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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
진불암의 한라봉과 「봄날」의 길
이은선
「봄날」은 어디까지 걸어봤을까. 「봄날」이 짚어보지 않은 곳은 또 어디일까. 해남 대흥사의 진입로에 들어선 순간, 아니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줄곧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질문이었다. 두륜산 대흥사 진입로에서 일주문까지의 1.4km를 삼십오 분에 걸쳐 걸으며 나는 그 옛날에 「봄날」이 걸어봤음직한 곳을 살펴보았다. 이 길은 내가 학부 생이던 때에 문학기행의 명목으로 2박 3일 간, 다시 문학예술기행이란 과목의 일환으로 3박 4일 간 다녀간 적이 있었다. 그 뒤 개인적인 여행으로 한 번, 이번에는 「봄날」에게 부탁해 먹고 잘 곳을 정하고 온 셈이니 나로서는 꽤나 익숙한 길목이기도 한 셈이었다. 우르르 몰려와서 밥 때만 기다리며 허송세월하던 단체 여행과는 다른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봄날」의 여정을 짚어볼 수 있는 기회라 여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설 한 편 제대로 완성하고, 도스트예프스키의 저작을 독파하고자 갓 나온 ‘열린책들’ 출판사 판형의 도스트예프스키 전집을 모조리 싸들고 온 참이었다. 경기도 수원에서 전라남도 목포까지 기차를 탔고, 목포에서 또 한 번 버스로 갈아타고 나서야 해남 두륜산 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취방을 떠나오던 때의 비장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대체 왜 이 책들을 다 가져온 것인가에서 부터 이것들을 다 읽을 수는 있을까, ‘열린책들’은 왜 도스트예프스키 전집을 내서, 아니 대흥사에 왜 하필이면 도스트예프스키지? 그 사람이야 뭐 빚 때문에 감옥에서 저런 걸작들을 썼다는데, 「봄날」은 오 월의 그 일이 있고 나서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마음으로 도망치듯이 두륜산에 은거했다는데, 나는 빚도 없고 인생을 뒤흔들만한 아픈 일도 없는데 왜 내 발로 이런 첩첩산중에 들어온 거지? 나는 누가 가져오라고 했다면 당장에라도 계급장 떼고 싸움 한 번 하자고 들러붙을 기세로 가져온 짐들을 부려놓았다. 길가에 놓인 간이 탁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이곳에 오고야 만 핵심적인 이유와 더 나아가 나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인 자문에 이상한 자답을 달면서 진불암의 주지스님을 기다렸다. 구정 설 연휴가 막 지난 한겨울이었다. 간이 탁자에 오종종하게 으레 모여 있을 법한 상인이나 이런 저런 주전부리, 뜨겁게 데운 술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곳이 간이 상점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빈 의자와 탁자만이 스스로 장소 증명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얼마 전에 내린 눈이 아예 얼음이 되어있는 탁자였다. 할 수만 있다면 전대로 뱃살을 가리고 앉아 있던 상인이 되어 불이라도 쬐고 싶었고, 상인의 불이 없다면 가지고 간 도스트예프스키 전집이라도 한 장 한 장-마음을 태우는 심정으로- 뜯어서 불쏘시개로 쓰고 싶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시험 끝나고 마시던 생맥주 거품처럼 내 몸이 간이탁자 위에서 톡 튀어 올랐다.
스님은 새벽까지 이어진 천도제 때문에 피곤해서 늦잠을 잤다고 했다. 스님이라면, 게다가 깊은 산중의 도력 깊은 분이라면 당연히 잠도 없고, 기다림과 배고픔에 지친 중생을 위해 내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시간을 예지하여 홀연히 이곳에 나타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삐뚫어진 마음이 들었다. 춥고 배가 고팠던 까닭이었다. 여섯 시간 가까이 기차와 버스를 타고 온 뒤였다. 피곤한 몸만 있다면야 터덜터덜 걸어서 절이 있는 곳까지는 올라갈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여기까지 짊어지고 온 것들을 내려다보았다. 소설을 쓰겠다고 보무도 당당하게 떠나온 스물세 살 여자 아이의 짐이었다. 3kg은 족히 넘는 노트북에 도스트예프스키 전집, 소설 『봄날』 다섯 권과 두터운 겨울옷들을 챙긴 커다란 가방, 절에 있을 리 만무한 미용실용 헤어드라이어와 롤빗, 게다가 절간에 가면 먹을 게 없을지 몰라 사온 먹을거리까지 합하면 자그마치 가방만 다섯 개였다. 출발할 때 이미 이고 지고 다닐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지만, 중생의 먹을거리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 해남 터미널 슈퍼에서 욕심껏 큰 봉지 두 개를 본래의 짐 위에 덧댄 결과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스님은 오지 않았고, 간간이 여행객으로 보이는 사람들만이 짙은 매연을 산중에 흩뿌리며 내 곁을 스쳐갈 뿐이었다. 나는 대체 어쩌자고 여기까지 온 것일까. 떠나온 지 반나절 만에 옹색하기 그지없는 나의 자취방이 그리워졌다. 「봄날」은 일이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내가 지난번에 과제 늦게 내서? 술자리에서 선생님 소설 너무 우울하다고 건방지게 대들어서? 얼마 전 ‘선생님이 여기 보내주기만 하면 열심히 소설 쓰겠다’고 큰소리 쳤던 내 목소리는 이미 전생의 일인 것 마냥 아득하게 느껴졌다. 「봄날」과 통화를 하던 때의 그 목소리가 내 몸에서 나온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으므로, 혹시 꿈이 아닌가까지 생각했을 즈음에 스님의 차가 내가 앉아 있는 간이 탁자 옆으로 굴러왔다. 방한모에 두터운 누비옷을 입은 스님은 짐 속에 파묻혀 있는 여자애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때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봤다는 사실을 스님은 알았을까.
짐을 차에 차곡차곡 옮겨 싣는 것만으로도 다시 시간이 걸렸다. 뭘 좀 먹었느냐는 질문에 곧 울음이라도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심하게 도리질을 치는 나를 스님은 한심한 눈길로 바라봤다. 어딘가로 차를 몰고 가던 스님은 도무지 장사를 할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길가의 상점에 문을 열고 들어가 어린 아이 팔뚝만 한 옥수수 한 자루를 내게 가져다주며 얼른 먹으라고 채근했다. 차 안에는 스님이 틀어놓은 금강경의 독경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와 내가 옥수수 먹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진불암 생활이었다.
아침 일곱 시가 되면 스님은 ‘아침 공양 하자’며 나를 깨웠다. 내 방 밖에서 “보살아, 고만 일어나거라잉!” 큰 소리로 외치는 식이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모닝콜 삼아 채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방 밖으로 나왔다. 일어나긴 했지만 정신 차리려면 아직은 먼 것 같은 내 꼴을 본 스님이 뜨거운 물을 한 대야 내 발치께에 가져다주면 그것으로 대충 얼굴을 씻고 부엌으로 가서 스님과 사미승이 먹을 음식을 공양주 보살님과 함께 차려냈다-차려냈다, 는 말은 좀 거창하고, ‘수저와 물그릇을 놓는 것만을 도왔다’가 옳겠다. 아무 일 없이 고요할 것이라고만 생각한 절 생활은 생각만큼 녹록치 않았다. 산중의 절이니 찾아오는 이 없을 것이라고도 생각한 것도 오산이었다. 기도를 하려는 사람, 스님에게 시주를 하기 위해 비무장지대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열혈 신도, 어머니의 49제를 부탁하려는 효성 깊은 아들들과 등산복으로 중무장 하고 시시각각으로 절을 찾는 여행객들, 책을 읽으려고 할 때마다 또각또각 들려오던 스님의 목탁소리-간혹 목탁을 치면서 기도를 하는지, 졸고 계시는지 몰라 내가 유심히 살핀 적도 있다-까지! 절에서 사는 일이 평온한 행자의 삶이라고 누가 그랬는지 알 수만 있다면 찾아가서 그의 삶과 대조라도 하고 싶었다. 손님이 다녀가면 그 뒤처리는 고스란히 나의 몫이었다. 용무도 다양한 손님은 끊이지 않았고, 설거지만 하다가 하루를 다 보낸 적도 많았다. 소설은, 아니 도스트예프스키는, 그보다 소설 『봄날』의 다섯 권은 언제 다 읽지? 그러는 동안에도 해남 터미널에서 사온 중생의 먹을거리들은 착실하게 비워져나갔다. 그 중생이 바로 나였으므로, 절에 들어가서 살면 살이 좀 빠질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했던 마음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스님은 며칠이 지나도 얼굴의 붓기가 빠지지 않는 나의 건강 상태를 염려하며 앞으로는 생고구마만 먹으라 권했다. 고구마를 먹는 일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았으므로, 흔쾌히 스님과 약속을 했다. 내 방에 남아있는 중생의 먹거리들은 그날 천도제를 지내러 왔던 사람들 틈에 끼어 있던 아이들에게 모두 나눠주었다. 절에 왔으니 절 법을 따라야지 않겠느냐는 심정으로 그 아이들이 달라는 대로 초콜렛과 사탕, 컵라면 등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무소유의 삶이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싶었지만 솔직히 아까운 마음도 있었다. 그날부터 공양주 보살님이 내 방으로 생고구마와 과도가 담긴 쟁반을 들여놓았고, 나는 꼼짝없이 염장된 야채가 놓인 반찬들과 생고구마만 먹었다. 그곳에 있는 모두들 그렇게 먹고 있다 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먹거리의 욕망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나는 속세의 것을 끊을 수 있으리라 믿었고, 처음 얼마간은 실제로 머리가 맑아지는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한밤중에 소설 『봄날』이나 도스트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다가 배가 고프면 생고구마를 깎아 먹었고, 몇 줄의 소설을 쓰다가 잠들었다. 그렇게 두어 편쯤 소설을 썼을 때, 나는 진불암을 벗어나 대흥사 쪽으로 혼자 내려와도 무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봄날」의 행적을 되짚어갈 수 있는 셈이었지만 그것이 늦은 것인지, 빠른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진불암에서 대흥사까지 내려와 거리에 있는 주점에서 녹두빈대떡을 사먹고 돌아가는 재미는 무척 쏠쏠했다. 동동주까지 마시면 스님한테 혼날 것 같아서 착실하게 빈대떡에 있는 고기만 골라 먹고 가기도 했다. 포만감 가득한 얼굴로 주점을 나와서야 「봄날」이 걸었음 직한 길을 찾아 걸었다.
스님의 다비식이 열리던 자리, 문학예술기행 시절에 「봄날」이 열 손가락을 쫙 펴고 손가락 사이사이로 바람을 느끼며 걸으라고 했던 그 길, 이것저것 보여주고 싶은 것은 참 많은데 학생들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 화가 난 「봄날」이 홀로 사라져 몸을 숨기고 있던 전나무-그 큰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줄 모르고 선생님 없어졌다며 혼비백산해서 찾으러 다니던 그 길, 나무와도 교감을 해보라며 각자 나무 한 그루씩 껴안고 한참을 앉아 있던 자리, ‘5.18’ 그 일이 일어났을 적에 피신해 왔던 사람들에게 대흥사 밑에 살던 주민들이 주먹밥을 해서 먹였다던 야외 부엌, 그 일로 친구를 모두 잃고 보름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던 「봄날」이 ‘그날’을 소설로 쓰겠다고 다짐했던 그 시간…. 나로서는 말로만 듣고 책으로 읽거나 티비로만 보았던 그날의 일들을 고스란히 되짚어가는 일들이었다. 다시 정확하게 말하자면, 광주의 오 월을 온 몸으로 겪고 영혼이 상한 「봄날」이 몸과 마음을 누일 곳을 찾아 들어왔던 그 겨울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공감하려던 시간이었다.
“철우가잉, 갸가, 여 와서 지냈어. 갸는 쩌어짝 집에 살았지잉. 나가 짠지도 쪼까 나눠주고, 울 아덜이 철우 친구여.”
탱화 무형문화재인 고스님댁 할머니의 말이었다. 학과 수업 시간에 「봄날」은 종종 그때를 회상하곤 했다. 무릎이 꺾이고 영혼이 반쯤 죽은 자신을 이곳에 부려두고 나서야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는 말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한밤중에 대흥사 숲길을 헤매기도 하고, 두륜산 곳곳을 안 가본 길 없이 가보기도 했다며 가만 가만히 말을 잇곤 했다. 얼마 간 그곳에서 살다 나오고 나서야 겨우 사람의 꼴을 다시 갖추었다고도 덧붙였다. 「봄날」이 자신의 상처를 형형한 눈빛으로 응시하며 이 길을 걸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어쩐지 눈을 두는 곳곳마다 그가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릎 까지 쌓인 눈을 방한화도 없이 걷다가 동상에 걸려도 그냥 걸었다고 했다. 춥고 배고픈 줄도 몰랐다는 말을 덧붙이며 울먹이던 「봄날」이었다. 그 길에서 그가 했을 어떤 다짐들이 기어코 다섯 권의 장편 소설을 만들어냈다. 그때 그 길에 내가, 고기 잔뜩 들어간 녹두전 사먹고 든든해진 몸으로 튼튼하게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셈이었다. 「봄날」에게 짠지를 나누어 주었다던 고스님댁 할머니에게서 뜨거운 대추차 한 잔 얻어 마시고 다시 진불암으로 돌아갔다. 이 길에 내 발자국을 덧씌우려고 이렇게 왔는가 하는 감회에 젖어 산을 오르는 길이 힘든 줄도 모르고 갔다. 스님이 방금 출타했는지, 암자에서 키우는 흰둥이가 눈 위에서 내가 오르는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둥이는 명석하게도 주인이 오가는 길목을 지키곤 했다. 흰둥이가 앉아 있는 곳은 절에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를 퇴비로 만드는 곳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것을 보았다. 아침에 내가 버린 고구마 껍질 밑으로 영롱하게 빛나고 있던 주황색 껍데기를 말이다. 내가 잠시 밑에 내려간 사이에 스님이 까먹고 버린 한라봉 껍데기였다. 급기야 나는 그날 밤 스님 몰래 창고에 들어가 제 올리고 남은 한라봉 한 개를 가지고 나왔다. 도둑질을 했다는 흥분이 가라앉질 않아 그때까지도 미적대던 소설을 마구잡이로 완성했고, 이제 그만 하산해야 할 때가 아닌가에 대하여 깊게 고민하다 그만 늦잠을 잤다. 며칠 후에 돌아온 스님은 없어진 한라봉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뒤로 내내 언제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좌불안석이었다. 나 혼자 고기 들어간 녹두전 사먹고 온 것은 생각도 못하고, 스님이 한라봉 드신 것에만 분개해 부처님 불상 앞에서 도둑질을 해버리고 말았으니 나야말로 죄지은 자가 아니던가.
죄인 된 심정으로 생고구마만 착실하게 벗겨 먹었다. 그곳에서 소설 세 편을 완성했고, 돌아와 「봄날」이 등단한 지면으로 우연찮게 나도 등단을 했다. 가지고 갔던 도스트예프스키 전집은 절 방에서 아주 훌륭한 등받이 역할을 해주었다. 전집 스무 권을 쌓아놓고 베개를 받치면 무척 탄탄한 등받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때 내 소설의 칠 할은 도스트예프스키표 등받이 덕이 아닐까.
처음에 ‘불교와 나’에 관하여 글을 쓰라는 제안을 받았을 적에 나는 내가 나고 자란 서산의 마애불과 수덕사에 사는 비구니 스님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절에 관한 생각을 조금 더 해보니 나에게는 대흥사가 있고, 진불암에서의 잊지 못할 주황빛과 그 위에 더 영롱하게 빛나던 「봄날」과의 인연이 있었다. 또 내가 그곳에 가기까지는 탱화 무형문화재인 고스님의 큰아드님이자 해남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이신 고 선생님의 힘이 컸다. 「봄날」의 친구이자 진불암 주지스님의 오랜 지우(知友)였던 까닭이었다. 여러 인연의 힘으로 간 그곳에서 『봄날』이 걸었던 길을 되짚으며 그가 느꼈을 감정들을 그의 소설들과 함께 느껴보고 싶었다. 얼마간은 그렇게 했다고 믿었지만 실은 내 발자국을 새롭게 하던 시간이기도 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봄날」이 그 일을 겪고 나서 상한 몸으로 찾아든 때의 비통함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어느 한때 그러했듯이, 나 역시 살다가 힘들어지는 때가 있다면 언제든 다시 그곳으로 찾아들 수 있을 거라 짐작하며 천천히 숲길을 걷고 또 걸었다.
「봄날」의 행적을 찾던 스물 세 살의 습작생이 서른 두 살의 신인 작가가 되어 다시 대흥사를 찾은 것은 이 글을 청탁 받은 다음의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목포 문학관에서 그가 쓴 『백년여관』을 토대로 한 ‘백년의 봄, 죄의식을 응시하다’라는 주제로 <문학카페 유랑극장>의 행사를 진행해야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로서는 스승과 한 무대에 선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고 또 「봄날」과는 오랫동안 못 보고 있던 처지였기에 한껏 긴장을 한 시간이기도 했다. 염려했던 바와는 달리 행사는 무사히 진행되었고, 나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은 뒤풀이를 계획했던 식당에서 여러 가지 플랜카드를 걸고 「봄날」의 예순 한 번째 생일을 미리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다. 쓸쓸하고 외로운 길을 홀로 걸어야 했던 『봄날』에게 이만한 마음의 표현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그러할 터였다. 함박 웃고 있는 「봄날」을 뒤로하고 나는 대흥사로 차를 몰았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고, 때마침 꽃놀이 철이라서 숙소를 정하기 무척 어려웠지만 기어코 어느 방을 찾아들어갔다. 후배들과 함께 조금 달뜨게 취했고, 객기와 취기를 구분하지 못하고 급기야는 그 길을 다시 한 번 걷겠다며 새벽에 숙소를 탈출하기도 했다. 소설 『봄날』의 어느 한 구절을 읊은 다음의 일이었다.
진입로와 일주문 사이의 어두운 숲길은 길가 곳곳에 박힌 가로등 탓에 그때의 그 분위기를 잃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서산대사의 기운이 서린 대흥사 입구였고, 그 옛날에 「봄날」이 걷던 길이었다. 나라의 총칼을 피해 숨어든 시민군에게 야외 탁자에서 주먹밥을 쥐어주던 아낙들이 사는 곳이었고, 고스님이 홀로 탱화를 그리던 땅이었다. 진불암 주지스님이 배고픈 여자애에게 옥수수 한 자루 얻어다 주던 길목이기도 했다. 내가 아무리 다시 그 길을 되짚어 가도 「봄날」이 걷던 그 시간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가 맺어준 대흥사와의 인연이, 나에게는 지금의 나를 만든 힘이 아닌가 싶다. 그 밤에 몇 몇의 후배들과 그곳을 걸으며 『봄날』을 쓸 때의 그 형형한 눈빛을 다시 만났다. 나의 건강을 위하여 생고구마만 주고, 스님 혼자 드신 한라봉 껍질 빛 같은 가로등이 유독 환하게 빛나던 밤이었다.
이은선/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