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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침로 변침
1998년부터 1999년 전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의 여파는 유럽과 아메리카 뿐 아니라 동아시아에도 강력하게 미쳤습니다. 소련과 일본이 내부를 수습하는 사이 한국, 대만, 인도차이나 반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은 국가 파산의 위기에 몰릴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직면했죠. 2000년 새해가 밝아오자 상처를 회복한 두 국가, 소비에트 연방과 일본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구제 경쟁'에 돌입했습니다. 누가 누구를 구제해주는 지가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의미했던지라, 두 세력은 불꽃튀는 경쟁을 펼칠 터였습니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과정에서, 대원칙이 수립되었습니다. 이미 연방의 우방인 국가들, 즉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에게는 반드시 신의를 지킨다는 것이었죠. 이는 열강국가로서의 위신과도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금융경제위는 또한 한국이나 대만과 같이 사회경제체제가 공고한 국가들에 비해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처럼 '펀더멘탈'이 부실한 국가의 경우 투자해야 할 재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사실을 공지했습니다. 정보당국은 일본이 대만 및 인도차이나에 우선적으로 재원을 투입할 것이라는 점을 알아냈죠.
대만 총통선거에서 민진당 천수이볜 후보의 당선이 확실해지고 이들이 확고한 친일 입장을 견지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금융경제위 장관 아미나트는 대만을 과감히 포기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또한 태국을 구제명단에 포함하는 대신 한국에도 어느 정도의 지원은 해야 한다는 의견이 안드레이에 의해 제기되었죠. 다만 한국의 경우 통일을 지원해주는 등 간접적 방식으로만 조력할 수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가스관과 송유관을 연결해주고 한국 기업의 북한 진출을 주선해준다면 자체적 경기회복이 가능할테니, 이를 노리자는 것이 복안이었습니다.
알렉세이는 조금 더 상황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일본에게 소련의 원조계획을 슬쩍 흘렸습니다. 이에 일본 역시 이미 소련의 영향권 하에 있는 국가들에 대한 '공세'를 중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대만에 집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남북한 통일을 주선해주는 일 뿐이었죠. 개성에서 열린 통일준비 고위급회담에서 소련 중재단은 생각보다 큰 의견차를 직면했습니다. 북한 측은 최소한의 '동등성'을 원했지만, 남한 측은 사실상 북한을 흡수통일하려는 의도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북한 공무원의 신분을 일괄 정지하고 남측이 주관하는 재임용고시를 응시하게 한다는 제안이 나오자 모두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죠.
중재와 중재를 거친 끝에, 다행히 대강의 합의안이 완성되었습니다.
0. 남북 간 동등한 조건의 통일임을 명시한다.
1. 국명, 국가, 국기 등은 대한민국 기준으로 한다.
2. 신헌법은 인구비례로 남북한 입법위원을 지명해 제정한다.
3. 남측 선관위 4할, 북한 선감단 4할, 중립국선거감시단 2할로 구성된 통일선관위를 구성한다.
4. 북한 지역의 균형발전을 위해 지역발전기금 설립. 그 사용은 남북 모두의 인준을 요구한다.
5. 북측 공무원은 신분 인정. 그러나 수용소 관리인원, 구 보위부원, 기타 반인권적 활동에 관여한 인원의 경우 북측 참관인 배석 하에 남측 법원이 배제할 수 있다.
6. 인민군은 해산, 구 인민군 장교와 부사관은 계급을 재조정해 국군에 편입한다.
7. 구 북측 거주민 및 지역을 기반으로 한 기간사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한다.
이상의 조건으로 남북 양측은 판문점에서 열린 이회창-김평일의 각서 교환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통일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의 합의에 따라 주한미군은 순차적으로 철수, 통일작업이 정식 완료되는 날에 마지막 미군 병력이 철수하는 일정이 공표되었죠. 또한 통일 한국은 군사안보적으로 무장 중립, 경제적으로는 국제 자유무역 및 시장경제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미국과 서유럽의 국내정치상황 역시 일종의 대격변을 겪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클린턴 행정부 말의 경제 대위기로 인해 민주당 내 시장자유주의자들, 즉 클린턴-고어 계열의 우파가 사실상 궤멸 수순을 밟고 있었고, 제시 잭슨을 정후보로 하는 사회민주주의 내지 미국사회주의 계열 정치인들이 민주당의 파이를 크게 가져갔습니다. 공화당에서는 조지 W. 부시와 딕 체니, 도널드 럼스펠드를 위시로 한 네오콘들이 고보수주의, 온정보수주의 성향의 존 매케인 캠프에 근소 우위를 점하고 있었죠. 연방 외무위는 잭슨 vs 부시 구도가 자국의 국익에 배치된다고 판단, 공화당 내에서 부시의 입지를 줄이고 매케인을 지원하는 공작에 착수했습니다. 공작은 매우 성공적으로 부시는 모든 정치적 자산을 잃고 몰락했지만, 월가를 위시한 금융자본에 대한 분노는 제시 잭슨에게 엄청난 힘을 가져다준 뒤였습니다. 선거인단 3석 차이로 잭슨이 승리했으며, 연방 외무위는 공화당이 급진 강경우파에게 넘어가지 않게끔 한 성과에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소련 정부는 영국이 유럽 대륙에서 빠지고 독일 정국이 안정화되는 것이 향후 CIS와 EU의 협력에 득이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영국에서는 토니 블레어 총리의 우파 노동당, 즉 '신노동당(New Labour)'이 세력 급감을 경험하는 상황이었는데, 총선에서는 보수당의 정권 재탈환이 유력해 보였습니다. 따라서 보수당 내 '유럽회의주의' 파벌을 지원하는 것이 가장 유리했고, 이에 따라 신정권은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거쳐 EU를 탈퇴했습니다. 독일에서도 유사한 공작으로 녹색당의 연정 탈퇴로 인한 정국마비를 '조기총선만을 전제로 한 건설적 불신임'으로 해결할 수 있었고, 총선 결과 기민/기사연합과 녹색당의 연정이 이루어져 가까스로 안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재선을 포기하면서 젊고 에너제틱한 이미지의 사르코지 후보가 공화당의 대선후보로 나왔는데, 극우 국민전선, 극좌 인민행진, 중도좌파 사회당 역시 지지세력을 총결집해 대선은 4파전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다행히 극우와 극좌가 결선투표에서 만나는 최악의 상황은 실현되지 않았고, 공화당의 사르코지가 인민행진의 라기예르 후보를 압도적으로 꺾으며 안정이 그럭저럭 유지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럽과 미국에서의 격변은 적당히 봉합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 나라'를 제외하고선 말이지요...
11. 로마의 휴일
푸틴과 수호청 간의 알력사태로 수호청이 무력화되고 헌정질서가 흔들리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체제개편 작업이 한창 진행되던 사이, 이탈리아는 사실상의 내전 상태에 빠졌습니다. 포 강 유역의 북이탈리아에서 '파다니아' 분리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한 것입니다. 북부동맹의 움베르토 보시 총수는 공공연하게 독립선언을 입에 담았고,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전진 이탈리아' 등은 이 움직임에 편승하기 바빴습니다. 중도좌파 성향의 민주당 등 역시 협상을 통한 해결에 매달리다가 나머지 이탈리아 지역 민심을 잃었고, 분노한 유권자들은 공산당에 몰표를 던졌습니다. 그들은 북이탈리아 독립을 '전쟁을 감수해서라도' 막겠다는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었죠.
파다니아가 굳이 분리독립하려는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부유하고 산업이 집중된 북부 지역은 경제위기를 명분으로 한 '남부 살리기'에 매우 회의적이었고, '거지들을 먹여살리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하다!'라는 지역이기주의적 슬로건이 급격히 힘을 얻었던 것이었습니다. 한때 바티칸이 중재인을 자처했으나, 공산당과 교황청의 미묘한 반목관계로 인해 요한 바오로 2세가 이탈리아 재통합을 주장하기에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이탈리아 공화국의 공산당 정권이 유로존 탈퇴를 시사하자 프랑스, 스페인 등을 중심으로 파다니아 분리독립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모양새가 연출되었고, 이에 이탈리아 정권은 아예 CIS 가입을 지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소련은 불똥이 CIS까지 날아오자 깜짝 놀라 개입을 결정했습니다. 그간 서유럽의 안정과 상호협력 구축에 힘을 쏟던 것이 이번 일로 몽땅 물거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파다니아 정부, 이탈리아 정부, EU, 미국, CIS에 각각 접촉한 각료들은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탈리아 공산당 정부는 유로화 창설로 금융주권이 상실되고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금융당국에 예속될 것을 우려했고, 유럽통합 움직임을 강력히 추동하는 프랑스와 스페인 등이 이탈리아의 정책에 경기를 일으켰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미국은 이탈리아가 소련 측에 붙는 일만을 우려했고, CIS 내에서는 이탈리아의 가입이 '마치 EU에서의 영국과 같은' 효과를 야기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소련은 파다니아 독립을 무효화하는 대신 이탈리아가 EU와 NATO에 잔류한다는 조건, 즉 '안코나 협정'을 제시했습니다. 대신 이탈리아 정부는 헌법개정 또는 그에 준하는 작업을 통해 지방의 자치권을 보장해야 했으며, 남이탈리아는 러시아에서 발칸, 타란토 지역으로 이어지는 가스관을 가지게 돼 북부에 대한 레버리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중재는 성공적이었으며, 소련은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강대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행복했습니다.
모두가... 행복했'었'습니다.
12. Under Attack
2003년 1월 19일, 아에로플로트 항공 소속 투폴레프 Tu-204기 2대와 Tu-154기 2대가 공중에서 미상의 괴한에 의해 납치당했습니다. ‘외적’의 공격으로부터 만반의 대비를 해두었다고 자부하던 연방의 방공시스템은 ‘내부로부터의’ 공격을 막는 데에는 역부족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들의 공격목표는 1) 붉은 광장, 2) 에르미타주 박물관(겨울궁전), 3) 모스크바 국립대학, 4) 연방 국방위 청사였고,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붉은 광장 한가운데에 여객기가 그대로 직하강하며 평화로이 산책하던 모스크바 시민들을 덮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레닌 영묘, 크렘린 벽 묘지, 성 바실리 성당이 전소, 굼 백화점이 반파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오전 10시 39분에 첫 번째 ‘공격’이 있었을 때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이들은 이 사건을 일종의 비행기 사고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30여분 뒤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또 다른 항공기가 자살테러를 감행하자 모두는 공포와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에르미타주에 보존된 수많은 문화재들, 1917년의 정신을 상징하던 유물들, 그리고 무고한 인민들이 증오와 혐오에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모스크바 근교에 있던 국방위 청사 또한 공격받았으나, 상황을 인지한 대공병력이 최후의 순간에 눈을 질끈 감고 요격에 나서면서 피해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스크바로 향하던 아에로플로트 107편 Tu-204기의 경우 상황을 전달받은 인민들이 테러리스트들을 자체적으로 물리치면서, 주코프스키 공항 활주로 인근에 비상착륙할 수 있었습니다.
1차 공격이 있던 때, 람스도르프 총리와 유관 각료 일부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CIS 정례회의에 참석 중이었고, 사건을 보고받은 즉시 모스크바로 향했습니다. 1호기를 제외한 모든 항공기의 강제착륙조치가 선포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사건에 전 인민들은 몹시 분노하여, “적에 대한 응징”을 강력히 부르짖었습니다. 비상사태부 장관 세르게이 쇼이구를 현장 최고책임자로 하는 구조복구반이 긴급 편성되어 생존자 구출 및 진화작업에 나서는 동안, 전 각료들은 핵전쟁 방호용 비밀지하철을 통해 핵전쟁용 U-8 벙커에 모여 비상대책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총 1,891명이 사망하고 4,188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연방의 상징들이 박살나버린 이 초유의 사태를 기획한 장본인은 인도네시아 아체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오사마 빈 라덴의 '이슬람 칼리프국'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직접 찍은 "레닌의 사형을 집행했을 뿐"이라는 영상은 모든 인민들의 극심한 분노를 이끌어냈죠. 공산당에서는 강경파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종무부를 폐지하고 중앙아시아 및 캅카스의 이슬람 다수지역에 무기한 군정을 실시하자는 결의안이 통과될 정도였습니다. 중앙의 각료들은 이러한 조치가 결국은 극약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사력을 다해 이 움직임을 막아냈습니다. 종무부를 유지하되 이슬람 모더니즘 성향 정당 및 정치인을 전수조사하며, 무슬림 다수지역의 치안 확보를 위해 내무군을 증강하는 안건이 통과되었죠.
남은 것은 인민들의 울분을 해소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소련과 일본 중 그 어느 나라의 선택도 받지 못한 인도네시아의 경제가 붕괴하면서 팔렘방 이서 수마트라섬의 통제권이 날아갔고, 이슬람주의 성향의 '메단 이슬람 토후국'이 성립한 뒤였습니다. 메단 토후국은 물론 미승인국이었지만 실질적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연방은 이들에게 '오사마 빈 라덴의 인도'와 '이슬람 칼리프국의 진압'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모르쇠를 날릴 뿐이었습니다. 전세계 여론이 테러리즘을 비난하는 상황을 이용해 빠른 군사작전을 진행한다는 안건이 각료회의를 통과하자, 연방이 야심차게 건조한 울리야놉스크급 원자력항공모함이 오데사 항을 출발해 인도양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레베드 국방위원장과 안드레이 사사노프 우크라이나 총리가 컨트롤 타워를 맡아 수마트라에 대한 대규모 공습과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을 지휘했죠. 외무위의 메스너 위원장은 방콕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해 소련 군사작전의 정당성을 열심히 설파했습니다. 아미나트는 언론대응비상위원회의 장을 맡아 테러현장 바로 앞에 본부를 차리고 이 모든 과정을 연방, 그리고 전세계 시민들에게 전파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리고... 소련군은 응축된 분노를 성공적으로 전세계에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90년대 내내 벼르고 벼른 신예전력이 화력시범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메단 토후국은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은 그 거처로 추정되는 12개 장소를 모두 폭격해 잿더미로 만드는 방식으로 사살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의 현현이었죠. 이는 소비에트 연방의 완벽한 부활을 전세계에 인식해주었습니다. 초강대국의 제1조건, 즉 "지정학적 배경에 구애받지 않는 상시적 세력투사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더 이상 미국이 주도하며 소련이 '약간 뒤쳐진 위치에서' 견제한다는 탈냉전의 공식은 적용될 수 없었습니다.
일본이 미일 신안보 가이드라인을 채택하고 한국 등이 엔블록을 거부하며 중국의 강대국 복귀가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연방은 1.19 테러를 확실히 수습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수습과정은 '구 소련 체제의 망령'을 수반했다는 것이었죠. 인민의 자유와 사생활 비밀, 법치주의 등을 파괴할 우려가 농후한 '반테러리즘수호법(일명 수호법)'이 공산당 자유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인민소비에트(하원)를 통과했고, 이는 람스도르프 서클에 막대한 후폭풍을 몰고 왔습니다. 현실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인 아미나트 나가이 장관은 "오히려 개혁사회주의 체제의 원동력은 강력한 체제수호력"이라는 논리를 제시하며 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해선 안된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알렉세이 메스너 외무위원장과 알렉산드르 레베드 국방위원장 역시 "현실은 어쩔 수 없다"는 현실론을 제시했죠.
그러나 안드레이 사사노프는 "구 소련 체제의 복귀는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막아내야 한다"는 입장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본래 이상주의자이자 투철한 자유주의자인 람스도르프는 고심 끝에 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인민들의 절대다수가 지지하는 법안이었지만, 자신이 '폭탄'이 되어서라도 이 '잘못된' 법을 통과시키고 자신의 정치생명, 어쩌면 '물리적 생명'까지 바치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이 여파로 내각 총사퇴와 의회해산, 조기총선안이 통과되었죠. '폭탄'이 터지자 소련 사회는 그야말로 '수호법 찬반'을 쟁점으로 하여 두 쪽으로 갈라졌습니다. 공산당 급진파는 유라시아주의자들과 범민족주의자, 전 강경파 군부 인사들을 끌어들였고, 인민의 분노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진보 야당들은 이 사안이 쟁점화되자 마자 수호법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람스도르프가 사실상 정치적 순교자가 되어 정계은퇴 수순을 밟자, 3인방은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가장 먼저 '다른 길'을 걸은 것은 아미나트였습니다. 그녀는 현재의 '혁신 체제'에 대한 대단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정의나 선의 따위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람스도르프의 행보 역시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드레퓌스 사건과 같은 대논쟁을 일으킨 총리는 그녀의 기준에서 '지도자 실격'이었던 것이었죠. 아미나트는 또 다른 실력자인 블라디미르 푸틴과 협력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알렉세이 역시 그동안 쌓아온 지위와 정치적(그리고 경제적) 자산, 명예, 행복 등을 절대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가 람스도르프를 지지했던 이유는 그의 이상 때문이 아닌 그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람스도르프가 현실정치인이 된 지 한참이 지난 뒤에도 현실보다 이상을 우선시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크게 절망한 그는 공산당 보수-중도파의 주가노프와 연락했습니다. 누군가는 알렉세이를 신 소련의 노멘클라투라라며 비난할 것이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안드레이는 람스도르프의 의지를 잇겠다는 다짐을 굳혔습니다. 연방의 개혁과 민주주의, 자유, 인권을 위해 오명까지 뒤집어쓸 수 있는 그에게 이 정도 굴욕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가 다시 세운 소련이 예전의 '억압적인 구 소련'으로 돌아간다면... 이 모든 것을 '무'로 돌리기 위해 몸을 바칠 준비도 되어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격변의 21세기가 도래했습니다. 역사의 주인공들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캐릭터 일람>
0.
- 이름: 예브게니 일리치 람스도르프
(Евгений Ильич Ламсдорфф)
- 플레이어: NPC- 생년월일: 1946년 1월 29일
- 클래스: 연방 총리
- 민족: 러시아인+부랴트인 혼혈
- 모국어: 러시아어
- 구사가능언어: 영어, 독일어, 중국어(약간)
- 배경:
예브게니 람스도르프는 1946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러시아인 지역당원이던 아버지와 부랴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았고, 활발한 콤소몰 활동과 뛰어난 학업성적으로 1965년 모스크바국립대학 인문학부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1학년을 마치고 장교로 군복무를 시작한 람스도르프는 1968년 상부로부터 긴급명령을 받아 그의 소대를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게 되었습니다. 연대장은 그에게 "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막으러 간다"고 전했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이상하게도 사회주의 동지의 나라라던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였죠. 그곳에서의 경험은 아주 끔찍했습니다. 비무장한 노동자, 아이를 업은 어머니, 지팡이를 짚은 노인에게 발포명령을 내려야만 했던 람스도르프는 그때부터 모종의 신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태가 진압되고 다시 복귀해 남은 복무기간을 마치고 복학한 뒤 대학을 졸업한 람스도르프였지만, 그는 밤마다 울부짖는 체코인들의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1972년 모스크바 지역당에서 교육행정업무를 맡으며 장래가 매우 촉망되었으나, 그와 안면이 있던 중앙당 정치국원 안드레이 키릴렌코와 니콜라이 리즈코프의 필사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람스도르프는 '브레먀' 방송에 소련 체제를 비판하는 투서를 남기고 그대로 체코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망명하고 말았습니다.
서독 본 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배우던 그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경험했습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비판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받는 존재였고, 어떠한 주제든 성역 없이 토론해야만 헤겔이 말한 정-반-합의 논리에 따라 건설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람스도르프는 탄탄대로였던 자신의 인생이 누군가의 처절한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보드카, 보르시, 톨스토이, 체호프, 라흐마니노프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사랑했고, 그의 조국 역시 사랑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는 '타락한 노동자 국가' 소비에트 연방을 구원하고 인민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진보를 가져다주어야만 하는 운명을 지고 태어난 이였습니다.
그러나 서방세계의 모든 것이 그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꽤나 많긴 했으나, 그들의 대책없는 개인주의와 인간 소외, 빈부격차의 정당화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혀 옹호할 수 없었죠. 람스도르프는 고향에서나, 여기서나 소수파에 속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더더욱 '내 사람'에 집착했습니다. 다행히 문화와 예술, 음주가무를 즐기고 지갑 여는 데 인색하지 않으면서도 지나친 물욕을 경계하는 그의 성격은 꽤 많은 이들의 호감을 살 수 있었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1986년, 새 서기장으로 취임한 고르바초프는 개혁개방을 외치며 그간 탄압해왔던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석방과 복권을 단행했습니다. 꾸준히 인연을 맺어왔던 리즈코프는 람스도르프를 잊지 않고 다시 연방에 불러들였죠. "개혁은 필수적이나, 미국인들에게 굽혀서는 안된다. 우리가 우리만의 원칙을 저버린다면 그들은 그대로 우리의 약점을 파고들어 종속시킬 것이다"라는 편지 내용이 리즈코프로 하여금 안심하고 람스도르프를 다시 불러들이게끔 하는 결정적 이유였습니다. 1988년 아르메니아 대지진 복구작업 지원 과정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눈도장을 얻고 나서, 그는 정치국 중앙위원회와 유류기지건설-가스공업부 장관으로 전격 발탁되었습니다. 물론 1990년 리즈코프와 함께 고르바초프-옐친의 "500일 경제재건계획"을 '비현실적'이라며 비판하다가 다시 서기장의 눈밖에 나긴 했지만, 그는 일단 자신의 직위를 유지하며 일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람스도르프는 소비에트 연방이 인권을 중시하고 공동체적 가치를 드높이며 서방과 협력하되 굴복하지는 않는 튼튼한 국가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는 약간의 고육지책이 필요할 지도 모르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 주어야 하는 일이 빈번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이상만은 수단으로써 뒤집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바라는 조국에서는 그 누구도 무고하게 상처받지 않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1.
- 이름: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메스너
- 플레이어: 카라멜 마끼아또
- 생년월일: 1946년 5월 8일
- 클래스:
- 민족: 러시아인
- 모국어: 러시아어
- 구사가능언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 능력:
지휘(0)/통솔(0)/행정(0)/경영(2)/호신(0)/조사(2)/위조(2)/선전(5)/공작(4)/화술(5)/장악(5)/압박(5)
- 트레잇:
#친절한 미소, 강력한 빠따: 동지에게는 무한한 신뢰와 친절을, 적에게는 가차없는 독설과 위협을 날려야 합니다. 영향력 하 국가에 대한 화술에 +2, 압박에 -1. 적성국에 대한 압박에 +2, 화술에 -1. 서방 국가에 대한 화술에 +1.
- 잔여포인트: 7
- 배경:
알렉세이 메스너는 1946년 5월 8일 대조국전쟁 승리 1주년이 되던 해 모스크바에서 소련 최고회의 의원인 니콜라이 메스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이 메스너는 당시 소련 법무장관을 역임한 사람이었습니다. 공산당 수뇌부의 일원으로 태어나 자란 그는 어릴적부터 소련에 대한 애국심을 교육받으며 자랐기에 조국 소련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마음 가득 가지게 되었죠. 아버지 니콜라이는 아들이 자신처럼 법조인의 길을 걷길 바랬지만 알렉세이는 외교관이 되어 조국의 이름을 국제무대에서 널리 퍼뜨리길 원했습니다. 그렇게 알렉세이는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하고 외무부에 들어가 외교관의 길을 걸었습니다. 브라티슬라바 조약, 모스크바 협정, 헬싱키 협정, 전략무기제한협정 등의 냉전 중반기 주요 외교장에서 경험을 쌓으며 평판을 쌓아나갔죠.
그렇게 외교관의 일에 열중하던 1980년. 알렉세이는 주영대사관의 공사참사관으로 발령받았습니다. 런던에서의 경험은 그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습니다. 분명 영국은 '지는 태양의 나라'이자 광업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구세대의 실패국가라고 배웠으나, 그런 영국의 인민들마저도 '초강대국'이라는 소련의 인민들보다 훨씬 나은 생활수준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국에서는 국영 백화점(굼) 등에서 길게 줄을 서야 살 수 있던 치약과 비누, 의류, 주류 등이 시골마을의 작은 상점에도 즐비하다는 것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부임을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알렉세이는 자신의 조국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자유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도입을 지지하는 '반체제 인사'가 되었습니다.
1985년, 공산당 정치국원들과 서기장이 직접 참관한 연방 외무부 실무자 전체회의에서 알렉세이는 서방과의 화해, 자유화, 아프간 철수, 군 개혁, 경제개혁 등이 연방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모험적 연설을 함으로써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관심을 샀습니다. 외무부 내에서 '인기 스타', 또는 '검은 양'이 된 알렉세이를 고르바초프는 기꺼이 중용하기로 했습니다. 대외교류위원회 서기, 그리고 고르바초프의 개인 외교안보자문위원을 역임하는 등 이른바 '고르비 라인'을 타는 듯 했죠. 그러나 개혁의 향방을 두고 둘의 사이는 극명하게 벌어졌고, 1990년 외무부 서유럽국장직을 끝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휴직계를 제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그에게 대학 시절 친구였던 람스도르프가 접근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둘은 의기투합해 조국을 바꿀 마지막 찬스를 잡아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의 싸움은 이제부터입니다.
2.
- 이름 :아미나트 잠불라토브나 나가이
(Аминат Джамбулатовна Нагай)
- 플레이어 :렌지파일
- 생년월일 :1955년 11월 7일
- 클래스:
- 민족 :체첸계 고려인(체첸 3/4, 고려 1/4)
- 모국어 :소련파 북한말(문화어+중앙아시아 한국어)
- 구사가능언어 :러시아어, 북한말, 바이나흐어(체첸-잉구시어), + 제한적으로 망명지 언어
- 능력:
지휘(0)/통솔(0)/행정(2)/경영(5)/호신(2)/조사(4)/위조(5)/선전(5)/공작(0)/화술(4)/장악(4)/압박(0)
- 트레잇:
#창조적 파괴: 다방면의 경험은 그녀에게 변화무쌍한 환경에 대한 적응력, 선호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민간조직의 혁신과 투자에 +2, 관료조직의 평시 관리에 -1.
#현란한 언론플레이: 그녀는 언론을 다루는 데에 상당한 재능을 보입니다. 여론선동 및 전환에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5
- 배경:
할아버지는 고려인, 친할머니와 어머니는 체첸인이라는 복잡한 가계도를 가진 아미나트는 북한 평양 출신의 여성으로, 그의 아버지 잠불라토프 나가이(나백선)는 스탈린의 지령을 받고 정권 수립에 참여하기 위해 북한으로 이주한 소련파 고려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8월 종파사건으로 대대적으로 소련파를 숙청하기 시작하자 나백선과 그의 딸인 아미나트는 소련 모스크바로 다시금 이주하였습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미나트의 부모는 북한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압박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고, 아미나트는 체첸인 할머니와 함께 자라며 충격적인 진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미나트의 할아버지인 나창만이 1938년 스탈린의 대숙청때 누명을 쓰고 사망하였으며, 그 후로 나씨 일가는 소련체제에 대한 증오심을 마음 속에 품고 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모스크바 국립교대에 진학한 아미나트는 서서히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나탈리아 마그나트, 그리고 알렉산데르 타라소프와 만난 아미나트는 체 게바라와 레프 트로츠키 등의 사상을 공부하며 이윽고 신좌파 비밀결사인 '신 소련공산당(NCPSU)'의 당원으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5년 NCPSU의 정체가 발각되고 타라소프가 정신병원에 강제수감되는 동안 아미나트는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였으며, 이때부터 아미나트의 11년에 걸친 망명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상징 유고슬라비아는 노동자 자주관리와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실현하고 있었고, 아미나트는 유고 시스템을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유고의 최고지도자 티토가 사망하며 민족주의자들이 유고 전역에서 득세하였고, 아미나트는 이번에도 망명하여 굴라쉬 공산주의를 실현하던 헝가리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노쇠한 야노슈 카다리의 헝가리 또한 쇠퇴기에 있었고,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주의 모델이 완전한 실패를 했다고 판단한 아미나트는 마침내 서구로 향했습니다. 스웨덴, 네덜란드 등지에서 '비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주의', 즉 반공 사회민주주의와 코포라티즘 등에 대해 공부하며 망명가 생활을 이어가던 아미나트는 1982년 람스도르프를 만나 친분을 다졌고, 일명 '람스도르프 서클' 내 좌파로써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1986년 고르바쵸프의 초청으로 람스도르프와 동지들이 소련으로 복귀한 뒤에, 아미나트는 몇 안되는 '복지국가형 자유주의'를 공부한 사람으로써 리즈코프 내각의 각종 경제정책 실무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체첸인-고려인의 이중 정체성을 가졌던 아미나트의 입장에서 체첸인 동지라고 생각했던 소련공군 전략폭격대 사령관 '조하르 두다예프' 소장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융단폭격을 했다는 사실이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에 의해 폭로되자, 큰 충격을 받은 아미나트는 사하로프의 국회연설 당시 원내에서 그를 옹호하며 악명과 유명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경제업무에서 좌천되어 1990년 12월 한국 노태우 대통령의 소련 방문을 담당하는 의전일을 맡았던 아미나트는 1991년 8월인 지금 무너지는 연방을 어떻게든 평등한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개혁하던 재건국하던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생각을 마음 속 깊이 품고 있습니다.
3.
- 이름 :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사사노프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Сасанов)
- 플레이어 : dear0904
- 생년월일 : 1955년 8월 20일.
- 클래스: 우크라이나 공화국 총리
- 민족 : 우크라이나+체코인 혼혈
- 모국어 : 우크라이나어
- 구사가능언어 : 러시아어, 체코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 능력:
지휘(0)/통솔(4)/행정(5)/경영(1)/호신(0)/조사(5)/위조(0)/선전(2)/공작(5)/화술(5)/장악(3)/압박(0)
- 트레잇: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이념과 이상의 차이는 일시적 협력에 그 어떤 장애도 되지 않습니다. 국내 적대/알력집단의 포섭 및 설득에 +1.
#명품 서포터: 탑, 원딜, 정글러가 빛나려면 누군가는 와드를 박아야 합니다. 각 메인이벤트 당 한번, 타인의 행동에 +2의 버프를 추가 부여해줄 수 있습니다.
- 잔여포인트: 6
- 배경:
사사노프는 1955년 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 당원인 아버지, 그리고 조약 체결 행사때 방문한 체코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적부터 외가인 체코와 우크라이나 사이를 오가면서 지내 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13번째 생일날 우크라이나에 있던 사사노프와 가족은 비보를 전해 들었고, 그때부터 사사노프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근을 조장하고, 체코에 피바람을 몰고온 소련을 언젠가는 내 손으로 엎어버리겠다고. 그러나, 그는 아직 어렸기에 자신의 속내를 깊게 숨기며 가슴속의 칼을 다듬었습니다.
1974년에 그는 키이우 종합 대학에서 법학과-외교 관계 연구소에 진학하여, 군 복무를 거쳐 훌륭한 성적으로 석사학위와 함께 졸업 했습니다. 사사노프는 국제법과 지역학을 배우면서 본인의 의지를 더욱 단단하게 굳혔고, 대학 총장의 추천사를 받아 소련 외무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외무성에서 일하는건 상당한 고통이었습니다. 프라하의 봄에 일조한 그로미코. 그리고 소련의 높으신분들. 그리고 그게 어느정도 눈에 띄는 바람에, 사사노프는 1984년 외무성에서 한직인 종교 문제 위원회로 좌천 되었습니다. 그는 차라리 더러운 사람 밑에서 계속 있기보다는 낫다 생각하며, 그 좌천을 받아들여 2년동안 버텼습니다.
그리고 1986년,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몇몇 부서들을 개혁 할때, 외무부로 다시 불려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는 람스도르프를 만났고, 같이 술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와의 대화는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소련은 이대로는 안된다." "프라하의 봄을 진압한건 미친일이었다." "부당한 탄압들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 같은 말과... 계산까지. 이후 람스도르프와 자주 만나면서, 이 호인의 조력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화술과 인맥으로 형님의 아르메니아 행을 지원했고, 사사노프는 공연히 람스도르프 라인으로 인식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 람스도르프가 서기장의 눈 밖에 났을때, 그의 라인인 사사노프 또한 문학 출판국 본부로 밀려났지만, 그는 계속 버텨낼 것입니다.
사사노프는, 소련은 인민을 탄압하는 국가로써, 소련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람스도르프가 소련에 칼을 들이댄다면, 그를 절대적으로 도울것입니다. 그것이, 소련을 붕괴 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더 기뻐하며 도울 것 입니다...
- 사회 안정성 : 3(동요함)
: 낮을 수록 극단주의가 횡행하고 급진적 수단이 선호됨.
- 주요국 안정성: 미국(5)/동아시아(5)/EU(4)CIS(6)
- 정권 지지도 : 3(저조함)
: 낮으면 인민들이 들고 일어남.
- 국가평판 : 2(아치-에너미)
: 낮을 수록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국가로 인식됨.
- 주요 대외관계 : 미국(4) / 일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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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지파일 대충 잭슨 행정부가 현실 마크롱처럼 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 백신패스? 그거 미접종자 킹받게 하려고 만든거 맞음 ㅋㅋ 아 꼬우면 백신 맞으라고 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이거 잘하면 4년만에 정권을 공화당으로 바꿀 수 있겠구만...
@카라멜 마끼아또 근데 공화당 상황 확인하고 논의하는걸 권합니다.
만약에 네오콘 같은 애들이 당을 장악했다면 걍 민주당이 나아요...
@931117 네오콘은 지난번에 전부 나락보내서 이탈리아 중도우파 정당들과 비슷한 상황이래요.
@카라멜 마끼아또 그럼 공화당이 이기긴 힘든거 아닙니까?
외면당할텐데?
@카라멜 마끼아또 네오콘이 나락 갔어도 꼴통들이 없는 건 아니랍니다…
@931117 공화당에 네오콘만 있겠습니까.
@E.E.샤츠슈나이더 일단 미국 공화당 상황 파악하고 정하는건 필수긴 해요.
당장 구심점이나 주도세력이 어디고 어떤 성향이냐에 따라 바꿀지 말지 정해야.
안그러고 무턱대고 일벌였다 심각해질수 있으니.
@카라멜 마끼아또 이탈리아 중도 우파 정당들과 비슷하다면서요?
@931117 근데 어차피 다음이 마지막이고 별도로 미국 공작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라… ㅋㅋㅋ
@931117 제 말은 네오콘이 이탈리아 중도우파 정당들과 비슷하다 한거지. 공화당이 그런 상황이라 한게 아니랍니다.
@E.E.샤츠슈나이더 다들 내용을 모르니까.
+ 곧 끝나는데 하필 이번주 수술에 입원이라 제가 아무것도 못하네요.ㅋㅋㅋ
그사이에 누가 연재 안하길 기도해야 하다니 사람의 본성은 정녕 성악설이란 말인가.
난 성선설이길 바라건만...
@카라멜 마끼아또 주어가 헷갈리니...
@931117 생각해보니 그런 말을 했었나요 제가..?
음… 일단 체니나 럼스펠드 류가 몰락한 건 맞지만 티파티같은 부류는 그대로.. 아니 오히려 네오콘 자리를 메꾸면서 좀 더 강해지면 강해졌지 없어지진 않았을테고, 트럼프같은 부류도 없진 않을 겁니다.
@E.E.샤츠슈나이더 전 기억이 안나니까 한말이고 카라멜님이 답하신거라 저도 모르겠네요
@E.E.샤츠슈나이더 전 네오콘이 나락갔다길래 공화당에서 완전히 비주류로 떨어진줄 알았는데...
@카라멜 마끼아또 아 네오콘이 이탈리아 중도우파들처럼 몰락했다는..
그건 맞죠. 물론 더 이상한 애들이 채우지 않았을 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한국 정치로 비유 하자면... 친이계/친박계 개 작살난 새누리당... 이라고 봐야 하려나요? 더 이상한 애들이야 공화당은 상수... 물론, 민주당도 좀 이상한 행보를 보이긴 합니다만.
@E.E.샤츠슈나이더 미국 대통령 벤 카슨 가능한가요?
@dear0904 적어도 다때려부수자느니 뭐니하는 사람은 적을듯.
@렌지파일 - 밋 롬니(시장보수주의)
- 마이크 허커비(사회보수주의)
- 론 폴(무정부주의적 자유지상주의)
- 링컨 채피(자유주의)
- 젭 부시(자유보수주의)
후보군은 대강 이러합니다. 벤 카슨은 별도의 공작을 띄우지 않으면 등판하지 않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정상인이 있는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같기도 하고...
@E.E.샤츠슈나이더 폴 부자는 백신 음모론 띄우면서 뇌절중이고, 채피는 폴 부자랑 같은 편이고, 롬니는 몰몬교도(...)고, 허커비는 젭의 형님과 별반 다를바 없을테고... 젭 부시는 그나마 낫지만 뭔가 ㅎㅎㅎ...
케이식은 연차가 아직 안될까요?
@E.E.샤츠슈나이더 론 폴은 어디선 가네다 추종자가 되었고, 어디선 진짜 기업국가를 이룬적이 있었지...
@렌지파일 그런데 몰몬교도가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뜨노에선 몰몬교도인 베넷도 국가 잘 운영하던데.
@카라멜 마끼아또 미국인들이 안 뽑아줍니다.
가톨릭 대통령조차 2명밖에 없어요 거긴 ㅋㅋ
@카라멜 마끼아또 걔들 사이비 이단 취급 받잖아요...
@렌지파일 뜨노에선 플레이어가 잡으면 베넷도 선거인단 534명 전원을 차지할 수 있는데... 여기선 그런게 안되나봐요?
@카라멜 마끼아또 거기는 요키도 대통령 만들 수 있는 곳이니까요 ㅋㅋㅋㅋㅋㅋ
@카라멜 마끼아또 가톨릭 대통령조차도 최고의 명문가인 케네디 가에서 한명, 개신교인 대통령의 부통령으로 한 명, 이렇게 겨우 나왔잖아요 ㅋㅋㅋ
@카라멜 마끼아또 aod mds도 선택지 따라 이명박이 낙선할수도 일본에서 공산당이 이길수도 있는데 하물며...
@E.E.샤츠슈나이더 결국 후보군은 젭 부시, 롬니, 가능하다면 케이식 정도인데... 다음 이벤트가 마지막일테니 ㅎㅎ 주사위에 맡겨야겠네요
@렌지파일 이벤트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