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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4년 11월 17일(제46주) 오전 11:00
장소 : 인천은혜교회당
본문 : 요한복음 4:34-38
제목 : 추수와 감사
오늘은 2024년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성경에서 뿌리를 찾으면 출애굽기 23:16절에서 말하고 있는 수장절입니다. “...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추수감사절은 성탄절과 부활절과 더불어 기독교가 받아들이는 중요한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에는 성탄절과 부활절을 지키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교회가 이 절기를 제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23장에서 맥추절과 수장절로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의 날자는 교회가 정한 것이지만 감사절은 성경이 명령하고 있는 역사 깊은 절기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 언약을 맺으면서 절기를 명하셨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유월절(무교절)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맥추절을 지키라는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첫 추수를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수장절을 지키라는 것은 연말에 추수한 것을 저장하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고 우리는 그 은혜 안에서 추수감사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절기들은 율법의 중요한 핵심적인 교훈입니다.
출애굽기에서부터 신명기까지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섯 가지 제사와 여덟 가지 절기를 주셨습니다. 이 5대 제사와 여덟 가지 절기는 따로 되어 있는 교훈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부 의미가 묶어져 있고 하나님의 율법 안에 절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3:14-17의 3대 절기에 대한 말씀을 보면 “14 너는 내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15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의 정할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 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16:16-17절에서는 “16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는 말씀은 최선을 다하여 가장 좋은 것으로 절기를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명령하실 때의 추수절은 농경사회이기 때문에 곡식과 과일로 드렸습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드렸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추수절을 지키는 환경은 다릅니다. 농경사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감사절과는 환경이 너무 다릅니다.
오늘 은혜를 나누려는 말씀은 예수님께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 과정 가운데 사마리아를 통화하시면서 벌어진 사건의 통하여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즉 사마리아 성읍에 살던 한 여자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구원해 주시는 결론으로 제자들에게 주시는 추수에 대한 교훈입니다.
성경에는 믿음생활을 농부의 삶으로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믿음생활 뿐만 아니라 인생의 삶은 그 자체가 농사와 같습니다.
사람들도 삶을 농사로 비유하여 사용하는 말들이 많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것을 자식 농사로 표현합니다. 기업하는 사람들이 한 해를 결산할 때에도 금년 농사는 별로 재미가 없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땀 흘려서 얻은 결과를 열매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나의 농사로 비유한다면 본문 말씀은 추수 때에 관한 말씀입니다. 농사에는 모든 부분에 시기가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가 있습니다. 곡식을 가꿀 때도 있습니다. 열매를 거두는 추수의 때도 있습니다.
믿음생활에서 열매를 거두는 시기를 영적으로 표현하면 바로 감사절입니다. 추수의 때는 바로 감사의 때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추수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감사를 가르친 것입니다.
농사를 지을 때 모든 때가 다 감사의 때이지만 특별히 추수 때를 감사절로 규정하고 있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추수는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추수는 그 동안에 수고한 결실을 거두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감사입니다. 즉 영적으로 보면 열매가 바로 감사임을 보여 주는 것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 열매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2024년 추수감사절을 맞이한 우리들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추수를 통해서 감사를 가르치시는 교훈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농사를 짓지 않는 현대를 사는 성도들이지만 이 추수 속에 감추어져 있는 감사의 원리를 배워야 합니다.
오늘은 봉독한 말씀을 통하여 “추수와 감사”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추수에는 때(시기)가 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제자들을 교훈하시는 내용입니다. 3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보면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씀했습니다. 추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 즉 시기입니다. 다른 것에도 시간이 중요하지만 추수는 때를 놓치면 모든 수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열매를 거두는 때를 감사의 절기로 주신 것은 열매와 감사는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감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삶의 열매와 같습니다. 때문에 감사가 없는 삶은 열매가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성도의 모든 일은 감사할 일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때문에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은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농사를 지을 때에는 여러 가지 때가 있습니다. 씨앗을 뿌리는 때가 있고, 곡식이 성장하는 때가 있고, 마지막에는 열매를 거두는 때가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일은 모든 일이 다 때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추수의 때는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추수의 때를 놓치면 지금까지 한 모든 수고를 다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농부는 추수의 때를 놓치지 않고 추수를 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감사에도 때가 있습니다. 감사의 기회를 놓치면 그의 삶은 열매 없는 가을 나무처럼 되어버립니다. 가을이 되면 그 무성하던 나무의 잎들이 낙엽이 되어 떨어져서 허무해집니다. 때문에 성도는 어떤 일을 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를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시편 116:12은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라고 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것들 중에는 내가 볼 때 안 좋은 것들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까요? 감사로 보답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기 위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감사는 기회를 놓치고 나면 감사 자체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람에게 감사는 감사한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일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 앞에 나와서 고침을 받은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있습니다. 당시의 나병환자들은 유대 사회에서 완전하게 격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 격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격리되어진 사람들이었습닏. 가족에서도 격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들을 묶어 두었던 천형과 같은 나병의 사슬이 벗겨진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을 치료 받은 열 명의 사람들 가운데 감사의 때를 놓치지 않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감사를 보면 그 열매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줍니다. 감사가 바로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로 감사하면 그 자녀가 열매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가정으로 감사하게 되면 그 가정이 바로 열매가 되게 하십니다. 고난까지도 감사하면 그 고난이 열매가 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열매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에게 열매는 나병의 치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이 바로 열매였습니다. 왜냐하면 감사하는 한 사람에게 주님은 구원의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 17:17-19). 나병에서 치료 받은 아홉 명의 사람들은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구원의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그렇게 큰 은혜를 받고서도 감사의 때를 놓쳐버렸습니다.
추수의 때가 바로 믿음의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감사의 때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이 우리들의 믿음생활에 감사의 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추수에는 기쁨이 있다
사람은 자기가 열심히 했던 일들이 잘 이루어지면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지난 11월 14일 목요일에 고삼 생들의 수능시험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공부한 것들이 수능 시험으로 성적의 열매가 나타날 것입니다. 좋은 성적의 열매를 거두면 좋은 대학에 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농부의 가장 큰 기쁨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추수요 수확일 것입니다. 좋은 열매들을 많이 거두면 기쁘지 않을까요? 그것이 농사의 성적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36절을 보면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농사에서는 뿌리는 자와 가꾸는 자와 거두는 자가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농사에는 뿌리는 자와 가꾸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과정을 보면 그 길을 준비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백성들에게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1-12).
추수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시편 126:5-6은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했습니다.
추수에 기쁨이 있다는 말씀은 감사에도 기쁨이 있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신비한 것은 동일한 일이라도 불평하면 그 일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감사하면 그 일에서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감사할 일이 있으면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가 감사하면 그 일이 감사할 일이 되고 우리가 불평하면 그 일이 불평할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와서 원망하다가 죽었습니다. 이들이 광야를 원망할 때는 광야가 원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원망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망하면 그 일이 원망이 됩니다. 감사할 일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감사하면 그 일은 감사가 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남들이 원망이라고 생각하는 일도 감사하므로 자신에게는 감사가 되게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성도가 배워야 할 것은 감사를 하고 나면 불평이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감사하고 나면 불평하는 일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절을 지킬 때에 감사하는 사람은 삶에서 오는 여러 가지 원망과 불평을 이기게 됩니다. 우리가 힘든 일을 만나면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것은 답이 아닙니다. 감사하고 나면 그 속에 답이 있습니다.
추수에 기쁨이 있듯이 성도의 감사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복의 열매가 열린다는 사실을 믿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추수에는 함께 라는 협력이 있다
농사는 사람의 힘으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농부가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농사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적절한 기온이 필요하고 때에 맞게 비가 와야 하고 햇빛이 있어야 하고 바람이 있어야 합니다. 신문에 보니까 그동안 배추 값이 비싼 이유는 배추 농사가 잘 안되어서 그런데 그 이유가 기온이 너무 높아서 그랬다고 합니다. 기온이 높으면 잘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본문 38절을 보면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열매는 한 해의 모든 수고를 다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매는 심는 사람의 수고도 담고 있고 가꾸는 사람의 수고도 담고 있고 열매를 거두는 사람의 수고까지 함께 담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도 동일한 원리가 있습니다. 감사는 모두의 수고와 은혜를 함께 생각하는 마음에 담는 삶의 열매입니다. 감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이 열매를 거두면서도 자신의 수고만 보지 않고 모두의 수고를 함께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감사의 원리입니다.
자녀를 낳으면서 감사하는 아내가 있습니다. 그는 해산하는 수고 가운데도 남편이 있으므로 자녀를 얻는다고 생각하니 감사가 됩니다. 의사가 있으니 해산하는 일에 도움을 받으니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원망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이는 자기 혼자만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원망한다고 합니다.
감사생활에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함께’ 라는 삶의 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감사절은 추수를 하면서도 자기 혼자 수고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셨다고 생각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 은혜를 이웃과 함께 나누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감사의 정신입니다.
감사에서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은 부자 농부와 같은 사람입니다. 농사를 잘 짓고 자기를 위해서 창고를 만들고 자신만을 위하여 먹고 마시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양일 치던 목자인 나발이 나옵니다. 그는 양털을 깎는 날 다윗이 보낸 소년들을 만납니다. 추수의 날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도움을 요청하는데 나발은 단칼에 거절하였습니다. 다윗과 그 일행 때문에 양들이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발은 함께 라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것이 죽음의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세상을 혼자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학자들은 사람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일에도 함께 할 때 거기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한 사람이 한 명을 맞설 수 있지만 두 사람이 함께 하면 열 사람을 맞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 과일을 준비하는 것에도 ‘함께’가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동참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풍성한 과일들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추수요 감사입니다. 추수를 통하여 감사의 열매를 거두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