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7장
율법을 통해 선을 알고 의지도 생기지만, 본성 안의 죄악의 성향에
노예가 된 우리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찬송 41장)
2017-2-17,
금
맥락과 의미
복잡한 것 같지만 단순한 말씀입니다. 로마서 전체의 주제는 한 가지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오직 바로 의롭게 된 그 믿음으로 의인은 생명을 누립니다.”(롬 1:17)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의 열매 맺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은혜로 먼저 죄
용서 받습니다. 우리의 행위의 선함 때문에 죄 용서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죄 용서 받았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죄 용서 받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의지를 일으키기 때문에 성령님 안에서 선을 행합니다.
새 생명 안에서 열매맺는 삶에 대해 5,6장에서 말했습니다. 7장은 특별히 율법/말씀을 아는 유대인 성도들은 자기 힘으로 의롭게 되고, 자기 힘으로
선을 행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다룹니다. 답은 “아니다” 입니다. 율법에도 의가 드러나지만 율법을 아는 그 사람도
죄를 짓습니다. 율법/말씀은 선하지만 선한 율법이 오히려
나의 죄를 죄로 더 드러나게 합니다. 율법/말씀은 내 속의
악한 것을 알게 합니다. 그 죄악과 심판에 대해 알게 합니다. 그
결과로 나에게 죽음과 같은 고통을 줍니다. 성령께서 율법/말씀을
가르치지만, 그 말씀이 말하는 선한 일을 나는 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을 행하는 이 악한 나로부터 누가 나를 벗어나게 할 것인가? 이 멸망의 율법이 가르치고 있는 나의
죄와 멸망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나야 할 것인가?
내가 율법/말씀을
안다고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있어도 그것을 행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죄용서 받고, 오직 성령님의 일하심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7장의 내용입니다..
1.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아닌 성령님을 의지하여 열매맺음 (1-6절)
1절에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법 아는 자들이라는 것은 율법을 아는 유대인 성도들입니다. 2-4절은 하나의 비유로 말합니다. 한 여자가 어떤 남자와 결혼해
있다고 합시다. 그 남편이 죽으면 그녀는 이제는 남편에 매이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됩니다.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정당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원래 죄를 남편 처럼
모시는 여자와 같았습니다. 죄를 주인으로 모시는 노예였습니다. 5절에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탐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 율법/말씀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죄의 욕심이 우리 안에 계속 일했습니다. 사망을 위해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죄를 짓고 그 결과 죽음과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나에게는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4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연합하여서, 죽으시면서 나를 죽여 버렸습니다. 내가 지금 살아 있지만 죄악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옛 율법이 나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율법이 가르치는
죄와 죄를 지으면 당하게 되는 사망이 나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더 이상 주인 노릇하지 몫합니다. 이제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깁니다. 의문(의식적인 문구, 즉 율법의 자구)으로 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힘으로 합니다. 율법의 형식적인 것으로 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나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면, 성령님이 없다면, 내가 아무리
좋은 것을 알아도, 좋은 것을 의지적으로 하려고 해도, 그것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2. 율법은 죄를 선명히 드러내는 선한 것 (7-13절)
7절은
“율법이 죄인가?” 묻습니다. 율법은 죄가 아니다. 선하다고 대답합니다. 율법을 통해서 죄가 선명히 드러납니다. 율법은 안경과 같습니다. 책상에 때가 끼어 있어도, 눈이 나쁜 사람은 그것을 잘 보지 못합니다. 안경을 끼면 자세히 보입니다. 안경 때문에 때가 있다는 사실이 나타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율법/말씀이라는
안경을 주셨습니다. 죄를 짓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을 배웁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죄의 때가 잘 나타납니다..
문제는, 율법으로
죄를 죄로 깨닫는 사람도 죄를 이길 힘은 없습니다.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배우고, 탐심은 잘못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탐을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경 때문에 책상 위의 먼지를 잘 본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먼지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안경은 책상위의 더러운 것을 자세히 보도록 만들지만, 그 더러운 것은 그대로 있습니다. 이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 안에 탐심이 움직이는 것이
더 잘 보입니다. 그렇다고 탐심을 없애 주는 것은 아닙니다.
9절은
말합니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전에는 내가
죄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죄가 죄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 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율법을 배우면, 죄가 더 드러나게 됩니다. 내
자신은 정말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율법/말씀이 선악의
기준을 분명히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래도 선하다.”는
생각을 없앱니다. 그래서 결국은 10절에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율법을 배우면서 나의 죄가 무엇인가를
더 자세히 배웁니다.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더 커집니다. 나는
죄와 죽음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12절에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13절에
선한 율법이 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죄를 죄로 드러내기 위해서, 선한 그것, 율법이 나를 죽인 것입니다. 율법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래서 죽음 가운데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살인한 자는 죽이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자는 죽이리라”
이 말씀을 들을 때 마다, 내가 받는 그 죽음의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13절)
3. 내 안에 율법의 요구를 거스르는 죄의 성향이 있음 (14-24절)
14절에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는 율법을 배웠기 때문에, 이제 죄가 무엇인지 압니다. 선이 무엇인지 압니다. 죄를 짓게 되면 죽는다는 것도 압니다. 문제는 육신(나의 자연적 본성)은
죄에 깊이 잠겨져 있습니다. 16절에 율법이 말하는 선한 것을 시인합니다. 선을 행하기를 원합니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 지식적으로 압니다. 그것을 행하려는 소원과 의지도 나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행함이 없습니다.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17절에 내가 알고 의지적으로 하고 싶어하는
그것을 내가 하지 못합니다. 결국 내 안에 악을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 속에 죄가 내 안에서 악을 행합니다.
18절에
고백합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선을 행하는 것을 원하지만 실제 선을 행함이 없고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19절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그렇다면 내 속에서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죄라는 것입니다. 21절에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절에
속 사람이 하나님 법을 제공하지만 23절에 내 지체 중에 다른 법, 육체의
법이 있습니다. 나를 죄의 법으로 사로잡아 갑니다. 나의
선의 의지를 사로잡습니다. 나의 선한 의지와 싸우며 나를 악으로 사로잡아 갑니다. 나는 율법을 알고 있습니다. 선하게 살려는 의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을 향해서 자꾸 떠밀려 가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안됩니다. 본성의 죄의 의지가, 선을 행하려는 의지보다 훨씬 더 강한 것입니다.
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만 의지하여 육신을 죽이고 선한 열매 맺음 (25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25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법을 원하는 이것을 행하도록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행하는 나의 육신을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성령께서 내 의지를 붙잡아서 선을 행하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행동입니다. 내 속의 악을 그리스도께서 짊어 지셨습니다. 우리 죄에 대한 벌을 받으셨습니다. 실제로 악이 내 안에 일하지
못하도록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길을 걸어 가도록,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성령님이 일하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이 의지할 때, 이제는 육신의 법은 점점 죽어가고 있습니다. 전에는
육신의 법이 내 선한 의지를 눌렀습니다. 이제는
거꾸로 성령님이 내 안에 선한 의지를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내가 육신을 계속해서 죽여 가도록 일하십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 가게 하십니다. 이 영적 세계는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믿고 복종할 일
두 가지를 꼭 붙잡읍시다. 첫째, 내가 선을 행하려 하는 생각도 있고, 의지도 있다고 해도, 그것을
행할능력이 없습니다. 나의 조그마한 선을 가지고 내가 하나님께 거룩하게 될 수 없고 죄를 이길 힘도
없습니다.
둘째로, 그러나, 예수께서 내 죄를 위해서 벌을 받으시고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
안에서 새롭게 살게 해주셨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보혈 공로로 감사합시다. 그리고 성령님을 의지해서 계속 거룩한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참고>
벗어남과 역사함
벗어남(카타-아-에르가조)과 역사함.이룸(카타-에르가조마이)은 반대 말입니다. 벗어남은
‘아니다(아)’라는 말이 가운데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벗어 났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났습니다. 성령
안에서 새로운 것으로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6절). 마치
혼인한 여성이, 남편이 죽은 다음에는 그 전 남편에 대한 매임에서 벗어난 것과 같습니다(2절).
율법이 어떻게 우리를
노예로 삼았습니까?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들은 우리 안에서
죄가 기회를 타서 각종 탐심이 이루어 지게 했습니다(8절).
죄가 죽음이 내 안에 이루어 지게 했습니다(13절). 나의 행하는 것(15절)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 율법은 선하다는 것을 아는 내 안에서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17절). 내 안에 거하는 죄가
행합니다. 선을 원하는 것(의지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은 내 안에 있지만, 선을 행하는 것은 내 안에 없습니다(18절).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것을 행할 때,그것은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가 행합니다(20절).
이처럼 죄악이 내
안에서 일하는 그런 운명에서 우리는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죄악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벗어난다는 말은 로마서 7장에 2번, 로마서의 다른 곳에 “폐한다, 멸한다”는 표현으로
4번 더 나옵니다.유대인의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믿음직 스러움, 신실함)을
폐하지 않습니다 (3:3). 또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율법을 폐하지 않습니다(3:31).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그런데 만약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헛것이고 약속은 폐하여 졌습니다(롬 4:10).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은 폐기되지 않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6:6)
행한다는 말은 로마서 7장에 6번
나오고 로마서의 다른 곳에 5번 더 나옵니다.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면서 죄를 짓게 될 때,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 즉
동성애를 행합니다(1:28).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환란과
곤고를 내리십니다 (2:9). 하나님의 율법은 진노를 이룹니다(4:14).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화해된 성도들에게 환란은 인내를 이룹니다 (5:3).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 자신에게 역사하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신실함과 하나님의 율법을 폐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굳게 세우십니다. 그리스도는 죄악된 우리의 본성만 멸하셨습니다. 전에 우리 안에서
죄악과 하나님의 진노가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내를 이루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심으로 사역이의 열매를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