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청소년 소설 좌담
2011년 청소년 문학을 돌아보다
참석 : 유영진, 오세란, 김성진
유 우리가 검토하기로 한 책이 2010년 12월 1일부터 2011년 11월 30일까지 출간된 작품입니다. 그간 출간된 것들이 대략 70종, 예상 밖의 엄청난 양의 청소년 소설이 출간됐어요. 출간된 책들을 읽어 보시면서 전반적으로 받은 인상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넘어가죠.
오 열심히 읽느라고 읽은 것에 비해 마음에 남아 있는 작품이 적어서 상당히 아쉬운 한 해였어요. 그 원인 중의 하나가 몇 년 사이에 청소년 소설 장르에 대한 고정관념이랄까, 아니면 '이렇게 써야 된다.'는 것이 내부에서 형성이 되는 까닭이 아닐까 이런 생각도 좀 들었고요. 그래서 오늘 개별 작품 이야기와 함께 청소년 소설의 전반적인 경향과 문제점에 대해서도 한 번 이야기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김 쏟아진 작품 양에 비해서 제 마음속에 오래 남을 것 같은 소설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 청소년 문학이 가볍게 생략해 버렸던 ‘아버지의 이름’과 대결하는 작품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2012년에는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파고드는 작품이 나올 것을 기대해 봅니다. 그리고 학교 문제에 대해서는 ‘교육의 불가능성’을 전제로 출발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인데요, 그 때문인지 학교 밖에서 ‘대안 성장의 공간’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유 청소년 소설이라는 장르가 원래 있었던 게 아니잖아요. 자본이 만들어낸 장르라는 말도 있고요. 최근 10년 동안의 흐름을 거칠게 짚어보면요, 2000대 초반에는 『봄바람』처럼 후일담류 소설이 주류였던 것 같아요. 2000년대 중반에는 현실 아이들의 삶에 집중하자는 흐름이 생겨서 임태희나 신여랑 같은 작가의 작품이 출현했다 보고요. 그런데 이런 작품들은 자기 청소년기를 되돌아보는 게 아니라 현실 아이들을 주로 취재해서 글을 쓰다 보니까 소재주의라는 한계에 갇히는 거 같더라고요. 10대 임신, 미혼모, 춤추는 아이, 연극하는 아이, 문예반, 밴드, 코스프레, 스포츠 카이트 등등 소재를 이동하는 방식으로요. 자본이 만들어낸 장르든 어쨌든 지금 청소년 소설이 장르로서 자리를 잡고 있는데요. 문제는 현실 아이들 삶을 이야기한다면서 특기적성 활동 순례기가 되고 있거든요. 지금 필요한 건 청소년기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라 생각돼요. 그것이 성장이든 반성장이든 말이죠.
김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봤어요. 청소년 소설이라는 범주는 과연 성립 가능한가? 그리고 필요한가? 우리 대학 도서관에 있는 young adult literature 타이틀을 단 책 몇 권을 뒤져 봤는데, ‘young adult novel’ 혹은 ‘young adult shot story’라는 용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아요. 그냥 청소년 문학 안에 리얼리즘, 오래된 낭만주의, 모험담 이런 식으로 분류를 했지요. 시 역시 마찬가지고요. 청소년 시라는 말은 없고 그냥 poetry에요.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한 번 진지하게 생각을 해 봤으면 좋겠어요. 소재로서의 청소년의 삶이나 내포 독자로서의 청소년을 의식하고 쓴다는 차원 이상의 별도 장르 개념이 과연 필요한가, 이 말인 거죠. 올해 쏟아진 작품을 읽다가, ‘청소년 소설’이라는 용어가 작가들이 과감하게 치고 나가는 것을 제약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어요. 좀 모순적이기는 한데, 저는 청소년 문학이라는 용어는 사용하되, 청소년 소설이라는 용어는 폐기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청소년 소설’을 살리기 위해서는 ‘청소년 소설’이라는 용어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죠. 특히 작가들은 청소년 소설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생각하며 작품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유 그럼 이제부터는 좀 더 구체적으로 작품을 들어 특별한 인상을 남긴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볼까요.
오 저는 청소년 문학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기를 바라거든요. '어떤 식으로 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 가야 한다'라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각기 개성 있게 창작을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그래서 흡사한 패턴의 작품보다는 그 외의 작품이 눈에 들어 왔어요.
일단 작년에 봤던 작품 중에서는 『내 청춘, 시속 370km』, 이 소설은 정통적인 성장소설이라고 봤어요. 마음에 흡족하지 못한 캐릭터도 있었지만 소년이 아버지와 소통하는 것이 성인으로의 진입 과정이라면 그것을 자신이 기르는 매를 길들이는 과정과 조응해서 잘 담아내지 않았나 싶어서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에요.
그리고 『정범기 추락사건』 이 작품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 작품은 단편이 여러 개 들어 가 있는데 요즘 아이들 이야기를 발랄하게 쓰면서도 독자에게 무언가 전달을 해주려고 하는 점이 좋았습니다. 작년에 제가 제일 아쉬웠던 건 작품이 독자들한테 뭔가를 전달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은 그래도 독자들에게 뭔가 여운을 주는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재미있었어요.
또 『나b책』 같은 경우, 김사과라는 작가가 원래 청소년물을 쓰던 작가가 아니고 일반소설에서 청소년 화자를 주인공으로 해서 많이 쓰던 작가거든요. 그런데 청소년물을 썼는데 상당히 다른 소설을 썼고, 그리고 리얼리즘 소설을 주로 읽던 독자라면 읽어내기 쉽지 않은 작품을 써서 청소년들한테 어떻게 읽힐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번 읽는 과정에서 상당히 취해야 할 부분이 있어서 문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 그러니까 『나b책』이 읽기는 좀 버겁고 청소년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새로운 면이 있다라는 거죠?
오 가장 크게 주목한 것은 철저히 주관적인 시점에서 사건을 보고 있다는 것이었죠. 즉 내면 독백이나 꿈이라는 장치가 적극 활용됩니다. 폭력에 대해 객관성을 가지려고 하는 소설이 아니고 철저히 피해자인 '나'와 'b'의 입장에서 주관적인 서사를 끌고 나갔는데 읽기 버거운 감은 있지만 주관적인 서사에 대한 하나의 시도를 해주었다는 점에서 앞으로 참고할 만한 문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저는 인상 깊게 본 작품이 네 작품 정도 되는데요. 세 작품은 오 선생님과 생각이 비슷해요. 『내 청춘, 시속 370km』, 『정범기 추락사건』, 『나b책』. 그리고 하나 더 주목한 작품이 『오늘의 할 일 작업실』입니다. 『내 청춘, 시속 370km』은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그동안 무시되어왔던 아버지의 세계, 어른들의 세계와 주인공의 만남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버지 혹은 부모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 사이의 갈등 그리고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미워하면서도 닮아갈 수밖에 없는 부모의 존재야말로 청소년 문학에서 너무나 중요한 소재거든요.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문제를 그냥 생략해 버렸어요. 하지만 생략한다고 회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어른들의 세계를 한없이 왜소하고 우습게 희화화해놓고 자기 길을 간다고 선언하는 주인공 이야기는 진부할 뿐만 아니라 그런 식으로는 ‘청소년의 삶’을 제대로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철없는 어른과 성숙한 아이 구도 속에서 양자의 소통이 없는 이야기 말고 정공법으로서의 ‘성장담’이 필요한 시점에 그 싹을 보여준 작품이 『내 청춘, 시속 370km』라고 생각합니다.
『나b책』은 판단을 유보하고 싶은데요. 물론 분명 좋은 면을 가지고 있어요. 냉소는 있지만 냉소주의에는 빠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에반게리온>에 나오는 열세 번째 사도의 등장 신호인가 하는 느낌도 받았고요. 특히 등장인물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을 문체를 통해 차단하는 면에 주목했으면 합니다. 이런 소재에 흔히 따르는 피해자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을 거부하는 부서진 서사라고 해야 하나, 이걸 의식적으로 추구하고 있어서 새롭게 읽혔어요. 그리고 문체적으로도 어두운 이야기인데 묘하게 시적인 리듬감 같은 것이 느껴져요. 하지만 이 작가의 다른 작품과 연결시켜서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겁니다.
그리고 『오늘의 할 일 작업실』 같은 경우는 작년에 제가 좋게 읽었던 김민경 작가의 『앉아 있는 악마』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어요. 저는 작가가 절실하게 하고 싶은 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우선인 거지 '학생들이 요즘 좋아하는 게 뭐고 즐기는 문화는 뭐지?'에서 출발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김혜진 작가는 미술에 대한 체험, 앎, 애정 같은 것들이 있었기에 이런 좋은 작품을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범기 추락사건』은 처음 읽었을 때의 기대가 컸기에 다시 읽었을 때의 아쉬움이 더 커진 그런 작품이었어요. 뭐랄까,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약했다고나 할까.
오 김 선생님의 말씀 중 『나b책』이 차갑고 어둡게 보지만 냉소주의에 빠지지는 않았다는 지점이 주목됩니다. 『나b책』의 세계관은 상당히 어둡지요. 아이들에게 '이 세상이 살만한 곳이다'라고는 말하지 않는 거죠. 어디에나 존재하는 폭력이나 어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지난해 나왔던 소설의 아쉬운 점 중 하나가 『완득이』 이후로 청소년 소설을 가능하면 재미있게, 웃기게, 아무리 어려워도 낙관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저는 그런 세계관도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일한 경향으로 형성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지난해에 두드러지게 보였었거든요. 이것의 문제점은 철없는 어른에 맞서는 ‘조숙한 아이’가 그 짐을 끌고 나가려다 보니까 세상을 우습거나 재미있게 그려내지 않으면 결말까지 도달하기가 힘들어지는 거죠.
예를 들어 양호문 작가의 소설을 보면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청소년에 대한 시선은 굉장히 소중하지만 과연 학교에서 배제되고 저소득층에서 생활전선에 나가야하는 아이들에게 낙관적이고 힘을 북돋워 주는 소설들이 과연 독자에게 문학적 진실의 힘을 줄 수 있을까. 그게 아니면 이건 하나의 일시적인 북돋움에 지나지 않는 거죠. 그렇게 보면 세상을 냉정하게 보여 주는 작품도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지난해에 나왔던 소설은 아이들에게 밝은 세상을 보여 줘야 한다는 관념 때문에 새로운 물꼬를 틀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를 했어요.
작품 중에 그런 작품 굉장히 많거든요. 『우리들의 짭쪼름한 여름날』, 『불량가족 레시피』, 『내 이름은 망고』, 『달려라 배달민족』 이런 것들이 다 부모나 어른이 무능하고 아이는 삐딱하지만 근본적으로 착하지요. 결국 그런 중에도 성장을 달성하는데 그런 작품이 계속 출간되는 이유가 청소년 소설에 대한 하나의 패턴화라고 생각이 들어서 아쉬운 부분이에요.
유 우리가 좌담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 청소년 문학의 주요 이야기 방식이 철없는 어른과 조숙한 아이의 대립 구도라고 했었는데요. 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 더 깊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저도 이런 패턴이 존재하고 있고, 어느 정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거든요. 그런데 거꾸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대립 구도가 시대적인 어떤 징후를 드러내는 증상일수도 있다고 말이죠.
오 몇 년 동안 청소년 소설을 읽어오면서 느낀 것은 청소년 소설이란 어떤 것인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달려왔기 때문에 청소년소설의 경우 한 가지 경향에 대한 휩쓸림 현상이 심하죠. 다른 장르에 비해서. 지난해에는 유독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야한다는 가벼움 안에 이와 같은 구도가 들어갔다는 것이지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서 이런 흐름도 있다면 다른 이야기죠.
일반 평론가 중에서 개인으로서 금기와 마주쳐서 그것을 재해석해 나가고 내 안에서 극복해 나가는 것이 문학인데 청소년 소설이라는 장르가 청소년들에게 그런 금기를 던져 주기는 하지만 금기를 뛰어넘는 방식이 아니고 제도 안으로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다면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 하는데요. 저는 이 말에 대해 반론할 부분도 있지만 분명히 새겨들을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읽는 동안 위안을 주는 문학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고 학부모에게 욕을 먹고 사회에서 거부되고 그 당시 독자에게는 읽히지 않더라도 현 시대를 제대로 읽고 그것이 문학적으로 발현되는 작품이 나와 줬으면 합니다. 어쨌든 그런 작품이 점점 보기 드물어진다는 것이 안타깝죠.
김 다양성이 나쁜 것 같지 않아요. 『우리들의 짭쪼롬한 여름날』은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완득이』 이후 특유의 까불까불하는 구어체가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 그 문체를 쓴다고 해서 꼭 나쁜 건 아니죠. 철없는 엄마와 엄마 역할을 떠맡는 청소년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런 식의 명랑소설 구도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이 문체와 이런 구도가 청소년 문학의 다양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을 제약하는 나쁜 관습 쪽으로 가면 분명 문제가 되죠. 바로 청소년 소설이라는 명칭이 오히려 그런 관습을 굳어지게 하는 효과도 있는 것 같고요.
전 이제 반성장의 공식이 진부하게 다가와요. 그냥 소설과는 다른 이야기 방식을 만들어야 하는 강박 관념이 지나쳐요. 과연 정통 성장 소설에 대해 작가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접근했는가를 좀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성장 소설이 튼튼하게 자리 잡았을 때 그것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반성장으로 가야 하는데 우리는 이걸 생략하고 반성장이 주류거든요. 아마 성장 소설은 근대문학, 그냥 소설인거고 반성장은 탈근대에 청소년 소설 이런 식의 구도가 잡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성장 소설이 다루는 소위 ‘근대적’ 과제는 생략하고 넘어간다고 그냥 넘어가지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언젠가 반드시 다시 돌아와 복수를 하지요. 올해의 양적 풍요와 질적 빈곤은 바로 그런 복수의 징조는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내 청춘, 시속 370km』는 사실 여러 가지 한계도 있지만 장점을 더 많이 보고 싶은 작품이에요.
유 저는 『우리들의 짭쪼름한 여름날』 재밌게 봤는데요. 철없는 엄마를 너무 적나라하게 잘 그려서 재밌었고, 가족문제가 결부 되어 있는데 좀 다르더라고요. 2천년대 중반 이후, 그러니까 최나미의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 이후로 서로에게 고통이 되는 가족이면 해체되는 게 낫다는 생각이 한 5~6년 동안 우리 아동청소년문학의 한 흐름이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불량가족 레시피』가 인상 깊었던 것이 가족의 해체를 통해서 가족이 새롭게 재구성되는 게 정말 좋았거든요. 이건 또다른, 새로운 발견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들의 짭쪼름한 여름날』도 가족주의로 함몰될 것 같은 위태함 속에서도 가족 해체 속에서 부유하는 청소년의 손을 잡아준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오 아까 말씀드린 어떤 구도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은 장르의 경향을 말씀드린 것이고요. 개별 작품으로 보자면 한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하신대로 엄마의 리얼한 철없음 같은 것을 재미있게 잘 그렸다고 생각해요. 이 작품은 말하자면 보물찾기 소설이거든요. 아이가 가게 된 섬에서 보물을 찾아 밭을 뒤지는 것은 결국 성숙이라는 내면의 보물을 찾아나가는 것이거든요. 나름대로 서사적인 재미와 기승전결이 잘 연결되어서 제가 말씀드린 경향의 작품 안에서는 재미있게 읽었어요.
김 청소년 문학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 이중적인 태도가 있는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기대치가 높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이정도면 괜찮아' 하며 넘어가기도 하고. 저는 꼭 이 작품이 나름대로 이야기가 탄탄하고 읽을 만한 재미가 있으면서도 말초적인 재미에 빠지지 않았다고 봅니다. 『정범기 추락사건』도 마찬가지고요. 추리 플롯이 제대로 구현된 작품이 많지 않거든요. 청소년 문학에서 뭐가 나올 수 있을까 했는데 이 작품이 비교적 성공적인 사례가 될 수 있어요. 등장인물의 캐릭터도 살아 있고, 누가 대체 뭘 훔쳤나, 이 아이의 비밀은 뭘까, 독자를 빨아들이는 면이 있거든요. 우리가 이런 장르 코드를 추구하는 청소년 문학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 저도 『정범기 추락사건』을 재미있는 단편집이라 말씀드렸는데, 그럼에도 꼭 드리고 싶은 말씀 중 하나가 『정범기 추락사건』에서 휴대폰 때문에 회의 열리는 단편, 「울지 않는 이유」에서, 휴대폰 때문에 학생회의가 열리는 이야기가 등장하지요. 지금 청소년 인권조례에 관한 담론이 사회에 등장하면서 이야기될 만한 소재고, 이것과 곁들여서 『나는 즐겁다』라는 작품도 보면 오빠의 동성애 이야기가 하나의 줄거리로 들어가 있는데요. 우리 사회가 이런 소수자 문제나 인권 문제를 보수 진영이나 진보 진영이 이데올로기화하면서 정작 중요한 알맹이를 소홀히 하거든요. 문학에서도 동성애 이야기도 좋고 휴대폰 소지 이야기도 좋은데 인권선언과 문학은 어떻게 다른 건가 생각해 보았으면 해요. 선언이나 당위성 이전에 인간의 문제로 좀 봐줬으면 싶어요. 휴대폰이야기도 너무 크게 보지 말고 나는 정말 너무 가지고 싶고, 손에 없으면 안 될 정도로 중독인데, 내건데 왜 내가 못 가지나하는, 철없어 보이더라도 좀 작은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어요. 중학생인 우리 아들이 머리에 신경을 좀 쓰는데요. 학생인권이 뭔지는 모르지만 “패션의 완성은 머리”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머리 모양을 포기하지 않아요. 사실 이것만 잘 그려도 결국 인권문제와 연결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지요.
청소년 소설이 청소년의 인권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너무 거창하게 가는 것이 아닌가.
개인의 내면과 욕망의 문제로 좀 좁힐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 저는 그 이전에 취향이나 주제 의식을 가지고 독자를 유혹하려는 작품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즐겁다』에서 갑자기 왜 오빠가 커밍아웃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지금 동성애와 관련된 인권 문제가 중요하고 이를 청소년들에게 전달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하는 거지요. 문제의식 심지어 취향만을 가지고 소설을 쓰려고 하는데, 독자들이 그렇게 어리숙하지 않아요.
유 저도 『정범기 추락사건』 재미있게 봤어요. 명랑하지 않은 이야기인데 명랑함의 톤을 억지스럽지 않게 유지한 게 좋았어요. 이 작가가 추리라는 장르를 계속 쥐고 가는 것도 인상적이었는데 아쉬운 건 읽은 지 3개월 정도 지났는데 인물이나 줄거리가 잘 기억이 안나요.
오 그건 선생님의 기억력 때문이 아닐까요? (웃음)
유 그래도 인상적인 한 두 장면이 기억나야 하는데 잘 안 나요.
오 『정범기 추락사건』이 다른 작품과 달리 자연스러운 웃음을 주는 것은 거리두기를 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작품의 경우 독자는 안 웃긴데 작가는 자꾸 웃기려고 하는 억지웃음이 보이는데 이 경우는 거리조절을 잘한 게 아닌가 싶어요.
김 전 『정범기 추락사건』의 캐릭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캐릭터가 대단히 개성적이고 살아 있거든요. 승효는 부잣집 아이이지만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하지요. 그런데 독특하게 쿨한 모습으로 나와요. 노는 아이로 오해 받는 당찬 성격의 민지영도 그렇고요. 이처럼 개성 강한 캐릭터들을 잡아서인지 독자들을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어요. 여기에 추적의 플롯이 일조를 하구요.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이 자꾸 드라마를 연상시키거든요. 그래서 반전마저도 이 장면에서 반전이 나오겠지 싶은 그런 기대를 그대로 따른다는 느낌을 주구요. 예를 들어 승효와 주인공 ‘나’의 우정 회복 과정이 딱 이 대목에서 이런 결말이 나와야지, 그럼 하는 느낌의 청소년 드라마의 한 장면 같거든요. 작가가 청소년 드라마 시나리오 작업을 많이 하신 분인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유 『내 청춘, 시속 370km』은 두 분이 좋다고 하셨는데 저는 구성도 그렇고 세계관도 동화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거든요. 이 작품이 동화가 가진 낭만성, 우리 동화의 큰 폐해라고 지적됐던 기존 질서에 대한 적응, 주인공이 매를 길들여 가는 과정을 통해서 결국은 독자들에게 안정적인 사회적 적응을 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 번 더 생각해 볼 부분은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오 일반소설에서 반성장 담론이 집중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게 90년대 초반 거대담론과 이분법적인 세계가 와해되면서부터거든요. 그런데 청소년 소설은 성장, 반성장의 담론이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왔어요. 성장소설을 지금의 눈으로 보면 낭만적인 장르로 보이거든요. 전통적으로 성장은 분명 일정한 목표지점에 닿아 있지요. 이러한 이야기성은 포스트모던한 시대의 눈으로 볼 때 낭만성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현대적인 시각에서 성장소설의 낭만적 성격을 읽으신 게 아닌가 싶어요.
저는 예전에는 성장이라는 말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었는데 이제는 청소년에게 일반적인 성장 역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청소년 소설은 스펙트럼이 넓어져야 하기 때문에 성장소설부터 반성장 소설까지 이 스펙트럼 안에서 고르게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보고 작년 같은 경우 아쉬운 한 해라고 생각해요.
유 그러니까 작년에 출간됐던 작품 중에서 성장이라는 전통적 키워드를 꽉 쥐고 나간 작품이기 때문에 높이 평가할 부분이 있단 말씀이시죠.
김 유영진 선생님이 이 작품을 동화적이라고 봤는데 전 오히려 소설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대 소설에 대해 ‘스스로 아버지가, 뭐 어머니라고 해도 되지요, 되는 과정을 다루는 이야기’라고 해도 괜찮을 겁니다. 김윤식 선생이 한국 근대 문학사를 설명하는 명제로 ‘애비는 종이었다.’나 ‘애비는 남로당이었다’ 이런 것들을 든 적도 있었고요. 과연 이게 뭘 뜻하는 걸까요? 저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를 정말 싹 무시하고 집 밖으로 떠도는 이야기만으로는 청소년의 성장을 제대로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어른이 되느냐,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지요. 그냥 집밖에 나가서 즐겁게 취미 활동하고 뭐 이런 것만 가지고는 이 고민을 제대로 그리기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요? 이 소설처럼 집을 콩가루로 만들어가면서 매사냥꾼으로 살아가려는 아버지라면 저라도 미워할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아버지에게 바로 매를 통해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야말로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이름’의 핵심이거든요.
오 철없는 어른들 틈에서 혼자 크는 이야기로는 결국 어른들과의 소통은 힘들죠. 그런데 이 작품의 경우 뒤로 가면 아버지, 즉 어른 역시 변하여 아이와 소통하는 게 보이거든요. 가령 주인공이 아버지를 욕한 드라마 스태프를 때리는 사건에서 아버지가 ‘제대로 때리라고’ 한 마디 슬쩍 던지면서 서로에 대한 갈등이 풀어지는 과정을 보면 아버지도 반성하고 변화하려는 심리가 나타나거든요. 사실 이 시대의 아버지, 어른들도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소통하고 변화해야 하거든요. 어른의 변화와 아이들의 변화를 쌍방 간에 이끌어내는 작품이 필요하다고 봐요.
유 그런 목소리를 옹호하는 것이 자칫 계몽성의 옹호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두 가지 이야기를 해보았으면 좋겠네요. 청소년 서사에서 아버지가 부재했는가? 이런 차원에서 거론할 작품들이 있을 거고요. 앞서서 철없는 어른과 속 깊은 아이의 구도의 의미를 더 따져볼 필요도 있고요. 저는 그게 증상이자 우리 작가들의 무의식일 수도 있다고 보는 게, 사실 기성세대인 어른들이 청소년들에게 그렇게 존경할만한 어른들은 아니잖아요. 그러면서 동시에 지금 작가들이 청소년들한테 이런 부족한 어른들을 대신해서 감싸주기를 원하는 게 아닌가 싶거든요. 쭉 거슬러 올라가면 현덕의 『나비를 잡는 아버지』도 부족한 아버지를 속 깊은 아이가 끌어안는 방식으로요.
이런 패턴이 철없고 찌질한 어른들이 망쳐 논 한국사회를 지금의 청소년들이 감싸서 뛰어넘어주기를 바라는 계몽성에서 무의식이 발현된 것은 아닐까 싶고요. 성장이 중요한 테마지만 무엇을 위한 성장인가 무엇을 위한 적응인가도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아버지 이야기 나왔는데 김성진 선생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복권시키는 작품들에 대해 하실 이야기가 좀 더 있으실 거라 생각되네요.
김 이현의 『오, 나의 남자들!』도 ‘아버지의 이름’ 측면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아버지가 노래방을 하면서 도우미를 고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여자 주인공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중요한 문제지요. 찌질해 보이고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아버지를 미워할 수는 있어도 그 미움조차도 ‘관계’의 표현 방식이 아닐까요. 물론 아버지든 어머니든 혹은 할머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모두 우리가 그 품에서 자랐으니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중력 같은 거지요. 그리고 이건 순응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인정의 문제지요. 소설은 특히 장편 소설은 그 현실을 일단 인정하는 가운데 쓰여질 수밖에 없어요. 너무 보수적인 태도 아닌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데, 중력을 부정해서야 하늘을 날 수 있겠어요? 소설을 쓰지 않겠다면 또 모를까. 아버지/어머니를 혹은 가족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또 한편으로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겠다, 이 이중적 심리가 쉽사리 해결되지는 않잖아요? 모순을 해결할 수 없이 어쩌면 모순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내는 게 소설 아니겠어요? 이 중요한 과제에 정식으로 도전장을 내 본 청소년 문학 작가가 저는 잘 떠오르지 않아요. 특히 90년대 중반 이후로는요. 이송현과 이현 작가의 작품에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호탄이라는 점에서 분명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내년쯤에는 중요한 화두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철없는 어른과 속 깊은 아이 구도에서 연관된 작품이 더 많을 텐데요. 저는 이게 쿨한 척 하는 화자의 문제, 문체와도 연결되는 거 같아요. 재미에 대한 강박과도 연결이 되고요.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작가가 ‘독자한테 재밌어야 돼’하며 글을 쓰는데 실제로 독자는 웃고 있지 않다는 거지요. 재미에 대한 강박을 갖지 않고 쓰면서도 자연스러운 웃음과 명랑함을 끄집어 낼 수 있어야 하는데 『정범기 추락사건』은 이런 면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거고요. 『그냥, 컬링』은 아쉬움이 더 많은 것 같네요.
오 문체 이야기와는 좀 다른 이야기지만 『정범기 추락사건』은 단편이기 때문에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묘미로 진행이 가능해요. 그런데 요즘 소설들이 뒤로 가면서 삑사리가 나는 이유가 캐릭터와 인물의 성격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장편에서 인물 구축은 인물이 그 등장 장면에서 빠지더라도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일관성, 개인의 역사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예를 들어 제가 요즘 읽고 있는 게 『밀레니엄』이라는 소설인데요. 장르문학인데 등장인물이 출생부터 죽음까지 인물의 성격이 너무 잘 구축되어 있어요. 장편은 인물만 잘 구축되어 있어도 사건의 기승전결이 연결될 수 있는데 이것을 캐릭터로 접근하다 보니까, 시트콤이나 개그 프로그램의 한 장면에 등장해야 될 캐릭터를 가지고 장편을 쓰다 보니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나. 『그냥, 컬링』같은 경우 그렇게 보거든요. 예를 들어 전부 별명으로 이루어져 있죠. 며루치, 산적 이런 캐릭터만 있지 인물 본체가 없어요. 잔재미를 주면서 가고 있지만 뒤로 가면 삼천포로 간다고 해야 하나. 인물을 구축하지 않은 소설은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달려라 배달민족』도 캐릭터의 측면에서 인물을 잡았거든요.
가벼운 캐릭터만으로는 소설을 끝까지 완성해내기 힘들기 때문에 두 작품 다 뒤로 가면, 산적이 성추행사건에 휘말린다든가 하는 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달려라 배달민족』의 불량배와의 한판 대결로 끝나는 결말도 아쉽고요. 끝까지 치열하게 나가지 못하고 있어요. 캐릭터로 접근하기 때문에 가벼워지고 문장으로 승부하려하고 재미로 승부하려 하는 그런 현상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어요.
김 사실 캐릭터라는 용어는 소설론에서는 줄거리 속에 구현되어 있는 인물의 성격을 뜻하잖아요. 드라마 쪽에서 캐릭터를 독특한 캐리커처의 의미로 쓰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우리 소설 판에서는 캐릭터는 당연히 줄거리나 플롯 속에서 구현되고 있는 등장인물의 성격을 뜻하지요. 이 둘을 구별했으면 좋겠어요. 『내 이름은 망고』, 『그냥, 컬링』, 『나는 즐겁다』, 『달려라 배달민족』은 그럼 점에서 기본 데생이라 할 수 있는 탄탄한 서사성을 경시한 흔적이 너무나 뚜렷해요. 『그냥, 컬링』은 주인공이 왜 하필 컬링에 빠지는지 전혀 설득이 안돼요. 작가도 좀 켕겼나 봐요. ‘컬링은 운명이니까.’, 뭐 이런 식의 독백이 나오던데, 이 장면을 읽다가 저는 얼굴이 화끈거리더라고요. 『나는 즐겁다』도 마찬가지고요. 어느 날 갑자기 식으로 사건이 전개돼서야 독자가 설득력을 느낄 수 있겠어요? 시트콤은 그런 설득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감상의 구조겠지만, 소설은 독자가 설득력을 느끼지 못하면 읽을 수가 없어요. 심지어 『내 이름은 망고』는 공정 여행 홍보 책자 같은 느낌을 주더군요. 이야기 자체에 좀 집중해줬으면 좋겠어요.
반면 『오늘의 할 일 작업실』을 저는 흥미롭게 읽었어요. 학교를 벗어나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공간으로 미술학원을 잡고 “밀도 있는 시간”, 그림을 그리면서 “눈물 나게 행복한 시간”을 찾아가는 과정을 차분하게 그려갑니다. 물론 그 동안에 학교 밖에서 대안 성장 공간을 찾은 작품이 없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그 동안의 작품들은 자유분방함이 지나쳐서 실패했다면 이 작품은 기초 데생에 소홀하지 않아서 탄탄한 성장의 서사에 성공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리고 이 작품은 완득이 이후 유행하는 문체가 아니라 일반적 소설의 문체를 썼어요. 과연 이 문체를 아이들이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청소년 소설이니까 직관적으로 독자를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없어 보여 전 참 좋더라고요. 이 작가처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가지고 이야기 자체를 탄탄하게 구축해서 그 자체로 승부한다는 의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단, 연애 이야기는 사족 같아서 그 부분을 빼면 더 좋지 않을까 아쉬움도 있습니다.
유 청소년 소설의 문장은 사유의 깊이가 느껴져야 하는데. 통통 튀는 문체만으로는 사유의 깊이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요. 독자에게 사유의 깊이를 전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재미라 생각해요. 전 청소년 소설이 정말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보지도 않는데 사유의 깊이가 전달될 리가 없는 거죠. 『나b책』 같은 경우 내면 토로에 의지해 가다 보니 읽기가 너무 버겁거든요. 평범한 독자들이 느끼는 재미는 결국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게 궁금한 거거든요. 『나b책』이 기존 소설에서 보지 못한 독특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청소년 독자에 대해 그다지 의식을 하지 않고 작업을 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오 가령 이상의 작품을 이해하는 대중 독자는 많지 않거든요. 그럼에도 이상을 한 번 읽고 두 번 읽으면서 서서히 내가 들어갈 만큼 들어갔다가 느끼고 나오는 거거든요. 『나b책』 같은 경우는 그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지금 현재 문학 교육이 모더니즘이나 초현실주의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교육이 전혀 안 되어 있어요. 그리고 학부모들은 본인이 해석할 수 있는 종류의 작품을 권유하다 보니까 계속 이런 작품들이 밀리게 되는 거예요. 대중독자를 위한 책은 아니지만 작품을 모든 독자가 읽어야 하는 건 아니거든요. 『나b책』이 완전 재미있다는 게 아니라 읽는 만큼 빠질 수 있는 문체를 일단 가지고 있다는 거죠. 작가만이 가지고 있는 리듬감이 있거든요. 문학적인 훈련도 이야기를 해봐야 하고, 하나의 시도라고 생각을 하고요. 『나b책』 이전의 김사과 작가가 주로 청소년 화자로 쓰는 작가이기 때문에 비교해봤을 때 일반소설에서는 일탈 청소년을 대상으로 타락한 세상을 보여 주는 의도가 강한 작가죠. 얼마나 세상이 타락했는지 그리고 전복되어야 하는지를 일탈 청소년을 통해 보여 주는 작품이었다면 『나b책』은 아까 크게 공감한 게 서사가 부서져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사실 이런 일을 겪었을 때 피해자인 중 1, 2는 사건을 일관성 있게 통찰할 수 없어요. 그리고 대안이나 비상구를 알지 못한다는 거죠. 그런 심경을 주관적으로 썼다는 문학적 시도가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제가 한 구절을 읽어볼게요. “길은 회색이었다. 아니, 검은색이었다. 그리고 좁았다. 가느다란 실처럼 좁았다. 그리고 나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잿빛 실로 된 길이 나를 향해 굽어지고 있었다.” 문장이나 장면 단위로 읽었을 때는 이 소설이 그렇게 어렵게 읽히지 않아요. 다만 작품을 통독할 때는, 대개 독자는 서사의 흐름을 좇는 재미로 소설을 읽는데, 이 소설은 의식적으로 그런 흐름을 깨뜨리고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어렵게 느껴지겠지요. 그런데 이런 장면 단위로 파편화된 서사가 학생들에게는 익숙한 것일 수도 있어요. 모더니즘 하면 우리가 좀 쪼는데, 사실 우리는 모더니즘 속에서 살고 있거든요. 어쩌면 이미 모더니즘에 익숙해서 그게 모더니즘인지 모르고 사는 것일지도 몰라요. 많은 CF 화면 구성이야말로 모더니즘 문법의 정수를 보여주거든요. 이 소설에 대해서 실제로 학생들이 어떻게 느끼는가에 대해서는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모든 소설이 다 똑같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오 어쨌든 일반 대중이 선호하는 방식이나 해독하기 쉬운 소설만 창작되어서는 안 되고요, 계속 강조하지만 문학은 여러 가지 패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 저는 김사과의 다른 작품 예를 들자면 『풀이 눕는다』같은 작품에 대해서는 일부 평단의 칭찬이 과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작가는 분노의 조절이 필요하다, 그 정도의 생각 정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b책』은 작가가 쓰면서 독자층을 조금은 의식을 한 것인지 오히려 『풀이 눕는다』보다 더 좋은 작품이 되었거든요. 다른 작가들이라면 내포 독자에 대한 의식을 제발 그만 하라는 말을 해야 할 텐데, 이 작가는 오히려 그런 의식이 조금은 필요한 게 아닌가 싶네요.
오 『나b책』에서 재미있는 것은 폭력에 대해서 이 아이가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리얼리즘 소설에서는 가해학생, 피해학생 방관하는 선생님이라는 구도가 있는데 이 작품은 주관적인 심경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학교 폭력문제에 대해서 ‘나 아니면 누군가가 또 겪을 일’이라는 식으로 이야기 하고 있고 결국 학교 폭력 이전의 폭력적 세계를 건드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학교폭력이 이렇게 당연하다는 것은 그 이전에 이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폭력적인 세계에 대해서 감지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 폭력이 이렇게 당연스럽게 이야기되지 않는가 싶었어요.
그리고 재미있었던 구절이 애들이 주인공을 때리는 이유가 심심해서라고 말하는데 충격적이면서 정확한 이유라고 봐요. 일반적으로 가해 아이들을 볼 때 학업에서 방치되면서 잉여의 시간들을 어떻게 쓸까 하면서 문제가 시작되거든요. 애들이 나를 때리는 이유가 심심해서고 내가 사라지면 애들은 심심하기 때문에 또 다른 아이들을 때릴 것이다. 굉장히 정확한 표현이라서 학교폭력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다른 작품들이 잡아내지 못하고 있는 괴롭힘을 가하는 학생들의 심리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폭력에 대해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되는 대부분의 소설에서 가해자들이 왜 그런 일을 벌이고 있는지에 대한 납득을 정확히 풀어놓고 있는 작품을 보지 못했어요. 가해자와 피해자는 이분법으로 나뉘고 가해자는 항상 적대자예요.
학교폭력 이야기 나왔으니 이를 다룬 또 다른 소설 『괴물, 한쪽 눈을 뜨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이 작품은 폭력의 문제를 괴물의 등장으로 접근했거든요.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청소년기를 비이성적인 시기, 아주 특별히 보호해야 할 시기로 간주하는데 저는 이에 동의하지 않아요. 물론 불안정한 시기라는 것에는 동의를 하지만 그렇게 생물학적으로 치부해버리면 결정론적으로 되어버리니까 해결도 안 되죠. 폭력문제에 대해서 좀 더 다각적으로 깊이 있게 봐야하지 않을까요?
유 저는 『괴물, 한쪽 눈을 뜨다』가 가해자들을 결정론으로 비이성적인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에는 동의가 안 되는데요. 저는 특정 상황에서 아이들은 괴물이 된다는 걸로 읽었어요. 사춘기에만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괴물을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요? 2000년대 한국 중학교 교실이라는 특정 상황이 아이들을 괴물로 만든 거죠.
오 작품에서 가해자만을 결정론적인 비이성적인 괴물로만 그렸다는 뜻이 아니고요. ‘사춘기는 괴물이 눈을 뜨게 되는 특별한 시기’라는 통념을 그대로 이어받지는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유 아까 『나b책』의 문체, 서술방식, 세계관의 독특함이 이야기 되었는데요. 저는 그런 새로움의 측면에서 『도둑의 탄생』을 인상 깊게 봤어요. 보통 작가들이 한 줄로 처리할 만한 장면을 이 작가는 굉장히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묘사하거나 독특한 비유를 쓰거든요. 이 작품의 마술적 상상력도 매력적이었고요.
오 저는 『도둑의 탄생』을 읽기가 힘들었어요.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로보라는 인물도 매력이 있고, 언니와의 관계에서 도둑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고, 특히 도둑학교라는 설정, 어쨌든 뭔가를 훔친다는 설정, 내가 없는 것을 가지고 싶다는 이야기, ‘훔친다는 것’ 얼마나 매력적인 문학적 소재인가요. 그러한 모티프가 분명 그게 중간 중간 나와요. 다만 그것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어요. 읽기 힘들게 만드는 부분, 서사를 확 잡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장이 김사과 책처럼 나 이렇게 쓰고 있다고 대놓고 티를 내는 것도 아니고. 『나b책』은 아예 대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읽게끔 처음부터 일관되게 끌고 나가는데 『도둑의 탄생』은 완결된 서사로 접근하는 책이겠거니 하고 읽었더니 문장이 길어지고 그러다보니 중간에 서사를 쫒아가기가 힘들어진 것 같아요.
김 서사의 의식적 파괴와 서사의 혼란은 좀 구분해야 할 것 같아요. 『도둑의 탄생』은 도둑 학교라는 공간 설정은 있는데 그 공간이 서사랑 연결되는 게 아니라 따로 떨어져 있어요. 그리고 그 세계가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않고요. 『라디오에서 토끼가 튀어나오다』 이것도 이야기의 연결이 들쑥날쑥 이거든요. 갖가지 음악제목이 나오면서 상황을 얼버무리듯 연결시키고 있지요. 음악이나 요리를 매개로 에피소드를 만들어 내면 저절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면서 안이하게 쓴 것 아닌가요? 그래서인지 설득력이 떨어지죠.
유 학교 폭력의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지금 사회 이슈가 되어 있기도 하니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 보죠.
오 우리 아이들이 중학생을 거쳤고 간혹 비슷한 상황이 간간히 있는데 지금 회자되고 있는 아주 극단적인 예로만 접근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13살이면 아이 시절을 갓 지나 이제 본격적인 사회 통제 시스템에 막 들어간 나이지요. 어리다면 어린 아이들이 처음으로 본격적인 통제 시스템에 들어간 건데 지금 결과론적으로는 사건을 일으킨 말썽쟁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묻게 되어 있어요. 물론 아이도 혼나고, 부모가 책임질 부분도 있지만 그 이전에 이런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에 대한 사회 전반의 성찰과 반성이 필요한 거죠. 그런데 그런 과정 없이 모든 책임이 아이들에게 가는 형태, 그리고 그것이 소설이 되고 있는 형태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어요.
예를 들어 『괴물, 한쪽 눈을 뜨다』는 시점이 달라지는 구성으로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가해자인 정진이, 태석이에 대한 시점이 한 장도 할애되지 않는다는 거죠. 가해 학생들은 원래 그렇게 컸고 원래 나쁜 애들이다. 그런데 얘 네들 안에도 숨겨진 비하인드가 있을 거예요. 그것이 규명되지 않는 한 이분법적인 폭력 이야기는 당위적인 이야기 이상 나오기가 힘들어요. 가해와 피해를 나누는 양상에서는 정말 더 깊이 있는 고민이 되지 않으면 표면만 훑는 양상이 되지 않을까.
김 표면만 훑는다는 어휘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고, 작가의 의도는 그 정글의 냉혹함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닐까요? 말 그대로 동물이 되어 가는 영섭의 심리를 다룬 부분은 빼어나지요. 그런데 ‘야동 반장’ 설정은 설계도에 끼워 맞춘 듯하게 읽혀요. 특히 마지막에 내 안에 괴물이 등장하는 부분은 작위적이고요. 오세란 선생님 말씀대로 가해 학생들 심리까지 포함해서 더 입체적으로 그려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유 끝으로, 이야기되지 못했는데 꼭 짚고 넘어가야 될 면이 있으면 이야기해 주시지요.
김 올해 작품은 드라마 문법의 흔적이 과하게 보이던데요. 경계를 좀 했으면 합니다. 『오, 나의 남자들!』에서도 오정우 편의 백현지 이야기는 백현지의 통쾌한 복수 장면도 그렇고, 『내 청춘, 시속 370km』의 애리와의 연애담도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어요.
유 드라마적이라는 것에 대해 보충 설명을 해 주셔야 될 것 같은데요.
김 드라마에서 본 듯한 기시감을 느낀다는 거지요. 요새 드라마의 공식이 반전의 패턴화 아닌가요? 이걸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어요. 청소년과의 소통을 시도하기 위한 일환으로 좋게 봐야 할지, 잠식되는 부분이 있다고 봐야 할지. 일장일단이 있는데 패턴화되는 건 피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한 작가가 자신은 ‘반전이 아니라 딴전’을 추구하겠다고 했는데, 2012년에는 소설에서 드라마로 역수출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에 더 충실해 볼 필요가 있고요.
오 어쨌든 평론가는 독자를 대변하는 사람이고 독자의 입장에서 청소년 소설이 대량 양산될 때는 지났다고 생각되거든요. 장르가 만들어지려면 축적되는 작품이 있어야 하지만 지금은 지나치게 양산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외국 작품도 정말 쉴 틈 없이 번역되고 있고요. 양호문 작가도 공들여서 한 편 쓰는 것이 한 해에 세권 내는 것보다 좋다는 조언을 감히 드리고 싶어요. 양호문 작가는 소중한 씨앗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하거든요. 청소년의 보이지 않는 자리를 보여 주려고 하고 그것을 공들여 작업하고 있죠. 그런데 『웰컴, 마이 퓨쳐』나『달려라 배달민족』나 메시지를 다르지 않다고 봐요. 그렇다면 한 편의 작품이라도 치열하게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러 작품에 고만고만한 아이가 나오기보다는 기억에 남을 만한 뚜렷한 한 아이를 그려줬으면 싶습니다.
김 양산하지 말라고 하는데, 전업 작가의 입장에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웃음)
오 저는 독자이자 소비자의 편에서 말씀드려요. (웃음)
김 내포 독자로서의 청소년을 고려할 수밖에 없죠. 특히 문학적으로 훈련된 독자가 아니라 문학의 세계에 입문하는 독자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고요. 하지만 청소년 소설이라는 별도의 장르를 만들어 그 속에 안주하려는 태도는 절대적으로 피했으면 합니다. 청소년 문학은 있지만 청소년 소설은 없다, 저는 이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유 작가는 결국 자기 이야기를 하는 존재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청소년 독자를 미리 상정하는 건 매우 중요하지요. 그런데 그걸 상정한 거하고 그 아이들의 소재를 따라가는 거는 또 다른 것 같아요. 자기 청소년 시기를 이야기 하는 것과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도 또 다르죠. 이렇게 하면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이런 소재를 쓰면 재미있어하지 않을까 하는 것만으로 글을 써서는 사람들 기억에 남게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오 저는 마지막으로 김선생님이 청소년 소설이라는 명칭에 대해 고민을 해보자라고 하셨는데 제가 ‘청소년 소설’로 논문을 쓰다 보니 그게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인지 이해가 돼요. 청소년 소설의 흐름을 보면 성장소설에서 출발해서 지금 현재는 청소년의 처지가 매우 강화되어 있는 상태거든요. 말하자면 “청소년의 눈으로 보자”가 강화된 상태여서 도리어 청소년소설을 쓰는데 그것 때문에 그 물에 고여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청소년의 처지를 쓰지만 전체 사회, 전체문학의 틀 안에서 거리를 두고 봐야 스펙트럼도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이지 '청소년의 눈으로 청소년을 그린다'에 갇혀버리면 그 자리에 맴돌게 되죠. 이제 이런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
김성진
청소년문학평론가, 대구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현대소설교육과 아동청소년문학을 연구하며 예비 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 아동청소년문학의 정전과 권정생의 한국전쟁 3부작」,「청소년 문학의 새로운 물결은 시작되었는가?」등의 글을 썼다.
오세란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역사를 소재로 한 어린이문학, 새롭게 읽기」로 제 4회 창비어린이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유영진
아동문학평론가, 본지 기획위원, 서울 자운 초등학교 교사. 「몸의 상상력과 동화」로 제 2회 창비 어린이 신인평론상을 받았으며,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평론 부문 창작지원금을 받았다. 평론집 『몸의 상상력과 동화』를 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