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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해 경(山 海 經)에 대한 소고(小考) <NO. 4>
※ 장문(長文)이라서 몇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산해 경(山海經)에 대한 다양한 시각은 환영할 만한 것이나 그것이 무지(無知)한 이들에 의해 왜곡되어 신화(神話)와 전설(傳說)처럼 치부되는 것을 염려합니다.
● 『산 해 경(山海經)은 조선(朝鮮) 상고시대(上古時代)를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기록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그 후대의 역사서(歷史書)에 기록된 나라와 종족(種族), 지형지리(地形地理), 기후(氣候)등과도 어울리며, 특히 주석(註釋)편은 아주 상세하여 현재의 지형지리(地形地理)와 풍속(風俗)과도 어울리는 것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 더하여 “산 해 경(山海經)”은 <동이(東夷)의 역사책이라고 할 만큼 주석(註釋)편을 보면, 동이(東夷)와 관계되는 많은 기록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그 후대(後代)의 기록들과 매치시켜보면, 그 기록들이 빛을 발한다. 이것은 기록이 거짓이 아니라는 “진실(眞實)”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산 해 경(山海經)의 기록(記錄)이 소중(所重)하고 중요(重要)하다』 는 것이다.
○ 아래의 “산 해 경(山海經)”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은 “조선(朝鮮)”에 관한 그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와 방향(方向)등을 분석해 보면, 과거(過去) “조선영토(朝鮮領土)”를 재구성(再構成)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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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의 번역(飜譯)과 해설(解說)의 요지【要旨 : 말이나 글의 핵심이 되는 내용】 를 잘못 판단하고, 억지스런 말을 하는 것은 아주 불편합니다. 본인(本人)의 생각과 기록(記錄)의 차이는 당연히 존재하며, 한자(漢子) 한자 한자의 의미(意味) 또한 옛 것과 현대(現代)의 것은 미묘한 차이(差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옥편(玉篇)에 있는 의미를 사용했으며,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본문(本文) 그대로를 번역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또 하나 <반도(半島)에 역사(歷史)가 없었다.>는 말은 비상식적인 말이다. 역사(歷史)가 무엇인가? 인간이 살아온 발자취, 그 이하(以下)도 그 이상(以上)도 아니다. 다만 반도(半島)에 <황성(皇城)이 없었고, 중앙정부가 없었다.>는 이야기며, 그러기에 반도(半島)만을 묶어 기록한 역사가 없다는 뜻이다.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현 세대까지 발견된 것이 없으니,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또한 한 사람의 개인(個人)이 말하고, 주장(主張)한 것을 전부인 냥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박 자우”님은 <본 카페>의 회원(會員)이기도 하며, <대륙조선사연구회>의 회원(會員)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글, 주장의 잘못된 점을 밝히려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밝히려 하면서 내미는 고증(考證)본 또는 인용문(引用文)이 정확(正確)한 것이라는 증명(證明)은 또 누가 해야 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니, 설사 왜곡(歪曲)되고, 누군가 첨삭(添削)하였더라도 그곳에서 진실(眞實)을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잘못됐다고 말만 하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또 누가 잘못된 것인지를 판단해야 되는 건지..............수천(數千)년 전의 기록이 그 때 그 진본(眞本)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글의 내용과 그 속에서 무엇을 주장하려 하는지의 요지(要旨)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전에도 말씀드린 것이나) “수경(水經)”을 보면 ; 본시 한(漢)나라 때 상 흠(桑欽)이란 분이 지은 것을 후대(後代)의 력 도 원(酈 道 元)이 주석(註釋)을 한 것이다. “수경(水經)”은 현 중국(中國) 땅의 물줄기를 기록한 것이지, 현 만주(滿洲)지방이나 반도(半島)지방에 대한 물줄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기록이다. <이것은 대륙학자 역시 같다>
산해 경(山海經)을 주석한 곽박(郭璞)이 “수경(水經)”도 주석(註釋)을 했다고 하나, 주석(註釋)을 한 “수경(水經)”이란 책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하니 없어진 것과 같다고 보아진다. 본인(本人)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곳에 패수(浿水)와 요수(遼水)가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패수(浿水)는 동쪽으로 흘러간다.>고 하였으며, 또한 <설문(說文)해자(解字) 역시 패수(浿水)는 동쪽으로 흘러간다.>고 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기록(記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이 분들의 기록(記錄)이 거짓이라는 증거(證據)나 고증(考證)이 있느냐? 없다는 것이며, 현 중국의 물줄기에 대해 기술한 책에 반도(半島)의 물줄기가 왜 나오느냐는 것이며, 설문해자에서도 똑같은 말인데, 그렇다면 설문해자에 기록된 것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패수(浿水)와 요수(遼水)>는 반도(半島)의 물줄기가 아니라, 현 대륙(大陸)의 물줄기라는 것은 책을 보면 다 알 수 있는데도, 여러분들은 엉뚱한 곳에 있는 하천(河川)을 말하고, 그 기록(記錄)이 잘못됐다는 등 법석을 떨고 있는 것이다. 바로 사고(思考)의 차이(差異)다.
반도(半島)수경(水經)에 대한 기록에서 현 만주(滿洲)나 대륙(大陸)의 물줄기를 기술(記述)할 필요가 있는가? 반도(半島) 수경(水經)에 대한 기록에서 열도(列島)에 있는 물줄기를 기술(記述)할 필요가 있는가? 전혀 불필요(不必要)한 것이다. 이제 무슨 말을 하는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하고, 본론(本論)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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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山 海 經 第 十 一 . 海 內 西 經
《弱 水 、青 水 出 西 南 隅 1,以 東 ,又 北 ,又 西 南 ,過 畢 方 鳥 東 2 。: 약수(弱水), 청수(靑水)는 서남(西南) 모퉁이에서 나와, 동쪽으로, 또 북쪽으로, 또 서남쪽으로, 필방(畢方)조 동쪽을 지난다. 》
1 郭 璞 云 :( 漢 書 ) 西 域 傳 : 烏 弋 國 去 長 安 萬 五 千 餘 里 , 西 行 可 百 餘 日 , 至 條 枝 國 ,臨 西 海 。 長 老 傳 聞 , 有 弱 水 西 王 母 云 。( 三 國 志 魏 志) 東 夷 傳 亦 曰 , 長 城 外 數 千 里 , 亦 有 弱 水 。 皆 所 未 見 也。 淮 南 子 ( 墬 形 篇 ) 云 : 弱 水 出 窮 石 。 窮 石 今 之 西 郡 ● 冉 , 蓋 其 派 別 之 源 耳 。珂 案 : 郭 注 「 ● 冉 」 , 何 焯 校 「 刪 丹 」 ; 黃 丕 烈 、 周 叔 弢 校 同 , 云 以 漢 晉 地 理 志 參 校 。 弱 水 已 見 前 卷 「 窫 窳 」 節 。 : 곽박(郭璞)이 이르기를 : (한서(漢書)) 서역(西域)전 : 조익국은 장안(長安)으로부터 일만5천리 떨어져 있으며, 서쪽으로 백 여일을 가면, 조지(條枝)국에 이르고, 서해(西海)에 임한다. 장 노 전(長老傳)에 듣기로, 약수(弱水)에 서 왕모(西王母)가 있다고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東夷)전에서 또 이르기를, 장성(長城) 밖 수천(數千)리에, 또 약수(弱水)기 있다. 모두 이것을 보지는 못하였다. 회남자(淮南子) (지형 편)에서 이르기를 : 약수(弱水)는 궁 석(窮石)에서 나온다. 궁 석(窮石)은 지금의 서군(西郡) ● 염(冉) 이며, 근원이 별도의 물갈래이다. 원가(袁珂) 안(案) : 곽박(郭璞) 의 주석(註釋) 『●염(冉)』은, 하 작(何焯)의 교정본에는 『산단(刪丹)』이다. ‘황 비열’, ‘주 숙도’의 교정본도 같다. 이르기를 한(漢). 진(晉) 지리지를 참고하라 하였다. 약수(弱水)는 이미 전권의 『알 유(窫寙)』구절을 보라 하였다.
2 珂 案 : 海 外 南 經 云 : 「 畢 方 鳥 在 青 水 西 。 」
● 산해 경(山海經)을 수십 번 보고, 또 번역해 보고, 설명하는데, 가장 핵심적 논쟁거리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운(云), 또는 왈(曰) 또는 역 왈(亦曰)》이라는 문구일 것이다.
우리들이 현재 갖고 있는 마인드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만(一萬)리 이상(以上) 떨어져 있는 서역(西域)지방의 풍속(風俗), 나라 등에 대해여, 또 서역으로부터 수천(數千)리 서쪽지방에 대한 풍속(風俗)과 나라 등에 대해,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운운(云云)』 하는 기록은, 그 동이(東夷)들이 그곳 가까이에서 살고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인국(女人國)은 총령(蔥嶺) 남쪽 3천리 떨어져 있다고 하면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옥저(沃沮)편』을 인용하고, 지금 위에서처럼 장안(長安)에서도 4-5천리 떨어져 있는 하서회랑(河西回廊)의 주위의 약수(弱水)를 설명하는 글에서도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운운(云云)』한다면 그 동이(東夷)가 살고 있었던 곳이 바로 그곳 주위(周圍)가 아니고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예를 들자면, 하서회랑의 북쪽 장성(長城)지대나, 그곳의 약수(弱水)나, 그 서쪽 수천(數千)리도 더 떨어져 있던 ‘조익 국’이나 ‘여인국’에 대해서는 그곳 주위에 있었던 옛 나라들이 있었으며, 전한(前漢). 후한(後漢). 수(隋). 당(唐) 등은 이곳지방을 철저하게 식민지(植民地)화하여, 조그마한 사건(事件)이나 국지(局地)전인 내란(內亂)사태가 발생(發生)하더라도 수만(數萬)의 황군(皇軍) 기마군단(騎馬軍團)을 파견(派遣)하여, 징벌(懲罰)하고, 도호(都護)를 설치하고, 성(城)을 쌓고, 어떤 시절에는 그곳에 주둔(駐屯)병까지 두었다고 하는 마당에, 자신들의 지리(地理)지나 열전(列傳)등엔 기록조차 남기지 않고, 인용(引用)하는 것은 오직 동이전(東夷傳)뿐이니...........여러분들은 이해(理解)가 가능합니까?
이것은 다른 각도로 생각해야 한다. 곧 『동이(東夷)』라 하는 것은 『천하(天下)의 중심(中心)지라는 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그 동(東)쪽 지방』을 말하는 것이며, 그 『동쪽지방의 왕조(王朝)는 동이(東夷)계열의 적장자(嫡長子)인 “조선(朝鮮)”외에는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수많은 나라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조선(朝鮮)”의 일개 제후(諸侯)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당시의 구도(構圖)를 알지 못하면, 조선(朝鮮) 영토(領土)에 대한 연구(硏究)는 공염불(空念佛)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적(事實的) 근거(根據)는 현 대륙(大陸)의 역사서가 증명(證明)하고, 그것을 다시 고증(考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 조선사(朝鮮史) 영역(領域)에 대한 다수(多數)의 의견(意見)과 주장(主張)과 추정(推定)논리(論理)는 환영(歡迎)할만한 것이나, 이미 영역을 정해 놓고 그곳으로 사냥 몰이 식으로 몰아가는 식의 연구형태는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다.
지리적(地理的), 지형적(地形的) 구도(構圖)와 생태(生態)계, 기후(氣候), 방향(方向)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관계를 따져 보아야 할 것들을.............이미 임의적 상태로 정해놓고, 그것에 맞추려 한다면 모든 것은 뒤죽박죽이 되어, 나중에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조차 분별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우린 좀 더 냉정한 자세가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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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山 海 經 第 十 二. 海 內 北 經
《 從 極 之 淵 1 深 三 百 仞 ,維 冰 夷 恆 都 焉 2 。冰 夷 人 面 3,乘 兩 龍 4 。一 曰 忠 極 之 淵 5 。: 종극 연(淵 : 못)의 깊이는 300 인(仞)이며, 빙이(氷夷)들이 항상 도읍(都邑)하여 이어오고 있는 바, 빙이(氷夷)는 사람 얼굴에, 두 마리의 용(龍)에 타고 있다. 첫째로 충 극(忠極)의 연못이다. 》
1 珂 案 : 文 選 江 賦 李 善 注 引 此 經 作「 從 極 之 川 」 。: 원가(袁珂) 안(案) : ‘문선강부‘ 의 이선(李善)이 주석을 인용한 이 경(經)에는 『종 극 천』이다.
2 郭 璞 云 : 冰 夷 ,馮 夷 也 。淮 南 云 : 馮 夷 得 道 ,以 潛 大 川 。即 河 伯 也。 穆 天 子 傳 所 謂 『河 伯 無 夷』 者 ,竹 書 作 馮 夷 ,字 或 作 冰 也 」 : 곽박(郭璞)에 따르면 : 빙이(氷夷)는, 풍이(馮夷)이다. 회 남(淮南)에 따르면 : 풍이(馮夷)가 득도(得道)하여 큰 내에 숨었다. 곧 하백(河伯)이다. 목 천 자 전(穆天子傳) 소위 『하백(河伯)은 무이(無夷)다.』하였으며, 죽서(竹書)에는 풍이(馮夷)는, 글자가 혹은 빙(冰)이다.
珂 案: 經 文 「恆 都」 , 藏 經 本 作 「 潛 都 」 。 郭 注 引 淮 南 子 齊 俗 篇 文 , 實 出 莊 子 大 宗 師 。 大 宗 師 云 : 「 馮 夷 得 之 , 以 遊 大 川 。 」 釋 文 引 司 馬 彪 云 : 清 泠 傳 曰 : 馮 夷 華 陰 潼 鄉 隄 首 人 也 , 服 八 石 , 得 水 仙 , 是 為 河 伯 。: 원가(袁珂) 안(案) : 경문에는 『항도(恒都)』이며, 장경(藏經)본에는 『잠도(潛都)』이다. 곽박이 주석한 회남자 제 속 편의 글에서, 장자 대종사에 실제로 나온다. 대종사에 따르면 : 『풍이(馮夷)가 득하여, 대천을 유람하였다.』고 하였다. 석문(釋文)을 인용한 사마 표(司馬彪)에 따르면 : 청령(淸泠)전에 의하면 : 풍이(馮夷)는 화음(華陰) 동향(東鄕)의 언덕에 살고 있는 우두머리이며, 8석을 입고, 물에서 선을 득하여, 이를 하백(河伯)이라 한다.
後 漢 書 張 衡 傳 注 引 龍 魚 河 圖 則 云 : 河 伯 姓 呂 , 名 公 子 , 夫 人 姓 馮 , 名 夷 。 楚 辭 九 歌 洪 興 祖 補 注 引 抱 朴 子 釋 鬼 篇 ( 今 本 無 ) 復 云 : 「 馮 夷 以 八 月 上 庚 日 渡 河 溺 死 , 天 帝 署 為 河 伯 。 」 等 等 , 是 皆 後 起 之 說 , 未 免 蕪 雜 不 倫 。 河 伯 蓋 古 黃 河 水 神 , 穆 天 子 傳 卷 一所 謂 「 陽 紆 之 山 , 河 伯 無 夷 之 所 都 居 」 者 是 也 。: 후한서(後漢書) 장형 전의 주석을 인용한 용어하도(龍 魚 河 圖)에 따르면 : 하백(河伯)의 성(姓)은 여(呂)이며, 이름은 공자(公子)이며, 부인의 성(姓)은 풍(馮)이며, 이름이 이(夷)다. ‘초사구가’의 ‘홍 흥 조’가 보완(補完), 인용한 주석 ‘포 박 자 석 귀’편에 (지금 그 본은 없다.) 다시 이르기를 : 『풍이(馮夷)는 8월 상경(上 庚)일에 하(河)를 건너다 익사한 사람은, 천제(天帝)의 관청의 하백(河伯)이다.』등등은, 모두 후에 일어나는 설이며, 이것은 면할 수 없는 여러 불륜(不倫)이 아니다. 하백(河伯)은 옛 황하(黃河)의 수신(水神)이다. 목천자전(穆天子傳) 권1에서 소위, 『양우 산에, 하백(河伯)은 무이(無夷)로 도읍하여 살고 있다.』고 하였다.
水 經 注 洛 水 引 竹 書 紀 年 云 : 「 洛 伯 用 與 河 伯 馮 夷 鬥 」 馮 夷 與 用 蓋 即 河 洛 之 神 也 。 殷 墟 卜 辭 屢 有 「 ● 于 河 」 ( 殷 墟 書 契 前 編 : 一 三 二 ‧ 五 ) 、 「 祊 于 河 」 ( 鐵 雲 藏 龜 : 九 六 ‧ 四 ) 等 記 敘 , 知 河 伯 神 話 之 淵 源 亦 已 古 矣 。 : 수경 주(水經注) 낙수를 인용한 죽서기년에서 이르기를 : 『낙백용과 하백 풍이가 싸웠다』 풍이(馮夷)와 함께 ‘용(用)’은 곧 하수(河水)와 낙수(洛水)의 신(神)이다. 은허(殷墟)에는 복사가 있는데, 『● 하(河)이다.』 (은허서계전편 : 132. 5)에 「 팽 우 하 (祊 于 河) 」(철 운 장 구 : 96. 4) 등에 기록된 서문에는, 하백(河伯)을 알고 있는 못의 근원은 역시 옛 곳에 있다. <팽(祊) : 제사이름 팽>
莊 子 人 間 世 云 : 「 牛 之 白 額 者 , 與 豚 之 亢 鼻 者 , 與 人 有 痔 病 者 ,不 可 以 適 河 。 」 適 河 , 釋 文 引 司 馬 彪 云 : 「 謂 沈 人 於 河 祭 也 。 」 則 在 戰 國 之 世 奉 祀 河 伯 之 風 仍 有 增 未 已 。 至 楚 辭 九 歌 , 乃 有 河 伯 專 章 之 敘 寫 , 其 中 「 與 女 遊 」 、 「 送 美 人 」 等 語 , 要 無 非 表 現 人 神 戀 愛 之 情 況 ( 見 聞 一 多 九 歌 古 劇 懸 解 ) 。 則 河 伯 者 , 固 亦 浪 蕩 風 流 之 神 : 此 史 記 滑 稽 列 傳 西 門 豹 傳 「 河 伯 娶 婦 」 傳 說 之 所 由 起 也 。: 장자 인간 세에 따르면 : 『소의 흰 이마는, 돼지의 높은 코(亢 鼻)와 같으며, 사람이 병을 가진 것은 옳지 않지만 하(河)는 적당하다.』 적하(適河)는, 석문을 인용한 사마 표(司馬彪)에 다르면 : 『물속에 사람들은 하(河)에 제사를 지낸다.』즉 전국시대에 제사를 받드는 하백(河伯)의 풍속이 증가했는지는 모른다. 초사구가에 있는 하백(河伯)의 전장의 서문에, 그 중에서 『여자와 함께 논다』, 『미인(美人)을 보낸다.』등의 말이, 없다, 아니다 라는 것은 사람이 신(神)에 대한 연애(戀愛)의 정황(情況)을 표현한 것이다. (見 聞 一 多 九 歌 古 劇 懸 解 . 하백(河伯)은 옛 부터 방탕한 풍류의 신(神)이다. : 사기(史記)의 활계열전. 서문표전에 『하백(河伯)이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다.』이것에서 전설이 연유되어 일어난 것이다.
楚 辭 天 問 云 : 「 帝 降 夷 羿 、 革 孽 夏 民 , 胡 射 夫 河 伯 而 妻 彼 雒 嬪 ? 」 羿 「 妻 雒 嬪 」 事 , 古 說 隱 淪 , 茫 昧 不 可 知 矣 。 而「 射 河 伯 」 , 則 有 王 逸 注 云 : 「 河 伯 化 為 白 龍 , 遊 于 水 旁 , 羿 見 射 之 , 眇 其 左 目 。 河 伯 上 訴 天 帝 , 曰 : 『 為 我 殺 羿 。 』 天 帝 曰 : 『 爾 何 故 得 見 射 ? 』 河 伯 曰 : 『 我 時 化 為 白 龍 出 遊 。 』 天 帝 曰 : 『 使 汝 深 守 神 靈 , 羿 何 從 得 犯 汝 ? 今 為 蟲 獸 , 當 為 人 所 射 ,固 其 宜 也 , 羿 何 罪 歟 ? 』 」
高 誘 注 淮 南 子 ( 氾 論 篇 ) 乃 逕 云 : 「 河 伯 溺 殺 人 , 羿 射 其 左 目 」 河 伯 蓋 為 民 害 ,羿 射 其 不 道 也 。 而 博 物 志 異 聞 云 :「 澹 臺 子 羽 渡 河 , 齎 千 金 之 璧 於 河 。河 伯 欲 之 , 至 陽 侯 波 起 , 兩 鮫 夾 船 。 子 羽 左 摻 璧 , 右 操 劍 , 擊 鮫 皆 死 。 既 渡 , 三 投 璧 於 河 , 河 伯 躍 而 歸 之 , 子 羽 毀 而 去 。 」 河 伯 性 行 之 卑 劣 , 於 此 尤 可 見 一 斑 。 其 在 古 代 神 話 中 為 反 面 形 象 人 物 , 蓋 無 疑 問 矣 。
3 珂 案 : 關 於 河 伯 形 狀 , 尸 子 輯 本 卷 下 云 : 「 禹 理 水 , 觀 於 河 , 見 白 面 長 人 魚 身 出 , 曰 :『 吾 河 精 也 。 』 授 禹 河 圖 而 還 於 淵 中 。 」 繹 史 卷 十 一 引 博 物 志 於 述 此 故 事 後 更 為 之 釋 云 : 「 蓋 河 伯 也 。 」 韓 非 子 內 儲 說 上 略 云 : 「 齊 人 有 謂 齊 王 曰 : 『 河 伯 , 大 神 也, 臣 請 使 王 遇 之 。 』 乃 為 壇 場 大 水 之 上 。 有 閒 , 大 魚 動, 因 曰 : 『 此 河 伯 。 』 」 可 見 河 伯 之 形 , 實 當 是 人 面 魚 身 。 酉 陽 雜 俎 諾 皋 記 上 云 : 「 河 伯 人 面 , 乘 兩 龍 。 又 曰 人 面 魚 身 。 」 「 人 面 , 乘 兩 龍 」 , 今 所 見 山 海 經 是 也 ,「 又 曰 人 面 魚 身 」 , 蓋 更 參 古 說 而 為 之 補 充 使 成 全 貌 也。
4 郭 璞 云 : 「 畫 四 面 各 乘 靈 車 , 駕 二 龍 。 」 郝 懿 行 云 : 「 郭 注 靈 蓋 雲 , 字 之 訛 也 。 水 經 注( 河 水 ) 引 括 地 圖 云 : 『 馮 夷 恆 乘 雲 車 , 駕 二 龍 。 』 是 靈 當 為 雲 。 太 平 御 覽 六 十 一 卷 引 此 注 正 作 雲 , 可 證 。 」珂 案 : 郝 說 是 也 , 王 念 孫 校 同 。
5 郝 懿 行 云 : 「 水 經 注 ( 河 水 ) 引 此 經 作 中 極 , 中 、 忠 古 字 通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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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河 伯 蓋 古 黃 河 水 神 : 하백(河伯)은 옛 황하(黃河)의 수신(水神)이다.>
● 위 내용은 『조선(朝鮮)의 일원(一員)이었던 ‘고구려(高句驪)’와 밀접(密接)한 관계에 있으며, ‘고구려(高句驪)’ 건국(建國)과 깊은 관계(關係)가 있는 ‘인물(人物)’』이란 것을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高句驪)본기(本紀)
《始祖東明聖王,姓高氏,諱朱蒙.中略.及解夫婁薨,金蛙嗣位.於是時,得女子於太白山南優渤水,問之曰: “我是河伯之女,名柳花.與諸弟出遊,時有一男子,自言天帝子解慕漱,誘我於熊心山,鴨綠江邊室中,私之,卽往不返.父母責我無媒而從人,遂謫居優渤水.”金蛙異之,幽閉於室中.爲日所炤,引身避之,日影又逐而炤之.因而有孕 : 시조 동명성왕, 성(姓)은 고(高)씨이며, 이름이 주몽이다. (중략). 해부루가 죽자, 금 와(金蛙)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 금 와(金蛙)는 태백산 남쪽 ‘우발 수’에서 한 여자를 얻어 그녀의 내력을 물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이다. 여러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 놀았는데, 때마침 한 남자가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면서 나를 웅심산 아래 압록강 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여 사욕을 채우고, 그 길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의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자와 관계한 것을 꾸짖고, 마침내 ‘우발 수’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금 와(金蛙)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녀를 방에 가두었는데, 그녀에게 햇빛이 비쳤고, 그녀가 몸을 피하면 햇빛이 또한 그녀를 따라 가면서 비쳤다. 이로 인하여 잉태(孕胎)하였다.》
● 고구려(高句驪) 건국(建國)과정 기록에서 말하는 주몽(朱蒙)과 하백녀(河伯女)의 기록을 보면, 황하(黃河) 수신(水神) 하백(河伯)의 따님이 하백녀(河伯女)이며, 유화(柳花)이다.
해모수(解慕漱)는 소위 천제(天帝 :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달콤한 말로 유화(柳花)를 유혹하여 정을 통(通)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뿌린 씨앗이 어디로 가겠는가? 유화(柳花)가 잉태(孕胎)하여 낳은 아이가 바로 “주몽(朱蒙)”이며, 고구려(高句驪)를 건국(建國)시킨 동명성왕(東明聖王)이란 분이다. 촌수(寸數)로 따지면 황하(黃河) 수신(水神)의 외손(外孫)이 아닌가!
황하(黃河) 수신(水神)의 딸이었던 <하백녀 (河 伯 女)> “유화(柳花)”가 수천(數千)리 머나 먼 반도(半島) 북방(北方)지대로 수학여행(修學旅行)이라도 왔었다는 이야긴가? 이러한 이야기는 『고구려(高句驪)와 부여(夫餘)등의 조선(朝鮮)나라들이 황하(黃河) 상류(上流)지역에서 시원(始原)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이며, 『유화(柳花)』란 이름에서 “유(柳)”는 별자리 이름으로 “북방(北方)”을 뜻하는 말이며, “유(柳)”는 버드나무로 유목(遊牧), 이목(移牧)족들이 수초(水草)가 있는 곳에서 틈틈이 버드나무 가지로 ‘광주리’등을 만들어 사용했었다는 고사(故事)와 연결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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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山 海 經 第 十 二. 海 內 北 經
《 陽 汙 之 山 , 河 出 其 中 ; 凌 門 之 山 , 河 出 其 中 1 : 양우산은 하(河)가 나오는 그 가운데에 있고 ; 능문산도 하(河)가 나오는 그 가운데에 있다.》
1 郭 璞 云 : 「 皆 河 之 枝 源 所 出 之 處 也 。 」 郝 懿 行 云 : 「 陽 汙 即 陽 紆 , 聲 相 近 。 穆 天 子 傳 (卷 一 ) 云 : 『 至 于 陽 紆 之 山 , 河 伯 無 夷 之 所 都 居 。 』 : 곽박(郭璞) 이르기를 : 『모두 하(河)가 흐르는 가지(지류)의 근원지에 있다.』 학의행(郝懿行) 이르기를 : 『양우는 곧 양우(陽紆)와 소리가 서로 가깝다. 목 천 자 전(穆天子傳) (권1)에서 이르기를 : 『양우(陽紆)산에 이르면, 하백(河伯) 무이(無夷)가 도읍(都邑)하여 살고 있다.』하였다.
水 經 注(河 水)云 :『 河 水 又 出 于 陽 紆 、 陵 門 之 山 , 而 注 于 馮 逸 之 山 。 』 蓋 即 引 此 經 之 文 。 陵 門 即 凌 門 也 。 或 云 即 龍 門 , 凌 、 龍 亦 聲 相 轉 也 。 藝 文 類 聚 八 卷 引 此 經 正 作 陽 紆 、 陵 門 , 與 水 經 注 合 。 陽 紆 、 陵 門 其 地 皆 當 在 秦 ,故 淮 南 子 云 : 『 昔 禹 治 洪 水 , 具 禱 陽 紆 』 : 수경 주(水經注) (하수)에서 이르기를 : 『하수(河水) 또 나오는 곳은 양우(陽紆), 능문(陵門)산이며, 물이 풍일 산에 이른다. 모두는 곧 이 경문을 인용하였다. 능문(陵門)은 곧 능문(凌門)이다. 혹은 곧 용문(龍門)인데, 능(凌)은 용(龍) 또한 소리가 서로 변화한 것이다. 예문유취 8권을 인용한 이 경문에서는 양우(陽紆), 능문(陵門) 모두 수경 주에서는 하나가 된다. 양우(陽紆), 능문(陵門) 그 땅은 모두 진(秦)에 있다. 옛 회남자(淮南子)에 따르면 : 『옛 적에 우(禹)가 홍수를 다스리려고, 기도하던 곳이 ‘양우(陽紆)’이다.』
高 誘 注 云 :『 陽 紆 , 秦 藪 。 』 是 也 。 水 經 注 反 以 高 誘 為 非 , 謬 矣 。」 珂 案 : 郝 引 水 經 注 「 馮 逸 之 山 」 , 當 即 「 馮 夷 之 山 」, 是 以 河 伯 之 名 而 名 山 矣 。: 고유(高誘)의 주석에 따르면 : 『양우(陽紆)는, 진(秦)나라의 늪(藪)이다. 』옳다. 수경 주(水經注)는 고유(高誘)의 주석이 반대로 잘못된 것이라 했다. 원가(袁珂) 안(案) : 학의행(郝懿行)이 인용한 수경 주(水經注)에서 『풍일 산』은 당연히 즉 『풍이(馮夷)산』이며, 이곳은 하백(河伯)의 이름으로 된 산의 이름이라고 하였다.
● 하백(河伯)은
1) 하(河)의 수신(水神)이며,
2) 빙이(氷夷)이며, 풍이(馮夷)이며, 무이(無夷)이며, 풍 씨(馮氏)이다.【 빙(冰)과 풍(馮)은 같다고 하였다.】
3) 주례(周禮)에, 하(夏) 관리이며, 대사마(大司馬)의 벼슬이다.
4) 빙이(氷夷)=풍이(馮夷)=무이(無夷)는 동이(東夷)족이며, 하(河)의 수신(水神)이며, 하(夏)나라의 대사마(大司馬)라는 벼슬이름이기도 하며, 그의 여식(女息)은 고구려(高句驪)를 건국(建國)한 시조(始祖)의 어머니(母)가 된다. 탄생(誕生)설화(說話)로 하(河)가 등장하며, 그 중에서도 하(河) 신(神)의 따님이 <건국시조(建國始祖)를 잉태(孕胎)하여 낳았다>라는 것은 곧 『하(河)를 중심(中心)으로 건국되었다.』라는 것을 강조(强調)하는 말이다.
2011년 12월 06일 <글쓴이 : 문 무>
첫댓글 문무 선생의 상대를 제압하는 논리적 방법은 풍부한 한문 번역으로 다른 사람에게 경외감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산해경이라는 책이 우공시대의 기록인데 이것은 사마천이 사기를 썻을 당시에도 몇천년 전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 사마천 당시의 지형지리도 섞여 있다고 합니다. 또 산해경은 저자가 한사람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첨삭되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천독이라는 것도 발음이 비슷한 조선험독이었는데 잘못 첨삭된것이라고 합니다.
산해경에서 현재 반도의 지명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서 그것이 대륙조선에서 주장하는 대륙은 될 수 없습니다.
지금의 대문구 유적을 보면 황하문며에 필적하는 것이 있다고 밝혀지고
있습니다.
문명선생의 논리는 A가 아니면 B가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현 반도 지리 지형과 다르니 조선은 무조건 대륙에 있었다는 논리적 비약을 하고 있습니다.
틀리셨습니다.
문무선생은 a가 아니면 b다란 논리가 틀림없이 아닙니다.
아무리 봐도 고 역사서적들상 b가 진실에 근접한데...왜 a 만을 도식적으로 진실이라 민중들을 쇄뇌하는가 하시는 방식입니다.
오히려 리선생님과 박선생님 방식이...동북공정류 지명사전(a)와 다른 b란 주장들은...사료로서 가치없습니더...
란 식의 중국 공산당들이 딱 좋아할 거들먹거림이라 전 보입니다.
그리고 문무님은...한자지식 많으심에도...독자들을 위해 반듯이 구절 구절 친절하게 주해를 다십니다.
님들같이 원문 한자글 쓱 드밀고...해석들 못허면 역사 논헐 가치 없어!... 란 식 거들먹거림이 없단 점에서 존경스러우면서 인간적으로 글에 신뢰가 간단 겁니다.
그렇군요 한문 주해에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댓글을 다는 것이 독자들로 하여금 대륙 조선 역사연구에 진실을 찾는 척도이군요
박자우 선생님 역사지명대사전 연재할 때는 순수한 목적으로 다른 연구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대륙조선 다른 派에서 고금지명대사전 역사지명자체를 흔들기 시작 한 것이 원인이었지요
지금은 홍 선생님도 거기에 가담하여 주장하고 있지만 저는 박자우 선생님이 예전처럼 역사지명대사전을 연재하였으면 하는 것입니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 善人이란 그러한 惡한 상항에 처하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대사가 나오더군요.
박자우 선생이 주변의 사항을 견디지 못하고 중심을 잃은 것 같습니다. 얼마전 달랑 한문만 내놓은 것 보았는데 저도 충격이었습니다. 다시 예전처럼 글을 쓰시고 계시지만요 빨리 극복하여야 할 텐데요
저는 말도 안되는 홍선생의 주장이 한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지명대사전은 사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자우 선생님은 본인의 사관의 입장에서 해석하거나 주석을 달지 말고 있는 그대로 번역하는 수준에서 그치면 그러한 무지한 포식자들의 공격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박자우 선생님의 연재로 인해서 고금지명대사전이 욕먹는 것도 좀 줄어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