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의 SG워너비
이승만 지시를 받은 중부경찰서장은 경찰80명을 동원하여 49년6월6일 아침 8시30분 반민특위를 기습하여 48년 10월23일부터 시작되어 7개월간 조사된 친일인사에 대한 모든 자료를 불태우고 또 이를 저지한 반민특위인사들을 강하게 구타한다.
해방 후 미군정의 반대로 친일청산은 미루어졌고 미군정기간 친일파들은 반공으로 신분을 세탁했고 친일자료들을 모두 없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시작된 반민특위는 최선을 다해 1948년 10월부터 조사를 해 688명을 체포하여 자료를 취합하고 있었다. 688명 가운데는 경찰이 37%였고 특히 이승만에게 총애를 받던 인물로 독립 운동을 하던 애국인사를 치욕스럽게 고문했던 노덕술 최연 등도 있었다.
이승만은 반민특위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고 선동하며 대통령 스스로가 폭력적으로 반민특위를 강제해산했다. 그러나 국민들이 매년 6월6일을 반민특위피습을 기억하며 친일청산을 요구하자 이승만은 6월6일을 현충일로 정해서 친일청산을 막았던 것이다. 내가 현충일이 불편하고 불쾌한 것은 순국 군인과 애국지사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6월6일 현충일이 이런 의도로 만들어졌다는 것 때문이다.
어제 최초 현충원이던 장충단에 가서 묵념했다. 장충단에 있는 외교전을 선택하고 유서투쟁을 한 이한응열사기념비와 특히 헤이그 밀사 이준열사의 동상 앞에서 기도했다. 이준열사 동상을 바라보는데 열사의 눈앞에 신라호텔이 있다. 이준열사의 눈이 불편해보이셨다. 밤에 장충단에 다시 가서 이 분들 뜻을 느끼며 이준열사의 생각을 마음에 담고 왔다.
나라를 사랑하기에 한양도성을 피, 땀으로 쌓은 국민들의 석돌들이 파손된 장충단이 건너편 보이고 성곽돌을 깔고 앉아 자기 집을 지은 재벌들의 집성촌 장충동을 보시는 이준 열사의 마음이 어떠하실까?
박정희는 이병철에게 국가시설인 영빈관 부지를 28억5천만 원에 팔고 그 자리에 이병철은 73년부터 호텔을 짓기 시작해 79년에 신라호텔이 완성된다.
호텔을 설계한 회사가 호국 충정의 장충단의 영혼을 밟고 있던 박문사란 절을 설계건설한 곳이다. 일본의 돈을 빌려 호텔은 완공되었다. 2011년4월에 있었던 일본자위대50주년 행사가 열리는 날 한복을 입은 방문자들이 출입이 금지되었던 곳이다.
어제 밤 이준열사가 나에게 이야기 해주셨다. "나의 동지들을 가열차게 역주행 시켜주시라! 헤이그에서 외교투쟁으로 싸웠던 이위종을 기억시켜주시라! 그를 기억하고 나누라! " 아래 사진 중 우측에 있는 미남청년이 헤이그에 간 청년외교관 이위종이다.
초대 주러 공사인 이범준의 아들인 이위종은 총명함이 뛰어났다. 7개의 언어를 들을 수 있었고 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했고 사교력과 추진력이 뛰어났기에 공사지만 외국어가 되지 않는 이범준을 대신해서 이위종이 실제 공사의 역할을 하였다. 이미 그는 프랑스에서 군 사관학교 2년을 마쳤던 수재였다.
이상설 이준과 함께 이위종은 헤이그밀사로 명을 받았고 외국어가 가능한 이위종이 실무를 다 관장하고 있었다. 1907년 헤이그에서는 44개국의 대표들이 모여 만국평화회의를 열고 군비축소 각 나라의 독립 등 여러 현안을 논의 하는데 이 세 명은 여기에 참여하고 일본의 부당한 을사늑약과 조선의 독립을 주요 의제로 삼자고 주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영국과 일본의 방해 개최국 네덜란드 주최국 러시아의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이들은 입장하지도 못했다. 2년전 영국에서 자결한 청년 이한응공사의 기상을 알기에 이들이 회의장에 입장하는 것을 강제로 막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청년외교관을 윌리암 스테드란 대기자는 이위종과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만국평화회의보>에 낸다.(의역했음)
기자: 당신들은 왜 이 만국평화 회의에 파문을 일으키고 소란을 피우죠?
이위종: 우리는 아주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우리가 이곳 이곳에 온 것은 만민의 법과 정의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각국 대표단들이 이곳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요?
기자: 이들은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구현하려는 조약을 맺기 위해서 모인 것이죠
이위종: 조약이라구요? 그렇다면 소위 한국과 일본이 1905년 맺은 조약은 조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국 황제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체결된 하나의 협약일 뿐입니다. 한국의 이 조약은 무효입니다.
기자: 일본은 최강 강대국인데 잊으셨나요?
이위종: 강대국이라 정의라면 정의는 겉치레에 불과할 뿐이며 당신들의 기독교 신앙은 위선일 뿐입니다. 왜 한국이 희생되어야 합니까? 일본이 힘이 있기 때문인가요? 이곳에서 정의와 법과 권리에 대해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솔직하게 총, 칼로 이긴 당신들의 나라가 유일한 법전이며 어떤 경우도 당신들의 나라는 강하기에 처벌받지 않는다고 말하지 그러십니까?
이 당찬 조선 쳥년들의 이야기가 언론에 나오면서 헤이그에 와있던 150명의 기자들은 조선 청년들이 외교관들에게 관심을 갖고 기자회견을 마련해준다. 이 때 이위종은 프랑스어로 유창하게 이들 기자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의역했음)
“지금 일본대표는 큰 목소리로 주장합니다. 조선에서 일본은 일본의 국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적이고 보편적인 인권과 문명을 돕고 있는 것이며, 조선에서의 개방정책을 유지하여 모든 나라들이 자유롭게 와서 활동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는 질서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지금 조선인들을 원통하게 만들고 세계 각국이 조선에 대한 정의롭고 평등한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닌 추하고 불의하고 비인도적이고 그야말로 일본의 욕심을 위해 야만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
이들은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이 갖게 된 을사조약이 조선과 일본의 우호적 관계로 체결되었다고 하지만 거짓말입니다. 뒤통수를 치는 강도보다도 더 비열한 짓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지금 한국인들은 아직 조직화되지 않았지만 이제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인 일본의 침략이 종말을 고하기 위하여 하나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일본은 반일정신으로 무장한 2천만 한국인들을 모두 죽여 없애도 조선의 독립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 회견은 감동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각 나라 대표들은 조선외교관을 입장시키지 않았지만 각 나라 기자들은 만장일치로 조선의 독립을 지원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해주고 기사화하였다. 이 연설을 할 때 이위종의 한국 나이는 24살이었다.
일본은 궐석재판으로 이위종에게 종신형을 선고를 했지만 오히려 이위종은 미국에 가서 루즈벨트 대통령면담을 요구하며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려 하지한 루즈벨트는 면담을 거절한다. 러시아로 다시 돌아온 이위종은 독립을 위한 무장 항일운동을 위해 러시아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한일합방이 되자 아버지는 1911년 고종황제에게 유서를 다음과 같이 보내고 권총으로 자살한다.
“고종황제각하 대한제국은 권리를 잃었고 나라는 죽었습니다. 소인은 자살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소인은 오늘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위종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고 혁명의 정신을 더 깊게 한다. 이위종은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넘어서 인류애를 담는 운동 사회주의 운동에 깊게 들어간다.
레닌의 볼세비키 당에 입당하여 러시아 혁명을 주도하고 제국주의 세력과 전투를 벌이며 특히 러시아에 있는 조선인 가운데 칠천 명이 항일운동을 하는데 실제 대장역할을 한다. 이 내용은 러시아에 있는 일본세작들이 일본에 보낸 보고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20대 그의 항일운동은 조선왕조의 복귀가 아니었다. 이위종은 조선정부의 부패, 과도한 세금징수, 정부의 비목민적 행정으로 민중들의 고생이 많았다고 보았고 그런 정치를 ‘구체제하 정부의 잔혹한 정치’라고 하였다. 그는 1919년 8월에 모스크바에서 미국의 자본주의체제를 비판하고 사회주의를 적극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다.
SG워너비의 노래가 좋았기에 역주행도 하고 감성도 주고 있다. 나는 헤이그에 갔던 세 명의 외교관 이 전사들의 진정성과 헌신 그리고 탁월한 국제 감각, 결국 진정한 외교는 주체적이어야 한다는 것과 외교투쟁을 통해서 열강이 우리의 우방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탁월한 콘텐츠가 있는 인물이고 이런 인물들이 조선 젊은이들의 주류였고 중심이었음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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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에 간 청년외교관 이위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