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회 세계대회, 2연패 숙원 좌절
8전 8승, 무실점의 예선리그
53개국의 500여명의 선수가 참가한 캘커타 세계대회는 1953년 봄베이 대회 이래 인도에서 두 번째로 열리는 대회. 개최 하루 전인 75년 2월 5일, 성대한 개회식과 함께 열전 11일간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본 대회 유치를 위해 캘커타에 건설된 네타지 서바스 스타디움은 20대의 탁구대와 1만 2천여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체육관으로, 세계대회를 유치하기에 조금의 손색도 없다는 평가를 자아냈다.
이번 대회의 하이라이트는 6일부터 10일까지 열리는 남녀 단체전.
73년 유고 사라예보 세계대회에서 남녀 모두 준우승에 그친 중국이 세계정상을 탈환하기 위해 벼르고 있는가 하면, 동구권 탁구가 새롭게 등장해 세계 탁구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특히 61년 인도와의 국경 분쟁이래, 처음으로 53명(선수단 28명, 스포츠관계 관리 35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참가시킨 중국이 남녀단체전을 비롯한 개인단식 등의 전 종목 석권에 도전하고 있었다.
이에 여자단체전 패권 고수를 위해 전심전력해온 우리 선수단은 보다 세밀한 정보 분석과 작전을 세우며, 막바지 대비책 마련에 만전을 기하는 모습이었다.
드디어 여자단체전 1군 A조 8개국 예선 풀리그전이 펼쳐지는 경기 첫 날, 이에리사, 정현숙 선수를 주축으로 한 우리 선수단은 주최국인 인도와 인도네시아를 각각 3:0으로 가볍게 물리치며 쾌조의 출발을 보였다.
둘째 날 역시 프랑스와 스웨덴을 각각 3:0으로 완파, 4연승을 거둔 가운데 우리 선수단은 사기충천의 무패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경기 3일째, 지난해 스칸디나비아 오픈대회에서 한국이 2:3으로 패한 바 있는 체코 외에도, 일본에게 분패하고 준우승을 차지했던 소련과의 대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선수단은 예선리그의 최강의 적 소련을 3:0으로 완파한 데 이어 체코 역시 3:0으로 완파, 지난해의 부진을 말끔히 씻고 파죽의 6연승을 거두었다.
이것으로써 우리 한국은 남아있는 대 헝가리 전에서의 승패와 관계없이 준결승 진출이 확정되었으나 헝가리 전 역시 3:0으로 스트레이트로 완파, 7전 전승으로 A조 1위에 유유히 안착할 수 있었다.
한편 B조 1위는 중국, 2위는 일본이 올라와 사라예보 대회의 재판 양상을 보였다. 일본과 대전하게 된 결승 토너먼트.
첫 번째 단식에서 정현숙 선수는 오제끼 선수와의 대전에서 예리한 보스커트로 오제끼의 찬스 볼을 봉쇄하면서 안정된 수비와 적시의 반격으로 압도, 2:0(13,16) 완승의 기선을 잡아냈다.
두 번째 단식에 선 이에리사 선수 역시, 특유의 드라이브와 루프 스매싱의 정공법으로 수비선수 요꼬다를 2:0(18, 6)으로 가볍게 이겼다.
그리고 세 번째 복식에서도 이에리사.정현숙 조가 오제끼.에다노 조를 2:0(19, 6)으로 가볍게 물리치면서 토털 스코어 3:0으로 일본을 완파, 대망의 결승 진출을 확정했다.
그 순간 박성인 감독을 비롯한 벤치 전원의 선수들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 수훈의 두 선수를 얼싸안고 눈물을 터트렸다. 예선 7전 7승과ㅗ 대 일본전을 거행하는 동안 단 한 세트도 내주지 않고 모두 2:0으로 승리한 것을 거의 기적에 가까운 투지의 결과로, 이는 영원히 탁구사에 기록될만한 것이었다.
특히 아시아탁구연합(ATTU) 관계로 중국에 빌붙어온 일본의 콧대를 납작하게 꺾은 통쾌감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간 국제 탁구계에서 일본으로 인해 한국이 얼마나 모진 수모를 받아왔던가?
우리 선수단이 일본을 이기던 날, 일본탁구협회를 비난하는 동경발 통신이 수많은 일본탁구 팬들에게 전해졌다. 일본여자 탁구팀이 한국에게 1점도 못 따고 3:0으로 완패, 결승조차 못 오른 데 대하여 각종 언론들이 흥분했다. 일본 하네다 공항을 출발하면서 일본팀 감독 고다마는 ‘일본의 전력은 사상 최강이다. 이번엔 단체전에 주력해 기필코 우승하겠다.’고 큰 소리를 친 바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캘커타 대회를 일본탁구 재기의 기회로 삼아 전례 없이 고된 훈련을 실시, 팀 전력을 정비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해왔던 것이다.
또한 일본은 지난 52년 봄베이 세계대회 때 첫 출전하여, 7개 종목 중 4개 종목을 휩쓸며 일본탁구를 세계에 선양했다. 61년 중국이 출현하기 이전까지 인도는 세계정상을 활보했던 영광의 발상지였던 까닭에 필승의 신념으로 이번 대회에 임했음은 당연지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큰 법, 큰 소리를 치고 출범했던 일본 여자팀이 한국에게 의외로 형편없이 패함으로써 일본 국민들은 더욱 격분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한국으로서는 우승 이상의 기쁨이 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2연패의 숙원 좌절
대망의 결승전에 오른 우리 선수단은 이튿날 다시 한 번 중국과 세기의 한판승부를 남겨놓게 되었다.
그러나 세계대회 여자 단체전 2연패를 눈앞에 둔 한국은 2월 10일 대 중국전에서 중국의 신인 복병 갈신애에게 이에리사, 정현숙 두 선수가 굴복함으로써 3:2로 패배, 2연패의 숙원이 좌절되고 말았다.
이날 한국은 1차 단식에서 이에리사 선수가 중국의 장립 선수에게 2:0(-18, -14)으로 완패한데 이어, 정현숙이 중국의 복병 갈신애를 맞아 2:1(19, -19, -20)의 대접전 끝에 분패하여 총 스코어 2:0으로 초반의 리드를 빼앗겼다.
그러나 이에리사.정현숙 콤비가 복식에서 중국의 호옥란.갈신애 조를 2:0(15, 21)으로 제압, 추격전을 벌이면서 정현숙 선수가 3번째 단식에서 그간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중국의 주전 장립을 2:0(16, 20)으로 이겨 2:2 타이까지 몰고 갔다.
그러나 승부와 세계정상을 가늠하는 최종 단식에서 이에리사 선수가 갈신애의 변화구를 처리 못해 2:0(-14, -10)으로 허무하게 지고 말아 세계선수권 2연패의 꿈이 좌절되고 말았다.
비밀병기 이용한 갈신애의 마구에 분루(憤淚)
캘커타 세계탁구의 화제는 패권의 방향보다 안티 러버를 이용한 중국의 러버 변화(양면 이질 러버 즉, 앞면은 변화가 심한 특수 핌풀 러버, 뒷면은 4mm의 표면 러버)를 이용한 중국의 변칙 플레이였다.
중국은 러버 변화의 플레이를 익힌 무명의 남녀선수가 등장, 남녀 단체전 우승을 거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세계탁구에 의문의 선풍을 일으켰다. 베일에 가려진 미스터리의 중국탁구 그들이 개발한 비밀병기는 무엇인가?
죽의 장막 뒤에 숨은 복병 갈신애의 확실한 전술을 몰랐던 한국은 장립과 황석평 선수를 중국의 에이스로 가정, 그들에 대비한 훈련을 쌓아왔다. 그러나 뜻밖에도 신인 갈신애가 등장, 정현숙과 이에리사가 차례로 꺾이면서 한국여자탁구 2연패의 꿈은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중국은 유고와의 남자 단체전 결승에서도 역시 변칙 플레이어 육완성을 기용, 기습 공격으로 당시 세계 랭킹 2위인 드로틴슈백 선수를 거뜬히 물리치고 토털 스코어 5:3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중국은 남녀단체전 모두 신인 갈신애와 육완성 선수를 비밀병기로 기용해 우승을 차지하게 된 셈이다.
중국은 당초 세계선수권자인 호옥란과 정회전의 부진으로 장립 선수를 제외하고는 뚜렷한 전력이 될 만한 선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당시 등록 선수만 3백 50만 명을 헤아리는 너무나 두터운 선수층으로 세계대회 때마다 혜성과 같은 신인을 배출해냈던 중국은 한국과의 결승전에 회심의 걸작 갈신애를 등장시켜 한국 타도의 결정타를 치게 한 것이었다.
결과를 놓고 오간 이야기이지만, 지난해 스칸디나비아 오픈대회 단체전에서 갈신애.호옥란 조가 복식조에 출전한 바 있어 대략 구질 파악 정도는 했어야 했는데, 이에 대한 대비가 전혀 마련되지 않은 것이 바로 2연패 좌절의 원인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해면체인 안티 러버에 의한 볼의 처리가 처음 경험한 선수들에게는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사전대비만 되어 있었다면 단순한 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가령 갈신애는 개인단식에서 그의 구질을 잘 아는 장립 선수에게 3:0 스트레이트로 패배했는데, 이것만 보아도 갈신애의 변칙 플레이가 그리 위협적인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현숙 선수가 먼저 싸우는 오더를 짰더라면 오히려 승산이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적지 않았다. 전해 스칸디나비아 오픈대회 이후 불과 45일간의 강훈이 세계정상 클래스는 지키게 했으나 세계정상은 아무래도 힘에 부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복식을 이기고 4번 단식에서 정현숙 선수가 세계 톱클래스인 장립을 꺾은 분전은 참으로 장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2연패의 꿈은 아깝게 좌절되고 말았지만 한국여자탁구의 저력은 유감없이 과시한 셈이 된 것이었다.
등록선수 2천 5백 명도 안 되는 우리 선수층이 3백 30만 명(1400배)과 대결한 셈인데 그나마도 얼마나 자랑스러운 선전이었던가? 비록 마의 이질 러버로 인해 무릎을 꿇었으나 다음 영국 버밍엄 대회를 대비해서 또 다시 정진할 것을 눈물로 다짐하면서 재기의 꿈을 꾸었다.
남자단체전 및 개인전
8개국으로 묶인 12그룹 중 A조에 속한 한국의 남자단체전 풀 리그.
한국은 덴마크를 5:2, 오스트리아를 5:1, 프랑스를 5:3으로 이겼으나 서독과 소련에게 각각 1:5, 스웨덴과 체코에게 각각 2:5로 패해 7전 3승 4패로 5위를 차지했다.
순위 결정전 9위~12위전에서 루마니아를 5:2로 물리치고 예선에서 5:3으로 이긴 프랑스에게2:5로 지는 바람에 당초 8위 목표를 둔 한국은 10위로 처지고 말았다.
2월 12일부터 실시한 개인단식에서는 남녀 선수 모두 본선에 진출했다. 그러나 남자는 2회전에서 모두 탈락하고 말았고, 여자는 기대했던 이에리사가 1회전에서 중국의 정희전에서 3:1로 패한 것을 비롯, 김순옥 역시 중국선수인 주상윤에게 3:0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손혜순, 성낙소, 심경옥 선수도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채 1,2회전에서 패하고 말았다.
정현숙 선수만이 3회전(16강)에 진출, 준준결승(8강)에서 북한의 박영순 선수와 대전하게 되어 있었다.
개인단식에서 세계선수권자인 중국의 호옥란 선수가 이미 탈락한 상태였으므로 박영순 선수만 이긴다면 무난히 결승R지 진출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피를 말리는 대접전 끝에 2:3으로 역전패 하여 실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게 되었다.
첫 세트를 21:13으로 손쉽게 이긴 정현숙은 두 번째 세트에서 19:21로 패배, 다시 세 번째 세트를 듀스 끝에 22:20으로 이겼다. 그러나 단체전에 참가하지 않은 박영순의 구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었던 까닭에 네 번째 세트를 16:21로 패, 세트 스코어 2:2의 숨 막히는 결전이 계속 되었다.
결국 마지막 세트에서 두 번씩 거듭된 듀스에도 불구, 아깝게 21:23으로 패하고 끝내 분루를 삼키고 말았다. 이후에도 박영순 선수는 준결승에서 만난 소련의 페드로바 선수를 3:2로 이기고 결승에 올랐고, 중국의 장립 선수 역시 3:1로 이기고 세계 탁구여왕으로 우뚝 섰다.
그밖에도 한국은 남녀복식 혼합복식에서의 입상권 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모두 탈락하는 아쉬움을 남긴 채, 11일간 열전의 막을 내려야 했다.
제33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종목별 종합 순위는 다음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