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이 현대미술의 중심지가 되기까지-소호(4)
마리 월쉬 샤프재단은 1985년부터 1년에 한번씩 14명씩 예술가들을 선정하여 작업실을 제공하는 데 이 재단의 거주작가로 선정된 알렉산드라 에스포지토가 다음과 같이 예술가를 표현했다."뉴욕의 예술가들은 무슨 미생물같아요. 가장 더럽고 후진 지역에 들어가서 더러운 것 다 먹어치우고 깨끗하게 해놓으면 땅값은 올라버리고, 그리고 나면 또 다른 더러운 곳을 찾아 떠나야하죠."
최근의 예가 윌리엄즈 버그다. 1990년대 중반부터 예술가들이 본격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이후, 이곳의 월세는 이제 맨해튼 부럽지 않게 되어버렸다. 윌리엄즈 버그 중심거리인 베드포드 애비뉴엔 동네사람들이 모두 모이던 몇개의 음식점이 있을 뿐이었다. 이제 이 거리에는고급 부티크와 프렌치 베이커리, 각종 음식점들이 들어섰고 주말이면 이 곳 주민들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놀러온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이제 윌리엄즈 버그는 보헤미안들보다는 멋쟁이들의 동네가 되어버렸다.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소호에 있다.소호가 예술가촌이었다가 갤러리촌으로 변했고 지금은 갤러리마저 다 떠나고 맨하튼 다운타운 쇼핑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소호의 변화를 목격한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옮겨가는 곳이 다음 부동산 붐 지역이 될 것이라 예측하게 되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함께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던 비평가인 해롤드 로젠버그는 1954년 <10번가>라는 글에서 "살곳을 찾는 것은 예술가로서 첫번째로 해야할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했다. 경제적인 문제, 작업하기에 적당한 공간, 그리고 동료예술가들, 이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장소에 사는 것이 예술가의 작업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2차대전을 전후로 형성되기 시작한 10번가의 예술가촌엔 갤러리와 비평가들이 모여 있었다. 추상표현주의 화가와 비평가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던 '시더 스트리리트 태번' 지금 '뉴욕 스튜디오 스쿨'이 있는 자리인 8번가에는 '휘트니 미술관'이 있었다. 유명화가인 필립 펄스테인이 1950년대 처음으로 뉴욕에 왔을 때 작업실겸 아파트 월세는 한달에 17달러, 지금의 가치로130 달러 정도가 된다. 당시 예술가들은 작업하며 살아가기 위해 그다지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 그의 제자가 룸메이트와 내는 월세는 1700 달러 예전과 비교하면 10배이상의 월세를 부담하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대부분 풀타임(주당40당시간)직업을 갖고 있다.이들의 직업은 교수직이 아니라면 예술과 관계없는 일인 경우도 많다. 주5주일을 일하고 나면 작업 할수있는 시간은 밤이나 주말뿐이다. 마치 취미작가인 선데이 아티스트들처럼. 예술가들이 취미처럼 작업을 해서야 작품이 발전할리는 만무하다.
10번가의 낮은 월세의 유산은 소호로 이어진다. 리처드 코스텔라네츠가 쓴 <소호- 예술가촌의 형성과 몰락>을 보면 이때의 사정이 자세히 나와 있다. 주철기둥으로 유명한 소호의 건물들은 대부분 섬유 산업을 해 1840년에서 1880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한다. 2차대전이후 남부와 외국의 섬유산업으로 인해 경쟁력을 상실한 이곳의 섬유산업은 점차 인쇄와 창고업에 그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거의 버려다시피한 음침한이곳에 1960년대 중반부터 예술가들이 점차로 모여들기 시작했다.(이러한 소호 1세대 중 한명이 백남준씨다.) 당시 소호의 월세는 평방피트당 0.13달러에서 0.75달러로, 이는 45평정도 되는 널찍한 로프트를 1년에 200에달러에서 1200달러를 내고 세들어 살 수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건물들은 거주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사는것은 불법이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예술가 거주자 협회'라는 비공식적인 단체를 만들어 당시 뉴욕시장인 로버트 와그너에게 거주허가증을 발행해 줄것을 요구했다고한다. 동생이 예술가였던 시장은 이 요구를 수락했고 그때부터 예술가들이 거주하는 상업용 건물앞에는 '예술가 거주 A.I.R(Artist in Residence)'라는 표지판을 써붙이도록 하였다. 화재시 소방관들에게 건물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이렇게 뉴욕시가 작가의 로프트 거주를 인정하면서 마음 편히 살 수 있었다. 작가들 사이에서는 몇몇 친한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로프트 빌딩을 구입하고 각 층을 자신의스튜디오로 개조하여 사용하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게 된다. 이들 로프트 빌딩은 각 층의 넓이가 70평 남짓한 층 정도의 규모가 일반적 크기였다. 이런 로프트 빌딩 전체를 15만달러 정도면 살 수있었다고 한다. 소호의 싼월세는 기적적으로 1970로년대까지 유지되면서 이제는 상상할 수없는 예술가촌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코스탈라네츠는 <소호>에서 그 이유를 몇가지로 분석했다. 첫째 소호의 건물은 보통사람들이 살기에는 너무 컸다. 둘째 거주자들을 위한 시설이 전무했다. 구멍가게도 세탁소도 학교도 약국도 없었다. 셋째 당시에 로어맨해튼 고속도로를 만들 계획이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이 계획이 실행되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들은 소호를 상당히 오랜기간동안 예술가들에게 아주 싼 가격의 공간을 제공할 수 있었다.
소호의 진정한 전성시대는 1980년대였다.그때 소호의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어 예술과 삶이 한데 녹아있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골목마다 많은 갤러리가 들어섰고 , 디자이너의 부티크가 하나 둘 문을 열기 시작했으며,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나가면 장 미셸 바스키아의 그래피티가 날마다 색다른 볼거리를 선사해주곤 했다.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하러 어느 레스토랑에 가더라도 한 두명의 작가들과 비평가 ,딜러,큐레이터등 에술계의 사람들과 만나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또 예술과 직접 적인 관련은 없더라도 진정으로 예술을 좋아해서 갤러리를 찾는 사람들로 소호는 늘 활기에 차 있었다. 작가들의 동지애같은 강한 유대감, 자유롭고 열정적이었던 분위기,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면서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작품감상보다 쇼핑을 하기위해서 세계각지에서 몰려든 수많은 관광객으로 예술의 동네에서 관광지로 변해갔다. 치솟는 월세로 소호는 예술가들은 물론, 갤러리들을 잃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갤러리를 잃기 시작한 것은 폴라 쿠퍼 갤러리가 첼시로 이전하던 1996년 경이다.
정든 소호를 외면하는 동료딜러들을 비판하면서 마지막까지 소호에 남아 막강한 파워를 보여준 페이스 윌덴스테인갤러리의 아르네 글림셰마저도 2001년 결국 첼시로 이전했다. 그의 갤러리 자리는젊은 층에게 폭발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디자이너 헬무트 랭의 가게가 들어와 있다. 또 최후까지 소호를 고수하던 실력있는 아트 딜러 데이비드 츠버너와 리만 마르쿠스도 9.11 테러사건이후 예술지역으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상실한 소호를 떠나 2002년 6월 모두 첼시로 자리를 옮겼다.
예전의 소호는 이제 사람들의 마음속에 추억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소호가 뉴욕예술계, 더 나아가 미국미술계에 끼친 역할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지금의 미국미술은 소호가 있었기에 그 이전에는 10번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소호와 10번가란 첫째 값싼 월세, 둘째 예술가끼리 모여살 수 있었던 커뮤니티를 뜻한다. 즉 예술가들이 돈벌이에 치이지 않고, 서로 모여 살면서 작업할 수 있었다는 환경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뉴욕 미술 시장의 고수인 아트 딜러들이 화려한 게임을 펼쳤던 갤러리들이 있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뉴욕커 뉴욕 미술의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