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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적 35 _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마태복음 1:18-25, 27:45-56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많은 이적이 기록되었으나 모든 이적을 다 소개한 것이 아니라 선별하고 편집하여 기록하였다(요 20:30, 21:25). 그래서 요한 사도는 ‘표적’이라고 하였다. 즉 이적 자체에 의미를 둘 것이 아니라 표적으로 가리키는 것에 집중하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복음서의 모든 표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제 그 표적의 본질이 되는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에 대해 살펴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1:18)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밝혀 준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눅 1:30)라고 하였는데 직역하면 ‘네가 하나님에 대한 은혜를 발견하였다’라는 말이다. 그 은혜를 35절에서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라고 하였다. 마리아에게 발견된 하나님의 은혜는 성령의 능력으로 덮으시는 은혜였다. 즉 “성령으로 잉태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성령의 능력으로 덮으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나심이 하나님의 영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죄와 상관없는 ‘거룩하신 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6)라고 선언함으로 요셉과 마리아가 등장하지만 예수님의 나심과 관련하여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사람의 지혜나 방법,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약속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은 태초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에 하나님의 영이 계속 움직여 일하셔야 되는 그 일을 친히 완성하실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 죄 없는 완전한 사람으로, 합법적인 다윗의 자손으로, 언약의 성취자로 이 땅에 오셨음을 강조한다.
오심의 목적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1:21)라고 하신 말씀에서 잘 드러난다. 이름을 “예수”라고 짓도록 명하셨다. 그리고는 그 이름의 의미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따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왜 이렇게 이름의 의미를 굳이 설명해야 했을까? 당시 이스라엘에 ‘예수’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으로 구약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음역이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여호수아는 열두 명의 정탐꾼 중 한 명으로 본래 이름은 ‘호세아’였는데 ‘구원’이라는 뜻이다(민 13:8). 그런데 모세가 그의 이름을 ‘여호수아’라고 불렀다. 호세아라는 이름에 ‘여호와’를 의미하는 ‘야’(또는 ‘여’)를 덧붙여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로 누가 구원하시는지를 강조하는 이름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일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일이라는 것을 드러내었다.
그런데 신약에 이르러 마태복음 본문에서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의미만 그대로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천사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면서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를 덧붙여 주고 있다. 예수라는 이름은 단순히 하나님이 구원자시라는 말에 누구를 구원하시며, 어디에서 구원을 이루시는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 대상자는 ‘자기 백성’이며, 그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상황은 ‘그들의 죄에서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처음부터 그 목적이 너무도 확고하고 분명하게 설정되었다! 예수님의 오심은 가난한 자들을 그 속에서 건지시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골치 아픈 문제들에서 해방되게 하시는 것도 아니다. 질병의 고통 속에서 놓임을 받고 평안을 가지게 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직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지시기 위함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오신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 하나님 편에서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이렇듯 이후 성령의 일하심은 예수님을 십자가를 향해 끌고 가시는 것이었다(참고 마 3:16-17, 12:28, 눅 4:1,14, 10:21 등).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27:45-46). “제육시로부터…제구시까지”는 오늘날 우리 시각으로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이다. 마가복음 15:25에 의하면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라고 하였으므로 예수님은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어둠이 임했다.
구약에서 대낮에 해가 빛을 잃어 캄캄해지는 현상은 슬픔과 애통을 상징하며(암 8:9-10) 또한 주의 날에 임하게 될 심판의 상징으로 언급된다(욜 2:2,31, 습 1:15). 실제 출애굽 당시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함으로 3일 동안 임한 흑암의 상태는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었는데(출 10:22) 십자가 사건으로 인한 세 시간 동안의 어두움은 출애굽 사건을 반영해 준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애굽과 같은 존재이며 곧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며 배척한 모든 죄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 준다.
고통이 극에 달하여 죽음에 직면하신 예수님은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는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엘리”라고 발음하는데 예수님께서 아람어로 말씀하셨다면 마가의 표현대로 “엘로이”(막 15:34)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는 시편 말씀의 성취를 염두에 두었기에 히브리어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표현은 분명 시편 22:1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는 다윗의 시를 인용하신 것이 분명하다. 다윗은 이 시를 통해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했다는 절망 가운데서 좌절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음을 고백한다(시 22:20-21).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다는 것은 다윗 속에 언약의 인물을 담아서 보여 주신 그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버림이라는 저주를 통해 구원을 반드시 이루어 내실 것을 미리 내다보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신 21:2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그러므로 다윗의 절망과 구원을 시로 고백한 것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시는 것을 담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나의 기둥(헬, ‘스타우로스’)이 세워진 것(헬, ‘히스테미’)으로 나타낸다(요 19:31, ‘시체들’은 복수이나 ‘십자가’는 단수로 표현하였다). 즉 언약이 성취되는 기둥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하셨다는 의미는 죄의 권세에 매인 인간들의 실상이 죽어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 주신 것이었다. 죽음의 본질은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죽음으로 버림을 당하신 분이라면 다윗 언약 안에서 나타내셨던 그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27:50)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을 직역하면 ‘큰 소리로 부르짖으시고 그 영을 내어놓으셨다’(헬, ‘아피에미’)라는 말이다. 이 표현을 요한복음에서는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라고 우리 성경에 번역하였는데 이 말씀도 직역하면 ‘그 머리를 두시고 그 영을 넘겨주셨다’(헬, ‘파라디도미’)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어느 곳에도 머리 둘 곳이 없으셨다(마 8:20). 예수님을 머리로 인정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어 그 머리 둘 곳을 찾으셨기에 그 영을 넘겨주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주님의 몸인 교회에 성령을 넘겨주셔서 다스리는 상태가 완성되었다는 의미이다. 결국 교회란 성령의 능력으로 덮으시는 은혜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함께 죽고 살아난 자들이다.
여기서 마태는 십자가 사건과 관련하여 나타난 두 가지 표적을 소개한다. 첫째로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27:51절a)라고 하였다. 이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것인데 네 가지 색으로 직조하여 짠 것에 그룹을 수놓은 것이다(참고 출 26:30-33). 휘장에 그룹을 수놓은 것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보내시고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차단한 것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었다(참고 창 3:24).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한 휘장은 죄인이 결단코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누가는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눅 23:45)라고 하였다. 이 두 표현을 종합하여 생각하면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찢으신 것이고, 분명하게 한가운데가 갈라져 길을 내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에서 동물들이 쪼개어지는 것과 같이 죽음으로 언약의 책임을 진다는 것을 나타내신 대로 죽음으로 언약을 성취하신 것이 십자가이다. 이 휘장을 완전히 찢어 버려 이제 죽음의 저주 아래 있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에 합류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히 10:19-20).
둘째로 나타난 표적은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27:51b-53)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땅의 진동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사 24:19, 욜 3:16, 나 1:5-6).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죄의 저주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을 여신 일로 땅의 근본과 질서를 완전히 뒤엎는 중대한 일이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렸다는 것은 죽은 자를 가두었던 음부의 권세가 십자가에 의해 정복되었다는 의미이다. 무덤에서 나온 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후에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단순히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는 이미 부활까지 완성한 사건이라는 뜻이다(참고 사 26:19, 겔 37:1-14, 단 12:2). 그래서 마태는 예루살렘 성을 “(그) 거룩한 성”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산 자와 죽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분리된다. 다윗이 언약 안에서 “내 하나님”으로 불렀던 그 하나님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으로 표현하셨다는 것은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뜻이다. 즉 십자가는 ‘나의 하나님’과 ‘너의 하나님’으로 갈라놓는 것이다. 이는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십자가를 지시도록 주도하신 성령께서 십자가에 근거하여 주를 부르도록 하신다. 그래서 주님의 몸 된 교회요 성도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 고백할 뿐이다.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3-1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2022122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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