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마조네스를 만든 사나이 >
ㅡ 1870년 3월 1일
영화 <미션> 기억나지? 예수회 선교사들이 과라니족과 힘을 합쳐 포르투갈 군대와 맞서 싸우던 그 슬프고 비장한 이야기. 웅장한 이구아수 폭포의 풍광과 더불어 노예상 출신의 예수회 신부 로버트 드 니로의 명연기와 엔니오 모리코네의 구슬픈 주제가까지. 이 영화는 실화를 배경으로 하는데 이 ‘실화’란 단순히 원주민과 원주민에게 포교하려는 예수회 신부들의 선교 스토리가 아니야.
이 지역을 지배하던 스페인은 원주민들의 반란에 골치를 앓다가 예수회 신부들에게 일종의 위임 통치를 맡겼어. 예수회 신부들은 그 안에서 노예 제도를 철폐하고 원주민들과 협력하여 꽤 독립적인 공동체를 가꾸게 되는데 여기서 ‘마테’라는 작물을 재배해서 경제적으로도 꽤 쏠쏠한 재미를 보게 돼. 우리가 흔히 편의점에서 보는 ‘마테차’의 마테가 이거다.
원래 이익이 생기면 욕심이 생기는 법, 스페인 정부는 다시 이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드는데 여기서 예수회 신부들, 그리고 그와 합세한 원주민들과 또 엄청난 피를 보게 되지. <미션>의 시대적 배경과는 다르지만 싸움 형태는 비슷했을 게야. 인간이란 게 한 번 맛본 권리를 잊기는 어려운 법이야.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안다잖아. 오래 전부터 독립적 지위를 누려왔던 이 지역은 남미에서도 최우등급으로 빨리 독립한다. 브라질,칠레, 페루보다도 빠른 1811년의 일이었지. 파라과이. 과라니 족 언어로 “여러 색깔의 강”.
빨리 독립한 나라답게 파라과이는 신속하게 발전했다. 남미에서 가장 안정된 부국이라 할만큼. 특히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즈 대통령은 독재자이긴 했지만 강력한 보호무역과 관세 정책으로 파라과이 산업을 보호함으로써 파라과이를 발전 도상에 올려 놨어. 그 후계자는 그 아들이었다. 파라과이 역사 뿐 아니라 전쟁사에 유명한 사람이야.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즈. 젊어서부터 이웃 국가의 전투에 뛰어들었던 이 괄괄한 기질의 이 사람은 야망이 큰 사람이었어. 강대국 파라과이를 꿈꾸던 그에게 파라과이라는 나라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었어. 바로 내륙국이라는 거지. 그러려면 이웃 나라 땅에 눈독을 들여야 했지.
이 사람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유럽 각국에 파견되기도 했는데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의 스토리에 고무된 것인지 징병제로 단련된 6만 대군의 힘을 믿은 것인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3국 모두에 선전포고하고 전쟁을 벌이게 돼. 현재의 우루과이의 반 브라질 세력이 반기를 들어 브라질과 충돌이 일어났는데 파라과이가 여기에 대뜸 개입해서 브라질을 공격했고 그 와중에 아르헨티나 국경을 침범하면서 손 놓고 있던 아르헨티나가 팔뚝을 걷어부쳤고 친 브라질 세력이 권력을 쥔 우루과이도 가세하니 결국은 삼국동맹과 파라과이가 맞선 꼴이 돼 버린 거야.
오늘날 지도를 보면 파라과이가 브라질 아르헨티나 근처도 못가지만 당시의 국력으로는 그렇게 처지는 편은 아니었어. 3국 동맹의 군대를 끌어모아도 2만이 못됐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파라과이군이 우세했지만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특히 브라질이 맘 먹고 전쟁에 나서자 파라과이는 점차 밀리게 돼. 그러나 로페즈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지. 심지어 항복이나 강화를 주장하는 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할 정도였으니까. 파라과이군은, 그리고 파라과이 남자들은 죽으나 사나 싸울 수 밖에 없었어. “포위됐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하면 “파라과이가 그대들과 함께 하리라. 조국을 위해 산화하라"는 식이니 초기의 강력한 파라과이 군대는 곧 없어지고 말지.
그 최대의 비극은 1869년 8월 16일의 아꼬스따 뉴 전투다. 아마도 중세 소년 십자군 이래 어린이 부대와 어른들이 전투를 치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다. 3500명의 어린이들은 어른으로 보이려고 수염까지 붙이고 총 모양의 막대기를 휘두르며 브라질 기병대와 싸웠다고 해. 무려 6시간 동안이나. 결과는 당연히 전멸. 그 가운데에는 여섯 살난 아이도 있었다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날은 오늘날 파라과이의 어린이날로 기념되고 있다는....
이쯤 되면 국가총력전이 아니라 국가전멸전이었지만 이 로페즈는 포기하지 않고 최후의 전투를 벌여. 그러나 브라질군 4천명 앞에서 로페즈의 마지막 군대는 200명 정도였어. 브라질 군이 몽땅 어린이라고 해도 브라질이 이길 판이었지. 1870년 3월 1일의 세로 코라 전투에서 파라과이의 마지막 군대는 전멸해. 로페즈는 항복을 권유받지만 “국가와 함께 죽겠다.”고 저항하다가 브라질 척탄병에 죽음을 당하지.
로페즈는 프랑스 근무 시절 엘리자 린치라는 고급 매춘부를 동반해서 귀국했고 그녀는 사실상 파라과이의 영부인 노릇을 했고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며 로페즈를 부추겼다는 의심도 받아. 어떤 사람은 이 여자가 사실상 전쟁을 주도했다고까지 얘기하기도 하지. 둘의 사랑도 열렬했나 봐. 아이도 여섯씩이나 낳았다니까.
그 가운데 장남이 그 아버지 로페즈가 죽을 당시 열 다섯 살이었는데 ‘대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지. 브라질 군이 이들을 추격해서 따라잡은 뒤 항복을 권하자 이 열 다섯 살의 대령은 “파라과이 군 대령은 항복하지 않아!”고 외치다가 가슴에 구멍이 뚫린다. 이때 엘리자 로페즈는 펄쩍 뛰며 브라질 사령관에게 노호하지. “이게 당신이 말한 문명인가.” 브라질은 ‘폭군으로부터 문명을 구한다’는 모토를 선전하고 있었거든.
이 전쟁 후 파라과이 인구는 1/3으로 줄고 남녀 성비는 1대 10 내지 20이라는 기록적인 성비를 기록하게 돼. 일부다처제가 암암리에 허용될 수 밖에 없는 일종의 ‘아마조네스’가 도래했다고나 할까. 이때 파라과이 남자로 살아남았다면 좋은 세상 누렸을 것 같다고 얘기하기는 하지만 나부터 그러고 싶진 않군, 그래서 지금도 파라과이에는 남성우월주의 문화가 강력히 남아 있고 여성에 대한 불평등한 대우가 남미 최고라고 해. 가장 희한한 건 이렇게 “국가 전멸전”을 도발하고 국민 태반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파라과이를 남미 최빈국으로 만든 로페즈가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묘한 사실이야.
죽이 되건 밥이 되건 그래도 남미 최강국 소리 듣던 때의 향수일까. 그런 사고방식도 한국과 비슷한 것 같아서 파라과이는 20세기 남미 최장기 독재자인 스트로에스네르 정권 (장장 34년)의 지배를 경험하게 되는데 요즘은 또 이 스트로에스네르 정권을 동경하고 있다고 하네. 지구 반대쪽인데 심리는 비슷한가 봐. 1870년 3월 1일 남미의 나폴레옹을 꿈꾸던 한 대통령이 브라질 졸병의 총에 맞아 죽음으로 한 전쟁이 끝났다. 유망했던 신흥국을 악몽의 아마조네스로 만든 전쟁이.
ㅡ From 후배 김형민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