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내남면 망성리 산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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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애왕릉으로 가는 길은 험허고 전혀 손길이 닿지 않는곳에 위치하고 있어 답사하기가 힘든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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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44대 민애왕의 이름은 명(明)이고 아버지는 인겸태자(仁謙太子)의 아들인 충공(忠恭)이다.
김명의 가계는 원성왕-인겸태자-충공-김명으로 이어지는데, 제42대 흥덕왕이 차기 왕위를 동생 충공에게 넘기려 했던 만큼, 김명은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다.
그의 어머니 귀파부인(貴巴夫人) 또한 인겸태자의 딸이니, 김명의 부모는 남매간 근친혼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근친혼은 권력독점을 위해 원성왕계 내부에서 자주 행해지던 일이었다.
비는 영공각간(永公角干)의 딸 무용황후(无容皇后)이다.
본래 후사가 없었던 제42대 흥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인물은 흥덕왕의 동생인 충공이었다.
따라서 충공의 아들 김명은 충공을 뒤이어 충분히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충공이 흥덕왕 10년(835) 형인 흥덕왕보다 먼저 사망함으로서 원성왕-인겸태자-흥덕왕으로 이어졌던 인겸태자계의 왕위 계승은 일시 단절되었고,
김명은 미처 어렸기에 왕위계승 대상이 되지 못했다.(이기동, 2003) 이에 원성왕-예영-헌정, 균정으로 이어지고 있던 예영계가 차기 왕위계승권자로 부각되었고,
이에 김명은 위기위식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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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흥덕왕은 자신의 후계자 문제에 고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흥덕왕은 충공의 뒤를 이어 균정을 태자 임명과 유사한 의미인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이것은 인겸태자계 내에서 달리 인물이 없는 이상, 우선 예영계의 반발과 이탈을 막아야 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흥덕왕은 균정의 아들 우징을 시중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인겸태자계의 조카 김명을 이 자리에 임명함으로써 이들 사이의 세력균형을 꾀하였다.
그러나 흥덕왕 11년(836) 흥덕왕이 후사에 대한 언급없이 사망하자,
곧 균정은 왕위에 오르고자 하였고, 여기에 김명의 지지를 등에 업은 헌정의 아들 제륭이 반발함으로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다.
제륭의 행적은 사서에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독자적인 정치적 영향력이 크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것은 사실상 김명이 제륭을 이용하여 균정과 대립한 구도였다.
제륭과 김명이 연합하게 된 원인으로는 제륭이 김충공의 사위였다는 점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김명에게 제륭은 혈연적으로 가까운 사이였으며 제륭도 예영계 내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입장이었기에 김명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윤병희, 1982) 결국 균정은 이들에게 피살당했고 제륭이 제43대 희강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희강왕 또한 즉위한지 얼마지나지 않은 희강왕 3년(838) 김명이 일으킨 반란에 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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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이로써 김명은 왕위에 즉위하지만 그 집권 역시 길지 못하였다.
민애왕 정권은 동왕 2년(839) 1월에 청해진대사 장보고와 연합한 군사를 끌고 달구벌(현 대구)까지 진격해 온 김우징의 반란군의 도전을 받게 되는데,
민애왕의 군사는 이를 막지 못하고 도리어 대패하였다.
이로써 민애왕 정권은 성립 1년만에 무너지고 말았으며 민애왕 자신도 반란군 병사에 의해 월유택(月遊宅)에서 피살되었다.
대구 팔공산의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발견된『신라민애대왕석탑기(新羅敏哀大王石塔記)』의 명문에 의하면
민애왕은 839년 1월 23일 23세로 사망하였다고 한다(황수영, 1969).
이는 민애왕이 1월 22일에 죽었다고 기록한『삼국유사』왕력의 기록과는 약간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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