參奉 順興 安天鎬 墓碑
參奉 順興 安天鎬 墓表
公諱天鎬 字應三 姓安氏 順興人 上祖高麗上護軍諱子美 三傳至晦軒先生 爲東國理學之祖 諱祖同 官副提學 爲麗社屋以殉諱守貞 際百六運而炳幾南下 卜居剛之艮雲 號可隱 諱殷國 號无憫處士 嘗以寢郞在直時 仜祖丙子也掛冠歸 因構登西亭 歌咏採微詩 有徵不起 隱居自靖 諱戒元 官同樞 推榮三世 是爲公六世祖也 高祖諱聖和 贈軍資監正 曾祖諱泰述 贈工曹參議 祖諱興晩 考諱相信 妣安東金氏 忠烈公方慶后 白孫女 以哲廟辛亥四月九日生公 性根質實 不喜浮華 尤篤友于 與伯兄公居近 昕夕聯仗 塤箎相和矣 不幸伯氏公早世 且三弟俱爲離索 每有看雲白日眼之懷 而况其又哭白眉 自憐形孤影隻 迺於庚子正月遘疾七月二十八日卒 葬武節山巽向原 配丹陽禹氏萬德女 文僖公倬后 有婦德 載在大東名賢綱倫錄 生王子後公十九年歿 祔于公四男承敬參奉 承龜 承文 承世 二女 黃永九 張泳洙 參奉男智榮 德榮 女金粲世 承龜男 甲榮 宇榮 承文男 建榮 樂榮 女余錫煥 承世男 植榮 女張師福 永九男 義樂 女安承武 餘皆幼 子壻諸人 爲設稧事 拮据者若干額也 噫承敬 承龜 皆逝 承世與其叔兄及從子智榮 詢謀買石 囑余以表阡文 而將欲爲深目之證 余嘉其繼述之事 不能辭 畧叙其顚末如右云
再從弟 光鎬撰幷書
참봉 순흥 안천호 묘표
(參奉 順興 安天鎬 墓表)
공의 휘는 천호(天鎬)요 자는 응삼(應三)이며 성은 안씨(安氏)이니 순흥사람이다.
시조는 고려 때에 벼슬이 상호군(上護軍)인 휘 자미(子美)시며 삼대를 전해내려 회헌(晦軒) 선생에 이르러서는 우리 동국의 이학(理學)의 조(祖)가 되신다. 그리고 휘 조동(祖同)은 벼슬이 부제학(副提學)인데 고려의 사직이 망할 때에 순국하였고 휘 수정(守貞)은 나라의 운명이 기우는 때를 지음하여 기미를 먼저 살피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영주의 간운(艮雲)마을에 살 곳을 정하였으니 호는 가은(可隱)이시다. 그리고 은국(殷國)은 호가 무민처사(无憫處士)인데 일찍이 참봉으로 수직(守直)할 때는 병자(인조 14년, 1636)였다.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등서정(登西亭)을 짓고 채미시(採微詩)를 노래로 읊으면서 나라에서 부름이 있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스스로 깨끗함을 지켰다. 휘 계원(戒元)은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인데 삼세(三世)에 걸쳐 벼슬의 영광이 미루어졌으니 이 어른이 공의 6세조가 되신다.
고조의 이름은 성화(聖和)이니 군자감정에 증직되었고 증조의 이름은 태술(泰述)이니 공조참의에 증직되었으며 조부의 이름은 흥만(興晩)이요 아버지의 이름은 상신(相信)이다.
어머니는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니 충렬공(忠烈公)인 방경(方慶)의 후예이고 백손(白孫)의 따님인데 철종(哲宗) 2년 신해(1851) 4월에 공을 낳았으니 천성이 성실하여 겉치레의 화려함을 즐기지 않았으며 더욱 우애가 독실하여 백씨공(伯氏公)과 가까이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지팡이 나란히 다니고 형제간의 우애가 서로 화합하였는데 불행히도 백씨(伯氏)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또 동생 셋도 모두 헤어져 살고 있으니 매양 구름을 보고 낮잠만 잔다는 회포가 있었는데 하물며 또 그 백미의 죽음을 울어야 했으니 스스로 외로워진 짝그림자를 서글피 생각하다가 경자년(1660) 정월에 병에 걸려서 7월 28일에 졸하였고 무절산(武節山) 손향(巽向)의 둔덕에 장사지냈다.
배위(配位)는 단양 우씨(丹陽禹氏)이니 우만덕(禹萬德)의 따님이고 문희공(文僖公)인 탁(倬)의 후예이며 부덕(婦德)이 있어서 대동명현강윤록(大同名賢綱倫錄)에 실려져 있다. 임자년(1612)에 출생하여 공보다 19년 뒤에 죽었고 공의 묘에 부장(祔葬)했으며 아들 넷이 있으니 승경(承敬)은 참봉이었고 다음은 승구(承龜)와 승문(承文)과 승세(承世)이고 딸 둘은 황영구(黃永九)와 장영수(張泳洙)에게 출가했다.
참봉의 아들은 지영(智榮)과 덕영(德榮)이며 딸은 김찬세(金粲世)에게 출가했고 승구의 아들은 갑영(甲榮)과 우영(宇榮)이며 승문의 아들은 건영(建榮)과 낙영(樂榮)이고 딸은 여석환(余錫煥)에게 출가했으며 승세의 아들은 식영(植榮)이고 딸은 장사복(張師福)에게 출가했으며 황영구의 아들은 의락(義樂)이고 딸은 안승무(安承武)에게 출가했으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들과 사위 여러 사람이 계(契)를 설립하고 자금을 모아 부지런히 이윤을 추구한 것이 약간의 금액이 되었다.
아! 승경과 승구는 모두 죽었고 승세가 그의 셋째 형 및 조카인 지영(智榮)과 더불어 비석을 사기로 상의하고 나에게 묘표(墓表)의 글을 부탁하여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증거가 되게 하려고 하므로 내가 그 선대의 뜻을 계승하는 일을 아름답게 여겨 사양할 수 없어서 간략하게 그 전말을 오른쪽과 같이 서술한다.
재종제(再從弟) 광호(光鎬)가 짓고 아울러 쓰다.
유(裕)ㅡㅡ>우기(于器)ㅡㅡ>목(牧)ㅡㅡ>원숭(元崇)ㅡㅡ>조동(祖同)ㅡㅡ>.....수정(守貞)ㅡㅡ>.....은국(殷國)ㅡㅡ>계원(戒元)ㅡㅡ>순련(舜連)ㅡㅡ>성화(聖和)ㅡㅡ>안태술(安泰述)ㅡㅡ>안흥손(安興遜) 안흥만(安興晩) 흥삼(興三) 흥윤(興潤) 흥렬(興烈)ㅡㅡ>상충(相忠)상선(相宣) 교수(敎壽) 상철(相哲)
안흥만(安興晩)ㅡㅡ>안상복(安相福), 안상신(安相信)ㅡㅡ>안천호(安天鎬)
안흥윤(安興潤)ㅡㅡ>안상목(安相穆)
안흥렬(安興烈)ㅡㅡ>안교은(安敎殷)
안태술(安泰述)ㅡㅡ>안흥만(安興晩)ㅡㅡ>안상복(安相福), 안상신(安相信)ㅡㅡ>안천호(安天鎬)ㅡㅡ>안승경(安承敬) 안승구(安承龜) 안승문(安承文) 안승세(安承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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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경(安承敬)ㅡㅡ>안지영(安智榮) 안덕영(安德榮)
안승구(安承龜)ㅡㅡ>안갑영(安甲榮) 안우영(安宇榮)
안승문(安承文)ㅡㅡ>안건영(安建榮) 안낙영(安樂榮)
안승세(安承世)ㅡㅡ>안식영(安植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