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 5월 25일
장소 : 천전리 암각화, 울산 반구대
회비 : 33.000원
준비물 : 도시락, 필기도구
출발지역 : 구미시청
출발시간 : 오전 8시
탐방비 입금 선착순으로 신청 접수
대구은행 270-13-066564
암각화(岩刻畵)는바위 표면을 갈아 파거나 그어서 여러 가지 동물상이나 기하학적(幾何學的) 상징 문양을 새긴 것으로, 풍요(豊饒)와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주술적 목적의 그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조사, 발굴되었는데, 그 규모와 내용 면에서 울산 반구대(盤龜臺 ... 국보 제285호) 암각화, 울주 천전리 각석(刻石 ..국보 제147호) 그리고 고령 양전동(良田洞) 암각화(암각화 ... 보물 제605호)가 대표적인 암각화 유적이다.
암각화란 무엇인가?
암각화란 한마디로 바위의 표면을 쪼아내거나 갈아 파거나 그어서 어떤 형상을 새겨 놓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바위 표면에는 이처럼 형상을 새겨 놓은 것도 있지만 물감을 이용하여 그린것도 있다. 멀리는 유럽의 알타미라 동굴벽화나 라스코 동굴 벽화 같은 것을 예로 들수 있으며,가까이는 중국이나 시베리아 각지에 분포하는 암벽 위의 물감그림들을 들수 있다. 이처럼 물감을 이용하여 그림 그림을 암각화와 구분하여 암채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암각화와 암채화 두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말로 바위 그림 또는 암화라는 말을 쓸수 있다. 따라서 암각화는 바위 그림보다 하위 개념이라 할수 있다.
우리가 암각화라는 한 가지 표혀능로 부르지만 새기는 방법에는 몇가지가 있다. 바위를 단단한 돌이나 다. 다른 도구를 이용하여 두드려 쪼아서 형상을 묘사하는 방법이 있고, 쪼아낸 뒤에 그 부분을 갈아서 더 깊고 매끈하게 만드는 법이 있다. 또 날카로운 금속 도구로 바위면을 그어서 가는 선으로 형상을 묘사하는 방법도 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이런한 것을 각각 쪼아낸 암각화, 갈아낸 암각화, 그어낸 암각화 등 다른 명칭으로 구분하여 부르지만 우리는 암각화라는 한 갖 말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암각화에는 이처럼 여러가지 묘사법이 있다는 것을 알아 두어야 한다.
이러한 방법들에는 각각 그림을 새긴 사람들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그림의 형태로 구분하면 윤곽선이나 도형 내부를 여러 개의 선을 분할하여 묘사하는 방법과 윤곽선 내부를 쪼거나 갈아내어 실루엣 처럼 만드는 방법이 있다. 앞으 것을 선각, 뒤으 것을 면각이라 부른다. 중국이나 몽골 또는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선각과 면각이 시대적으로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상대적인 선후 관계가 비교적 분명하며 대체로 면각화가 서각화에 앞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제작기법과 환경
암각화(岩刻畵)는 바위의 표면을 쪼아내거나, 갈아 파거나, 선을 그어서 형상을 새긴 것이다. 중국이나 시베리아, 유럽 등지에서는 물감으로 채색한 암채화(岩彩畵)도 발견되었으나,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암화(岩畵)에서 채색화는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우리나라 바위 그림은 암각화(岩刻畵)를 일컫는다. 암각(岩刻)의 기법은 바위를 단단한 돌이나 다른 도구를 이용하여 쪼아내는 방법 ( PECKING. 그림 1), 쪼아낸 부분을 갈아 파서 깊고 매끈하게 만드는 방법 ( GRINDING. 그림 2), 그리고 날카로운 금속도구를 이용하여 가는 선(線)으로 형상을 묘사하는 방법 (CARVING . 그림3)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림 1. 쪼아내기 ... 울주 반구대 암각화
그림 2. 갈아내기 ... 남원 대곡리 암각화
그림 3. 그어 새기기 ... 울주 천전리 암각화
또한 그림의 형태로 구분하여 면각(面刻)과 선각(線刻)으로 나눌 수 있는데, 면각(面刻)은 윤곽선 내부를 쪼거나 갈아내어 넓은 면으로 표현하는 방법이고, 선각(線刻)은 그림의 윤곽선이나 도형의 내부를 여러 개의 선(線)으로 분할하여 묘사하는 방법이다. 면각과 선각의 선후관계는 분명하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대체로 면각화(面刻畵)가 선각화(線刻畵)에 앞서 나타났다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 암각화는 대부분 강가의 수직바위 면에서 발견되며 대부분 동남향이나 남향으로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새겨져 있다. 하늘을 마주보는 평면에 새겨져 있는 안동 수곡리 암각화와 고인돌 등 소형바위에 새겨진 그림을 제외한 암각화는 대개 강가의 수직절벽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대부분의 암각화가 높지 않은 위치에 새겨져 있어서 선사인(先史人)들이 제작조건이 유리한 바위을 선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울산 반구대(盤龜臺) 암각화의 경우는 높이 3m, 길이 10m 정도의 대규모 암각화로 특수한경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반구대는 거의 북향으로 여름철 아침에 햇빛이 닿는다는 점도 특이하다. 우리나라 암각화 유적의 환경은 강가의 수직암벽이며 해가 뜰 때나 낮에 햇빛이 비친다는 두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어 암각화가 강(江) 그리고 태양(太陽)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보 285호 울산대곡리반구대암각화
반구대 암각화는 바위에 새겨진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암면에 그림을 그리거나 새기는 문화는 세계적으로 구석기 시대 후기부터라고 한다. 예사 그림이 아니라는 것은 서북러시아 해안에 새긴 바위그림이나 몽골 알타이 지방의 암각화를 접해 본 사람일수록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찬사는 그칠줄 모른다. 더구나 반구대 암각화의 형상이나 선묘를 한번이라도 그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더더욱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황홀경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반구대 암각화의 조형미는 시대를 통털어서 가장 앞서 있다. 바위에 새겨 넣은 여유로운 공간의 배치나 여백의 아름다움을 살려낸 절대미와 오묘하게 선묘된 음양각의 처리는 찬사와 예찬을 능가하는 초월적인 힘과 여유마저 느껴진다.
- 반구대 암각화의 위치와 역사-
반구대란 이름은 절벽이 있는 산등성의 암반모습이 마치 앉아있는 거북 같다하여 불리워진다. 반구대 암각화는 반구대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져 있다. 1971년 12월 25일 동국대 문명대 교수에 의해 발견되어 우리나라 선사시대 바위 그림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귀중한 유적이다. 울주구 언양면 대곡리 대곡천 중류(사연댐의 상류)의 암벽에 새겨져 있는데 평균 70m 높이에 하류로 이르는 계곡 오른쪽 절벽에 석재병풍을 이어 놓은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가장 많이 쪼아 새겨진 암벽부분은 석양무렵을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햇볕이 들지 않는 곳이다. 즉, 옛날에는 북쪽을 향하고 있으므로 풍화에 의한 침식이 진행되었으나 현재에는 몰속에 침수되어 있어 풍화나 인위적인 해악, 결빙과 같은 온도에 의한 균열이 방지되고 있다. 원래는 물에 잠기지 않았지만 현재는 사연댐 속에 잠겨 있어서 심한 갈수기를 제외 하곤 볼 수 없는 실정이다.(발견 당시 이미 댐이 있었다.) 반구대 암각화는 1971년에 발견해 낸 것으로 배, 고래, 거북, 사슴, 범, 족제비, 멧돼지, 사람 같은 형상들이 새겨져 있다.
"한국미술 오천년전"이라는 역사성을 내세우는 주된 문화 유산이 바로 반구대 암각화이다. 오천년이라는 연대 추정의 근거는 분분하다. 신석기에서부터 청동기, 초기철기시대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청동기나 초기 철기시대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것은 포경에서 작살같은 그림이나 암각화를 새기기 위해 청동이나 철기같은 도구가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기시대의 정교한 도구들은 모두 돌로 다듬어낸 것들로 미루어 볼 때 돌을 가장 손쉽게 쪼아 낼 수 있는 것은 청동이나 철보다는 숙련된 솜씨로 석기를 다등어 내듯 돌로 쪼아내는 것이 한결 수월하다는 주장을 해 본다.
<방패든 사람> <멧돼지> <작살꽂힌 고래>
<수직으로 서있는 호랑이> <표범> <고래>
<인면상> <방패든 사람>
<사슴과 족제비> <잉태한 고래>
-반구대 암각화의 규모와 양식
반구대 암각화는 너비 6.5m 높이 3m 가량의 중앙암면으로서 중심으로 좌우 15∼16m에 걸쳐 짐승이나 사람, 수렵이나 어로를 위한 물품 등 200여개 정도의 형상들이 음양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들은 바위를 쪼아 형상을 나타낸 뒤 그 위에 다시 그림을 새기는 겹새김과 오랜 세월 동안 비와 바람으로 말미암은 풍화와 침식 등으로 인하여 내용을 알기 어려워진 부분도 많다. 암각화가 새겨진 면은 중앙 암면을 포함하여 모두 9개에 이른다. 그림은 표현대상의 내부를 음각으로 모두 쪼아낸 "음각면쪼으기", 음각으로 쪼아내면서 부분적으로 형상을 양각으로 남긴 "음양각면쪼으기", 윤곽선만으로 쪼아낸 "음각선쪼으기", 윤곽선과 투시골격선을 함께 살린 "투시음각선쪼으기"에 의한 그림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반구대 암각화의 표현 기법
1) 위의 예시된 암각화의 부분을 보면 이러한 형상들은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중첩된 표현 기법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기존의 선대 집단들이 남긴 형상에 담긴 상징적 의미 또는 세력, 권위를 부정하기 위한 또 다른 표현을 함으로써 자신들을 신성시하거나 권위를 내새우기 위한 목적으로 선대의 흔적에 덧쪼으기를 하였던 것 같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이미 그려진 그림이 자신의 시각에 맞지 않으면 가필하여 자신의 시각을 만족해 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러한 흔적이 극히 일부분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의 선대들의 역사성에 대한 존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2) 암각화에 새겨진 표현기법들은 대부분 음각기법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오랜세월을 거치는 동안 그들의 능숙하고 다양한 표현기법의 발전상을 엿볼 수 있다. 그 발전적인 표현 기법의 변천은 다음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음각선쪼으기 : 초기 표현에서 나타나는 표현기법으로 외곽의 윤곽선만으로 쪼아낸다.
음각선무늬쪼으기 : 윤곽선의 기교에서 무늬를 표현하는 기교로 발전한다.
투시음각선쪼으기 : 윤곽선에 따른 표현이 능숙해지면 형상의 내부를 표현해 내는 기법으로 발전한다. 마치 동물의 몸 속 내부를 꽤뚫어 보는 듯한 투시기법이나 골격을 과감하게 표현해 내게 되는 것이다.
음각면쪼으기 : 쪼아내기 기법이 능숙능란해지면 선쪼으리에서 면쪼으기로 넘어간다. 즉, 구석기시대의 사실적인 묘사에서 신석기 시대의 단순화된 형상으로 바뀌듯이 과감하게 단순화되어 전체면을 쪼아내는 형산으로 바뀌어 간다.
음양각면쪼으기 : 전체면을 음각으로 쪼아내다가 세부의 형상을 남기는 표현기법으로 발전한다. 고래의 몸에 작살을 남기거나 잉태한 고래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발전한다.
- 반구대 암각화 이야기
표현기법에서 음각면쪼으기 기법에는 고래그림이 많이 있는데 돌고래, 향유고래, 솔피, 큰고래, 혹등고래, 흰긴수여고래 등 6종이 있다. 이것은 그 옛날 이곳 가까이가 모두 바다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조선시대의 문헌에는 16세기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현재의 태화강 하구에서 10km위쪽에 해당하는 학성 근처까지 미쳤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에도 암각화에서 20km떨어진 울산만에는 고래가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동안 한반도 정착집단들이 농경과 기마민족의 특성을 지녔다는 설과 함께 배와 고래 작살 등의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로기술도 함께 하였음을 알수 있다.
소재지: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234-1 수량 및 규격: 1기, 10×3m 제작연대: 신석기시대 후기∼청동기시대 현상: 강바닥보다 1단 높은 'ㄱ'자 모양으로 꺾인 암반에 새겨져 있다.
전체 화면에는 고래, 물개, 거북 등 바다동물과 호랑이, 사슴, 염소 등 육지동물 그리고 탈을 쓴 무당, 사냥꾼, 배를 타고 있는 어부, 목책, 그물 등 다양한 종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들 모습은 떼어내기 수법으로 형체를 표현한 음영화(陰影畵)와 쪼아파기 수법의 선으로 나타낸 선각화(線刻畵)로 나타내었으며 시베리아 암각화의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수렵과 어로를 위주로 한 당시의 생활풍속을 알려주는 가장 귀중한 선사시대 문화유산으로 한 화면에 200여점에 달하는 다양한 종류의 물상들이 새겨져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예로서 고고학, 미술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천전리 암각화
천전리 암각화가 있는 곳은 선사인들의 제사 지내는 장소라고 여겨지고 있다.
선사인들의 하늘에 대한 제사의례가 생명 창조와 관련된 신성성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암각화도 생명을 만들어내는 태양 빛이나 성적 표현물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문양들은 성기나 태양을 상징하고 그에 따라 풍요를 기원했다고 볼 수 있다.
천전리 암각화
면각(面刻)으로 새겨진 동물상(動物像)은 쪼아파기로 얕게 새겨져 있고, 마멸과 훼손이 심하여 지금은 바위면의 오른쪽과 왼쪽 끝에 약간 남아 있으며 중심부에는 비교적 깊게 새긴 것만이 남아 있다. 그런데 군데군데 남아 있는 상(像)을 통해 처음에는 상반부 전체에 가득 새겼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면각화(面刻畵)의 주제는 사람의 얼굴, 사슴, 종류, 고래와 비슷한 물고기 등으로 약 40여 점이 있다. 암수 한 쌍이 묘사된 사슴은 몽골과 중국 북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상(像)으로 역시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으로 본다. 바위면의 가장 중심부에 크기가 작은 동물 사이로 작은 꽃모양이 보이는데 이 모양을 태양(太陽)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슴의 큰 뿔과 태양(太陽)의 숭배는 북방문화(北方文化)의 영향과 관련하여 볼 수 있다.
울주 천전리 각석(刻石)은 너비 9.5m 높이 2.7m의 규모이다. 상부(上部)의 문양(紋樣)은 주로 쪼기(彫琢)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하부(下部)는 긋기(線刻)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이것은 제작시대 및 제작 집단(集團)이 서로 달랐음을 의미한다. 상단부에는 바위를 쪼아낸 뒤 깊게 갈아내어 만든 추상(抽像)도형이 여러 점 표현되어 있다.
바위면 하단부에는 철기로 파낸 가는 선(線) 그림이 집중되어 있다. 가는 선(線)그림은 신라의 선각문자(線刻文字)와 중복되어 나타나며 마멸이 심해 정확한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다. 바위 중앙부에는 다양한 동물과 글자, 직선과 곡선이 교차되어 새겨져 있으며 인물의 입상(立像)도 남아 있다.
암각화의 상부
이 암각화의 상단부에는 바위를 쪼아낸 뒤 깊게 갈아내어 만든 추상도형(抽像圖形)이 여러 점 표현되어 있다. 이 도형은 대체로 연속적인 마름모꼴과 동심원(同心圓) 모양이며, 도형은 아니지만 같은 기법으로 만든 사람 얼굴도 두 점이 있다. 마름모꼴의 이중선 내부에 세로선을 새겨 양분하거나 중심점을 찍은 것은 여성의 성기를 묘사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또한 동심원과 나선형의 문양도 일반적으로 태양(太陽)을상징하는 것으로 인정되지만, 동심원과 나선형이 어떻게 다른지는 알 수 없다.
기하학적 문양 ... 상부의 기하학적 문양은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마름모꼴무늬, 굽은무늬,둥근무늬, 우렁무늬, 십자무늬, 삼각무늬 등이 홑이나 겹으로, 혹은 상하 좌우 연속으로나타나기도 한다. 이들 기하학적 문양은 대개 직선(直線)보다 곡선(曲線)이 많고 상징성을 띠는 것이 많아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가장 많이 새겨진 것은 마름모꼴무늬로 홑무늬, 겹무늬 외에 연속문이 있다. 연속문에는 가로, 세로로 겹친 것과 한 무늬 내부에 같은 무늬가 두 겹 세겹 반복되거나, 점이나 빗금이 있는 것도 있다. 굽은무늬에는 가로굽은무늬와 세로굽은무늬가 있다. 원시문양(原始紋樣)에서 이들은 각기 물결과 뱀(蛇)을 상징한다.
상부 오른쪽 끝의 열매를 꿴 화살모양의 무늬는 암수이 결합을 의미하는 문양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상부의 이와 같은 문양들은 본질적으로 신석기시대 무늬토기의 기하학문양과 연결된다. 표현이 단순, 소박하면서도 명쾌한 무늬토기 문양양식을 이어받아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문양은 곡식(穀食)이나 음식물 등이 항상 풍요롭기를 바라는 청동기시대(靑冬期時代)의 기원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동물상 ... 동물상은 대부분 상부 왼편에 있다. 사슴종류가 압도적으로 많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동물과 물고기, 새 등이 있다. 사슴은 대개 암수 2마리가 서서 마주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 쌍으로 표현된 사슴 중 숫사슴은 뿔이 매우 크고 가지가 무성해 순록(馴鹿)의 일종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크기가 작은 사슴들은 신체의 특징이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염소나 말 등 다른동물로 볼 수 있는 것도 여러 마리가 있다.
상부 중심부에는 도안화된 얼굴의 한 인물과 태양을 나타낸 듯한 둥근 문양의 좌우로 4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을 새겨놓았다. 이는 당시의 어떤 종교의식이나 신앙관념과 관련있는 표현으로 보인다. 이들 동물상과 기하학 문양 사이에는 곡식 이삭이나 풀뿌리, 꽃종오리를 나타낸 문양도 있으나 상징성을 띤 기하학 문양의 변형으로 볼 수도 있다.
석각(石刻) 상부의 문양 제작집단(製作集團)과 종교신앙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상부 왼편 끝에 보이는 인두수신상(人頭獸身像)이다. 이 동물상은 부드러운 얼굴을 한 사람의 머리와 사슴을 닮은 몸체가 결합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선사(先史)시대 사람들이 믿고 숭배하던 신수(神獸)의 하나로 생각되며, 반인반수(半人半獸) 관념의 기원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평가되는 자료이다. 그밖에도 몸체가 긴 두 마리의 동물이 교미를 하는 듯 돌아서서 꼬리를 맞댄 채 서있는 모습이 2군데 보인다. 어떤 동물을 나타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상부 왼편에는 상어를 나타낸 듯 꼿꼿한 지느러미가 여러 개 있는 물고기 2마리와 주둥이와 비늘까지 표현된 물고기 1마리, 붕어모양의 물고기 1마리가 각각 새겨져 있다.
인물상 ... 인물상은 뚜렷이 파악되는 것이 모두 7군데이다. 얼굴만 묘사된 것과 전신(全身)을 나타낸 것 등 두 종류가 있다. 모두 원시암각화(原始岩刻畵) 특유의 극도로 단순화된 표현법을 쓰고 있어 사실성이 약하며, 일면 괴상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얼굴상은 대부분 원시종교의식가 관련된 탈을 연상시킨다. 눈, 코, 입이 뚜렷이 새겨진 얼굴상 하나는 시베리아 아무르강 유역 암벽조각에 새겨진 원시탈과 유사하여 주목된다.
이 각석(刻石)은 발견 후 암반 하부에 새겨진 다량의 명문(銘文) 때문에 서석(書石)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있다. 이 명문(銘文) 중 확인된 글자는 모두 800자가 넘는다. 상부 오른편의 원명(原銘)과 그 왼편의 추명(追銘)이 내용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밖에 제명(題銘)이 다량 보이고 있다.
오른편의 원명(原銘)이 새겨진 기사년(己巳年)은 신라 법흥왕 12년(525)이고, 추명(追銘)이 새겨진 기미년(己未年)은 법흥왕 26년(539)으로 추정하고 있다. 뒤에 새긴 추명(追銘)은 왕(王)과 왕비(王妃)가 이곳을 찾은것을 기념하여 기록했음을 밝히고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명문(銘文) 중에는 사탁부(沙啄部)라는 부명(部名)이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이곳이 신라 6부(六部)의 하나인 사탁부(沙啄部)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장소임을 뜻하고 있다. 이곳은 사탁부(沙啄部)의 고유한 종교의식(宗敎儀式)이 행해지던 성지(聖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밖에도 제명(題銘)에는 영랑(永郞), 금랑(金郞), 정광랑(貞光郞) 등 여러 화랑(花郞)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당시 많은 화랑이 이 곳을 찾아 도장(道場)으로 삼았음을 전해준다. 이들 각석(刻石) 하부의 명문과 각종 선각화(線刻畵)는 신라 6부체제의 발전,변화 과정과 내용을 규명하나가는데 주요한실마리를 제시해주고 있으며, 앞으로 이에 대한 보다 종합적이고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한다.
원명 原銘
원명(原銘)은 서석(書石)의 하단부 중앙에서 왼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서석의 면을 파서 곱게 다듬고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둘러 구획을 정한 후에 글자를 새겼다. 서석의 명문 가운데 이것이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가장 먼저 작성되었다고 보이기 때문에 원명(原銘)이라고 불렀다.
원명(原銘)의 작성연대는 을사(乙巳)라는 간지가 보인다는 점, 추명(追銘)에서 과거의 사실을 축약하여 기술한 사실, 주인공인 사부지발문왕(徙夫知葛文王,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이 진흥왕이 즉위한 해인 540년 이전에 사망하였다는 사실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하여 525년(법흥왕 12)로 추정하고 있다. 원명(原銘)의 내용은 사훼부(沙喙部) 소속의 갈문왕이 고곡(古谷)을 찾아 이를 서석곡(書石谷)으로 이름지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추명(追銘)의 내용과 더불어 6세기 전반 신라 왕실의 실태와 정치사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을사년(乙巳年)에 사훼부(沙喙部)의 갈문왕(葛文王)이 찾아 놀러와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오래된 골짜기인데, 이름 없는 골짜기이므로,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짓고, 이로 말미암아 서석곡(書石谷)으로 이름을 삼아 명문(銘文)을 새겼다. 더불어 놀러 온 이는 갈문왕과 우매(友媒)와 여덕광묘(麗德光妙)한 아수추안랑(於史鄒安郞) 셋이다. 사냥을 많이 하여 일체의 일을 맡으신 이는 이리부지 내마(奈麻)와 실득사지(悉得斯祉) 대사제지(大舍帝智)이었다. 음식을 만들어주시는 분은 송지지 일길간지(宋知智 壹吉干支)의 처(妻)인 거지시혜 부인과 진육지 사간지의 처(妻)인 아혜모홍 부인이다. 글을 쓴 사람은 모모이지 대사제지(慕慕荑智 大舍帝智)이다.
추명 追銘
추명(追銘)은 원명의 좌측에 서석의 면을 약간 파서 다듬고,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둘러 구획을 짓고 글자를 새겼다. 내용과 위치로 보아 원명과 연속된 명문 자료로 추정되기 때문에 추명(追銘)이라고 이름하였다. 여기에 기미년(己未年)이 보이는 점, 내용 가운데 '사부지왕자(徙夫知王子 ..갈문왕의 아들)'의 이름이 보이는 점에 근거하여 추명의 작성연대는 539년이라고 볼 수 있다.
글자가 마멸되어 정확하게 판독되지 않는 것이 있다. 판독에 따라 명문의 해석에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체로 명문의 내용은 앞부분에 을사년에 사부지갈문왕(徙夫知葛文王) 등이 서석곡(書石谷)을 찾아온 일, 갈문왕(葛文王)의 누이와 더불어 갈문왕도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이어서 기미년(기미년) 7월3일에 서석곡을 찾아왔다는사실, 그들을 따라온 사람들의 인명 등을 차례로 기술하였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법흥왕(法興王)이 태왕(太王)이라는 왕호를 사용하였음을 전하는데, 이를 통하여 530년대에 왕호(王號)가 매금왕(寐錦王)에서 대왕(大王)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법흥왕 재위 기간 동안에 그의 동생, 갈문왕이 사망하였다는 사실도 살필 수 있다. 이밖에 추명(追銘)의 기록들은 법흥왕대 관등표기 방식, 갈문왕(葛文王)의 성격 등을 살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원명
<을사년( 525년) 법흥왕( 12년)에
사훼부 갈
문왕께서 찾아서 놀러 오셨다가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게
되시었다. 오래된 골짜기로서 이름이 없는 골짜기 였다. 이에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쓰게
하시었다. 이후로 이름을 서석곡이라고 명명하고 글을 짖게 하시었다.
더물어 함께 놀러온 우매( 사랑하는 누이)는 아름답고 덕이 있으며 빛처럼 오묘하신 어사
추안랑님이시다.
(짐승을)죽여서 음식을 많이 차린 작공인은 이리수지 대나마
식득지 대사제지이야. 음식을 만든 사람(작식인)은
영지지 일길간지의 처인 거시헤부인.
진육지 사간지의 처인 아혜모호부인이다.
년 법흥왕14글을 쓴 이는 모모이지 대사지이다537>
과거 을사년(법흥왕 12. 525년) 6월 18일 새벽에 사훼부(沙喙部)의 사부지 갈문왕과 누이인 어사추여랑님이 함께 놀러온 이후 올해로 14년이 흘렀다. 누이를 생각하니 이미 누이는 돌아가신 분이다. 정사년(법흥왕 24. 537년)에는 갈문왕(葛文王)도 돌아가셨고, 그 왕비 지몰시헤비는 애달프게 그리워 하였다. 기미년(법흥왕 26. 539년) 7월 3일 갈문왕과 누이가 함께 써 놓은 서석(書石)을 보러 골짜기에 왔다. 이때 세 분이 함께 왔는데 무즉지태왕비인 부걸지비와 사부지갈문왕의 아들인 심맥부지(深麥夫知)가 함께 왔다. 일을 맡은 총 책임자는 사훼부의 지례부지 사간지와 박육지 거벌간지이다. 의례를 맡은 신하는 정을이지 내마(奈麻)이다. 음식을 만든 이는 진육지 파진간지 부인인 아혜모호 부인과 이부지 거벌간지의 부인인 일리등차 부인, 거례차 거벌간지의 부인인 사효공부인이 함께 하였다.
추명(追銘)의 내용은 사부지 갈문왕(葛文王)과 어사추여랑이 서석곡(書石谷)을 찾은지 14년이 지난 기미년(539년)에 갈문왕의 부인과 그 가족이 다시 서석곡을 찾아왔다. 그리고 이때는 갈문왕과 어사추여랑은 모두 사망한 상태이었으며 갈문왕은 2년 전인 정사년에 이미 사망하였다. 어사추여랑는 갈문왕 보다 앞서 사망하였다.
다양한 문양(紋樣)들
공룡발자국 화석
백악기 공룡의 발자국 화석으로 울산광역시문화재자료 제6호로 지정. 비적색층으로 200여 개의 백악기 공룡 발자국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초식 공룡인 한외룡을 비롯한 중형 초식 공룡인 조각류 이구아나룡에 속하는 고성룡과 육식 공룡인 큰룡 등의 것이라 한다. 이동의 흔적이 아닌 공룡의 주요 서식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발자국의 깊이가 깊고 윤곽이 뚜렷하여 자연사적 가치가 높다.
이곳의 공룡발자국 화석은 약 1억년 전 전기백악기(前期白堊記) 시대에 살았던
중대형 공룡들의 것으로 귀중한 자연사 자료이다.
당시의 공룡들은 아열대 기후 아래 우기와 건기가 반복되고,
열대 무역풍이 영향을 미치는 사반나 지역의 하천평야 일대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공룡발자국 화석은 약 1,750m2 면적의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남아 있는 것은 대형 초식공룡인 한외룡(울트라사우루스)을 비롯한
용각룡 열마리의 발자국과, 중형 초식공룡인 조각류 이구아나룡에 속하는
고성룡(고성고사우루스) 한 마리의 발자국 등 200여 개이다.
걸어간 발자국 길은 보이나 그 발자국들이 평행한 행렬은 아닌 것으로 보아,
공룡들은 이 일대를 평화롭게 배회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룡발자국 화석이 나온 지층은 중회색이암혼헬스의 비 저색층으로
경상누층군(慶尙累層郡) 하양층군(河陽層郡) 사연리층에 속한다.
청동기문화의 기원 - 자체발생설, 중국 殷靑銅器의 영향설,남부시베리아-북방 오르도스Ordos 지방 청동기에서 왔다는 설. 세 번째설이 지배적. 기원전 13세기 남부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상류 미누신스크Minussinsk 지방에서 출현한 카라스크karasuk문화(B.C.1200-700)의 담당자가 동쪽으로 이동해 한국청동기문화를 형성시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