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증언>
마태경 28.1-20
부활의 소식
1. 오늘 읽은 마태경 28장은 수난에 이어지는 주님의 부활을 전하고 있다. 부활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에서 기독교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예수 부활의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 본문은 부활의 첫날에 일어난 일들을 알려주고 있다. 살펴보며 교훈을 얻기로 하자.
2. 부활의 소식은 마리아 두 여인이 안식일이 지나고 새벽에 무덤에 갔다는 진술로 시작된다(1절). 여기서 시간을 나타내는, 문자적으로 ‘안식일이 지난 안식일 첫날 새벽’이라는 표현은 문장으로는 상당히 투박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나오는 ‘삽바톤’(σαββάτων)을 대개 ‘주간’(週間)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한 사유의 전환을 시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안식일을 중시했던 유대교의 날자 계산법은 저녁부터 다음날 저녁까지가 하루이다. 해가 지는 것으로 하루의 시작을 따지는 것인데, 이러한 방식은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적용되고 있다. 그런데 문자적으로 ‘안식일이 끝나고’라는 말로 시작되는 시간적인 표현은 실제로는 저녁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루가 시작되는 시각이나 끝나는 시각이 거의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주간의 첫날이란 또 다시 새 날이 시작되는 저녁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마태경은 그것을 새벽(‘테 에피포스쿠세’ τῇ ἐπιφωσκούσῃ)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교의 날자 계산법을 버리고 새로운 기독교식 시간 계산법을 제시하려고 한 것은 아닌가? 말하자면 주님의 부활을 새 날의 기점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저녁이 아니라 새벽을 새 날의 기준으로 세우려는 시간관념의 변경이 여기서 엿보이는 것이다. 예수 부활을 새로운 기원으로 삼으려는 의도라는 말이다.
3.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전한다(2~6절). ‘당신들이 예수님을 찾는 줄로 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그가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6절의 말씀에는 두 대비가 대구 형식으로 나타나며, 그러한 묘사로 인해 부활의 사실이 돋보인다. 여인들은 무덤 속에 예수께서 계실 줄로 알았다(A). 그러나 예수는 무덤 속에 계시지 않는다(B). 그분은 일어나셨다(B′). 그러니 그분이 누우셨던 곳을 확인해 보라(A′). 일어남(‘에게이로’ ἐγείρω)은 생명이고 누움(‘케이마이’ κεῖμαι)은 죽음이다. 시신은 무덤 속에 있었으나 주님은 무덤 속에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살아계시다!
4. 천사는 여인들에게 가서 전할 말을 알려준다(7절). 그 핵심은 세 마디로 정리된다. ‘예수님은 살아나셨다. 그분은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 거기서 제자들을 보자고 하신다!’ 마태경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제자들을 만나지는 않으신다. 그분은 갈릴리에서 보자고 하신다. 제자들을 만날 곳이 왜 갈릴리인가? 예수께서 사역하셨던 주요 활동지역은 갈릴리였다. 갈릴리라는 지명은 ‘갈릴’이라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둘레 또는 회로를 의미하고, 나아가 국경이나 변경을 의미했는데, 나중에 북쪽 변방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굳어졌다. 마태경은 세례자 요한이 잡힌 다음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위해 카페르나움에 자리를 잡으셨을 때 이사야경을 인용하여 갈릴리 사역을 규정했다: “즈불룬땅과 납탈리땅, 요단 건너 호수로 가는 길, 이방민족의 갈릴리!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고장과 그늘에 앉아있는 그들에게 빛이 일어났다”(마 4.15,16, 개인역). 여기서 갈릴리는 ‘어둠 속, 이방민족의 터전, 죽음의 그늘이 드린 곳’으로 규정되었다. 갈릴리는 죽음의 땅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 실현되었던 부활은 갈릴리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와 같이 이제 죽음의 땅에 사는 존재들에게도 부활의 역사가 실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분이 부활 직후에 제자들을 갈릴리로 초대하신 것은 부활의 역사가 그들을 통해서 죽음의 영역에서 실현되고 확대-재생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일이 제자들이 맡아야 할 사명일 것이다.
5. 여인들은 두렵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마음에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려고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도중에 예수님과 마주했다. 주님이 갑자기 나타나신 것이다. 두 여자는 아마도 놀라서 그분 발 앞에 납작 엎드렸을 것이다(8~10절). 그분의 인사는 문자적으로 ‘기뻐하라’는 뜻으로 파악되는데, ‘기쁘냐’는 의미와 거의 같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가 이 장면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제자들에게는 나중에 저 멀리 변방 갈릴리에서 보자고 하시면서 이 여인들에게는 왜 무덤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바로 나타나신 것인가? 이 의문은 아마도 인간의 영적 상태와 공간적인 거리의 관계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여인들은 아마도 십자가를 짊어진 ‘고통의 길’(Via dolorosa)을 함께 걸어갔고, 십자가 처형장에서 지켜보았으며, 마지막 매장 순간까지 확인했다. 그래서 안식일 기간이 지날 때까지 며칠 동안 마음을 졸이며 여인들은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무덤에 찾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 제자들은 게쎄마네 동산에서 도망한 후에, 카야파의 집까지 따라갔던 베드로의 한 경우를 제외하면, 고난을 겪으시는 과정에서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는 말씀의 기록과 정황적 근거에서 그 영적 상태의 차이를 그렇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6. 한편 무덤을 지키던 군인들은 천사의 출현으로 사색이 되었다가 유대교 당국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그러자 당국자들을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군인들을 돈으로 매수한다. 그리고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갔다는 가짜 뉴스를 퍼뜨린다(11~15절).
7. 마태경은, 주님의 분부대로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그분을 뵈었다고 전한다(16~17절). 여기서 ‘갔다’는 행로의 표현은 본래 그들이 떠나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순례길 같은 여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 예수님을 만난 장소가 산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갈릴리에는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어떤 언덕이나 고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경문은 그 공간을 ‘산’으로 표현하고 있다. 거기서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께 경배를 드렸다고 한다. 예배를 드릴 장소가 ‘산’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분은 주님(‘퀴리오스’ κύριος) 곧 예배를 받으실 분이시다.
8. 마지막에 전해지는 내용은 주님의 분부다(18~20절). 그분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주님의 말씀에서 제자가 되는 길은 두 기둥 또는 두 요소로 나타난다. 첫째는 세례이고, 둘째는 교육이다. 세례는 교인이 되는 입문이다. 그런데 입문하기까지 매우 중요한 요소는 주님에 대한 고백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듯이, 이제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주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고백하여야 한다. 그분은 세상을 속량하신 구세주, 그리스도이실 뿐만이 아니라, 부활하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 바꾸어 말하면 그분이 세상에 오시면서 받으셨던 인성(人性)을 본래 하느님 품에서부터 지니셨던 신성(神性)에 통합하신 분이다. 예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음의 분부는 이렇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무엇이나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것이다. 여기서 가르친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전수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유의해야 하는 것은 명령하신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도록 해야 하고, 그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살면서 행하도록 살피고 도와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 명령을 받은 이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지도자의 책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세례를 받은 모든 이들은 이 두 사항을 항상 명심해야 하고 또 스스로 수행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할 것이다.
9. 부활의 본문에서 우리는 위와 같은 뜻을 배울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부활을 대하는 태도를 점검해 보고자 한다. 본문에는 주님의 부활을 대하는 네 부류를 볼 수 있다. 첫째로 기쁨을 가지는 이들이다. 무덤에 찾아갔던 여인들이 그들이었다. 이 여인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가장 슬퍼했던 이들로 여겨진다. 시신이라도 잘 모시고 싶었던 모습에서 그것은 분명하다. 이 여인들은 고난의 현장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기쁨이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둘째로 대제사장들과 군인들이다. 그들은 부활의 소식을 거짓으로 만들어버렸다. 대제사장들은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꾀를 냈다. 군인들을 매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부활의 소식을 가짜로 만드는 작태를 드러냈다. 셋째는 의심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제자들 가운데 있었다. 넷째는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듣고 그 소식을 받아들여서 그의 제자가 되는 이들이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이들은 부활의 기쁨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던 이들은 부활의 소식 역시 거짓으로 만든다. 또 믿는 자들 가운데서도 여전히 주님의 부활에 의심을 품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마태경의 본문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현실 가운데서도 넘친다. 그렇지만 그 소식을 받아들여 제자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그러한 이들이 믿는 자들의 주류를 이룬다. 이것 또한 우리 현실이다.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이들과 그 소식을 가짜로 만드는 이들, 제자들 가운데 있지만 여전히 의심하는 이들과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수행하는 이들, 부활을 대하는 태도는 이렇게 구별된다.
10.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근에 나무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다. 나무들이 씨를 퍼뜨리는데, 발아되는 것은 열에 하나가 되지 못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발아도 갖가지다. 어느 것은 바로 싹을 틔우지만, 어떤 것은 몇 년씩 혹은 수십년씩이나 땅속에 묻혀있기도 한다고 한다. 씨앗 하나 틔우기가 그렇게 어렵다고 한다. 싹이 나고 잎이 돋아도 생장하기 위해서는 또 갖가지 환경에 적응해야 하고, 그래서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우리가 말씀에서 나무들 이야기를 교훈으로 삼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물질적 현실 속에서도 나무의 교훈은 적지 않다. 죽어있는 것 같지만, 언제가는 살아나서 ‘낙낙장송’으로 굳굳하게 성장하는 신앙인들, 그러한 공동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부활절에 가지게 되었다. 우리 주님이 나 자신 안에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다시 살아나시는 일이 곧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가지는 다짐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