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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정독하는 것 처럼 진중하게 산을 만나고 싶다
어린시절 대단한 독서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책을 접한 것이 아니라 인쇄물들을 접했을 뿐이다.
일년에 몇 권 뿐이라도 요즘은 정독을 하면서 책에 담긴 풍성한 생명력을 느끼려한다. 지금은 한 달째 중세의 가톨릭 수도사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가 주는 감동에 사로잡혀 있다.
산도 마찬가지다. 부지런히 산행을 했으면서도 정작 산을 모르는 것은 건성으로 산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제는 책을 정독하는 것 처럼 진중하게 산을 만나고 싶다.
설악산과 지리산부터 시작할 생각이다. 도화지위에 지도 정도 그릴 수 있는 북한산 만큼은 아닐 지라도 설악산의 눈.코.입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정도는 알고 싶다.
감명 깊은 명작을 다시 읽을때처럼 설악과 지리를 새롭게 알아가는 감동도 대단할 것이다. 분주한 내 일상이 그것을 허락할지 모르지만 시간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옛 친구를 만나는 설레임으로 그 산들을 찾아 떠나려 한다.
2011년 8월 15일
산행 파워블로거 강산님과 야생화와 버섯 그리고 리지 전문가로 유명하신 호박님이 준비한 매우 특별한 설악산 계곡 트래킹에 따라나섰다.
이번에 들어간 이름도 생소한 아니오니골은 백담사 계곡과 십이선녀탕 계곡 사이에 있는 심마니들이나 들낙거리는 미지의 골짜기다.
너무나 아름다워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 해서 아니오니? 계곡이 깊고 험해서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하여 아니오니? 골짜기라 한다. 산행 초반부터 깊고 좁은 협곡이 길을 막았다.
계곡을 울리는 우렁찬 폭포 소리를 들으면서 협곡 위쪽으로 나있는 희미한 소로를 따라 올라가는데 하류인데도 발 아래 흐르는 계류는 수정처럼 맑았다.
산행을 시작한지 십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우린 여러개의 폭포와 투명하다 못해 짙은 녹색의 소를 지나면서 산아래 세간의 일들이 뇌리에서 지워졌다. 그리고 물의 흐름 뿐만 아니라 시간까지 정지된듯한 명경지수가 걸음을 멈추게 한다.
심마니의 제단
아니오니골 초입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있는 절벽 아래 돌로 쌓아놓은 제단이 있었다. 천 조각이 걸려있고 술잔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어 그리 정갈해 보이진 않았지만 심마니들이 입산하기 전에 제를 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뱃 사람들처럼 심마니들 또한 귀한 약초를 찾아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험산을 헤메야 하기 때문에 산행의 안전을 기원할 것이고 특히 산삼같은 경우엔 산신령이 점지해준다고 믿기 때문에 정성껏 제를 올린다고 한다.
우리도 걸음을 멈추고 트래킹의 무탈함을 기원하였다.
원래 인적이 드물어 길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희미한 데다가 이번에 내린 큰 비 때문인지 아예 길이 보이지 않는 구간이 많아 예리한 통찰력을 발휘하여 비교적 쉬운 곳을 찾아 아르바이트( arbeit 길을 개척한다는 의미의 산악용어 )를 하는 호박님 뒤를 따라 상류를 향해 올라가는데 갈 수록 빼어난 경치가 발목을 붙잡는 바람에 일행들로부터 자꾸만 뒤쳐진다. 지금까지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다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은 아니오니? 골짜기다.
계곡으로 들어갈 수록 숲은 점점 울창해지고 계곡의 수량도 오히려 풍부해진 것 같고 폭포의 스케일도 점점 커져 마치 시간을 거슬러 원시를 향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무를 칭칭 휘감고 있는 굵은 다래덩쿨을 보니 어린시절 열광하면서 보았던 텔레비젼 시리즈 [타잔]이 생각났다.
바위와 고사목은 두터운 이끼옷을 입었고 관목사이엔 고사리 종류인 관중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바로 그 판도라 행성같은 곳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렇게 깊은 산중은 난생처음이 아닌가 싶다.
여기저기 쓰러진 고사목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수명이 다 되어 생명력을 잃은 아름드리 나무들인데 이끼를 잔뜩 뒤집어 쓴채 지렁이. 온갖 벌레 버섯이 공생하면서 살아가는 소중한 생명의 터전으로서 역할을 하면서 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무가 본연의 숭고한 생애를 끝까지 마칠 수 있는 이런 곳이야 말로 원시림이라 할 수 있겠다.
한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가책에 사로잡힐만큼 아니오니 계곡은 순수자연 그대로였다.
그곳엔 산양이 살고 있다
설악산이 최고의 명산이라는데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고 그리고 수학여행때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다녀온 친근하게 여겨지는 산이다.
하지만 설악산엔 눈에 들어오는 울산바위나 비선대 뿐만 아니라 운무 저편엔 또 다른 모습을 지닌 신비로운 봉우리와 골짜기들이 있다.
이번에 아니오니골과 음골 트래킹을 통해서 지극히 일부분이었지만 지금까지 접했던 것과는 판이한 설악의 진면목을 엿보았다. 지난 1편에 이어 산양이 살고 있는 설악의 속살을 공개한다.
골짜기로 깊히 들어갈 수 록 오히려 계곡의 수량이 늘어난다. 점점 선명해 지는 수목과 이끼의 푸르름도 이미 세속의 색상은 아니다.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저 봉우리 넘어 아니오니골 남쪽 능선엔 응봉이 있고 그 아래쪽엔 십이선녀탕이 있다.
아니오니골을 거슬러 오르면서 강산님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전국의 산하를 누벼 오셨건만 산만 생각하면 설렘이 앞선다는 타고난 산꾼과 나누는 얘기도 온통 산이다.
오르고 또 오르면서 만나고 또 만나는 입이 딱 벌어지는 선경. 세월아 내월아 한 없이 더딘 걸음 산행 대장 호박님 왈 " 천천히 가면서 실컷 구경 하세요. "
너울거리는 한삼자락인가. 백색 명주천 펼쳐진 살풀이 길인가. 상서로운 바람 불고 무지개 어른 거리는 이 골이 정녕 무릉도원 그 선경이런가.
뉘라서 보랴. 홀딱 벗어도... 세번이나 짙푸른 소에 몸을 담그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포로 몸을 씻었다. 세사에 찌든 홍진 다 떨어져 나가더라.
아니오니골에서 음골로 넘어가기 위해 가파른 산비탈을 기어오르는데 오른쪽 허벅지가 갑자기 경직되고 옆구리에 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 식후 달리기 할때 오는 그런 통증...)
점심때 호박님이 주신 산삼과 갖은 약초로 담근 술을 넙죽 넙죽 다섯잔이나 받아 마신 것이 화근이었는지 모르지만 전에도 가끔씩 이렇게 허벅지에 쥐가 나곤 했으니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 산행중 찬물에 갑자기 발을 담글때 쥐내리는 경우 스트레칭 부족으로 짐작 )
일행들에게 민폐를 끼칠까봐서 참고 오름질을 계속하는데 허벅지에서 무릅 위쪽 근육까지 경직되고 통증을 참을 수 없어 일행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초면인지라 그때까지 서로 인사도 변변히 나누지 못한 뫼오름님과 대단한 산꾼이신 느티나무님 그리고 연세가 가장 많으신 어르신께서 도와 주시는 바람에 일행들의 일정에 큰 차질을 주지 않고 남은 산행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런 산행에 있어서 동료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철저한 산행 준비가 왜 필요한지 다시한번 깨닫는 순간이다. " 산행전 스트레칭 필수(쥐내림을 예방), 산행시 근육이완제 지참 필수( 쥐내림 치료 ) "
설악의 주인공들
산양 설악산에 다수 서식한다고 알려져 있다. 쉬는 도중에 산양의 것이 분명한 배설물을 보았다. 쥐내림의 고통을 당하고 있던때라서 카메라에 담지는 못했다. 설악산이나 DMZ같은 인적이 없는 고산에 서식한다고 알려진 멸종위기 희귀종이다.
칠점사 놈은 음골 계곡 바위 위에 또아리를 틀고 오랜만에 찾아온 햇볕에 몸을 말리고 있었다. 까치 독사로도 알려진 맹독성 뱀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희귀종이다. 여름이나 가을철 오지산행을 할땐 뱀에 물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특수한 스페츠와 토시를 착용해야 한다.
아기 멧돼지 음골로 내려오는 도중 무수한 멧돼지 흔적과 방금 다녀간듯한 배설물 흔적을 보다가 결국 작은 아기 멧돼지 한마리를 만났다. 엄마나 아빠도 가까운 숲속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호박님의 재미난 얘기 어느 산꾼이 산행 도중 아기 멧돼지 한마리를 길에서 주어 안고 가는데 갑자기 어른 멧돼지가 쫓아와서 아기를 놓아주고 나무위로 피신했는데 성이 안풀린 그놈이 한참을 머리로 나무를 지어박아 혼비백한 했다는... 산에서 만난 아기 멧돼지는 안아보지도 말것 ㅎㅎㅎ
이 정도 깊은 산림이라면 표범이나 시라소니같은 고양이과 동물들의 서식 환경으로도 부족함이 없겠다. 겨울철에 설악산을 비롯한 백두대간에서 대형 고양이과 포유류의 발자국이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 호랑이는 아니라고 함 )
오지 산행 단상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는 심산 유곡, 첩첩 산중에서 원시 그대로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오지산행 가끔 이웃님들의 블로그를 보면서 그런 산행을 꿈꾸어왔다.
이번에 다녀온 아니오니 골과 이웃에 있는 음골은 제법 알려진 곳이라 오지산행 마니아들에게는 오지측에도 끼지 못한다고 하지만 원시의 자연을 맘껏 체험했으니 그 꿈을 이룬 셈이다.
그러나 아니오니골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마음 한켠에 부담이 찾아왔다. 등산 허용 여부를 떠나 어느 발걸음이 내 발걸음을 불러왔을 것이고 내 발걸음은 또 다른 발걸음을 불러와 결국 이 천혜의 자연은 결국 우리가 보고 있는 무수한 명산들 처럼 오염되고 말꺼라는 염려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나무와 토양의 지렁이와 온갖 버섯들과 이끼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완벽한 평형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한 사람일지라도 숲의 평화를 해치는 발걸음과 소음, 옷이나 신발에 묻혀온 숲 바깥의 온갖 세균과 박테리아같은 이물질들을 옮겨올 수 있고, 숲에 사는 생물들에게는 이 낯선 방문자가 엄청난 충격으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숲엔 이것을 정화시키는 탁월한 능력이 있지만 이런 반갑지 않은 방문이 거듭된다면 숲도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원시의 숲엔 온갖 귀한 약재들이 많아서 심마니들이 이런 산을 들낙거리며 전문적으로 채취했다. 그러나 그들은 산과 더불어 그런 약재들까지도 신성시 했기 때문에 남획하거나 훼손하는 것은 금기시 되었다. 최근 무수한 아마추어 약채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오지 산들도 몸살을 앓고 있다. 산행을 하면서 귀한 산삼이나 상황버섯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어느 산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당귀나 더덕 몇 뿌리를 캐거나 느타리 버섯을 따는 행위 자체까지 잘 못되었다고 볼 수 는 없지만 우리나라의 모든 오지마다 무수한 등산화들이 들어가 희귀한 식물들을 죄다 채취해서 몇 십년 안에 그것이 모두 멸종에 이르는 비극은 피해야 한다.
산림청과 환경부같은 정부기관에서도 우리나라 생물다양성 확보를 위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산을 사랑하는 우리들의 의식의 변화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우리 모두의 화두로 남겨두고 오지여행가( 중국 샹그릴라)이신 블로거 춘향 오빠의 어록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친다.
" 발자국 조차 남기지 말자 "
계곡과 능선 몇 개를 넘다보니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다.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 이런 심산유곡에서 길이라도 잃는다면 엄청난 낭패일 것이다. 산에서는 함께 하는 일행들이 이 세상 누구보다 가깝고 귀중한 이웃임을 다시한번 절감했다. 함께 해주신 호박님.강산님.라임님.뫼오름님.느티나무님.다락님.그리고 어르신께 이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
(나종화 객원기자 )
[ 출처 : 서울포스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