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4]
살며생각하며
페스트, 눈먼자들의 도시, 통천서
이수진_문화예술교구
코로나19가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세계의 관심은 온통 전염병으로 몰린다.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졌던 괴질들이 다시
호출되고 각계에서는 이 전염병이 변화시킬
사회 현상을 예상하며 준비작업에 돌입할 자세다.
인류의 발전은 늘 위기와 함께 했다.
요즘 전염병이 창궐한 사회의 모습을 잘 그려낸
이야기들이 다시 조명을 받는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1947년)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1995년)와 아주
오래된 이야기로 1020년 경 송나라 인종 때
수도에 닥친 역병을 이겨낸 이야기다.
『페스트』의 첫 문장은 “4월 16일 아침 의사
배르나르 리유는 자기의 진찰실을 나서다
층계참 한복판에서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도시 곳곳에서
발견되던 죽은 쥐 떼의 모습이 어느 순간
시민들의 모습으로 대치되며 인구 20만인
194×년 프랑스의 오랑시(市)는
죽음의 도시로 변한다.
처음 시민들은 각각 이 전염병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에 따라 행동한다.
의사 리유는 매 순간을 성실하고 단호하게
페스트와 맞서 싸운다. 그는 보건위원회를 열고
페스트에 대처할 현실적인 방법을 논의하며,
시민들의 목숨을 보호하는 것을 최선의 목표로
삼는다. 늙은 의사 카스텔은 백신을 만들고,
의식 있는 시민들은
보건대를 만들어 봉사활동을 벌인다.
시청 하급 직원 그랑은 퇴근 후 행정적으로
탄탄한 기반에 되어 시민을 도울 수 있는
보건대의 통계 작성 업무를 맡는다. 오랑으로
취재를 왔다 고립이 된 기자 랑베르는 이방인으로
도시의 일들을 관망하다 시민의식이 생기며
보건대에서 활동하게 된다. 리유처럼 처음부터
변함없이 활동하는 시민이 있지만, 중간에
랑베르처럼 어떤 계기로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는 시민이 있다.
인물들 중에서 가장 먼저 자신의 생각을
바꿔야 했던 인물은 파늘루 신부이다. 신부는
페스트를 ‘신에 대적한 사악한 인간에 대한
신의 징벌’로 규정하며 이 재앙을 통해 인간은
신에게 복종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부는 판사의 아들인 한 어린아이의 죽음을
지켜본 후 커다란 갈등을 일으킨다.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죄 없는 영혼들까지 페스트에 걸려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면 이 재앙은
정의롭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코타르는 범죄를 저질러 도망치는 자이다.
그는 페스트가 창궐하며 수사망이 느슨해지자
다시 암거래, 불법 알선 등으로 돈을 끌어모아
흥청거린다. 그는 “나는 훨씬 지내기가 좋아졌다.
(···) 페스트 안에 있는 게
더 편하다”라고 떠벌린다.
『눈먼 자들의 도시』의 첫 장면은 평범한 어느 날
오후, 차를 운전하던 한 남자가 차도 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 갑자기 우유에 빠진 것처럼
눈앞이 뿌옇게 변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남자가
안과를 찾게 되며, 안과 의사, 의사의 아버지,
환자들이 모두 눈이 멀어버린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실명 상태와 믿을 수 없는 전염성에
심각성을 느낀 의사는 상황을 곧장 보건당국에
알리자 정부는 백색실명을 전염병으로 규정하고
이 병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격리 수용하기에 이른다.
그 와중에 의사의 아내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병을 피하게 되지만, 눈먼 남편을 보살펴야
하기에 본인도 감염이 되었다고 하여
남편과 함께 수용된다. 정부는 병원으로
군인들을 파견한다. 그러나 전염병이 무서운
군인들은 이탈하는 자만 사살할 뿐이어서
시설에서 수용자들은 무방비로 방치된다.
볼 수없는 자들만 수용된 시설은 곳곳이
온갖 오물로 더렵혀지고 위생 상태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용소는 혼음과
불량배들에 의한 성폭행과 살인까지 일어난다.
그 안에서 안과 의사 부인은 눈이 먼 것처럼
위장하여 수용자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녀는 폭력과 이기주의가 난무하는 혼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책임감으로 희생과 헌신을 다한다.
수용소에 갇힌 시민들은 서로의 고통을 함께하며
순간순간의 위기를 함께 해결해 나간다.
이 소설에서도 『페스트』의 코다르처럼 위기 뒤에
숨어 개인의 이익을 탐하는 자가 나타난다.
불량배 중에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자가
있었는데, 어둠에 익숙한 이 자는 패거리에 끼어
수용자들에게 지급되는 식량을 독차지한 뒤
총과 무력으로 수용자를 갈취한다. 돈이나 보석,
여자를 바치면 음식을 조금씩 나누어주며 권력을
확장해 나간다. 의사의 아내는 결국 불량배
우두머리를 죽이고 그들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수용시설에는 불이 나게 되며 수용자들은
밖으로 나온다. 군인들도 모두 감염이 되어
떠난 시설에서 수용자들은 흩어지고 안과의사
부인이 이끄는 소수 인원은 이미 감염자들로
엉망이 된 도시로 들어온다. 여자는 이들을
인도해 배설물과 쓰레기 시체를 뜯어먹는 짐승들
속에서 식량을 구하러 다니다
자신의 집으로 오게 된다.
그러나 이미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도시에서
살아남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이들은
의사 부인의 도움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지내는
동안 서로 간에 진정한 인간미를 느끼며 타인을
위해 사는 법을 깨닫게 된다. 이들은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살길을 찾으러 떠나려 하는 순간,
그들 중 신호등 앞에서 처음 눈이 멀었던
사람부터 시력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시력을
되찾은 사람들이 환호를 지르는 그 시간, 의사의
아내는 우윳빛 하늘을 보고 있다. 감염 증세가
나타난 것이다. 『페스트』에서 백신을 맞은
시민들이 모두 회복되었는데, 마지막에 감염이 된
타루를 연상하게 하는 장면이다. 두 작가 모두
전염병은 종결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1020년경 송나라 인종 때 일이다. 송사에
의하면 송나라 인종 시절 갑자기 수도에 역병이
창궐했다. 인종은 궁중 어의에게 처방을 연구하게
하고 내시에게는 궁궐에서 귀하게 보관하는
약재를 꺼내오게 한다. 어명을 받은 내시는
코뿔소 뿔 2개를 가지고 임금 앞으로 나왔다.
그런데 내시가 가지고 온 코뿔소 2개 중 하나는
통천서이다. 통천서란 코뿔소 뿔의 한 종류로
광채가 신비로워서 고관대작의 허리띠에
장식으로 쓰는 귀중품이었지만, 귀한 약재이기도
하다. 내시는 인종에게 이 통천서는
황제를 위하여 아껴두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그러자 인종은 말했다. 내가 기이한 물건을
귀히 여기느라 백성을 천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더냐. 인종은 그 자리에서 통천서를
부수어 백성의 병을 고치는 약으로 썼다.
당시 인종은 역병이 창궐한 것은 오직 자신이
하늘의 꾸지람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성심을 다해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세세히 살펴
보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도에 퍼졌던
전염병이 점점 사라졌다.
이때 조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조변은
언제나 밤이 되면 의관을 갖추고 향을 피운 다음
매일 자신이 낮에 한 일을 하늘에 고했다. 그는
하늘에 고할 수 없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에 전염병이 발생하자 그는
지혜가 생겼다. 조변은 직접 나서서 구휼을
주관했다. 그는 백성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밤낮으로 애를 썼고 어느 순간에도
태만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사람들을 마음속에 두었고 먼저
취약계층부터 돌봤다. 당시 나라 안은 가뭄과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절반가량이나 죽어
나갔지만, 조변이 구제하는 곳은 신기하게도
식량이 부족하지 않았고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부임한 지역은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또한 억울한 송사가 없었으며 감옥은
텅 비었다. 이는 모두 하늘에 고할 수 없는 일을
하지 않은 결과였다.
또 이때 절강성에는 관사인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새해 첫날 관사인은 일찍이
문을 나서다 깜짝 놀랐다. 기골이 장대하고
흉악하게 생긴 귀신들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관사인은 그들에게 무슨 일로 그곳에 왔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우두머리 귀신이 말했다.
우리는 역귀인데 새해 첫날 사람들에게
전염병을 퍼뜨릴 예정이다. 그러자 관사인이
물었다. 우리집에 그 병에 걸릴 사람이 있소?
역귀는 없다고 대답했다. 이상하게 생각한
관사인은 역귀에게 물었다. 그 연유가 무엇이요.
역귀는 말했다. 당신 집안은 조상 삼대에 덕을
쌓고 선행을 했으니 당신 집안사람 중 병이 걸릴
이는 없을 것이요. 아니나 다를까 그해 마을에는
역병이 크게 유행했지만 관사인과 그의 가족들은
모두 무사했다고 한다.
그들의 재앙과 2020년,
우리가 처한 재앙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어떤 재앙이 오든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개인 또는 사회의 일원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여태까지
역사를 보면 인류는 결코 전염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우리는 일생에서 언제
어떤 형태의 전염병으로부터 공격을 당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자신이 놓인 위치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야 하는 그 기본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그렇기에 인종 때 조변처럼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페스트』의 베르나르 리유처럼,
『눈먼자들의 도시』의 안과 부인처럼, 각자의
위치에서 매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하는 길만이 최선이다. 오늘날 코로나19와
맞서 있는 우리에게 앞의 이야기들이
전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