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즐 속의 미로
S-TV 제작 담당 이사 이성구는 참모진들과 회의를 열고 있었다.
말이 회의이지 모여 앉아 턱들만 받쳐들고 이 난감한 문제를 어찌할수 없어 한숨들만
쉬고 있는 실정이었다. 회의에는 '흥남 철수 작전'을 쓴 드라마 작가 조성래씨와 연출가
박영웅씨 그리고 진행 책임의 김호균씨도 참석하고 있었다.
"정말 힘들겠습니까?"
이성구 이사가 조성래 씨를 보며 물었다.
"지금 말씀 드린 대롭니다. 그가 지금 죽는것으로 만들면 드라마는 죽도 밥도 안됩니다.
그를 살려내고 그 어려운 고통을 이겨나가는 게 이 드라마의 핵심인데 주인공이 중간에서
죽는대야 무슨 감동이 있겠습니까?
제가 말씀 드린 대로 고강진이 죽은 거야 세상이 다 아는 거고, 비슷한 배우를 골라 대타로
내보내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드라마 작가 조성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출을 맡았던 박영웅이 테이블을 탁치며
흥분된 목소리로 의견을 제시해 왔다.
"아니 조 선생님, 그것도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아무리 배우가 죽었다고 대타를 쳐서
내보내면 그게 드라마가 됩니까? 장난이지. 그거 기억 안 나세요? 타이론 파워 말입니다.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이라는 영화를 촬영하다가 급사했을 때 비슷한 배우를 골라서
대타를 내보냈습니까? 아닙니다. 적어도 국제 수준의 대작을 만들려는 방송국측 의도나
일생 일대의 작품을 만들려는 저는 절대 그걸 용납할 수 없습니다.
타이론 파워가 죽자 시나리오를 다시 고쳐서 율부린너를 내세워 처음부터 다시
촬영하지 않았습니까. 어려우시지만, 약간만 개작해서 주인공 바꾸고 다시 촬영합시다.
밤을 새워서라도 나도 작업할 테니까요."
"박영웅씨 당신은 당신 욕심만 생각하십니까? 지금 진행이 50% 이상이나 진척되었어요.
이제 본격적으로 눈이 오기 시작하면 촬영이 막바지로 오를 텐데 처음부터 다시 찍으면
제작비는 어떻게 감당하고 계절 촬영은 어떻게 커버할 겁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 생각 같아서는 주인공이 여기서 죽고 여인이 자기의 죽은 애인 사진을 가슴에 묻고
흥남 철수 작전에 따라 남하하기 위해 배를 타고 서있는 장면을 끝으로 막을 내렸으면
좋겠어요."
연출 진행을 맡은 김호균이 처음의 고집을 꺾지 않고 있었다.
세 사람의 의견이 모두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진짜 걱정은 시청자들의 반응이었다.
고강진이 죽은 것은 어차피 세상이 다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촬영한 내용으로 보아 주인공 고강진은 한참 클라이맥스에서 사고를 당한 것이다.
제작 책임자인 이성구 이사는 작가의 의견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 4후퇴 때 헤어진 애인이 서로를 그리워하며 결혼도 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다가
이산 가족 생방송 인연으로 늙어서 다시 만나는 눈물겨운 포인트의 장면이 빠진대서야
드라마를 제작한 보람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하늘을 찌를 듯 치솟고 있는
고강진의 인기가 그의 죽음으로 해서 드라마에 관심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지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비록 50% 지만 고강진의 모습을 더 볼 수 있다는 것은 방송국측의
시청자에 대한 서비스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 이성구 이사의 계산이었다.
나머지 50%는 어쩔수 없다.
대타를 내세우는 길밖에는.
그리고 그것은 시청자들도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문제는 온 생애를 걸어 이 작품에 몰두하고 있는 연출가 박영웅의 고집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지난 여름 즉 6.25발발 시점부터 시작되는 이 드라마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 그간 과로로 입원한 일도 있었고 때로는 산 속에서
야간 촬영을 강행하다 때마침 내린 비로 옷을 벗어 카메라를 덮는 바람에 감기까지
걸려 큰병으로 번질 뻔한 고비도 있었다, 이런 것들을 누구보다도 이성구 이사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이 전혀 타당성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스토리가 어떻고 감동이 어떠니 해도 주인공이 중간에 바꿔지면 드라마 자체의
긴박감이 여지없이 풀어져 버린다.
그리고 이왕에 대작을 기획하여 시청자의 성원에 보답하고 외국의 진출까지 모색할
바에야 제대로 만들자는 그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6.25는 어차피 전쟁이 빚은 비극이니 만큼 드라마 작가가 6.25시점부터 시작되는
장면을 6.28수복장면부터 새로 써서 촬영을 시작하면 작은 문제는 해결해 나갈수 있었다.
그러나 진행의 김호균의 말도 그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었다.
50%나 끝난 촬영을 다시 하는 것도 여러 가지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입장이 돼 버린 이성구 이사는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문호가 S-TV에 도착한 시간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아무리 제작이 중요하고 사업이
바빠도 전속 톱 탤런트가 피살당하고 그래서 경찰측에서 수사를 위해 출동했다는데
우물쭈물하고 있을수는 없었다. 반갑지는 않은 손님이지만 어쩔 수 없이 회의를 중단하고
밖에 마련된 응접실로 들어갔다.
"제작 담당 이성구라고 합니다."
명함을 내밀며 비서를 시켜 커피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몇 가지 알아야겠기에 들렀습니다."
"원 별 말씀을, 잘 오셨습니다."
말은 친절하였지만 그의 태도는 귀찮아 하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공연히 시계를 들여다보고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방문자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쯤에 동요될 문호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런 면에서는 이 이사보다는 문호가 훨씬 고단이었다.
더구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냥 두지 않는게 문호의 성미였다.
"이 이사님 큰일났군요."
"네? 네, 정말 큰일입니다."
"이사님,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마흔 아홉입니다."
"정말 큰일이십니다."
"뭐가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그 나이에 벌써 신경통으로 그렇게 좌불안석이니 큰일 아닙니까?
무슨 약을 쓰시던지... 온천도 좋다던데."
문호의 빈정거리는 말뜻을 못 알아들을 이 이사가 아니었다.
슬그머니 의자에 앉더니 비로소 말을 건냈다.
이 때를 놓칠새라 문호는 본론을 꺼내 질문을 시작했다.
"협조 좀 부탁합니다."
"뭐든 말씀하시죠. 사실 오늘 경찰측 연락을 받고 지금까지 쭉 대책회의를 열고 있었습니다.
아직 점심 식사도 못했으니까요."
"그럼 아직 병원엔 못 가보신 셈이시군요."
이 소리가 그의 아픈 곳을 찔렀는지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까 직원들 시켜서 조화만 보냈습니다. 시간을 내서 가봐야 할텐데."
말끝을 맺지 못하고 손톱으로 책상만 두드리고 있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책임자가 영안실도 둘러보지 않고 종일 사무실에만 있었다는 것은
고강진이가 사람이 아니라 철저한 상품 가치밖에 없었다는 것을 웅변해 주고 있었다.
아까 방송국에 오려고 광화문에 서있다가 되돌아간 것도 병원에 먼저 가보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병원에는 팬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가족도 있었으나 정작
방송국측의 상부에서는 어느 누구의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문호가 병원에 먼저 들른 것은 방송국 사람들이 병원에 먼저 와 있을것이라는 추측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병원엔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이사님, 저는 협조를 좀 얻자는 것뿐입니다. 절대 귀찮게 안해 드릴 겁니다.
요는 범인이 누구냐, 왜 죽였느냐 하는 방증 수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온 겁니다.
특별히 오늘 제가 찾아온 목적은 평소 고강진의 태도나 그 주변 사람,
또 사건 당일 고강진의 행적을 추적 해 보려고 하는 거죠.
다시 말해서 고강진의 주변 인물, 그리고 당일의 발자국을 쫓아보자는 것뿐입니다.
이 상황에서 가족에게 꼬치꼬치 물어보기도 어렵고 또 가족들보다는 아무래도
방송국측에서 더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은 내일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도와 드릴까요?"
조금 전보다는 훨씬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문호는 이 이사를 바라보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고강진의 요 며칠 행적입니다.
가까운 탤런트나 그간 쭉 같이 행동해 온 다른 동료들을 소개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방송국 안에서의 그의 평판이나 태도도 알고 싶구요."
이 이사는 탤런트실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찾아 올려보내라고 지시했다.
잠시후 젊고 발랄하게 생긴 아가씨가 하나 올라 왔다.
"이분, 지대로 탤런트 실장한테 모시고 가. 내가 전화해 놓을게."
이 이사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협조를 아끼지 말라는 지시까지 해놓고는 일어서서
응접실을 나왔다.
문호는 아가씨가 안내하는 대로 뒤를 따라 한참이나 걸어서 어느 커다란 홀로
들어섰다. 홀에는 벽에 거울이 일렬로 쫙 부착되어 있었고 거울 밑으로는 책상을
연결해 놓은 듯 화장대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울긋불긋한 옷들이 함부로 널려 있었고
열려져 있는 캐비닛 속에는 흔히 볼 수 없는 옷들이 꽉꽉 들어 차 있었다.
낯익은 탤런트들과 가수들이 바쁘게 왔다갔다 하며 일들을 하고 있었다.
한 구석에서는 고강진 피살 사건을 얘기하고 있는지 심각한 얼굴로 수군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그 커다란 홀을 지나 작은 방으로 다시 안내되었다.
입구에는 '실장'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대본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책상 안쪽으로 50대의 낯익은 탤런트가 앉아 있다가 일어서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지대로라고 합니다."
그는 손을 내밀며 먼저 악수를 청했다. 이 이사와 이미 연락이 닿았던 것같이 보였다.
"아, 네. 화면에서 여러번 뵈온 것 같습니다. 특별 수사반 박문홉니다."
지대로라는 탤런트는 이 곳 S-TV의 탤런트 실장을 맡고 있었다.
탤런트를 대표해서 회사측과 업무 협의도 하고 일정이나 기획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연극계에서 오랫동안 종사하다가 탤런트로 전향해서 중후한 연기로 팬을
사로잡는 중년 남자였다.
고강진이 데뷔할 무렵 많은 후원을 해주었던 장본인이라고 설명했다.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겨서 그저 어리벙벙할 뿐입니다.
참 아까운 친구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저희들은 상상도 못하겠어요.
아, 어저께까지만 해도 바로 여기서 허허거리며 같이 웃고 떠들고 했는데 말이죠.
참 세상사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들은 만나 보셨나요?"
"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병원부터 다녀왔죠.
가족이라야 자기 홀어머니하고 이모뿐이니까요. 좀 외로운 애죠."
지대로 실장은 창가에 투사된 건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았다.
고강진이 죽은 후 그의 가족들 외에는 처음 보는 눈물이었다.
문호도 마음이 숙연해졌다.
세상에서는 그의 죽음을 다만 흥미거리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반하여 오십이 넘은
이 노탤럴트는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잠시후 문호가 질문을 시작했다.
"그의 환경은 어떻습니까?"
"환경요?"
고강진, 그는 아버지가 없었다. 아니 없는 게 아니고 누구인지를 몰랐다.
어머니가 젊은 시절 화류계에 몸담고 있었다는 말은 있었지만 자신이 태어난 동기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가 탤런트로서 명성을 날리고 젊은이들간에 우상으로 받들어지는 인기를 누리게
되자 주간지에서는 이따금 그의 아버지가, 유명한 정객이었느니 실업인이었느니
떠들어대긴 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아버지의 실체가 누구였건 피를 나누어 준 사람을 닮아 무척
귀족적이고 이성적인용모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확실했고 그가 태어나기 직전이나
직후에 아버지는 둘을 버렸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짓궂은 기자들이 고강진의 어머니를 찾아가 끈질기게 물어봤지만 끝내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의 성격은 내성적이긴 하지만 또 거친 면도 있었다.
모친에게는 극진히 대하는 효성도 있었다. 그가 H대학 연극 영화과에 다닐 때 그의
교수로부터 지대로 실장에게 추천서가 날아 들어왔다.
얼굴과 재질을 검토한 지 실장이 적극 후원하여 데뷔하자마자 주연급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의 첫 작품은 장년의 히트작 '10대의 반항'을 리바이벌한 사회물이었다.
그의 반항적 성격이나 오만한 성품이 아주 확실하게 일치되어 작품이 공전의
대히트를 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김석오라는 사내는 고강진이라는 탤런트로서
새출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탤런트들 사이에서는 그리 원만하지가 못했다.
원래 성격이 타협적이질 못하고 나이도 아직 어린데다가 인기가 온통 햇병아리
신인에게만 쏠리니 다른 탤런트들이 고분고분 대해 주지도 않았다.
이러한 다른 탤런트들의 태도를 가지고 그 자신도 불만을 터뜨려 비교적 주위 동료들과
썩 어울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의 감점은 직업관이 투철한 연예인으로 철저한 프로근성이
있어 지금까지 촬영 시간이나 모임에 단 한번도 늦거나 펑크를 내본 경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지대로 실장의 말을 빌리면 아주 깐깐한 청년임을 알수 있었다.
아무리 자기보다 선배라고 해도 자기 성격에 안 맞으면 곧바로 들이대고 언쟁을
벌렸고 자기 상대역이 마음에 안 맞으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배역을 바꾸어야만
직성이 풀려 작품에 임한다고 했다.
그대신 일단 작품이 시작되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촬영에 임했고 밤을 세워서라도
대본을 외우며 절대 실수하는 법이 없다고 했다.
영화가 아닌 TV에서는 가장 힘든 점이 대본 암기였다.
영화는 촬영 후 녹음을 따로 하는 구태의연한 더빙 방법을 쓰고 있지만 TV는 직접
대사를 암기해야 했다.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고강진의 인적 사항이 도착되었다.
실장은 자기가 먼저 훑어본 후 문호에게 넘겨 주었다.
문호는 습관처럼 수첩을 꺼내 기록하기 시작했다.
본적: 서울 성북구 미아동 87번지
주소: 서울 강남구 반포동 7번지 5의3
성명: 고강진(본명: 김석오)
생년월일: 1959년 10월 14일 생
학력: H대학 연극 영화과 졸업
작품: 데뷔작 '십대의 반항'
주요작 : '사랑의 계절' '행복의 길'
진행 작품 : '흥남 철수 작전' '꿈길' '쇼는 즐거워(사회)'
대략 메모를 마치고 수첩을 집어넣으려는데 밖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지 실장 책상에도 요란스러운 벨소리가 울려 왔다.
"저, 잠깐만 앉아 계십시오.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인데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바쁘실 텐데... 저도 일어나..."
"아, 아닙니다. 잠깐만 앉아 계십시오."
일어나려는 문호를 억지로 되앉혀 놓은 지 실장은 문호에게깍듯이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문호는 그를 기다리는 동안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살인이라고 하는 엄청난 사건을 저지를 때는 그만한 대가를 받는다.
우발적이거나 충동적인 살인이 아니라 주도 면밀한 계획된 살인에는 그에 대응하는
대가나 충분한 사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강진을 살해한 범인이나 그 배후자는 그에게서 어떤 대가를 얻으려 했을까.
문호는 지금까지의 지 실장 말을 토대로 수사 방향을 설정하고 있었다.
만일 고강진이 자기의 친아버지를 최근 찾았거나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이것을 안 아버지가 자기의 신분이나 위치에 흔들림이 온다든가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될 경우 아무도 모르게 없애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첫째, 고강진의 생부는 누구일까? 이것이 수사방향의 방침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둘째, 고강진의 죽음으로 드라마의 주인공 역할과 톱 스타가 공석이 된다.
그의 뒤를 이을 강력한 후보자는 누구일까?
셋째, 고강진의 여성 관계는 어떨까? 밝혀지지 않은 스캔들은 없을까?
만일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중 단 한 가지라도 강력한 사유로 떠오르는 게 있으면
집중 수사를 하기로 다짐하며 메모지에 지금 생각을 옮기고 있었다. 이 때 밖으로
나갔던 지 실장이 되돌아왔다. 얼굴이 창백해 있었다.
"박 선생님 또 사고가 터졌습니다."
"네 ?"
깜짝 놀란 문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슨 사곱니까? 누가 또 당했습니까?
"저희들이 지난 가을 프로 개편 때 '쇼는 즐거워'라는 프로를 신설했습니다.
이 쇼에...아, 자 앉으시죠. 이게 보통 심각한게 아닙니다."
지 실장은 문호를 다시 소파에 앉히고는 담배를 꺼내 문호에게 한대 권하고는
힘없이 빨아들였다. 문호는 잠시 그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희들이 '쇼는 즐거워' 프로를 신설하면서 사회자로 고강진과 전속 여성 개그맨
이화영을 지명했습니다. 이 프로는 일주일에 한번 공개 방송으로 나가는데 그저께
리허설을 했습니다. 오늘이 바로 공개 방송 시간인데 고강진 대신 다른 배우를 내세워
땜질을 했는데 이번에는 이화영이 나타나질 않는 겁니다. 벌써 한시간이나 지났는데두요.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 담당 프로듀서한테 전화가 왔답니다.
아주 다급한 목소리로요.
어딘지는 모르지만 납치되어 있는데 아주 무서워 죽겠다고 합니다.
전화도 다 못 맺고 끊어졌답니다."
고강진의 얘기가 끝나면 다음 진남포에 대해서 알아보려던 문호는 또 다른 사건이
터지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불과 이틀 사이에 S-TV에서 세 개의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저께 리허설했거든요. 촬영 전에 한번씩 하는 총연습 말입니다.
그때만 해도 아무일 없었답니다, 고강진이두 이화영두 아주 밝았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무슨 일인가로 둘이 무척 심하게 다투었다는군요.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어제 리허설하던 사람들을 만나볼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촬영 때문에 전부 모여 있으니까요.
또 방송도 어차피 누군가를 대타로 내세워야 하니까 시간이 좀 있어요.
만나시겠다면 제가 안내하죠. 혹 참고가 되실는지도 모르니까요."
문호와 지실장은 스튜디오로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문호는 생소한 방송국 환경을 흥미 있게 관찰했다.
영화에서나 TV에서만 보던 유명한 배우나 가수, 코미디언들을 볼 수가 있었고 또
이들의 화려한 의상에 놀라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 비해서 지대로 실장이라는 사람은 너무나 검소했다.
뿐만 아니라 무척 섬세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어딘지 모르게 품위가 있어 보였고 신뢰감까지 들었다.
흔히 생각하는 연예인들의 이미지와 막상 만나본 연예인들의 성품은 너무도 차이가 많았다.
오히려 더 인간답고 순수하며 따뜻한 성품까지 느낄수 있었다.
어느 사회에서나 갈등도 있고 사고도 생긴다.
그런데 유독 연예계의 사고는 사람들이 비상한 관심으로 지켜보며 작은 흠집까지
확대해서 힐난하려 든다. 물론 유명세와 인기세가 따라붙는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같은 인간이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보다 더 감싸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녹화실 스튜디오에는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화려한 의상을 입은 가수와
개그맨들이 여기저기 앉아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송국 사정으로 공개 방송이 취소되었다는 벽보를 만들고 있었다.
모두들 긴장된 얼굴들이었다.
프로듀서와 카메라맨 그리고 조명기사, 연예인들이 웅성거리고 모여 앉아 수군거리고
있었다.
무대 장치 담당인 듯한 사람이 페인트가 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왔다갔다 하기도 했다.
지 실장은 이들을 한곳으로 불러모았다. 이들이 방청석 의자에 듬성듬성 앉자
문호를 소개시켜 주었다.
지 실장은 이번 연이어 발생 된 사건 해결에 참고가 되도록 협조해 달라고 부탁하고
그들 옆에 앉았다. 문호가 절을 꾸벅 하고는 말을 꺼냈다.
"사건 해결은 반드시 커다란 단서에 의해서만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지극히 사소한 일, 평소에는 그냥 지나쳐도 그만인 그런 일들이 사건 해결에 큰
도움을 줍니다. 여러분들도 이미 아시다시피 어젯밤 고강진 씨가 피살된 채 열차
속에서 발견되었고 또 진남포 씨가 피습당해 입원중이고 오늘은 이화영씨가 누구에겐가
납치당해 이 자리에 못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꺼번에 사건이 터진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그저께 여러분들은 진남포를 제외한 두 사람과 같이 리허설에 참여했습니다.
사소하고 적은 것 같은 일들이라도 기억나는 대로 더듬어서 엊그제 일들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문호가 말을 하고 있는 동안 이들은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있었다.
얼굴에는 불안한 그림자가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한 젊은 개그맨이 주섬주섬 일어나 문호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고 문호는 수첩과
볼펜을 꺼내 메모를 시작했다.
"저... 사실 엊그제 리허설할 때만 해도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이번 프로가 특히 젊은 시청자들에게서 좋은 반응이 있었고 고강진씨나 이화영씨도
호흡이 잘 맞아 출연자들도 기분이 썩 좋은 상태였습니다.
연습이 다 끝날 때까지는 별일이 없었는데... 아마 연습이 끝날 무렵이던가,
막 돌아서려고 하는데 고강진씨가 이화영씨를 부르더니 '바쁘더라도 나 좀 보고 가'하며
안색을 바꾸더니, 요 뒤에 있는 의상실로 데리고 갔어요. 잠시 후 억양이 높아지고
싸우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죠."
그가 말을 마치자 비로소 여기저기서 질서 없이 한 마디씩 거들어댔다.
문호는 이들을 진정시키고 한 사람씩 차근차근 이야기하도록 부탁했다.
"싸우는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혹 기억에 남으십니까?"
"제가 똑바로 들었어요."
요란한 의상을 하고 눈에 짙은 눈썹을 붙인 아가씨가 일어났다.
"무슨 내용으로 싸우는 것 같았습니까?"
"있잖아요. 음... 제가 두 분이 싸우는 소리가 나서 깜짝 놀라 문앞으로 다가갔어요.
목소리가 아주 분명하게 들렸어요.
고강진씨가 매우 고조된 억양으로 '뭐 어째? 내가 언제 너보고 나이트 가자고
졸랐어'하니까 화영이 언니가 '별꼴이네 내가 언제 고강진씨 보고 나이트 가자
그랬어요. 참 웃겨, 누가 그래요. 대요. 대'하고 발악하듯 악쓰는 소리가 났어요.
그러니까 고강진씨가 '다 듣고 온 사람이 있어. 네가 다니면서 그랬다는데 뭘 그래.
고강진이가 날 유혹해서 나이트하러 호텔 가자고 그랬다고 말야.
내가 언제 널 유혹했어. 없는 말을 왜 하고 다녀'하며 소리 지르고 의상 내던지는
소리가 우당탕퉁탕하고 났고 이화영 언니는 울고불고 아주 난리가 났었어요."
"저도 그건 들었어요."
"저 두요."
모두들 머리를 끄덕이며 한 마디씩 했다.
"그 때가 몇 시나 되었습니까?"
"한 4시 30분쯤 되었을 겁니다."
그들의 말을 종합해서 정리해 보면 이화영이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고강진이 자기를
유혹하려 했다고 떠들며 다녔고, 이 말을 들은 고강진이 흥분해서 이화영에게 따진
것이고 이화영은 죽어도 자기는 그런 말 한 일이 없다고 우겨대는 것이었다.
이 정도야 연예인들간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 문제는 현재 그 두 사람 모두 신상에
이상이 있다는 점이었다. 문호의 고민은 바로 그 점에 있었다. 이화영이란 아가씨는
지금 어디에, 왜 누구에게 납치되어 있으며 그들은 왜 납치를 했을까.
생각에 잠기던 문호가 지 실장에게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네, 그 문제는 자세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는데요.
박 형사님. 마침 그분이 지금 이성구 제작 이사실에 있습니다.
아침부터 대책 회의를 하고 있거든요."
지 실장은 문호를 앞세우고 이성구 이사실로 올라갔다.
수사 방향은 다갈래로 검토되어야 했다. '흥남 철수 작전'의 작가 조성래 씨를
만나고 나서야 문호는 이 사건들이 결코 단순하지가 않음을 알았다.
요는 어느 맥을 짚어야 이번 사건 해결의 지름길이 되느냐 하는 게 문제였다.
문호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간의 수사 생활을 해오면서 이렇게 방향을 잡을 수 없는 사건이 터진 일도 별로 없었다.
수사를 하다 보면 함정에 빠지는 일이 있기는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난 가을 끝이 났던 소위 토곡리 밀실 살인 사건 '덧'의 수사 때가 그랬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용의 선상에 오른 사람은 한정이 되어 있었다.
불과 세 명의 용의자를 놓고 범인의 함정에 빠져 무려 두 달이나 걸려 사건을 매듭지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그 양상이 또 달랐다.
수사 방향을 어지럽히는 복잡하고 애매한 사건들이 너무 많이 얽혀 있었다.
방송국을 나온 문호는 본부로 돌아오지 않고 막바로 정릉으로방향을 틀었다.
다만 한두 시간이라도 조용히 생각하며 머리를 정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들이 땅바닥을 훑으며 이리저리 구르고 있었다.
목덜미에 싸한 바람이 파고들었다. 주중이라 그런지 등산객도 별로 눈에 뜨이지 않았다.
산길을 천천히 오르며 사건의 방향을 하나하나 생각하고 있었다.
첫째, 고강진외 개인적인 사생활. 즉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그의 생부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좀더 자세히 알아봐야 하겠지만 자기와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를 찾아 위협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고강진의 아버지가 의외로 정계나 기타 분야에서 거물로 통하는 인사는 아닐까.
이러한 자기 아버지에게 복수하려고 한 일은 없을까. 따라서 뒤늦게 연예인이
되어 찾아온 아들이란 자가 자기의 명성이나 명예에 위협을 주자 누군가를 시켜
없애 버리려고 획책하여 생긴 사고는 아닐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아버지 수하 중 누군가 과잉 충성을 하기 위해 저지른
사고는 아닐까. 이 점이 첫째가는 관심거리였다.
그렇다면 고강진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문호도 첫번째 수사 대상으로 고강진의 친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두 번째, '흥남 철수 작전'의 작가 조성래의 말을 토대로 한다면 이 드라마를
위해 R-TV에서도 혼신의 노력을 다한 것이 밝혀졌다.
조성래가 이 작품을 들고 처음 찾아간 곳은 S-TV가 아니라 R-TV였다.
S-TV와는 경쟁 상대로 되어 있는 R-TV에서는 이 작품을 검토하고 내용은
좋으나 대중성이 부족하니 일부 개작해서 시작하자고 누누이 교섭을 벌여온 터였다.
그러나 개작 생각이 추호도 없는 조성래는 원고 뭉치를 싸들고 그대로 S-TV에
넘겼던 것이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R-TV에서는 조성래를 위협하기도 하고
급기야는 S - TV를 맹렬히 비난하기까지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작품을 그냥 촬영하게 놔두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이나 주요 배역을 없애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더욱 배우들의 스카웃 문제로 상호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게 지금의 실정이었다.
R-TV에서는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고강진을 유인하려던 사실도 밝혀졌다.
실패로 돌아간 R-TV측으로서는 고강진에 대한 원한이 사무친 것도 사실이었다.
두 TV간의 갈등이 이번 사건을 일으킨 기폭제가 되었다고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 번째,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치정으로 얽힌 여성 관계였다.
치정 사건의 가장 손쉬운 복수 방법은 살인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만큼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남다른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그는 여성을 함부로 사귀지도 않았을 뿐아니라
치정 복수의 살인은 대개 우발적이거나 거칠어서 미궁으로까지 몰아갈 힘이 없기
때문이다. 여하튼 03-03의 사내나 혹은 그 배후 인물이 열차표를 사전에 예매한
것이 드러났고, 열차 내에서 범인이 연기처럼 증발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사건은
치밀한 계산과 계획, 사전 탐사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분명해졌다.
가장 확실한 것은 지금 고강진이 피살되어 죽어 있는 것이고 가장 불투명한 것은
범인의 정체와 동기였다. 더욱 문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진남포의 피습과
이화영의 납치 사건이었다. 과연 이 세 개의 사건은 서로 연관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발적인 개체의 사건일까,
그리고 고강진과 이화영이 다툰 내용 즉 고강진이이화영을 유혹했다는 말은
이화영이 조작한 스캔들일까, 아니면 실제 고강진 자신이 유혹을 시도했던 것일까.
그 문제도 아주 애매했다. 확실히 증언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모두 사고에 휘말렸기
때문이었다. 벌써 5시가 다 되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호의 머리는 정리가 되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와 본부로 돌아왔다.
"어딜 다녀 오셨어요. 무척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방송국에 전활 걸었더니 거기서도 나가신 지 오래라구요. 다녀온거 보고 드리겠습니다."
공범자로 지목되는 노인의 집을 방문해서 신원 조사를 하고 돌아 온 부하 형사가
들어오자마자 서두르고 있었다. 문호가 보고문을 받아 막 들여다보려고 할 때
구내 전화가 따르릉하고 울려 왔다.
"아, 네 네 감사합니다. 지금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바로 이 앞에 아람 다방이라고 있습니다. 거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계십시오.
지금 막바로 나가겠습니다."
문호는 보고문을 결재판에 도로 꽃아 놓고 부하 형사에게 멀리 가지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지시하고는 황급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다방에서 아까 방송국에서 만난 일이 있는 신인 여가수가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조금 전 방송국에서 일을 마치고 나올 때 뒤따라오며 '이따가 찾아뵙고 싶은데
어떻게 만날 수 있나요'하며 '귓속말로 건네 주던 사람이었다. 무엇인가 은밀히
나누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았다.
여가수는 흔히 볼 수 있는 청바지에 값싼 잠바를 걸치고 있었다.
얼굴 화장도 하지않고 말씨도 매우 분별 있어 보이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바쁘실 텐데 일부러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호는 되도록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얼굴에 함박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TV에서보다 훨씬 더 미인이시군요. 발랄해 보이시구요."
하며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늘어놓자 여가수의 얼굴에는 금방 화기가 돌았다.
"어머 고마워요. 워낙 신인이라 잘 모르실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TV에서 절 보셨나 봐요."
"웬걸요. 저도 팬 자격이 있는 겁니까? 이거 영광인데요."
'어머 어머'하고 가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정말 신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가씨였다.
"그건 그렇고, 무슨 긴한 말씀이라도."
적당한 때를 맞추어 문호가 용건을 물었다.
"있잖아요, 선생님. 제가 알고 있는 게 몇 가지 있는데 혹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해서
찾아왔어요. 사실 강진이 오빠가 왜 죽었는지는 저도 잘 몰라요.
그런데 어저께 강진이 오빠하구 화영이 언니하고 대판 싸웠잖아요.
서로 유혹하려 했느니 언제 그랬냐느니 하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사실 그 말을 한 사람은 화영이 언니도 아니구 강진이 오빠두 아녔어요.
전 그날 강진이 오빠하구 쭉 같이 있었는데..."
"그럼 아가씨는 고강진씨 하구 어떤..."
"아이 그런게 아니구요. 강진이 오빠가 유독 저한테 잘해 주셨고 또 저도 잘 따랐어요.
그래서 그냥 부르기 좋게 오빠 오빠 하는 거죠, 뭐."
잠깐 말을 쉬던 아가씨가 테이블 위에 있는 담배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문호는 그가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고한 대 권했지만 담배는 못 피운다고 했다.
"아녜요. 담배가 피우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구요, 강진이 오빠가 생각나서 그래요.
엊그제 리허설을 시작하려고 막 준비하고 있는데 어디선지 전화가 왔어요.
고강진을 찾는다고 해서 강진이 오빠가 그쪽으로 갔어요.
구내 전화였죠. 저도 무심결에 슬슬 뒤따라갔어요.
그런데 전화를 받더니 조금 후에 '뭐 어째, 누구? 이화영이가요.
실례지만... 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더니 수화기를 탁 내려놓고 돌아서려다가
내가 있으니까 나보고 '이화영이 어디 있지'하기에 '무슨 전화예요'하니까 '아,
나참 기가 막혀 이화영이 쓸데없는 나발을 불고 다니고 있대' 하기에 내가 '아니 왜 그래요?
무슨 전화예요?' 하니까 그 말을 하더라구요.
'글쎄 내가 이화영일 유혹해서 호텔에 데려가려구 해서 자기가 아주 애를 먹었다고
떠들고 다닌다'는 거예요. 저도 그말 듣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어요.
강진이 오빠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건 제가 잘알고 있거든요.
오빠말이에요, 어떻게 보면 아주 냉정하고 쌀쌀한 사람이에요. 허튼짓 한 번 없고,
거기다가 또 결벽증까지 있어요.
아주 대단해요. 같이 촬영하는 다른 남자 탤런트요, 옷에 비듬만 조금 묻어도 공연 중지예요.
성격도 그런데 그런 말을 들었으니 어떻겠어요. 한꺼번에 담배를 두 대나 피우고는
리허설에 들어갔죠. 그래서 제가 틈을 내어 화영이 언니한테 슬쩍 물었거든요.
아니래요. 자기가 왜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느냐고요. 있지도 않은 일이라는 거예요.
그렇지만 누가 알아요. 자기가 유명해지려구 오빠를 이용하는 건지.
지금 납치되어 있다는 것두 순 구라예요. 좀 엉뚱한 데가 있는 사람이거든요.
저 보고요 자기가 K대학 국문과 출신이라고 하잖아요. 알고 보니까 2년 예술 전문 학교
출신이에요. 그런 앙큼한 사람이니까 지금도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게 뭐예요.
얼굴 좀 예쁘고 말 좀 잘하는 거 가지고 출세하려는 사람이에요."
"그래, 그 다음엔 어떻게 됐죠?"
"그 다음은 아시다시피 리허설 끝나고 싸웠잖아요. 사실 이 내용 때문에 찾아온 거예요."
말을 잠깐 마친 여가수는 엽차를 홀짝 마시고는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처음에는 싸움이 그렇게 격렬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싸움이 보통 커진 게 아녔어요.
의상실이 떠나가도록 아주 격렬하게 싸웠어요. 저는 걱정이 돼서 끝까지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싸우면서 이런 말 하는 걸 들었거든요.
'이 자식아, 난 사람 없는 줄 알아. 너 같은 새끼 죽여 버릴 테야.
인기 좀 있다고 까불지마'하니까 강진이 오빠가 '야 너 같은 년한테 죽을 놈 어딨어'하며
뺨 갈기는 소리가 났어요. '너 같은 게 인기 좀 얻으려고 날 팔아?'하고 말이에요.
울고불고 하던 화영 언니가 어디 두고 봐. 너를 살려 두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고
펄펄 뛰기에 참다 못해 뛰어들어가 '참으세요. 천천히 생각하고 진정해요'하니까 강진이
오빠가 '에이 더러워, 나 오늘 집으로 안 가고 별장으로 갈테니 이따 밤에 전화해'하고
밖으로 막 나가려는데 진남포 씨가 어디서 말을 듣고 왔는지 눈이 휘둥그래져 와서는
강진이 오빠보고 마음 가라앉히라고 누누이 당부했어요.
화영 언니도 그냥 안 두겠다며 악을 쓰고 나가 싸움은 끝이 났는데 하필 그날 저녁
피살당할게 뭐예요. 화영 언니도 사라지고... 아무래도 이상한 예감이 들어 찾아온 거예요."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별장이란 곳은 어디 있습니까?"
"별장이래야 뭐 대단한 것은 아녜요. 연습실도 겸해서 쓰고 있는 곳인데 아주
조그마하고 아담한 집이에요. 오빠가 대본 연습도 하고 연기 연습도 하는 곳인데
저도 한번 가본 일은 있죠. 그 날 저녁 저보고 전화하라고 해서 전화 걸었더니
안 받아요. 그래서 다른 데로 갔나부다 했지, 누가..."
"그 별장은 어딨죠?"
"저 구의동 아시죠. 워커힐 입구 말이에요.
그 정문에서 약 500m쯤 산으로 들어가면 구의동하고 워커힐 정문하고 중간쯤 되는
곳에 있어요. 그 근처에 별장 같은 게 두어 개 있는데 제일 작고 또 벽이 전부
갈색이라 눈에 쉽게 뜨이는 집이에요."
"그 별장을 아는 사람은 누구 누굽니까?"
여가수는 한참 앉아 생각에 잠기더니
"그거 산 게 지난 봄이니까 봬 많이들 알고 있을 거예요. 그래도 사람들 잘 데려가진 않았어요."
"그 날 고강진 씨가 별장에 간다는 걸 아는 사람은 이화영씨 그리고 아가씨뿐이겠네요?"
하니까 가수가 깜짝 놀라며 얼굴이 굳어졌다.
"어마 선생님 절 오해하세요?"
"원 별 말씀을 제가 왜 아가씰 의심합니까?
의심받을 만한 사람이 여기까지 와서 이런 정보를 제공하겠습니까?
두 사람 중 의심받지 않을 사람이 한 사람이면 의심받을 사람은 나머지 한
사람 아니겠어요. 기분 나빠 하실 필요 없습니다."
부드럽게 웃으며 달래주자 비로소 빙긋이 웃으며 얼굴이 풀어졌다.
"미안해요. 선생님."
사건은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어떤 경우보다도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인 가능성을 토대로 새롭게 수사를
시작해야 했다. 애꾸의 바로 앞석에 있던 '사라진 노인'은 그의 기록대로 현주소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는 전직 대학교수로 이공학 박사로서 지금은 연구와 강연으로
남은 생애를 보내고 있는 사람이었다.
성기준 씨의 신분은 확연히 드러난 셈이 된 것이다.
이화영과 고강진의 싸움. 그리고 성기준 씨의 신원이 밝혀진 것이 오늘의 수확이었다.
문제는 성기준 씨가 이 살인 사건에 가담을 했느냐 아니냐가 중대한 관심사로
남게 된 것이다.
만일 이화영이 어떤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누굴 사주하여 저지른 범죄라면
성기준 씨의 개입 가능성은 전혀 희박해진다.
그만한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가진 학자가 나이 어린 여가수의 사주를 받을 이치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기준 씨가 이 사건에 가담하지 않았다면(물론 그가 귀경하면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이화영의 개입 가능성이 짙어진다.
그러나 문제는 성기준 씨가 개입하지 않았다고 추측 할 때 범인이 열차 내에서 사라진
방법이 미궁에 빠져 버리고 만다.
어떤 경우이든 노인, 즉 성기준 씨의 도움 없이는 애꾸는 절대 열차 속에서 사라질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화영과 성기준의 연결 가능 방법,
그것은 성기준 씨가 이화명의 사주를 받고 가담했을 경우인데...
이런 가능성은 정말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도 더 실현 가능성이 없는
상황이었다.
문호의 머리는 몽롱하게 되어 버렸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만 혼란이 오고야 말았다 예리하고 노련하며
논리에뛰어나다는 박문호. 지난번 소위 '덫' 사건 때도 한 번도 이런 혼란에 빠진 일이
없는 문호가 이번 사건에는 그만 넋을 잃고야 말았다.
어쨌든 이화영이 '고강진을 죽여 버리겠다'고 공언하고 떠나던 날 밤, 고강진은
경부선 특급 열차 속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이화영은 출연도 하지 않고 어딘가에
납치되었다는 전화만 하고 끊어졌으니 이화영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진남포의 피습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일까.
진남포는 왜 누구에게 피습당한 것일까. 그를 담당한 최찬일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문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도무지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화영, 성기준 그리고 사라진 애꾸. 이 세 명이 설치해 놓은 퍼즐의 미로에서
헤매고 있는 기분이었다. 거기다가 이유를 알수 없는 진남포 피습 사건까지
가담하여 그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벌떡 일어난 문호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밤새워 대전을 왔다 갔다 한 피로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찔한 순간과 영감처럼 머리에 생각이 떠오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일어나 어디론가 가려던 문호는 다시 책상에 주저 물러앉았다.
나이 어린 가수의 살해 음모와 교수 출신의 노학자 성기준 씨가 살해에 가담했을 경우
이를 뒷받침 할 논리적 가능성을 생각해 낸 것이다.
좀 거북하고 뻑뻑한 추리이긴 했지만 그러나 결코 소홀히 할수 없는 아주 중요한 가능성이었다.
이화영과 성기준을 꿰어 맞출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
그것은 바로 R-TV의 개입 가능성을 전제로 사건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즉 고강진이 이화영을 유혹하려 했다는 터무니없는 루머를 퍼뜨려 두 사람이
싸우도록 유도한다. 그것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TV로서는 S-TV의 녹화나 공개
방송 시간을 충분히 알아낼수 있기 때문에 사전에 치밀히 계산한 계획적인 일로
볼 수 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명성과 인기를 위해 루머 저지와 오해의 갈등으로
격렬하게 싸운다. 그 다음 이화영을 납치한다.
그리고 그날 밤 고강진을 피살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범인을 탈출시킨다.
이 탈주를 위하여 방송국에서는 성기준을 동원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추리
속에 함정은 있었다. 그것은 R-TV와 성기준의 관계였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생각한 문호는 R-TV의 제작 담당 책임자인 조남웅을
기억에 떠올려 보았다.
가령 성기준 씨가 평소 조남웅의 신세를 단단히 지고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아주
가까운 친적이든가 선후배, 아니면 후견인으로 보살펴 주는 그런 인맥 관계를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 이런 가능성이 그리고 이런 추리가 적중하여 맞아 들어간다면 진남포
사건까지도 어느 정도 윤곽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즉 그 깊은 밤중에 R-TV정도라면 2류 탤런트쯤 어디로든 끌어내는 것은 손쉬운
일일 것이다. 가령 좋은 조건으로 스카웃하겠다든가 아니면 무슨 대책을 세워
활로를 뚫어 주겠다든가하는 미끼만 던져 놓으면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문호는 심사숙고하며 이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쳐 보고 있었다.
성기준 씨가 '공범자' 가능성을 받을 지도 모를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자기
신분을 거리낌 없이 노출시킨 점. 그리고도 새벽에 대전에서 증발한 점.
다음 이화영의 증발과 고강진의 다툼,
마지막으로 고강진이 피살되고 진남포가 피습된 점.
이런 것들을 하나의 줄로 일목 요연하게 꿰어 맞출 수 있는 길은 오직 R-TV의 조남웅이
개입했다는 가정 아래에서만 가능했다.
문호는 이제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애꾸의 행방을 찾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어두워지는 서울 거리에는 어둠과 불빛이 교차되며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는 택시를 잡으려고 뛰어다녔다. 고강진의 별장을 조사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보름 가까운 달이 주위를 조명하고 있어서 어둠 속에서도
주변을 식별하는 데는 그리 큰 어려움이 따르진 않았다. 저녁에 찾아온 여가수의
말대로 별장은 구의동 워커힐 입구에서 워커힐 정문 방향으로 5백여 미터 들어간 큰길 옆,
척추 장애자 자활원인 정립회관에서 다시 아차산 속으로 20m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큰 도로변에서 겨우 자동차 한 대 들어갈 만한 좁은 도로가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채
뚫려 있었고 그 끝에는 작기는 하지만 아름답게 생긴 별장 하나가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별장 15m 전방에서 차를 내린 문호는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며 올라갔다.
별장 근처에는 승용차가 있는 듯 어렴풋이 보여 왔다.
승용차를 멀리서 바라보던 문호가 깜짝 놀라 몸을 숨겼다.
승용차 뒤에서 어른거리는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한 것이다.
그림자는 승용차 뒤로 해서 건물 뒤편으로 사라졌다. 불이 하나도 켜져 있지 않은 건물을
배회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숲속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잔뜩 웅크린 채 숨어 있는 문호는
손바닥에 배어 오는 촉촉한 땀을 느끼고 있었다.
건물 뒤로 사라졌던 그림자가 다시 한 바퀴 돌아 반대 방향에서 나타나 건물 정문 앞으로
다가와 잔뜩 꾸부리고 앉아 땅바닥에서 무엇을 찾으려는지 더듬거리고 있다.
문호는 살금살금 다가갔으나 그림자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그대로 꾸부리고 앉아
무엇을 하고 있었다. 문호는 때를 놓치지 않고 다가가 힘껏 덮쳤다. 갑자기 습격을 당한
그림자는 몸을 빼돌리려고 발버둥쳤으나 유도와 격투술로 단련된 문호의 완력에
저항하기에는 너무도 역부족이었다.
잠깐 엎치락뒤치락하며 엉켜 붙었으나 문호의 주먹 한 방에 그림자는 넙죽이 엎어져 버렸다.
문호가 엎어진 그림자를 그대로 내려다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그림자가 엉금엉금
기어 옆의 나무를 의지하고 일어났다.
"누구야, 누구냔 말야."
일어나는 사내를 바라보던 문호는 그만 어이가 없었다.
문호는 놀란 채 그림자로 다가갔다, 그러나 정작 놀란 것은 문호가 아니고 그림자의
사내였다. 둘은 서로 얼굴을 들여다보다 말고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긴 네가 갑자기 등뒤에서 덮치는 바람에 여기서 인생 끝나나 부다 했지.
어이구 깜짝 놀랐네. 웬놈의 주먹이 그렇게 세. 봐가면서 쳐야지."
둘은 마른 풀밭에 앉았다.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는 멍청하게 부어 오른 턱을 만지며 앉아 있었다.
그림자는 다름아닌 Q신문사 민형규 기자였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문호가 형규의 턱을 미안한 듯 바라보며 물었다.
등에 흐르는 땀이 찬 바람으로 서늘해졌다. 형규가 일어나 문호를 끌고 자기가 몰고온
승용차 속으로 들어갔다. 히타를 켜고 둘은 잠시 앉아 쉬고 있었다.
"나 오늘 종일 취재 다녔어. 방송국에 가니까 박문호 형사가 다녀갔다 그러더군."
"그랬어? 그런데 여긴 왜 왔어?"
"여기?"
갑자기 한기가 오는지 몸을 부르르 떨던 형규가 손수건을 꺼내 등의 땀을 닦았다.
"여기가 고강진이 피살당한 장소 같아서 찾아왔어. 혹 무슨 단서라도 발견할까 하고."
"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형규나 문호가 방송국에서 얻은 자료에 의하면 고강진이 이화영과 싸우고 난 뒤
이 곳 별장으로 오겠다고 말을 했다. 그렇다면 방송국을 나온 고강진은 이곳으로
달려왔을 테고 누군가가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습격했다는 추측을 쉽게 할수 있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게 있어."
"이상해? 뭐가."
"문호 자네보다 난 한 시간 정도 먼저 왔어.
그런데 이 근처에 아무리 살펴봐도 격투를 했거나 사람을 죽였을 만한 장소는 못찾았어.
집안팎이 너무도 잘 정돈된 채로 있단 말야. 도대체 무슨 흔적이 없어."
"글세... 만약 범인이 고강진과 면식이 있는 범인이라면 집안에서 사고가 났겠지.
그런데 대문이 밖에서 잠겨 있다는 것은, 그리고 안팎이 잘 정돈 되어 있다는 것은
집 밖에서 범행했다는 증거란 말야. 이런 경우가 아닐까. 즉 범인이 이 숲속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고강진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길에서 습격해서 죽은 거 말야.
그 상황 같은데."
"글쎄, 그 생각도 해 보았는데, 그래도 무언가 싸웠다면 흔적이 있어야 할 텐데.
그걸 발견하지 못하겠어."
"가령 범인이 힘이 아주 강하다면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냐.
아까 내가 널 덮쳤을 때 죽일 마음만 먹었으면 간단히 끝났어. 목 졸라 버리면 말야.
고강진이 죽은 것도 그것으로 판단하고 있잖아."
"경찰 병원에서 검시 결과는 언제 나온대?"
"내일 오전 중에 나오나 봐."
"검시 결과를 기다려 보자구. 그 결과에 따라 추적하는게 정확할것 같아."
"이봐 형규. 검시 결과도 중요하지만 말야. 난 아무래도 머리가 정리되질 않아.
도대체 범인은 누구며, 열차에서 어디로 사라졌으며, 열차에서는 왜 애꾸다 아니다
하며 진술이 엇갈리는지. 거기다가 이화영이까지 누구에겐가 납치당했으니.
진남포 피습 사건만 해도 그렇고 정신을 못 차리겠어. 정신을."
"그래도 생각나는 게 있을 거 아냐."
"생각이야 많지. 난 이번 사건들이 절대 개체 사건이 아니다 하는 생각뿐이야.
고강진, 진남포, 애꾸, 사라진 노인. 즉 성기준, 이화영 이들이 모두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얽혀있으면서도 보이지는 않는 거야. 중요한건 이들을 하나로 일목
요연하게 꿰어 맞출수 있는 논리를 성립시켜야 하거든.
그 논리 성립이란 게 참 어렵단 말야. 내가 어떤 가정의 논리는 성립시켜 놓았어.
논리적으로는 이들이 한끈으로 꿰어져. 그런데 문제는 현실성 결여야.
현실성이 부족해. 그래서 고민중이라고."
"그래? 그거 아주 흥미 있는 얘긴데. 진남포, 고강진, 이화영, 노인이 모두 하나로
연결된다 이거지. 그것 좀 들어보자고."
"가만 있어. 그렇게 흥분할 만한 게 못 돼."
문호는 온몸에 피로가 엄습해 오는지 시트에 몸을 기대고 기지개를 켜며 온몸을 뒤틀어 댔다.
그도 그릴 것이 새벽부터 사건이 터져 서울에서 대전으로 다시 서울로, 방송국으로
한시도 쉴 새 없이 뛰어 다녔으니 아무리 강인한 체력이라 해도 한계를 느끼지 않을수
없기 때문이었다. 시트에 기대어 눈을 감은 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한 가능성은 딱 한 가지, 즉 R-TV의 개입이야.
거기 제작 담당 이사 조남웅이 고강진을 스카웃하려다 오히려 망신만 당한 얘기는
다 알려진 것이고 거기다가 손에 들어온 떡을 놓친 결과가 돼 버린 '흥남 철수 작전'
시나리오 사건하며, 더구나 그 주연에 고강진이 발탁됐다고 하니 그 사람 눈 뒤집히게도
됐거든. 방송국 측에서도 조남웅이 쓸데없는 고집 피우다가 죽 쑤었다고 상당히 불만을
품고 있나 봐. 그러니 그의 개입 가능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단 말야. 조남웅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화영과 고강진의 스캔들을 흘리는 것쯤 손쉬운 일이거든.
그러니까 두 사람이 같이 출연하는 프로에 시간을 맞춰서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가운데서
다투도록 유도할 수 있고, 그리고 다툰 다음날 누굴 시켜서 고강진을 살해하는 거야.
다음 이화영을 납치하는 거지. 혐의를 이화영에게 돌리도록.
그리고 제 2의 사건을 또 하나 터뜨리는 거야. 혼선을 빚도록 말야,
거기서 억울하게 당한 게 바로 진남포라 이거지. 소위 손자 병법에 나오는
허허실실전법을 사용한 거야. 그 다음 범인을 완전 범죄로 만들어 법망에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자기와 개인적 친분이 있는 성기준을 동원시킨 거지.
이렇게 되면 범인이 사라진 방법도 또 모든 사건을 하나로 꿰어 맞출 수 있는
논리가 완벽하게 성립되거든."
"거 기가 막히는 추린데.
그 노인이 공범자였다는 증거만 포착되면 사건은 일사천리로 풀려 나가겠는데..."
그러나 문호의 표정은 결코 밝지만은 않았다.
그 나름대로의 멋진 추리에도 한가닥 질긴 회의는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현실성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성이야.
TV방송국 제작 담당 이사 정도 되는 사람이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과연 살인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지. 물론 조남웅이 이 사건에 개입되어 있고 범인이
그 하수인이라는 게 나타나면 사건이야 쉽사리 끝나겠지만 가능성이 희박하단 말야.
그렇다고 그의 개입이 한낱 추측에 불과한 것이라면 사건 해결이 문제고."
형규는 잠자코 있었다. 예리하고 판단력이 강한 문호가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의
고충이 이해가 되었다. 물론 조남웅이 개입되었다면 일은 쉽게 풀려간다.
그러나 문호 자신의 판단대로 그만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지금까지
쌓아온 자신의 탑을 포기하고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이런 커다란 범죄를 감행할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형규 자신도 회의에 젖지 않을수가 없었다.
형규는 담배를 빼어 문호에게 넘겨 주었다.
"이봐 너무 성급하게만 생각하지 마. 아직 사건이 터진 지 하루도 못됐어.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붙어 봐. 또 무슨 구멍이 뚫리겠지. 기다려 보자구.
금년에 참 어려운 일만 생기는구먼. 하나 해결하면 또 하나 터지고..."
문호와 형규는 차 뒷좌석 시트에 기대어 담배만 혼자 다 타들어가도록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바람이 또 스산하게 불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