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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의 세월을 건너온 촌놈의 노래
아스라한 옛이야기 같은 소백산의 품
1955년, 나의 이야기는 소백산의 깊고 너른 품속인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 일명 '새밭마을'에서 시작되었다. 반세기도 훌쩍 넘은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풍경은 마치 아득한 고대 사회의 전설처럼 아련하기만 하다. 국민소득 100달러를 겨우 웃돌던 시대, 첩첩산중 오지 마을에 살던 우리에게 '풍요'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기조차 벅찬 사치였다.
가난은 공기처럼 당연하게 우리 곁을 맴돌았다. 아침에는 밥을 먹고 저녁에는 묽은 죽을 쑤어 먹는 '조반석죽(朝飯夕粥)'의 일상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했다. 한창 커가던 시절이었지만 늘 뱃속은 허기로 차 있었고, 밥을 굶는 일은 흉도 아닌 예사로운 일이었다. 어머니가 밤새워 손수 지어주신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고, 매서운 겨울이면 솜을 두툼하게 덧댄 옷 하나로 그 시린 산바람을 맨몸으로 버텨냈다.
뛰놀기 좋아하던 사내아이의 무릎과 팔꿈치, 양말은 성할 날이 없었다. 해지지 않은 곳이 없어 겹겹이 기워 입는 것이 당연한 멋이었고, 바닥이 다 닳아 비 오는 날이면 물이 찔벅하게 새어 들어오는 낡은 검은 고무신을 신고도 나는 소백산 자락을 내 세상을 만난 듯 누볐다.
제1장: 검은 고무신과 조반석죽의 유년 (1955년 ~ 1972년)
왕복 8km, 말표 검정 고무신에 얽힌 애환
학교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멀고도 험난한 여정이었다. 첩첩산중 오솔길을 따라 편도 4km, 왕복 8km를 매일같이 걸어야 했으니 얇은 고무신 밑창이 얼마나 빨리 닳아 없어졌으랴.
비라도 쏟아지는 날이면 징검다리 위로 불어난 계곡물이 사납게 넘쳐흘러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그렇기에 이 깊은 오지 마을에서 6년 내내 '개근상'을 탄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학교에 가는 것 자체가 매일매일 자연과 맞서야 하는 작은 모험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어느날, 아침에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열어보니 강냉이밥에 반찬은 무우말랭이절임 이었다.내가 제일 싫어하는 강냉이밥과 반찬이었다.
강냉이밥은 따뜻 할 때에는 그나마 넘어가지만 식은 강냉이 밥은 씹어도 입에서 뱅뱅돌며 넘어가지를 않는다.
그 날은 도시락을 팽개치고 등교를 하여 점심을 쫄쫄 굶었다.
방과후 집으로 가는길에 허기가 져서 도저히 걸을수가 없었다.친구들을 먼저 가라고 하고 쉬었다가 가기를 반복하여 한드미 까지 왔다.
한드미에는 고모님댁이 있었다.일명 뿌뚜리네집"그 나이에도 눈치가 보여 정말 고모집에 밥 달라고 들어가기 싫었지만 꾸역꾸역 고모네집으로 들어갔다.마침 고모님이 계셨다.배가 고파서 왔다고 했더니 고모님이 밥을 차려 주었다.정신없이 먹고 나니 잠이 쏱아졌다.
고모님이 한잠 자라고 하여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없이 잠들었다.
누군가 깨워서 눈을 떠보니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시집 안간 종하 고모까지 와 계셨다.당시는 연락 수단이 없을 때라 집에서는 호영이 잃어버렸다고 난리가 났다.학교간 아이가 다른 애들 다 왔는데 호영이만 깜깜한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서 식구들이 모두 찾아나선 것이었다.
깜깜한 밤에 솔가지에 불을 붙여들고 온 식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를 졸라 겨우 얻어낸 새 말표 검정 고무신. 차마 흙바닥에 닳을까 신기조차 아까워, 고무신을 품에 안고 맨발로 산길을 걸어도 발걸음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당시 고무신은 생김새가 하나같이 똑같아 툇마루 아래 벗어두면 친구들과 신발이 뒤바뀌기 일쑤였고, 갓 산 새 고무신은 누군가 훔쳐 가 잃어버리는 일도 흔했다. 그래서 새 고무신을 사면 안쪽에 나만 아는 표시를 까맣게 칠해 두거나 흠집을 내어 두곤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갔다가 신발을 도둑맞는 날이면, 신발장 구석에 덩그러니 남은 남의 낡은 고무신을 짝짝이로 질질 끌며 훌쩍훌쩍 울음 섞인 하굣길을 걸어야 했던 아이들의 모습은 그 시절 흔한 슬픈 풍경 중 하나였다.
제2장: 청춘의 지게질과 겨울밤의 낭만 서당에서 다진 학문의 뿌리와 선비 정신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배웠던 기억이 지금도 아련하게 떠오른다. 흙냄새 짙은 시골 마을이었지만 배움에 대한 열기만큼은 뜨거웠다. 훈장님의 가르침 아래 『동문선습(童蒙先習)』으로 첫걸음을 떼고, 『명심보감(明心寶鑑)』으로 마음을 다스렸으며, 『대학(大學)』을 읽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깊은 이치를 깨우쳐 나갔다.
이때 서당에서 소리 내어 글을 읽으며 길러낸 올곧은 정신은 평생의 삶을 지탱하는 흔들림 없는 뼈대가 되었다.
제3장: 주경야독, 꿈을 향한 전진과 시련의 파도 (1973년 ~ 1998년) 한약 향기에 실어 보낸 고독한 독학의 시간
1973년, 나는 제천 동원당 한약방에서 의학의 길에 첫발을 내디뎠다. 낮에는 약재를 다루고 밤에는 『약물학』, 『동의보감』, 『방약합편』 등 고전 의서들을 벗 삼아 2년간 독학에 매진했다. 잠을 아껴가며 새벽에는 운전대를 잡아 1974년 보통 1종 면허를 취득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밤에 공부할 팔자'였나 보다.
이후 원주 연수당에서 실습하며 한약업사의 꿈을 키웠으나, 당시 한의계의 극심한 갈등으로 국가 고시가 무기한 연기되는 청천벽력 같은 상황을 맞았다. 간절했던 꿈은 문턱에서 멈춰 섰지만, 그때 몸에 새긴 인내와 공부 습관은 내 인생을 지탱하는 가장 큰 자양분이 되었다.
빈손으로 일군 부산에서의 자수성가
1977년, 하소리 고모님의 소개로 부산행 기차에 올랐다. (주)삼화에 입사해 주임까지 오르며 성실함을 인정받았고, 1980년 아내 지명숙 여사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두 아들 민우와 민태를 얻으며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은 더욱 단단해졌다.
내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배움의 시간은 1983년부터 1986년까지였다. 진급을 위해 남몰래 밤샘 공부로 중.고졸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매일매일이 주경야독이었다. 6과목 평균 60점이면 합격하는 제도이니 2~3년에 중.고졸 검정고시를 모두
패스하는 공부벌레들이 많던 시절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배움의 시간'으로 각인되어 있다.
가장이라는 무게가 주는 책임감은 컷다.생에 처음으로 내집을 갖게 되었다.
보증금20만원에 월세로 시작한 신혼에서 24평 아파트를 삿다.
그것도 부모님으로 부터 단돈 만원도 받지 않고, 부산으로 내려올 당시 빈손이었는데 결혼도 하고 자식도 생기고 내집까지 마련되었다.오직 혼자만의 노력으로 내집을 마련했다는 자부심은 자신감 이었으며 가족의 행복이었다.
1987년10월3일개천절 회사 부하직원2명을 호출하여 용달차를 부르고 이삿짐을 싣고 직접 이사를 하였다.얼마나 힘들었던지 몸살이 날 것 같았다.
지금 시대 에는 정말 상상도 안되는 일이 였다.휴일에 부하 직원들을 불러서 상사의 이삿짐을 나르게 하였다면 큰일 날 사건이었다.그것도 짜장면 하나 시켜주면서 말이다.
남상진 반장과 박주상씨 수고 많았어요.미안해요.ㅠㅠ
승승장구와 4년 만의 부장 승진
1988년 (주)삼원화학으로 자리를 옮긴 후, 나는 '내 회사'라는 마음으로 경영에 몰입했다. 재무제표를 개선하고 시스템을 혁신해 낭비 요소를 제로(0)로 줄이자 효율이 극대화되었다. 그 공로로 입사 4년 만에 계장에서 부장까지 파격 승진하는 특혜를 누렸고, 1989년에는 생애 첫 차인 '현대 엑셀 GL'을 부상으로 받기도 했다.
Reversal(反轉반전)은 (주)삼원화학 입사 당시 상관이었던 분들이 2년 후, 3년 후 한분씩 나의 부하 관리자가 되어가는 이상한 체계가 형성되었다. 30대 중반에 부장을 맡아 회사를 실질 운영하고, 각 거래선 별 계약을 주도하고, 원청업체의 영업을 전담하다보니 지금의 부장직이 오히려 부담이 되는 측면도 있었다.거래 업체의 과장들이 보통 나보다 10년이상 연상인데 어린 부장을 대하기가 서먹할 때도 있다는 느낌을 많이도 받아왔기 때문이다.
이후 세경실업, 두경실업, (주)아드리아를 잇달아 창업하며 사업가로서 승승장구했다. 세상은 내 편인 듯했고, 앞날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IMF의 가혹한 파도와 고독한 사투
그러나 1998년, IMF 외환위기의 파도는 무자비했다. 16억 원이라는 막대한 어음 부도는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긴 터널의 시작이었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영재 아들 민우와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나는 홀로 사투를 벌였다. 채권자들을 집 밖에서 먼저 만나고, 아이들이 볼까 봐 곳곳에 붙어있던 압류 딱지를 즉시 뜯어내며 태연한 척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아내의 냉대였다. 부도 전에는 레이디 볼링클럽 회장 등을 맡으며 혜택을 누렸던 아내가, 위기의 순간에 위로 대신 채권자보다 더한 질책과 압박을 가해올 때의 서운함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남몰래 일기에 서러움을 쏟아내며 버틴 나날이었다.
"그래도 세월은 흐르고 지구는 돌아간다. 회사와 개인 자산을 모두 매각해 빚잔치를 끝냈다. 남은 것은 아내 명의의 아파트 한 채뿐이었지만, 나는 그 폐허 위에서 다시 일어서리라 더욱 강하게 다짐했다."
제4장: 대륙을 향한 독기, 집념으로 일군 재기의 신화 (2001년 ~ 2003년) 잠을 쫓으며 채운 수십 권의 중국어 노트
IMF라는 혹독한 겨울을 지나며 업계를 떠나 있었던 3년은 재기를 위한 응축의 시간이었다.
2001년 (주)미키월드 상무이사를 시작으로 다시 업계에 뛰어 들었다.
미키월드 상무이사를 역임하던 시기에는 모든 서류나 행정이 수작업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어있었다, 인터넷이나 하고 한글 윈도우로 간단한 서류만 작성하던 실력으로는 뒤쳐질 수 밖에 없었다.
노트에 빽빽하게 적어가며 프로그램용어들을 익히고 또 실행하며 모르는 부분은 디자인실에 달려가서 질문하고 디자이너들이 많이 귀찮았을 것이다. 늘 들고가는 음료수로 미안함을 전하며 엑셀부터 포토샵 일러스트까지 틈만나면 컴퓨터에 매달렸다.오늘 잘 하던 것들도 내일이면 또 생각이 안나고 그러면 또 메모장을 뒤지고 그러기를 반복 하다보니 어느시점 부터는 어떤 문서라도 어떤 그래픽도 마음대로 작성하고 수정하고 업로드 할 수있게 되었다.
대륙을 향한 독기
2003년 'MK Trade Co. Ltd'를 창업하며 나는 중국 수출입 유통이라는 새로운 승부수를 던졌다.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나는 다시 한번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붙였다. 매일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쏟아지는 잠을 쫓으며 중국어 독학에 매진했다. 성조(聲調) 때문에 대화는 서툴지언정, 읽고 쓰는 것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수십 권의 노트가 새카맣게 변하도록 쓰고 또 썼다.
"현지인보다 읽고 쓰는 능력이 낫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나를 단련한 뒤에야 비로소 중국 땅을 밟았다. 준비된 자에게 대륙은 기회의 땅이었다."
통역 없는 비즈니스, 경외심을 이끌어내다
중국 진출 1년 만에 나는 모든 통역을 내보냈다. 직접 소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어로 직접 작업 지시서와 사업 계획서, 상세한 제품 사양서를 능숙하게 작성해 내자 중국 파트너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또한 중국어 간체로 작성하는 타이핑은 꼭 한국어 처럼 빨랐다.중국sns일명 qq메신져도 현지인들 보다 오히려 빠르게 쓰고 읽었다.중국은 병음으로 好 자를 쓸려면 hao라고 쓰면 여러개의 浩鎬好號湖虎豪 글자가 뜬다 그 중에서 좋을好자를 선택하면 된다. 현지인에 버금가는 글"메신져"언어까지 소통을 하자 이방인 사업가에 대한 불신은 경외감으로 변했고, 이는 곧 그 어떤 계약서보다 단단한 인맥과 신뢰라는 자산이 되어 돌아왔다.
낯선 땅에서의 비즈니스는 매 순간이 도전이었지만, 2017년까지 이어진 나의 중국 사업은 '김호영'이라는 이름 석 자 뒤에 숨겨진 저력을 다시 한번 세상에 증명해 보인 찬란한 시간이었다.
체력은 국력,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다
사업적 성공의 밑바탕에는 지독할 정도의 자기관리가 있었다. 부산의 아파트 헬스장에서부터 중국의 호텔 헬스장까지, 나는 하루 2~4시간을 거르지 않고 운동에 쏟아부었다. 러닝머신 위에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마다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머릿속을 헤집었지만, 일과처럼 정해진 루틴을 단 하루도 어기지 않았다.
사실 얼마나 귀찮고 힘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고통을 견뎌내며 다진 체력이야말로 대륙을 누비며 거친 협상 테이블을 견뎌낼 수 있게 한 진정한 에너지원이었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식이라는 이름의 가장 귀한 열매
내가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대륙에서 길을 닦는 동안, 아이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눈부시게 성장해 주었다.
큰아들 민우: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영재는 어느덧 카이스트(KAIST) 박사 과정을 거쳐 삼성전자의 핵심 인재가 되었다
둘째 민태: 일찍이 자신의 길을 찾아 호주로 건너가 셰프(Chef)로서 기량을 닦으며 든든한 사회인으로 뿌리를 내렸다.4년전 귀국하여 부산서면에 태태태(TAETAETAE) 아시아 요리점을 오픈하여 운영중이다.
제5장: 경영인의 결실과 시대를 앞서간 열정 (1987년 ~ 2016년) 로망과 현실 사이, 밀양 희곡리 별장 이야기
A story I want to remember(내가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
2011년 도시인들의 로망 시골별장을 매입하였다.대지300평에 마당에는 잔디가 푸르고,감나무,사과나무,배나무에는 제법 주렁주렁 많이도 달렸다. 작은 연못에는 붕어가 헤엄치고, 황토방 아궁이에는 장작이 타고 있었다. 밀양시 산외면 희곡리였다. 매입 후 가구를 들여놓고 거실에는 프로젝트를 달고 서라운드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어 영화관을 만들었다.
이재 주말이면 지인들과 야외 파티를 열고 즐거운시간을 만들고 휠링 할 일만 남았다.
양주장에는 발랜타인,로얄샬루트,마우타이 등 고급양주를 진열했다.
중국 출장이 많아서 한동안 희곡리를 갈수 없었다.
2개월만에 모처럼 친구들을 초대하여 놓고 하루 전 희곡리로 향했다. 오마이~갓
별장이 완전 풀밭이 되어 있었다.
별장에 도착 하자 마자 옷갈아 입고 풀과의 전쟁을 하였다.
봄부터~가을까지는 한달에 한번쯤 가면 풀깍고 잔디깍고 청소가 일이었다.
관리상 별장을 유지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매각에 들어갔다.
로망은 무슨” 생 고생만 하고 끝난 별장이야기 였다.
알비나반 아이들, 가슴으로 낳은 열두 명의 인연
2011년 인연이 닿아서 송도 마리아 수녀원의 알비나반 고아들을 후원자로 만나게 되었다.
김수정(6).이가인(7).허은유(8).김윤희(8).박다해(8).김선희(8).송지혜(8).최정림(9).김순주(9).강유림(11).최예은(12).허여란(12)이렇게 12명을 후원자로 인연을 맺었다.
매달 후원금을 이체하고 한달에 한 두 번씩 고아원을 방문하여 아이들과 짜장면 탕수육도 시켜먹고 신발무역을 하는 관계로 아이들 신발도 자주 갔다주고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선물도 했었다.
또 어떨 때에는 아이들을 대리고 야외로 나가기도 하였다.
일요일 오전 10시쯤 방문하겠다고 수녀님께 이야기 하면 9시부터 아이들이 밖에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하면 서로 손을 잡으려고 다투기도 하였다.
아이들과 함께 울지마 톤즈도 관람하고, 만들기도 하고, 함께한 시간들이 보람있고 끈끈한 정을 느낄 있었다. 크리스마스에는 아이들이 보낸 카드가 아파트 우편함을 가득 채우기도 하였다.출장 중 카드를 사서 공항에서 아이들에게 보낸 적도 있었다.
이재는 모두 성인이 되어 사회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사회의 일원이 되었을 때 자립심을 해칠 수 있다는 수녀님의 조언에 따라 지금은 연락을 끊었지만,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내 좌우명처럼 그들이 꿋꿋하게 세상을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한다."
"부산 시민의회에서 센텀누리까지: 사회와 이웃에 봉사한다는 일념으로 달려왔던 시간들"
"부산 시민의회 5기 회장을 역임하며 매월 의회사무처 및 시민단체와 머리를 맞대고 부산시의 현안을 고민하며 시민들을 대변하여 목소리를 높였던 그 시간들이 아련 합니다.아울러 더샵센텀누리 초대 회장으로서 지역 주민, 해운대구와 뜻을 모아 '미래의 해운대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열정을 쏟았습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달려온 시간이었지만, 지역 사회를 위해 헌신하며 느꼈던 그 크나큰 보람은 지금도 제 가슴속에 깊고 새로운 감회로 남아 있습니다."
대륙을 누빈 信用과 关系의 비즈니스
(주)삼원화학의 총괄책임자로서 실질적인 경영을 이끌고, 이후 세경실업, 두경실업, (주)아드리아, MK Trade Co.Ltd를 거치며 나는 수많은 풍파를 이겨냈다.
중국에서의 사업은 그래도 안정적이었다. 아마도 信用을 제일로 중시하는 습관이 통했나 보다.그로 인하여 信用도 쌓이고 관계가 개선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복건성 진강시에 R&D center를 두고 中國의 여러지역의 工場들에게 OEM
(발주자의 상표를 부착하는 주문자 생산 방식)방식으로 ORDER를 하는 관계로
중국내 에서도 많이 다닐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물량을 맞추기 위해 밤 비행기로 광주에서~청도를 가고, 12시간 야간버스를 타고 다시 광주로 날아가는 강행군 속에서도 나는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나의 진심은 중국 파트너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특히 허 총(許總)은 내가 중국에 가면 전용 BMW와 전담 운전기사까지 내주며 극진히 예우해 주었다.
또 한 영발공사 柳總(류총)과 함께 승용차로 진강에서 광주로, 許總(쉬총)과 진강에서 복주를 뻔질나게 다녔다.
죽마고우보다 더 깊게 상부상조했던 진강의 진 총, 허 총, 황 총 등 중국 파트너들과 함께 흘린 땀방울이 지금도 그립다.
* Episode(에피소드)
중국 파트너들은 모두 애주가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집(ktv)으로 불러내어 새벽까지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걸 참 좋아들 했다.
술이야 마시지만 노래하고 춤추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자리가 불편했지만 늘 끝까지 함께하며 분이기를 맞추곤 했다.
선천적으로 음치인 나는 여러사람 앞에서 노래를 불러 본 적이 없었다.
노력도 해 봤지만 안되는 건 안되는 것이었다.
혼자 연습해서 녹음을 하고 들어 보면 박자는 그렇다고 해도 음이 맞지 않았다.
성격상 완전하지 않으면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술자리도 비지니스의 연장이라는 생각에 한번은 뭔가 보여줘야 하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어차피 노래는 안되는 것이었고 춤을 추자"라고 생각을 굳혔다.
당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대 유행을 할 때였다.
호텔에서 노트북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틀어놓고 한 3일 연습을 하니
노래에 밪추어 거의 비슷하게 출 수 있었다.
이재 비장의 무기 하나를 장착한 느낌 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밤10시 許總이 호텔 로비에 와 있다고 나오라고 한다.
도착한 곳은 新一代佳人(신 이따이 지아 런)이라는 ktv였다.
홀에서는 가수들과 무희들이 끝임없이 공연을 하고 룸에는 3~40명이 자리할 수 있는 유명한 ktv였다.
許總은 친구들까지 불러서 도합 30여명이 룸에 합석했다.
술이 한순배 돌고 자주하는 주사위 게임(요싸이즈)와 이거 싼거 우거 하는 게임까지 하다보니 술기가 많이 올랐다.
슬슬 노래하고 춤추는 분이기로 바뀌고 있었다.
그날 처음 온 뻔띠(本地지역민)가 韓國來的金先生(한국에서 온 김선생)한곡 하세요 라고 한다.
중국 파트너들은 내가 노래는 안한다는 사실을 알고 만류 하였다.
술김에 손을 번쩍 들었다. 我會跳舞(나는 춤을 출줄 안다)한번 출께 라고 소리쳤다. . 박수가 쏟아졌다.
술김에 웃통을 벋어 던지고(상체알몸)
강남스타일을 틀어달라고 하니 대형 모니터에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신나게 나오고 있었다.
연습한 대로 능숙하게 강남 스타일을 추고 있는데 거의 모두가 휴대폰으로 나를 동영상 촬영하고 있었다.
한바탕 춤이 끝나자 박수가 쏟아졌자.순간적으로 연예인이 된 기분이었다.ㅋㅋㅋ
한국에서는 웃통 벗으면 실례가 되지만 중국에서는 버스도 웃통벗고 타는 사람 자주보는 풍경이다.
땀방울의 궤적, 그리고 멈추지 않는 취미의 정점
1989년 첫 차 엑셀을 시작으로 뉴그랜져,뉴체어맨,S-550과 렉서스LS에 이르기까지, 내가 갈아탄 수많은 자동차는 내가 흘린 땀방울의 궤적이었다.
취미 또한 허투루 하지 않았다.
밤을 새우며 내기에 빠졌던 300점의 당구, 일요일 마다 전국을 돌아다니고 사진촬영대회 마다 다 참가했던 그 열정으로 MBC 전국 사진촬영대회 금상을 받고, 월간영상 추대 작가가 되기도 했다. 늘 함께 한 마미야RB-67과 니콘F-4 카메라와 광각 표준 망원줌 등은 아직도 창고에 보관 중이다.
1년에 100회 이상 라운드를 돌며 눈을 감으면 천장에 골프공이 떠돌아 다니던 10여 년. 2010년 9월 프로선발전에 합격했을 때의 기쁨은 모든 노력의 대가를 받았던 것 같았다.
라이센스를 취득한 후에는 아마추어 골프대회에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회원들의 열렬한 추천으로 골프 비서의 초대 회장직에 취임하게 되어 4년간 골프 발전에 열정을 쏟았다.
또한 부산 골프 모임인 골누리의 초대 회장을 맡아 공을 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내 인생은 정말 행복한 일상이었다.
동문회장 7년, 모교를 향한 마지막 헌신
고향으로 돌아온 후 나는 제7대 대곡초등학교 총동문회장을 맡아 7년간 봉사했다.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위기 속에서도 동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기 위해 애썼다. 비록 출산율 저하로 폐교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농촌 유학 등을 통해 학교를 지켜내려는 동문들의 의지를 확인하며 보람을 느꼈다. 2024년, 후임 황춘기 회장에게 바통을 넘기며 나는 비로소 무거운 책임을 내려놓고 한 명의 동문으로 돌아가 허허로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제6장: 다시 고향의 품으로, 몽벨리의 평온 (2017년 ~ 현재) 칠순에 이룬 귀향, '몽벨리'에 피어난 평화
2017년, 칠순을 앞두고 나는 마침내 태어난 곳인 어의곡리 26번지로 돌아왔다. 검은 고무신을 신고 뛰어놀던 소년이 백발이 되어 고향의 흙내음을 다시 맡게 된 것이다. 그곳에 정성을 다해 '몽벨리펜션'을 신축했다. 잣나무 숲이 감싸 안고 청정 새밭계곡이 흐르는 이곳에서, 나는 여가와 소득을 동시에 창출하며 생애 가장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 평화의 곁에는 든든한 혈육들이 있다. 삼성전자에서 핵심 인재로 활약 중인 장남 민우, 그리고 부산 서면에서 요리점 '태태태'를 운영하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차남 민태. 여기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 은성이와 현성이까지, 이들은 내가 거친 풍파를 견디며 뿌리 내린 삶의 가장 귀한 열매들이다.
93세 노모와 함께한 축복의 생일잔치
2025년 8월, 단양 장다리식당에서 열린 생일잔치는 내 인생의 가장 찬란한 보상이었다. 93세의 노모님을 모시고 형제자매, 아들 내외, 손주들과 조카들까지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난생처음으로 아내 지명숙 여사에게 공개적인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조카, 여자는 가슴이 좁으니 가슴 넓은 남자가 늘 져주고 이해해 줘야 하네."
오래전 하소리 고모님이 해주셨던 그 말씀을 이제야 온전히 가슴으로 이해한다. 모진 세월 묵묵히 곁을 지켜준 아내에게 전한 감사의 말 한마디에 쏟아진 가족들의 박수 소리는 그간의 모든 피로를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맺음말
검은 고무신을 신고 소백산을 달리던 소년은, 이제 중국 대륙을 종회무진하던 기개를 뒤로하고 고향의 품에 안겼다. 운동과 극기로 다져진 체력과 밤샘 공부
로 다진 정신력이 오늘날의 나를 만들었다.
그러나 대단한 이야기도 특별한 영웅담도 아니다.
그 시절에는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왔다.
이 글을 쓰면서 혹 과장되거나 미화된 부분은 없는지 살피고 또 살폈다.
인증 사진이 있는 것은 첨부하였으나 필카를 쓰던 시절에는 사진이 그렇게 많지를 않았다.
이제 나는 사랑하는 가족의 든든한 뿌리로, 그리고 고향의 죽마고우들과 함께 새밭마을의 한 조각 풍경으로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고자 한다.
丙午年 正初 靑華 金鎬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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