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7]
지상강좌
생명 존중과 자살 예방을 위한 종교인의 성찰
- 물신주의와의 전면전과 고통의 치유
김용휘_서강대
최근 의정부에서 생활고를 비관하여 한 가장이 아내와 딸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는 참혹한 사건이 일어나 큰 충격을 주었다. 5월 26일에는 인천 연수구에서 역시 생활고를 비관하여 40대 남녀가 자택에서 동반자살한 기사가 났다. 또 5월 8일에는 김포시 구래동의 아파트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40대 여성이 10살 아들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되었다. 또 어린이날에 일가족 4명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17년 기준으로 1년에 1만 2463명이 자살을 했다. 하루에 약 35명이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교통사고 3781명에 비해서도 세 배나 높은 숫자이며, 산업재해 971명에 비하면 열 두배나 높은 숫자이다. 또 1년간 범죄에 의해서 살해된 숫자 301명에 비해서 40배나 높은 숫자이다. 한국에서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인물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울릉도 인구가 9700명인 것을 비교하면 매년 울릉도 인구보다 많은 사람들이 생을 스스로 마감하고 있다.
이 숫자는 전쟁 중인 나라의 사망자 수(군인+민간인)보다 많다. 최근 10년간 한국에서의 자살자 수는 약 15만 명으로 9년간의 이라크 전쟁 사망자 수인 3만 9000명보다 무려 4배가 많다. 자살문제의 심각성은 자살을 시도했지만 사망하지 않은 자살 시도의 경우까지 고려하면 얼마나 심각한 지 알 수 있다. 연간 자살 시도자는 매년 30만~60만 정도로 추정한다.
특히 10대부터 30대 젊은 층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고 한다. 노인자살률은 더욱 심각해서 10만명당 54.8명인데 이는 OECD 평균인 18.4에 비해서 거의 세배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빈곤과 노인성질환으로 삶을 포기하는 노인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2017년 기준으로 OECD 국가 중 2위이다. 그나마도 세계자살률 1위인 리투아니아가 OECD에 편입되면서 2위로 내려앉았다. 사실상 지난 10년 넘게 1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2000년에 만명당 16.6명에서 2005년 29.9으로 급등했으며, 2010년 33.5명으로 최고치를 찍은 후에 2011년 31.1명, 2012년 28.1명, 2014년 27.3명, 2017년 24.3명으로 점차 감소 추세에 있긴 하지만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는 OECD 평균인 11.6 보다 두 배 이상 높은 수치이다.
자살률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 한국 사회가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삶이 불행하다는 것이다. ‘살고 싶지 않은 나라’ 라는 뜻이다. ‘자살률 최고, 출산률 최저’인 사회가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이 두 현상은 곧바로 ‘생명’과 관련된 것으로 같은 뿌리, 같은 원인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물신주의로 병든 사회
일본은 이미 2009년부터 월 단위 통계를 작성하고, 지자체 별로 자살률을 따로 통계를 내어서 어떤 지역에 어떤 형태로 발생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지자체가 그것을 토대로 예방정책을 실질적으로 수립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런 노력으로 한때 자살률 세계 1위였던 일본은 지금 30% 가까이 감소했다. 자살위기에 있는 위험군들에 대한 정보 관리와 의료·행정적인 도움 체계, 관련 법령의 정비만으로도 30% 가까이 자살률을 줄일 수 있다.
자살의 많은 부분이 실업, 파산, 부채 등에 따른 생활고, 즉 경제적 이유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자살률이 치솟은 시기는 2000년대로 이는 1997년의 외환 위기와 IMF의 긴급구제와 맞물린다. 이때 대규모의 구조조정으로 인한 대량 실업, 중소 영세업자들의 몰락이 이어졌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화된 것도 이 시기이며, 이로써 비정규직이 대량 양산된 것도 이 시기였다. 통계 자료는 비정규직의 비율과 자살률이, 저소득노동과 자살률이 비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살 원인의 많은 부분이 생활고와 관련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느 순간 1%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형성되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온갖 갑질의 형태로, 비정규직 차별과 청년실업의 증가로, 노인빈곤과 독거노인 문제로, 낮은 최저임금, 복지 축소, 저출산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청년들과 여성,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점점 더 고통스러워지고 있다. 여기서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외환위기 이후로 좋은 일자리가 점점 사라지고 경쟁은 더욱 심해지면서, 한마디로 삶이 불행한 사회, 경쟁사회, 불안사회가 된 것이다.
따라서 경제위기로 인한 경제 파탄이나 생활고 자체가 자살의 직접적 원인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초래한 소득불평등과 사회양극화, 그리고 거기에 따른 불공평과 불공정, 그리고 온갖 종류의 차별과 갑질, 인격적인 모멸감과 무시, 그리고 사회적 좌절감, 열패감 등이 더 근본적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가난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없는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무시와 차별과 업신여김과 조롱인 것이다. 경제파탄이나 빈곤 자체라기보다는 사회가 병들어 물신화됨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 사회적 욕구의 좌절, 그로 인한 관계의 파탄이 자살의 진정한 원인이다. 물신주의에 병든 사회가 근본원인인 것이다.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풍조, 즉 생명이 존중받지 못하는 문화는 그 자체가 원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증상이며, 그 근원에는 ‘물신주의’라고 하는 더 큰 악이 자리하고 있다.
물신주의에서 생명주의로
생명을 존중하자는 데 원론적으로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생명이냐 돈이냐의 선택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다소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손해를 보면서도 생명을 선택하는 결단이 그 개인을 존엄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본본위에서 벗어나 생명본위로 사고해야 하며, 그것을 세상에 펼 수 있어야 한다. 생명이 ‘한울님’이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의 교리를 믿게 하는 것이 전도가 아니라, 생명본위의 삶으로 전환하게 하는 그것이 포덕(布德)이다.
우주와 인간, 자연과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면적 전환이 필요하다. 모든 생명 속에 신성이 있고, 모든 존재는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그래서 ‘너가 곧 나’이며, ‘남을 잘 되게 해주는 것이 나를 잘 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의 자각이 필요하다. 그래야 갑질을 멈추고 모두가 존귀한 존재로 거듭나고 존귀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대신사의 자각인 시천주(侍天主), ‘모심’은 내 안에서 신령한 한울의 생명과 신성을 발견함과 동시에 내가 전체 우주의 뭇 생명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주체의 존엄성과 생명의 연대성에 대한 자각이었다.(內有神靈, 外有氣化) 또한 이런 생명의 연대망과 떨어져서 나의 생명의 유지될 수 없음에 대한 통렬한 자각이었다.(各知不移) 해월신사도 고기가 물속에 살 듯 우리는 신성한 생명의 에너지로 충만한 우주적 음수(陰水) 속에 살고 있다고 하였다.
이런 자각에 바탕해서 과학의 성과를 존중하되, 생명의 전일적 관점에서 우주와 인간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에 따라 일체의 삶의 영역이 재편되어야 한다. 정치와 경제, 교육과 보육, 노동과 복지도 생명의 전일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생명살림과 평화공존의 길
몸이 어딘가 이상이 있을 때 몸은 ‘고통’이라는 방식으로 신호를 준다. 그나마 고통이라는 신호가 일어날 때는 아직은 괜찮을 때이다. 더 심각한 것은 고통마저도 느껴지지 않을 때이다.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죽고 싶다’는 정신적 고통을 느끼는 것은 차라리 아직은 정신적 건강함이 남아 있다는 증표이다.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면서도 아무런 고통도, 반성도 없는 사람이 진정 위험한 사람이다. ‘죽고 싶다’는 신호를 ‘제대로 살고 싶다’라는 내면의 목소리로 알아차리고, 잠시 멈춰서서 지금까지의 삶의 방향과 방식을 점검을 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남에게 맞춘 삶은 아니었지를 점검해야 할 때이다.
본디 종교는 병든 사회를 치유하고, 개인의 정신적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병리현상은 소득의 불평등과 사회적 양극화, 그리고 그로 인한 공동체의 붕괴와 극심해진 물신주의이다. 생명경시 풍조는 이 물신주의가 초래하는 현상일 뿐 진정한 원인은 아니다. 따라서 종교는 이 물신주의와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 물신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척결해야 할 가장 힘센 우상이다. 원래 종교는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손을 잡아 주고, 고통 받는 자들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느끼고, 철저한 자기 비움의 영성으로 세속적 영광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추구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에서 종교는 오히려 물신주의에 기대서 자체 몸집을 키우는 데만 급급했다. 성공과 출세를 부추기고 물질적 풍요와 부(富)가 신앙의 증표이며 ‘하느님’의 은총이고 ‘부처님’의 가피인 것처럼 가르쳤다. 가난한 자들과 연대하기 보다는 부자들과 연대하고 정의의 편에 서기보다는 권력의 편에 서서 마침내 대형교회와 대형사찰의 성공신화를 이룩했다.
먼저 이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참회 위에서 종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우리 시대의 소득불평등과 양극화, 물신주의의 병든 사회를 구제하기 위해 가난하고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여 진정한 사랑과 자비, 모심과 살림, 생명과 정의의 실천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야 할 것이다.
또한 동시에 외롭고 상처받은 영혼들, 온갖 부정적인 감정으로 마음이 닫히고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고 그 마음을 변화시켜 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을 더 교인으로 만드는 것보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마음에 깊은 평화와 기쁨이 넘쳐흐르는 길을 가르쳐주는 곳이 종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가져오게 하는 방법의 핵심은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을 감사하는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으로 치유하고, 그 대신 희망과 사랑의 빛으로 가득 채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치유하고 가슴에 평화와 기쁨을 가져오게 하는 것, 얼굴엔 늘 미소를 잃지 않고, 말은 따뜻하며, 온 몸에서 긍정적 에너지가 흘러넘치게 하는 것, 그것이 이 ‘생명파괴’의 시대에 ‘자살을 예방’하는 근본적인 길이며, 내 삶의 주인이 되게 하는 길이며, 진정한 ‘생명살림’의 길이자 ‘평화공존’의 길이다.
/ 이 강좌는 6월18일 개최된 한국종교인연합(URI)에서 김용휘 교수가 발표한 기조발제의 일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