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목련이 질 때 / 강에리
목련은 누구보다 청초하게 피어나서 처연히 진다 목련이 피는 계절이 오면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꽃삽으로 모래를 파고 우리는 3층 베란다에서 차를 마시며 하얀 꽃잎이 지는 놀이터를 내려다 보곤했다 어릴 때 친구는 아니지만 그시기 그녀와 나는 단짝처럼 지내던 친구였다 우리는 마주보는 아파트에 살며 큰애를 같은 유치원에 보내고 막내들을 업고 구연동화, 피아노, 종이접기, 체육 과외도 함께 시키고 가족들 생일파티도 함께하고 한 달에 한 번씩 같은 모임에 나가며 발레며 연극 관람을 다녔다 돌아보면 대부분 어린이를 위한 공연이었지만 함께여서 즐거웠다
그녀가 주택을 사서 다른 동네로 이사간 후에도 우리들은 자주 뭉쳤다 함께하는 모임 구성원 대부분이 언니들이었고 둘이만 동갑이라 더욱 친했던거 같다 어느날 산책에서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심적으로 힘든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그녀는 강남에서 큰 레스토랑을 4개나 갖고 있었고 오전에는 수영과 꽃꽃이를 하고 오후에는 아이들 서포트로 하루를 보내는 온화한 주부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져서 직접 사업을 해야겠다고. 그녀의 둘째는 겨우 두돌을 지났을 때였다 얼마후 그녀는 마지막 남은 가게를 직접 경영했고 아이들은 그큰집에 새벽까지 둘이만 있기도 했다 집에 돌아오면 가끔 작은 애가 어두운 4층 계단에 앉아 울고 있을 때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다 그후 큰집을 팔고 청담동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해서 한 번 다녀온 일이 있는데 텅빈 벽에는 열한 살 먹은 딸의 돌 사진과 다섯 살 아들의 백일 사진이 걸려있고 거실 창문에는 커튼 대신 신문지가 붙어있었다 깔끔하고 예술적 조예가 깊던 그애답지 않은 썰렁한 인테리어에 가슴이 아팠다 당시 그녀의 곤고한 삶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이었다
그렇게 애쓴지 삼 년 그녀는 다시 일어섰다 집도 서초동 팔십 평대 빌라로 옮기고 가게는 좋은 가격으로 매각했다 그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모임에는 나오지 않았다 이제 다른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평범하고 소박한 그리고 다소 답답한 일상이 아닌 모험적인 투자사업가로 변신한 것이다 만나도 더 이상 공통의 화제도 없었고 관심사도 달랐다 그녀는 이제 비즈니스가 아닌 작고 소박한 일상에는 관심없는 듯 보였다 그런 어색한 만남이 몇 년간 이어졌고 나는 서서히 연락을 하지 않았다 지금도 언니들이 가끔 그녀의 안부를 묻지만 나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까지 만남이 이어지지 않은 것이 다행인지 모른다 내 기억 속엔 아직도 목련이 지는 날 우산을 쓰고 아이를 마중하던 흰블라우스의 단아한 그녀의 모습이 여운처럼 남아있다
이렇게 꽃들이 화창한 봄이면 서로의 아픔을 다독여주고 고민을 상담하고 매일 만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을 가고 입지도 않을 옷들을 쇼핑하던 그때가 그립다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일본 인형처럼 단아했던 그녀. 소풍 갈때면 예쁜 도시락을 만들어오던 그녀. 함께 예당 음악회에 가던 그녀가 그립다
친구야 오랜시간 함께 해줘서 고마웠어 어디서든 행복하렴!
강에리 시인, 작사가, 칼럼니스트, 기자
(사)한국국보문인협회 문예진흥연구소 소장, 한국신문예문학회 기자, (사)서울우리가곡협회 카페ㆍ홈페이지 운영자
월간한국국보문학 신인문학상, 주간한국문학신문 기성문인문학상, 제19회 황진이문학상
시집 "단 하나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