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싸움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꺼지라구!
- 신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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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마지막 주가 열렸습니다.
계절의 순환은 잡을 수 없이 빠르게 돌아갑니다.
마른 나무들은 단풍이 채 들지 못해서 가지 끝에서 색도 없이 비틀려갑니다.
가뭄에 작은 비 내려 그것도 달아서 다시 단풍이 곱게 들겠지요.
척박하면 더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것이 자연이고 또 생이라 감히 생각해봅니다.
집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은 평안함 그 자체입니다.
돌아올 곳을 두고 떠난다는 것은 사치스러울 만큼 평안한 일입니다.
멀리 남쪽으로 발길을 둘 때면 더욱 설레이는 것은 반도의 동쪽이나 서쪽 끝하고는 다른,
내가 한반도의 발끝에 서있구나, 다른 나라에 비하면 턱없이 또 작을 지도 모를 국토를
먼 시간을 달려가서 딛을 때의 설레임은 언제나 어린아이의 그 마음과 같습니다.
그렇게 기차로 한밤중을 달려 도착한 새벽 여수는 한없이 고요했습니다.
달리는 자동차도 없이 고요한 거리를 가뭇없이 걷다가 피곤한 몸을 누일 곳을 찾았습니다.
서너 시간 눈을 붙이고 다시 거리로 나와 느긋한 아침으로 간장게장 백반을 들었습니다.
아침밥을 거둬먹고 오동도를 돌아 바다를 눈에 한껏 품어 보고 돌아 나옵니다.
여천 사는 선배가 돌섬을 돌아준다 해서 주차장에 앉아 기다립니다.
관광버스 사이에 옹기종기 자리를 펴고 앉아서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
김치인지 반찬을 손가락으로 집어 입을 한껏 벌리고 먹는 사람을 보니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입에 군침이 돌았습니다.
주차장 한쪽에서는 갓이며 마른 해산물을 파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갓 여러 단을 흥정해 들고 버스로 오르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흐뭇한 보였습니다.
드디어 차를 얻어 타고 돌섬을 돌아 다시 점심 먹으러 황소게장 집으로 갑니다.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앉아서 늦은 점심을 먹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누구나 원초적으로 행복해지기는 같은 마음인가 봅니다.
그 소란함 속에서 불평 하나 없이 말없이 밥을 먹는 사람들.
게장과의 즐거운 식사가 짧아서 아쉬웠지만 행사장으로 향했습니다.
행사장에서 반주의 여파로 몰아치는 졸음을 쫓아버리지 못해 형편없이 구겨졌습니다.
여순사건이 제주도 4.3과는 다르게 꽁꽁 숨겨져 있어서 슬픔이 더 컸겠지요.
봉인이 풀리고 조금씩 세상 사람들에게 그 숨겨진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그 아픔과 그 이후의 의미를 다시 되짚어가는 뜻 깊은 자리가 내 있겠지요.
끝까지 함께 자리하지 못하고 중간에 돌아와서 애쓰신 분들께 죄송한 마음입니다.
여수를 벗어나 순천으로 가는 도중에 보았던 갯벌과 풍경들이 눈에 삼삼합니다.
순천만에는 처음 가보았는데 그 커다란 키의 갈대 숲길을 걸을 수 있어 꿈만 같았습니다.
소리가 보이는 갈대밭, 갯벌 위를 덮고 있는 칠면초의 보랏빛과 갯벌의 회색빛,
보색을 그대로 들어내 멋진 옷 한 벌 지어 입었으면 싶었습니다.
갈대 밭길을 따라 걷는 일은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순연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바람에 끝없이 소리를 올려주는 갈대의 군무를 한없이 누리기도 했습니다.
저절로 손끝에 바람이 실리고 그 바람이 바로 리듬으로 살아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바람 따라 바람의 소리 따라 마음은 한껏 춤사위가 살아났습니다.
혼자서 먼저 달려가 꼬마 아이처럼 팔랑거리며 춤을 추듯 뛰어보기도 했습니다.
그곳의 바람 소리는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바람이 보이는 곳, 바람이 춤을 추는 곳,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와 이영애가 소리를 담아내던 그 장면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순천만 사이를 흐르는 물길, 굽이굽이 느긋하게 휘어져 그대로 장단이 되는 물길은
내셔날지오그래픽에 실린 인도의 백워터보다도 아름다웠습니다.
전망대에 올라가 바라보는 순천만을 보니 조물주의 그 신묘함에 다시 감탄을 합니다.
아름다운 순천만, 그 강물 위로 녹아드는 세 떼를 보았습니다.
예전의 순천만은 더 아름답다는 분들의 아쉬움을 들으며 그 풍경을 상상해봅니다.
내 것 같이 누리고 싶어서 사람들은 자꾸만 자연을 훼손합니다.
좀 더 가까이 가고 싶어서 멋대로 가공하고 길을 내 버립니다.
결국 새 들이 떠나고 칠면초 밭은 듬성듬성 땜빵이 생겼습니다.
함초 대신 칠면초를 뜯어가 돈을 챙기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나봅니다.
낙조를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은 아쉬웠지만 언제고 가보리라 마음을 잡습니다.
이번 여행은 내려가 끼니마다 간장게장을 먹었던 기억도 즐겁습니다.
사실 일요일 점심에는 게장에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좋아하는 간장게장도 먹고, 오동도에도 다시 가보고, 순천만도 가보고,
여순사건을 기리는 행사에도 참여하고, 참으로 길고 긴 여행이었습니다.
다시 가도 마음이 그득해질 남녘으로 또 떠나고 싶습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다시금 언제 어디로 갈수 있을지 다음 여행을 기대합니다.
일하다 다시 아득해지면 떠나려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망가지지 않고 다시 걸어가기 위해서 일을 하러 돌아옵니다
내 자리로, 내 일터로, 내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언제나 평안합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입니다.
2008. 10. 27. 월. 이명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