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43호
- 공식명칭 : 혜심고신제서 (慧諶告身制書)
- 지정일 : 1962.12.20
- 분류 : 기로유산
- 수량/면적 : 1축
- 시대 : 고려시대
- 주소 : 전남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 송광사 (신평리)
불이 문서는 고려 고종 3년(1216)에 조계산 송광사 제2세 진각국사 혜심에게 대선사의 호를 내릴 것을 제가(制可)한 것이다. 이것은 능형화문의 무늬가 있는 홍, 황, 백색 등의 비단 7장을 이어서 만든 두루마리에 묵서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3.6m, 세로 33㎝이다. 이것은 고려시대 승려에게 하사한 제서 중 몇 점 되지 않는 귀중한 자료이다. [문화재청]
송광사 16국사 (國師)
불교에서는 참으로 귀하고 값진 보배 세 가지를 들고 있는데 불(佛), 법(法), 승(僧) 즉, 부처님(佛), 가르침(法), 제자, 승가(僧)를 말하며 이 3가지 삼보(三寶)중 불보(佛寶)사찰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 법보(法寶)사찰은 부처님 말씀을 새긴 팔만대장경판을 보유한 해인사이며, 승보(僧寶)사찰은 역대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를 말한다.
송광사는 이처럼 16국사를 배출하여 한국불교의 승맥(僧脈)을 잇고 있다는데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칭송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조계종의 중천조(中闡祖)로 추앙받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스님이 바로 이곳 송광사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통해 고려말 타락한 불교를 바로 잡아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16국사의 1세 큰스님이며 그 뒤를 이어 열 다섯 국사들이 출현하였으니 승보종찰(僧寶宗刹)로 불리워도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송광사(松廣寺)의 이름을 풀어보면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니 아직 2명의 큰스님이 나오지 않았다는 뜻으로 언젠가 다시금 혼탁해져가는 이세상을 맑고 향기로움으로 가득채울 큰 스님이 오실것으로 기대해 본다.
혜심고신제서 (慧諶告身制書)
국보 탐방중 처음으로 기록유산이다. 물론 국보 제32호 합천해인사 대장경판이 있었지만 이는 기록유산임과 동시에 목판에 새긴 서각류임을 감안하면 비단에 글씨를 쓴 기록유산은 혜심고신제서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혜심(慧諶)은 보조국사 지눌에 이어 2세가 된 진각국사를 말하며, 고신제서(告身制書)란 스님을 대선사(大禪師)에 임명하는 고신(告身 ;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을 예부(禮部)에서 작성한 문서를 말하며 다른 말로 ‘고려고종제서’라고 한다.
1210년 보조국사 지눌이 입적하자 수선사(修禪社 ; 지금의 송광사)의 제2세 사주(社主)가 되었으며 1216년 (고종 3)에는 스님을 대선사(大禪師)에 임명하는 고신(告身)을 예부(禮部)에서 작성하여 발급하였는데 그 절차를 보면 먼저 왕명에 의하여 지제고(知制誥) 이득근(李得根)이 제사(制詞)를 찬술하고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修文殿大學士 최홍윤(崔洪胤)이 검토하여 국왕에게 올렸다. 이것을 中書門下省에 보내 門下侍郞平章事와 給事中 현군체(玄君涕)가 심의하여 정식으로 시행을 요청하였다. 이에 국왕은 ‘可’하다고 결재하였다. 이에 원본은 중서문하성에 보관하고 다시 사본을 만들어 국왕이 결재한 ‘可’의 부분을 ‘制可’로 고쳤다. 이후 尙書省에 보내져 禮部尙書 · 尙書左丞등이 기록한 다음, 禮部郞中을 중심으로 하는 하급실무자가 2차 사본을 만들어 서명하고 날짜를 기록하여 스님에게 발급한 것이다.
문서의 내용은 주로 혜심의 학문과 덕망이 찬양되어 있다. 즉 문서의 끝부분에 ‘참된 이를 숭상함은 나라를 위하려는 것이고, 賞 을 보이는 것은 善 을 권장하려는 것이다. 행동을 존경하고 道를 사모하여 朕이 예를 다해 師에 명령하노니, 불법을 넓혀서 인간을 이롭게 하여 師는 힘을 다하여 朕을 보호하라’라고 되어 있어 스님의 덕망을 확인 할 수 있다. (송광사)
<국보 제43호 혜심고신제서, 혜심 스님을 대선사에 임명하는 문서로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송광사 홈페이지에는 복제본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현장에는 사본(모조) 표시가 없어 문화재 전시의 기본을 지키지 않은듯 하다.>

문서의 크기는 길이가 352㎝정도이고, 폭은 35㎝이다. 문서의 재질은 비단인데 꽃무늬를 놓은 황·청색 일곱 장을 가로로 이어서 만든 것이다. 서체는 행서를 썼다. 문서의 끝에는 대선사의 시행 연월일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고려시대 선사·대선사 제도의 일면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또 이 문서는 고신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원문서로 승정체제연구는 물론 국가행정체제를 파악하는데 긴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송광사에는 이밖에도 노비첩(奴婢帖)등 고려시대 문서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어 관심을 끈다.
진각국사(眞覺國師)
진각국사는 사후 추증된 시호이며 스님의 휘는 혜심(慧諶),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이다.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스님은 본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유학자였으나 출가하여 스승 보조국사를 보좌하였고 저술서를 정리하여 후대에 전했을 뿐 아니라, 이를 발전시켰다. 또 고종 13년(1226)에는 선문염송(禪門拈頌) 30권을 집대성하셨다. 스님께서는 많은 문도를 양성하였고 그들의 활동은 고려후기 불교계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1210년 지눌이 입적하자 왕명에 의해 조계종의 2세가 되었으며 그의 문하에는 최우(崔瑀)를 비롯해 당시 무인집권자들의 가족과 무인정권에 참여했던 수많은 문무 관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혜심은 1213년(고종 즉위)에 선사(禪師)를 제수받고 다시 1216년에는 대선사로 올려졌다. 1219년 왕이 단속사(斷俗寺)의 주지로 명하자 여러 번 사양하다가 이듬해 부임했다. 1234년 6월 26일 문인인 마곡(麻谷)에게 "이 늙은이가 오늘은 너무 바쁘다"라고 말하고 가부좌한 채 앉아서 입적했다. 이때 나이 56세, 법랍 32세였다. 왕은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승탑의 이름을 원조지탑(圓炤之塔)이라 사액(賜額)했다.
승탑은 광원암(廣遠庵) 북쪽에, 탑비 진각국사비는 강진군 월남산 월남사(月南寺)에 각각 세워졌다. 그의 비명에는 "승과(僧科)를 거치지 아니하고 승직에 오른 것은 사(師)가 처음이었다"라고 적혀 있다. 그의 문하에는 청진몽여(淸眞夢如)·진훈(眞訓)·각운(覺雲)·마곡 등이 있으며 청진몽여는 그의 뒤를 이어 수선사 제3세 법주가 되었다.
<송광사 16국사 진영, 윗줄 왼쪽에서 5번째가 1세 보조국사 지눌, 그 왼쪽(4번째)이 2세 진각국사 혜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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