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서원 전문가 워크숍(2012. 4. 18)
서원 기록문화의 정리, 보존관리의 현황과 과제
[제2주제 발제문]
서원 기문 및 금석·석각자료 정리현황과 과제
김 덕 현
(경상대 지리교육과 교수)
1. 의 의
2. 시각적 기록자료의 중요성
3. 서원별 시각적 기록자료 현황
4. 시각적 기록자료 현황과 조사․보존관리 방향
1. 의 의
1) 자연 친화성으로 한국 서원의 진면목을 함축
〇 지금까지 한국 서원을 소개하는 자료나 논문에서, 석각 ․ 현판 ․ 그림은 거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이번 서원 기록자료 워크숖을 위하여, 9개 서원을 대상으로 수집한 서원 기록 자료에서도 석각이나 현판 등에 관한 자료는 매우 적었다. 이는 해당 서원의 세계 문화유산 등재에 이런 자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아예 조사 정리가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〇 과연 서원을 방문하는 일반 사람이나 외국인들에게 서원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석각이나 현판, 그림이 무의미한 것일까?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소수서원은 방문한 사람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에는 경렴정에서 바라본 죽계천의 붉은 색 칠한 경(敬)자 바위가 있다. 이 ‘敬’자를 죽계천 작은 시냇가 바위에 새겨두고자 했던 주세붕의 뜻을 알게 한다면, 소수서원은 특별한 기억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도산서원에서는 퇴계선생이 “이 대(臺)에서 자연의 활발한 운행을 보고 오묘한 하늘 뜻을 깨달으며 하루 종일 마음의 눈을 열었다(流行活潑妙天淵, 江臺盡日開心眼)”고 기뻐한 천연대(天淵臺)가 있다. 이 천연대 석각은 도산서원 정비사업 이후 보이지 않는 벼랑에 방치되어 있어 아무도 보지 못한다. 천연대 표시석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병산서원 만대루(晩對樓)에서 비취빛 앞산과 낙동강을 바라보는 경치가 가장 좋다고 한다. 여기에 ‘晩對’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 수 있다면 감동은 더 깊어지고, 참으로 해질녘 강산을 감상하는 누각에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할 것이다. 옥산서원 앞 큰 바위 벽에 새겨진 세심대(洗心臺)라는 글자를 주목하고 그 의미를 새기며 서원으로 들어간다면, 가슴 속은 더 시원해지고 마음도 경건해질 것이다. 그러나 세심대와 그 주변은 거의 관리되고 있지 않아 아무런 주의를 끌지 못하는 장소가 되어 있다. 도동서원 문루이름은 수월루(水月樓)인데 왜 ‘水月’이 되어야 하는지, ‘가을 달이 찬 강물을 비춘다(秋月照寒水)’에서 왔다는 설명이 없다. 이 말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선생의 정신세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이미 함축을 알면, 도동서원에서 북쪽으로 내려다보는 낙동강이 한결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정읍의 무성서원이 다른 서원과 달리 마을 속에 있는 것을 보고는 누구나 의아해 한다. 그러나 서원이 이름 ‘무성(武城)’은 論語에 나오는 고을 이름이고, 제자 子游가 이 작은 고을을 예악으로 다스린 것을 알게 된 聖人 공자가 곧바로 제자에게 사과한 사연을 알려 준다면, 문루 이름 현가루(絃歌樓)는 새삼 의미 깊게 느껴질 것이다. 장성 필암서원은 시원하게 넓게 트인 전망이 자랑이다. 이 전망은 문루 확연루에 올라서면 가장 잘 감상된다. 확연루(廓然樓)는 군자의 학문은 “확 트이게 넓혀 크게 공정하게 하고서, 사물이 다가오면 의리에 맞게 순응한다(廓然大公 物來順應).”는 의미를 취한 것이다. 이 문루 현판의 함축적 의미를 알면, 시원하게 트인 전망 경치가 廓然의 의미와 서로 통하고, 이 확연루가 필암서원의 선비들을 無私公正 物我一體의 天人合一 경지로 이끄는데 기여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하서 김인후의 ‘成己成物’의 도학정신과 탁 트여 막힘없는 廓然大公의 전망경관, 그리고 문루 廓然樓가 일체가 된 것이 필암서원의 진면목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2) 한국 서원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는 자연과 일체화된 입지 경관
〇 유형 문화유산으로서 9개 한국서원은 거대함을 자랑하는 세계의 다른 종교적 건축물과 시각적 탁월성을 경쟁할 수 없다. 따라서 한국 서원이 세계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진정성’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 진정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이 서원 교육이 추구하는 가치가 서원의 입지와 경관에 깊고도 넓게 배여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〇 등재대상 9개 서원 가운데 무성서원을 제외한 8개 서원은 신유학자 곧 성리학자를 제향하는 서원이다. 유교는 仁을 추구하며, 인의 체득은 송나라 이후 신유학의 전통에서 天人合一을 산수자연에서 지각적으로 감통 감응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서원이 신유학의 본거지이며, 관학인 향교를 제치고 서원이 신유학의 본거지라고 주장하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이 천인합일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의 자연경관이다. 조선시대 스승을 찾아 배움을 얻는 일을 ‘유학(遊學)’으로 불렀다. 이 유학은 유교의 학습과 토론이 항상 자연 경치의 즐기는 즐거움, 즉 ‘인지지락(仁智之樂)’과 동반되었다는 점을 말한다.
2. 시각적 기록 자료의 중요성
〇 문제는 9개 서원이 세계유산적 가치를 고유하고도 진정성 있게 지니고 완전성 있게 보존 관리되고 있다는 점을, 서원 관계자나 한국의 전문가가 아닌, 외국인 전문가에게 인정받는 방법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선인들이 서원에 유학하면서 추구했던 천인합일의 경지를 나타내는 증거, 특히 누구라도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가시적 시각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한국 유교문화의 고유한 특성인 자연과의 친밀성이 9개 서원에서 어떻게 차별화되어 다양하게 나타나는가를 분명하게 납득시켜야 한다.
〇 한국 서원에서 확인될 수 있는 유교문화의 자연친화성은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째,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둔 채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이름, 시문, 그림을 새겨 넣은 방식이 석각(石刻)이다. 이는 인간의 정신이 자연의 일부가 되는 ‘문화의 자연화’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둔 채 거기에 유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즐겁게 감상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 방식을 대표하는 장소는 누각‧정자이며 그 시각적 기록 자료는 현판(懸板: 당호 扁額과 記文, 詩板 및 柱聯을 포함)이다. 이는 자연을 문화적으로 즐기는 ‘자연의 문화화’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현판에는 자연을 감상하는 것과 거리가 먼 윤리적 격언을 내용으로 할 수 있다.
셋째는 자연의 이미지를 취하여 유교문화의 가치 관념을 표현하자 하는 회화 방식이다. 산수도에 포함되는 서원도는 ‘문화의 자연적 투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에는 자연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인물화․개념도 등이 포함된다.
〇 세계유산 등재추진 대상 9개 서원은 입지와 경관에서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고, 이 개성은 각 서원의 제향인물과 강학전통의 특성을 반영한다. 각 서원의 특성을 반영하는 시각적 기록 자료는 앞의 분류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즉 석각․현판․그림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시각적 자료를 조사 보존 활용함으로써, 한국 서원의 자연친화적 고유성 ․ 진정성을 전문가는 물론 탐방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인식시킬 수 있다.
3. 서원별 시각적 기록자료 현황
세계문화유산 등재 대상이 되는 9개 서원의 시각적 기록 자료를 분류하고 현황 정리를 통해, 조사와 보존관리의 방향 탐색을 시도해 보았다.
발제 자료는 이번 서원기록문화 워크숖을 위해 각 서원별로 전문가에 의해 보고된 내용을 참조하였으나, 이 분야는 내용이 너무 소략해서 발표자가 수집한 자료를 중심으로 종합한 것이다. 다만 본 발표를 위한 현장 조사를 할 수 없어서 수집 정리된 시각적 기록 자료의 분류와 현황은 매우 거친 것이 되었다.
따라서 이번 발제의 용도는 앞으로 자료의 수집정리와 보존활용을 위한 방향을 제안하여 토의하는 참고자료에 그친다.
1) 소수서원
⑴ 석각 : 소수서원의 대표적 석각은 경(敬)자 바위이다. 경렴정에서 죽계를 바라보는 전면의 바위에 경(敬)자를 새기고 그 위쪽에는 백운동(白雲洞)이라고 각자하였다. 경자를 새기게 된 내력에 대하여 주세붕의 자세한 설명이 있다. ‘白雲洞’ 자에 대하여는 주세붕의 시에 설명이 보인다. ‘敬’자는 붉은 색을 입혔고 ‘白雲洞’자는 흰색을 칠했는데, 한국의 석각이 중국과 달리 색을 칠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데 특별한 사례이다.
오래된 비로는 제월교비가 있다. 최근에 안축의 <죽계별곡(竹溪別曲)> 5장을 5개의 자연석에 각자하여 죽계천변에 각각 세웠다. 또 1973년에 세운 소수서원 중수기적비(重修記蹟碑)가 있다.
⑵ 현판 : 소수서원 연구자가 보내준 자료에 의하면, 소수서원의 많은 현판들은 현재 소수박물관에 기탁 보관되어 있다고 보고되었다. 건물관련 편액으로는 ‘白雲洞’, ‘文成公廟’, ‘日新齋’, ‘直方齋’, ‘學求齋’, ‘至樂齋’, ‘景濂亭’(1), ‘景濂亭’(2), ‘文宣王影幀室’, ‘儒道敎育館’, ‘遺物館’ 등 13점이 있으며, 名言․名句 관련 편액으로는 ‘學求聖賢’(1), ‘學求聖賢’(2), ‘學求聖賢’(3), ‘鳶飛魚躍’(1), ‘鳶飛魚躍’(2), ‘鼎山幽居’, ‘仁者無敵’, ‘雙坪’, ‘承家輔國’ 등 9점이다.
그러나 위 소수박물관에 기탁된 편액 가운데, 현판 ‘鳳棲樓’, ‘迎鳳樓’, 과 기문 ‘鳳棲樓重營記’(1), ‘鳳棲樓重營記’(2)은 소수서원이 아니라 조선시대 순흥도호부 객사 문루 ‘鳳棲樓’의 현판과 기문이다. 또 위에서 열거한 것 외 취한대(翠寒臺), 광풍정(光風亭) 편액이 영남문화연구소 편(2007) <소수서원지>에 수록되어 있다.
기문과 시판: 위의 자료에는, 記文에 해당되는 것으로 ‘白雲洞紹修書院記’, ‘白雲洞安文成公祠堂記’, ‘紹修書院童蒙齋重建記’, ‘紹修廟宇重修記’ 등 6점이 있으며, ‘白雲書院榜’, ‘學規’, ‘白雲洞書院令’ 등 公用文 3점과 ‘文成公享祀執事’도 보존되어 있다. 위에 제시된 기문 외 지락재, 일신재, 학구재의 기문도 건물에 시판과 함께 건물에 걸려 있다. 죽계를 바라보는 경치가 있는 경렴정과 지락재에는 시판이 많이 걸려 있다. 또 최근 소수서원 측에서 복원을 추진 중인 제월루 관련 기록과 상량문이 <소수서원지>에 나타난다.
<소수서원지>에 기문과 건물에 관련된 수많은 시문을 번역 게재하였으나, 건물의 이름 관련 현판에 대한 해설이 없는 것이 아쉽다.
⑶ 그림 : 소수서원의 입지 경관에 관한 그림이 있다는 것은 확인하지 못하였다. 다만 제향인물인 안향 ‧ 주세붕 ‧ 이원익의 초상화 영정이 있다. 이덕형 ‧ 허목 ‧ 채제공 등의 초상화는 봉안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없다. 다른 서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공자의 영정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와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소묘화(素描畵)가 소수서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래의 그림은 중국 원나라 시대의 것이며 안향에 의하여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2) 도산서원
⑴ 석각 : 현재 도산서원 경내의 석각의 대부분은 1970년대 도산서원 정비 사업 이후 제작된 표시석(標示石)으로 보인다. 서체와 돌의 크기․모양이 획일적이어서 진정성이 약하다.
한국 서원 중에서 외면적으로 가장 많이 정비된 서원이 도산서원이다. 그러나 이 정비과정에서 도선서원의 경관 원형이 매우 심하게 훼손되었다. 정비공사를 통해 원래의 서원 진입로가 매몰되고 새로운 진입로가 개설되는 과정에서 옛날 길가에 많이 존재했을 석각이 매몰되거나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원형이 보존된 석각은 천연대(天淵臺) 각자가 있고, 심하게 마모되었지만 석간대(石澗臺) 바위에 새겨진 퇴계선생의 시가 대표적이다.
⑵ 현판 : 도산서원의 여러 당호와 전교당에 걸려 있는 잠(箴), 치제문(致祭文)의 대부분이 현판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고, 해설서도 출판되었다. 다만 출판된 해설서가 형식과 내용에서 교육 홍보 효과를 기대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누정 기문에 해당하는 기문은 편액으로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되지 못했다. 퇴계선생이 직접 도산서당 인근의 장소와 경치를 읊은 <도산잡영병서>나 서원 경내의 많은 장소에 대한 시문도 현판으로 제작된 것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도산서원에는 다른 서원의 문루에 해당하는 건물이 없어 경승을 읊은 기문이나 시를 걸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점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그림 : 보존된 산수도 풍의 다양한 도산서원도가 보존되고 있어, 변형되기 전 도산서원의 경관원형을 추정해볼 수 있다. <陶山圖>란 이름으로 金昌錫, 鄭敾, 姜世滉의 그림이 있고, 작자 미상의 <陶山圖>도 4종이나 전한다.
4) 병산서원
⑴ 석각 : 병산서원의 석각자료는 확인하지 못했다.
⑵ 현판 : 병산서원의 현판은 단조롭다. 서원 건물의 당호 현판으로, 정문에 해당하는 復禮門, 이층누각 晩對樓, 강당 立敎堂, 사당 尊德祠이다. 창석 이준이 지은 기문 ‘屛山尊德祠復享記’가 입교당에 걸려있다. 서원 누문 가운데 가장 큰 평가를 받고 있는 만대루의 조성 내력을 알 수 있는 기문이나 상량문 자료가 조사되지 못해 매우 아쉽다.
⑶ 그림 : 하회마을 박물관에 하회 일대를 그린 산수화가 보관되어 있다. 병산서원은 탁월한 입지경관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기문 등 기록 자료로 확인된 ‘원형 문화콘텐츠’는 많지 않다. 경관 감상에 관한 자료도 대부분은 최근에 현대인들이 현대적 관점에서 기술한 내용이다. 병산서원의 자연경관은 유교적 세계관 자연관과 관련하여 해석될 때, 그 진정성과 탁월성이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을 특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4) 옥산서원
⑴ 석각 : 독락당박물관에 전시된 자료에 의하면, “1531년(중중26) 회재 이언적이 독락당 주변 경승 10곳에 이름을 지었는데, 사산(四山) 오대(五臺)와 용추(龍湫)가 그것이다. 사산은 독락당 북쪽의 도덕산, 남쪽의 무학산, 동촉의 화개산, 서쪽의 자옥산이다. 오대는 계정 아래 관어대, 그 맞은편의 영귀대, 관어대 북쪽의 탁영대, 더 북쪽 상류의 징심대, 그리고 옥산서원 앞의 세심대이고, 용추는 세심대 앞의 폭포이다. 이 중 자옥산‧용추‧관어대‧세심대‧탁영대‧징심대‧영귀대 7개 장소는 퇴계 이황에게 부탁하여 큰 글씨로 써 받았는데, 지금 독락당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하였다.
서원에 인접한 대(臺)에는 석각이 있는 경우가 많다. 사진 자료가 있는 석각은 서원 앞의 퇴계의 글씨를 각자한 ‘洗心臺’ 뿐인데, 확인이 필요하다. 옥산서원 입구에 잘 보이는 장소에 위치한 세심대 석각은 “마음을 씻어내는 곳”이라는 의미를 연상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관리상태가 부실하다. 회재의 神道碑가 강당과 사당 사이에 있다.
⑵ 현판 : 옥산서원에는 亦樂門, 無邊樓, 동서재인 敏求齋, 闇修齋, 강당 求仁堂, 그리고 體仁廟 등이 각각 당호를 편액으로 걸어 놓았다. 정문인 亦樂門을 지나면, 2층 누각인 無邊樓가 나오는데 이 현판은 한호의 글씨이다. 무변루에는 許曄이 쓴 ‘玉山書院記’가 현판으로 걸려있다. 강당에 걸린 ‘玉山書院’ 현판은 두 개인데, 이산해와 김정희가 각기 썼다. 전면의 것이 화재 후 다시 사액된 김정희의 글씨이고, 강당 안의 현판은 최초 사액 당시의 이산해의 글씨이다. 강당 좌우 방의 당호는 兩進齋와 偕立齋이다. 강당에는 ‘傳敎謄書’라는 현판이 있고, 또 ‘御製祭文’이라는 현판이 있다.
옥산서원 당호 현판의 특징은 당호 글씨 좌측에 짧은 해설문을 적어두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無邊樓 글씨 왼쪽에 “靡欠靡餘 罔初罔終 光與霽與 遊于太虛(부족함도 없고 남음도 없으며, 처음도 없고 끝도 없구나. 마음이 광풍제월처럼 맑고 빛나, 태허의 경지에서 노니네)” 하여 황정견이 지은 濂溪先生 -六先生畫像贊의 風月無邊에서 뜻을 취한 것임을 알고 있게 한다. 이 해설문은 현판으로 게시된 당호의 함축적 의미를 풀이한 것으로 주목된다. 활용성이 높은 자료이다.
옥산서원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獨樂堂에는 퇴계 글씨의 ‘玉山精舍’와 이산해 글씨의 ‘獨樂堂’ 현판이 있다. 독락당에는 <獨樂堂十四詠>을 비롯한 많은 시판이 걸려 있다. 또 시내에 면한 溪亭에는 ‘溪亭’ 현판과 맞은 편 온돌방 벽에 ‘養眞庵’ 현판이 있다. 계정은 한호, 양진암은 퇴계 글씨이다. 그리고 시내를 내려다보는 툇마루 뒷 벽에는 ‘仁智軒’ 현판이 걸려 있다. 계정에는 시판들이 걸려 있다.
옥산서원과 독락당, 그리고 옥산서원 유물관에 보존된 자료를 포함하면 옥산서원 현판자료를 방대하다. 그러나 현대인이 함께 그 의미를 이해하여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번역 해설한 자료 제작은 매우 부족하다.
⑶ 그림 : 조사된 자료를 확인하지 못했다
5) 도동서원
⑴ 석각 : 자연석 석각은 조사된 내용이 없다. 최근에 서원에 들어오는 길목에 해당하는 다람재 전망대에 최근 김굉필의 시 ‘노방송(路傍松)’을 새긴 석각이 있다. 그 옆에 다람재 표시석이 있다. 도동서원 앞에는 이 장소로 서원 이설을 주도한 한훤당 김굉필의 외증손 한강 정구가 심었다는 큰 은행나무가 있다. 우측에 신도비가 있고, 좌측에 근래 세운 국역신도비가 있다.
⑵ 현판 : 수월루(水月樓), 환주문(喚主門), 道東書院(강당 전면과 내부 후면에 각각 1개), 강당 중정당(中正堂) 현판이 걸려 있다. 동재인 거인재(居仁齋), 서재인 거의재(居義齋)가 있다. 강당 중정당 안에 특별히 자세한 ‘道東書院規目’, 기문으로 옥산서원과 마찬가지로 傳敎가 걸려 있다. 문루인 수월루에는 ‘水月樓重建記’, ‘水月樓重修上樑文’, ‘水月樓重建顚末小記’가 걸려 있다.
⑶ 그림 : 도동서원 사당 안에는 인상적인 벽화 두 폭이 그려져 있다. 그림은 중앙칸 벽채 상부 왼쪽 북벽에 <雪路 長松>, 오른 쪽 남벽에 <江心月-舟>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한훤당 집안에서 소장했다는 안견의 그림 병풍과 관련된 이해도 있다. ‘설로장송’이나 ‘강심월일주’의 그림 주제나 내용은 도동서원의 경관과 흡사할 뿐 아니라, 김굉필이 시로 읊은 주제이다. 이 그림을 통해서, 도동서원 제향인물 김굉필의 정신세계가 도동서원 입지와 경관에 투영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수월루가 뜻을 취한 ‘寒水照月’이나 그림의 ‘江心月一舟’와 같은 자연 이미지는 김굉필의 정신세계를 상징한다. 따라서 자연경관을 보면서 상징적 이미지를 취해서 이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다시 그림 이미지를 통해서 도학자의 관념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그림은 도동서원의 자연경관과 한훤당의 정신세계를 매개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6) 남계서원
⑴ 석각 : 서원 경내에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서원 앞에 최근에 건립한 <문헌공정여창선생추모비>가 거대한 규모로 서 있다.
⑵ 현판 : 풍영루(風咏樓)ㆍ준도문(遵道門) ‧ 명성당(明誠堂)ㆍ동서재인 보인재(輔仁齋)-영매헌(詠梅軒), 양정재(養正齋)-애련헌(愛蓮軒) 등이 있다. 영매헌과 애련헌은 각각 그 앞에 조성된 방지(方池)와 관련된 명칭이다. 강당 명성당 건물 전면에 ‘蘫溪’, ‘書院’ 두 현판이 좌우로 분리되어 걸려 있는 것이 특성이다. 명성당 좌측 방에 ‘居敬齋’, 우측 방에 ‘集義齋’ 현판이 걸려 있다.
기문으로 강익의 강당에 걸린<灆溪書院記>, 풍영루에 정환필의 <風詠樓記>, 奇正鎭의 <風詠樓重建記> 기문이 걸려 있다. 기문에 인근의 경치에 대한 기술이 자세하고, 이 경치를 즐김이 曾點이 風詠하는 즐거움과 같을 것이라고 기술하였다. 풍영루는 남계서원 앞에 전개된 경치를 바라보는 느낌과 통하고 一蠹가 지리산 유람을 다녀오며 지은 頭流詩 내용과도 상통한다.
⑶ 그림 : 강당 明誠堂은 단청이 화려하고, 윗벽 기둥에 벽화가 많이 그려져 있다. 그림 주제는 호랑이 그림 등 신선사상과 관련된 것이 많다. <灆溪書院圖>가 있다.
7) 돈암서원
⑴ 석각 : 돈암서원이 창건될 당시에는 지금의 연산면 임리 숲 말에 소재하였는데, 서원 서북쪽에 ‘돈암(遯巖)’이라는 큰 바위가 있어 이름을 ‘돈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논산시 연산면 임리 하림에 ‘遯巖’이라는 석각이 있다. 기타 자연석 석각은 조사 확인하지 못했다.
묘정비 양성당 정면 앞 마당에 遯巖書院院庭碑(1669년, 송시열 찬; 재목은 連山遯巖書院碑記), 遯巖書院移建碑文(1903년, 송병선 찬)이 있다. 최근에 세운 <黃岡金先生靜會堂史蹟碑>가 서원 문 앞에 서있다.
⑵ 현판 : 당호 현판으로 문루 山仰樓, 入德門(遯巖書院:1660년, 현종 1), 강당 凝道堂 ․ 養性堂, 靜會堂, 사당 唯敬祠(崇禮祠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이다. 양생당 좌우 방에는 居敬齋 , 精義齋 현판이 있다. 최근에 중수한 문루 山仰樓가 있다. 산앙루 누각에는 <吟諷弄月>, <浩然之氣>이라는 편액과 시판도 있는데 최근의 것으로 보인다.
沙溪 金長生의 ‘養生樓記’에 나오는 “仰而樂山。俯而觀水 觸物悟理。涵泳優游”의 ‘仰而樂山’에서 취한 것으로 보인다. 산앙루의 “仰而樂山 俯而觀水”이라는 서원 입지와 경관 특성은 현재 서원이 아닌 과거 서원의 입지 경관이다. ‘仰而樂山’은 과거 서원 자리에서 멀리 남으로 大屯山과 북으로 鷄龍山을 바라보는 경관이다. 또 ‘山仰’은 “높은 산을 우러르고 큰 길을 따라간다(高山仰止 景行行止 - 詩經).”하는 孔子의 仁에 대한 志向을 연상시킨다.
기문으로 書揭遯巖書院(송시열), 雅閑亭題詠, 養性堂記(김장생 찬), 養性堂記(1603년, 정엽 찬), 養性堂後記(1883년 김상현 찬), 憶沙溪先生有感(이유태), 從享遯巖書院(김집), 題凝道堂壁右(유일준), 藏板閣記(1926년, 李商永), 遯巖書院上樑文(1633년, 김상헌), 遯巖書院重修記(1955년 군수 박유진), 遯巖書院重修記(유사 황택수), 養性堂重修記(1956년), 양성당 이건기(1971년, 송재성), 양성당 이건기(1978년, 김영완), 산앙루중건기(2006년), 산앙루중건상량문, 柱聯은 응도당과 양성당 각각 여섯 개 기둥에 걸려 있다. 그러나 <돈암서원지>에 게재된 응도당 사진에는 주련이 없어 응도당의 주련은 최근에 새로 걸린 것으로 보인다.
⑶ 그림 : <遯巖書院全圖>가 있다.
8) 무성서원
⑴ 석각 : 자연석 석각은 확인하지 못했다. 流觴臺 각자 존재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서원 마당에는 묘정비를 비롯하여 기적비 등 비석이 많다.
⑵ 현판 : 絃歌樓, 武城書院, 講修齋, 泰山祠 등의 당호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서원의 이름 ‘武城’은 공자의 제자인 子游가 다스리던 邑 이름에서 취한 것이다. 문루 絃歌樓는 ‘絃歌之聲’을 의미한다. 다른 서원의 문루가 신유학의 天人合一의 의미를 함축하는 내용인 것과 달리 絃歌樓는 원시 유학의 현실 참여의 의미를 가진 것이다.
강당에 <武城書院集賢氣> 등 기문이 여럿 걸려 있다. 현가루에는 기문 <武城書院絃歌樓重建記>, <武城書院絃歌樓重修記>, <絃歌樓重建記>가 걸려 있다. 강당 여섯 기둥에 모두 주련이 있다. 齋에 해당하는 강수재에도 기둥마다 주련이 있다. 사당 내삼문에도 ‘聖朝額恩 士林首善’ 등의 주련이 있다.
⑶ 그림 : 사당 태산사 안에 채용신이 그린 최치원 영정이 있었다. 이 영정은 하동 쌍계사에서 1784년(정조 8)에 가져온 것이라 한다. 지금은 전북박물관에 별도 보관하고 있다.
絃歌樓 가로 기둥에 산수화 풍 그림과 난 그림이 그려져 있다. 泰仁 고현 읍치 지도에 무성서원이 성황산 아래 중심적 위치에 입지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무성서원은 등재 대상 9개 서원 가운데 매우 특이한 서원이다. 서원이름․제향인물․서원의 입지 등에서 그렇다. 공간구조도 특이한데, 강당이 앞뒤의 문루와 사당과 양쪽으로 모두 개방된 대청을 가진 것이나 재사가 사당과 강당의 축선에서 벗어난 곳에 배치되어 있다. 무성서원은 주련이 강당․재․사당 삼문에 모두 걸려 있는 것도 특이하다. 도학적 엄숙으로 권위적인 다른 서원과 달리 무성서원은 대중적이어서 친근감을 주는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무성서원이 다른 서원과 차별화되는 고유성을 더욱 진정성 있게 보존, 홍보할 필요가 있다.
9) 필암서원
⑴ 석각 : 필암서원이 현재 위치한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8번지 일원(조선시대 전라도 장성부 서일면 필암리)는 두 차례의 이건 과정을 거친 제3차 입지 장소이다. 따라서 1, 2차 서원이 입지한 곳이나 그 연고지에도 시각적 기록 자료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대표적 사례가 필암이란 이름의 유래가 된 김인후 태생지의 붓바위이다. 붓바위에는 윤봉구(尹鳳九, 1681~1767)가 썼다고 알려진 ‘筆巖’이라는 글씨 석각이 있다.
현재의 필암서원은 평지에 입지하고 주위에도 암석이 없어 자연석에 새겨진 석각은 나타나지 않는다. 필암서원 사당 우동사 앞 묘정(廟廷)에는 특이한 비석이 있는데 필암서원 계생비(繫牲碑)이다. 제물로 쓸 가축을 매어 놓는 비이다. 맥동마을 난산에는 하서 김인후 망곡단(望谷壇)과 난산비(卵山碑)가 있다.
⑵ 현판 : 필암서원의 현판은 확연루를 비롯한 건물의 당호를 쓴 편액과 상량문 중수기 등 기문류, 그리고 시판 등 3 가지로 구분된다. 대표적 편액으로 확연루는 송시열, 강당 청절당과 동재 진덕재‧서재 숭의재은 모두 송준길, 필암서원은 윤봉구가 썼다고 한다. 장경각 편액은 정조 임금의 어필이다. 우동사 편액는 주자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 한다. 확연루에는 김시찬의 ‘확연루기(1960년)’와 송명흠(宋明欽, 1705~1768)의 ‘중수상량문(長城筆巖書院廓然樓重修上梁文)’ 등 기문이 걸려 있다. 확연루에도 시판이 있는데 제목이 ‘筆巖樓前方塘’이다. 주자의 讀書有感 시를 모방한 듯한데, 필암서원 앞에 방당이 있음을 암시한다. 강당인 청절당에는 필암서원 중수기와 松江·淸陰의 시와 이를 차운한 시판 여러 개가 걸려 있다.
⑶ 그림 : 필암서원 장경각에는 인종임금이 하사한 묵죽도와 묵죽도 판이 보관되어 있다. 사당인 우동사에는 김인후의 천명도가 복사된 병풍이 있고, 벽면에는 학‧용‧연꽃‧봉황‧잉어‧매화‧국화‧소나무 등 절개와 장수를 상징하는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사당안의 병풍이 조야하게 복사된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쉽고, 그림은 그 유래를 설명하는 자료 보완이 필요하다. [필암서원지, 1975]에 <필암서원전도>가 실려 있으나 산수화 풍의 서원도는 확인되지 않는다.
필암서원은 최근 대규모의 정비사업을 끝냈다. 정비사업의 결과 廓然하게 전망되었던 전면경관이 키 큰 나무로 가려져 廓然하지 못하게 변했다. 하드웨어 정비가 크게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소프트웨어 문화콘텐츠의 기본이 되는 廓然樓記를 비롯하여 시판 등이 아직 정식으로 번역 소개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앞으로 과제이다.
4. 시각적 기록자료 현황과 조사‧보존관리 방향
<표> 서원의 시각적 기록자료 분류 체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