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밭이다.
강원도 정선군 남면. 동면에 걸터 앉은 산이다.
억새가 흘리고 간 바람이 민둥산 정상임을 알리는 1,119m 표석에 차갑게 다가와 머문다.
오른쪽 멀리로 백두대간 인듯한 능성이가 구름 아래에 깔린다.
우선 먹자!
산에서 먹는 음식의 맛은 언제나 감미롭다.
여전히 산에서 먹으면서 느낄 수 있는 음식의 풍만한 행복이 오늘도 어김없이 정상 언저리에 자리를 잡았다.
인삼주. 백세주. 살구주. 포도주. 캔맥주...
주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치킨. 계란말이... 계란말이가 이토록 이쁘게도 될 수 있다는걸 처음 알았다.
막 담가온 김장김치. 호두볶음...
눈이 내린듯한 멋진 모습을 자아내며 일렁이는 억새를 뒤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이 제법 차갑게 느껴진다.
7시 13분.
주차장의 어스름한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에 기사님에게 안전을 부탁하는 인사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독도는 우리땅이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김밥. 두유. 귤을 나누어 주는 손길들이 분주하게 시간을 보낸다.
여전히 고맙고 사랑하고 싶은 우리 총무님과 부대장들이다.
감칠맛 나는 안동 소주의 향이 상업지역 점주들의 입술을 당기며 오늘 산행에 대한 여유로움을 느끼게 해 준다.
민둥산 3.5km.
정상으로 향하는 이정표를 보면서 이제 산행을 시작해야 될 때다.
동네 뒷산을 오르내리듯 빈둥거리며 올라야 한다는 민둥산이다.
처음부터 약간 가파른 등산로가 앞을 막았지만 산행이 짧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저만치 어디쯤에서 막걸리 한잔을 마실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발길을 이끈다.
산을 오르기 시작한지 불과 10여분인데 벌써 두툼한 옷가지는 벗어 허리에 묶고 사랑하고 난후 내뱉는 신음 같은 거친 호흡을 입가에 담는 모습이 보인다.
하늘을 찌를 듯 팔을 올리고 서 있는 적송들을 지나자니 이번엔 낙엽송 밭이고 곧게 뻗어 올라간 나무들 뒤로 검푸르게 반듯한 잣나무 숲이다.
민둥산에도 억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멋진 숲길이 있다는걸 안것이 마치 큰 지식을 얻은양 즐겁기만 하다.
솔잎사이를 헤집는 바람이 차라리 향기롭다.
처음 산행에 동참한 새색시, 밤새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섬마을 아저씨, 매번 산에 오르는것이 점점 더 힘들게만 보이는 복덩이. 체해서 힘들어 하는 사람을 위해 손을 따 주던 회원.
산에도 실과 바늘을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여성스러움이 체한 속을 달랬을 것이다.
모두가 즐겁고 모두가 상쾌하다.
억새마을 휴게소.
구수한 내음새가 제법인 누룽지 막걸리에 오뎅국물...
어느새 젓가락 두드리는 흥이 생선 굽는 내음새와 어울려 가슴속으로 스미어 온다.
산이 주는 내음새. 고향의 내음새다.
서로가 서로의 잔에 막걸리를 따르며 이마에 슬그머니 돋아나기 시작하는 땀방울을 닦는다.
민둥산 0.6km.
이제부터 주능선 일대에 본격적인 참 억새밭이다.
거칠고 조잡한 느낌이 드는 갈색꽃을 지닌 갈대와는 달리 한올 한올 분리되어 정갈하고 깔끔한 모습을 지닌 볏과의 여러해살이 풀인 하얀 억새꽃밭이다.
그 옛날 산나물을 키우기 위해 나무를 불태우며 가난을 복습해야 했던 우리네 부모들의 가냘프고 모진 삶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는듯 하다.
달빛보다 희고 이름이 주는 느낌보다 수척하여 하얀 망아지의 혼 같다는 억새.
군데군데 세워져 있는 어설픈 푯말과 통나무 철책이 사람들의 욕심과 무지를 비웃으며 다가오는 이들을 막는다.
“억새 군락지에 들어가지 마시오”
정상으로 향하는 억새 길을 사이로 통나무로 울타리를 쳐 놓은 등산로가 자연 그대로의 느낌이 아니라 어색해 보이는 것은 마치 정상으로 소떼를 몰듯 하는 그런 기분에서 오는 것 만은 아닌 듯싶다.
사람이 들어 가지 못하는 억새풀속으로 바람이 숨는다.
“반천 송어 횟집”
출출해서 집나가기 직전인 위장으로 야채에 콩가루를 넣고 비벼 제법 붉은 송어 한점을 보내어 본다.
맛있다.
사실 회맛을 잘 모르는 내게도 별로 낯설지 않은 달콤함으로 다가왔다.
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이 있었을까?
모두 모두 사랑하고 감사해야 될 사람들이다.
바윗돌을 들추면 아직은 개구리가 놀라 찬물을 비켜가는 그런 맑고 깨끗한 동네다.
골 높은 소나무 사이로 산골의 짧은 해가 살며시 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