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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7일 처음으로 일반인들에게 신당동 박정희 가옥을 개방한 후 다음날인 18일 해설을 저에게는 처음으로 하는 날이라서일찍 갔습니다. 그리고 긴장해서인지 목소리는 탁음으로 간간이 끊어지곤했습니다. 이곳을 아직 방문못하신 분들을 위해 그날 하려했던 시나리오를 이곳에 옮겨놓습니다.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을 위해 일부의 첨삭하였습니다.
2015년 3월 18일
안녕하세요? 저는 박정희 전대통령 가옥에서 해설을 맡고 있는 자원봉사자 양병택입니다. 하고 첫 멘트를했다. 신당동가옥을 3월 17일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18일 처음으로 이곳 방문객앞에 섰다. 호기심이 있어서 일가 아니면 전직 대통령과 현재의 대통령이 함께 살았던 집이라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쉴새없이 밀려온다.
아래와 같이 하려고 했지만 생각대로 잘 안되었고 외었던 시나리오를 잊어 허둥지둥하긴 했지만 안한 것처럼 하려니 진땀이 나기도 했다.
이 가옥은 2008년 10월 10일 등록문화재 제412호로문화재청장이 등록한,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을 지내신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가족이 살았던 집입니다. 이 가옥은 재단법인 육영수여사 기념사업회에서 소유하며 서울시에 관리 및 시민개방을 위임하고 있습니다.
이 가옥에서 설정하고 있는 주된 전시 대상 시기는 당시 박정희 소장 가족이 살았던 시기인 1958년~1961년으로 한정하고 있으며, 전시물들은 1961년 가족이 사용하던 유품이 남아 있지 않아 신문의 기록과 사진, 유족 및 친지들의 회고담을 바탕으로 재현했습니다.
이 가옥은 시멘트 기와를 올린 단층 목조건물로 대지 약 100평과 건평 약 40평정도가 되는 가옥입니다. 이가옥이 등록문화재가 된 것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큰 전환점이 되는 5.16이 이 집에서 기획되었다는 점에서도 기념할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이던 1930년대 후반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에서 당시 서울에 부족한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 신당동 지역을 문화주택지로 개발하면서 조성한 가옥 중 유일하게 남은 집이라는 점에서 한국 주거사의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문화주택”이란 1920년대부터 서울에 유행하기 시작한 서양식 주거 형태를 반영한 가옥입니다. 우리나라 전통 한옥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복도와 응접실, 식당, 욕실 등이 내부 공간에 생겨나고 보일러를 사용한 난방과 수도 등 근대적인 설비를 갖춘 집을 말합니다.
이제 마당에서 실내로이동하겠습니다.
이곳은 응접실입니다. 여기 조금전에 설명 드렸던 문화주택에 대해 설명이 있습니다. 이 가옥은 일본 강점기였던 1930년대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에서 지금의 장충동과 신당동 일대에 1932년, 1934년, 1938년 3차례에 걸쳐 격자형 도로를 갖춘 ‘문화주택’ 단지를 조성하였을 때 1930년도 후반기에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육영수 여사는 원래 일본식 가옥의 검은 기와였던 것을 붉은 기와로 바꿔 얹었고, 창고와 방 1개를 증축했으며, 마루와 부엌, 베란다, 담장을 수리하였다고 합니다. 뜰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앵두나무, 유자나무, 벽오동, 백목련, 향나무, 장미 등을 심었고, 서재 앞에는 대통령이 좋아한다는 수수꽃다리(라일락)을 심었다고 합니다.
2011년 복원공사 당시 전문가들은 최대한 1961년의 모습을 살리고자 하였지만 자료가 불충분하였기 때문에 현 상태에서 최선은, 불확실한 부분은 손대지 않는 것이다 라고 판단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곳은 응접실입니다. 여기를 복원하려고 자료를 찾던중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는 사진을 찾았습니다. 보시는 이사진은 1961년 당시 집안의 모습을 보여주는 희귀한 자료 중 하나입니다. 이 사진에 보이는 외국 여성들은 1961년 7월 10일 주한미군을 시찰하기 위해 방한한 미국 육군 차관 스테픈 아일즈(Stephen Isles)의 부인을 비롯하여 주한 외국 사절의 부인들입니다. 사진에 보이는 응접 세트는 모양이 제각기인 것은 당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부족한 의자를 급히 이웃에서 빌려 왔다고 합니다. 사진을 참고하였습니다. 벽에 보이는 서예액자는 옥천서예가 송치헌의 신이심정(神怡心靜)이란 글자로 정신이 즐거우면 마음도 고요해진다는 뜻입니다.
다음은 안방으로 가보겠습니다. 이곳은 안방입니다. 여기에 육영수여사의 이력이 간단히 소개되어있네요. 육영수여사의 이력을 살펴보면 육영수 여사는 1925년 11월 29일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고, 1942년 서울 배화여고를 졸업한 후 고향에 내려가 1945년 말부터 1947년 초까지 교편을 잡았습니다.
1950년 6.25전쟁 중 당시 육군 중령이던 박정희와 12월 12일 결혼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습니다. 1963년 양지회를 설립하여 양로원·고아원을 위문하고 전몰군경미망인 자활운동, 빈민 돕기 등 사회활동을 하였으며 어린이를 위한 지원사업과 한센병 환자를 위한 복지사업을 벌였습니다.
박정희 부부는 1950년 12월 대구 삼덕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후 1953년 7월 동숭동으로 이사 오면서부터 서울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동숭동에서 같은 해 10월 고사북동(오늘날 보문동)으로 이사를 하였고, 1955년에는 노량진, 다시 1956년 4월 서울 충현동(오늘날 신당동)으로 이사하는 등 여러 차례 이사를 하였습니다. 마침내 1958년5월 16일 잔금을 다 지불하여 450만환에 이 집을 구입하여 가옥을 구입하여 이사하였습니다.
저기 벽에서 나오는 영상은 1979년 대한 뉴스를 제작하던 국립영상제작소에서 여사님의 일대기에서 있던 것을 편집한 것입니다.
이곳 방에 전시되어있는 액자사진들은 1961년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박정희 소장의 결혼사진과 그옆에 있는 여사의 여고시절의 사진으로 배화여고 졸업앨범에 있었던 사진입니다.
자녀의 방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이곳은 안방과 연결된 형태이며 벽장이 있는 자녀방입니다. 1961년 당시 10살과 8살이었던 자매가 거처한 방입니다. 디지털 액자 모니터에서는 61년 전후한 시기에 가족사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진이 찍힌 곳은 1961년 8월 이후 이사 간 의장공관입니다. 액자 속의 아드님이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카우보이 복장은 1961년 11월 박정희 의장이 미국을 방문하여 미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을 때 선물로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우리 색동저고리 한복과 교환한 선물이었습니다.
전시물들은 당시 교과서와 학용품, 아동도서류입니다. 첫째 딸은 장충 초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둘째 딸은 1학년이었습니다.
여기 대통령 가의 가계도가 있습니다. 대통령은 박성빈과 백남의 사이 5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고, 육영수 여사는 육종관과 이경령의 1남3녀 중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대통령은 이 집에 이사와 아들을 얻어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지 대통령은 청와대에 지내면서도 이 집 관리에 무척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이곳은 주방입니다. 이곳에 노란 금으로 표시된 선까지가 주방이었던 자리입니다. 1963년 의장 공관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공관으로 이사 간 이후 이 집에는 육영수 여사의 어머니가 홀로 살게 되는데 다리가 불편한 장모 이경령여사를 위해 이곳 바닥을 평평하게 다고 합니다.
1961년 5.16 그날의 신문 기사를 모아전시했습니다. 한국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에서 당일 새벽 발발한 5.16을 1면 뉴스로 대대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5월 16일 한국일보를 보면 당시 유엔군사령관 매그루더(Carter Bowie Magruder 1959년 7월 유엔군 총사령관·주한 8군 사령관부임)의 이름은 큰 크게 보이는데 일부 가려진 부분도 보입니다.
여기 패널에는 1960, 61년에 개봉한 영화들의 포스터가 있습니다. 1961년 개봉한 “춘향전” 과 “현해탄은 알고 있다” 과 같이 한국전쟁의 상처를 극복하면서 전통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영화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이때부터는 도시 서민층 가정을 배경으로 사회 풍자를 담은 “로맨스 빠빠(1960, 신상옥 감독)”와 “서울의 지붕 밑” 같은 가족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서울이 대도시로 발전하면서 발생하는 도시 젊은이들의 방황과 좌절, 야망과 사랑 등을 소재로 한 ‘청춘영화’도 만들어졌습니다.
여기 진열장을 보시면 1960년대 발행되었던 잡지들이 있습니다. 이 잡지의 기사들을 보면 1960년, 61년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데요. 당시 잡지계에는 60년대 초 7만부라는 판매부수를 기록하며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사상적, 사회문화적인 전환을 선도했던 『사상계』 가 있었습니다. 5.16이 발생한 후 1961년 6월 사상계 사설을 보면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서재로 이동하겠습니다. 이곳은 서재로 박정희 소장이 사용하던 방입니다. 당시 지방의 군부대에서 가끔 서울로 올라왔을 때 이방을 사용했다고 하는데요. 잠깐 박정희 소장의 일생을 살펴보겠습니다.
박정희 소장은 1917년 11월14일 경상북도 구미 상모리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문경소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다가 1942년 중국만주군관학교에서 2년 예편과정을 수료하고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1946년에는 현재의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를 졸업, 육군 대위로 임관했습니다. 1950년부터 육군 정보국 제1과장으로 근무하기 시작했고, 그 해 12월 12일 육영수 여사와 결혼하였습니다.
1955 년 제5사단장, 57년 제7사단장, 그리고 59년 7월 1일 제6관구 사령관을 역임하였고 1060년 12월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이었습니다. 1961년 5.16을 주도하여 같은 해 7월 3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이후 1962년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한 뒤, 3월 24일부터 시작한 권한대행 기간을 포함하면 1979년 10월까지 5,6,7,8,9대 대통령으로서 약 17년간 재임을 하였습니다.
박정희 소장은 이곳에서 우리나라 현대사의 큰 전환점이 된 5.16을 계획하였습니다. 1960년 당시 자유당정권에 의하여 치러진 3.15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운동이 전개가 되면서 4.19 학생의거가 일어났고, 제2공화국이 내각책임제를 표방하며 민선정부 2기를 막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육사 8기생들을 주축으로 장교 250명과 사병 3,500명이 참여한 5.16이후에 주참여자들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이후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게 됩니다.
박정희 소장은 이방에서 5월 14일 밤 신당동 자택에서 김종필이 가져온 혁명공약과 각계에 보내는 호소문, 포고령 등의 문안을 검토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방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5월 15일 밤에는 김종필, 장태화, 이낙선이 출동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소장은 현관을 나가면서 아내에게 “내일 아침 5시 라디오를 들어보오” 라는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1961년 5월 16일은 화요일이었습니다.
지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바로 그날 새벽에 일어난 일을 전달하는 아나운서의 멘트입니다.
여기까지 해설을 마칩니다. 마당에 나가시면 장미넝쿨이 우거진 아치 아래 박정희대통령 부처 모형이 있어 기념촬영도 하실수있습니다. 그 모형은 1963년 국회 부의장이 된 장경순 내외, 인사들과 단체 기념촬영한 중에서 두 분의 모습만 모형으로 만들었습니다.
열심히 준비를 한다고 하였지만 아직도 미진한곳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차후라도 이곳에 관련된 자료가 있다면 실제 1961년도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의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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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단하세요!
각자의 평가는 다르겠지만,
제가 존경하는 분으로
선배님도 뵐겸 방문 하겠습니다.
건강하시고 수고 하세요.
처음이라 그러셨나봐요~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이 오늘이 있게한 두분의 업적 많이 많이 알려 주세요~
우리집에서 진짜가까운데 못갔네요 한번가 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