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철야기도회 2024/10/9) 사쿠라이 나오미
저는 일본 이시카와현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1969년에 태어났습니다. 우리 가족은 6명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저는 큰딸이구요, 여동생이 둘,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제가 신앙의 길을 가는데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기독교 신앙자입니다. 그 교회는 “그리스도 막사 교회”라고 해서 십자가가 없는 교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서 성경을 읽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몇번이나 읽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성경에서는 확실한 구원을 얻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기독교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을 모르는 상태로 시집오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남편이 믿고 있는 종교니까 이해하려고 많이 노력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저도 동생들도 부모님과 함께 일요일마다 교회에 다녔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그 교회의 특징은 예배 때 교회식구가 모두 “하늘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거의 같은 말을 반복해서 큰 소리로 외치며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예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왜 다들 우시지?”라고 어린 저에게는 그 광경이 매우 신기했습니다. 마치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서 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엉엉 울고 계셨지만, 예배 후에는 항상 개운한 표정이었습니다.
우리집은 작은 직물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집 바로 옆에 공장이 있어서 부모님은 항상 공장 아니면 집에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성격은 성질이 매우 강하고 항상 짜증이 나셨습니다. 저도 동생들도 자주 혼나고 맞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낮에는 일하기보다는 친구들을 불러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면서 마작하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신앙인으로서의 아버지의 모습과 평소의 모습이 너무나도 차이가 있어서 저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가끔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아이처럼 울면서 사랑받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저는 “종교는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困った時の神頼み“(어려울 때 신에게 부탁드린다)라는 말이 있는데, 어려울 때만 하나님께 부탁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면 실례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는 제 힘만으로 어떻게든 해나가자, 종교 길에는 절대로 가지 말자”라고 어린 나이에 마음먹었습니다.
제가 중학생이 될 무렵에는 아버지가 신뢰했던 목사님이 인사로 이동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아버지는 점점 교회에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국엔 어머니도 저도 동생들도 신앙이 잘 모르는 상태로 우리는 교회에 가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저는 고등하교 졸업 후 디자인 전문하교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2년 동안 공부한 후 바로 취직했습니다. 세상에 나와보면 제가 정말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절실히 알 수 있었고 저의 인생은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라는 불안감이 생겨났습니다. 어느 날 길가에서 믿음 어머니를 만난지 6개월 후에는 비디오센터에 다니기 시작하여 단기간으로 다 배우며 참아버님과 통일교회에 대해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1990년 봄에 가나자와 교회에 입교되었습니다.
저렇게 절대로 종교의 길에는 가지 않겠다고 했던 저였지만 아무런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참아버님과 교회를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이 길은 진짜다. 모든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이라고 확신을 가졌습니다. 겨우 이것으로 아버지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여기서부터 지옥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교회 책임자의 지시에 따라 정성 조건을 세운 후, 부모님께 제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을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통일교회만은 절대 안 된다고 크게 반대하셨습니다. 실제로 아버지가 다니던 교회 월간지에 통일교회는 이단이니까 절대 가지 말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안 된다고 하면 나쁜 곳이구나 하시고 동생들도 그런 곳에 가지 말라고 해서 큰일이 났습니다.
저는 집에서 매일 회사를 다니고 일이 끝난 후 교회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했습니다. 헌신하고 뜻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형제자매들이 너무나도 부러웠습니다. 항상 외로웠지만 제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부모님과 동생들을 전도할 것이라고 자신을 분발하게 했습니다.
부모님들을 전도할 수 있도록 계속 정성드리며 아버지와 함께 교회에 가서 목사님과 면담을 받거나 선배가정들이 우리집에 오셔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여러가지를 시도해봤지만 아버지는 “통일교회 사람들의 눈을 보면 다 죽은 눈을 하고 있어서 믿을 수가 없다” 고 하셨습니다.
제 집인데도 불구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저는 너무 힘들고 불편했습니다. 교회에서는 다들 바빠서 제 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신앙을 포기하면 편할 수 있다는 생각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가슴에 떠올랐지만, 그때마다 아니다, 이 길을 포기하면 절대 후회한다고 마음먹고 교회에 머물렀습니다. 그런 중 지역의 선배가정분들과 만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같은 이시카와현에 살고 있어도 소속 교회가 달라서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 선배님들은 저를 친절히 대해 주시고 잘 챙겨주셨습니다. 저는 항상 위로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이 선배님들과 가족저럼 교류하고 있습니다.
1992년에 3만쌍 축복을 받을 기회가 있었지만 아직 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포기했습니다. 부모님들을 전도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 3년 후 이번에는 36만쌍 축복을 받을 기회가 왔습니다. 만약에 이번 축복을 포기하면 저는 축복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신청했더니, 미국 남자가 제 축복대상자라고 해서 놀랐지만 감사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부모님들께 각오하고 미국인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또다시 큰일이 났습니다.
매일 밤 집에 돌아올 때마다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둘러싸여 결혼을 포기하라는 설득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참부모님의 사진과 우리가족 6명이 함께 찍은 사진을 나란히 놓고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화가 난 아버지가 유리로 된 재떨이를 던져 내 귀 바로 옆을 지나 유리창이 깨지기도 했고, 어떤 때는 아버지가 진심으로 제 목을 조르고, “너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하셨습니다. 죽을 수는 없다고 그때만은 아버지의 손바닥을 할퀴었습니다. 교회로 도망가고 싶었지만 교회에 폐가 끼치기 때문에 제가 살든 죽든 이 목숨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아버지는 어젯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하시고 어제 일에 대해서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제가 한살 때 죽을뻔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집에서 제가 갑자기 숨을 쉬지 않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저를 안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드렸더니 제가 다시 숨을 돌렸다고 합니다. 그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 때 내가 다시 준 생명인데 너는 왜 빼앗으려 하는가?”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반성했다고 하지만 변함없이 저의 결혼에 대해서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부모님들의 큰 반대에 또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느낀 저는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서 한국에 가기 전까지의 몇 주 동안 하루에 먹는 밥의 양을 반으로 줄여 마음을 가다듬고 그 상황을 견뎌냈습니다. 캐리어를 사서 한국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짐을 다 부모님께 몰수당했기 때문에 저는 은밀히 새로운 짐을 준비하고 부모님 몰래 축복을 받으러 한국으로 떠났습니다.
제가 한국 축복현장에 도착했더니 그 축복대상자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미국에 전화해봤더니 정규 비행기 티켓이 비빠니까 싸게 사려고 했는데 사기를 당해서 한국에 못 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결국엔 우리는 위생 중계로 축복을 받았고 조만간 미국에 가기로 약속하고 저는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가 “너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해서 아는 목사님이 있는 시마네현으로 아버지와 동생이 저를 데려갔습니다. 그 목사님은 소위 반대 목사가 아니었지만 이대로 제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진짜 반대 목사가 있는 곳에 데려가겠다고 아버지가 협박을 했습니다. 저의 감시자 역할로 남동생이 있었지만, 틈을 봐서 저는 도망치고 도야마현에 몸을 숨겼습니다. 그곳에는 6000쌍의 선배 가정이 청소 회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살면서 미국에 갈 돈을 모았습니다. 축복식을 마치고 한국에서 돌아온지 두 달 후에는 혼자 미국에 갔습니다.
미국에 가서 알게 된 일이지만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남자에게는 이혼 경력이 있고, 헤어진 아내와의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일본에서 받은 그 남자 사진 뒤에는 분명히 미혼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는데 사실이 다르기 때문에 너무 혼란스러웠습니다.
미국에 있는 일본인 책임자에게 상담했더니 “이대로 이 남자와 축복을 받든, 거절하든, 어느 쪽이라도 상관이 없다. 당신이 판단해라”고 하셨고, 원래 제가 소속한 가나자와 교회 책임자에게 전화했더니 “당신에게 잘못이 없으니 지금 당장 그 축복을 파기하고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의 큰 반대를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는데 어떡하면 될까?” 이 상황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간절히 기도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에서의 제 사정을 알게 된 일본에 있는 777가정의 선배님이 전화해 주셨습니다. “당신은 그 남자와 결혼해서 정말 부모님을 복귀할 수 있는가?”라고 하시니, 저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맞아, 가뜩이나 대반대하시는데 이 사람으로는 절대로 부모님을 복귀할 수는 없어. 거절하고 일본으로 돌아가자”고 결심했습니다. 이 판단을 가나자와 교회 책임자에게 다시 전화했더니 이번 일은 서류의 실수이니 당신에게 잘못이 전혀 없다, 당신이 사적 이유로 거절해서 이 축복이 깨진 것이 아니니까 안심하고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남자에게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전하고 일본에 돌아갔습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책임자가 하신 말씀에 ”참부모님은 미국을 구하려고 하셨는데 기독교가 참부모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탕감이 있다, 당신의 아버지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도 참부모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미국과 똑같다. 당신이 감사하고 이번 일을 잘 넘어간다면 그것은 좋은 탕감조건이 될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두달 후, 1995년 크리스마스도 끝난 연말에 갑자기 팩스가 왔습니다. 8월에 개최된 36만쌍 축복이 많이 깨졌기 때문에 36만쌍 추가 축복으로 제가 선택된 것이니 모레까지 한국에 오라는 소식이었습니다. 웨딩드레스도 돈도 아무것도 없고, 여러 곳에서 빌려와서 겨우 한국에 갔습니다. 거기서 만난 게 지금의 남편입니다. 처음 남편을 봤을 때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남자는 너의 영원한 남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 한마디가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 지금이 있습니다.
부모님로부터 숨어 도야마현에 있을 때는 매일 밤마다 가위에 눌려 납치 감금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에 질세라 저도 정성 조건을 계속 세워 기도드렸습니다. 1년 후 부모님께 제가 도야마현에 있는 것을 들켰지만 다시 저를 데려가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 부모님께 한국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저희 부부는 일본에서 피로연을 했습니다. 그리고 초대한 손님들 앞에서 시족메시아 선포를 한 후 일본에서 가정출발했습니다. 부모님을 안심시키고 3년 후에 한국에 갈 예정이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결국엔 14년이상 일본에서 살다가 한국에 왔습니다.
일본에 있는 동안 저희 부부는 부모님 공장에서 10년간 함께 일을 했기 때문에 부모님은 남편의 단장점을 다 보면서 남편의 성실함과 인품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부모님께 인정받기까지 정말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힘든일이 너무 많았지만 항상 저를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신 하나님과 참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겠습니다.
이 간증을 통해 제 인생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었습니다.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순창교회에서 20241005 간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