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1-10절.
여호수아와 갈렙의 하나님의 언약의 신뢰
불신이 가져온 결과는 무엇으로 드러났는가? 인간의 비이성적인 사고를
가져온다. 12명이 가져온 팩트는 동일했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그 땅의 과일은 그 땅이 얼마나 비옥한 땅인가를 증명했다(27절과 23절: 한 송이를
둘이 짊어지고 왔다). 이들의 팩트 속에서, 다수는 다른
한 가지에 초점을 둔다. 바로 백성의 강함과 요새화된 성벽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들이 점령하여 살 땅은 없다고 언급한다. 땅, 산, 바다가 모두가 이미 점령되었으니, 혹여 나 가나안 땅에 들어 간다
할 지라도, 현재로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28-29절). 여기에서 한 가지 그들의 비 이성적인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다. 13장
32절에서 백성들에게 언급한 이야기를 보면, 그들이 땅에
대하여 모세에게 보고한 내용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땅이 주민을 삼킨다”라는 일차적인 의미는 땅의 상태를 의미한다. 즉, 그것은 현재, 가나안 땅은, 비옥
하기 보다는, 가뭄, 기근,
그리고 해충들의 확산으로 백성들을 혹사 시키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그들이 모두 거인들이었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얼마나
비이성적인 사고인가? 죽음의 땅에서 그들이 두려워할 만큼의 건장한 체격을 소유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그러면, 10명이 전한 정보 속에서
그들이 잊은 것은 무엇인가? 즉 그들이 간직하지 못하여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한 것은 무엇인가? 13장 2절이 그 해답이 될 것이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가나안 땅”을
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약속한 언약의 말씀이었다. 이미 하나님은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 준 것이다. 만약 10명이 그 언약을 간직한 체 땅을 보았다면, 그 땅은 정복이 불가능한
실패의 땅이 아니라, 약속의 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의 눈으로 본 가나안의 사람들의 외적인 모습에서 그들은 이성조차도 빼앗기고 말았다(아낙의 자손인 네피림은 창세기 6장에서 죄의 근원이 되어 홍수 심판의
원인 제공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잊었기 때문에(“당신께서 우리를 보낸 땅”이 되었다, 13장 27절), 그들은
인간의 외형을 두려워한 것이다.
지도자의
불신에서 기인된 비이성적인 말은 백성들을 역시 비이성적인 상태로 이끈다. 그들은 애굽과 광야에서 죽는
것이 가나안에서 죽은 것보다 낫다고 한다. 즉, 지금 죽는
것이 후에 죽는 것 보다 낫다는 것이다. 또한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이 탈취물이 될 지 언정(새번역: “왜 우리의 아내들과 자녀들을 사로잡히게 하는가?”)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요구한다. 다시 말하면, 애굽으로 돌아가 차라리 아내와 자녀들이 노예로 사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들의
비이성적인 판단은 하나님의 모든 행동이 그들 앞에서는 단지 장애물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자, 그들은
분명히 가나안이 약속의 땅임을 명시하는 수식어를 사용한다. 14정 7절의, “그 땅은 매우 매우 좋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에서
사용된, “매우 보기에 좋다”는 표현을 상기 시킨다. 그들은 그곳이 약속의 땅으로 하나님은 그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들을 보냈고,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을 믿고, 들어가면, 하나님은 약속대로 그곳을 주실 것임을 확신한다. “(8절). 여호수아의 이름의 변화를 보면, 여호수아의 인격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원래 이름, הוֹשֵׁ֥עַ 에서 יְהוֹשֻֽׁעַ , 단지 철자 하나를 추가하여 이름을 호세아 에서 여호수아로 변경한다. “구원”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이 구원하신다”의 의미로 전환이다. 여호수아는 특별한 순간에 하나님의 구원의 존재를 믿고 있는 것이다. 갈렙 역시 24절에 보면, 그를 수식하는 표현은 “다른 영이 있어 온전히 나를 따랐다”고
언급한다. 이 둘의 공통점은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의 약속을 신뢰했다는 것이다. 그 약속의 신뢰가 그들을 두려움에서 자유케한 것이다. 그들은 가나안
백성들에게 그림자가 떠났다고 언급한다. 여기서 צִלָּ֧ם “그림자”는 그들의 보호막이 된, 신들의 은유적인 표현이다. 신들이 떠났다는 것은 동시에, 이 명사의 동사형인 “짤”,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상태의 가나안을 그들은 본 것이다.
언약의 신뢰에 따라 이스라엘의 승패가 달려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패하지 않는다. 단지 그 약속 앞에 서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만이 패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대로 이시다. 단지 인간만이 변하고 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고전, 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