 ---------- 魄
一(元)氣 + 神 一氣
神 --> 氣 ---------- 魂
물론 유가들은 응취한 기가 흩어지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느리고 빠름이 있다고 인정한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죽으면 곧 일원기로 흩어지는 것이 보통의 경우이지만 예외적으로 원한에 맺혀 죽은 사람과 같은 경우는 바로 소멸되지 않고 그 신의 작용이 어느 일정기간 동안은 계속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에는 모두 흩어져 일기로 돌아가게 된다.
신유가는 이와같이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영혼불멸설을 시종되게 부정한다. 그러면 이렇게 한 인간을 생겨나게 하고 돌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유가에 의하면 이것은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理)라고 불리는 이치 혹은 스스로의 이치(自理)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우주의 궁극적인 존재를 인격화하는 데에 대한 거부의 표현으로 조물주 대신 원리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신유가의 이 생사관은 누구나 “본성적으로” 영생을 바라고 있고 이것을 종교적인 방법을 통해 성취하려고 하는 일반 인류들의 바람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영생하고 싶을텐데 삶에 대한 미련을 근저에서 부터 짤라버리는 성리학자들의 단호함과 철저함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교조인 공자의 현실중심적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하는 노력의 표현이 아닌지 모르겠다. 유가들은 죽음자체의 의미나 죽음 뒤의 또 다른 세계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고 그런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오히려 경멸하였다.
.. (유가들은) 삶과 죽음 때문에 앞뒤로 연장될 수 있다는 상념을 처음부터 단념하고 거의 일회적인 인생자체에 몰두하게 되었다. 공자가 한 것처럼 귀신과 죽음의 질문을 뿌리치면서 사람과 삶에의 정열적 관심과 사랑을 나타낸 것이 유가였다. 위의 논문, p.160.
이와같이 유가들은 이 삶속에 전념함으로써 죽음의 공포나 영원에 대한 꿈을 함께 묻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유가들은 보통 인류들처럼 영생에 대한 바램이 정말 없었을까? 만일 정말 없었다면 자손, 그것도 대를 이을 아들에게는 왜 그렇게 강한 집착을 보이며 자손들로 하여금 드리게 하는 제사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어떤 다른 의식보다도 중요시 하는 것일까? 필자의 견해로는 영생을 바라는 면에서는 결국 유가들도 예외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손(그중에서도 아들)으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고 죽은 자신들을 위해 제사지내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흔적을 이승에 남게 하는 간접적인 영생법을 갈구한 것 같다. 죽은 뒤에도 자신의 분신인 아들이 이 세상에 남게 되고 그 아들이 자신을 때때로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제사를 “받아 먹음으로써” 자신의 존재의 연장을 꾀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에 대해 유가들은 제사를 중요시하는 것이 자손들에게 효를 가르치기 위함이지 선조의 영혼이나 귀신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할 것이다. 다시말해 제사는 조상으로부터 존재나 존재원리가 나에게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그 “엄숙한 사실 자체에 대한 경건한 확인행위이다” 라고 주장할 것이다. 위의 논문, p.159.
아울러 공자도 귀신을 있는 것처럼 모시라고 했지 정말 귀신의 존재를 긍정한 것은 아니라고 덧붙일 것이다. 더 나아가서 정자(程子)는 귀신을 보았다는 것은 정신이 병들어 헛본 것이라 하면서 이것을 안병(眼病)이라고 부르면서까지 귀신의 존재를 극력 부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귀신이나 영생에 대한 부정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소단원에서 보게 되듯이 유가들의 제사의식에는 귀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면이 많이 눈에 띤다. 머리로는 -공자의 교설을 따라야 되기 때문에- 부정하지만 몸으로는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불교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가의 이 수준높은 생사관이 일상의 한국인의 생사관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일상적으로는 조상의 영을 굳이 혼백으로 나누어 보려고 하지도 않고 영이 일기로 화해 흩어져버려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 현실적 이해
유달리 이승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것으로 보이는 일상적 한국인들은 대체적으로 죽음을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한국인에게 죽음은 ‘이승에서의 해방’이나 ‘하늘나라의 부르심’이라기 보다는 ‘죄의 댓가’라든가 ‘원한의 결과’, ‘업력의 부족’ 등과 같이 좋지않은 이미지로 일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홍우 외, ?한국적 사고의 원형 -그 원천과 흐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94.
이러한 경향은 한국인의 원초적인 생사관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무교(巫敎)나 장례, 제사 등에서 강하게 엿보인다. 이 가운데에서도 무교적인 관습은 현재로서는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 영향이 아주 막대하지는 않다치더라도 한국인이 유사이래로 천착해왔던 장례나 제사의식에는 그 종교의 다르고 같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현실적인 생사관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ㄱ) 무교적 이해
기본적으로 무교에서 보는 죽음은 한스러운 것이다. 죽는 자에게는 죽음의 살이 끼어 있어 원한관계가 생기고 그 결과로 죽는 것이다. 위의 책, p.92.
이렇게 해서 죽은 영혼은 많은 경우에 저승에 곧장 들어가지 못하고 헤매게 되는데 그저 헤매는 것 뿐만 아니라 생전에 가졌던 한 혹은 원 때문에 살아있는 가족이나 친지를 괴롭히고 자신의 순탄한 천도를 위해 의례를 가져줄 것을 부탁한다고 한다. 따라서 무교에서 행하는 사령제의 주목적은 죽은 자를 잘 달래고 그 살을 풀어줘 저승에 안착하게 함으로써 후환이 없게 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영혼이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한국무교에서는 영혼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깃들어 있다는 생령(生靈)이고, 다른 하나는 사후에 저승으로 간다는 사령(死靈)이 그것인데 후자인 사령은 다시 조령(祖靈)과 원령(寃靈)으로 나뉘어진다. 우선 조령은 순탄하게 살다가 제대로 죽은 착한 영혼 [善靈]으로 별다른 원한이 없기 때문에 저승에 쉽게 안착이 되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에 원령은 하고 싶은 일을 못이루었다거나, 객사를 했다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거나 하는 등의 일로 생전에 품게 된 원한 때문에 이승에 대한 강한 집착이 생겨 저승으로 가지 못하게 된 영혼을 말하는데 이 때문에 무당의 중재로 천도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된다. 김태곤, ?한국무속연구?, 집문당 1981, pp.301-302.
그러면 무교에서는 죽은 뒤의 영혼들이 어디로 간다고 하는 것일까? 크게 보아 무교의 저승관은 그 자체로서는 희박한 것 같고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무교의 저승은 불교의 그것과 같이 지옥과 극락으로 크게 둘로 나뉘고 지옥은 다시 “칼산지옥”, “불산지옥”, “독사지옥” 등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위의 책, p.309
고유의 저승관념이 잘 발견되지 않는 것은 무교에서 뿐만 아니라 장제 혹은 민담과 같은 토속적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민담의 경우를 보면 ?황천기(黃泉記)?와 같은 민간설화에서도 우리민족 고유의 저승관이 아주 모호하고 대부분 불교의 저승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본다. 장덕순, “저승과 영혼”, ?한국사상의 원천?, 배명사, pp.178-180
이것은 우리민족이 저승보다는 이승적 현실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설화에서도 저승세계에 대한 구체적 묘사보다는 죽은 영혼이 육신을 도로 찾아 재생하는 환생모티프(motif)가 더 많이 발견된다. 이때 주인공은 이승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대단히 반기는데 이것 모두가 우리민족의 이승지향적 성향을 엿볼 수 있는 단서인 것이다. 위의 책, p.175
그런데 무교의 저승관에 대한 불교의 많은 영향에도 불구하고 양자간에는 적지않은 차이점이 발견된다. 우선 불교의 저승관은 철두철미하게 인과응보사상에 기초하고 있지만 무교의 경우는 죽은 영혼이 이승에서 닦은 공덕, 신앙 등은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고 그저 망자의 원을 풀어 저승으로 보내“버리는 데에” 더 관심을 두는 것 같다. 따라서 자연적인 결과로 불교에서는 사령제를 통해 죽은이의 명복을 빌고 보다 나은 다음 생을 받게끔 좋은 법문을 들려주는 데에 비해 무교는 망자를 어서 저승으로 보내어 살아있는 자손들에게 해를 안끼치게 하는데 주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홍우 외, p.109
이 외에도 불교는 왕생극락을 하기 위해서 신자들에게 이승에서 많은 수행과 선행을 요구하는 데 비해 무교에서는 망자가 살아있었을 때의 공덕보다는 죽은 뒤 타인, 특히 직계 가족들에 의해서(도) 왕생극락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면에서 그 차이를 찾아볼 수 있겠다. 위의 책, p.111
결론적으로 말해서 무교의 저승관은 망자중심이라기 보다는 생자중심이며 저승보다는 이승에 초점을 더 맞춘다는 면에서 현재와 삶을 더 중요시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무교에도 권선징악관에 토대를 둔 나름대로의 소박한 인과응보적 내세관이 있기는 하다. 진오기굿의 무가(巫歌)를 보면 효나 충, 화목과 같은 유교적 덕목을 제대로 실현했는가 혹은 거역했는가에 따라 극락행과 지옥행을 나누어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무교의 내세관은 무교의 추종자들에게 크게 영향을 준 것 같지는 않고 여전히 매우 현세지향적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무교에서 이승과 저승의 거리를 “모퉁이”를 돌아가는 정도로 생각하는 데에서도 익히 알 수 있다.
문상희, “무속신앙의 윤리문제”, ?한국교회와 신학의 과제?,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편, 연대출판부, 1985, pp.237-242를 참고로 했다.
ㄴ) 장제에 나타나는 죽음관
우리 민족의 생사관을 알아보려고 할 때 이 장제관이 매우 유용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우선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사실과 지금도 장지면적으로 일년에 여의도의 1.2배 되는 땅이 소용되고 있을 정도로 한국인이 이 장제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장제의 내용을 분석함에 있어 장례의 각 단계를 분석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 작은 논문에서는 모든 단계를 다 분석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가령 일례로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우리 민족의 장제관과 뗄래야 뗄 수 없는 풍수설이다. 장지를 정하는 과정에서 풍수설이 지대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한국인의 생사관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장제의 단계들만을 간추려서 보고자 한다.
사람이 죽었다고 단정을 내렸을 때 한국인이 전래적으로 가장 먼저 행했던 의식에는 고복(皐復)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임종을 지켜 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망자의 옷을 들고 마당에 나가거나 지붕에 올라가서 망자의 이름이나 관직명을 부르면서 “복(復)”이라고 세번 외치는 의식을 말한다. 그런데 이 의식의 배면에는 영혼이 자의적으로 육신을 떠난 것이 아니라 저승사자가 와서 강제로 데려가는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깔려있다. 임재해, ?전통상례?, 대원사, 빛깔있는 책들, 총서 101-16, 1990, p.22
앞으로의 설명도 대부분이 이 책의 내용을 따랐다.
그래서 돌아오라고 외치는 것이다. 이 강제구인의 양태를 상엿소리를 통해 보면 염라대왕의 명을 받은 저승사자들이 죽은 이를 쇠사슬로 묶고 밀고 당기며 쇠몽둥이를 사정없이 휘두르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때 생자들은 망자의 저승가는 길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저승사자를 잘 대접해야 하는데 이것을 위해 마련하는 것이 바로 사자상(혹은 사잣밥)이다. 이 상에는 보통 3인용분의 밥, 술, 돈, 짚신 등이 준비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간장을 놓는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사자들이 간장을 먹으면 물을 자꾸 마시게 되어 저승가는 길이 늦어지거나 물을 마시러 아예 되돌아올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죽음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할 수 없이 끌려간다는 인상이 짙다. 망자를 되돌려 오게 해 다시 살게 하면 가장 좋고 그것이 안되면 저승가는 길이라도 더디게 가게끔 저승사자를 매수하고 수를 쓰기까지 하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이승에 대한 집착이라 아니할 수 없다. 더욱이 부모로 하여금 이렇게 가기 싫은 저승길을 가게 만든 사태는 자손의 죄로 여겨진다. 다시말해 상주는 부모를 죽게 한 죄인이 된다. 따라서 행세를 죄인처럼 해야 한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맨발에 단도 제대로 꿰매지 않은 옷을 입어야 한다. 여기에는 죄인이라는 의미말고도 부모의 상을 당해 옷을 제대로 입을 경향이 없었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주검을 다루는 의례로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주검을 목욕시키고 수의를 입히는 습(襲)이다. 수의가 다 입혀질 무렵에는 저승까지의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 소위 반함(飯含)의례를 한다. 쌀을 물에 불려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세번에 걸쳐서 주검의 입에 넣는 것이 그것이다. 또 저승노자돈이라는 의미로 동전 3개를 가슴에 놓아주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도 저승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 하는 저승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죽어서 가는 곳을 막연하게 저승이라고 부른 것이다. 습이 끝나면 염(殮)을 하고 주검과의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입관(入官)식을 한다. 입관이 되면 더이상 망자의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가족들은 오열을 터뜨린다. 이렇게 해서 입관이 끝나면 그때부터 영혼은 따로 영을 모시는 자리, 즉 영좌(靈座)를 만들어 모시게 된다. 이때부터 발인까지 문상객을 치르는 등의 상가의 모든 일은 이 영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발인 전날 저녁에는 상두꾼 등을 중심으로 하는 빈상여 놀이판이 벌어져 슬퍼야 할 상가가 때아닌 축제판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이때 하는 빈상여놀이 가운데 최근까지 남아있는 것은 진도지방의 “다시래기”이다. 자세한 내용은 임재해, 위의 책, pp.46-58을 참조하라.
“상주를 웃겨야 문상을 잘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들의 놀이는 침울한 상가의 분위기와 전혀 다른 해학을 가져다 준다. 죽음을 새생명의 시작으로 보는 소박한 생사관의 반영이 아닌지 모르겠다.
발인날이 되면 마지막 제사인 발인제 혹은 영결제를 지내고 집을 나서게 된다. 이때 행렬의 주요 순서를 보면, 맨앞에는 죽은이의 이름을 쓴 명정을 들고 그 다음에는 망자의 영혼을 실은 영여(靈輿)가 뒤따르며 그뒤에는 만장(輓章) 등을 든 패거리가 있으며 그 다음에 오는 것이 상여와 그 가족 혹은 문상객 들이다. 이 장례 행렬에서 영여가 상여와 따로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우선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영여가 상여의 앞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영혼이 육신에 비해 우선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임재해, 위의 책, p.73
상여가 양택인 집에서 음택인 묘지로 가는 도중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상여소리이다. 상여소리 안에는 많은 내용이 담겨 있지만 그중에서 죽음에 관한 부분을 뽑아보면 여기에 나타나는 생사관에 대해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상엿소리에 대한 인용은 모두 임재해, 위의 책의 pp.82-84을 참고로 했다.
가령 “한번 아차 죽어지니 저승길이 분명하데이 대궐같은 집을 두고 나의 갈 길 찾아가네. 이제 가면 언제 오노 한번 오기 어려워라”와 같은 구절을 보면 이 좋은 현세를 두고 다시 돌아오고 싶어도 못오는 길을 떠난다는 내용으로 역시 죽음, 저승보다는 삶과 현세를 강력히 선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승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에도 “저승길이 멀다해도 문전 앞이 저승이데이”라고 하면서 이승과 저승사이의 거리를 부정하는 현세중심적 사고를 여전히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가까운 저승을 가는데도 저승사자가 와서 위협을 하며 한참을 데리고 가는 것처럼 묘사한다. “일직사자 월직사자 한 손에 창검들고 또 한 손에 철봉들고 쇠사슬을 비껴들고... 저승원문 다다르니 우두나찰 마두나찰 소리치며 달려들어...” 망자는 가기 싫은 길을 억지로 강요에 못이겨 가고 있는 것이다. 가능한 한 단 얼마라도 이승에 사는 게 더 좋다는 현세에 대한 강한 집착을 다시금 엿볼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상엿소리의 앞소리꾼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망자가 좋은 곳으로 갔으면 하는 일종의 천도굿 같은 소리도 잊지 않는다. “아들 손자 다 버리고 어느 곳으로 가실려오. 집안 걱정 다 잊었부고 영결종천 잘가시오. 옥황님전 가신 님아 슬퍼말고 고이 가오. 비나이다. 비나이다. 극락세계 가옵기를 고이 가소. 고이 가소. 극락세계 고이 가소”.
주검이 묘지에 도착하면 상여의 임무는 다 한 셈이다. 그런 까닭에 상여는 곧 해체되거나 불태워진다. 그러나 영여는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데 그것은 영혼을 다시 집으로 모시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묘지에서 관을 묻는 의식에도 매우 복잡한 절차가 있으나 본고의 주제와 직결되지도 않고 번거로운 관계로 생략하기로 한다. 하관식을 하고 흙으로 다 메우고 나면 상주는 망자의 혼백을 다시 집으로 모시고 돌아오는 일을 하는데 이것은 반혼(反魂)이라 불린다. 이것은 사람이 죽어도 곧 바로 저승으로 가는게 아니라 일종의 전이기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도 있다. 묘지에서 혼백을 반혼하여 -다시 영여에 태운 채로- 집으로 돌아오면 묘지까지 따라 갈 수 없어 집에 남아있던 여성들이 나와 맞이하면서 곡을 하는데 이것을 반곡(反哭)이라고 한다. 반곡하는 가운데 혼백은 빈소에 있는 영좌에 모셔진다. 가족들은 망자의 혼백을 이곳에 모셔놓고 죽은지 3년이 되는 해에 탈상할 때까지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밥상을 차리거나 들어오고, 나갈 때 고(告)하고 나가는 등 마치 망자가 살아있어 그 가족의 구성원인 것처럼 예우한다. 혼백이 영좌에 모셔지면 바로 3일 동안 삼우제(三虞祭)를 세번 지내는데 이것은 주검을 떠난 혼백이 방황할 것을 걱정해서 지내는 제사이다. 반혼하고 반곡하면서 혼백을 집에 잘 모셨는데 다시 혼백이 방황한다고 하니 일관성이 없지 않은가 하는 지적도 있지만 장덕순, 위의 논문, p.136
여기에는 혹시라도 묘지에서 집까지 반혼하는 과정에서 망자의 혼백이 길을 잃지는 않았을까 하는 자손들의 애틋한 마음이 작용한 것 아닌지 모르겠다. 이렇게 해서 3년째 되는 해에 대상(大祥)까지 치루고 나면 탈상을 하게 되고 그 이후 부터는 망자에 대한 의례는 끝나고 자손들 역시 상주의 제약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와 함께 망자는 온전히 저승에 통합되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일상적인 현실적 삶으로 되돌아 가게 된다. 임재해, p.102
장제를 이야기할 때 마지막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은 묘지의 선택과 관련된 풍수설이다. 풍수설에 대해서는 미신이다 아니다 하는 끊임없는 논란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이상할 정도로 강한 집착력을 이 설에 보여왔다. 풍수설은 이미 수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그 오랜 역사동안 수많은 종류의 풍수관련서적이 나와 그 이론이 번쇄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그 기본적인 신조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이희덕 교수에 의하면 “산수가 신비로운 생기를 내함하여 인간생활의 배후에서 길흉화복을 좌우한다고 믿고, 거기에 인간과 사령을 일치?조화시킴으로써 인간생활에 복리를 추구하려고 한 하나의 속신(俗信)”이 풍수사상이다. 이희덕, “풍수지리”, ?한국사상의 원천?, 배영사, p.182
따라서 풍수사상의 기본핵심은 자연을 죽은 것이 아닌 살아있는 것으로 보고 자연, 그중에서도 특히 땅의 생생한 기운 [生氣]을 인간의 것으로 하여 우리의 생활을 도모하려고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풍수설과 가장 관계있는 인간의 두가지 거처는 양기(陽基) 혹은 양택(陽宅)이라 불리는 생존시의 주거지와 음기(陰基) 혹은 음택(陰宅, 幽宅)이라 불리는 묘지이다. 그런데 근세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풍수설은 전자보다는 후자, 즉 묘지의 터를 잡는 데에만 편중되어 전개되었기 때문에 풍수설하면 으례 묘터 잡는 것으로만 연상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졌다.
풍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위 생기(生氣)를 “입는(乘)” 것이다. 같은 책, p.213
그런데 그 기운 가운데에서도 지상의 생기보다는 땅속의 생기를 거두어 모으는 것이 용이하다고 한다. 모으는 방법으로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죽은 조상의 골체(骨體)인데 여기에는 사람의 뼈에는 생기가 집약되어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죽은 뒤에라도 그 뼈에 깃들어있는 그 사람의 생기가 땅속에 흐르는 생기와 같은 기운으로 통해, 즉 이른바 동기감응(同氣感應)하여 그 땅속의 큰 기운이 다시금 동기를 나누고 있는 자손들에게 통하게끔 (親子感應) 해준다고 하는 것이 바로 풍수설의 바탕을 이룬다. 이때 이른바 명당을 찾는 것이 중요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대지도 인체와 같아서 그 기가 흐르는 기맥이 있고 기가 모이는 기혈이 있어 -인체에 침이나 뜸을 놓을 때에도 혈자리에 놓듯이- 혈자리에 묘지를 쓰면 그곳에 모여있는 가장 좋은 생기를 조상의 뼈를 통해 자신이 받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생기가 모이는 자리 즉 혈자리가 바로 명당인 것이다. 따라서 기를 쓰고 명당을 찾아서 부모의 시신을 모시고자 하는 자손들의 노력은 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자 하는 효도의 마음도 있겠지만 스스로의 복을 구하려고 했던 것이 더 큰 의도가 아니었겠는가 자문해본다. 물론 이러한 속설은 본래의 풍수사상과는 어긋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게 있다. 이것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와 그의 논문은 다음과 같다. 최창조, “인륜을 위주로 하는 지리학”, ?땅의 논리, 인간의 논리?, 민음사, 1992, pp.15-33.
그러나 대부분의 풍수설에 대한 믿음은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어 이 설을 통해 다시금 한국인의 현실 즉 이승에 대한 집착을 엿볼 수 있다. 죽어서도 저승에 대한 고려보다는 이 땅 어디에 묻히나에 더 강한 관심을 보이고 자손들도 조상의 혼백을 저승에 천도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 유골을 편안히 모시고 더 나아가서는 죽은 조상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 이 모두가 대단히 현세 이익중심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세 중심적 사고를 반영하는 것으로써 풍수설과 관련해서 많은 것을 인용할 수 있겠으나 비교적 흔한 이야기 가운데 다음의 것을 들고자 한다.
어느 자손의 꿈에 최근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꿈에 자주 나와 춥다고 하소연을 해 용하다는 사람과 상의했더니 그것은 묘를 잘못 쓴 때문이라 했다. 그래서 묘를 다시 파보니 할아버지 시신이 물에 둥둥 떠 있다는 것이다. 수맥이 지나가는 자리에 잘못 묘를 쓴 것이다. 다시 자리를 잡아 곧 이장을 하니 할아버지는 더이상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그 자손의 종교에 관계없이 종종 듣는 이야기로 다른 민족들에게서도 발견되는 이야기인지 궁금하다. 죽은 영혼마저 생전의 자신의 유골에 대해 갖는 강한 관심은 한국인 특유의 생사관을 결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ㄷ) 제사에 나타나는 생사관
장례는 아주 드물게 일어나며 한 두번에 끝나는 것이라면 한국인들이 죽음과 자연스럽게 더 자주 만나는 경우는 아마도 제사에서 일것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사대부 집안의 조상제사가 연간 40회를 상회한다고 하니 -보통 상민의 경우는 그보다 적다하더라도- 당시의 삶은 철저하게 유교적인 것으로 제사를 중심으로 한 삶이 되는 셈이라 하겠다. 최기복, “유교의 음복” ?종교신학연구? 제3집 (1990), 서강대학교 종교신학연구소, p.171. 이 이후의 제사에 대한 설명은 최기복 신부의 위의 논문을 주로 참고로 했다.
물론 제사는 유교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제사는 신령한 존재와의 합일 혹은 원만한 관계를 위해 그 존재에 공경을 표하는 것으로 그 기원이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인데 인류사회에서는 대단히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민족도 예외는 아니어서 옛부터 제사를 통해 조상을 섬겨왔지만 그 표현의 틀은 유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 체계화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유교식의 조상숭배가 마치 국교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최기복, “천주교신앙과 제사의 의미”, ?기독교와 관혼상제?, 전망사, 1984, p.82
따라서 제사의식은 그 영향의 강도나 기간의 면에서 볼 때 한국인의 생사관을 형성하는 데에 대단히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볼 때 유교의 제사의식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몸과 마음을 재계(齋戒)하고 제물을 준비하는 준비단계가 있고 두번째로는 신령을 맞아들여서(迎神) 음식과 술을 올리는 단계(奉獻)가 있으며 세번째는 신령께 올린 술과 음식을 -강복(降福)의 표시로- 받아먹고(飮福) 작별하는(送神) 의식이 되며 마지막 단계에서는 조상신령에 대한 의식을 끝내고 그 남은 음식을 같이 제사지낸 사람들과 나눌 뿐만 아니라 이웃사람하고도 나누어 먹는 순서(飮福宴)로 끝을 낸다. 조선조에 걸쳐서 이와같은 과정으로 진행되던 유교의 제사의식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었으나 현재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종묘제사와 공자에게 올리는 석전(釋奠)과 단순한 조상제사 뿐이다. 여기에서는 조상제사에 대해서만 보기로 한다. 많은 종류의 유교의 제사의식에 대한 것은 최기복, “유교의 음복”, ?종교신학연구? 제3집, pp.192-201에 도표형식으로 상세하게 잘 설명되어 있다.
이 조상의례는 앞에서 언급된 대로 그 틀이나 기본이념이 유교식으로 되어 있는 것을 곧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교, 그중에서도 특히 성리학자들이 제시한 이론에 충실한 것만은 아니다.
첫번째 단계인 재물준비와 재계에는 그다지 언급할 거리들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때 계(戒)는 외적으로 삼가는 것을 말하는데 몸을 닦고, 술과 마늘을 먹지 않으며, 동침이나 문상을 하지 않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되는 반면 재(齋)는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삼가며 제사올릴 신령만을 생각하는 내적인 준비를 말한다. 이것은 제사자로 하여금 신령의 임재를 절실하게 느껴 신령이 “마치 위에 계신 듯 좌우에 계신 듯” ?中庸? 16장, “使天下之人 齊明感服 以承祭祀 洋洋乎 如在其左右” 혹은 ?논어? “八佾” 12, “祭如在, 祭神如神在”를 참조.
하게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준비가 끝나면 신령을 맞아들이는 두번째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이때 우선 주목을 끄는 것은 신위를 모시는 것이다. 요즈음은 약식으로 종이에 써서 대신하기도 하지만 원래는 나무로 정성스레 만들었다. 이 위패를 해석하는 데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단지 상징적으로 해석해 단지 신상(神像)으로만 보는 것과 신령이 직접 거처할 수 있는 빙의처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지금은 -제사를 끝내고 지방(紙榜)을 태우는 것으로 보건대- 전자의 경우가 우세한 것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신령이 직접 강림하는 곳이 바로 위패라고 여겼고 더나아가서는 조상 그 자체로까지 여겼던 것 같다. 위패를 조상 자체로 생각한 경우는 출처는 분명치 않지만 전해내려오는 다음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경상도 어느지방 민가에서 있었던 일로 3년 탈상이 아직 안돼 위패를 모시고 있었는데 그 방에 불이 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방에는 마침 시어머니가 자고 있었는데 며느리가 너무도 황급해 둘은 다 건질 수 없게 되자 그녀가 선택해 구출한 것은 조상의 위패뿐이었다. 이에 관아에서는 그녀를 시어머니를 죽게 한 죄인이기 보다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위패를 구출했다는 의미에서 효녀표창을 했다고 한다.
가령 위패를 취급할 때의 그 정성어림과 조심성도 그렇고 위패에 신이 들어오고 나갈 수 있는 구멍을 뚫은 예를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Roger L. Janelli 외, ?Ancestor Worship and Korean Society?,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1982, p.94
신을 모시는 형태는 대체적으로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우선 향을 피움으로써 혼을 모셔오고 곧 이어서 술을 땅에 부움으로써 백을 모셔들여 흩어졌던 이 둘을 원래대로 다시 합일시킨다. 이렇게 해서 조상이 돌아오면 참가자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절을 올리고 조상령들에게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바친다. 재물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술이기 때문에 이 때의 봉헌은 술을 중심으로 -세번 바치는 등- 이루어 진다. 봉헌 다음순서로는 자손들의 추모의 정이 담긴 축문(祝文)을 읽게 되는데 그 내용은 주로 감사의 마음으로 올린 음식들을 드시라는(흠향) 간청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곧 조상령들이 음식을 들 수 있는 여유를 주기 위한 순서를 갖는데 원래는 문을 닫고 잠시 나갔다 들어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요즈음은 엎드린 상태로(부복) 머리를 조아리는 것으로 간략하게 대신하기도 한다. 어떻든 여기에는 신령이 직접 음식을 들 것이라는 간절한 바람이 있고 동시에 이에 대한 확신이 깃들어있다 하겠다.
세번째 단계가 되면 자손의 정성을 받은 조상이 복을 내리는 의식을 한다. 이때 보통 축관이 조상을 대신해서 제관에게 조상의 복이 담긴 밥과 술을 전하면서 농사를 잘 짓고 장수하라는 등의 좋은 덕담을 같이 전해준다. 그러면 제관은 꿇어 앉아서 밥은 조금만 먹고 술은 다 받아 마신 다음 감사의 표시로 절을 한다. 이와같은 음복례가 끝나면 조상을 보내는 작별인사를 하는데 조상제사의 경우 간단하게 축문을 태움으로써 이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것으로써 제사의 순서는 모두 끝나게 되는데 차린 것은 우선 모두 거두어 가고 위패가 있을 경우에는 원래의 장소로 다시 위패를 모셔가면 조상과의 만남의 의례는 완전히 끝나게 된다. 다음 단계로는 이 음식과 술을 참가한 모든 자손들이 음복하는 순서가 이어진다. 나이순대로 술을 서로 권하면서 어른께는 축원을 올리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재물과 복의 이같은 나눔은 집안에서만 끝나지 않고 친구나 이웃들에게도 연장된다. 나라의 큰 제사같은 경우에는 왕으로부터 문무백관 등의 대표자들은 음복에 참가하고 재물이나 선물은 병졸?문지기에게까지 전달하며 죄수의 사면까지 단행하는 등 유교의 이상이기도한 대동(大同)세계의 실현을 위한 큰 잔치가 바로 제사가 되는 것이다. 조상제사의 경우에도 일정한 공동체가 항상 재물과 복을 서로 나눔으로써 제사를 종결시킨다.
제사의 전체과정에서 유교의 영향을 살펴보면 으레 조상제사는 유교식이다 라는 통념과는 달리 그 영향이 그리 많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더 나아가서는 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상치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위에서 본 과정중에 명백하게 유교의 영향으로 보이는 것은 조상령을 모실 때 향을 피우고 술을 땅에 부음으로써 흩어져 있던 혼백을 다시 불러 합치는 것에서이다. 이것은 인간을 혼과 백, 양 요소로 구성된 존재로 파악하는 유학자(성리학자)들의 주장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외의 과정은 유교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적인 모습이라기 보다는 -아프리카나 다른 부족적 공동체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아프리카인들의 생사관이나 조상관에 대해서는 참고할 수 있는 좋은 책이 있다. 존 S. 음비티 (정진홍 역), ?아프리카 종교와 철학? (현대사상사, 1979)이 그것으로 특히 제8장인 “영적존재?영?살아있는 - 사자” (pp.148-177)를 참조할 것.
- 인류보편적인 종교심에서 나온 조상숭배의 모습과 과히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 제사의식에 일관되는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조상령이 어디에서부터인가 와서 제사과정동안 계속 더불어 있다가 다시 돌아간다는 조상령의 실재에 대한 확신이다. 이것은 성리학자들이 그렇게 강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이 있는 것처럼 할 뿐이지 조상령이 정말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과는 강한 대치를 보인다. 유학전공자들은 많은 경우에 공자의 말에서 벗어나기 싫어서였던지 주6)을 참조할 것.
혹은 이성(rationality)을 너무 강조해서 영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를 믿는 것은 우매한 백성들이나 하는 덜떨어진 신앙행위로 폄하해서 그랬든지 종교학자들이 제사의 종교성, 즉 제사에서는 영의 실재성을 받아들인다는 주장을 할 때마다 강한 반대주장을 해왔다. 그러나 그들의 형이상학적인 주장이 어떻든 일반적 제사의 모습은 조상령의 존재를 시종 인정하고 있다. 민담 가운데에는 오히려 (조상령의 실재를 부정하는 성리학적인) 이전 주장에 물들은 선비가 우연히 한 상민의 집에서 조상의 영을 정말 살아있는 것처럼 모시는 제사의식을 보고 자신이 지켜왔던 현학적이고 공허한 제사 순서를 뉘우치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장덕순, “저승과 영혼”, ?한국사상의 원천?, pp.138-141에 잘 나와있다.
이렇듯 한국인들은 조상령이 제사지내는 바로 이 자리에 현존한다는 데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조상령이 어디에 어떻게 있다가 제사자리에 오는지 아무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이때 조상들은 대체로 둘로 나누어 모시는데 4대까지는 따로 모시다가 5대 이후의 조상들은 함께 모시게 된다. 이와 비슷한 조상관이 아프리카에서도 발견된다. 아프리카에서는 -특히 스와힐리족의 경우- 보통 5대조까지를 “사사(sasa)”라고 해서 현재의 시간에 포함시키면서 ‘살아있는 사자’라 부르고 5대 이후는 “자마니(zamani)”라고 해서 완전히 잊혀져 버리는 과거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시간의 지평너머로 침잠해버리는 영의 존재로 전이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음비티, 앞의 책, pp.52-54, pp.163-167.
풀어 설명한다면 4대까지는 기억해주는 후손들이 있어 살아있는 자들의 공동체에 포함되지만 5대 이상이 되면 산자들에게 보다는 죽은자들 쪽에 가깝게 되어 전자의 경우는 따로따로 기억해 각각을 위한 제사를 지내지만 그 이후는 한데 묶어 제사를 지내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조상령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은 없다. 어떤 때는 무덤에 있는 것 같아 무덤앞에서 제사지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신주에 있다고 생각해 집에서 제사드리기도 하는 등 일관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단히 현세적인 한국인의 모습을 다시금 발견한다. 조상령들의 거주처가 분명하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정확하게 하려는 의지나 관심도 갖고 있지 않다. 조상들은 어딘가에 있는 것이고 4대까지는 기일이 되면 불러낼 때 어딘가에서 와서 산자들의 공동체에 “살아있는 사자(死者)”로서 참여하게 되고 살아있는 자손들은 다시금 그 뿌리됨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5대 이후의 조상들도 마찬가지라 한국인들은 그 높은 대의 조상령들이 어디에 어떻게 있다가 시제(時祭)를 드릴 때 오시는지에 대해 아무런 개념이 없다.
이제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생사관의 전통적 이해에 대한 긴 설명을 마치면서 한국인의 저승관을 요약하는 것으로 마치고자 한다. 이 요약은 정진홍 교수의 설명을 따랐다. 정진홍 “이승과 저승: 한국인의 종교적 공간관의 모색”, ?한국종교문화의 전개?, 집문당, 1986, p.108
우선 저승이 묘사될 때는 -무교나 민간신앙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하늘, 바다, 땅, 산 등과 같은 자연의 장소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죽음을 일단 삶과 분리된 것으로 보긴 하지만 망자가 가는 저승은 이 이승과 완전히 다른 혹은 초월적인 세계로 보지는 않는다. 즉 저승은 그저 죽으면 누구나 가는 곳이며 이승과도 왕래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김태곤 교수는 한국인의 저승관이 나타나는 속성을 未分性, 循環性, 持績性이라고 지칭했다. ?한국무속연구?, pp.482-495.
따로 어느 곳에 존재하는 특정한 공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어떤 때는 모퉁이만 돌면, 어떤 때는 문턱 밖에만 나가면 저승이 된다. 따라서 그 저승에 대한 묘사도 대단히 희박하다. 한국인들의 관심은 오로지 이 현세에만 향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