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건축학교 건축전문가들의 도동서원 답사를 동행 취재한
한계레신문 구본준 기자는
『조선 특유의 서원 건축을 보여주는 곳-도동서원(한겨레 2010년9월28일)』에서
한훤당 김굉필을 이렇게 소개했다.
학문의 깊이에서 김굉필은 정여창이나 이황에게 비길 바는 아니었다. 그랬음에도 그가 동방오현(東方五賢)의 첫머리에 오는 것은 그의 지조와 비장한 죽음이 남긴 인상이 워낙 강렬했던 덕분이었다. 그가 남긴 책들이 사후 모두 불태워져 지금 그의 학문 세계와 철학에 대해 접할 길은 없지만 그는 성리학의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도동서원은 이 깐깐하고 강직했던, 그리고 조선 후기 모든 선비들이 가장 높게 떠받들었던 김굉필에게 바치는 헌정의 집이다. 그의 참모습이 그가 쓴 글이 아니라 죽음을 불사한 의지에서 나오듯, 도동서원의 본질도 건축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런 인물을 기리기 위해 뜻을 모으고 건물을 지은 후학들의 정신에서 나온다. ‘성리학의 道가(중국에서) 동쪽(조선)으로 왔다’는 도동(道東)이라는 書院의 이름 뜻은 이 지독하게 투철했던 인물에 대한 조선 사림들의 애정과 자부심을 그대로 담고 있다.
사람은 어떤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느냐로 판단할 수 있다. 김굉필은 정적들에겐 지독한 적이었지만 그의 뜻을 따르는 후학들에겐 위대한 실천가였다. 도동서원은 서원이란 독특한 건축장르가 진정 담아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서원을 찾아가는 우리가 서원에서 진정 느껴보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전하고 있다.
☞한겨레 기사 보기 - "조선 특유의 서원 건축을 보여주는 곳-도동서원"
김굉필(金宏弼 1454∼1504, 단종 2년∼연산군10년)
본관(本貫) 서흥(瑞興), 자(字) 대유(大猷), 호(號) 한훤당(寒暄堂), 시호(諡號) 문경(文敬)
서흥김씨 시조 휘(諱) 보(寶)는 신라 왕실의 후예로 경순왕의 넷째 아들 보국대안군 평장사(輔國大安君平章事) 김은열(金殷說)의 5세손이다. 보공(寶公)은 고려중기 1183년(명종13)에 탄생하였으며 32세에 금오위정용중랑장(金吾衛精勇中郞將)에 오르셨다. 그의 손자 김천록(金天祿)은 고려 원종(元宗 1260-1274)과 충렬왕(충렬왕 1274-1308) 양조(兩朝)에 무장으로 출사하여 당시 도원수(都元帥) 김방경(金方慶) 휘하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1270년(원종11)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이 일어나자 진압작전에 출정해 진압작전을 지휘하던 김방경 장군을 위기에서 구출하는 대의충절(大義忠節)의 무공을 세웠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과 1281년(충렬왕7년) 려원연합군(麗元聯合軍)의 두차례 일본 정벌 때도 모두 참전하였으며 1차 정벌때의 혁혁한 무공으로 1280년(충렬왕6년)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상장군(上將軍)‧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에 오르고, 원조(元朝)에서도 충현교위 관군총파(忠顯校尉 管軍摠把)의 대작(大爵)을 제수받았다.
고려조는 무열(武烈)의 정신과 행동으로 나라를 구출한 천록공에 서흥군(瑞興君) 봉작(封爵)을 내렸다. 하지만 자신이 시조가 되심을 송구히 여긴 휘 천록은 역시 명장으로 이름을 떨친 조부 휘 보(寶)를 시조로 모시게 되었으니 부친 정용장군(精勇將軍) 휘 덕인(德仁)과 함께 시조 삼대(三代)가 무장의 가문에서 문무제예(文武諸禮)를 익힉 분들이다. 후손들은 이로부터 본관을 「서흥(瑞興)」으로 하게 되었다. 경기도 안성군 고삼면 월향리 소재 무열사(武烈祠)에서는 매년 음력10월 첫일요일 서흥김씨 시조와 서흥군의 유덕과 훈업을 기리는 향사(享祀)를 모시고 있다.
본관이 서홍(瑞興)인 휘 굉필(金宏弼 1454-1504)의 자는 대유(大猷)이며, 호는 한훤당(寒暄堂)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아버지는 유(紐)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이다. 그의 증조부 휘 중곤(中坤)은 조선 태조(太祖)·정종(定宗)·태종(太宗)·세종(世宗) 사조(四祖)에 출사하여 사헌부(司憲府)와 간성(諫省)에 봉직하면서 명성을 떨쳐 통정대부 예조참의(通政大夫禮曹參議)에 이르렀다.
벼슬에서 물러나 취향(娶鄕)인 현풍(玄風)에 내려가 세거하여 서흥김씨 영남파의 파조가 되었다. 곧 한훤당의 증조모는 현풍 곽씨(郭氏)이며 중조모의 친정이 현풍이다. 한훤당의 조부 휘 소형(小亨)은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나아가 봉훈랑(奉訓郞:從五品) 의영고사(義盈庫使)에 올랐다. 부친 휘 유(紐)도 세조6년(1460) 무과(武科)에 올라 절충장군(折衝將軍) 호군(護軍:正四品)을 역임하였다.
한훤당의 조부와 부친이 관직에 올라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는 1454년 5월25일 한성부 정릉동(貞陵洞,지금의 貞洞) 사저에서 태어났다. 1472년(성종 3) 순천박씨와 혼인 후 합천 말곡의 처가에 거처. 1475년(성종1) 함양군수로 부임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小學)을 배우며 함양의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과 교분. 1480년(성종11년) 26세 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최부(崔溥) 등과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 모임을 만들어 활동. 과거에는 뜻이 없어 서울생활을 접고 합천으로 다시 내려가 살았다.
도동서원 뒷 자락에 자리한 대니산 기슭의 현풍 정수암(淨水庵)은
1487-1490년(성종 21년) 선고(先考)의 상사(喪事)에 3년동안 시묘(侍墓)를 한 곳이다.
부친시묘를 마치고 모친을 서울로 모시고 서울에서 생활. 1493년(성종24) 용문(미원현) 강학소 정리 후 고향 현풍으로 낙향. 1494년(성종25) 경상감사의 유일(遺逸)로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천거되고, 그후로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봉직하며 여러 옥송(獄訟)을 명쾌하게 처결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쁘게 따랐다.
1498년(연산4)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점필재 김종직의 문도라는 이유로 연루되어 희천(熙川)으로 유배. 1500년(연산6) 모부인(母夫人)이 상언하여 순천(順天)으로 배소가 옮겨졌으며 1504년(연산10) 무오사화에 이어 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로 10월1일 망극(罔極)함에 이르렀다. 선생은 처음에 왕명을 듣고 목욕재계한 후 관대(冠帶)하고 나오니 조금도 신색(神色)에 변함이 없었고 우연히 신발이 벗어지자 바로 신고 손으로 수염을 골라 입에 물고 조용히 말하기를 『몸과 머리털 피부 모두 부모로부터 받은 것인데 이렇게 상(傷)하게 함은 옳지 않은 일이다』며 조용히 나아갔다.
이종범 조선대 교수는 프레시안(2007년11월26일)에 연재된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굉필(金宏弼)」에서
도동서원(道東書院)에 관해 다음의 글을 남겼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산등성이가 다람쥐 같다고 하여 다람재라고 하는 고개 아래 낙동강 개경포가 훤히 보이는 곳에 있다. '도가 마침내 동쪽으로 왔다'는 '도과동(道果東)'의 뜻이 있는 도동서원은 선조 원년(1568) 비슬산 아래 쌍계동에 세워졌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8년(1605)에 이곳으로 옮겼다.
서원 앞 큰 은행나무는 조식과 이황의 문인으로 김굉필의 외증손이 되는 정구(鄭逑)가 심었다. 기록에 드러난 행적을 중심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면 학술적 문장을 거의 남기지 않았고, 조정과 국왕을 비판한 적도 거의 없으며, 천거로 나선 조정에서 관직도 높지 않았으며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던 사실에 김굉필이 곤혹스러울 것이다. 또한 현란한 언변을 과시하다가 간혹 무거운 침묵을 겹칠 줄 아는 수사적 처세술을 훌륭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날카로운 언변과 순발력 있는 논설을 내세운 적이 없는 김굉필에게서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맥락에서 그의 언행과 침묵을 인내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그의 묵언과 과문(寡文)이야말로 내일과 호흡하며 미래를 설계하기 위하여 빛을 감추고 흔적을 숨겼던 고육책이었구나, 할 것이다.
☞프레시안 기사 보기 :
[이종범의 사림열전] 김굉필: 침묵, 미래와의 대화 '말과 글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아래는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자료총서 제16집
도동서원지(道東書院誌-1997년7월30일刊)에서 옮겨온
도동서원(道東書院)에관한 글이다.
조선시대 서원은 사림의 교육, 교화기구인 동시에 대표적인 향촌운영기구이다.
서원설립 주체인 사림은 조선왕조 개창을 둘러싸고 재야세력으로 밀려나는 계열의 후예들로 이들은 향촌에 내려가 교육과 향촌건설에 주력하였는데, 서원제도의 성립은 이러한 사림세력 들의 향촌지배체제 확립을 위한 노력의 결과로 나타난 제도이다.
사림세력들의 향촌문제에 대한 관심은 조선 초부터 사창제(社倉制, 농민들이 관(官)에서 곡식을 꾼 후 이자를 갚지 못해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자 가난한 농민들에게 싼 이자로 곡식을 꾸어 주는 제도), 유향소복립운동(留鄕所復立運動), 향약(鄕約) 실시 등으로 나타났는데 서원제도의 성립은 이러한 노력들의 실패로 돌아간 뒤 여기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제도이다.
사림세력이 이와 같이 향촌사회의 구심점을 서원으로 바꾼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일단은 서원자체가 교육기관으로써 훈구파의 견제를 어느 정도 피할 수 있다는 점과 송대(宋代) 서원제도의 일정한 영향에서 였으며 이는 사림세력 자체를 위해서도 그만큼 유리한 일이었다. 즉 서원은 교육과 교화를 표방함으로써 정치적 반대세력으로부터의 견제를 그만큼 덜 받을 수 있다는 기구였다.
초창기 서원은 강학(講學)이 일차적 목적이었지만 존현(尊賢) 또한 중요한 기능이었다. 따라서 초기에는 배향인물의 선정에 있어서도 신중을 기하였다. 이후 사림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선조 대에 오면 명종대의 일정한 제약에서 벗어나 서원은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되는데, 이때 오면 배향인물도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彥迪) 등 사화기에 화(禍)를 입은 인물, 이황(李滉) 이이(李珥) 조식(曺植) 등 학파의 영수 등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확대되었다. 당시 사림들은 서원의 배향인물을 통해서 그들의 도학적 정통성을 천명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일정하게 강화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한훤당(寒暄堂)을 배향하는 서원이 곳곳에 건립되었다. 한훤당을 향사하는 최초의 서원은 선생이 돌아가신지 60여년후인 명종 20년(1565)에 선생께서 별세하신 적소(適所)인 전라도 순천(順天)에 건립된 옥천서원(玉川書院)이다.
이후 선생의 고향인 현풍에서도 한훤당을 향사하는 서원 건립이 추진되어 선조원년(1568) 현동(縣東) 비슬산(琵瑟山)자락에 상계서원(雙溪書院)이 건립되었다. 이 서원에 대한 자료는 전무해서 서원의 건립과정이나 운영 등 구체적인 것은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창건시 문적(文籍)에 의하면 이 쌍계서원의 건립은 당시의 여타 서원과 마찬가지로 향중사림(鄕中士林) 뿐만 아니라 특히 감사(監司)를 비롯한 지방관의 적극적인 협조로 성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서원은 선조 6년(1573) 에 경상감사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경주의 옥산(玉山), 영천 (榮川)의 이산(伊山)서원과 함께 사액과 동시에 서적을 하사 받았다. 이후 쌍계서원은 임란으로 폐파(廢破)되었지만 당시 전란으로 인한 향촌사회의 피폐와 물력(物力)의 부족으로 10여년간 중건되지 못하였다. 이후 선조 37년(1604)에 현서(縣西) 15里 오설면(烏舌面) 도동(道東) 송추하(松楸下)로 옮겨 중건되었는데 이때 서원명을 포노(浦老)로 개명하였다가 이후 도신(道臣)의 계청(啓請)으로 도동(道東)으로 사액(賜額)되었고, 광해 2년(1610)에 봉안(奉安)하였다.
이때 건립된 건물 중 강당의 도동서원(道東書院) 4字 현판은 선조 40년(1607)에 현갈(懸擖)하였는데 외미액(外楣額)은 도사(都事) 배대유(裵大維)의 필(筆)이며. 정간(正間)은 퇴계필(退溪筆)을 집자하였다. 또한 중정당(中正堂)은 봉조하(奉朝賀) 이관징(李觀徵)의 필이다. 상량문(上樑文)과 원기(院記) 송(頌) 등은 원래 없었다고 한다.
한편 서원내의 신도비는 인조3년(1625) 사우당 김대진이 후손과 사림 및 경상감사 이민구의 협력을 받아 세웠는데, 그 글은 장현광(張顯光)이 짖고 사헌부감찰 배홍우(裵弘祐)가 썼다.
도동서원의 중건(重建)은 이 시기 여타서원과 마찬가지로 사림의 공론에 의해 환훤당의 내외손 및 일향사림(一鄕士林)의 공동협력 의해 중건되었다, 그 과정에서 볼 때 도동서원의 중건은 선생의 내외손, 향촌사림의 공동협찬하에 감사를 비롯한 본현(本縣) 내지 인근 지방관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다. 특히 이 서원의 중건과정에서는 한훤당의 외증손이며 당시 영남학파를 영도해 나갔던 정구(鄭逑)와 감사의 역할이 컸다.
정구는 중건초기 구획시조(區劃施措)에 노심(勞心)하였고 또한 백록동규를 모범으로한 도동원규(道東院規)를 제정하여 매 삭망에 제생(諸生)에게 의리를 강마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선조 37년(1604)에는 먼저 중건역사를 관장할 원장으로 곽근(郭赾)을 천거하였고 선조 40년(1607)에는 안동대도호부사로 있으면서 당시 영남학파의 중심인사였던 대구도호부사인 정경군수(鄭經世)와 협천 군수 여대로(呂大老)와 함께 중건구조통문(重建救助桶文)을 내기도 하는 등 도동서원 중건을 실질적으로 관장하고 있었다.
이후 숙종3년(1677)에 본현(本縣) 생원(生員) 곽수하(郭壽夏)등이 상서를 올려 서원중건을 실질적으로 주관하였고 또한 초기 서원운영의 기본방향을 마련하였던 선생의 외증손(外曾孫)인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종향(從亨)을 청하였다. 이때의 상서에서는 한강을 비롯해 배신(裵紳)과 박성(朴惺)의 배향을 청했지만 정구만 윤허를 얻어 숙종4년(1678) 3월26일에 봉안하였다.
도동서원은 매년 음력2월 중정일과 8월중정일을 맞아 봄가을 향사를 봉향하고 있다. 또 달성군 현풍면 지동(못골) 한훤당 종택 광제헌(光霽軒)에서는 음력10월초1일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에 이어 이튿날 10월초2일 묘사(墓祀)를 모시고있다.■
한훤당 선현 배향 서원 및 유적 현황 (2012.4월)
천곡서원(川谷書院)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해평리(1528년 건립)
배향인물 : 정이천(程伊川)·주자(朱子)·김굉필(金宏弼)·이언적(李彦迪)·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
1871년(고종8)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미복원 상태.
이연서원(伊淵書院)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매암리(1587년 건립)
배향인물 :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1869년(고종6) 대원군 서원철폐로 훼철. 미복원 상태.
미원서원(迷原書院)
경기도 양평군(구 양근군 미원현) 1602년 건립
배향인물 : 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
※ 민족백과사전에는 경기도 가평에 미원서원이 있고
배향인물은 조광조(趙光祖)와 김식(金湜) 외 10인으로 기록되어 있음
인산서원(仁山書院)
충남 아산시 염치면 서원리(1610년 건립)
배향인물 :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홍가신(洪可臣)·기준(奇遵)·이지함(李之菡)·이덕민(李德敏)·박지계(朴知誡)
1871년(고종8)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미복원 상태.
도산서원(道山書院)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일부리(1661년 건립)
배향인물 :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정온(鄭蘊)
1869년(고종6)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미복원 상태,
상현서원(象賢書院)
1576년 건립
평안북도 희천군(양강도 희천시) 희천읍 읍하동
배향인물 :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미복원(註*).
희천서원(熙川書院)
건립년대미상
평안북도 희천군
배향인물 :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화곡서원(花谷書院)
1584년 건립(경현록1568)
황해북도 서흥군 서흥면 화곡리
배향인물 : 김굉필(金宏弼), 이이(李珥), 김유(金楡)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미복원.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1588년 건립(경현록1518)
황해북도 황주군 황주읍 예동리 백록동
배향인물 : 주자(朱子), 김굉필(金宏弼), 이이(李珥), 최충(崔沖), 성혼(成渾), 박세채(朴世采)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미복원.
비봉서원(飛鳳書院)
1596년 건립
황해남도 연안군 연안읍 연성리
배향인물 : 주자(朱子)·최충(崔冲)·김굉필(金宏弼)·이이(李珥)·성혼(成渾)·박세채(朴世采)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미복원.
반곡서원(盤谷書院) 일명 : 율봉서원(栗峰書院)
1613년 건립
황해남도 은율군 남부면 개원리
배향인물 : 주자(朱子)·김굉필(金宏弼)·이이(李珥)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미복원.
경현록에는 봉암서원(鳳巖書院)으로 소개되어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