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교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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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는 말까지 나온 중세 교회 최전성기의 교황이다. 속명(俗名)은 로타이레 디 세니(Lothaire di Segni)이며, 37세의 젊은 나이에 교황에 선출되었다. 이는 전임자 첼레스티노 3세가 80대 중반의 고령으로 즉위해 92세로 사망했던 점 때문에, 추기경들 사이에서 "젊은 교황을 뽑아 시국에 강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견해가 일치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160년 무렵 태어난 로타이레는 1190년 무렵 부제 추기경에 임명되었고, 1198년 1월 8일 첼레스티노 3세가 선종하자 그날 거행된 장례식 직후 바로 열린 교황 선거에서 선출되었다. 로타이레는 로마, 파리, 볼로냐 등 당대 최고의 명문 대학에서 공부하며 신학과 법학에 조예가 깊었고, 달변가이기도 했다. 거기에 외모도 준수했다고. 교황계의 엄친아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의 지위와 권한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바탕으로 자신을 '베드로의 대리자'가 아닌 '그리스도의 대리자', 즉 하느님의 대리자로 자처한 최초의 교황이며, 이는 그만큼 교황권이 무소불위의 절정기에 도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인노첸시오 3세는 교묘한 배후조종과 파문을 번갈아 써가며 독일 정치에 개입해 자기 뜻대로 프리드리히 2세를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만들었으며, 프리드리히는 1212년 12월 9일 황제 대관식을 치르고 3년 뒤 아헨(Aachen)에서 정식 대관식을 치러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인정받았다.[1]
독일 왕권 분쟁만이 아니라 인노첸시오 3세는 리처드 1세의 동생인 존 왕에게도 간섭하여, 캔터베리 대주교의 서임을 둘러싼 논쟁 끝에 존 왕을 파문하고 프랑스 왕과 연합하여 전쟁에 자신이 없던 존 왕을 위협했다. 결국 존 왕은 인노첸시오 3세의 위협에 굴복해 잉글랜드 전체를 교황의 봉토로 바치고 이를 다시 수여받음으로써 스스로 교황의 봉신(封臣)이 되었으며, 봉신의 의무로 매년 1,000파운드의 세금까지 납부하기로 약속해야 했다.[2]
군주들의 문제에 대한 개입 외에도, 인노첸시오 3세 시대에는 종교적으로 중요한 일이 많았다. 남프랑스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새로운 신앙운동은 제도권 교회를 거부하여 위협으로 인식되었고, 결국 인노첸시오 3세는 1208년 교황 사절 피살 사건을 계기로 소위 '알비 십자군'을 결성해 남프랑스의 반(反)교황 세력인 알비 파를 처단하였다. 그러면서도 인노첸시오 3세는 교회 자정(自淨)의 필요성도 인식, 1210년 프란치스코의 새로운 수도회를 인준하고 순회 설교의 권리도 인정하여 어느 정도 교회의 자정을 위한 노력도 실시하였다.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가 이 때 허가된 건데, 인노첸시오 3세가 프란치스코의 새로운 신앙운동을 알비파처럼 탄압했다면 2013년에 선출된 새로운 교황의 이름도 달라졌을 것이다.
한편 1215년 인노첸시오 3세는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열어 교회 개혁과 신앙 및 윤리 문제, 새로운 독일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승인, 탈선해 버린 제4차 십자군을 대신한 새로운 십자군 운동의 계획 등을 논의하였다.[3] 라테라노 공의회는 중세 최대의 공의회로 1,200여 명의 주교, 수도원장, 사제들이 참석했다.
이 외에 인노첸시오 3세 때의 유명한 사건은 제4차 십자군의 탈선이다. 베네치아가 주도한 제4차 십자군은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약탈한 뒤 라틴 제국을 세우는 것(1204)으로 마무리되었다. 팀킬 그리스 교회를 무력으로 짓밟아 굴복시킨 뒤 콘스탄티노플에 라틴인의 교회가 세워졌기에 그리스인들의 증오심은 대단했으나, 인노첸시오 3세는 어쨌든 동서방 교회의 일치가 이루어졌다고 자평했다. 교황 스스로 말하길 "콘스탄티노플이 좀 더 빨리 라틴인의 손에 들어 왔다면 성지(聖地)가 짓밟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 했다고 한다.[4] 흠좀무.
라테라노 공의회를 끝낸 뒤 교황은 1216년 7월 16일, 새로운 십자군 원정에 대한 조율을 위해 머물던 페루자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