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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풍류탑골 (1)
1.'모반의 무대'
가게 안이 맵다. 사람들이 맨몸에 그리고 옷자락에 묻혀오는 최루가스 때문. 벌써 세 팀이 안방과 거실 그리고 칸막이를 건성으로 쳐놓은 룸으로 나뉘어 가득 찼다.
"하 자식들 겁나게 쫓아 오데"
"말도 마 그 자식들 사람 죽일라고 그 지랄탄을 쏘는 것인지 눈이 안보이고 숨이 막히더라고"
"고만 허고 술이나 마셔. 최루탄엔 술이 약이랑게"
군데군데에서 4.13호헌조치 때문에 일어난 시위 무용담이 꽃핀다. 그러나 나는 안다.
저 신나는 이야기소리가 잠시 후면 잦아들고 고함소리 욕설 그리고 그 모든 소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터져나오는 노래소리로 뒤바뀔 것이라고. 그때쯤 한쪽에선 술상에 고개를 처박거나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이 든 사람들도 출현한다는 것을.
'야 복희야 술 가져와' '여기 술 떨어졌는디' 등 표현은 각각이지만 나를 부르는 소리에 왔다갔다 하다보면 오늘 하루도 갈 것이라는 것을. 술을 밥보다 더 좋아하던 사람들. 술상 앞에서 처음엔 현인이다가 점차 지사가 되고 느닷없이 주정꾼이 되던 그래서 아름답던 사람들. 참으로 인간다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 알콜로 혁명적.낭만적 순정을 또다시 맑디맑게 닦아내던 사람 사람들.
거대한 노르웨이산 카페리호지만 높은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누구든 그러하겠지만 하얀 드레스를 입은 나 또한 마음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선상에 혼자 서있기도 부담스러운데 하객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넬 때면 그 흔들림은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내 마음의 진동은 결혼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불과 한달 전까지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들, 한 시대의 격랑이었던 얼굴과 말들이 뱃전에 다가와 부딛치고 있었다.
남들은 우리의 결혼식을 깜짝 이벤트라고 부르겠지만 제주행 고속페리호 위에서 시작하려는 우리의 결혼식은 식장이 없어 물색하다가 찾아낸 임시변통이었다.
서로 안지는 1년이 넘었지만 결혼을 결정한 것은 불과 한달 여. '그러므로 결혼식 그 자체가 깜짝 쇼나 다름 없었다.
결혼식의 풍경도 선명하지 않다. 주례의 당부 말씀이 얼핏 떠오르고 이원규 시인의 축시가 낭송되고 박선욱 시인의 축가가 불려지고 난 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사람들과 어울려 인사를 주고받은 뒤 우리는 일주일 간의 지리산 종주를 신혼여행으로 정해 구례 화엄사로 떠났다.
그렇지만 결혼식 도중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치 식구들 처럼 오가며 늦은 밤을 세웠던 한 시대 풍운아들의 풍류와 울분이 명멸하는 밤하늘의 별처럼 스치고 있었다.
고은 김지하 신경림 황석영 백낙청 염무웅 이영희 이문구 송기원 이시영 김성동 김주영 김원일 조정래 이문열 김사인 황지우 이영진 이재무 강형철 박철 이문재 고정희 신경숙씨 등의 문인은 물론 김명곤 김민기 임옥상 강요배 임진택 정태춘 나병식 김상현 박석무 이해찬 손학규 이철용 김태경씨 등등. 통일을 위해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문익환 목사와 모시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에 '유폐' 시키고 홀로 괴롭게 술병을 기울이던 허문도씨 등등. 시대의 내로라 하는 문화인들과 정치인들의 갖가지 풍경과 말들이 겹쳐지고 있었다.
2..'강도 시인' 김남주
나는 애써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는 모두 지워야할 이름들이었으므로. 십년 세월동안 탑골이라는 이름으로 그 사람들 옆에서 술시중 들며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자체가 못내 즐거웠지만 이제는 나도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 하고 있지 않은가.
결혼 후 난 무심하게 살았다. 전남 신안군에 딸린 한 섬에서 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 가능하면 흙과 더불어 소박한 섬 아낙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지금은 내 안에서 불과 한달 남짓이면 태어날 새로운 생명이 힘차게 뛰놀고 있다.
그러나 가끔 신문을 보거나 TV를 보다가 그 사람들과 옛날 이야기를 떠올리며 웃기도 하다가 가슴이 아파지기도 한다. 울고 웃으며 지냈던 세월들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살게된 아프고 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감히 붓을 들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야말로 살아 있는, 피가 도는 80년대 정신사라는 말도 해주셨지만 속 깊지 못하고 생각마저 짧은 내가 감히 기억을 추스르려 한다.
당시 탑골은 '자실' 이라는 약칭으로 불렸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들의 단골술집이었다. 내가 가게를 맡은 것이 1986년 봄이었으나 그 이전에도 김지하 시인의 석방운동을 논의하고 또 석방 이후에는 김지하 시인이 자주 다녔던 그런 가게였다.
인연이란 묘해서 처음 그 가게를 소개받은 순간 나는 이 가게야말로 내가 운영할 곳이라고 결심하고 말았다. 낙원상가와 탑골공원 돌담 사이의 후미진 골목에 다 떨어진 우중충한 건물, 30평도 채 못되는 공간이 시대의 아픔을 나누는 멋진 사람들의 '아지트' 로 다가왔다.
물론 탑골에는 그냥 술 마시러 오는 사람도 있었고 출판기념회가 열리는가 하면 모종의 비밀 모임도 이루어졌다. 당시 틈만 나면 데모요 성명서에다 체포되고 감옥에 가는 사례가 빈번했기에 마음 편히 그런 모임이 이루어졌을 리 없다.
그러나 그런 일들의 자세한 경과나 전말에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게는 그 곳에 왔던 사람들의 재담이나 그러그러한 일들의 뒤에 남은 재미난 에피소드가 소중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 인물과 시대의 아픔도 자연스레 떠오를 것 아니겠는가.
지금은 개나리.진달래의 꽃 천지 광주 망월동 묘역에 잠들어 있는 꽃 같은 김남주시인. 1988년 이후 94년까지 김남주 시인은 우리 가게의 진정한 단골이었다. 물론 처음 내가 가게를 열었을 때 김시인은 '남민전 전사' 로서 재벌집을 털다 잡혀 감옥에 있었다.
석방 이전까지 시인을 위해서 석방촉구의 밤이니 일일주막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 나는 이 시인이 상당히 과격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10여 년을 감옥에 있으려니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석방 이후 직접 보게되었을 때 나는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촌에서 갓 올라 온 농촌 총각이었다. 키는 작달막했고 얼굴은 거무데데했으며 말소리는 너무 조용하였다.
석방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조용한 출옥환영회가 탑골에서 열렸다.
이시영.송기원 시인이 주도한 모임이었는데 이경자.유시춘.윤정모.이혜숙.김성동.안종관.정희성씨 등이 모였다. 소설가 이경자씨가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어이 강도 시인! 그렇게 강도를 해서 얼마나 벌었나?" "벌기는 뭘 벌어. 망보다 그 양반이 소리질러서 도망친 것인데!"
"도망가서 한 두어달 있다가 체포됐지!" 일방적으로 놀리는 말을 이 사람 저 사람이 하면서 웃고 웃기고 있었는데 김시인은 별사람 다 봤다는 듯이 일체 대꾸가 없었고 속 좋은 웃음만 짓고 있었다.
3. 시인의 노래
그러나 약간의 비아냥거림을 주고받으며 서로 밉지 않게 힐난해대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김남주 시인이 감옥에 들어간 1979년도엔 유신시대의 시퍼런 칼날이 춤추던 때인지라 석방을 말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러나 84년 이래 얼마간의 유화국면이 진행되면서 재창립된 자실을 중심으로 석방운동이 시작되었다. 김시인이 발표한 시를 모아 '진혼가' 라는 시집을 발간한 것이 계기가 됐는데 처음엔 그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너무 과격한 주장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시집 발간 이후 그의 시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가해지고 민주화 역량도 커지면서 그에 대한 석방운동은 갈수록 힘을 얻고 있었다.
정부쪽 입장은 확고했다. 김시인이 정치사범이 아니고 형법상 강도였다는 것이었다. 엠네스티나 국제 펜 클럽을 통해 항의 전문과 석방촉구서가 제출될 때도 답은 매번 똑 같았다.
그 사람은 시인이 아니라 강도였으며 그것도 재벌에 칼을 들이댄 흉악한 죄인이라는 것이었다.
술자리에서 약간의 놀림 말을 한 것은 그동안 그런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알리는 것과 동시에 김시인이 평생 남의 집 빗자루 하나 훔칠 것 같지 않게 생긴 데 대한 느낌 때문이었으리라.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서로 탐색전이 끝났다는 듯이 노래가 시작되었다.
노래라니까 생각난다. 김시인의 노래는 남인수가 부른 '고향의 그림자' 였다. 그가 출옥하기 전에도 후배문인들이 김시인을 기리며 부르는 노래였고 나온 후에는 그가 불렀다. 그가 영면한 후에도 그 노래는 정녕 김남주의 노래였다.
"찾아갈 곳은 못되더라 내 고향 첫사랑 떠난 고향이기에" 로 이어지는 그 노래는 이영진.김형수.이승철.박철.강형철 등등 후배 문인들의 버전이 있는데 누가 불러도 그 노래는 듣는 사람들을 숙연케 했다. 아니, 숙연케 했다라기보다는 술 마시게 했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시위가 한창일 무렵 한 쪽에서 그 노래가 흘러나오면 어느쪽에선가 따라하는 이가 있었고 대개는 김시인에 대한 연모나 그리움으로 한 덩어리가 되게 했다.
김시인이 잡혀간 뒤 고향의 동생들이 빨갱이 집안이라는 이유로 결혼이 깨지고,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등 엉망이 되어버린 사정들이 겹쳐지면서 그 노래는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들에게 고향은 몹쓸 설움을 주는 곳이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킨 것은 아니었을지.
어쨌든 그날 나는 김시인의 오리지널 '고향의 그림자' 를 들을 수 있었다. 약간 비스듬히 선 자세에서 눈을 감고 부르는 그 노래는 아름다웠다.
그날 김시인은 '항구의 에레나' 라는 노래에 이어 '고향의 그림자' 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왜 젊은 시인들의 심금을 울렸는지 알 것만 같았다.
시위가 벌어지거나 행사가 끝날 무렵 그 노래가 나오면 모두 따라부르던 노래, 부르다가는 마음이 심란해져서 누군가에게 시비를 걸고 마침내는 싸움으로 이어지던 뇌관과 같은 노래. 이야기가 다소 무거워졌다. 그러나 탑골은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바탕 일하고 난 뒤 주어지는 푸짐한 밥상처럼 걸죽한 육담도 꽃을 피웠고 때로 터무니 없는 주사(酒邪)
가 있어 가끔은 황량해지기도 했다.
걸죽한 육담! 백기완 선생과 천승세 선생의 '만주벌판, 독립운동 시절' 운운하는 대륙적 육담도 그렇거니와 그중 천하 제일은 소설가 황석영 선생의 그것이 아닐까.
4. 육담 대가 황석영
"야, 복희야 너 닭 이야기 알아?"
"뭔데요?"
자리에 앉자마자 술 주문도 하지 않은 채 황석영 선생이 불쑥 물어왔다. '응, 좌중의 긴장된 분위기를 일단 눙치려는 육담이겠거니' 하며 받아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말이야, 혼자 외롭게 지낼 때였는데, 시골이란 게 처음 얼마간 즐겁지 지겨운 것이거든. 마음의 안정을 주는 곳 어쩌구 하잖냐, 그런 놈 며칠만 살아보라 해. 다 나자빠지게 돼있어. 그런데 그 양반 봄 날 몸은 근질근질한데 어디다 몸을 풀 데가 있어야지. 그래서 궁리하는데 마침 맴생이란 놈 있잖냐, 도시에서는 염소라고 하고. 그 놈이 좌우로 찍 갈라진 뭐시기를 하고 풀을 뜯어먹고 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참을 수가 없었던 게야.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뒤엔 이 사람이 그 염소 옆만 지나가면 계속 메에에햄 메에에햄 울어대는 거라. 남이 안 봤으니 다행이지만 이 양반, 속으로 무척 쑥스러웠다는 거야. "
"그래서요?"
"그 뒤론 이 사람이 뭔 일이 있어도 그 염소 있는 곳은 피해 다녔다는 거지. "
"그게 끝이어요?"
"그 다음이 죽여. 더 들어봐. 그 뒤로 염소보기도 미안하고 그따위 짐승들도 뭘 할 줄 안다는 걸 깨닫고 이 사람이 한참 근신했다는 거야. 그런데 그게 어디 맘대로 되냐. 그게 맘대로 됐으면 벌써 득도했게. 그 뒤로 잘 참았는데 어느 날 닭을 보다가 그만 이 사람이 참을 수 없었다는 거야.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나자 이놈의 닭들이 그 사람만 보면 계속 꼬꼬댁 꼬꼬댁 울면서 자기한테로 왔다는 거야. "
이쯤 되면 그 자리가 어떤 자리든 그야말로 웃음의 바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어느 정도 웃음이 가라앉으면 다시 얘기는 시작된다.
"나도 그 얘기 듣고 되게 재미 있었거든. 그래도 의심이 생기는 거야. 어떻게 닭한테 그 모진 일을 하느냐고, 그게 어디 가당찮은 일이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그 사람이 뭐라고 한 줄 아니?"
"뭐라고 했는데요?"
"야, 닭이 알을 낳잖냐!"
그쯤이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에선 눈물이 비척거리고 뒤로 넘어져 방바닥을 두드리고 있기 일쑤다. 어디서 그 많은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하기사 황석영선생의 입을 통하면 어떤 얘기도 새롭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라도 다시 새롭게 번안되어 싱싱한 생선처럼 퍼덕거린다.
또 이야기를 할 때는 제스처가 어찌나 풍부한지…. 물론 왼손을 주로 사용하며 흥겨운 판소리 한 대목 하듯 멋을 부리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로맨틱하다. 그래서 밀입북 때 김일성도 황선생의 재담을 즐겼다는 것 아닌가.
하지만 황선생이 와서 그런 재담을 할 기회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실제로 탑골에 그 분이 왔을 때는 많은 일들이 따라왔다는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자실이 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된 1987년 무렵에는 젊은 문인들을 '포섭' 하러 많이 왔다. 89년 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
이 결성될 초기에는 그야말로 우리 나라 재야문화인의 야전 사령관이라 할 만큼 많은 사람들과 함께 왔다.
그런 모임이 있고 난 뒤엔 굵직굵직한 일이 이뤄져 당국을 긴장시켰으니 재담이나 육담은 그런 신산스런 일들을 넘어가는 청량제 아니었는가 싶다.
그러나 황선생은 그런 재미난 이야기말고도 노래의 천재였다. 어디서 그 많은 가사들이 어김없이 불려나와 가락에 얹혀지는지 같이 노래를 불러보면 감복할 따름이다. 그런 재담과 노래 가락이 30대 초반에 '장길산' 이란 대작을 낳지 않았나 생각한다.
5. 공개된(?) 밀입북
울음이란 무엇일까. 탑골에서 사람들이 흘렸던 눈물을 모두 모으면 그들이 마신 술 보다 더 많을까. 눈물 때문에 생긴 일들은 또 무엇일까. 아니 눈물과 함께 삼킨, 제 각각 가슴 속에 묻을 수밖에 없는 서러운 사연들은 얼마나 될까. 그러나 거기에 들어갈 것이 또 있다.
웃으면서 흘린 눈물 말이다. 황석영 선생은 분명 웃으면서 황량한 시대와 자신의 삶에 아프게 울고 있었다.
"쓰다만 시 때문에 얼굴 찡그리고 있는 김사인이나 안되는 소설로 폼이나 잡으면서 인상만 찡그리고 있는 김영현이! 그만 집에 가서 애기나 봐. 자아 자, 여기는 오줌을 누면서 힘껏 싼다고 싸는데도 구두코를 적시기 일쑤요, 결정적이다 싶은데도 고개 숙인 순이처럼 다만 이슬방울 입에 물고 처마 밑에 쪼구라져 앉는 고것 때문에 한숨 쉬어본 아랫도리 부실한 사람들만 남아. 자, 내가 아주 기가 맥힌 소식을 전해줄테니. "
황선생의 뱀장사가 시작되기 전의 서설이다. 그 자리에선 내로라하는 원로든 신출내기 신인이든 모두 동급이다. 거침없이 입방아에 오르고 기약 없이 추락한다. 좌중 인물들과 그들의 작품이 촌철살인의 비평적 사설로 오르내린다. 그렇게 좌중이 모두 뱀장사 사설의 주인공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뱀장사가 시작될 때 황선생은 허리 벨트를 풀어 오른 손에 쥐고 왼손으론 그 벨트 끝을 훑으며 마치 뱀을 쥐고 있는 것처럼 했는데 처음 본 사람은 그 폼만 봐도 신이 났다.
게다가 목소리는 단전 끝 어딘가에서부터 기어올라와 토해지는, 그래서 약간 가래 끓는 소리 같기도 하고 불량한 사람이 윽박지르는 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를 내곤 했는데 그 소리 앞에선 모두 '땅꾼 앞의 뱀' 이었다.
황선생은 문인들 뿐 아니라 화가.음악가.무용가등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과도 함께 곧잘 탑골을 찾았다.
그래서 뱀장사로 그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며 김윤수.박범훈.채희완선생 등 문학판은 물론.그림판.음악판.춤판 등을 엮어 민중의 예술, 현실과 삶 속의 예술을 위한 민족예술인총연합회를 결성해내기도 했다.
"날이면 날마다 파는 것이 아녀, 기회라고 생각할 때 과부 감동하고 그것 움켜쥐듯 꽉 움켜줘. 지 에미를 잡아먹은 살모사, 꽃처럼 아름다운 화사, 넘의 집 고구마 캐먹고 능글능글 걸어가다가 도라무깡(드럼통)
에 물 받아놓고 목욕하는 이웃집 처녀 알몸을 훔쳐보는 놈처럼 능글능글 거무테테 시커멓기 짝이 없는 능구랭이, 먹어봐야 아무짝에도 소용 없지만 그래도 이빨 쑤실 꺼리는 된다는 물비암, 이 개구리 저 개구리 이 비암 저 비암 모두 잡아먹고 이제는 칠십 먹은 노인 아랫거웃처럼 허여진 백사. 자 골라 골라 잡아, 형편 따라 골라 잡아. 정말 될까 먹으면 될까 의심하기 조조 같은 사람, 돈 한푼에 손가락 발동기 옆에 나락처럼 떠는 사람 고런 사람은 빨리 집에 가고 자 어서어서 골라 잡아, 잡기만 하면 다 일러줄텡게…. "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뱀장사의 사설이 할 때마다 달랐던 것이다. 때로는 전 대통령 등의 흉내를 내며 독재를 꼬집고 당시의 심각한 시사문제를 시원스레 희화화하기도 했다.
때로는 그 시 잘썼더라고도 하고 이러저러해 그것은 소설도 못된다는 문학비평도 뱀장사의 사설로 담아냈다.
그 재미난 사설이 사라지고 얼마 뒤 신문에는 대문짝만하게 황선생의 밀입북이 보도됐다. 그러나 나는 안다. 아무도 몰래 입북한 것이 아니라 입북하고 싶은 심경을 술좌석에서 알게 모르게 털어놓고 또 요로에 있는 누구누구에게 밝혔을 것이란 것을.
천하제일의 황선생의 재담을 들으며, 그 엉성한 곱사춤을 보며 우리는 웃은 것이 아니라 울었다.
누군가 말했다. 웃음이나 울음은 얼굴만 다르지 그 꼬리는 같다고, 어떤 신이 둘을 화해하게 하려다 안되어서 꼬리를 붙여놨다고. 그러고 보니 밀입북전 황선생이 보여주던 쓸쓸함, 남과 북 사이에서 갈곳 없는 유랑의 모습도 떠오른다.
6. 문인들의 '누이'
문인들과 어울려 있는 동안 황석영 선생은 결코 쓸쓸한 사람이 아니었다. 걸걸한 육담이 지속되는 순간 그 자리는 옛날 장터만큼이나 풍성했고 재미가 넘친다.
때로 곱사춤을 추거나 동료.후배문인들의 흉내를 내면서 그 사람들의 내면을 꼬집는 모습은 천하일품이었다. '세수 안한 사슴' '침 맞은 오랑우탕' '허물 덜 벗은 구렁이' 등의 별명을 붙이면 그 해당 문인의 모습이 영락없는 그 모습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들어 소설가 윤정모씨가 동석한 자리에선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뒷날 그것은 이혼한 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앙금 같은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 날엔 황석영 선생은 얼핏얼핏 진득한 회한이랄까 쓸쓸함을 비추곤 했다.
남을 많이 웃기는 사람들이 대개는 지독한 슬픔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는데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윤정모씨를 생각하면 괜히 마음이 푸근해진다. 문인들끼리는 서로 싸우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다지만 탑골에서 만난 윤정모씨는 참으로 넉넉한 언니였다.
선배문인에 대한 예우는 물론 후배문인들에게도 넉넉히 정을 베풀어 나는 그런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다고 여긴다.
싸움이 났을 때도 어느 한편에 서지 않고 둘 다 다독이는가 하면 술 취해 잠든 이에겐 모포를 꺼내 덮어주기도 했고 새벽녘 집으로 돌아갈 때는 반드시 차비를 넣어주곤 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잘못될까봐 택시운전사에게 여러 번 부탁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 남편의 차에 후배들을 태워 보내기까지 했다.
키가 매우 큰 윤씨의 남편은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수산물 경매일을 하고 있었는데 다음날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도 윤씨의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탑골에 대해 분에 넘치게 아름답게 말씀하시는 분이 많은데 윤씨가 동료나 후배들에게 베풀어주던 정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윤정모씨를 처음 만난 것은 용인이었다. 당시 나는 작가 송기원.영화감독 장선우.신륵사 주지이던 원경스님과 함께였는데 송기원씨가 갑자기 들를 데가 있다고 해서 간 곳이 용인의 황새울이었다.
집에 다와 갈 때쯤 만날 사람이 "고삐" 의 작가 윤정모씨라는 것을 알고 나는 약간 당황했다. 그 즈음 반미문제를 소설로 담는 일은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었는데 그런 소설을 쓴 사람이니 다소 부담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가구 되지 않는 마을의 한 구석에서 윤정모씨를 만났을 때 그것이 기우였음을 금방 깨달았다. 윤정모 씨는 작달막한 키에 수건까지 두른 모습으로 상추를 솎고 있었는데 우리가 다가가자 소쿠리를 던져놓고 "기원이 니 웬 일이고" 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냥 왔어, 인사해 원경스님이고 여기 '접시꽃 당신' 영화 찍은 장선우씨고 이 아가씨는 탑골 하고 있는 복희!" 송기원씨가 우리를 소개했다.
"잘왔다 고마, 밥은 묵었나? 내가 직접 밭에서 딴 것으로 묵자" 며 앞장 서는 모습이 우리가 오랫동안 만나던 사람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고 나는 금방 윤정모씨에게 반해버렸다.
그 뒤에 탑골에서 만났을 때 윤정모씨는 내게 가장 편한 언니가 되었고 나는 순한 동생이 되었다.
흙 가까이 살며 쓰는 정직한 글, 때로는 사납고 거칠다는 생각도 없지 않지만 살아가는 일에 가장 열성이고 진중한 사람, 그러나 동료나 후배들에게 따뜻한 고향의 누이같은 사람. 이것이 내가 받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해야 한다. 그는 정말 부지런하고 뜨거운 사람이었다. 89년 현대중공업 파업사태가 크게 일어났을 때 동행하면서 본 모습이다.
7. 윤정모의 작가정신
울산에서 노사분규가 났다는 소식을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 알고 있을 때와 직접 현장을 본다는 것은 사뭇 달랐다.
돌이켜보면 내가 윤정모씨와 함께 현장에 갔다온 것이 참으로 행운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처음부터 계획된 일은 아니었다. 1989년 특히 황석영선생 방북사건이나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이 있은 후에 사회는 다소 어수선했다.
그 해 2월말 노태우대통령 취임식때 발표한 선언이 남북간 긴장완화와 교류 증대를 내용으로 하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 사회는 금방이라도 획기적으로 변화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두 사건을 정점으로 급격하게 어두워져 갔다. 더구나 당시 남북작가회담 시도 등으로 문인들이 대거 체포.구금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탑골은 그런 저런 영향으로 어수선했다.
그 즈음에 윤정모씨가 같이 바람이나 좀 쐬러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따라나섰다.
울산으로 가는 기차가 출발할 때쯤 내가 잘못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윤정모씨는 그곳에 가서 '투쟁현장' 을 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며 이 사회가 노동자들의 힘에 의해 크게 변할지도 모른다며 다소 흥분하고 있었다.
막상 그곳에 도착해 들어가려했으나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입구의 분위기가 하도 살벌해서 나는 속으로 그냥 물러서는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윤정모씨는 입구의 책임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주장했다.
'고삐' 라는 소설을 쓴 작가이며 '현대의 노동자들이 싸우는 모습을 취재하여 글을 쓰고 또 노동자의 입장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왔다' 는 얘기를 했다.
얼마 후에 우리는 엄청난 현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쇠파이프를 들고 있는 모습이나 작업할 때 쓰는 많은 도구들이 무기로 변했다.
골리앗 크레인도 볼 수 있었다. 군데군데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는데 비닐이나 신문지를 덮고 자는 이도 있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꼭 이렇게 싸워야만 되는 것인지 나는 혼란스러웠다. 무엇보다 그들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추운데서 웅크리고 자는 것이 눈물겨웠다. 나는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적극 그들과 얘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다만 그 풍경이 서럽다는 생각을 했고 빨리 원만히 해결되기만을 빌었을 뿐이다.
그러나 윤정모씨는 달랐다. 그 사람들의 잠자리는 물론 식사는 어떻게 하며 투쟁의 전망은 어떠하고 밖에서 도울 일은 무엇이냐며 세심하게 묻곤 했다.
주변의 풍경을 간단히 스케치도 하고 책임자급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격려금이라며 봉투를 전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작가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윤정모라는 사람이 정말 좋은 작가라고 느꼈다. 그 시대 문제의 중심으로 찾아가 보고 느끼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려는 의지와 실천력을 지닌 것이 너무나 존경스러웠다.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이 세상에 여러 작가나 시인이 있지만 진짜 작가는 바로 이런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윤정모씨의 글은 빠짐없이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너무 사적으로 흘러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가 탑골을 하는 동안 때로 술꾼들때문에 힘들고 어렵기도 했지만 결국은 배우고 느낀 것이 더 많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나는 감사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단순한 술집 주인에서 조금은 세상의 진실이 어떻게 탄생하고 작동하는 것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을.
8. 酒黨들의 천국
술버릇이란 것이 있다. 술을 마실 때나 술을 마신 후의 모습이 일정하게 반복될 때 쓰이는 말이겠다.
술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다 보니 나름대로 술꾼을 구별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나는 술꾼들을 주정파.한량파.실속파로 나눈다.
실속파는 하기 어려운 말이나 부탁을 접대라는 핑계로 술을 나누면서 은근슬쩍 소기의 목적을 이루는 부류다. 이런 사람들은 쓸데없이 심부름을 시키고 괜히 큰소리도 치곤 한다. 출판사에 갓 들어간 편집장이나 직원들이 대체로 이런 부류에 속하는데 탑골의 입장에서는 그저 평범한 고객이다.
한량파들은 탑골에 오면 늘 환영을 받는다. 술을 마시되 지나침이 없고 점잖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용히 돌아가는 사람들인데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
가끔 흥에 겨워 노래를 불러도 흘러간 옛노래를 순서에 따라 학예회 하듯 돌려 부르면서 서로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말릴 필요도 없다. 그러고 보면 이들도 가요파와 은근파로 나뉠 수 있겠다.
탑골에서 아무리 은근한 이야기를 해도 그럴 만한 대상이 없으니 그만이다. 기껏해야 갓나온 음담패설을 스무고개 하듯 하다가 마는 정도다. 가끔 나누는 이야기는 고담준론으로 비약하기도 하고 심해야 '그 녀석' '그 자식' 정도이니 듣기가 그다지 거북하진 않다.
그러나 역시 문화예술계 술꾼의 대종은 주정파다. 이 주정파는 실신파와 통곡파. 주사파로 다시 나뉜다.
실신파는 마셨다 하면 끝내 실신, 가사상태가 되고 운구조가 동원돼서야 술이 끝나는 참 실신파와 소설가 현기영선생처럼 마셨다 하면 얼마 되지 않아 장소.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고개를 꺾고 잠을 자는 '꾸벅파' 가 있다.
통곡파도 두 가지 부류다. 혐오성 통곡파와 연민성 통곡파다. 술을 마셨으면 기분을 내고 놀 일이지 왜 우는 것일까. 그런데 그 울음이 아름다워 함께 마시던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이가 있는가 하면 울기 시작하면 일행으로부터 빨리 집으로 보내야겠다는 말을 듣는 이도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다지 큰 문제가 없다.
이 각박한 세상에 울 일이 있다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씩씩하게 사는 사람들이 무섭기조차 하지 않은가.
그러나 주사파(酒邪派)
에 이르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소신성에 음모성. 무대책성 주사파까지 있다. 술을 마시다가 비위가 상하는 일이 생기면 소신을 가지고 주정을 해대는 '소신성 주사파' 는 그 소신을 만족시켜주면 잠잠해진다.
그러나 '음모성 주사파' 는 안에 숨겨둔 불만이나 원한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대책을 세우기도 난감하다. 이름 밝히기는 뭐하지만 그런 예술인들도 많다. 어쨌든 이쯤 되면 가끔 빈 병이 탁자 위에 온전히 서있지 못하고 마른 안주로 내놓은 말린 무화과나 오징어가 술에 젖기 일쑤다.
하지만 여기까지도 약간의 소란이 있을 뿐 한 두명의 의로운 어른에 의해서 얼마든지 진압이 된다. 그러고 나면 오히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고 술맛도 다시 나는 듯 하다.
그러나 어떤 어른도 소용 없고 심지어 실내에 걸려있는 그림마저도 그냥 둘 수 없다는 듯이 이리저리 뛰며 난장을 피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멀쩡하던 사람의 머리에서 '빨간 물' 이 나는 것을 보고서야 '광기' 를 멈춘다. 이런 '무대책성 주사파' 를 만나면 그렇게 하룻밤이 길게 느껴질 수가 없다. 아니 솔직한 말로 질린다.
먼저 우리 실신파의
9'만다라'의 슬픔
탑골을 하는 동안 가끔 나도 모르게 따라 울게 만든 사람이 있다면 소설 '만다라' 의 작가 김성동 선생이다.
김선생은 대개 많아야 대여섯 명 정도의 사람들과 함께 왔는데 별로 말을 안했다. 일행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며 그야말로 단아한 선비처럼 술을 마시곤 했는데 뒤에 보면 늘 가장 많이 취해 있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로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복희야 너 알지" "너는 알지, 너는 알잖여? 올래! 몰른단 말여?"
갑자기 건네는 말에 처음에는 무슨 일을 안단 말인가 생각하다가도 따뜻하게 손을 쥐는 그 순간 나는 아무 말 못했다. 먼 허공을 향해 기약없이 달려가던 시선을 거두어 내 눈을 바로 보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네 알아요" 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면 "그려, 술 한잔만 혀" 하며 따라주는 그런 술에 두 잔이면 쥐약이요 석 잔이면 사약인 나의 주량은 여지없이 묵살되곤 했다. 그래 그랬다.
김선생이 쥐어주는 손은 고향 같았다. 아니 그는 너무나 따스한 오라비였다. 그때쯤이면 나도 모르게 내가 슬퍼졌고 또한 김선생의 대책 없는 순결성이나 개인사가 지닌 비극적 삶이 자꾸 마음으로 밀려와 서러웠다.
불과 네 살 때 6. 25로 아버지와 큰 삼촌이 우익에게, 면장을 지내던 외삼촌이 좌익에게 학살당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때가 6월 어름이리라고 짐작은 하지만 어느 날인지 알 수 없어 생신날에 제사를 모시는 비극적 삶이 고스란히 얹혀 왔다.
이후 할아버지의 무릎 밑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백수문이라 일컫는 천자문은 물론 통감.명심보감.소학.대학을 거쳐 맹자까지 배웠던 가난한 천재의 삶과 출가 환속으로 이어지는 극단의 외줄타기가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했다.
또 '만다라' 이후 이런 저런 실패에 가까운 소설가의 삶이 내겐 아릿한 슬픔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김선생은 대개 김사인.임우기.이은봉.이재무.김영현.이영진. 강형철 씨 등 젊은 문인들과 함께 오거나 이시영.송기원.정희성.안종관 씨 등의 비슷한 연배의 문인들과 함께 왔다.
또한 신경림.고은.송기숙.염무웅.김윤수씨 등 선배문인들과 오곤 했는데 가끔은 원경스님이나 나병식 풀빛출판사 사장 혹은 민예총에서 일을 보는 김용태 사무총장 등과 함께 왔다.
특히 풀빛출판사 나사장이나 김용태씨와 함께 올 때는 바둑으로 거의 밤을 세웠다. 만원이나 2만원 정도가 오가는 판이었는데 술값은 아까워하지 않았지만 바둑을 두고서 잃는 돈에는 매우 엄격했다.
'문단의 국수' 였으니 양보가 있을수 없다. 그러다가 밤을 새운 날은 아침에 북어국을 끓여서 같이 먹곤 했는데 입맛이 까다로와 일반 음식점에서는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일테면 집에서 먹는 밥이거나 그에 방불한 그 무엇이 아니면 전혀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선생은 술을 마셔도 표정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분명 많이 취했는데도 다른 사람이 보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처음 보는 사람이거나 본인이 인정하지 않는 작가나 시인에게는 매우 냉정했다.
갑자기 "그래 무슨 소설을 썼는고" 라거나 "시를 증말로 쓰긴 썼어" 라고 물으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매우 당황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할 때 그 표정이나 어조가 거의 흐트러짐이 없었으니 처음 보는 사람들은 오해를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다가 술을 마셔도 오랜 산문(山門)
의 생활에서 익힌 데로 가부좌를 틀고 술을 마셨으니 다른 사람이 오해를 할밖에. 그러나 그즈음이면 김선생은 이미 실신상태나 다름 없다.
10. 릴레이 대작
그러나 소설가 김성동선생이 실신한 모습은 여느 술꾼들과는 달랐다.
허튼소리 하나 하지 않으면서 점잖게 넉자배기 고사성어를 섞어 때로는 세상을 개탄하고 또 문인들을 비판하는가 하면 망가져가는 지구나 환경생태계를 걱정하되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하루 저녁은 물론 심지어 2박 3일에 걸쳐 통음을 계속했다.
같이 마시던 사람들이 떠나도 새 사람을 불러 술을 마시니 도무지 대책이 없었다.
결국 누군가가 강제로 집에 데려가야만 하기에 실신파의 맹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실신이란 말이 신체에만 해당되는 말이라면 김선생은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실신 지경에 이르는 사람들은 김선생과 대작한 사람들이었으니 실신하게 만드는 데도 대가라는 말이 옳겠다.
"성님 인자 취했슈. 인젠 가야 혀요. "
"얼라, 내가 취했다고. 중호 니가 취했지, 내가 취했나. "
"그류. 나도 취했고, 성님도 취했슈. 인자 가요. "
수염 몇 올이 독립군처럼 듬성듬성 난 윤중호 시인이 가까스로 설득하면 그때서야 문을 나오면서 구두끈을 졸라맨다.
이럴 때 때로는 현준만.김사인.강형철.임우기 등등이 함께 뒷수발을 해 그들을 통상 '운구조' 라고 부르기도 했다.
운구조라는 명칭은 김선생이 직접 젊은 후배들에게 준 이름인데 자신이 겉으로 보기엔 말짱했어도 실제로는 가사상태나 다름 없었다는 것을 밝히며 머쓱해서 하는 얘기였다.
사실 요즈음은 술을 마시되 그렇게 목숨 걸고 마시는 사람은 거의 볼 수 없다.
대개는 차가 있다느니 아니면 집안에 급한 볼일이 있다는 둥 빠져나가기 일쑤다.
그러나 그 땐 김선생이 후배나 선배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증말 갈껴□ 가지마" 라고 말하면 대개 가지 못했다.
정도가 지나쳐 안되겠다 싶으면 겨우 화장실을 간다고 둘러대고 도망치곤 했다.
'머물기 위해 떠나고 떠나기 위해 머문다' '그리고 마침내 삶은 떠나가는 것' 등등 김선생 말은 하도 들어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쯩' 얘기다.
"복희! 자네 쯩은 뭐여?"
"쯩이라뇨?"
"아, 거기는 무슨 학교를 졸업 했느냐는 것이여. 나는 고퇸디, 허기사 고검퇴도 있고 중퇴도 있는디…. 요즈음은 최소 박사요, 거기다 점 찍고 교수니. 난 말여 시인 점 찍고 문학평론가 거기다가 교수라고 쓰는 작자들 안 믿어. 그자들이 한국문학의 현단계 어쩌구하는 얘기를 안믿는단 말여. 하나나 제대로 하면 되지 뭐가 잘났다고…. 문학이란 것이 시장바닥에 오체투지(五體投地)
를 허고 좀약이니 머리빗이니 수세미를 파는 앉은뱅이의 포복 같은 것인디 요즘은 나왔다 하면 3관왕, 4관왕이니…. "
고등학교 중퇴를 고퇴로, 고입 검정고시 낙방생을 고검퇴로 바꿔서 얘기하면서 학력 위주의 우리 사회에 대한 강한 분노를 표시할 때면 나도 맞장구를 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실제 능력보다는 그가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에 따라 사람 됨됨이를 판별하는 세상에 대한 한 서린 비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김선생이 노래를 부를 때가 있었다.
대개는 노래를 사양하고 염불 한 토막을 하지만 도무지 어쩔 수 없을 때는 '충청도 아줌마' 를 불렀다.
"와도 그만 가도 그만…" 하면서 노랜지 염불인지 모르게 그윽하게, 주억주억 읖조리는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 선생이 스쳐온 인생역정이 떠올라 괜히 서러워졌다.
11. '천의 얼굴' 고은 시인
술꾼들의 풍경화를 그려본 적 있지만 그런 그림으로 도무지 그려볼 수 없는 분이 있다.
어떤 때는 아주 짖궂은 주당같다가 어떤 때는 그 어떤 사람에게서도 볼 수 없는 카리스마를 거느린 의젓한 지도자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큰 예술가처럼 느껴지고 또 어떤 때는 집안의 어른 같이 엄숙한 아버지 혹은 자상한 어머니 같은 모습을 볼수 있었으니, 바로 시인 고은 선생이다.
고선생이 탑골에 들르는 것은 대개 큰 행사 뒤거나 신동엽 창작기금이나 만해문학상 시상식 뒤여서 늘 탑골이 넘쳐났다.
그럴 때면 내실이고 홀이고 수많은 사람이 꽉 들어차 시중들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는데 그러한 혼란스럽고 어수선한 분위기도 고선생의 한마디 말이면 고요해지곤 했다.
고선생이 말할 때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모른다. 연인에게 속삭이듯 조용조용한 어조로 말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분위기가 잡히면 청천벽력과도 같이 큰 목소리로 그 어조는 변하는데 그 즈음이면 끼리끼리 즐겁게 마시던 사람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백미는 소련말인지 프랑스말인지 아니면 영어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 모든 말의 종합인지 하여튼 국적불명의 말을 흉내내며 퍼붓는 욕설 겸 푸짐한 육담이다. 짙은 저음에서부터 시장바닥의 아낙이 싸우면서 지르는 소리까지 이르는 넓은 음역으로 펼쳐지는 그 말은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글을 쓰기 위해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잘 안되는데 대략 흉내내면 이런 것 아닐까 싶다.
"카따라 비이아 가이 썅, 꼬데떼 네에미 썅 카따따 콩그리씨아 막 퍼줘 달라는데로 뚜치아 루붐바 오짜와 우당탕. ....."
아무튼 그런 말로 시작되는 이상한 말을 듣게되면 가게 안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배꼽의 소재를 확인하며 동시에 입으로 가져가는 맥주잔을 조심스럽게 살피지 않으면 안되었다. 웃다가 술을 엎지르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재미난 분위기가 있는가하면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중요한 모임일 경우는 아주 진지하고도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하기도 했으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수 밖에. ..
13년 승려생활과 그후의 환속, 1958년 문단에 등장한 이래 1백권도 넘어 본인도 몇 권인지 모를 정도의 무수한 저서. 또한 그 저서의 범위란 것도 시집.소설집.에세이집.평전.기행문 등 전방위의 활약을 펼치는 시인의 모습을 나같이 가방 끈도 짧고 그저 평범한 아낙인 처지에 뭐라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리라.
뿐이랴. 문인이면서 동시에 70년대 이후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최고의 지도자급에 속하신 분이어서 수배.체포.감옥살이 세월이 너무 많아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분이니 내가 뭐라고 말하는 순간 그런 말들은 모두 허당이 될 것이다.
고선생은 특히 시인 이시영 씨나 송기원 씨와 올 때 행복해하셨는데 아마도 오랜 세월 고난이나 기쁨을 함께 나눈 탓이리라. 그렇지만 신경림선생이나 백낙청선생 혹은 송기숙선생과 함께 올 때에는 참으로 편안한 모습이었다.
물론 화가 여운선생이나 오페라 연출가 문호근선생, 때로는 소리꾼 임진택씨를 비롯해 환경운동가 최열, 화가 김용태씨등 좁은 의미의 문단이 아닌 범 문화적인 범위의 인사들과도 자주 어울린 편이었는데 89년 남북작가회담 대표격으로 많은 작가들과 함께 버스로 서울서 판문점으로 가려다 구속된 뒤부터는 술 마시기 전에 약을 한줌씩 드시곤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범위의 일로 만나고 일을 하셨으니 탈이 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12. 어둔 시절의 흔적
술도 많이 마시면서 그렇게 약을 많이 드시는 고은 선생이 무척 걱정스러웠다. 특히 그 약들 중엔 예전 80년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받을 때 당한 고문 후유증 약도 섞여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 더욱 마음이 심란해졌다.
멀쩡한 사람도 잡혀가면 그렇게 모진 구타와 고문을 받아 몸과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아야 했다는 사실에 당시 정부에 대해 무조건적인 분노와 증오가 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할라치면 고선생께서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이게 내 훈장이여'라고 말씀하시며 '날씨가 조오치, 우리 어디 갈까'라고 화제를 돌리곤 했다. 세상엔 별일 아닌 것 갖고도 생색내는 사람이 지천인 판에 그 어떤 사람보다 모진 일을 겪고도 태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진실로 감동을 준다.
그러나 내가 가장 큰 감격을 느낀 것은 종로 5가의 연강홀 개관기념으로 개최된 고선생의 시낭송회 때였다. 가끔 작가회의 행사 때 고선생이 시를 읽는 모습을 보았고 그래서 시낭송 솜씨가 보통이 아닌 줄 알고 있었지만 무대가 장중하고 화려하면 할수록 그 솜씨가 빛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다정한 연인의 귀에 속삭이듯 조용한 음성으로 시작하는가 하면 어느덧 거대한 광장에서 위대한 선지자가 미욱한 중생들을 깨우치듯 우렁찬 소리로 휘몰아쳐갈 때는 나도 모르게 전율하고 있었다.
"나는 방랑의 시대를 살았다. 그것은 동족상잔의 내전으로 인한 폐허를 떠도는 자의 역사에 대한 무책임을 자유로 착각한 전후세대의 삶이었다.
허무가 내 청춘의 권리였다. 나는 6.25로 산에 들어갔고 4.19로 산에서 내려왔다. 역사는 이런 나의 삶에 각성을 요구했다. 그 요구를 발견했을 때의 나의 감격이 아직까지도 선명하다. "
이것은 고선생의 시집 '만인보' 앞에 있는 서문 중의 일부인데 그날 연강홀의 감격이 너무나 커서 평소 잘 보지 않는 책을 넘기며 내가 새로운 감동을 느꼈던 대목이다.
솔직이 말해서 고선생이 어쩌다 말씀하시는 날것의 육담에 질린 일이 없지 않았던 터였고 그러한 때 느끼는 이해불능의 어떤 것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것들이 그날의 감격 속에서 그리고 시집의 그 말들 속에서 말끔하게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선생이 통과했던 저 허무의 시대 그리고 온몸에 상처를 지니고 이 현실을 살아가는 시대의 아픔이 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어른들의 구체적인 고통이 우리를 이만큼 살게하는 밑바탕은 아닐까 생각한다.
"야 그래도 고선생 너무하는 것 아녀. 그렇게 자고 나면 시집을 내니. "
"그러면 어뗘, '만인보' 나 '시여 날아가라' 를 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애기해도, 그렇게 많이 써도 실패한 작품이라고 말할 작품이 별루 없잖여. "
"그러니까 불가사의지. 그렇게 써도 실패작이 없으니 약도 오르고. "
"아 고선생이 감옥에 계시는 동안 이희승 국어대사전을 그냥 다 외우셨다잖아. 거기다가 결혼 이후 마음에 안정을 찾았으니. 오랜 산문(山門)
생활에서 익힌 선시와 복잡한 인생살이, 거기다 그것에 살을 입힐 언어가 있으니 그렇게 봇물처럼 터질 수 밖에. "
"아무튼 괴물여,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 머리로는 이해 불능의. "
"성적 욕망과 창작의 관계를 연구혀보면 재미 있을 틴디. 고선생은 아직도 그것을 못참는댜."
어느날 김사인 이재무 현준만 강형철 이승철 박철씨 등 젊은 시인들이 나눴던 이야기의 몇 대목이다. 후배 문인들도 그렇게 알 수 없는 큰 어른이니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옛날 한 나라를 통틀어 소리 잘하는 사람을 명창이라 했다는데 고선생은 그럼 명시인쯤 되는 것일까. 고은 선생님의 건필과 건강을 빌고싶다.
13. '제주 독립군' 현기영
소설가 현기영 선생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비분강개성 한량파에 더하여 지칠 줄 모르는 애주가 형에 속한다. 술을 마시되 술의 종류를 가리지 않았고, 마셨다 하면 상대가 손을 들 때가지 마신다.
술 마실 때 보면 현선생은 마치 한약을 드시듯 한다. 약간 얼굴을 찡그리되 그것을 안 먹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소중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마신다.
탑골에선 주로 맥주를 드셨는데 영업이 끝나면 24시간 해장국을 파는 집으로 옮겨가서 소주를 마셨다. 그러고도 모자라면 관철동이나 인사동 입구 포장마차로 진출해서 다시 시작하는데 그 때의 표정이 재미있다. 전혀 술 마신 사람 같지 않기 때문이다.
뜨거운 오뎅 국물에 숟가락을 댓다가 그저 간만 보고 다시 소주를 마시는데 '목을 탁 치고 넘어가는 이 맛'이 최고라며 소주예찬론을 펼쳤다.
그러면서 진짜 술꾼은 안주 없이 먹어야 한다며 후배들을 점잖게 나무라기도 한다.
바로 그런 모습 때문에 소설가 김성동선생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세상 사람 모두 변절해도 현기영선생만큼은 변절하지 않을 것" 이라고. "그렇게 매일 그리고 그렇게도 많이 알콜로 소독 하는데 잡균이나 잡생각이 붙을 수 있겠느냐" 는 것이 그 이유였다.
현선생은 나이든 어른들과도 술을 하셨지만 대개는 젊은 문인들과 많이 어울렸다. 시인 김정환.채광석.박영근.이재무.박철.고형렬.김사인.김형수.이승철 씨등과 소설가 김영현.김남일씨 등 젊은 사람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도 그 젊은 문인들처럼 필름이 끊어졌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이 전혀 없었다.
후배들이 현선생을 따른 이유는 자기들의 주정을 그야말로 어느 때고 받아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들어보면 심지어 12시가 넘어서도 현선생께 전화하면 거의 빠짐없이 나오셔서 대작을 해주신다고 하니 후배들이 신이 날밖에.
제주도 4.3문제를 처음으로 소설로 썼던 '순이 삼촌' 이래 일제 시대 제주 해녀들의 투쟁을 그린 '바람 타는 섬' 개항기 제주도이재수의 난을 그린 '변방에 우짓는 새' 등 줄곧 제주도 근.현대사와 관련된 소설만을 써서 '제주도 독립군' 이란 말도 동료나 후배들에게서 듣곤 했는데 선생의 그러한 음주벽은 해방 이후 역사로부터 소외당한 4.3 사태에 대한 복권의지 아니겠느냐는 설명이었다.
"현 선생님은 언제 육지에 상륙하실 겁니까"
"야, 그래도 제주도에 대해 말할 것이 얼마나 많은 줄 아니. 또 한 명 쯤은 그렇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언젠가 어떤 평론가가 선생의 작품이 너무 제주도에 치우 친거 아니냐는 야유성 질문을 하자 거기에 대해 답한 내용이지만 현선생은 서울이란 곳에 몸은 있으되 고향 제주와 함께 사는 분 같기도 했다. 그런 모습은 노래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현선생은 노래를 부를라치면 '산타루치아' 를 개사한 '쌀 타러가자' 를 불렀고 흥에 겨우면 '이어도 사나' 를 개사한 '이어도 산하' 를 불렀다.
본인이 어렸을 때 불렀다는 '쌀타러 가자' 는 가사가 재미 있었다. "창고에 가득찬 쌀을 타러… 니 배만 고프냐 내 배도 고프다 쌀 털러 가자 쌀 털러 가자. "
바리톤 가수처럼 늘여 빼는 후렴 부분에서는 웃다가도 눈물이 나왔다. 그럴 때면 본인이 어려서 겪은 4.3 사태 얘기를 하며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했는데 그 얘기에 주변 사람들이 심각해지면 도리어 "술이나 더 먹지" 라며 오히려 분위기를 눙쳐 주었다.
14.진짜 애주가
한동안 소설가 현기영선생은 본인보다 나이가 15년 이상 차이가 나는 후배들에게도 망년우(忘年友)
라며 서로를 편히 부르게 했다.
그럴 때면 고형렬 시인이나 이재무 시인은 거침 없이 "어이 노형" 하고 불렀다가 한박자 쉬고 '선생' 하였다. 아무래도 뒤가 캥겼던 것 같다.
선생이 태어난 고향 동네의 이름인 '노형리'에서 리자를 뺀 것이 그 호의 내력이었는데 막상 그렇게 부르려하니 선생의 나이가 너무 많았던 것이리라.
"아니 노형 선생, 이번에도 그 줄뻔댁한테 또 당했지요?"
"말도 마, 내가 말야 10년을 넘게 공을 들이는데도 줄듯줄듯 안 준단 말야. "
"점잖게 허니까 그렇죠. 힘을 한번 쓰셔야지."
"야 그 줄뻔댁이 힘가지고 해볼 위인이냐? 그럼 진작 주었게. "
탑골이 아닌 단골집 여주인 이야기였는데 그들 모두가 다 현선생이 소기의 성과를 못거두고 있음을 놀리는 것이었고 그때마다 웃음이 터져나왔다.
현선생이 술을 사랑하던 일화는 많다. 그중 재미난 것은 소주를 뜨거운 물에 부어 마신다는 이야기다.
한번은 현선생이 지독한 감기에 걸렸는데 강형철 시인의 청에 못이겨 술집에 와서는 절대 술 못마신다고 했다가 앞에서 술마시는 것을 보고는 물을 뜨겁게 끓여오라고 주문한 뒤 그 물에 소주를 부어 그야말로 한약 먹듯이 먹더라는 것이다.
그쯤이면 주선 아닐까? 나는 가끔 탑골 시절에 만났던 그런 문인들의 안부를 신문을 통해 알게 되는데 현선생의 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 도 그렇게 해서 볼 수 있었다.
그 책은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생각이 들만큼 구수하고 재미있었다. 그 책을 읽으며 현선생이 왜 그렇게도 제주도 이야기만 쓰는지도 알았고, 이야기를 들을 때 한쪽 귀에 손을 대며 듣는지도 알았다.
어려서 겪은 열병 덕에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나는 서울 토박이여서 그런 고향 이야기를 들으면 신기하고 재미있다.
더구나 70년대 말 이래 줄곧 제주도 이야기를 한 것에는 커다란 역사적 비극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는 것을 현선생의 어린 시절 구체적인 이야기를 통해 들으니 더더욱 실감이 났다. 책의 뒷부분에는 다음의 말이 있어 인상적이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 동안의 서울생활이란 부질없이 허비해 버린 세월처럼 여겨진다. 저 바다 앞에 서면, 궁극적으로는 내가 실패했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내가 떠난 곳이 변경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라고 저 바다는 일깨워준다."
나는 현선생이 서울 생활이 모두 실패라고 말한데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그 동안 4.3에 대한 진상 규명 특별법이 통과되었고 일반 사람들은 제주도 4. 3이 단순한 폭동이 아니고 우리의 현대사에 드리워진 근원적 모순의 발로라는 생각도 많이 갖게 되었는데 그런 공은 바로 현선생이 선구적으로 일궈낸 것이 아닌가!
도리어 그런 말을 보면서 앞으로도 현선생은 또 제주도에 얽힌 이야기를 쓰게 되겠구나라는 생각부터 갖는다.
제주도는 선생에게 세계의 중심인 것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떠나온 고향을 못잊어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데 현선생이야말로 고향 제주도를, 아니 그 제주도의 비극과 진실을 불러내기 위해 소금기둥을 자청한 사람이 아닐까.
"우리 어멍 바다로 나가 추운 물살에 몸을 담글제" "으쓰 으쓰! 이어도 산하, 으쓰 으쓰"
"전복이랑 해삼이랑 모두들 모여" "으쓰 으쓰 이어도 산하, 으쓰 으쓰"
그렇게 매기고 받으며 늘 청년처럼 술을 마시던 현 선생, 후렴으로 따라 부르다가 모여 있는 술꾼들이 모두 하나가 되던, 힘든 그 고통들을 정겹게 넘어가던 모습은 내게 별처럼 아름답다.
15. 문인들의 격정장
흔히 미운 정이 더 무섭다고 한다. 미우면 그만이고 또 미우니까 안보면 그만이지만 사람 사는 일이 어디 그러한가.
미워도 자꾸 보아야만 하고 또 그러다보면 정들어 보고싶어지기까지 하는 것이 사람일 아닌가. 이재무.이승철.박영근.박철 씨 등 젊은 시인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또한 양문규.이원규.공광규 시인 등을 작가회의 3규라고도 했는데 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당시 탑골에 출입할 때는 모두 30대였는데 곰곰이 생각하면 이들에 의해 탑골은 다소 어수선했으며 동시에 재미났다. 큰소리가 난 것도, 얼마간 기물들이 손상을 입은 것도 대개 이들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얌마, 니가 문단에 나온지 얼마나 됐다고 선배들한테 엉기는 거야. 내감 임마 선배 앞에서 담배를 바로 핀 것이 언젠줄 알아! 선배들 심부름 하고 박박 긴 것이 5년이 지났어도 함부로 못했어. "
대개 이런 말은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해 데뷔한지 얼마 되지 않은 후배들을 앞에 놓고 훈계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말에 큰소리는 오래 가지 못한다. 후배 격인 어린 친구가 머리를 주억거리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이들이 선배들한테 대들 때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당시 80년대 후반기에는 87년 4.13 호헌조치가 취해졌을 때 이에 대해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라는 문제, 이후 6월 항쟁 때의 대응 문제, 6.29 선언 후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민족문학 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되는 문제, 이어 벌어진 87년 대선 때 지지후보 문제, 지지방법론 문제. 그리고 88년 말 창간을 준비 중이던 '노동해방문학' 을 둘러싼 문학 노선이나 기존의 문학적 입장과의 대립갈등 문제 등등 첨예한 문제를 중심으로 논쟁이 벌어질 때는 매우 소란스러웠다.
당시는 문학적 노선이 어떠냐에 따라 모이는 사람이 달라지기도 했고 그런 노선이 불분명한 경우는 적잖은 논쟁에서 비켜서거나 서로 적처럼 대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큰소리가 나면 대개의 경우 싸움판이 벌어지곤 했다. 처음에는 맥주잔이 엎어지고 맥주병이 탁자로부터 굴러 떨어지다가는 마침내 어린아이들처럼 멱살잡이도 심심찮게 벌어지기도 했다.
그럴 경우도 주변 사람들이 말리면 대개 조용해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이좋게 술 마시는 것으로 종결되었지만 심한 경우는 맥주잔이 날아가고 벽에 붙은 그림까지 맥주세례를 받아야만 하는 때도 있었다. 그러고 나면 대개는 일을 저지른 문인들이 엉엉 울어댔다. 그때 우는 것을 보면 참으로 장관이다. 세상에 가장 큰 비극적인 일을 겪고 서러워서 우는 모습도 그렇게 처연할 수는 없지않나 싶다.
그 경우 죽어나는 것은 가게 주인인 나나 주방에서 일하는 할머니다. 그 할머니는 전라도가 고향이었는데 입이 매우 걸걸했다.
"아아니 싸울 티면 밖에 나가서 싸울 일이지 넘의 가게에서 왜 싸우고 지랄여. 이 아깐 안주를 다 흘려놓고 염병 지랄이 지랄여. 담부터 오면 술을 안 줘야 헌 당게. 그런디도 복희언니는 들구 주라고 혀싸니, 요담에 오기만 혀봐라, 국물도 없을팅게. "
"그러니 말요. 다음에 오면 술값 말고 청소비도 받으슈. "
누군가가 할머니 말에 맞장구를 치면 그때야 할머니의 말이 멎었다. 나 또한 속이 상해 솔직한 말로 다음에는 안왔으면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금은 보고싶기만 하니 사람의 마음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기야 지금은 그들 모두가 얼마나 의젓한가!
16. 이유있는 반항
1989년 어름이었던 것 같다. 우리집 관할인 종로경찰서 기동타격대원 몇이 불쑥 들어와 술을 주문했다. 명색이 술집이고 저녁 여덟 시 즈음이었는데 술을 안판다고 할 수 없어 술을 팔긴했지만 찜찜한 것은 사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재무.강태형.이승철.박철 씨 등 젊은 문인들이 뒤에 들이닥쳤다. 그런데 홀의 한쪽에서 경찰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으니….
특히 이재무 시인은 참지 못했다. 앉자마자 나한테 저 놈들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시비를 붙을 태세였다.
나는 '재무씨 왜 그래. 저 사람들도 손님이야' 라며 달랬지만 맥주 한 잔 비우고 그들이 있는 곳을 노려보고 다시 또 뭐라고 욕을 했으니.
"아니 저 자식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술을 먹는 거야. "
"야 재무야 여기는 술집이여, 누구나 돈만 내면 술 마실 수 있어. "
"너 재무, 외상값 갚았어. 그날 틀림없이 갚겠다고 큰소리 쳤잖어. "
"뭐 외상값이야 이번 인천에 배 들어오면 갚을 거고. 썅, 이놈의 탑골을 통째로 살테니께 걱정 말고, 그나저나 저 새끼들 왜 여기 와서 술 마시는 거야, 독재자 똥개같은 자식들이!"
분위기가 그야말로 일촉즉발이었다. 다행히 강태형 시인이나 이승철 시인이 말려서 분위기가 누그러졌지만 불안감은 그치지 않았다. 더구나 그런 말을 경찰 쪽의 책임자급인 사람이 눈을 찌푸리며 듣고 있었다.
당시 나는 종로 경찰서와는 사이좋게 지내야할 이유가 있었다. 자정이 넘도록 돌아가지 않고, 그제서야 찾아드는 주객들로 인한 심야영업으로 벌금을 물고 영업정지까지 당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재무 시인이 막무가내로 계속 시비를 걸고 있었으니. 나는 다급해져서 재무 좀 말리라고 일행 중의 강태형 시인을 불렀다.
"강태형씨가 어떻게 좀 혀봐, 저쪽에 사람이 계속 노려보고 있잖아"
"나도 보고 있어, 괜찮아. 저 자식들 뭐라하면 한판 붙지 뭐. "
"아냐, 나 겁나 죽겠어. "
그렇지만 강태형 시인은 걱정 하지 말라는 말만 하고 경찰쪽의 책임자급을 노려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강태형 시인에게 부탁한 것은 우선 일행 중 가장 연장자였고, 시인으로 데뷔하기 전에 권투선수였다는 것을 송기원 시인에게서 들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불을 끄기는 커녕 불을 지를 태세였으니 얼굴이 홧홧 타올랐다. 그런데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경찰의 대표격인 사내가 일행를 수습하여 자리를 정리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의아해져서 그들이 가고 난 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재무 시인이 통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 나도 쫄았거든. 그 새끼들이 뭘 알고 와서 우리를 잡아 족칠라고 그러는가 해서 말야. 그런데 역시 그 자식들도 아는 것 같애. 옛날 권투 선수가 째려본다는 것을 알았던 거야. 강태형 형하고 그 자식이 한참 눈싸움을 하더니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거지. 권투선순디 지들이 죽을라고!"
그러나 강태형 시인은 아무말 없었다. 한참 술을 마신 뒤에야 이재무 시인에게 훈계를 시작했다.
"너 재무 조심해라. 그 자식들하고 붙었으면 너나 나나 성하게 집에 돌아가지 못했을 거여. 그 자식 눈빛이 아주 심상치 않더라고. 서너 놈이야 어떻게 해봤겠지만 나도 그 뒤는 자신이 없더라. "
지금 생각해도 정말 막무가내의 세월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순정적인 거부감이나 저항(?)
이야말로 어두운 시대를 뚫고 나가는 사람들의 가장 큰 아름다움 아니었을까?
17. 탑골의 악동들
누구나 어디서든 술을 마실 수 있는 것. 더구나 당시는 서슬 퍼런 공권력의 시대였다. 술취한 문인 몇 사람이 기동타격대 십여 명을 잔뜩 노려보아 그들을 탑골에서 물러가게 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한 일이었다.
그 날은 그렇게 무사히 지났지만 이후엔 싸움을 벌일 때가 많았다. 1980년대 중.후반의 세월은 젊은 문인들에는 '울화의 시대' 가 아니었던가.
당시 박영근.이재무 시인이나 양문규.이승철 시인이 왔다 하면 '오늘은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고 은근히 조바심이 났다. 한마디로 '뗑깡의 대왕' 들이었다.
6.29선언이 있고 난 뒤의 일이다. 그날은 여러 팀이 왔었기 때문에 가게가 어지러웠다. 나는 이들 팀을 오가며 술을 몇 잔 한 뒤 내실에서 쓰러져 자고 있었다.
새벽녘 갑자기 누군가 방안으로 들어와 뭔가를 찾고 있었다. 거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니 소설가 윤정모 언니였다. 나는 가까스로 수습하여 무슨 일인가 하고 물었다. 이불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니 깼으니 잘됐다" 며 내 이불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한참만에 돌아온 정모 언니가 한마디 했다.
"복희야, 쟈들 저래 자다가 무슨 일 안 나겠나. 저게 무슨 일이고. "
"무슨 일인데요. "
"마, 나 창피스러바서 말을 못하겠다. 쟈들 일어나모, 묻지 말고 해장국이나 끼리주라. "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홀로 나갔다. 홀로 쓰는 곳 옆에 긴 소파가 두 개 놓여 있었는데 이승철.박영근.양문규 등의 시인이 자고 있었다.
키 작은 제비새끼가 집밖으로 고개만 내민 형국으로 담요에 목만 내놓고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그 옆에는 놀랍게도 속옷이 걸려 있는 게 아닌가. 누군가 집으로 착각하고 속옷마저 벗어던지고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속옷이 걸려있는 것도 그렇지만 알몸으로 자고 있는 모습을 정모 언니가 보고 놀랐을 풍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속옷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직도 확실치는 않다. 다만 그 뒤 누군가가 정모 언니로부터 "니 그렇게 아무데서나 자다가는 시인은 커녕 사람 대접도 못받을기다" 라는 따끔한 충고를 담은 편지를 받고 그 버릇을 고쳤다는 얘기가 소문으로 돌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날은 비교적 '애교' 있는 날이라고 할 만 하다. 더욱이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들이 얼마나 다급했든지 속옷을 그냥 놔두고 사라져버려 탑골 식구끼리 주인공이 누구일까를 놓고 깔깔거리기까지 했으니까.
이런 문인들이었지만 가끔씩 본인으로부터 혹은 주변의 동료나 선배문인들로부터 그들의 속내를 들을 때면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로 눈이 아렸다.
당시 이재무 시인은 충청도 시골에서 올라온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때인데 상경하기 얼마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동생도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경운기와 부딪쳐 비명횡사했으며 결혼생활도 파탄이 났다.
더욱이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교사가 되기도 불가능해졌고 얼마 있던 재산마저 빚 잔치로 다 날려버렸으니 그야말로 정처 없는 신세였다.
오직 할 수 있는 일은 시를 쓰는 일이었는데 시가 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본주의 시대에 누가 보아도 뻔한 일. 그의 아우성이나 울분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8. 살아남은 자의 슬픔
1980년대 말 이승철 시인이나 박철.박영근.김형수.박선욱 등등의 젊은 시인들은 모두 비슷한 처지였다.
각각 상황은 달랐지만 처해 있는 상황은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하는 순간 피를 나눈 동기처럼 금방 정들 수밖에 없을 만큼 불우하기 그지없었다.
이승철 시인의 경우 광주 5.18의 희생자라 할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무슨 부상을 당했거나 잡혀들어가 옥살이를 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 다니던 중에 5.18을 만났지만 항쟁기간에는 총을 들었다 놨다할 정도로 심약한 문학청년이었다.
광주 농성동과 대인동 일대에서 그 자신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지만 동료들이 끌려가고 부상당하고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당하는 참상을 목격했기에 살아남은 자로서의 채무의식을 천형처럼 지니고 살았다고 했다.
그런 모습은 동료들과의 싸움이나 통곡 등 여러 가지로 표출되었고 가끔 노래 부르는 모습으로도 드러났다.
이승철 시인이 잘 부르던 노래는 광주항쟁 때 희생당한 박관현 열사와 이귀순 열사의 영혼결혼식에서 불려진 노래였는데 부를 때면 한 마리 어미 곰이 잃어버린 새끼를 그리워하며 자기 가슴을 치는 모습과 흡사했다.
"음 사람들은 잊지 못하지, 거리마다 넘치던 그 목소리 음 우리들은 잊지 못하지, 밝아오던 마지막 새벽 하늘. 젊은 넋은 애달프고 안타까와도…"
특히 그 다음 구절 '남과 북이 하나 되듯 둘이서 하나되어' 할 때쯤이면 두 볼 위로 눈물이 어룽대곤 했는데 그것은 듣는 사람에게도 벅찬 감격이었다.
광주항쟁 이후 그야말로 우연히 살아남은 친구들과 '젊은 벗들' 이라는 시낭송회를 조직하여 '그날' 의 서러운 시절을 노래하다가 83년 홀연히 서울에 나타나 여러 출판사를 전전하면서도 조금 편해질라치면 광주의 넋들에게 송구스러워 모든 것을 팽개치고 일부러 역경의 길만 가고 있었으니 그러한 서러움이 듣는 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또한 바로 그러한 이유로 다른 사람의 조그만 마음의 여유도 용서할 수 없는 추악한 짓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탑골에서 행사 후 뒷풀이를 하던 때였는데 이승철 시인이 김정환 시인의 멱살을 잡은 것이다. 뒷풀이 도중 누군가 노래를 부르자 김정환 시인도 특유의 미성으로 '제비' 를 부르고 있었는데 이승철 시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김정환 시인에게 갑자기 다가가서 돌연한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일행은 뭔지 몰라 아우성이 벌어졌는데 갑자기 이승철 시인이 울부짖었다.
"야, 너 김정환! 문학운동 한다는 자가 광주에서 그토록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는데 '아 정답던 얘기…' 라니 그토록 한가하고 여유로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거야 엉.그러면서도 광주를 팔아 명망을 얻으면 다 되는 거야."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여흥의 자리에서 가슴을 적시는 노래조차도 이승철 시인에게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였다.
여러 사람이 말리고 나중에는 누군가의 주먹다짐이 있고 난 뒤에야 종결된 그 일은 내게 너무나 낯설었다.
사실 그러한 주관적인 태도는 주위 사람들에게 충분히 이해 받지 못했고 그럴수록 이른바 '자학' 은 심했던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편할 리 없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
생각해보면 그들 모두는 시인이라는 이름 하나만 가슴에 붙이고 그 시절을 통과하던 막무가내의 청춘이었으며 세상의 불의나 부정엔 조금이라도 정면으로 돌파해가지 않는 문학운동은 무조건 인정할 수 없는 죄에 해당되었던 것이다.
19. 탑골의 가수들
분위기란 묘한 것이다. 그렇게 소란스런 시인들이 와도 아주 점잖게 술자리가 무르익어가는 때가 있었다.
박선욱 시인이 끼어 있는 일행 가운데 누군가 점잖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거나 소설가 천승세 선생이 술을 마시다가 노래를 청할 때였다.
"야 박선욱, 영락교회 성가대원! 벨칸토 창법으로 노래 한자리 혀라. "
"아이쿠 선생님, 아직 분위기도 무르익지 않았는데 무슨 노래를. "
"어허, 노래를 허라니까. 니가 노래를 불러야 쓰겄다."
감히 누구의 말이라고 거역하겠는가.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은 적이 있어 다리가 약간 불편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박선욱 시인은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박시인이 주로 불렀던 것은 '그리운 금강산' '떠나가는 배' '광야에서'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이었는데 웬만한 성악가보다 더 잘 부르는 것 같았다.
가끔 문인들의 노래를 듣다보면 나는 그들이 글을 쓰지 않고 노래판으로 갔어도 성공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들이 전국 노래자랑 같은 프로에 나가 노래를 부른다면 훨씬 빨리 유명해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수준급 실력에 약간의 익살만 더한다면 인기상은 떼어논 당상이다.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이천봉 말은 없어도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못가본지 몇 몇 해‥. "
침침한 편인 가게의 조명을 깔고 영롱하게 불러대는 그 노래는 많은 사람들을 조용히 눈감게 하였고 오늘에야 찾을 수 있나에 이르면 누구나 눈을 뜨고 노래 부르는 이가 정녕 박선욱 시인인가 하고 의심하였다.
노래가 끝나면 재청이 이어졌고 그 자리에 이재무 시인이 있을 경우엔 '칠갑산'으로 이어져 분위기를 돋웠다.
천승세 선생의 경우 같은 목소리로 가곡을 부르곤 했다. 그때쯤이면 박철 시인이 피아노 앞으로 가서 건반을 두드리다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달픈 길 나그네길 비바람이 분다 눈보라가 친다' 어쩌고 하는 '이별의 종착역'이란 노래를 라이브 가수처럼 불러댔다.
이시영 시인이 함께 했을 때는 굵은 목소리로 '립스틱 짙게 바르고'가 보태졌고 고형렬 시인의 '파도', 이도윤 시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 이은봉 시인의 '돌아가는 삼각지'등등으로 끝없이 이어져 그쯤이면 완벽한 노래 경연장으로 탑골은 변해 있었다.
어쨌든 이들 젊은 시인들은 각기 지닌 서러움과 시대의 아픔을 술과 노래로 울었다.
그리고 그 술과 노래는 대중들과 함게 하는 시낭송회, 혹은 홀로 밤 새우는 원고와의 씨름을 통해 시로 아름답게 승화하고 있었다.
이재무나 이승철.박영근 등의 젊은 시인들 외에도 김주대.이원규.박남준.오철수.나희덕.차정미.이규배.김남일.현준만.이재현씨 등등의 젊은 문인들이 그렇게 탑골에서 서러움을 달래며 그야말로 젊은 한국문단의 한 축을 너끈하게 이루질 않았나 싶다.
아프게 운 그 시절을 거쳐 이제는 그들이 어엿한 중견시인들이나 작가의 자리에 우뚝 서 있음을 신문이나 TV를 통해 확인하는 것은 요즘 나의 재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의 약간 선배이면서 생각만 해도 슬며시 웃음을 짓게 만드는 시인이 있다. 김사인씨다. 언젠가 황석영 선생이 그를 일러 '세수 안 한 사슴'이라 불러 절묘하다고 생각했는데 늘 조용하게 술을 마셨다.
그런데도 김사인 시인은 늘 선배 작가 송기원 선생의 지청구를 들어야했다. 요점은 한 자리에 앉은 여성 문인들의 마음을 송선생이 사로잡았다 생각할 때쯤이면 김시인이 순식간에 가로챈다는 것. 그말을 들을 때마다 김시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본인은 그럴 의도도, 그런 일도, 그럴 생각도 없다는 것이다.
20. 수수께기의 사나이.
하지만 김사인 시인이 그 말을 하는 시간은 매우 길었다. 단어 하나 하나 하나, 아니 한 음절 한 음절을 발음하려다가 삼키고, 삼켰다가 다시 소리내는 형국이어서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특히 고개를 45도쯤 내렸다가 슬그머니 들면서 말해 실례의 말이지만 약간 모자란 사람같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더듬거려 완성한 말들은 씹을수록 맛이 있었다.
아무튼 여자 문인들이나 후배 혹은 선배 문인들과 같이 있을 때면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늘 중심에 있었다.
송기원선생 말처럼 특히 여자 문인들에게 인기(?)
가 있어 늘 수수께끼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매력은 사람을 업무적으로나 성적으로 긴장시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는 말도 느리고 행동도 굼떠 그야말로 전형적인 충청도 사람이었다.
특히 글쓰는 것이 느려서 사람들이 김사인에게 청탁하느니 차라리 팔만대장경에서 육법전서를 집자고 하는 것이 더 빠르다고 할만큼 애간장을 녹였다.
그러나 간간이 쓰인 글들은 그야말로 소쿠리에 담긴 알밤같은 것이어서 기다린 보람을 만끽하게 했으니 청탁을 할 수도 안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들 했다.
일과 무관한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천하태평이었다. 술을 마실 때도 그랬다.
성질이 급한 사람은 마시는 것도 취하는 것도 속전속결이었지만 김시인의 경우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쟁여 넣는다' 라고 말해야 옳을 것 같다.
한번은 5박6일 동안 탑골을 떠나지 않고 맥주와 소주를 번갈아 가며 흔들림없이 마신 일이 있었다.
소설가 김성동 선생도 술을 오래 마시지만 김시인의 경우는 그보다 더했다.
김성동 선생이 그 소식을 듣고 "좋아, 음주의 용맹정진이로고" 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서 사실상의 백기를 든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면 술을 마신 기간은 길었어도 양은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김성동 선생이 잔을 들으면 한숨에 쭉 들이켠 반면 김시인의 경우 양주 마시듯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셨기 때문이다.
또 김성동 선생의 경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속적으로 마신 반면 김시인의 경우 술집에 온 다양한 팀을 옮겨 다니면서 마시고, 피곤하면 방에서도 탁자에서도 한참 자고 또 일어나서 마시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기를 5박 6일이었으니….
더 우스운 일이 생각난다.
나흘이나 집에 들어가지 않아 내가 조바심이 나서 "집에 안가실거예요□" 라고 물으니 "나 아무디도 안가고 여기서 기냥지냥 살쳐" 라며 막무가내였다.
그쯤 되면 내가 어떻게 해볼 수도 없다.
결국 소반에다 마른 안주나 좀 챙겨놓고 주방에서 일하는 할머니와 나는 그냥 잠을 잤다.
그런데 한밤중에 일어나보니 김시인이 오른쪽 팔로 몸을 괴고 대접에 부어놓은 무엇을 빨대로 빨고 있었다. 맥주였다.
나는 막걸리를 빨대로 먹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맥주를 빨대로 마시는 것은 처음 보았다.
"김사인씨! 왜 그래. 어떻게 맥주를 빨대로 마신다?"
"술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 당체 귀찮고 힘들잖여. 앉아있기도 너무 힘들고 그렇다고 술은 안마실 수 없으니께. 이렇게 먹어보니 편혀"
아무튼 김시인의 경우 우리를 정말 질리게 했다. 더욱 질리게 만든 것은 그 절묘한 노래솜씨였다.
'산유화' 나 '고향생각'같은 동요도 그가 부르면 가곡처럼 우아했고 '나성에 가면'같은 템포 빠른 노래는 잔잔한 연가로 바뀌었다.
더욱 우리를 매료시킨 것은 목소리였다.
감미로우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폐부를 훑는 것 같은 슬픔의 그림자가 어려있어 노래 소리의 어떤 기슭에서 목매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켰다.
21. 시인의 아내
내가 막상 결혼해 살아보니 보통 아내들이 바라는 것은 남편이 여느집 남편들과 비슷하게 퇴근도 하고 함께 외식하는 것 정도로 소박한 것 같다.
그 점에서 보면 문인의 배우자는 보통 인내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5박 6일이 되도록 집에 가지 않고 술을 마시고 있다면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양반이라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김사인 시인의 부인은 아무렇지 않았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마지막 날은 소설가이며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더 알려진 이창동씨와 강형철 시인이 체포조(비슷한 동료들에게 끌려갔다는 뜻으로 붙인 말이다)
로 와서 잡아끌다시피 데리고 갔다.
그런데 그들 또한 별일이 아닌 것처럼 태연했고 웃기까지 했으니 문인들이 그 점에선 여느 사람들과 다른, 딴 세상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그런 일이 대수롭지 않은 이유는 딴 데 있었다.
우선은 1980년대 중반 무려 2년에 걸쳐 수배를 피해 다니느라 여기저기 도피생활(잠수함 타기라고 불렀다)
로 전전했고 대학 시절에 두 번, 졸업 이후 89년 '노동해방문학' 발행과 관련해 또 한차례 감옥생활을 했으니 일주일 정도의 가출은 애교로 봐줄만한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김사인 시인은 박노해 시인을 시단에 소개했다.
또 그와 더불어 '노동해방문학' 을 창간하여 80년대 후반 이른바 문학판의 이념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물론 그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피해가 막대해 거의 파탄지경의 삶을 자신은 물론 가족들에게 강요한 셈이었으니 소재가 파악되는 상황에서 며칠간 가출은 오히려 안심할 일이라는 것이 친구들의 말이었다.
김사인 시인의 부인 또한 이는 그저 웃고 넘어갈 정도의 하찮은 일이라는 태도였다.
솔직히 여자라는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그냥 넘어갈 일이겠는가.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 범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존경심을 갖고 있거나 남편에 대해 모든 것을 포기한 자포자기성 절망의 표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김 시인의 부인은 전자인 듯하다.
참으로 존경스럽다.
게다가 김사인 시인의 경우 그런 공적인 농성(□)
외에도 청탁한 원고가 써지지 않으면 원고를 펑크내기로도 유명했다.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 이 희대의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 두 번째 시집을 낼 때다.
서점에서는 책 독촉이 빗발치듯 했는데 해설을 쓰기로 한 김시인이 원고를 쓰지 않은 채 두어달을 버티자 출판사는 물론 여러 사람들에게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마침내 실천문학사 사장이었던 송기원 시인이 김시인을 여관 방에 넣고 열쇠를 잠가버렸다.
그런 뒤 며칠 지난 후에야 원고를 받아냈다. 김시인은 당시 실천문학사의 편집위원이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놀라운 것은 김시인의 부인이 보여준 상냥함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전화한 편집자도 김시인의 부인이 전화를 받으면 모두 유순한 편집자가 되었다.
원고가 늦어지는 것에 편집자보다 더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동시에 남편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한숨을 곁들이며 설명하니 도리가 없었다고들 했다.
세상에서 제일 거두기 힘든 남편을 가장 의연하게 지켜간다고 하면 실례가 될까?
일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으면 사람은 모든 것을 포기한다고 한다.
탑골에서 김사인 시인이 보여준 그 모습은 자신을 유폐하고 스스로 몰락하려는 몸부림이 아니었을는지.
거기에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죄책감이 더해졌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그 사람들은 서로 멀리서 사랑하는 것일까?
22. 모범주당 이시영
언제나 한결 같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같고 또 술을 마시거나 마신 후의 모습도 거의 변화가 없는 사람. 이시영 선생은 그런 사람의 대표급이다. 물론 신경림 선생이나 정희성 시인 등도 그런 예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시영 선생이야말로 모범적인 단골이었다는 말이다.
이선생은 주로 고은.신경림.황석영.백낙청.송기숙.안종관 선생 등 선배들과 어울려 탑골에 오곤 했다.
창작과 비평사에서 20여년을 붙박이로 일하면서 편집장.주간.부사장.사장 등을 역임한 관계로 후배들은 물론 제자급의 어린 후배들과 오는 경우도 잦았다. 하지만 술을 기화로 누군가에게 주정을 한 바 없고 일행이 무사히 귀가하도록 챙기는 가 하면 술값까지 계산하는 그야말로 '모범 술꾼' 이었다.
정직하게 말하면 술값 문제는 만만치 않았다. 개점 이래 술을 마신 후 단 한 번도 술값을 가린 일이 없는, 그러면서도 욕설만을 퍼붓던 손님도 있고 얼마 남은 술값이 빌미가 되어 발길이 뜸한 문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술값을 가려달라고 연락을 하는 일은 탑골 사전엔 없었다. 내가 그렇게 여유 있게 탑골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시영 선생 같은 틀림 없는 고객(?)
덕분이 아니었던가 한다. 참으로 고맙다.
참으로 반가운 사람 앞에서 흉허물 없이 자신의 속내를 얘기하듯 이시영 선생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별 이상한 얘기를 다했지 싶다. 그러나 사실 그런 고마움은 너무도 큰 것이다. 술꾼들이야 처음에는 호기있게 내가 산다고 큰소리도 치곤 하지만 워낙 주머니가 가벼운 문인들이라서 그게 쉽지 않은데다 술값 낸다는 사람이 먼저 술에 취해버려 난감해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런 때 이시영 선생은 그야말로 생색이 나지도 않는 술값을 대신 물어주기도 하고 또 일행이 나눠 내도록 해 마치 탑골의 상무님처럼 일을 처리해 주었다.
성경에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드러나지 않게, 그러나 가장 긴요한 일을 해주신 것에 대해 무어라 할 말이 없을 정도다. 그런 이시영 선생도 딱 한번 우스운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 나로서는 신기하기까지 했다.
후배문인들 중 하나였는데 술이 얼큰해서 계속 시비를 걸었다.
"시영이 형, 그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열나게 뒤치닥거리를 하는 시인들의 시는 안실어 주고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식들 시는 싣고…. 도대체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매번 삼류 시인이고 거리에 나가 최루탄이나 맞으면 되고…."
'창작과비평' 이 동료나 자신의 시를 청탁해주지 않는다는 불평이었는데 비슷한 말을 반복해서 삼십 여분이나 계속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그 일은 편집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것이니 좀 기다려보자" 는 말도 하고 나중에는 "우리들 말고 다른 사람들 작품을 많이 실어야 실제로는 우리가 커지고 넓어지는 것 아니냐" 는 충고도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그 문인은 심지어 "너는 상업주의 마름 아니냐" 고 극언을 퍼부었다. 그러자 이시영 선생은 벌떡 일어나 그 후배를 한참 노려보다가 "나 간다. 제발 이러지 말고 좋은 글 써라" 며 집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도 그 후배는 막무가내였다. 주변에서 다른 문인들이 그 후배를 말렸다. 그러자 그 후배문인은 "이거 놔 썅" 하며 욕설을 퍼붓었다.
그 말에 집에 가려던 이시영 선생이 소리를 질렀다.
"너 이새끼 나와. 나랑 한번 뛰어보자.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순간 모두 놀랐다. 더구나 이시영 선생이 웃통을 벗어젖히고 동네 건달들처럼 주먹을 쥐고 한판 붙을 태세였기 때문이었다.
23. 장기전의 명수
견인불발(堅忍不拔)
의 달인 이시영 시인이 화를 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건이었다.
또한 그 일은 그것으로 종결되었다. 오죽하면 주정하던 후배시인도 놀라서 아무런 말도 못했고 고개를 꺾었으랴. 주변의 동료 문인들은 황급히 자리를 정돈하였다. 전혀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화를 내면 상대는 무조건 잘못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는 분위기가 되고 말지 않는가.
그러나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이시영 시인이 싸우려고 하는 모습이 너무나 진지했고 야릇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마을 뒷산 소나무 아래서 사내 아이들이 한번 뛰자고 합의한 뒤 서로 싸우다가 넘어지면 다친다며 솔방울을 주워서 멀리 던진 다음 상대를 노려보며 씩씩거리던 풍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들은 모두 나이는 먹었지만, 백사장에 나앉아 희게 빛을 뿜는 조약돌과 모래에 엉덩이를 맡기고 드러누워 장난치다가 별 것 아닌 이유로 엉겨 싸우는 아이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만년 소년들이었다.
그렇게 모범적인 이시영 시인도 송기원 시인과 함께 술을 마시는 날은 달랐다.
두 사람은 대학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는데 어찌 보면 서로 너무도 달랐고 어찌 보면 너무나 닮았다.
당시는 송기원 시인이 실천문학의 실질적인 대표였고, 이시영 시인도 창작과비평사의 핵심적인 중추였으므로 늘 후배들과 함께 어울렸기 때문에 둘이서 오붓하게 마시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서로 너무 바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과 한 두 명쯤 더 어울려 왔을 때는 그야말로 두주불사였다. 2박 3일도 좋고 3박 4일도 좋았다. 그쯤 술을 마실 때면 이시영 시인이 아주 쓸쓸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어이 복희, 지금 문밖으로 그림자들이 왔다갔다 하는데 누구지? 김사인.박남철.강태형.김남일이 왔다갔다 하는데, 맞아?"
그러나 그 순간 아무도 그 옆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거명한 사람들은 어제 저녁 혹은 이틀 전에 같이 술을 마시며 정담을 나눈 이들로 이미 각자 집으로 간 뒤였다. 너무나 오랜 시간 취해 있어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선생님, 그 사람들은 어제 집으로 갔어요. 너무 취했어요. 이제 집으로 가셔야죠. "
내가 이렇게 말하면 내 얼굴을 한참 보다가 "맞아, 집에 가야지" 하며 주섬주섬 옷을 입고 일어났다.
그러다가 앞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송기원 시인을 보고 "야, 기원아. 술은 그만 마시고 노래하자" 며 노래를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더냐. 손목을 잡고…. " '해운대 엘레지' 란 노래였는데 바리톤 풍 그 노래가 익어갈 무렵이면 송기원 시인도 어느새 일어나 어깨 동무를 하고 한 손은 허리춤에 붙인 채 모둠발로 쫌쫌거리며 원을 그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춤추고 노래했다.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불평불만을 듣는 것이 직업이었고 후배들은 물론 선배문인들을 보살피는 일이 주업이었던지라 한번쯤 그런 의무감을 털어내면서 술을 마시며 눈빛으로 서로 달랠 수 있는 이들끼리 나누는 한판의 난장이 아니었을까.
"반짝 반짝 작은별" 로 시작하는 동요를 부르면서 어린애 같은 춤을 추며 인생의 시계바늘을 되돌리려는 듯 퇴행성 유희를 즐겼던 것은 떠나온 길과 거리를 서로 눈 끝에 얹어주려는 것은 아니었을는지.
지금도 그 풍경을 떠올리면 가슴이 뭉클해지며 아름다움과 서러움이 밀려든다.
24. 스타들의 첫 모습
탑골에는 출판에 관계되는 사람들이 가끔 왔다.
자신들의 출판사에서 낸 책을 기자들이나 여타 문인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런 일 말고도 출판계약을 하거나 출판계약에 앞서 '인간적 관계' 를 다지기 위해서도 이곳으로 왔다.
때로는 조촐한 형식의 출판기념회도 열렸는데 대개 어른들의 축하말을 잠시 듣고 술은 오래 마셨다.
축하의 노래가 가끔 불리기도 했고 시집 출판기념회의 경우 시를 몇 편 낭송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갓 데뷔한 문인들도 선배 문인들과 어울려 왔으며 때로는 문단에 주목을 받는 문인들이 기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오곤 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란 시집을 낸 최영미 시인도 데뷔하기 전 가끔 나타난 술꾼이었고 '슬픔 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란 시집을 내고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던 허수경 시인도 한동안 단골이었다.
그렇게 어울리면서 서로의 문학이나 살아온 세월들을 이해하면서 우의를 돋우곤 했다.
소설가 신경숙씨도 93년 '풍금이 있던 자리'란 소설집을 낸 직후 탑골에서 만났다.
당시 신씨는 종로구 행촌동에 있는 열 평짜리 독신자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고 허수경 시인도 광화문 근처의 조그만 원룸에서 살고 있었는데 처지가 비슷해서인지 자연스럽게 어울려 정담을 나누곤 했다.
신씨는 이후 '깊은 슬픔' '외딴 방' 등등으로 아주 큰 성과를 거두어 만해문학상.동인문학상.현대문학상 등 큼지막한 문학상을 여러 개 받을 만큼 큰 소설가가 되어 지금은 그때보다는 훨씬 좋은 여건에서 집필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허수경 시인은 좋은 시집을 계속 내다가 독일로 유학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는 그야말로 스타가 된 문인들이지만 당시 처음 만났을 때는 왜들 그렇게 수수하고 참하게 보였든지…. 물론 지금도 그런 모습을 유지하고 있겠지만 당시의 모습이 내겐 훨씬 매력적이다.
지금은 '문학동네' 대표인 강태형 시인, 김사인 시인, 소설가 김성동 선생, 신문사 문학담당 기자였던 박찬 시인, 문학평론가 김훈 선생, 강형철 시인 등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신경숙씨는 시종 별 말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잔을 들고 주변 사람들에게 신씨를 익살스럽게 소개하였다.
"에 이 미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찍이 황인숙 시인이 '북구풍의 미녀' 라고 말했던 것에 비추어 전혀 손색이 없는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서 85년 문단에 데뷔한 이래 심산유곡에서 붓과 펜을 갈고 닦아, 갈아 치운 붓펜이 수 천 자루요 아직 갈아야할 펜이 10킬로 그램은 너끈히 남아있는 신예 소설가…. "
그러자 한쪽에서 말을 받았다.
"아니 미인이라고 했으면 확실히 밀고 나가야지 느닷없이 사람 운운허는 것은 뭐여!
내가 보기엔 촌이서 금방 올라온, 오라버니 논에서 일할 때 샛거리 내러 갔다가 느닷없이 승질나서 상경헌 사람같고만. "
"에이 사람들 이렇게 놀리고 그러면 쓰나. 신경숙씨 고향이 정읍이지 나도 거기여. 나 정읍 동국민학교 나왔는디 어디 나왔능가?" 뒤에서 다른 사람들을 제지하고 나선 사람은 박찬 시인이었다.
아무튼 그런 저런 모습으로 그들은 서로를 소개하고 익혀갔는데 그런 자리들을 통해 서로의 작품에 대한 흉허물없는 품평을 통해 성장해가고 또 성숙되어 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자리의 뒷끝에서 신경숙씨가 노래를 불렀는데 정태춘 박은옥의 "북한강에서" 였다.
25. '공주병 시인' 허수경
여느 여자 문인들에 비해 키가 좀 컸던 신경숙씨는 몇 번이고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일어나서 노래를 불렀는데 좌중에 있던 이들이 하나같이 감동한 눈치였다.
누군가가 촌에서 갓 올라온 소박한 누이 같다고 말했던 터라 모두 그렇게 멋지고 세련되게 노래할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저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릴…. "
잔잔하게 잦아들다가 다시 이어지는 그 노래는 가사의 아름다움과 함께 모두를 참으로 조용하게 만들었다.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거요' 로 매듭 지은 노래를 들으면서 신예 소설가 앞에도 정녕 새로운 날이 오고 서울살이의 낯설음이 안개 사라지듯 사라지기를 일행들은 절실하게 빌어주는 것처럼 엄숙해졌다.
허수경 시인은 당시 실천문학사에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라는 시집을 냈는데 그 이후 탑골을 마치 학교처럼 찾아왔다.
처음에는 송기원 시인이나 이시영 시인하고 같이 왔지만 뒤에는 스스럼없이 찾아와 친동생처럼 살갑게 행동하곤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도 술을 잘했다.
주로 소주를 마셨는데 술을 마실수록 말이 없어지다가 나중에는 혼자 홀짝거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자신이 슬픈 이유를 설명했는데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자기가 너무 예뻐 사람들이 시기한다' 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법이지만 허시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소 황당했다.
키는 작고,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주근깨도 몇 개 있는데다 쌍꺼풀 없는 소박한 눈을 가진 허시인인지라 마음의 아름다움이라면 모를까 외양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정말 인정하는 것은 허시인의 노래솜씨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잔잔하게 시작하는 양희은의 '한계령' 이나 잘 익은 젓갈같이 몸에 척 들러붙게 만드는 '진주난봉가' 는 일품이었다.
그런 노래를 부를 때면 사람들은 허수경 시인에게 흠뻑 빠져든 표정이었는데 이를 두고 자신이 예쁘다는 근거로 삼은 것은 아닐지. 그런데 그런 예쁜 모습도 잠시, 누군가가 "너 예쁘다" 거나 "너 시 좋더라" 라고 말하면 참지 못했다.
"내가 어디가 예쁘다고 생각하느냐" 혹은 "당신이 내 시에 대해 정말 아는 거야" 라는 식의 말도 서슴없었다.
한마디로 당차고 씩씩했다. 그런 과정에서 사람들과 가벼운 입씨름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늘 우는 것은 허수경 시인의 몫이었다.
고향 진주에서 갓 올라온 '어린 소녀' 인 처녀 시인이 좌충우돌하며 자신의 세계를 다지려는 몸부림이었음을 뒤에는 알게 되었지만 당시는 왜 그렇게 못 참을까 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1992년 가을 독일로 홀연히 떠나 마르부르크 종합대에서 고고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다시 뮌스터에서 근동고고학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잡지를 통해 읽으며 나는 허수경 시인이 자기가 예쁘다고 한 말을 조건 없이 인정한다.
국문학과를 나온 가난뱅이 처녀 시인이 혼자서 유학을 떠나 힘든 공부를 하면서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이 커보이고, 그런데도 그 일을 용기있게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26.다정다감한 신경림
기차여행을 하다보면 창밖으로 많은 풍경을 보는 재미가 있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주로 철도변에 핀 꽃들을 보며 알게된다.
본래 나는 서울 토박이지만 그래도 그런 꽃들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누군가를 보고 웃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런 꽃들을 지고난 뒤, 특히 가을쯤에는 벼들이 베어지면서 군데군데 빈 공간들이 마음을 허하게한다.
그러나 그때 꽃들이 이루어내는 풍경보다 훨씬 아름다운 풍경이 살아난다. 시골 야산의 있는 그대로의 자태다.
때로는 도란도란 얘기하는 모습이기도 하고 때로는 한 두 개 있는 묘소들의 무게조차도 힘에 겨워 낑낑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때면 그런 곳에 무작정 내려 한참 놀다가 저녁노을이라도 오래 보고 싶어진다.
시인 신경림 선생님을 생각하면 나는 꼭 그런 야트막한 야산을 보는 것 같다. 어디 특별하게 높지 않으면서도 많은 사람에게 실감의 측면에선 거대한 산인 사람, 한없이 큰 정감을 주면서도 소박한 모습으로 사람들 곁에 늘 있는 그런 사람.
탑골을 하는 동안 신선생님이 오시면 우선 마음이 놓였다. 실제로 신선생님이 계시는 술자리는 늘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오갔고 늘 잔잔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신선생님이 오실 때는 거의 정희성 시인이나 문학평론하시는 구중서 선생님이 동행이셨지만 민족예술인총연합 사무총장으로 일하는 김용태 화백이나 여타 장르의 많은 분들과도 어울려 오셨다.
물론 나이 어린 후배들도 함께 오기도 했고 때로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도 함께 오셨다.
술은 남에게 결코 뒤지지 않게 마셨는데도 신선생님이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후배들과 어울릴 때 때로는 원로 문인들이나 옛날 문단에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를 해 주시곤 했는데 그런 얘기가 오가는 동안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어쩌다 시간이 있으실 때 내기바둑을 두셨는데 바둑은 손으로만 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하셨는데 바둑에 문외한이었던 나도 재미가 나서 그 옆에 서있곤 했다.
"아아니 그 수가 있었남. 그 수에 졌군. 어허 큰일 났네. 그렇지만 이런 수를 알고 있는지 몰라. "
"아하! 나는 끝났어. 그런 꼬락수가 있을 줄이야. 결국 그 수에 졌다는 이야긴가! 그렇다면 포기하는 셈치고 그냥 이렇게 두어볼까. '현현기경' 에 있는 순데 이 수는 상대가 알 때에만 빛이 나는 수라서! 요즘엔 상대가 워낙 딴 기보를 연구하고 오는 통에 잘 안돼. "
대개 신선생님과 김용태 선생이 두면서 나누는 이야긴데 바둑 알이 놓이고 놓을 때마다 스스로 만족해 하기도 하고 난감해지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바둑통에 꽉 찬 바둑알보다 많은 얘기가 대국 주변으로 넘쳐났다.
바둑이 끝나면 만원이나 2만원이 오갔는데 그 때마다 세상의 어떤 큰 보람도 거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드문 일이긴 하지만 혼자 오시는 때도 있었다. 대개 약속 시간 중간의 자투리 시간이 있을 때 오셨는데 그런 때면 가끔 신선생님에게서 남들에겐 안보이는 어떤 회한이랄까 쓸쓸함이랄까, 어쨌든 그런 것을 느꼈다.
평생 직업 한 번 제대로 갖지 않으시고 그러면서도 부자처럼 보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가난해 보이지도 않은 안성마춤의 어떤 선비의 모습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는데 그것이 뭔지 나는 모른다.
늘 누구에게도 좋은 사람일 수 있으려면 가을 낙엽이 등밑으로 성애를 거느리고 있듯이 쓸쓸함을 스스로도 모르게 거느리는 것은 아닐지.
27. '신경림'의 유래
어쩌다 한번씩 그런 모습을 보았지만 신경림 선생님의 본령은 그야말로 서민풍의 익살과 해학이다.
또한 언제 뵈도 나이가 별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한결 같아서 놀랍다. 언젠가 선생님께 '언제 뵈도 늘 그대로인데 비결이 뭐예요'라고 물은 적이 있는데 선생님은 일초도 생각 않하시고 '내가 속이 없어서 그랴'라시며 환하게 웃으셨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에이 그런 말씀이 어딨어요' 하고 웃고 말았지만 참으로 듣는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시는 분이구나라고 감탄했다.
그런 선생님이 한창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1989년 추진한 남북작가회담과 관련해서다. 그때 선생님을 비롯한 20여 명이 판문점으로 향하다 경기도 고양시의 속칭 '여우고개'에서 마포경찰서로 모두 연행되어 이틀간 구금되었다.
일행은 마포서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그때 선생님의 본명이 신응식이라는 것이 밝혀져 많은 사람들이 취조를 받는 가운데서도 재미났다는 것이다.
일행이 모두 분단 이래 처음 시도된 남북작가회담이 무산된 것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는데 연행된 소설가.시인들을 형사가 불러 취조를 시작했다. 그런데 분명 일행 중에 한사람을 부르는데 낯선 이름이 거명되더라는 것이다. 형사가 부른 이름은 신응식씨였다.
그 이름은 당시 연행된 사람들 중에 있던 문인의 이름이 아니어서 일행은 모두 다른 사람을 잘못 불렀거니 생각하고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데 한쪽 구석에서 신경림 선생님이 '예'하고 답을 하며 나가시더라는 것이다. 일행은 의아한 표정으로 '신선생님 부른게 아니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신선생님이 나가시면서 "신응식이가 내 이름이여"라고 말씀 하셨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일행은 하도 우습고 또 이름이 너무 시골스러워서 또 배꼽을 쥐었다는 것이다.
그 일이 있고난 뒤 짖궂은 후배들이 "신응식 선생님 술 한잔 하시죠" 라고 응석을 부리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흔쾌하게 "하 그 이름이 너무 촌스럽지" 라고 말씀하시며 필명을 쓰게 된 내력도 더불어 말씀하셨다.
붓글씨를 쓰다보니 '應' 자와 '植' 자가 획이 촘촘해서 여간 해서는 맵시가 안나 그 글자들과 비슷한 모양의 글자를 써본 것이 경림(庚林)
이라는 글자였는데 맵시가 나서 필명으로 택하셨다는 것이다. 설명을 듣고 나자 신선생님의 소탈한 모습이 더 크게 느껴졌다.
나는 신선생님의 시 중에서 '파장' 이란 시가 제일 좋다.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흥겹다' 로 시작되는 그 시는 불과 열 세줄짜리 짧은 시인데 그 짧은 시 속에 시골의 장터풍경과 그 속에서 울고 웃는 가난한 서민의 깊은 속마음이 다 들어 있다.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심심하면 참외도 깎아 먹다가 약장사가 오면 약장사가 들려주는 음악에 발장단도 치고 결국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를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며 돌아오는 풍경은 너무나 구수하고 쓸쓸하다.
사실 못난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본다는 것이 흥겹기는커녕 지겹고 답답할 뿐이다. 그러나 그 지겨움과 짜증이 어느 순간에는 오랜 체념과 절망 속에서 흥겹고 정겨운 모습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게 마련이다. 바로 그런 우리네 속내를 참으로 아름답게 써주셨다고 생각한다.
'농무'라는 시집으로 우리의 누추하고 허름한 살림살이를 살만한 삶의 세계로 건져올리신 이후 '새재' '가난한 사랑 노래' '길'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등의 시집을 내시면서 늘 우리 남루한 삶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시는 신선생님은 내게 있어서 영원한 참 시인이다.
28. 의리의 사나이
시인.문예지 편집장.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출판사 사장, 이런 직함을 함께 가지거나 경력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은 1980년대 우리 사회의 급박한 상황이나 시인이라는 반자본주의적 직함을 고려할 때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직함 옆에 권투선수를 넣으면 어찌 될까. 권투선수 시인 혹은 권투선수 출판사 사장(?)
,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런데 그런 이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아니 그래서 더욱 한사람의 독특한 모습이 튀어나오는 사람이 있다. 문학동네 사장인 강태형 시인이다.
중앙 일간지의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무작정 상경하여 자유실천문인협회 총무간사. '실천문학' 편집장 등을 거쳤다가 88년 출판사를 세워 경영하다가 인계하고 난 뒤 다시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을 역임한 뒤 계간지와 문학서를 내는 출판사 문학동네 사장이 된 사람, 이것이 강태형 시인의 표면적 약력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직함보다 '의리의 사나이 돌쇠' 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싶다. 물론 이러한 느낌은 그가 한때 잘나가던 권투선수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도 한 몫을 하겠지만 탑골에 와서 술을 마시거나 술을 마신 후의 여러 모습에서 비롯된다.
언젠가 눈빛만으로 막강한 경찰들을 물리친(?)
얘기도 하였지만 그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동안 불의한 일은 참지 못했다.
또한 자신의 선배와 관련된 일들은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챙기고, 때로 보살핀다고 느낄 만큼 위해주었다.
또한 '실천문학' 편집장을 하는 동안 그가 보인 일에의 열정과 성실성은 당시 책임자였던 송기원 시인에게 귀가 따갑도록 듣기도 했다.
실천문학사에서 펴낸 도종환 시인의 시집 '접시꽃 당신' 이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그는 몇날 며칠 집에도 들어가지 않은 채 일을 했다고 들었으며 이후 출판사를 창업했을 때 가장 많은 일을 했던 사람도 강태형 시인이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런 열정이 있었기에 짧은 시간에 문학동네라는 출판사가 나름대로 확고한 자리를 잡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속문인 돕기 일일주점을 열고 난 뒤의 일로 기억난다. 황석영.박노해씨 등 문인이 감옥에 있을 때 영치금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서대문 네거리 호프집에서 일일주점이 열렸는데 그런 일이 있고 나면 뒷풀이 장소는 어김없이 탑골이었다.
서로가 수고 한 것에 대한 위로 겸 반성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지만 나중에는 소란스러운 싸움으로 비화되는 수도 있어서 구속문인 돕기 일일주점이 아니라 구속문인 생산 일일주점이 아니냐는 농담 같은 우스갯 소리도 나오곤 했다.
그런데 그런 날이면 마지막까지 뒤처리를 하는 것은 강태형 시인이었고 후배들은 후배들대로, 선배들은 선배들대로 결 따라 잘 정돈함으로써 그야말로 일들을 깔끔하게 처리하곤 했다. 다 보내고 난 뒤 마지막으로 한 두 명이 남았을 때 나는 "당신 시집은 언제 낼 것이냐" 고 물었다.
남들 시집이나 소설집을 내주면서도 자신의 것은 챙기는 바 없고 전세 돈까지 날리며 출판을 열심히 하는데 도무지 기울어만가던 당시 자신이 경영하던 출판사 사정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에서였다.
"왜 나라고 시집 한 권 내고 싶지 않겠어. 그런데 서울에 올라온 이후 그렇게 수많은 청년들이 죽어가고 병신돼가는데 그런 사람들의 억울함에 대해서 시는 안써지고 그렇다고 다른 시도 쓸 수 없고…. 대신 남들의 책이나 내주는 거지 뭐. 별걸 다물어!"
그런 말이 내가 들은 강태형 시인의 간단한 소회였지만 그것이 어찌 자신의 시적 능력에 한정된 말이랴. 남들의 뒷자리, 그늘에 있을 수 있는 것. 그것이 강태형 시인이 보여준 진짜 의리가 아닌가 한다.
29. '위대한' 연극인들
탑골에는 문인들만 온 것은 아니다. 노래하는 이, 연극하는 이, 미술하는 이도 많이 왔다.
이런 예술인들 가운데 '어느 장르의 예술인이 제일 가난하냐' 고 내게 묻는다면 '연극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고 대답하겠다.
왜냐하면 연극하는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돈을 낸 것은 거의 없었으므로. 대개 그분들을 좋아하는 이들이 대신 술값을 내주곤 했는데 그마저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연극 한 편을 올리는데 드는 비용이 만만찮고 또 올려봐야 적자가 나기 일쑤니 극단에 속한 사람들은 가난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사서 하는 고생을 통해 불세출의 배우가 탄생해 일반인에게 벅찬 감동을 주는 것이리라.
지금은 국립극장 극장장인 김명곤 선생은 내가 탑골을 하는 동안 '아리랑' 인가 하는 극단을 운영했다.
가끔 친지들과 어울려 탑골에 왔는데 나는 연극인들의 고생이 자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인사치레로 '공연하면 티켓 좀 보내주세요' 하고 말을 건네곤 했다.
김선생은 공연을 하면 표를 10여장쯤 보내오곤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거기에 해당하는 값은 늘 치르고 어쩌다 시간이 나면 공연도 보러 가서 음료수를 몇 박스 넣어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야말로 온몸으로 세상의 그 무엇을 지켜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마음이 찡했다.
음료수 몇 박스에도 그렇게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송구스럽기도 했고. 어느 날 극단 단원들에게 술이라도 한 번 대접하고 싶어 김명곤 선생한테 내 뜻을 전달했더니 "말이라도 고맙다.
언제 그런 기회가 되면 한번 연락하겠다" 고 했다. 그 뒤 무심하게 지냈는데 제목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공연을 끝내고 연락이 왔다.
"뒷풀이를 하고 싶은데 지난 번 약속을 지킬 수 있느냐" 는 것이었다. 나는 반가웠다. 순수한 호의를 받아주는 것 같아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고 사람들 모시고 오라" 고 했다. 대략 20여명 온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오늘은 아무 계산 말고 술과 안주를 준비하라고 했다. 맥주 한 박스면 20병이니 열 박스면 충분하겠거니 했다. 당시 맥주는 4홉들이 큰 병인데다 여러번 행사를 치른 내 경험으로 봐도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손님들이 늦게까지 술을 마시면 그냥 둔 채로 탑골 식구들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내실에서 잠을 청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날 김선생 일행은 자정을 훨씬 넘겼는데도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안되겠다 싶어 열 박스를 더 갔다 놓고 탑골 식구들은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설마 하고 확인해 보니 남은 술이 단 한 방울도 없었다.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오는 행사에서도 맥주 열 박스면 충분했는데, 그것의 두 배를 마시고도 부족해 소주 등도 말끔히 비웠으니!
우리들은 정말 놀랐다. 게다가 그렇게 마셔댔으니 화장실 형편도 말씀이 아니었다. 같이 일하는 식구들이 불평을 쏟아놓을 기세였지만 내가 별일이라며 즐거워하자 차마 그런 내색은 하지못했다. 대신 그때까지 '용맹정진' 한 사람들을 위해 해장국을 끓였다.
술고래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보면서도 실감이 안났다. 한편으론 재미있었지만 한편으론 어이없기도 했고 또 오죽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 슬프기도 했다.
거대한 술꾼들!
그 뒤 그날 술자리에 왔던 일행들을 만나면 극단 생활을 오래 했지만 그날처럼 푸짐하게 술 마신 일이 없었노라고, 월급이라고 5만원 정도 받으며 이리저리 뛰니 언제 한 번 마시고 싶던 술을 실컷 먹으며 한풀이를 할 수 있었겠냐며 행복해했다는 말을 건네주곤 했다.
감사하다. 지금은 모두 새로운 자리에서 그날을 말하며 이 시대의 별이 되어 빛나고 있기를.
30. 천하의 가객
지금은 자정을 넘겨도 술을 파는 곳을 어디서든 볼 수 있지만 5공화국 시절 자정 이후 술을 판매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술꾼이란 늘 '마지막 한잔 더' 가 있어야 그날의 일정을 마치는 법이어서 탑골이 그런 역할을 가끔 했다. 물론 심야에 영업을 하다가 단속에 걸려 한번은 보름, 또 한번은 한달 이상 영업정지를 당한 적이 있다.
조금 일찍 오든지 아니면 자정 쯤 되면 두말 없이 나가주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딱 한병' 만 더 먹다 보면 자정을 지나기 일쑤였다. 그런 때는 가끔 아예 내실로 들어가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을 생일로 정하고 단속이 나오면 생일잔치를 한다고 둘러대기로 하고 밤새워 술 마신 적도 꽤 있다.
그런 때는 문을 걸고 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가끔 문이 매우 덜컹거렸다. 단속이 나와도 가끔씩 그런 일이 있었고 아닌 때는 그 굳센 음주가무의 문사(文士)
들이 다급해서 찾는 경우라 현관문에 가서 목소리로 판별하여 아는 사람이면 돌아가면 어떠냐고 물었다.
물론 그것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말이었지만. 그런 어느 날이었다. 현관문이 덜컹거려 갔는데 목소리는 과히 익숙하지 않았지만 본인이 '박남준' 이란 말에 급히 문을 열어주었다.
평소 술을 마셔도 뒷뜰에 핀 채송화 마냥 잔잔하기 그지없고 그렇다고 자주 오는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는 날은 대개 송기원 시인이나 강형철 시인의 청에 못이겨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기막히게 서럽고 좋아 너무나 뚜렷하게 기억나는 시인이었다.
문을 열자 너무도 미안하다는 표정이었으나 매우 안심이 된다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데 더듬거리며 찬찬히 말하는 내용을 듣고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도 순수하다는 생각을 했다.
박남준 시인의 말은 탑골을 찾기 위해 무려 두 시간 이상을 헤맸다는 것이었다. 전주에서 올라와 일을 처리하고 아는 사람 몇이라도 만날까하여 탑골을 찾아 왔는데 거기가 거기 같고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주변을 맴도는 이상한 남자들도 만났다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직감했다. 게이들과 만난 것이라고. 당시 탑골 주위엔 그런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있었는데 박남준 시인이 계속 그 주변을 맴도니 필시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닐까 충분히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문을 열어주었을 때 안도의 한숨을 쉰 것도 그 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그런 암시만 주었을 뿐 그들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고 혹시 인근의 불량배들이었을 수도 있겠다.
어쨋든 그런 상황에서 안으로 들어왔으니 술자리에 합류할 수밖에. 실례의 말이지만 당시의 박남준 시인의 모습은 너무 예뻤다. 막 소녀 티를 벗어난 여자처럼 몸 전체에서 뿜어내는 향기가 있었다.
게다가 '쑥대머리' 같은 판소리 한 대목을 뿜어내면 우리 가락의 서럽고 기쁘고 욱신욱신한 맛에 가슴이 더워졌고, 여성스럽게 몸을 살짝 꼬면서 '삼다도 소식' 을 부를 때면 모든 사람이 어이없어 멍한 얼굴이 되기도 했다.
가성으로 내는 '미역을 따오리까 소라를 딸까' 대목에선 모두 뒤집어졌다. 영락없는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기왕에 주는 것 다 준다' 며 송창식의 '선운사에서' 를 부를 때면 모두가 노래 속에서 떨어지는 동백꽃과 함께 저 고창 선운사나 각자의 마음 속에 어여쁘게 피어있던 동백 숲으로 가서 엉엉 울고 말았다.
동백꽃이 바로 눈앞에서 툭툭 지며 우리 모두를 섧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천하가객 박남준 시인은 지금 어디를 홀로 떠돌며 서럽게 노래하며 정갈한 시를 쓰고 있는지.
31.작은 거인 김정환 시인
베개를 들고 다니는 사람! 이렇게 말하면 술을 많이 마시고 아무데서나 잠을 청하는 사람을 연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네가 함부로 그렇게 부르는 것 뿐이다.
사실 그 베개는 책이었다. 그것도 우리 말이 아닌 독일어나 프랑스어로 된 책들이었다. 이 책을 모두 읽고 일년에 무려 원고지 2만장을 써대는 사람이 있다.
시는 물론 소설에서부터 역사서까지, 그것도 모자라 음악에 관한 책까지 그야말로 전방위로 책을 써대니 사람은 사람이되 사람 같지 않은 그런 사람이 바로 김정환 시인이다.
1980년대 이후 김정환 시인이 거치거나 만들었던 단체 또한 한 두 개가 아니다. 탑골을 운영할 때에는 주로 문학인들과 어울려 왔지만 다른 곳에서 더 많은 세월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
사무국장을 시작으로 김시인은 민중문화운동연합.노동문화운동연합 등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80년대 초의 이른바 운동의 일환으로 문학 혹은 문화를 실질적으로 이끈 맹장 중의 한 사람.
고(故)
채광석 시인과 더불어 80년대 초반 모든 사회운동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작은 등소평' 이라 불렀다.
김시인의 경우 단체의 행사나 시상식의 뒷풀이로 가끔 왔지 한가하게는 탑골에 들르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탑골에 왔지만 분위기를 일거에 휘어잡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김시인은 바로 그런 드문 사람 중의 하나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행사의 내용을 점검하거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일신할 필요가 있을 때에 김시인은 일어섰다. 그러나 키가 너무 작아 별로 도드라지지 않는다.
그런 체구에서 어떻게 많은 사람을 휘어잡을 수 있는 노래가 나오는 것인지! '제비' 라는 노래는 언제나 지정곡이었는데 처음엔 너무나 작은 목소리로 시작해 곁에 앉은 사람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작은 목소리가 서러운 가락을 타고 중반에 이르게 되면 백여 명이 모인 자리라 할지라도 갑자기 조용해진다. 그리고 감탄을 시작한다.
"사실 나는 김정환이가 쓰는 시가 좀 어렵긴 하지만 시는 어려운 것이니 그렇다 쳐. 그러나 산문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렇게 어려운 개념을 어떻게 그렇게 '변증법적'으로 연결해 나가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런데 노래를 들어보면 알아. 저 자는 시인이야! 영락없는 시인이야. "
여러 얘기들이 있지만 김시인처럼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깊고 서늘하고 처연하고 쓸쓸하고 그러면서도 유장한 맛이 나는 노래.
한 개의 형용사를 제대로 거느리기도 어려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그 많은 형용사를 거느리고, 그것도 동시에 품에 넣고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노래! 이것이 김정환 시인의 노래였다.
그렇다고 술을 못 마시는 것도 아니었다. 유쾌하게 담소하며 찬찬히 마시는 술은 어느 누구와 대작해도 늘 처음처럼 윤이 났다. 한번은 채광석 시인이 말했다.
"김정환이는 인간이 아녀. '시와 경제' 동인이 모일 때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김정환이 집에 몰려갔는데 우리를 재워놓고 쟈가 뭐를 한 줄 알아? 하! 타자기 옆에다 원서를 걸쳐놓고 가운데 손가락 하나로 타자를 치며 책을 번역하고 있더라고. 독수리 타법이지. 그러니 저게 괴물이지 인간이야. 그때 이래로 나는 쟤를 인간으로 보지 않기로 했어!"
명민하기로 치자면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다고 할 채광석 시인이 그런 말을 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랴.
32. 문인들의 고스톱
젊은 문인들이 모이면 즐겁다. 서로의 속옷이 어떤 색깔인지, 그리고 그것은 언제 갈아 입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이미 서로에게 탓 될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탑골을 시작하고 얼마 안됐을 때에 김정환 시인이나 평론가 고(故)
채광석씨 등과 거의 떨어지지 않고 어울려 다니던 많은 문인들 중에서 외국어대 3총사가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재현.현준만씨는 평론가로, 김남일씨는 소설가로 문단에 나오면서 문학운동에 한바탕 풍운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재현씨는 노동문학에 대한 날카로운 평론을 썼고 현준만씨는 '김지하론' 을 비롯해 문제적인 평론을 썼던 민중문학의 맹장들이었다.
그런데 문학에 대한 이론을 펼칠 때보다 어쩌다 여흥으로 하는 고스톱에 대한 이야기는 훨씬 신랄하고 재미가 그만이었다.
"너 재현이, 니가 인간이냐□ 아무리 고도리를 치다가 돈을 잃었기로 개평 하나 주지 않고. 난 임마 그날 이문동에서 수원까지 걸어갔어. 알아!"
"남일이 너한테 누가 걸어가라 했냐고! 같은 그림 찾아서 모아보면 점수가 되고 너는 안돼서 돈을 잃은 것인데 무슨 불만이 많냐고! 야 우리도 수박통(머리)
깨지도록 연구해서 치는거야. 머리가 나쁘면 발도 힘들고 몸도 피곤한거야. 괜히 비 십끗짜리 끝까지 들고 광 먹으려고 하니까 그렇지. 그 판은 육백이 아니고 고도리야 고도리. 새잡는데 괜히 빗자루 틀어쥐고 벌벌 떨며 민폐나 끼치고. "
그쯤이면 김남일씨가 이재현씨한테 다시 한번 피바가지 쓰는 것으로 판명이 난다. 그러나 김남일씨가 그냥 물러갈 수 있는가.
"우리 아버지가 인간성이 나쁜 애들하곤 놀지 말랬는데, 아버님 말씀을 안들은 것은 내 죄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까지 인간성 나쁜 것은 니탓이야 임마. "
"재는 아무 때나 인간성이래. 야 고도리가 인간이냐, 화투판이지. 그리고 너는 걸어가도 싸. 내가 너한테 차비하라고 천원 줬냐? 그 돈으로 어떻게 해보겠다고 또 덤벼서 그렇게 된거고. 너야말로 고도리의 과학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발 고생이나 몸 고생을 통해서 겨우 알 수 있는 터무니 없는 인간주의자야. 총으로 사람 죽인 전모한테나 가서 인간성 회복 플래카드 들고 왔다갔다 하시지. "
이쯤이면 그야말로 인간성 아름다운 김남일씨는 얼굴이 벌개지고 '하이 참, 하이 참' 등의 탄식의 소리만 내게 된다. 그때 쯤 현준만씨가 등장할 타임이다.
"야 남일아. 너 바쁘지 않으면 종로서적 2층에 가서 책이나 몇 권 사서 공부해라. 가서 '과학적 고도리 이렇게 정복하라' 편하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법' 이라는 명상서와 '고도리경(經)
' 을 사서 5년만 수도해. 그러면 우리가 놀아줄게, 우리도 수원이 아니라 대전까지 걷고 싶거든. "
"너 현준만 그러는게 아녀. 너 청년문인 MT 갔을 때 돈 좀 땄다고 그럴 수 있어. 돈 싹쓸이하고 개평 좀 달래니까 점퍼 속 주머니에 그 돈 다 넣어두고 엎어져서 잤지. 잠자는 사이에 누가 지 주머니에서 돈 빼갈까봐. 너도 인간성이…. "
"야 그러면 그렇게 어렵게 돈 땄는데 뭐하러 돈을 돌려 줘. 그러려면 하지 말든가. 괜히 하고 나서 쓸데없는 불만이나 털어놓고. 그러니까 운동을 할 때는 운동을 하고 고도리를 칠때는 고도리를 치고 그래야지. 운동인지 고도린지 구분이 안되면 어떻게 하냐고. 내가 쓰고 이재현이가 감수했으니 책이나 사봐. 나도 인세 좀 챙기게. "
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렀다.
서점에 가면 그날 장난치면서 한 말이 실제로 실현되어 있다. 고스톱이나 카드 치는 방법에 대한 책들이 실제로 많이도 나와 있으니.
33. 저 높은 곳을 향해
'문학을 해도 운동으로, 놀이를 해도 운동으로.' 그것은 외국어대 3총사의 원칙이었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 져서는 안되는 것이며 늘 새롭게 전투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었다.
당시 문학평론을 하던 이재현씨는 박노해 시인 등장 이후 우리 문학의 쟁점이 되었던 노동문학의 문제를 탄탄한 사화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 문학의 중심 테마로 만들어 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현준만씨 또한 노동문학의 중심문제를 쟁점화하는 일은 물론 '김지하론' 등을 통해 문학과 사회에 대한 폭넓은 담론을 제기하면서 주목을 받는 평론가였다.
게다가 소설가 김남일씨를 비롯하여 세명 모두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중요한 분과를 맡아 간사를 하던 맹장들이었다.
그리고 서로는 서로를 비판했지만 언제나 동지로서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3총사가 술을 마시거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각기 달랐다.
술을 마시고 가장 먼저 흥분하는 사람은 이재현씨였고 가장 늦게 발동이 걸리는 사람은 김남일씨였다. 나는 노래도 노력 여하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모범적인 사례가 김남일씨라고 생각한다.
김남일씨가 처음에 노래하던 모습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고 듣는 사람들의 풍경만 떠오른다. 듣는 사람이 참아야 하겠지만 참을 수 없는 것이 곡조 무시하고 제 마음 따라 부르는 노래일 것이다. 낮게 소리내야 할 때 높게 소리내고 늘여 불러야 할 때는 안 늘이고 짧게 끊어야 할 때 여유를 부리고 있으면 참기 어렵다.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노래에 심취해 있는 정도는 참으로 깊고 너른 것이어서 듣는 사람이 눈을 감고 꾹꾹 눌러 참다가 마침내 웃을 수밖에.
그러던 김남일씨도 몇 년 후 '비내리는 고모령'과 '고향의 그림자'를 부르는데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김남일인가 하고 모두 눈을 커다랗게 뜰 정도로 박자와 높낮이가 거의 맞아떨어졌다. 김남일씨가 새롭게 보였다. 또한 그의 독특한 노래를 들어준 많은 동료들의 인내심이 꽃을 피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김남일씨가 '득음의 경지' 에 이른 것은 밤을 세워가며 목이 쉬도록 서너곡을 집중적으로 부른 뒤였다는 증언을 들은 바 있다. (그 노래를 들어준 사람에게 복 있기를)
김남일씨는 술에 취하면 마음의 곡조대로 늘 노래를 불렀는데 거기에 더하여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눈에 띄는 것 중에서 높이 솟아있는 것만 보면 못 참고 올라가는 것이었는데 주위 사람들을 무척 놀라게 한 고약한 취미활동(?)
이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시민을 위한 문학교실'을 서울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열었는데 종강 때면 가끔 한강둔치에서 밤을 새며 뒷풀이를 했다. 그런데 김남일씨는 새벽만 되면 농구골대에 올라갔다.
한번은 전봇대를 끌어안고 꺽꺽 울기도 했다. 너무 미끄러워 올라가기 힘들어서란 것이 그 이유였다. 술에 취하면 왜 어디로든 올라가고 싶었을까?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당시 앞이 안 보이는 사회적 상황에 대한 온몸으로의 항의나 거부의 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현준만씨는 노래를 맛있게 불렀다. 또한 '공포의 바이브레이션' 이라는 말을 듣곤 했는데 '목포의 눈물' 이나 '갈대의 순정' 을 부를 때면 듣는 사람의 마음도 노래의 떨림대로 흔들렸고 조금 과장하면 잔에 담긴 맥주마저 몸을 떨었다.
서로가 서로를 밀고 당기며 1980년대 후반을 살아가는 모습은 같이 어울렸던 문학평론가 김명인.백진기씨, 소설가 김인숙.정화진씨 등과 더불어 민중문학 한 중심의 구체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지금 무르익은 역량을 과시하고 있다. 지금도 그 고도리를 치고 있는지?
34. 탑골의 귀빈
머잖아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고 한다. 한 시민의 입장에서는 그 일이 잘되어 남과 북이 서로 화평하게 사는 일에 큰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통일과 관련된 일을 매스컴을 통해 알게될 때마다 떠오르는 분이 있다. 늦봄 문익환 선생님이다.
민족의 통일이라는 문제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큰 열망을 지니시고 또 그런 일에 참으로 몸을 던져 애쓰신 분. 이런 것이 내가 드릴 수 있는 어쭙잖은 헌사겠지만 그분은 가까이서 뵐 때나 멀리서 뵐 때나 참으로 따뜻하고 큰 산 같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탑골에는 돌아가시기 전 딱 한번 오셨지만 탑골에 들르는 사람들에게서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었고 또 방북한 일로 감옥에 계시는 동안 구속 문인 돕기 일일주점 등을 통해 조그만 힘을 보탠 일도 있어서 매우 많이 오신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하기사 그분이 직접 탑골에 오시고 안 오신 것이 무엇이 중요하랴. 이미 우리 모두에게 큰 어른이자 숨결인 것을. 하지만 탑골에 오신 그날의 일을 잊을 수 없다.
출옥 후 여의도에서 무슨 행사 후에 많은 분들과 함께 오셨는데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털실로 짠 목도리를 두르고 계셨다.
술은 한 모금도 안드셨는데 일행과 아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무척 반가워서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내 손을 덥석 잡으시고 찬찬히 말씀 하셨다.
"한선생 나 탑골 얘기 많이 들었어. 꼭 고향에 두고 온 누이같이 생겼구만. 여기 짓궂은 사람들 많이 오지? 다 괜찮아. 그러잖아도 내 언제 시간을 내서 꼭 한번 찾아오고 싶었는데 시간에 쫓겨 이제사 왔구만. "
나로서는 분에 넘치는 말씀이었다. 더구나 손으로 전해지는 그 느낌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하고 향기로웠다. 마치 어떤 정기가 마음으로 전해지는 느낌이었는데 마음 속의 병들이 치유되는 것만 같았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진담이라고//(중략)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동무라고 부르면서 열살 스무살 때로/돌아가는 거지"
선생님의 '두 하늘 한 하늘' 이란 시집의 맨 처음에 실린 '잠꼬대 아닌 잠꼬대' 라는 시의 앞부분인데 그 말 그대로 당신이 그 엄혹한 시절 방북 하시고 정겹게 그 누군가를 끌어안는 모습을 생각하면 참으로 큰 분을 내 인생에서 만난 적이 있구나라는 느낌이 든다.
그 시의 뒷부분에 "역사를 산다는 것은 훈장이나 타는 일이 아니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는 일이며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 이라는 말은 지금 들어도 신이 난다.
그리고 그 다음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하면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걸어서라도 가겠다" 고 말씀하시는 대목에선 눈물이 난다.
우리는 그 때 참으로 머리가 말짱한 바보들은 아니었는지. 그 시를 쓰고 꼭 그대로 살아내심으로써 그분의 삶 자체가 시가, 아니 역사가 됐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지금이라도 어디선가 그분이 성큼성큼 걸어오셔서 '복희야 잘 사느냐' 고 물을 것만 같은데 이것은 착각일까? 초여름인데도 나는 눈 덮인 야산 사이에 선명하게 찍혀 백두대간으로 이어진 어여쁜 발자국 하나 가슴에 안는다.
35. 마음 편한 손님
이야기를 하다보니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활동하는 문인들 이야기가 많이 되고 말았는데 그 분들과는 조금 다른 분들도 탑골에 오곤 했다.
물론 특별하게 다르다기 보다는 같은 자리에 어울리는 일이 적었던 분들이라고 해야 옳겠다.
소설가 김원일.김원우.이문열 선생님, 문학평론가 정현기.김화영 선생님 등이 그런 분들인데, 나이드신 민족문학작가회의 쪽 어른들은 서로 어울려 반갑게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대개의 경우 그분들은 홀의 한쪽에 어울려 참으로 점잖게 술을 마셨다. 어지간해선 노래도 안불렀고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면서 편안하게 술을 드셨다.
그분들이 오시면 내가 바쁘게 뛰어 다니거나 곤혹스러운 일은 조금도 없었다. 실례의 말이지만 그런분들은 아무리 많이 오셔도 나 혼자 얼마든지 술시중을 들어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다만 그분들 중에서 정현기 선생님은 가끔 한 잔 하시면 노래도 하시고 좌중을 재미나게 휘어잡고 얘기도 하셨다.
정현기 선생님은 염무웅 선생님하고도 친구 사이여서 민족문학작가회의 팀들과 같이 어울려 술을 드시기도 했는데 노래를 할 때는 가곡을 주로 불렀고 정지용의 '향수' 라는 시에 곡을 붙인 노래는 일품이었다.
훤칠한 키에서 바리톤 풍으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많은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고향 마을을 떠올렸고 마시는 술잔을 그윽하게 바라보게 했다.
이문열 선생님은 한국기원에서 바둑대회가 있는 날 대회가 끝나고 난 뒤 가끔 오셨다. 많은 술을 드신 것은 거의 못 봤고 또 매우 바빠 보였다. 그런 때는 밤늦게 신문이나 잡지에 기보 해설을 쓰는 노승일씨나 지금은 소설가로 더 알려진 성석제 시인이 오기도 했다.
그런 분들은 대개 약간의 소란은 있었으나 모두 점잖은 신사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들은 모두 너무나 점잖아서 한분 한분에 대한 뚜렷한 기억이 별로 없다. 아무래도 조금은 시끄럽고 또 싸움도 있는 술자리여야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민화투급 대작' 이란 말이 생각난다. 어느 해인지 분명치 않지만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신년하례식을 마치고 여러 어른 들과 함께 소설가 송기숙 선생님이 오셨을 때다.
신경림 선생님이 무슨 얘기 끝에 '왜 백낙청 선생은 안왔느냐' 고 묻자 송기숙 선생님이 한순간도 생각지 않고 답을 하셨다.
"하이 참 고게 무신 소리당가! 나가, 백낙청이 하고 술을 마실라 하믄 차라리 우리 외할머니 허고 민화투 치겄네. 고렇게 재미 없는 사람하고 무신 술을 마시겄능가?"
전라도 걸쭉한 사투리에 얹혀 나오는 그 말에 곁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배꼽을 쥐고 웃고 말았다. 사실 백낙청 선생님은 탑골에 가끔 오셨지만 거의 들른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오래 계시지 않았다.
또한 여간해서는 한잔 이상의 술을 드시지 않았는데 술 마시는 사람이 어디 그런가. 권커니 잣커니 해야 술을 마시는 것이지. 더구나 송기숙 선생님처럼 두주불사인 분에게는 도무지 성이 차지 않으셨으리라.
소설 쓰시는 분들이어서 그런지 그 표현이 정말 절묘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뒤에 술을 마실 때는 재미없게 술 마시는 사람들을 할머니와 민화투급 술상대라고 비아냥거리면서 마시곤 했는데 생각할수록 재미난 말이다.
아무튼 앞에서 말한 분들이 오신 날은 너무나 평온했고 다른 술꾼들에 비하면 너무나 '민화투급' 들이어서 별다른 추억이 없다.
실제로 가장 큰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추억할 풍경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섭섭하다. 대신 인사를 올리고 싶다.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36. 시인의 행복
세상에서 단 하루 살고 온 죄수도 평생 감옥에 있는 동안 추억할 일이 모자라지는 않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은 쪼개보면 볼수록 애틋하고 서럽고 때로는 기쁘고 아름다운 일이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는 뜻이겠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런 아름다움을 찾아내 즐거워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우리에게는 너무 힘들고 지치고 짜증나는 일 투성이다.
종로 네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을 붙잡고 '행복하세요'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경우 '미친 사람 다 보겠네' 라는 시큰둥한 반응 아니면 '말도 마소, 나같이 힘든 사람은 조선 팔도에 없을 것이오' 라는 말을 듣지 않을까 싶다.
탑골을 하는 동안 나는 진짜 자기가 부자라며 수줍게 웃는 사람을 보았다. 정희성 시인이다. 언제나 단정한 옷을 입고 늘 조용하며, 많이 빠진 머리카락 때문에 모직으로 된 모자를 눌러쓰고 점잖게 술을 마셨는데 어느 날 나를 은밀히 불렀다.
"복희씨! 나 말야 할말이 있는데. "
"예? 정말이세요. "
정희성 시인이 그렇게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부르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어서 나는 긴장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정말 비밀을 밝히는 것처럼 속삭이는 목소리로 가슴께에 손을 얹으며 말씀 하셨다.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아? 시가 두 편이야. 시 두 편이 내 가슴 위에 얹혀 있다는 것이 여간 든든한 게 아니야. 내가 정말 부자라고. "
나는 다소 당황하였다. 가슴께에 두둑한 현금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또한 하도 은밀하게 말씀하셔서 순간적이나마 로맨틱한 말을 기대하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겨우 시 두 편에 그렇게 나이 드신 분이 얼굴이 환해져서 행복할 수 있다니! 순간 그 말이 너무나 재미 있어서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부자 되셨으니 한턱 내셔야겠어요. "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멋 없는 말이 없었다. '작품 쓰셨으니 얼마나 기쁘세요' 라든가, '시 한편 씌어지면 그렇게 기쁜가 보죠' 등등 좋은 말이 얼마나 많은가.
송구스럽다는 생각이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부럽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단 한가지 좋은 시에 대해서는 부러움을 느끼는 것이 시인 아니던가!
그런데 사실 정희성 선생님에게서 로맨틱한 그 무엇을 기대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평소에 술을 드시면 거의 '민화투급' 이셨지만 가끔 우리를 놀라게할 만큼 노래를 그럴듯하게 불러주셨기 때문이다.
다소 고색이 창연한 트로트풍의 노래였는데 제목은 '남포동 부르스' 였고 노랫말은 상당히 고혹적인 것이었다. 또한 그 노래를 부르실 때는 순진한 청년이 좋아하는 연인을 위해 부르는 꼭 그런 모습이어서 듣는 사람들 모두가 정희성 시인의 어디에 그런 모습이 숨어있었을까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희성 선생님은 천생 선생님이셨다. 지금도 서울의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대학에서 국문과 교수로 초빙된 일이 있었지만 응하지 않고 중등교육 현장을 지키신 것으로 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자신의 키를 재려하지만 정희성 선생님은 그런 키재기에는 관심이 없고 대신 맡은 일을 처리할 때는 꼼꼼하기로 소문이 난 김사인 시인도 머리를 흔들 정도로 정확했고 빈틈이 없었다.
그런 분도 발표되지 않은 시에 한 생애의 보람을 다 얹어 흐뭇해하며 부자라고 큰소리치는 일이 있었으니…. 세상은 얼마나 그윽한 것인가.
37. 과묵한 주당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일이 있을 때라든가 위기에 처했을 때 크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문학평론가 구중서 선생님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 한다.
구선생님이 탑골에 오시면 참으로 조용하게 술을 드셨다. '과묵한 술꾼' , 그런 말이 있다면 구선생님께 딱 어울리는 말이리라.
대개의 경우 신경림.민영.정희성 시인 등과 함께 왔고 인병선 시인(신동엽 시인 부인)
이 동행할 때도 있었다. 특히 신동엽 창작기금 수여식이 끝난 날은 틀림 없이 탑골에 오셨다. 그런 때는 가게 안이 매우 어수선했고 좋게 말하면 활력에 넘쳤다.
또 그런 날은 술자리가 무르익게 되면 누군가가 수상자에게 축하의 말을 하면서 노래잔치가 벌어졌다.
그런데 지금이야 술 마시고 노래 부르는데 큰 제약이 없지만 1987년 무렵에는 여러 제약이 많았다. 부르는 노래도 은근히 제약을 받았으며 말하는 수위도 적당한 선을 넘는다는 것이 다소 부담스럽기도 했었다.
그 어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구선생님이 호명되어 노래를 불러야할 차례였다. 대개 연만한 어른들께선 트로트 풍의 옛노래를 불렀던 터여서 그와 유사한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싶었는데 난데없이 신동엽 시인의 시와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분위기가 묘해져서 웅성거리게 되는데 구선생님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이 한참 말씀하신 연후 노래 대신 좋은 시를 들려주시겠다며 정지용의 '향수' 를 낭송하시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납.월북 시인들의 작품이 해금이 되네, 안되네 하던 때여서 약간의 긴장이 요구되었지만 구선생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의젓하고도 장중하게 시를 암송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로 매듭 되는 5 연의 긴 시를 한번의 막힘도 없이 낭송을 끝내자 사람들은 모두 환호했다. 그러자 다시 한 말씀이 시작되었다.
"여러분이 좋은 시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항상 마음 속에 새길 말로 다산 정약용의 말씀이 있습니다. '不憂國 非詩也' (불우국 비시야)
라는 말인데 시를 쓰되 민족이라든가 공동체를 늘 염두에 두고 시를 써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나라를 염려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라는 다소 과격한 이 말을 오늘같이 험한 세상에서 시인들이 늘 마음에 두어야 시가 음풍농월이나 한가한 자의 소일거리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노래판이 걸판지게 벌어져 계속 소란스러울 것 같은 분위기가 일신되었고 다소 무거워지기까지 했다.
그러자 다시 구선생님이 "내가 느닷없이 분위기 망치는 얘기를 했노라" 며 대단히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냥 재미나게 노래하고 술 마시자고 제안하셨다. 그러자 누군가가 혼잣말로 한 마디 했다.
"구중서는 저게 병이야. 아무 때나 너무 무게를 잡는다구. 하기사 그게 구중서지, 어디가!"
주위의 사람들이 일제히 웃었지만 나는 가끔 마구 달려가는 일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딘가 한 번은 일단 멈춰서고 다시 갈 길을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그런 때에 바로 구선생님이 지니신 풍모가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닐까. 구선생님이 민족문학작가회의 부회장이라든가 한국민족에술인총연합 이사장을 역임하시게 되는 일이 바로 그러한 모습의 방증이 아닐까?
그렇지만 그런 구선생님도 바둑을 둘 때는 달랐다. 바둑이란 묘해서 그 어떤 사람도 승부욕의 화신처럼 변하게 하는 요물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한 수 물러달라는 말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일이나 딴 돈을 호주머니에 챙기면서 짓는 그 표정은 전혀 다른 또 한사람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38. 영원한 '라이벌'
탑골공원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노인들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3.1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자리였다는 역사적 사실보다 언제부턴가 모이기 시작한 노인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정치적 소신을 발표하고 또 심심풀이 장기나 바둑을 두는 '중앙 노인정' 같은 역할로 더 알려진 곳이다.
가게가 바로 탑골공원 뒤쪽이지만 그렇다고 자주 가는 편은 아니었다.
'근친혐오증' 이란 말처럼 '근처기피증' 이란 말도 있음직한데 언제라도 가볼 수 있는 곳이어서 더욱 안가는 그런 곳이 탑골공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 번 우연히 가보고 난 뒤에는 그곳에 가끔 들렀다. 우선 담장 하나에 가려져 있지만 현대식 도시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고 또한 그곳에 가족과 한나절을 떠나 있는 것이 일인 많은 노인들이 모여있는 풍경이 좋았으며 그러다가 가끔 생기는 싸움도 왠지 정겨워 보였다.
물론 그분들이야 나름대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일 테지만 싸우는 이유가 터무니 없는 경우가 많아서 실소를 자아내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었다.
정치적 견해가 달라 싸우는 진지파나 투사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장기판이니 바둑을 둘러싸고 일어난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훈수를 두지 말아야 할 때 했거나 한 수만 물러 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짓밟은 야속한 사람이란 것이 주된 이유였으니 얼마나 재미 나는가.
한때는 모두 이 세상의 어딘가에서 주름을 잡던 분들이 이제는 그런 날과 경륜을 후대들에게 넘겨주고 장기판 말의 생사에 목숨을 거는 모습!
얘기가 길어졌지만 탑골에 오시는 분들 중에서 만나면 대개 한바탕 입씨름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들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민영 시인이다. 민선생은 신경림 시인에게 주로 시비를 걸었는데 대개는 키와 관련된 말이었다.
"야 꼬마야! 너는 어려서 얼마나 못먹어서 그리도 작누?"
"하이 요놈 봐라. 완전 땅꼬마가 어른한테 꼬마란다. 민영이 지가 나보다 훨씬 작으면서 큰체 하는걸 보면 우스워 죽겠어. "
그런 때에 젊은 이승철 시인이나 이재무 시인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선생님들 신발 벗고 방으로 들어오시죠. 오늘은 정말 두분 중에 어떤 분이 크신 것인지 결판을 내드리겠습니다. 자 어서 들어오시죠. 이런 때에 김규동 선생님도 모시면 좋은데. " 그런 말에 한 분은 반드시 적극적으로 나온다.
"민영이 너부터 들어가, 내 들어갈테니. "
"경림이 니가 들어와야지. 너 안들어 올라고 그러지?"
"뭐야. 저번에 내가 들어가서 재보자고 했을 때 안들어 와놓고!"
하지만 우리는 알았다. 두 분의 키재기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서로를 힐난하는 것같으면서도 눈에서는 미소가 얼굴 전체에 퍼져 있는 것을. 그러므로 두 분의 키재기는 영원한 숙제라는 것을. 그렇게 한바탕 하고나면 술자리는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모른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다니는 민선생은 별로 술을 안하시지만 신경림 선생님은 꽤 술을 드시는 편이었다.
특히 두 분 모두 젊은이들의 생각을 많이 존중해주는 편이었고 가끔은 따끔하게 작품 얘기도 하는 편이어서 그런 때는 2차, 3차도 기꺼이 가셨다.
그런 때에 호기심 많은 젊은이들이 묻곤 했다.
"두분 선생님들 언제나 서로 키가 크시다고 하시는데 정말 누가 크신겁니까?"
그러면 언제나 답이 똑 같았다. "그걸 말이라고 물어. 그리고, 보면 몰라? 내가 더 크지!"
39. 움직이는 얘기보따리
늘 어디서나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분들이 있다. 그 중심은 어지간해서 이동하지 않고 모임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는데 소설가 천승세 선생도 그런 분이다.
선생이 한마디 하면 어떤 시구보다 빛이 났다. 날카로운 끌처럼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용렬함과 비겁함을 쪼아냈다. 특히 천선생의 경우엔 사람을 넘어 하찮은 동물에까지 두루 안 미치는 바가 없었으니….
말 안듣고 짖기만 했던 개의 코를 물어 개의 버릇을 고쳐준 이야기며 젊은 시절 가난한 연인이 곡물 부대로 지어 입은 속옷에 쓰인 '정량 20㎏' 등은 문인들에겐 고전이 됐다. 왕년의 주먹시절 이야기는 전설이 된지 오래다.
어떻게 하여 많은 이야기들이 뒤따르는 것인지 참으로 신기하다.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전설' 이며 '움직이는 설화' 라고나 할까. 천선생이 겪은 이야기 끈을 풀어놓으면 그대로 생생한 그림이었다.
"내가 동네에 나갔다가 문열이 돼지 새끼 한 마리 안 얻어왔냐. 너 문열이 알아□ 돼지가 새끼 날 때 맨 처음 지 에미 그 곳을 열고 나오는 놈 말야. 고것이 다른 놈허고는 다르잖냐. 안커요. 그래서 그 놈을 일부러 매장해버리기도 하고 그냥 밟아 죽이기도 하지.
그런데 고놈이 너무 불쌍해서 내가 집으로 데리고 왔지. 하, 고놈 생각하면 이뻐 죽겠어. 그래서 고놈하고 집에 있던 개를 내가 우유를 주고 키웠지. 니들 돼지란 놈을 멍청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는데 그래도 고것이 영리한 디가 있어요.
한 5분 정신없이 먹고서는 한 10초 정도 명상하는 것 모르지. 명상할 때 돼지 표정을 보면 참으로 거룩해요. 그렇게 한 4개월 정도 키웠더니 중돼지가 다 됐어. 아참 그놈 이름이 깡돌이여. 왜 내가 그 멍청한 돼지한테 깡돌이란 이름 붙여준지 알어?"
그쯤 말하면 듣는 사람들은 침을 꼴깍 삼키고 술도 한잔씩 권하면서도 한시 빨리 다음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학수고대한다. 약간 뜸을 들인 후 이야기를 계속한다.
"키운지 3개월이나 되었을까? 한번은 밤중에 같이 키우던 개 흰돌이가 죽어라고 소리를 질러요. 흰돌이란 놈도 영리하고 사나운 놈인디. 무슨 난리가 벌어졌나하고 내가 나가봤지. 아 그랬더니 그 돼지란 놈이 흰돌이 국부를 우유 젖꼭진줄 알고 빨고 있었던 게야. 허 참, 그러니 그 흰돌이란 놈 땀을 뻘뻘 흘리며 소리를 지를 수밖에. 내가 그냥 버려두면 흰돌이가 죽을 것 같아서 돼지란 놈을 혼내서 중단시켰지. "
듣던 사람들은 모두 눈물.콧물을 쏟으며 웃지만 천선생은 웃지도 않고 계속했다.
"그래서 고놈을 내가 깡돌이라고 불렀던거야. 그래서 이젠 '개하고 같이 키워서는 안되겠다' 싶어 돼지우리를 만들어 키웠지. 그런데 고놈이 뭘 아는지 내가 가기만 하면 지 에민줄 아는지 고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어요. 한 4개월쯤 됐을 때였는데 사고가 났어.
밥을 주려고 우리에 들어가서 고놈을 돌아 들어가는데 나를 머리로 받는거야. 그런데 어떻게 재수가 없을라고 내가 넘어졌잖냐. 지가 싼 똥이나 오줌 속에 자빠졌는데…, 어찌나 화가 나던지. 나도 참았어야 했는데 못 참고 허벅지를 한 대 때렸지.
그랬더니 이 자식이 그냥 옆으로 가더니 픽 쓰러져요. 냄새 더럽더라고. 그런데 고놈이 점심 때에 가봐도 일어나지를 못해. 그래서 보니 허벅지 부근이 좀 부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 계속 자빠져 있는 거야. 결국 며칠 후에 죽더라고. 뒤에 확인해보니 허벅지 부근의 뼈가 으스러진거래. 병들어 죽은 놈은 못먹잖냐. 불쌍하기도 해서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줬지. "
40. 자나깨나 술조심
힘 들여 친 것도 아니고 홧김에 돼지의 허벅지를 한 대 때린 것이 그 정도였다니!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하도 흐벅진 이야기의 뒷끝이라 더 이상 캐물을 수도 없어 천승세 선생이 가끔 쥐는 주먹의 위력이겠거니 하고 넘어가고 만다.
천선생은 늘 그렇게 이야기의 중심에 있었다. 그렇다고 푸짐한 이야기꾼으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가 출범한 이후에는 주로 구속자를 위한 복지활동에 힘썼고, '민족문학작가회의' 로 재출범한 이후에는 자유실천위원장으로 또 부회장으로 많은 활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또 1987년 이후 각 대학에 민주동문회가 꾸려졌는데 천선생이 성균관대 민주동문회와 전국민주동문회 연합모임의 회장을 역임한 것으로 안다.
그런 천선생을 젊은 문인들이 많이 따랐다. 그것은 작가회의에서 자유실천위원장을 맡아 일을 하며 이른바 궂은 일들을 앞장서서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구속문인들을 위한 일일주점과 구속문인 석방촉구 시낭송회 등을 열며 많이 어울렸다. 그 때마다 천선생은 때로는 신나는 육담으로, 때로는 문학하는 자세에 대한 준절한 가르침으로 후배들을 챙긴 것으로 안다.
천선생과 얽힌 일화를 하나 쯤 가지고 있지 않은 젊은 문인은 없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천선생이 젊은이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던 시절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지방에서 열린 시낭송회에 천선생이 낭송 시인으로 참여했던 때의 얘기다. 대개 이런 행사는 일찍 끝난 뒤 큰 방을 잡아 지역의 문인들과 어울려 술판도 벌이고 또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외출해서 친지를 만나곤 하는데 그날도 천선생은 젊은이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고 한다.
오전 4~5시가 돼서 각자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자려고 할 때쯤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박몽구 시인이 후배문인에게 "야, 이제 술판 끝났냐. 그리고 승세는 자냐?" 하고물었다.
천선생과는 삼십년 가까이 차이가 나는 박시인인지라 딴에는 친밀감을 과시하고 호기도 부릴 양으로 그런 소리를 했을 텐데 하필이면 천선생이 자려는 방 바로 앞에서 말한 것이 탈이었다.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던 천선생은 문을 살며시 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야, 승세는 아직 안잔다. 그런데 니가 몽구냐?" 함부로 말을 했던 박 시인이 얼마나 놀랐을까? 그야말로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린 셈이었다. 다급해진 박 시인은 고개를 숙이며 "하이코! 선생님 아직 안주무셨고만요. 나는 선생님이 주무시는줄 알고…. " 하고 더듬거렸다.
그 뿐이 아니었다. 박 시인은 옛날 대역죄를 진 죄인처럼 무릎을 꿇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예의 그 주먹으로 한 대 맞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천선생은 "야 니가 술이 좀 취한 모양이구나. 방에 가서 편히 자거라" 고 점잖게 타이를 뿐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 뒤 탑골에 들른 문인들은 천선생의 그 일을 한참 동안 되뇌이곤 했다.
아무튼 천선생이 오시면 탑골은 늘 풍요로왔다.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또 싸움이 벌어지면 벌어진 대로 활력이 생겼다. 희한한 것은 모든 일이 원만히 끝나는 것이다. 천하의 싸움꾼이라 할지라도 천선생이 나타나서 한번 휘둘러보기만 하면 조용해졌다.
신라때 만파식적(萬波息笛)
이란 피리가 있다고 했는데 그 시절 천선생이야말로 외롭고 서러워서 싸우기 좋아하는 문인들의 만파식적이 아니었을까?
41. '광화문 용사' 이도윤
시인들이 시만 쓰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그런 이는 없을 것이다.
대개 직업을 갖고 있는데 시 쓰는 일과 관련있기도 하지만 가끔 전혀 동떨어진 일을 하는 이들도 있다. PD인 이도윤 시인도 그런 예다.
이시인은 직업만 이색적인 것이 아니라 용모도 출중한 편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과는 달리 술을 마시면 울기도 잘하고 또 애교 섞인 주정도 많이 부렸다. 건강 문제로 의사가 강력하게 금주를 권했는데도 술을 끊지 않았다.
술을 마신 뒤에는 남진의 '가슴 아프게' 나 배호의 '누가 울어 ' '아직도 못다한 사랑' 등을 자주 불렀다. 노래 솜씨가 하도 뛰어나서 '살아있는 배호' 로 통했다.
이 시인이 탑골에 온 어느날 너무 많이 술을 마셨다. 옆에는 이승철.박영근.이재무.장대송 시인 등이 있었는데 그 날은 이시인의 술주정을 차분히 받아주고 있었다. 물론 그들보다 이시인이 나이가 조금이라도 위였지만 그날만은 관계가 역전된 것 같았다.
"야, 그게 어디 니 잘못이냐. 어차피 터질 일이었고 너 또한 양심에 하나도 거리낄 것 없는데 뭐가 속 상하다고 울고 그래. 자 술이나 맘껏 마시자. "
"얌마 니들이 뭘 알아! 나 때문에 억울한 사람 목이 잘렸는데. 나도 먹고살기 위해서고 경찰도 먹고살기 위해선 데. 나 때문에 억울하게 목이 잘려서야 될 일이냔 말야. "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사연인 즉 이랬다. 당시 이시인이 보도국 기자로 있으면서 고속도로에서 '삥땅' 을 치는 경찰관들을 촬영해 보도함으로써 경찰관 서넛이 파면당했는데 그중 한 명은 현장에 없었지만 같은 조라서 억울하게 파면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그 경찰은 당시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며 소송을 내고 이시인을 증인으로 요청했다는 것. 그러나 방송국 관례상 증언을 하지 못해 서류상으로 현장에 없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지만 그 일이 잘못돼 결국 그 경찰이 옷을 벗게 됐다는 것이다.
방영된 내용이 일본 NHK TV에 그대로 보도되고 한국기자협회에서는 한국기자상을 준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일 때문에 억울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하루종일 술을 마시고 방송국을 그만 둔다고 난리를 피운 것이었다.
그 일이 있고난 뒤에 이시인은 보도국에서 스포츠국으로 자리를 옮기고 이후 스포츠 쪽에서 PD로 일을 한다고 들었다.
어찌 보면 한없이 문약해 보이는 이야기인데 정작 이시인은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광화문 용사' 였다. 광화문 용사라면 광화문 네거리에서 거창한 시위나 독립투쟁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1987년 이후 정국이 한창 가파르게 대결구도로 가고 있을 때 이시인이 광화문에서 누군가의 결혼식이 끝나고 선배 문인들과 함께 술을 마신 뒤의 일이다.
지금도 화장실 문제는 심각하지만 당시는 더했고 맥주를 마신 몸은 출렁대는 방광을 비워달라고 요란 법석을 떨었으니…. 이시인은 결심했다고 한다.
세상도 맘에 안 들고 그렇다고 그걸 못 참는 방광도 불쌍하고, 때는 일요일이라 거리는 비교적 한산했으므로 얼마간의 호기와 저항의식으로 광화문 네거리에서 이순신장군 상이 볼 수 있도록 물줄기를 쏘아댄 것이다.
그러나 마른 모래에 몸을 감추며 흘러가는 물줄기가 멀리 가기도 전에 달려온 경찰에 의해 그는 붙잡히게 됐고….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광화문 용사다.
42. 문인들의 대합실
얼마 전 민주화를 위해 불처럼 태풍처럼 살다가 안타깝게 타계한 조태일 시인은 유신시절 밤마다 장독대에 서서 '유신독재 타도' 를 외치다가 당국에 혹심하게 당한 '전설' 을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를 '장독대 사건' 이라 불렀다.
이도윤 시인이 나름의 반항을 광화문 네거리에서의 방뇨로 표현한 것을 '광화문 사건' 으로 부른 것도 이런 의식의 연장선상에서였다고 볼 수 있을까.
이웃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틋한 친밀감과 잘못된 권력에 대한 거부감이 다소 우습게 표현된 바 없지 않지만 이런 모습들이야말로 당시 시인들의 투박하고도 건강한 초상이 아닐까 한다.
그러고보니 많은 지역문인들이 떠오른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큰 행사를 치를 때에는 지역의 문인들이 대거 서울에 왔다가 밤차를 타고 내려갔지만 떠나기 전에 탑골에 모여 서로 회포를 풀곤 했다.
자연 각 지역 연락간사들이 주축이 되었는데 부산지역은 최영철.이적 시인, 마산.창원은 이소리 시인, 대구지역은 김용락 시인, 청주는 김희식.김성장 시인, 대전은 이강산 시인, 전주는 박남준 혹은 박배엽 시인, 광주는 임동확 시인 등이었다.
이들은 늘 지역의 중견.중진 문인들을 모시고 왔다.
가령 광주의 이명한.문병란 시인, 전주의 정양.최형.이광웅 시인, 부산의 임수생 시인, 창원의 이선관 시인, 밀양의 고(故)
이재금 시인, 대구의 이하석 시인, 청주의 도종환 시인, 속초의 이상국 시인, 울산의 김태수 시인 등이 그런 분들이다.
이들은 술좌석에서도 문학의 민주화라든가 지역문화운동 혹은 문학운동의 활성화를 고민하곤 했다. 서로 성공담을 청해 들으며 때론 부러운 표정도 되고 때론 한탄하기도 했다.
탑골에서 서로 나누는 얘기를 귀동냥하다보면 이들이 없다면 전국적인 행사를 열기가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인원들을 동원하고 행사의 내용을 채우고 또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또 그들이 가끔 데리고 온 지역 신인 문인들로 탑골의 술자리 또한 풋풋하게 전국 규모가 되어갔다.
지역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이들과 서울에서 활동하는 젊은 문인들이 모이면 그야말로 활력이 넘쳤다.
청주의 김희식 시인이 부르는 판소리나 '진주난봉가' 는 일품이었고 김용락.최영철.유명선 시인등의 트로트 등은 언제나 재미 있었다.
물론 이들은 피가 뜨거워 당시의 운동가를 많이 불렀고 가끔씩 싸움판도 벌였다.
하지만 그 싸움들은 서로의 애정과 존재를 확인하는 몸짓이었으므로 언제나 벅찬 감동으로 귀결되었다.
한쪽에서 서로 언성을 높여 싸워도 그 옆에선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술을 마셨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상한 술판이라 여겼음직하다.
그런 때에 고 채광석 시인은 자신의 시에 즉흥적인 곡을 붙여 노래를 불렀는데 그 곡은 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언제 어떻게 올라갈지 아무도 몰랐고 언제 끝날지는 '며느리도 모를' 만큼 절묘했다.
큰 입 그리고 유난히 하얀 이가 감은 눈과 함께 이루어내는 괴상한 노래는 많은 사람들을 터무니없이 긴장시켰고 노래가 끝난 뒤에는 굉장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해할 수도 없고 듣기에도 민망한 노래가 빨리 끝난 것이 적잖이 안심돼 치는 박수 같기도 했다.
또한 거기에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박영근 시인이나 키가 장대 같았던 강세환 시인이 휘청거리며 부르는 노래가 곁들여지면 한바탕의 난장이 벌어졌다.
80년대말 순정한 시대적 양심과 야성 넘치는 글들로 들불같이 일어났던 그 민중.노동.지역 문인들은 지금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43. 문인들의 춤바람
해 떨어지기 전부터 탑골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젊은 남자문인들이 선배 여류 소설가 이경자씨와 몇 잔 마시며 속닥거리더니 일어났다.
일행은 허리우드 극장 부근의 한 카바레를 찾아갔다. 소설가 김영현.김남일, 시인 강형철.박영근.이승철.이재무.박선욱.이소리.이원규 등을 이경자씨가 이끌었다. 92년 연말 무렵이었다. 이들이 카바레를 가기 전에 간단한 교육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야 거기 가서 괜히 종업원들하고 싸우면 안 된다. 그리고 파트너가 정해지면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곡에 맞추어 춤을 추는 거야. 너희들이 맨날 나라의 민주화니 민족의 통일이니 거창하게 이야기하지만 이 시대 마음 둘 곳 없는 주부들이 장바구니를 들고 와서 잠시 마음을 놓아두는 풍경을 보면서 깨우치는 것이 있어야돼. 그 많은 주부들을 소외시켜 놓고 무슨 민주화냐. 그리고 설령 춤을 못 춰도 성의를 다해 춤을 추는 모습을 보여줘야해. 알았지. "
"추다가 약간 흥분되면 어떻게 하죠?"
"염려 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또 그렇게 야한 포즈를 취하면 퇴장 당해. 잘 들어. 춤을 추러 가는 것이 아니고 민중들의 숨결을 배우러 가는 거야. "
"너무 거창한 것 아닙니까. 춤은 춤이지. "
일행은 약간 어두운 카바레 입구를 들어서고 있었다. 입장료는 그날의 교사 이경자씨가 냈다.
이씨는 일하는 사람을 불러 뭐라고 말했다. 그러자 종업원은 일행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10여 명의 시인.소설가들은 대기실에 죽 앉았다. 맨 먼저 플로어에 나간 것은 김영현.강형철씨였다. 이승철 시인이 소리쳤다.
"카바레에서도 선후배가 있나 뭐. 여봐 웨이터. 거 우리도 인간답게 춤 좀 춥시다."
나머지 사람도 웃으면서 웅성거렸다.
"잘 추고 오쇼. 빠꾸 맞지 말고. "
그 사이에 이경자씨는 시범을 보이듯 한쪽에서 춤을 추고 있었고 나머지 문인들도 마침내 플로어로 다 나가서 처음으로 '인간답게' 블루스를 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력한 보람도 없이 곧 이어 하나 둘 제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강형철 시인이 말했다.
"아아니 그럴 수가 있는 거야! '목포의 눈물' 에 맞춰 도로똔지 도로프슨지 일절을 췄는데 손을 턱 놓아버리는 거야. 젊은 사람이면 내가 이해한다, 인간적으로. 하필이면 칠십은 다 된 것 같은 할마씨가 그럴 수 있냔 말여. "
"야 그러니까 너도 기본 스텝은 익혀 둬야지. 그리고 너는 뭐 젊어 보이는 줄 아나본데, 너도 가서 거울 좀 봐라. 내가 할머니라도 너하곤 안추겠다."
"어허 내가 이래봬도…. "
그런 허튼 자부심은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묻히고 멀리서 춤을 추는 일행의 선생의 스텝만 아름다워 보였다. 누군가 말했다.
"야 나가자. 이거 창피스러워서. 당장 어디 가서 춤이라도 배워야지. "
하지만 일행은 춤을 배우러 가지도 못하고 대거 탑골로 몰려왔다. 그래도 1절과 2절이 끝날 때까지 춤을 추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자기의 파트너는 젊은 새댁 같았다고 큰소리 치는 사람도 있었고.
"야 그렇다고 빨리 나오면 어떻게 해. 내가 말했잖아, 성의를 다해서 춤을 춰야 한다고. 아무리 손을 놓아도 애틋하게 애원을 했어야지. "
뒤늦게 돌아온 이경자씨가 일행을 향해 훈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44. 五松會와 이광웅
소설집 '절반의 실패' 를 펴낸 이후 페미니즘 문학의 중요 쟁점이 될 만한 문제작들을 계속 발표하던 소설가 이경자씨는 젊은 문인들과 특히 잘 어울렸다.
인세가 나오거나 원고료를 받으면 젊은 문인들의 보양을 위해 개고기도 사고 '카바레의 춤' 처럼 젊은 문인들의 모자란 부분을 거침없이 보완해주기도 했다. 재미있는 음담패설도 즐겨 하는 편이었고 듣기도 매우 좋아했다.
늘 강조한 것은 문학이나 문학운동이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젊은 문인들로부터 '인생파 누님' 이란 말을 많이 들었다.
그는 비슷한 연배의 문인들을 곧잘 탑골로 소집해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소설가 송기원.박범신.윤정모.김성동.윤명혜씨, 시인 노영희.고(故)
고정희.이시영씨 등과 80년대 함께 어울려 '우리는 외로운 사십대' 라며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아무튼 그날 젊은 문인들의 카바레 견습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에게 약간의 세상연습을 시켜준 것은 '인생파 누님' 다운 행동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렇게 약간 에로틱한 인생파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야말로 아름다운 영혼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인생파 시인' 도 있다.
바로 시인 이광웅 선생이다. 물론 이광웅 시인이 탑골에 온 날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전교조 행사를 마치고 왔거나 구속문인을 위한 문학의 밤 행사가 있을 때였는데 특별하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 온 것도 잘 몰랐다.
5공 시절 초반 월북시인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 을 차에다 두고 내린 일 때문에 수배 대상에 올랐고, 그 일로 진보적인 교사 다섯 명이 감옥에 간 사건이 '오송회'사건이다.
이광웅 시인은 그 조직의 '수괴' 로 몰려 5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87년에 석방됐는데 감옥에 있는 동안 '대밭' 이란 옥중시집을 냈다. 89년에는 '목숨을 걸고' 라는 시집도 냈다.
출옥 이후 문인들이 석방운동에 힘써준 것에 감사하는 뜻으로, 또 감옥에서 만난 김남주 시인의 안부를 전하는 전령으로 가끔 문인들과 자리를 함께했는데 늘 조용했다.
술도 조금밖에 못하는 편이었으나 미성으로 부르는 노래는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해방 후 유행한 '부용산'은 물론 감옥에 있는 동안 미전향 장기수들로부터 배웠다는 일련의 노래는 나로서는 잘 들어보지 못했던 잔잔한 노래들이었다.
그러나 노래의 아름다움보다 노래를 끝낸 뒤의 이광웅 선생이 짓는 표정이 사람들을 더욱 감동하게했다.
추운 겨울 난로 가에 다가온 소년의 뺨처럼 해맑고도 붉은 모습이었는데 거기에 약간 부끄러움이 더해졌으니 우리 모두는 "저분은 천생의 시인이야" 라고 찬탄할 수밖에 없었다.
"원양어업이란 말보다 먼바다 고기잡이가 더 좋은 것 아니냐" 고, "개인이 사대주의를 하면 머저리가 되고 인민이 사대주의를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뭐가 나쁘냐" 며 취조하는 형사에게 대드는 통에 "이런 악질은 처음 본다" 며 배후 세력을 찾아낼 때까지 물고문.비행기고문.통닭구이고문.전기고문 등을 당했다고 한다.
결국 아름다운 인간이라는 배후 밖에 아무 것도 보여줄 수 없었던 시인 이광웅. 그러나 그분도 돌아가셨다.
92년 암으로 돌아가신 선생을 묻고 온 날 젊은 시인들은 탑골에서 또 한바탕 술을 마셨다.
세상의 맑은 영혼들은 받아들이는 비극에 대한 감도가 더 예민하고 깊은 까닭에 몸에 침투한 병원균도 더 극악스러워지는 것이 아닐까.
잔잔하면서도 올곧기 짝이 없던 시인 한 명, 탑골의 어두침침한 공간에서가 아니라 이즈음 세상이라는 넓은 광장에서 마음의 등불로 기억된다.
45. 탑골의 정객들
탑골을 운영하는 동안 뜨내기 손님들은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문화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전혀 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일부 정치인들은 문화인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렸다. 김상현.고(故)
이수인 의원, 손학규 의원과 5공 실세였던 허문도씨 등이 그런 분들이다.
마당발로 소문난 김상현 전의원은 민예총 관계자들과 많이 왔다. 김용태.여운.김정헌 화백이나 고은.신경림.구중서 선생 등과 같이 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김상현 의원은 늘 술자리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고,끝날 때는 술값도 기분 좋게 계산해주는 멋쟁이었다.
사실 나는 탑골에서 김 전의원을 처음 만났을 때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1년 정도 그의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일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는데도 나를 알아보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눈썰미는 참으로 매섭다고 생각했다.
손학규 의원은 1993년 보궐선거에서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자당 후보로 당선된지 얼마 후 지구당 관계자들과 함께 탑골에 들렀는데 거의 자정이 다 돼갈 무렵이었다.
당시만해도 '자정이후 영업금지' 라 곤란했다.
어찌할까 망설였는데 손의원과 친분이 있던 이시영 선생이 특청을 해서 술을 내놓았다.
손의원은 문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면서 "문인들 빽으로 술을 마시게 되어서 술맛이 더 좋다" 면서 매우 즐거워했었다.
이수인 의원은 국회의원이 된 후 송기숙.고은 선생 등과 어울려 탑골에 왔는데 술을 아주 즐겼다.
특히 송기숙 선생과는 형제처럼 어울려 인상적이었다. 대구출신이면서 호남에서 당선됐다는 특이한 경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 자체가 지역문제를 초월해 우의를 보인 것으로 내 마음에 남아있다.
며칠전 신문에서 작고기사를 보면서 지역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제일 자주 온데다 강력한 인상을 남긴 이가 바로 허문도씨다. 5공 시절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 는 막강한 힘을 가졌던 분으로 알고 있는데 "탑골을 김지하 시인 때문에 알게 되었다" 며 가끔 와서 조용히 술을 마시곤 했다.
주로 방에서 술을 마셨는데 한번은 당시 작가회의 젊은 문인들과 맞닥뜨리는 바람에 적잖은 소란을 빚기도 했다.
5공 청문회가 끝난 한참 후였는데 젊은 문인들은 허씨를 알아보고 "탑골이 어딘데 저런 사람이 와서 술을 마시느냐" 고 항의를 했었다.
허문도씨와 관련돼 가장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일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간 뒤 홀로 술을 마셨던 날이다.
역사적 평가야 어떻든 본인이 모시던 분이 백담사에 가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회한이랄까 비통함에 잔뜩 젖어있는 모습이었다.
술을 마시다가 사인펜을 달라고 해서 벽에 '월인백담 만파정식(月印百潭 萬波停息)
' 이란 글을 남기기도 했다.
글 아래에 을묘(乙卯)
춘(春), 서림(徐林)
이라는 서명도 함께. "오늘도 어김없이 떠오른 달은 백담사에 유폐된 주군을 비출 것인 바, 그 달빛을 받으며 주군이 느낄 만가지 생각이나 비통함을 생각할 때 나 또한 천 갈래 만 갈래의 회포에 몸둘 바를 모르겠노라" 는 뜻이라고 어떤 분이 해석해주었다.
뒤에 오신 손님들은 그 글을 읽고 모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막강한 힘으로 만인 위에 군림하던 사람이 권력의 정상에서 비껴나자마자 백담사로 가고, 그를 따르던 이가 홀로 남아 연모하는 풍경이 '권력무상' 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그날 밤늦도록 통음하던 허문도씨의 모습은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46. 클래식 박사 송영
희극적인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은 그것에 전혀 빠지지 않는 사람이 희극 배우 가운데 최고가 아닐까. 같은 이야기인데도 어떤 사람이 말하면 재미가 하나도 없고 어떤 사람이 말을 하면 웃음을 참을 수 없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소설가 송영 선생은 탁월한 희극 배우다. 송선생처럼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가지고 많은 사람을 찬찬히, 그러나 근본적으로 웃기는 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송선생은 대개 시인 이영진.강형철.이승철.이재무.박선욱 등과 어울려 왔다.
송선생이 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에는 작가들을 위한 기금마련 술집을 하고 그 뒤풀이를 탑골에서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송영선생이 있는 자리에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가 들어보려 해도 잘 들리지 않을뿐더러 들어봤자 별 얘기도 아니었다.
본인의 자랑을 슬쩍 곁들이되 그것을 매우 객관적인 것처럼 말하곤 했다.
"승철이 자네도 알다시피 콩트 이런 것은 내가 거의 천재 수준 아닌가.
사람들이 콩트집도 내던데, 우리 집에는 콩트가 널려 있어. 발 딛을 틈이 없을 정도라니까. "
"에이 선생님도. 많긴 많습디다. 선생님 방에 가니까 각종 사보에 쓴 콩트가 방바닥에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널려 있었으니까 그 말도 맞긴 하지만. 그렇다고 선생님이 천재라고 하시기에는 조금…" 말이 잘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굳이 반박할 것도 없을 만큼 말의 빈틈을 물고 늘어지는 솜씨에 사람들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잔잔하면서도 조용한 분이 해병대 학사장교 탈영병 1호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7년을 도피생활을 했고 그 기간 동안 클래식 음악감상실에 출입하면서 전문가 수준이 됐다고 하니 참으로 묘한 일이다.
게다가 바둑의 수준이 김성동.김흥규 선생과 더불어 한동안 '문단 3강(强)
' 을 이루어 서로 본인이 최강이라고 주장했다.
엇비슷한 실력의 문인들은 서로 '하수' 라고 부르기 좋아해 졌을 때는 운이요, 이겼을 때는 실력이라고들 했다. 바둑에 관해서는 송영 선생도 똑 같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송영 선생이 부르는 '부용산' 은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하다.
작곡자가 알려지지 않은 이 노래를 문단에서 처음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김지하 시인이 원조라는 설, 황석영 선생이 원조라는 설 등이 오가지만 송영 선생도 자신이 원조라고 주장한다.
남북정상회담도 열렸고 하니 '부용산' 의 작곡자를 알아내는 게 쉬워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함께 이 노래를 처음 부른 문단의 원조도 언젠가 가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노래는 해방후부터 6.25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의 해방공간에서 빨치산 활동에 가담한 사람의 애달픈 심사를 노래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목포의 한 음악 교사가 사랑하는 연인이 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하는 슬픔에서 만든 노래라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이 노래가 유장한 가락에 실려 불릴 때는 모든 사람이 숙연해졌다.
"부용산 오릿길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부용산 오릿길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송영 선생은 노래만 잘 부르는 것이 아니라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해나 감식력이 매우 빼어나 음악 전문지에 주요 연주에 대한 평을 연재했고, 이를 묶어 '무언의 로망스' 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 잔잔한 노래가 듣고 싶다.
47. 별난 애정표현
사람들이 왁자지껄 들어오고 있다. 먼저 와서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문쪽을 본다. 이가 잘 맞지 않는 탑골의 나무 대문의 윗쪽에 달린 방울이 딸랑딸랑 울리며 낯익은 사람들이 서로 눈인사를 나눈다.
그때 한 사람이 나와 연인처럼 꼭 껴안는다. 그리고 한참동안 입을 맞춘다. 들어오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한다.
"야, 송기원이 한테 입술 뺏기지 않으려면 빨리 가서 조용히 앉아. "
"입술만 뺏긴다면 그까짓 것, 천 번이면 어때, 혀가 뱀처럼 쑤우욱 들어오니까 문제지. " 그러나 송기원 시인의 입술을 피해갈 문인은 아무도 없다.
나이가 든 시인 신경림.민영, 소설가 현기영씨는 물론 비교적 젊은 편에 속했던 문학평론가 진형준.임우기, 시인 김사인.이재무.이승철, 소설가 김남일.방현석 등등. 모두 입맞춤을 피하지 못했다.
여자문인은 안심해도 된다. 남자들 상대하기도 바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자만 사랑하는 이상한 사람인가□ 그것도 아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일뿐이다. 송기원 시인이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문인뿐이랴.
"나이가 마흔이 넘응께/이런 징헌 디도 정이 들어라우/열여덟살짜리 처녀가/남자가 뭔지도 몰르고 들어와/오매, 이십년이 넘었구만이라우. /꼭 돈 땜시 그란달 것도 없이/손님들이 모다 남 같지 않어서/안즉까장 여기를 못 떠나라우. /썩은 몸뚱아리도 좋다고/탐허는 손님들이/인자는 참말로 살붙이 같어라우. " '살붙이' 라는 시다.
너무나 많이 들어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 작품이다.
늙은 창녀의 회한조 넋두리를 그대로 베껴놓은 듯한 시 속에 서려있는 사람에 대한 깊디 깊은 사랑은 참으로 장엄하다.
인생의 맵고 짜고 쓰면서도 동시에 단맛이 이 시에 잘 익은 장아찌처럼 박혀있는 것 같다.
자신의 몸을 세상이라는 장터에 내놓고 이리 저리 팔면서 겪었을 회한과 서러움이 얼마이랴. 하지만 이제 그 설움을 거둬들이고 인간들의 서러운 몸짓과 외로움을 이 여인은 본다.
외로움을 애틋하게 여기다 못해 내가 그들의 살붙이는 아니었는지를 가늠해보는 마음이 내게도 그대로 전달돼 아프도록 어여쁘다.
탑골을 자주 찾는 많은 시인들을 보며 가끔 '위대하다' 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 설움 저 설움 다 있어도 제 손톱 밑에 박혀있는 아픔이 제일로 크다고들 하지 않는가. 제 설움이나 슬픔이 힘겨워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고통쯤은 안중에도 없이 살아가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다.
그런데 시인이란 참으로 독특한 이들이어서 이렇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고스란히 받아내 언어로 수놓는다.
이상한 일은 사랑도 아니 사랑의 표현형식도 전염된다는 것이다.
송기원 시인의 입맞춤은 문학평론가 진형준.임우기씨에게 옮아가 한동안 그들도 다른 남자문인들의 기피대상이었다.
작지 않은 그 입들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궁리하고 헤매는 모습이라니. 그 사이 송기원 시인은 새로운 사랑형식을 개발하기도 했다.
'볼태기 잔' 이라고도 하고 '입술잔' 이라고도 불렀는데, 먼저 맥주를 마신 송기원 시인이 다른 사람의 입술에 맥주를 전달해주는 것이다.
입맞추는 것을 피해 자리에 앉아 조용히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주는 더욱 진한 사랑. 따뜻하기도 하고 미지근하기도 하며 찝질하기도 한 그 잔을 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화장실로 달려갔던가.
집요하고도 어두침침한 송기원 시인식 사랑은 참으로 많은 사람을 혼비백산하게 했다.
'아름다운 악동' 은 지금은 어디서 또 어떤 사랑을 나누고 있을까.
48. 확실한 단골 송기원
탑골을 하는 동안 '가장 많이 오신 손님' 이라면 단연 송기원 선생이다. 단짝처럼 지내는 이시영 시인도 많이 왔지만 그래도 최후까지 남아서 술을 마시며 어울렸던 사람은 송 시인이었다.
그래서인지 송 시인의 짓궂은 행동도 내겐 참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또 탑골에 왔던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 한다. 아무리 짓궂은 행동을 해도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웃어 넘겼다.
송 시인이 있는 자리엔 늘 긴장감 넘치는 재미가 마른 논에 송사리 모인 것처럼 오골오골했고 활력이 넘쳤다. 언제였던가 정확하지는 않은데 아침 나절에 이시영 시인과 김사인 시인이 들이닥쳤다.
늦은 밤엔 자주 왔지만 아침 일찍 온 것은 드문 일이어서 웬일이냐고 물었다. 이시영 시인은 "김사인 시인과 밤새 술을 마시다가 새벽이 돼 집에 가려는데 갑자기 앞에 미인이 걸어가 무심히 따라오다 보니 탑골이었다" 고 말했다.
그런데 들어와 보니 벽면에 송기원의 청자켓이 걸려 있어 "과연 송기원" 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고. 그 말에 나도 웃고 말았다. 새벽녘에 탑골에 온 송 시인이 홀에서 아침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다가 사우나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탁자에 걸쳐놓은 자켓을 종업원이 방에 걸어두었는데 그것을 보고 이시영 시인이 반갑다고 말하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다.
송시인은 탑골에 오는 모든 문인들과 잘 어울렸지만 특히 원경스님이나 희곡을 쓰는 안종관 선생.영화감독 장선우씨 등과 어울릴 때가 많았다.
다른 문인들에겐 술값을 내는 등 뒷바라지를 했지만 이분들과 왔을 때는 원경스님이 뒷감당을 많이 했다.
원경스님의 친부가 유명한 박헌영 선생이란 얘기를 한 잡지에서 본 일이 있는데 그런 사실들은 남북이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서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이제 남북의 정상이 만나고 민족의 동질성이 얘기되는 상황이므로 명확하게 밝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스님은 나에게도 정말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탑골에 문인친구들과 함께 오신 스님들이 몇 분 계셨는데 그중 가장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 아닌가 한다. 참으로 큰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송 시인은 그렇게 많은 사람과 어울리면서도 많은 일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후배들을 잘 챙겼다. 간혹은 잘 꼬집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일이 바로 '사봉잔 사건' 이다.
송 시인이 실천문학사를 운영할 때였는데 '접시꽃 당신' 이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치는 바람에 여유 자금이 생겼다. 송 시인은 평소에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일을 많이 했는데 그 중엔 노동문학을 지원하는 일도 들어있었다.
송시인은 월간 '노동문학' 을 내는 한편 지역이나 현장의 문예운동 모임을 지원했다. 시인 김윤태씨가 '구로 노동자문학회' 실무일을 맡고 있을 때도 실천문학사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언젠가 송 시인이 김 시인을 싫지 않게 혼내는 것을 보았다. 김 시인은 당시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장 급진적인 노동문학운동을 한다고 하면서도 선후배를 엄격히 가리고 특히 윗사람에 대해 극진한 예의를 갖췄다.
송 시인은 내심 좋아하면서도 김씨가 표방하는 '과학적 문학운동' 과 괴리가 있다고 생각해 은근히 꼬집고 싶어던 듯하다. 송 시인이 김 시인에게 "너야말로 사봉잔이야" 라고 명명한 이후 김윤태씨의 별명이 사봉잔이 되었다.
사봉잔이란 '사회주의 봉건잔재' 라는 말의 약자다. 당시 많은 젊은 문인들이 지녔던 관념적 급진성을 적절히 지적한 절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49. 가난한 시인의 유산
조용히 왔다가 소리 없이 가는 술꾼 중에 한 사람이 고형렬 시인이다.
탑골에는 대개 늦은 시간이 돼야 사람들이 몰려왔다. 주로 오후 10시 이후에 오는 사람이 많아 오후 8시께면 손님을 찾아보기가 드물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시간쯤에 고형렬 시인이 혼자 찾아왔다. 주로 여럿이 몰려올 때 같이 오던 시인이었으므로 무슨 특별한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기대를 훌쩍 지나쳤다.
"집에 가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왔는데. 내가 너무 일찍 왔나. 하기사 매번 밤늦게
온 기억만 있어서‥.. "
나는 그 밋밋한 대답에 웃음도 났고 왠지 정겨워지기도 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조금 앉아서 기다리세요. 그러면 사람들이 올거에요. "
맥주 몇 병을 앞에 놓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도무지 말이 없는 사람과 마주 앉아 술을 마시니 어색하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이 생각 저 생각 떠올랐고 마치 선보는 사람처럼 머쓱해졌다가 불쑥 고향을 묻고 말았다. 고형렬 시인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 고향은 전남 해남이었지만 나는 강원도 속초에서 나고 자랐지. 서울 오기 전에 면에서 일하기도 했고. 처음에는 서울이라는 데가 정이 안붙어서 고생했는데 이젠 조금씩 익숙해져가. 복희는 어디야. "
"저는 원래 서울이에요. 동대문구 창신동 산동네에서 나고 자랐지요. "
말을 하고 보니 점차 우스워졌다. 여간해서 그렇게 다정하게 고향을 묻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아마도 매일 사람들을 많이 상대하면서 생긴 마음의 빈자리를 돌아보게 해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이렇게 점잖은 신사 같은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서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
고(故)
채광석 시인도 그런 경우다. 채광석 시인은 1987년에 작고했다. 탑골의 문을 열 때부터 여럿과 함께 찾곤 하던 채 시인의 유난히 큰 입과 희디흰 치열이 눈에 선하다.
그것은 탑골에서 채 시인이 말도 많이 했고 노래도 많이 했으며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크게 웃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야말로 함박웃음이었다.
그렇지만 채 시인은 내가 알기로 1987년 6월 항쟁의 야전사령관이라 부를 만큼 많은 일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채 시인은 문인들 뿐만 아니라 문화인, 나아가 노동운동 곳곳에 많은 지인들이 있었으며 그외에도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어울렸을 뿐만 아니라 그 많은 사람들을 조직하여 당시 6월 항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6.29선언이 나오고 사회가 민주화가 되어가는 모양을 갖춰가고 있을 때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운명의 그날도 아직은 선언에 불과한 6.29선언을 실질적인 민주화의 디딤돌로 만들어야한다는 생각으로 후배 문화인들과 밤늦도록 토론을 벌이다가 귀가하던 신새벽에 그 참변을 당했으니….
그런데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채 시인의 호주머니엔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고 한다. 문화인장으로 치뤄진 세브란스 병원에서 후배 시인이 오열을 참지 못하고 울먹이며 말한 조사를 들으며 알았다.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어떤 것도 다 바쳤지만 자기 가족을 위해선 아무런 유산이 없던 사람, 저승길의 노자가 동전 몇 개뿐이었던 시인. 오늘 우리의 사회가 이만한 자유를 누리는 것도 그런 이들의 희생 덕분은 아닌지….
채광석 시인의 시비가 고향 안면도에 오는 7월 16일 세워진다고 한다. 사후 13년 만에 세워지는 시비가 해풍에 젖는 모습을 보고 싶다.
50. 이념의 상처 -끝-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돼 나라가 온통 축제 분위기다. 정말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
앞으로 후속조치도 잘 이뤄져 통일의 든든한 초석이 되길 충심으로 빌고 싶다.
온 국민이 다 그렇게 되길 바라겠지만 소설가 이문구 선생의 바람은 더욱 절실하지 않을까 싶다.
이선생이야말로 좌.우 양쪽에서 문학 활동을 벌이며 줄곧 통합을 꿈꿔온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선생은 탑골에 오셔도 늘 조용히 술을 드시다가 점잖게 돌아가신다. 그러나 선생과 같이 온 젊은 문인, 나이 드신 문인들의 면면이나 성향은 다양하다. 그 다양한 스펙트럼의 문인들로부터 한결같이 존경을 받으면서 인간성과 성실성만으로 이들을 통합해 온 사람이 이선생이다.
충남 보령이 고향인 이선생은 해방기와 6.25 와중에 당시 남노당 충남 보령 지역 위원장이던 아버지를 잃은 것은 물론이고 위로 세 형이 죽어 네째인 이선생이 장남이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분단의 비극이 어떤 그늘을 드리웠는지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들은 얘기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선생이 열두살 때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그 일을 이루었다는 얘기다.
어린 시절 꿈이야 대통령이나 장관, 위대한 발명가가 되겠다는 게 그 당시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선생의 꿈은 남들이 으례 가지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이른바 좌익 집안으로 낙인 찍혀 언제 풍비박산 날지 모르는 긴박한 처지였다.
그런 와중에서 이선생은 열두살 때 우연히 책방에서 6.25때 부역을 하고도 살아남은 이야기를 읽었다.
대구의 L씨라는 문인이었다. 철없던 소년이었지만 앞으로 살아남는 길은 문인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다.
문인이 되려면 신춘문예나 잡지를 통해 등단해야 하는데 당시 가장 앞장서서 반공을 외쳤던 소설가 김동리 선생에게 추천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 선생은 마침내 김동리 선생의 추천을 받아 1965년 소설가가 됐다.
문학하는 것만이 목숨을 부지하는 방법이란 생각으로 정진했다는 사실, 그것도 세상물정을 모를 나이인 열두살 때 인생의 길을 결정했다는 얘길 들으며 나는 우리에게 드리워졌던 이데올로기의 덫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새삼 실감했다.
이선생은 보수문학단체인 한국문인협회가 발행하던 '월간문학' 의 편집장으로 일했고 월간 '한국문학' 이 김동리 선생에 의해 창간됐을 때는 거기에서 편집장을 했으며 이후에는 진보적인 문학잡지인 '실천문학' 의 대표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70년대 초 '한국문학' 에서 일할 때에는 반정부 활동의 선봉장 격이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이후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많은 일을 하다 이제 이사장을 맡고 있다고 들었다.
그야말로 한국문단의 좌우를 망라한 실질적인 증인이자 주역인 셈이다.
좌우 양쪽을 아우르는 일을 해온 이선생을 욕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오징어를 질근질근 씹듯 안주삼아 남을 비판해야 직성이 풀리는 술좌석에서 조차 이선생은 칭찬의 대상이었다.
공적은 늘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뒤에 있으면서 실질적으로 필요한 일이 있으면 가장 앞장선 때문일 것이다.
남북 분단이 드리운 그늘의 극심한 피해를 소설로 가꾸어낸 이선생의 한(恨)
의 승화가 남북정상의 합의문을 이끌어낸 바탕은 아닐까하고 나는 생각해본다.
80년대 중반부터 10년 가까운 탑골의 단골 술꾼들은 기실 다 이문구선생 같은 분들이었다.
핍박 받으면서도 문학과 예술의 맑은 혼과 실천하는 양심으로 시대의 어둠을 거두워나간 이들, 시대의 고통을 술로 달래며 자꾸 혼탁해지려는 양심을 알콜로 씻어내던 이들이 우리 탑골의 주인이었다. 그들이 엮어내던 순정의, 격정의 대서사가 이제 통일로 이어질 것이다.
한복희 <전'탑골'주점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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