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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63.2]
천도교현대사 사건과 인물
“혁명 선배에 대해서 우리가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 정운일의 교육활동과 비밀결사활동
탁암 심국보_진주시교구
대구경북지역은 동학 천도교가 태동한 곳이지만,
천도교 세력은 약한 편이며 특히
3.1운동 무렵은 전국에서 세력이 가장 약했다.
일제에 국권을 잃은 이후 천도교를 삶의 희망으로 여기고 많은 분들이 천도교를 찾았다. 포덕 60년(1919) 전후 대구, 안동, 김천, 영천, 성주, 경주, 고령, 의성, 군위, 칠곡, 성주, 선산, 상주, 문경, 예천, 영주, 봉화, 을릉도, 달성, 경산, 영일, 영덕, 영양, 청송 등에서 천도교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이 무렵 대구경북에는 교육활동·비밀결사에 가담한 분들이 천도교를 많이 찾았다.
대구·경북에서의 천도교 교육사업
포덕51년(1910) 이후 천도교는 직간접으로 사학을 운영하거나 관계하였다. 학교경영에 앞서 교리강습소 등을 먼저 운영했다. 교회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포덕 49년(1908) 6월 각 지방에 교리강습소를 설립했다. 특히 야학강습소까지 설치하였는데 강습소에서는 교리뿐 아니라 보통학교 수준의 교육을 실시했다. 또한 1909년 2월에는 중앙에 특별사범강습소를 설치하고 25세 이상의 청년 213명을 선발하여 강습을 시켰다. 1910년 3월에는 각 지방 800개소에 강습소를 설치하였다.
천도교교리강습소는 사립학교로서 인가되지 않은 민간교육시설이었고, 서당이나 사설학술강습회와 달리 일제의 탄압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리강습소는 전국적으로 설립이 이루어졌다. 교리강습소의 교과는, 기본적으로 교리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결코 교리에 치우쳐 있지 않았고, 강습료를 비롯한 제반 비용 또한 실질적으로 강습생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운영난을 겪는 교리강습소가 대부분이었으나 교인은 물론 비교인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유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천도교교리강습소의 교육은 내세가 아니라 현세라는 무대를 무엇보다 중시했기 때문에, 1910년대에 천도교의 교육을 전파하는 데에 기여하였고, 이후 1920년대에 들어 전개된 천도교의 다양한 사회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천도교는 1910년 이후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비롯하여 용산 양영학교·선덕여학교, 마포 보창학교·삼호보성소학교, 청파동 문창보통학교, 청주 종학학교, 안동 봉양의숙, 선천 보명학교, 전주 창동학교, 대구 교남학교·명신여학교 등 31개 학교를 운영하였다.
천도교가 대구의 교남학교, 명신여학교 그리고 안동의 봉양의숙을 인수·경영하면서 대구경북 지역에는 학교 운영에 관계한 분들이 천도교에 많이 들었다.
안동의 거유巨儒 송기식(1878~1949)이 1911년 무렵 천도교에 입교하여 강도원과 전제원으로 활동했다. 안동 유림에서 송기식이 차지하던 위상을 고려할 때 그의 입교는 교세 신장에 큰 힘이 되었다. 특히 송기식이 운영하던 봉양의숙을 천도교에서 1912년 확장 운영한 한 것은 천도교 입장에서도 커다란 사건이었다. 봉양의숙은 지금의 안동시 송천동 998-3 번지에 소재한 하락정으로, 하락정은 봉양의숙 옛터에 건립한 정자다. 주목할 것은 송기식의 일가친척들이 대거 천도교에 입교하였고 함께 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송기식은 ‘유교의 종교화운동’에 힘을 쏟았고, 안동의 천도교는 쇠락하였다.
천도교 대구교구장을 역임한 홍주일(1876∼1927)은 명신여학교 교장으로 취임(1912.7.2.)했고, 3.1운동 직전 예비검속되었다가 2년간 감옥살이를 하다 출옥 후 대구유치원 및 교남학교를 설립했다. 홍주일은 천도교 대구교구 금융원 및 공선원(1914.2~1914.8), 대구 대교구교구장 대리(1914.9), 대구대교구장 및 교구장(1918.1), 대구종리원 종리사(1923.5.1.), 종법사(1927) 등을 역임했다.
이번 호에 살펴보는 정운일(鄭雲馹,1884∼1956)은 대구 서상면 남중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장관동)에서 함경북도 관찰부 주사를 역임한 아버지 정시원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운일의 호는 춘주春洲이며, 1910년 무렵 천도교에 들어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대구명신여학교 교감(1912.7.2.~1913.2.10.)을 지냈다. 그리고 대구교구 전제원(1914.6.5.), 교구 서기(1914.8) 등을 역임하였다.
정운일이 근무한 대구 명신여학교는 대구 여성교육의 선구적 위치를 차지한다. 천도교의 여성교육의 산실이 서울의 동덕여학교라면, 대구는 명신여학교였다. 명신여학교는 순종이 대구를 순시하면서 내린 하사금 200원을 종자돈으로 1910년 8월 26일 대한애국부인회에서 설립했으나 경영이 어려워지자 1911년 6월부터 천도교에서 경영하였다. 천도교에서 인수 당시 교장은 오세창이었다. 이후 명신여학교는 김울산 여사가 학교를 인수하고 이후 복명초등학교가 되었다.
천도교에서 운영한 대구 명신여학교는 대구 여성의 개화교육을 위해 문을 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명신여학교 외에 대륜중·고 전신인 교남학교를 천도교가 운영한 것은 천도교가 서울에서 보성학교, 동덕여학교 등을 경영한 것 못지않게 대구지역 교육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교남학교는 3·1운동 복역 후 출옥한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과 정운기, 김영서 등이 설립했다. 교남학교 초대교장 정운기는 정운일의 동생이었다. 교남학교에는 시인 이상화가 교사로 재직했었고, 시인 이육사가 이 학교 출신이었다. 1940년 교명을 대륜학교로 변경하였다.
정운일은 명신여학교에서 1912년 7월 교감을 맡아 반년 넘게 직위를 유지했다. 이후 천도교 대구교구 활동과 독립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비밀결사를 통한 독립운동
조선총독부의 폭압정치는 1910년대 내내 지속하였다. 헌병경찰제도와 같은 무력,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각종 악법, 그리고 태형과 같은 야만적인 형벌제도 등이 일제의 통치수단이었다. 그리고 경제적 수탈이 이어졌다. 농가 1호당 경지면적은 1910년의 1.63정보에서 1920년 1.42정보로 감소했다. 영세농이 그만큼 더 늘어났다는 의미다. 농지를 잃은 농민들은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해외 유망의 길을 떠났다. 1916년 화전민의 수는 24만 5천 명에 달했으며, 1910년부터 1920년 사이에 만주로 이주한 사람은 22만 7,970명에 이르렀다.
일본인들은 1910년 이전에는 경성, 인천, 부산, 마산, 군산, 목포, 대구, 원산, 청진, 평양, 진남포, 신의주 등지에 상권을 형성했고, 1910년 이후 내륙 각지로 진출하여, 1919년경에는 “전 조선 이르는 곳마다 내지인의 상점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일제에 대항한 의병활동은 탄압으로 국내 활동이 어렵자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넘어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했다. 그리고 1910년대 국내에서는 비밀결사를 통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신민회, 달성친목회, 조선국권회복단, 대한독립의군부, 풍기광복단, 민단조합, 대한광복회 등이다.
대구는 무장의열투쟁의 중심지였고, 대구지역의 천도교인들은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등에서 활동했다. 정운일은 1914년까지는 대구교구 전제원이나 서기로 활동했고 이후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단 결성에 참여한다. 당시 홍주일 대구교구장의 활동도 마찬가지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1월 15일(음) 경북 달성군 수성면 대동면 안일암이라는 암자에서 조직되었고 본부는 천도교대구교구였다. 이들은 상업조직을 광범하게 활용하였다. 대표적인 상업조직은 박상진의 상덕태상회, 서상일의 태궁상회, 윤상태의 칠곡군 왜관 향산상회, 안희제의 부산 백산상회, 통영의 곡물상 서상호, 마산 이형제의 원동상회와 김기성의 환오상회 등이었다. 상업조직은 일제의 무력적 탄압이라는 악조건 하에서 비밀지하운동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정보연락과 재정기지의 역할을 수행했다. 일경의 감시망을 피하고 부호들에게 쉽게 접근하여 활동하는 데는 상업조직이 유리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단원 박상진·정운일 등이 풍기의 광복단과 연계하여 1915년 7월 대한광복회를 결성하면서 조직의 활동영역이 더욱 넓어졌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모으고 반민족적 부호와 지주를 처단하는 것을 당면과업으로, 비밀·폭동·암살·명령을 행동강령으로 하고 있었다.
대한광복회 결성 당시 조직원들은 “오인은 대한독립광복을 위하여 오인의 생명을 희생에 공供함은 물론, 오인이 일생의 목적을 달성치 못할 시는 자자손손이 계승하여 수적讐敵 일본을 완전 구축하고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절대 불변하고 결심 육력戮力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서고誓告함.” 이란 결의문을 채택하고, 다음과 같은 실천강령을 마련하였다.
1. 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2. 남북 만주에 군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3. 종래의 의병 및 해산 군인과 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
4. 중국·아라사 등 여러 나라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5. 본회의 군사행동·집회·왕래 등 모든 연락 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에 두고, 한만韓滿 각 요지와 북경·상해 등에 그 지점 또는 여관·광무소 등을 두어 연락 기관으로 한다
6. 일인 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수시·수처에서 처단하는 행형부를 둔다
7.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의 달성을 기한다
정운일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16년 8월 김진만·김진우·최병규 등과 함께 권총을 휴대하고 김진만의 장인인 대구 부호 서우순의 집에 잠입하였다. 이를 목격한 그 집의 머슴과 격투가 벌어졌고, 이러한 상황에서 김진우가 머슴에게 권총을 발사하였고 일행은 일단 피신하였다. 그러나 곧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정운일은 1917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7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하였다.
반민특위 경북책임자
‘대구권총사건’ 이후 정운일의 활동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정운일이 다시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8.15 광복 이후다. 그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고, 미군정청 경북 상임고문을 역임했다. 1948년에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앞서 경북 선거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임되었고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경북책임자가 되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도조사부책임자는 1948년 12월 22일 국회에 제안되어 이듬해 2월 승인되었다. 정운일에 대한 국회 승인과정에서 당시 배중혁 봉화군 국회의원(대동청년단)의 반대가 있었으나, 조헌영 영양군 국회의원의 변호로 79 대 19(재석140)로 가결되었다. 조헌영 의원은 다음과 같이 정운일을 변호하였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너무 나이가 적어 기미운동 때에 어려서 거기에 언제 했느냐고 해 가지고서 말이 많아서 부결되었읍니다. 이번에는 나이가 많아서 일을 담당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이 이유인데, 이분은 내가 잘 압니다. 지금부터 33년 전에 내가 대구에서 중학에 다닐 때에 하숙한 집에서 정영백이라고 하는 노인의 집인데 그때에 젊은 주인이 광복단사건으로 징역 15년을 받고서 산다고 하는 말을 들었읍니다. 최근에 내가 정운일 씨를 만나보니 그분이 곧 그때의 광복단사건으로 징역을 살었다고 하는 분인 것을 알었어요. 그분이 나이가 많으나 본래 초년에는 권총사건으로 두 번이나 광복단에 직접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오래 징역을 지내신 분이고 한데도 놀래리만큼 건강이 대단히 좋습니다. 나하구 씨름을 해도 나는 못 당할 만큼 건강이 좋은 것은 내가 작년 여름에도 보았읍니다.…그리고 우리가 혁명 선배에 대해서 우리가 좀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지 여기에 또 손 안 들고 이분을 폐기한다고 하면 안 될 줄 압니다. 나는 아무한테도 이분을 폐기할,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경북반민특위는 정운일이 책임자가 되어 1949년 3월 중 한익동(매일신보 주주이자 대구지국장), 정해붕('임전보국' 경북이사), 허지(경북도 평의원, 대구부 의원), 김성재('임전보국' 경북이사), 김재환(경북도평의원) 등을 체포했고, 배국인(대구정동연합회장)은 자수했다.
그리고 고원훈(중추원 참의, 임전보국단 부단장)은 1월 27일 문경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문명기(중추원 참의, 비행기헌납)는 2월 1일에는 영덕에서 체포되었고, 서병주(경북도평의원, 참의)는 3월 2일 자수하였다. 대구 갑부 서병조는 3월21일 서울에서, 친일거두 박중양도 같은 날 대구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친일경찰관에 대해서는 국민감정이 나빴고 경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직 대구경찰서장 유철(일제때 경부)은 경찰의 제복을 입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수갑에 채워져 연행되었고, 고등계형사 문구호·김성범·송세진·배만수 등이 체포되었다. 경주의 서영출, 대구의 남학봉은 서울의 특경대가 체포하였다. 친일 악질경찰로 악명이 높던 최석현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고위 친일관직을 지낸 현직의 행정관리들에 대한 체포는 기대 이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노골적인 반민특위 방해공작 결과였다. 무엇보다 동족을 욕보이는데 앞장섰던 악질 친일관리들을 징벌했어야 옳았지만, 반민특위는 한때의 어설픈 소동극으로 마무리되었다.
미완의 실천, 교정쌍전
반민특위 활동 이후 정운일은 1956년 2월 5일 대구에서 환원하였다. 정부는 1977년 정운일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달성군 가창면 오리에 안장되었던 그의 유해는 2007년 10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대구경북 지역은 천도교 활동이 약한 곳이었지만, 봉양의숙·명신여학교·교남학교 등 교육활동과 조선국권회복단·대한광복회 등 비밀결사 활동을 통해 천도교의 활동이 왕성해진 곳이다. 정운일은 홍주일 대구교구장 등과 함께 교육활동과 비밀결사활동을 함께 했다. 특히, 조선총독부의 폭압정치에 저항한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활동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비밀결사 단체는 일제에 대항하여 ‘비밀·폭동·암살·명령’ 등으로 치열한 의혈활동을 보여주었다.
정운일은 ‘대구권총사건’으로 7년 형을 받는 등 의혈활동의 중심에 있었고, 광복 후 대구경북지역의 반민특위 책임자였다. 그러나 정운일의 ‘교정쌍전’의 실천은 미완의 과제로 오늘날의 천도교인들에게 넘겨졌다. 아래의 경구로 정운일의 삶을 기억해 둔다.
“과거의 무수한 희생자들을 지금 기억해 내어 구원하지 않으면, 역사의 진보도 미래도 없다. 우리가 패배당한 희생자들의 고통과 비탄을 복구하고, 그 세대가 투쟁 대상으로 삼았으나 이루지 못했던 그들의 목표를 완수할 필요가 있다.” /미카엘 뢰비, 『발터 벤야민: 화재경보』(양창렬 역, 난장,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