送 舊 迎 新(송구영신)
세월은 우리(사람)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Time and tide waits for no man.)라고 하더니, 다사다난했던 갑진(甲辰)년도 드디어 저물어 가고 을사(乙巳)년 새해가 다가온다.
금년이 청룡의 해라고 모두 들 기대와 희망 속에 맞이했건만 소리만 요란하고 제대로 된 것은 별로 없는 아쉬움 속에 저물어 간다. 작금(昨今)의 우리나라는 기업들과 시민들은 잘도 하는데 정치 지도자들이 조선시대의 망국병이라던 사색당파 병에 걸렸는지 제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탄핵하여 사법 심판을 받도록 해놓고도 법의 심판이 나오기도 전에, 그 것도 못 참고 연일 광화문 광장에서 하루 빨리 하야하라고 난리를 치고 있다. 이 추운 엄동설한에 부모의 등골을 빼먹기 일수인 저 젊은이들이 이 치열한 삶의 경쟁을 도외시하고 도데체 무슨 생각으로 밤을 새워 불을 켜들고 저러는지
<너희들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모르는가
광화문에서 대통령을 탄핵하라고 외치는 저자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살고 있다는 말인가 ...
을사년은 십간십이지 체계에서 뱀띠 해로서 을(乙)은 천간(天干)에서 부드러움, 성장, 희망을 상징하고, 사(巳)는 지지(地支)에서 뱀의 기운으로 고대로부터 지혜와 직관, 재생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통하여 지나간 세월 을사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1485년 성종 시절에는 오늘날의 헌법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조선의 법과 제도를 집대성한 경국대전이 완성되었고,
1545년에는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병으로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의 누이인 문정왕후가 어린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첨정을 하던 시절, 권력다툼이 심하게 있었는데 양재역 벽서 사건을 기화로 윤원형 일파가 역모를 씌워 정적들을 제거한 을사사화가 일어 난 해이기도 하다.
1665년에는 현종 6년 효종과 효종비가 죽은 후 새어머니였던 인조의 계비가 죽었는데 적장자에 준하는 상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조정 대신들이 끝없이 싸웠던 소위 을사예송이라는 흥미로운 싸움이 있었던 해인데 이를 두고 이웃나라에서 얼마나 우리를 우습게 여겼는지도 모른다. 왕의 어머니의 상복을 얼마동안 입어야 하는 가를 가지고 싸웠다고 하니 웃음이 나올 뿐이다.
1785년에는 정조의 개혁정치 시절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비운의 생을 마감한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수원 화성 건설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정약용이 만든 기중기를 이용하여 수원 화성을 만드는 대형 프로젝트를 통하여 강력한 개혁정치를 위한 기반을 구축한 해이기도 하다.
1905년 을사년에는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이 채결된 해이다. 순조의 비 순원왕후의 외척인 안동김씨의 파당정치가 순종,헌종,철종때까지 이어졌는데, 권력의 독점과 부패로 국정문란과 사회적 부패로 국가 체제의 붕괴를 초래하여, 차라리 이런 나라는 망해버려도 아쉬울 것이 없다는 백성들의 공감대속에 나라가 기울어져 가도 그것은 왕실만의 불행이지 서민 대중은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고 했을 정도였으니 그런 나라가 부패관료의 재산축척을 위한 과도한 세금 부과, 가혹한 군역을 부과하였으며 을사 오적의 개인적인 이익과 고종의 무기력한 대응이 국가의 저항동력을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도 중,러,북괴의 연합 적인 야욕 앞에 한,미,일 공조를 통한 보국안민의 의지도 없다면 제2, 제3의 을사늑약이 다시는 없을거라고 누가 장담을 할 수가 있겠는가?
지도자들이 국제정세는 뒷전에 두고 집안 싸움에만 영일이 없었던 시절이니 간악한 일본의 마수에 걸려 두 눈 뻔히 뜨고도 찍소리도 못하고 당한 해이다.
1965년에는 당시에도 찬반 논란이 많았지만,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 협정이 채결된 해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 역사를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하는 말이 생각이 난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요란하게 하는 많은 일들을 살펴봐도 거짓말이나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있으니 당시와 견주어 보면 정말 황당한 일도 많다.
조선 중기 정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임금이었던 선조 22년, 정여립이 한강물이 얼면 강을 건너와서 모반을 꾀하려 한다고 하는 고변으로 잡혀 죽었는데, 그 모반설도 확실히 검증되었다고 볼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일은 조대중이란 벼슬아치가 정이 들었던 여인과 이별하기가 어려워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이 정여립이 잡혀 죽은 것을 슬퍼하여 울었다고 일러 바친 탓에 잡혀 가서 고문을 받다가 죽었고. 당시 김빙이란 사람이 눈병을 앓고 있어서 날씨가 추우면 눈물이 자주 나왔는데 추운 날씨에 눈물을 딲아도 자꾸 눈물이 났다고 하는데 이것을 보고 그가 정여립의 죽음을 슬퍼하여 울었다는 죄목으로 잡혀가서 국문을 당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옛 날이나 지금이나 허위 날조된 가짜뉴스가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알만하다.
전설상의 극락조란 새는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둘이 달려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두 개의 대가리끼리 서로 미워한 나머지 다른 쪽 머리가 죽기를 바라고 멍청한 한쪽 대가리가 독이 든 콩을 삼켜서 상대편 머리가 죽게 하는데 성공을 했지만 한 몸뚱이에 달려 있는 자신도 함께 죽었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서로 죽기 살기로 싸워 함께 망가진다면 바보같은 극락조와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주변에서 우리나라가 발전하고 우리가 잘사는 것을 반기지 않고 속으로 아니 공개적으로 잘 못되기를 바라는 나라들이 없지 않을진 데, 그런 나라들이 좋아하도록 바보같은 짓을 하는 자들이 꼴에 지도자라고 고개를 쳐들고 싸워대니 우리나라의 앞날이 어찌 염려가 아니 되겠는가.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이 왜 발발하였으며 그 당시 어리석은 우리의 선조들이 얼마나 근시안적으로 국가 대사보다 눈앞의 당리당약에 빠져서 소탐대실하였던 탓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데 있나.
머리가 나빠서 모르거나, 알면서도 극락조처럼 상대방만 망하게 되면 나라야 어찌되건 내 알바가 아니라서 그러는가.
우리나라의 정지 지도자들이 왜들 저러는지 모르겠다. 어리석기는 유권자들도 마찬가지이고, 좀 배워서 똑똑하다는 젊은 40~50 대의 공무원들이나 우리의 젊은 자식들도 어리석기는 매 일반이니 이 일을 어이 할꼬?
반백이 넘은 우리 노인들보다 더 오래 잘 살아야 할 젊은 세대의 각성을 촉구할 뿐이로다.
각종 제도와 헌법 체계도 당리당략으로 뜯어 고칠 것이 아니라 국가 백년대계를 위하여 평소에 잘 정비를 해야 할 것이고, 서로 협력하고 양보하면 쉽게 풀릴 수 있는 일도 사생결단으로 싸우느라 여념이 없고, 국내 문제뿐만 아니라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 설정에는 초당적으로 대처해야 할텐데도 당리 당략에 따라 아전 인수적으로 판단하고, 성과를 기다리는 것도 서로가 너무 성급하게 바라는 것도 지양해야 하는데 이러한 모든 것을 지난 날의 역사에서 지난날의 과오를 통하여 반성하고 치명적인 과오를 반복하는 그런 어리석은 국민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다가오는 을사년에는 우리 모두가 뱀띠해의 지혜로움과 직관력을 가지고 지난 역사를 돌아보고 배운 지혜와 직관력을 발휘하여 후회 없는 선택과 밝은 미래를 계획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회투보원(懷妬報冤)은 시기하는 마음을 품고 원한(怨恨)에 보복(報復)함은
여 자손지위환(與子孫之危患)이라. 자손(子孫)에게 위태(危殆)로움과 재앙(災殃)을 끼쳐주는 것이다.
손인이기(損人利己)면 남을 해쳐서 자기(自己)를 이롭게 하면
종무현달 운잉(終無顯達雲仍)이요 마침내 현달(顯達)하는 자손(子孫)이 없을 것이고,
해중성가(害衆成家)면 뭇 사람을 해롭게 해서 집안을〈크게〉 이룬다면
기유장구부귀(豈有長久富貴)리요 어찌 장구(長久)한 부귀(富貴)가 있겠는가?>
-명심보감 성심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