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 아델리아 홀 레코드란 ? 다. 해결방안
나. 한국으로 반환 결정 문화재 1. 표범 양탄자 2. 조선검 3. 조선시대 관인 |
가. 아델리아 홀 레코드란?
미국 메릴랜드에 있는 국가 기록보존소에 보관된 문서로, 2009년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스님이 단독 발굴하여 공개했다. ‘아델리아 홀 레코드’는 아델리아 홀이라는 미 국무부 관리가 1950년대 작성한 것으로서 지금은 기밀이 해제된 문서다. 이 문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후 나치에 의한 문화재 약탈과 해외 문화재의 미국 내 불법 반입에 대해 미 정부가 직접 개입했던 비밀 프로젝트를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국 전쟁 당시 덕수궁 등의 궁궐에서 유출된 카페트, 칼, 관, 관인 등이 이 문서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 문서의 한국 편은 ‘미군에 의한 약탈’이라는 명시적 표현까지 적혀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에 언급된 문화재들이 과연 환수된 목록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한국 정부 당국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델리아 홀 레코드에는 미군 병사가 한국전쟁 당시 약탈해온 문화재를 조사, 반환결정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Ardelia Hall Records
During and after World War II, Ardelia Hall served as a Monuments, Fine Arts, and Archives adviser to the State Department and as a Monuments, Fine Arts, and Archives officer in occupied Europe. These files reflect the extent of German art looting in Austria, Italy, and Germany itself. The records include files relating to the recovery of cultural objects dispersed during World War II and the programs for the return of historic objects to countries of origin. These files consist of correspondence, memoranda, and minutes of interdepartmental committees and international conferences relating to looted art, disposition of Austrian and German Jewish libraries, settlement of cultural properties under U.S. control, and international protection of artistic and historic property. Also included are reports that refer to Ardelia Hall’'s expert advice and guidance on a variety of cultural concerns throughout Europe and the Far East.
0265 Korean Leopard Skin Rug—Giltner, Pueblo,Colorado—ReturnedtoKorean
Embassy, August 1951–February 1952. 47 frames.
Major Topic: Return of leopard skin rug to South Korean Embassy.
0774 Korean Embassy Cases—Korean Sword and Crown, January 1953–May
1956. 106 frames.
Major Topic: Recovery of Korean official seals, sword, and crown looted by U.S.
military personnel.
나. 한국으로 반환 결정된 문화재
문화재제자리찾기(사무총장 혜문스님)는 아델리아 홀 의 기록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1. 표범 양탄자, 2 조선검 3.조선시대의 관인 등이 한국으로 반환 결정되었다는 자료를 입수했다. 그 뒤 정부 당국에 질의했으나, 정부 당국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문화재의 소재도 파악하지 못했다. 이에 조사활동을 시작, 표범 양탄자, 조선검의 행방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조선시대 관인에 관한 소재는 파악하지 못햇다.
1. 명성황후의 표범 양탄자
6.25 당시 미군 병사 길트너(Hugh V. Giltner)에 의해 유출
관계당국, 관련자료 없어 소재처 확인 불가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사실 공개
● 혜문스님(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은 미국으로 유출된 문화재 조사 결과 ‘표범가죽이 미국에 의해 전쟁 당시의 약탈품으로 분류되어 1951년 8월 - 1952년 2월 사이에 주(駐) 미 한국대사관에 반환된 물건으로 , 반환 사실을 확인한 뒤, 표범가죽의 행방을 찾기 위해, 문화재청, 국가 기록보존소, 외교부 등에 문의해 보았으나 모두 관련 기록이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소재를 찾기 위해 5/18일 감사원에 301명의 서명을 받아 '국민감사청구'를 접수한 상태이다
● 문화재청이나 국가 기록원, 외교부 모두 관련 기록이 전무한 상태라고 답신한지 7일만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사실을 발표'한 것은 조금 의아한 면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미국으로부터 반환받은 문화재에 대해 ' 정확한 목록이 없거나 혹은 소장품의 종류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나아가 국립박물관은 1951년 라이프지에 기재된 포범 카페트와 동일한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소장경위를 자세히 밝힐 것을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문화재제자리찾기는 ‘명성황후 카페트의 재발견’이 최근 논의 되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칼 ’히젠도 반환운동‘, 일본 궁내청 소장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의 반환 운동으로 확산되어, 국민적 관심을 고조시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한편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표범 카페트의 소재가 확인된 만큼, 미국으로 부터 반환 받은 또 다른 문화재 목록들에 대해서도 공개, 추가적 조치를 취할 예정이다.
명성황후 카페트 관련 사건 경과
1. 2009년 혜문스님 미국 뉴욕 체류중 교민들에게 표범 카페트의 반환 관련 사실 제보 받음
2. 2009년 11월 미국 라이프지 기사 확인, 메릴랜느 대학 소장 ‘반환문화재 목록 입수
3. 2010년 4월 관련 자료 수집 완료
4. 2010년 5월 7일 국가기록원, 문화재청에 정보공개 청구
---> 2010.05. 10일 국가 기록원 회신 관련 자료 없음
2010. 05. 13일 문화재청 회신 : 외교부로 이관
5.2010년 5월 17일 주간 조선 보도
6. 2010년 5월 18일 감사원에 국민감사 접수
7. 5.19일 외교 통상부 회신
---> 관련자료 없음. 교민 상대로 조사중
8. 5월 25일 국립중앙 박물관 소장 사실 공개
참고 자료 1 라이프지 기사 1951년 8월 20일
<라이프지 기사요약문>
♠ 길트너씨는 아마추어 골동품 수집가라서 집에 작은 갤러리를 꾸미고 비록 값비싼 물건은 아닐지라도 이집트의 피라미드 돌에서부터 콜로라도의 오래 된 성냥 곽들도 잡다한 것들을 수집해놓고 있는 중이었다.
♠ 그의 아들 27세의 에브른 중사는 한국에 파병 되어 있었다. 51년 5월 아들은 엄마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주 괜찮은 한국 표범 가죽 카페트를 샀습니다. 부모님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1951년 6월16일, 길트너 집안에 군용 더플 백에 담긴 묵직한 물건이 국제 배송되어 왔다. 거기에는 39.20불의 항공 배송료 꼬리표가 붙어있었다. 백안에는 폭 8피트 길이 18.5피트의 기다란 표범 가죽 카페트가 있었다. [가로 2.5미터 길이5.6미터]
♠그 카페트는 너무 커서 길트너 집의 응접실에 깔 수도 없었고, 어디에 두어야 할지조차 마땅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조셉. R 시몬스( Joseph R Simmons) 모피 판매상에게 보관을 의뢰 했다. 모피상 시몬스는 한국에서 건너온 이 진귀한 보물을 언론에 공개했다.
♠한국 뉴욕 총영사관에서 신속하게 반환을 요청하는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 표범 가죽은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국보급 보물로서 서울 경복궁의 명성황후 궁실에서 도난당한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길트너 중사는 자신은 이 보물을 51년 4월 서울 길거리 행상에게서 십오만 환(25달러)에 구입했다고 말했다.
♠미 세관은 ‘길트너로부터 표범가죽 카페트를 압수했다. 물건은 덴버에 압수물로 보관되어 있는데, 곧 한국 명성황후의 궁전으로 되돌려 질것으로 보인다.
참고자료 2 정보 공개 청구서와 답신
정보공개서
수신자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55 봉선사 ●●●
접수일자 : 2010.05.07 접수번호 : 1055644
처리기관 : 국가기록원 통지일자 : 2010.05.11
질의사항 1. 1951.8월부터 1952년 2월 사이 한국 주미 대사관은 미국측으로부터 ‘표범가죽 카페트를 반환받은 기록이 있는지의 여부 2. 반환 받았다면 표범 가죽 카페트는 지금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 공개내용
1. 국가기록원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 귀하께서 문의하신 내용과 관련하여 국가기록원 소장기록물 중에서 표범가죽 카페트를 반환받은 기록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 보았으나 국가기록원 소장기록물 중에서 확인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3. 기타 궁금하신 사항은 국가기록원 공개서비스과 정보공개담당자(042-481-6305, 전종호)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참고자료 3 문화재청의 사실조회서
|
1AA-1005-012507 | ||
|
단체 | ||
|
문화재제자리찾기 | ||
|
김●● |
|
- ******* |
|
|
|
010-3667- |
|
472-864 |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55 봉선사 | |||
|
비공개 |
|
이메일 |
|
doorskyj@naver.com |
|
기타 |
|
2010.05.07 12:06:41 |
|
외교통상부 주미합중국대사관 | ||
|
백영희 (202-939-6469) |
|
1AA-1005-012507 |
|
2010.05.10 10:07:06 |
|
2AA-1005-019010 |
|
2010.05.17 23:59:59 |
||
| |
김●● 님께, 안녕하십니까. 국민신문고를 통해 문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의하신 내용은 대사관 내 관련과로 전달하였습니다. 회신이 오는대로 곧 추가답변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주미국 대한민국대사관 영사과 |
참고 자료 4 외교 통상부의 답변
접수일자 2010.05.08 접수번호 1056095 처리기관 외교통상부 통지일자 2010.05.19 청구정보내용
안녕하십니까,
귀 단체의 정보공개 청구신청을 잘 받아 보았습니다. 문의하신 표범가죽 카페트 관련 사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드립니다.
외교통상부 본부 외교사료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51-1952년 사이의 문서상에 상기 표범가죽 카페트 관련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미대사관에서도 자체적으로 단서가 될 만한 관련 문서 및 물품 등을 조사해 보았으나 카페트의 행방에 단서를 제공해 줄 만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 이와 관련, 당시 외교문서는 관련 법령에 따라 이미 일반에 공개되었으므로 언제든지 외교통상부 외교사료관에서 열람하실 수 있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주미대사관에서는 상기 표범가죽 카페트와 관련하여 미 정부 등이 보유한 추가 기록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노력중입니다. 그리고, 뉴욕총영사관과 함께 교민회측과도 연락하여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인사가 있는지 파악 중입니다.
오랜 기간이 경과한 동 사안의 특성상 사실 확인에 시간이 걸리고 다소 어려움도 있을 것으로 예상되나, 최선을 다해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위 결정과 관련하여 궁금하신 사항은 담당자(주미대사관 총무과 이원우 서기관, 전화 : 202-939-5637)에게 문의하시면 친절히 설명하여 드리겠습니다.
참고자료 5 사진 설명 (출전 <라이프>지 51년 8월 20일 발행)
1) 명성황후의 표범 카페트
2) 라이프지 기사와 콜로라도의 길트너 부부의 집, 명성황후의 접견실
3)길트너 부부의 모습과 서울 고미술상을 방문한 미군
5) 길트너 중사의 모습
나. 조선검
미군 약탈 조선검을 한국으로 반환하는 사진, 가운데가 아델리아 홀 여사 , 왼쪽이 이선근 장관(출전 : 미국 국가기록보존소, 아델리아 홀 레코드 中)
문화재제자리찾기(사무총장 혜문스님)는 미국 메릴랜느 국가 기록보존소에 있는 미 국무부 문서 ‘아델리아 홀 레코드’를 최근 입수, 미군 병사가 한국전쟁 당시 이왕가 박물관(덕수궁 박물관)에서 가져간 ‘조선검’의 행방을 찾았다고 밝혔다. 이는 아델리아 홀 여사의 기록에 등장하는 ‘반환 문화재 목록’에 기재된 것들중 ‘korea sword'란 물건에 해당하는 것으로, 지난 5월 ‘명성황후 표범 양탄자’에 이어 두 번째 성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혜문스님이 입수한 ‘아델리아 홀 레코드’에 의하면 이 칼은 지난 6.25 전쟁당시 주한미군 병사 Tom C, Harrlaon이 미국 LA로 가져갔던 칼로 1954년 아델리아 홀 여사의 노력으로 한국으로 반환되었다. 이 칼은 전체길이 53인치(134.6Cm) 칼날길이 38인치(96.5Cm), 금, 은, 철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칼날에는 금으로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Tom C, Harrlaon 병사는, “ 북한군에 의해 도난당했던 많은 양의 도난품들을 서울에서 발견했으며 거기서 검을 찾았고, 그 검은 원래 당시 서울 박물관에 있었던 칼”이라고 진술했다.
아델리아 홀 여사는 사실관계를 조사하기 위해 당시 한국의 국립박물관장인 김재원 관장에게 편지를 보냈고, 김재원 관장은 “조선 전기의 검이란 사실을 확인했으며, Lee Household Museum (이왕가 박물관, 당시 덕수궁 소재) 에 있던 검으로 보인다‘는 답신을 미국에 제출했다. 미국 정부는 미군의 약탈행위를 인정하고 1954년 당시 이선근 장관 에게 한국으로 반환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미국이 반환한 문화재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이칼의 행방 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혜문스님에 의하면 “미국으로부터 반환받은 ‘조선검’의 전체길이, 칼날 길이, 모양, 명문의 상태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때, 육군 사관학교 박물관에 있는 삼인검으로 판단한다. 아델리아 홀의 기록을 정부 당국에 제공한 뒤,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할 예정이다 ”고 입장을 밝혔다.
주)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지난 2009년 ‘Ardelia Hall Records’를 입수한 뒤, 관련 자료를 조사 최근 명성황후 표범 양탄자의 행방을 찾아 내기도 했다. 혜문스님은 ‘Ardelia Hall Records’에 ‘ Korean Embassy Cases - Korean Sword and Crown 등이 함께 기록된 것으로 보아 ‘ 조선왕실로부터 유출’된 것으로 추정 ,어쩌면 이 칼이 일제시대까지 현존했던 이순신 장군의 실전용 칼 ‘쌍룡검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하는 가정에서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소재를 파악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지난 7월 10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 잃어버린 쌍룡검을 찾아서 -에서 방영되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15013
다. 조선시대 관인
아델리아 홀 레코드에는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이 약탈한 문화재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거기 국새 혹은 어보로 보이는 도장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이 기록은 당시 서울에서 360개의 도장을 미군이 도둑질 했는데 그중 14개를 잃어 버렸다는 점. 그중 왕실의 문장이 새겨진 도장이 있다는 점, 무려 4인치나 되는 정방형 도장이 있다는 점 등이 기재되어있다. 그렇다면 아델리아 홀 레코드에서 언급된 ‘ korean official seals'은 조선시대의 관인의 특징과 비교할 때, 어보 내지 국새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used to stamp official document' . 만약 왕실문양이 있고 사용한 흔적이 있다면 대한제국의 국새일 가능성도 있어 보임)
조선 관인의 특징을 말하면,
① 인형은 대부분 네모형이거나 직사각형이며,
② 인문의 자체는 明·淸의 영향으로 장식적이며 도안적인 구첩전(전서를 아홉번 구부린 글씨체)으로서 문자의 선은 가늘고 테두리는 두터우며 굵다.
③ 印材는 대부분 銅 또는 철을 사용하였으나. 국새, 어보류는 금·옥·은(金·玉·銀)을 썼다.
한가지 더 주목할 것은 대한제국 국새의 행방이다. 1897년 고종이 황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한(韓)」으로 바꾸게 되자, 대한국새, 황제지보, 대원수보, 제고지보와 2개의 칙명지보, 내각지인, 내각총리대신장 등 모두 8개의 옥새를 주조해 사용하다가,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 주권을 강탈했을 때, 이 옥새들도 함께 빼앗아 갔다. 동경으로 옮겨진 이 옥새들은 해방 후 맥아더 원수를 통해 모두 반환되었다. 총무처는 1946년 1월 13일 되찾은 이 옥새들을 구한말 조약문서들과 함께 특별전시, 일반에게 선보였다.
최근 발견된 당시 전시회의 전시목록에 의하면 전시됐던 옥새 중「대한국새」는 金 3.05㎏으로 만든 것으로 바닥의 가로 세로는 사방 9.7㎝의 정사각형이며,「황제지보」역시 금제로 무게는 4.6㎏,바닥의 사방은 11.4㎝,그리고, 전군에 대한 통수권을 행사하는데 쓰였던「대원수보」도 금으로 무게 1.75㎏, 사방8.2㎝, 황제가 내리던 사령장에 날인했던「제고지보」역시 금으로 무게 5.8㎏, 사방11.1㎝의 크기다. 또「칙명지보」는 금으로 무게 6.25㎏, 사방 11.2㎝짜리와 금과 은으로 만든 무게 2.8㎏에 사방 9.2㎝짜리였다. 이밖에「내각지인」과「내각총리대신장」도 모두 금은제로 무게는 0.52㎏과 0.25㎏에 규격은 사방 6.4㎝와 4.1㎝로 되어 있다.
이들 옥새의 꼭지는 모두 거북형인데, 이 옥새들은 전시회가 끝난 뒤 총무처에서 관리하던 중 6·25 전란을 겪게 됐고, 전쟁의 와중에 옥새 8개가 모두 없어졌다. 그 뒤, 54년 6월 잃어 버렸던 옥새 「대원수보」와「제고지보」,「칙명지보」등 3개는 되찾았다. 되찾은 경위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이 3개의 옥새는 54년 6월 28일 오전 10시0 부산의 경남도청 서무과에서 총무처가 문교부(당시에는 국립 중앙 박물관이 문교부 산하에 있었음)에 인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수복 후 옥새는 부산에서 옮겨져 지금까지 한번도 일반에게 공개된 적이 없다.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의 금고 속에 깊숙이 보관되어 있다. (http://blog.naver.com/goking65/100003484964)
아델리아 홀 레코드는 미군 병사가 훔쳐간 물건(looting)을 토대로 작성된 문서이다. 여기에 9cm가 넘고, 왕실문양이 있으며,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면 맥아더가 1945년 일본으로 되찾아준 ‘대한제국의 옥새’중에 6.25 기간 분실되어 버린 ‘대한국새 등의 5개’ 중에 하나일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나아가 최근 미국 LA 박물관에서 발견된 '문정왕후 어보'도 6.25때 유출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델리아 홀의 문서에 나오는 분실된 ‘47개의 도장중 47개중 하나가 아닐까 ?
이에 아래와 같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질의한뒤, 아무런 기록이없다는 문서를 받음
정보(비공개) 결정통지서
접수일자 2010.09.06
처리기관 국립중앙박물관
통지일자 2010.09.10
청구정보내용
미국 국가기록보존소에 기록된 아델리아 홀 레코드에는 한국 정부에게 Korean official seals을 돌려 주었다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 다음의 사항에 대해 정보 공개 청구합니다.
가) 국립중앙박물관은 50-60년대 미국으로부터 Korean official seals(옥새, 어보, 관인 등)을 반환 받은 사실이 있는지 여부
나) 아델리아 레코드에 기록된 Korean official seals의 현재 소장처는 파악하고 있는지( 반환 받았건 반환 받지 않았건)
공개내용
귀하께서 청구하신 정보공개에 대하여 반환받은사실과 소장처에 대하여 파악된 자료가 없음을 말씀 드립니다.
처리과명 행정지원과
문서번호 행정지원과-6310 (2010.09.10)
기안자 서제성
직위/직급 행정주사
검토자 공병윤
직위/직급 행정사무관
결재권자 송철현
직위/직급 과장
주소
140-026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168-6
전화번호
02-2077-9033
전자우편
seo9010@korea.kr
다. 결언 - 관계 당국의 문제점을 제기한다.
A. 명성황후 카페트에 대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의 미숙한 태도를 비판한다 - 명성황후 표범 양탄자에 대한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솔한 대응
우선 국립중앙박물관이 오는 8월 5일부터 ‘명성황후 표범 양탄자’를 공개, 전시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서 환영한다. 그러나 ‘명성황후 표범 양탄자’에 대한 발견 및 전시 경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없이 ‘명성황후의 표범 양탄자’가 아니라는 홍보에 주력하는 경솔한 행동에 대해서는 실망을 금치 않을 수 없다
문제의 표범 양탄자는 6.25 당시 미군 병사 길트너에 의해 25달러에 팔려 미국 콜로라도까지 갔다가 반환 받은 ‘특이한 이력의 물건’이다. 사건 당시 미국 언론에서 ‘10만 달러의 가치’를 갖는 양탄자로 ‘명성황후가 썼던 카팻’이란 보도가 라이프지를 비롯한 수십개 언론에서 다루어 졌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통해 반환된 문화재임에도 불구하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한채, 60년 동안 단 한번의 공개없이 수장고에 방치해왔다. 지난 5월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가 ‘소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감사원에 ‘국민감사청구’를 접수하고 나서야 비로소 소장 사실을 시인하게 되었다. 소장사실을 확인할때도 마치 국립중앙박물관은 스스로 공개하는 듯한 인상을 심으려고 노력했으며, 시민단체와 민원인들의 노력으로 ‘명성황후 표범 양탄자’의 소재가 확인된 사실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이 없었다.
게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은 8/5일 역사적 유물의 공개에 앞서 충분한 자료검토없이 ‘표범 양탄자’와 ‘명성황후’는 관련사실이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이 사건과 관련 국립중앙박물관이 범하는 잘못을 상세히 지적하고자 한다.
1. 국립중앙박물관은 유물목록에 대한 진상을 밝혀라
국중박은 지난 5월 ‘표범 양탄자의 소장사실’을 공개하면서, 유물번호 덕근 201호란 자료를 공개했다. 그런데 이 목록을 자세히 검토하면, ‘虎皮’라고 기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제의 양탄자는 호피 가죽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豹皮가죽으로 만든 것임을 상기할 때 이것이 정확한 유물목록이란 사실을 인정할 수 없게 한다. 표피를 호피로 잘못 기재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국중박 학예사가 호피와 표피를 구분할 수 없는 정도의 수준이란 걸 인정하는 꼴이 되버리고 만다. 또한 표범 양탄자는 단순히 호피, 혹은 표피라고 기재할 유물이 아니고, 호피가 지시하는 대상물은 호피의 가죽 자페를 지칭하는 것이지 가공된 양탄자를 지칭하는 물건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국중박이 제시한 덕근 201호란 유물목록은 다른 유물(호피 자체를 지칭한다고 판단함)의 목록일 것이고, ‘표범 양탄자’는 유물번호 조차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2. 국립중앙박물관은 자료수집 부족 상태에서 어떤 판단도 내리지 말라
국중박은 ‘표범 양탄자 반환’과 관련된 아무런 근거자료를 갖고 있지 않음을 시인하라. 이 양탄자는 1951년 길트너 병사가 불법 반출한 뒤, 미국 국무부의 아델리아 홀 여사의 주도로 인해 반환된 경과를 갖고 있다. 따라서 미국 메릴랜느 국가기록보존소에 보관된 ‘아델리아 레코드’를 열람하기 전에는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없는 셈이다. 문화재제자리찾기가 정부기관에 수차례 질의해 본 결과, 우리 정부는 아델리아 홀 레코드의 존재자체를 모르고 있는 실정이었고, 국중박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유물의 반출경위, 반환 경위, 반환 논의 과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판단은 너무나 경솔한 판단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아델리아 홀 레코드의 자료입수후 신중한 검토후 ‘명성황후’와 ‘표범 양탄자’의 관계를 정의해야 할 것이지, 아무 자료도 없는 상태에서 ‘명성황후’와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경솔한 일이다.
3. 국중박은 미국측의 기록을 무시하지 말라
미국 신문기사는 1951년 당시를 기자가 직접 취재해서 남긴 보도이므로, 지금보다 훨씬 많은 양의 주요정보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미국 기사들은 표범 양탄자의 주인이‘명성황후’였음을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당시 뉴욕주재 한국영사 데이비드 남궁은 ‘이 표범 카페트는 한국의 궁궐에 있었고, 명성황후가 사용하던 것’이란 성명서를 발표하고, 미국 정부에 반환을 공식 요구했다고 한다.(헤럴드 트리뷴, 라이프지 등 보도) 남궁 영사가 이런 성명서를 발표한 이면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확인절차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라이프지는 사진기자를 직접 서울에 보내 도난 당한 장소까지 명기하고 있음을 참고 할때 , 명성황후와 관련성을 가졌음은 당시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아델리아 홀 레코드에는 ‘한국측으로부터 전달받은 기록에서 명성황후, 창덕궁 과 같은 메모자료,서신 등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국중박이 1951년 당시 한국 정부의 입장과 상반되게 ’명성황후와의 관련‘을 부정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국중박의 이런 자세는 당시의 한국 정부가 ’표범 양탄자를 반환받기 위해 거짓말‘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이에 대한 국중박측의 신중한 대응을 요청한다.
4. 대한제국기의 이화문양은 증거가 될 수 없다.
국중박은 이화문양이 존재한것은 대한제국의 성립이후이므로 , 명성황후의 카페트가 아닌 결정적인 단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화문양은 황실재산을 표기하거나 황제가 사용했을때 얼마든지 후에 부착할 수 있는 것이기에 결정적 단서라고 말할 수 없다. 실제로 라이프지 기사에는 황제가 겨울여행에 이 카펫을 사용한적이 있다는 단서를 달고 있다. 궁궐밖으로 겨울 여행을 떤난 사람은 조선역사상 순종 밖에 없으므로, 순종이 겨울에 지방 순시중 이 카펫을 사용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후대에 황제가 사용했음을 기념하기 위해 얼마든지 표범양탄자에 이화문 장식을 넣을 수 있는 셈이다.
표범 양탄자는 명성황후가 남긴 유일한 유물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을 증언해 주는 유물이다.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 경위를 조사하고 전시해야할 유물을 방치했던 것은 국중박의 커다란 과실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해 '소재파악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에 대한 일언의 배려없음, 그리고 명성황후와의 관련성까지 부정하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경솔함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국중박측에 좀더 신중한 고려를 촉구한다.
B. 조선검에 대하여
: 현재 보관된 육군 사관학교에서조차 이것이 미군으로 반환된 문화재란 사실을 모르고 있음
C. 조선시대 관인
: 정부기관이 반환 받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고, 행방을 찾아야 함
보론
: 이 3가지 경우에서 보이듯이 우리는 그동안 반환받은 문화재의 관리가 엉망이었다는 면을 알 수 있음 . 이는 시급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함. 국정감사 기간에 이런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