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두뇌는
몸 전체의 세포 집단의 총합 지령실이며, 통제실입니다.
기억실은,
대뇌피질의 신경조직에 흐르는
일체의 전기적인 파동 입자에 의해 성립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발신된 진동의 에너지는,
의식으로 전달되어 기록됩니다.
" 우리의 모든 것은 뇌 내부에 기록되어 있다."
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틀린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뇌가,
일체의 기억장치를 가지고,
생각하는 에너지를 발신하는 장소라고 생각한다면,
자고 있을 때에, 생각하거나, 보고 듣는 것은 할 수 없을 터이다.
우리가 자고 있어도,
뇌파의 진동이 발신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의식과의 접촉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며,
영자선이 끊어져 의식이 돌아오지 않을 때에는,
뇌파의 진동은 정지되고, 육체는 광자체와 분리되어,
저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 < 죽음 >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뇌파의 진동수도,
오관을 통해서 뇌 내에 통하고,
그 발신 진동에 의해, 의식에 보고되는 것인데,
수면 중에 진동수가 다른 것은, 이처럼 짜여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세는, 육체 세포에서는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본에만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 조건이 다른 모든 세계의 나라들에 자신이 희망하여,
전생 윤회하고 있는 생명임을 알아야 하며,
육체적 선조가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여기에 잘못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생명은 양친으로부터라고 생각한다면,
왜 부모 자식 간에 부조화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왜 성격이 다른가.
왜 사고방식이 다른가,
이것에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멘델의 유전 법칙은, 육체 유전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뇌세포는 약 200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억의 도로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기억 뇌세포를 주장한다면,
우리의 교신의 실험을 보여주겠습니다.
우리 영도자(靈導者)는,
모든 차원이 다른 세계와의 교신이 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올바른 신리의 실천 생활 속에서,
정(定=반성 참선)에 드는 것에 의해,
우리는, 몸이 우주대로 확대되어,
신불의 의식과 조화되어, 마음의 평안을 맛보는 것이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은, 상념의 정지에 의해 깨달음을 열었다고 합니다.
만생만물 일체의 현상은,
한 순간도 정지하는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상념 정지의 순간에 동물령에게 지배되어,
< 나는 신이다 >라고 하는 위선자도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본인은 항상 병약하고,
또 물욕의 염(念)을 버리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병약(病弱)의 원인을, 신자의 업(業)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는데,
사실은, 어두운 상념에 의해 빙의령에게 빙의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산중에 들어가 수행했다고 칭하는 자가,
훌륭한 수행자처럼 생각되기 쉬운데, 이것은 반대입니다.
폭포를 맞는다고 해서, 번뇌는 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 수행의 고통에, 의식과 육체가 조화되지 못하고,
그 순간에 주로 동물령에게 지배되어,
그 변화를 보기도 하고 영청을 들었다고도 하는데,
그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선인계(仙人界)나, 천구계(天狗界)의 사람들에게 많은 수행법인데,
이러한 사람들은 자아가 강하고, 자비심도 없고,
본인이 항상 부조화로서 평안함이 없는 자들이며,
깨달음에는 먼 사람들입니다.
신비의 술(術)에 통하고 있는 술사에는,
이러한 동물령에게 지배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올바른 정(定)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정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겸허합니다.
뽐내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일체의 현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올바르게 팔정도를 실천하며,
삼세(三世)를 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산 중에 들어가 수행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직업에 전념하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 육체의 배를 가진 것입니다.
인도의 고타마도,
육 년 간의 산중의 수행에서는 결국 깨닫는 것이 없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예수도 어릴 때,
산 중에 들어갔지만, 거의 육체적 고행은 하지 않았습니다.
신리를 깨닫지 못하고,
참선을 해도, 그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리를 깨달은 실천 생활 속에서의 육체적인 산중 수행 등,
스포츠로서라면 좋습니다.
그렇지만, 깨달음은, 형식이나 논리가 아닙니다.
형식이나, 이론만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아직 깨달음의 일보도 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올바른 정(定)이란,
신리의 깨달음과, 올바른 상념과 행위 속에 성취하는 것입니다.
학문 불교에도, 형식 불교에도, 관광 불교에도, 또 장례 불교에도,
깨달음을 얻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도 시대에 설한 고타마의 불교에 의해서만이,
깨달음으로의 길은 열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시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신리로 돌아가는 것이,
현대사회의 사람들에게,
진정한 마음의 존엄을 알게 해주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기 자신의 깨달음을, < 여심(如心) > 이라고 말합니다.
팔정도는,
자기 자신의 깨달음이며,
인간은 최저,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태어난 것입니다.
정법은 한 국가에만 통하는 것이 아니고,
전 우주의 신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도, 그리스도교도,
고타마의 시대, 예수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선결입니다.
신리는, 시대에 구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문명은 생활의 지혜이며,
보다 높은 차원으로 마음을 갖는 것이,
만물의 영장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 가장 큰 문제인 학문 불교.
흔히 하는 말 중에 ' 나는 무엇인가 '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 이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신(神)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짧은 인생에서 알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비유하자면, 전기는 무엇인가, 라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현대 과학의 시대에도 전기는 무엇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전기의 성질,
전기의 법칙을 하나씩 알아내는 정도이지요.
우리가 사는 짧은 세월은, 신(神)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시간이다.
부처님의 독화살의 비유가 딱 들어맞는 것이지요.
태어나는 순간 맞아버린 독화살,
독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왜 쏘았는지, 독은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짧은 시간이다.
삶의 한시적인 시간, 죽음이 예고되어 있는 모든 생명들. . . . .
부처님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같이
전기의 고마움을 알고 고맙게 사용하라.
그리고 나아가서 그 고마움을 표현하라.
안 이 비 설 신,
색 수 상 행 식,
그런 이론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하지만 감사함을 모르면,
마음에 괴로움과 욕심이 생기고,
감사함의 비율이 10%이면, 나머지 90%만큼 ,,, 욕심이 생기겠지요
감사함의 비율을 1%씩 올리도록 노력하는 것이
살아가는 동안의 수행이라고 하겠지요.
쉽게 수행하는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쉽게 한다고 하는데서 마음의 마(魔)가 낍니다.
반성을 쉽게 하는 방법,
그것은 없습니다.
하루 24 시간 생활하는 가운데에서 반성을 하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순간순간마다의 잡념들이 나를 괴롭힙니다.
그것은 반성의 재료로서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야겠습니다.
실제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잡념에 휘둘리고 있지만,
그래도 지나고 나서 생각나는 것은
수호령, 지도령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잡념의 그 순간순간마다 원인 분석을 하여 반복하지 말라는 가르침...
오사카에서 운영국장 고다니씨에게 물었습니다.
아무리 반성을 해도 모르겠다고,,.. 돌아 온 대답은,
그래도 계속하면, 수호령 지도령이 해답을 주니까
계속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 자신이 해답을 찾는 것은 어렵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가슴이 울컥하면서, 눈물이 쏟아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