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굴 (洞 窟)
五 舟 黃 成 赫
1.
카알(Karl Trevis)이 죽었다. 1992년 10월초 쉰 셋의 나이로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피붙이 보다 가깝던 친구였다. 부음을 듣고 바로 카나다의 뱅쿠버로 갔다. 그의 세상 떠나는 모습을 보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맨손으로 시작해서 쉰을 갓 넘긴 나이에 세계의 해운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큰 해운회사 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때까지 유조선은 원유를 대량으로 수송하는 30만톤급 초대형 유조선(VLCC)이나 정제유를 운반하는 5만톤급 정유 운반선으로 대표되었다. 그는 오래 지속된 해운업계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선형을 개발했다. 중동의 산유국과 수입국 사이의 고정 항로를 왕복하는 초대형 유조선이 아닌 태평양 연안의 나라들 사이를 오가며 적은 양의 기름도 배달할 수 있는 10만톤급의 유조선을 개발하여 단숨에 해운왕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그는 처음 일본 조선소에서 배를 짓기 시작했으나 80년대 후반부터 한국으로 오기 시작해서 한국 조선소의 단골이 되었다. 내 자랑 같지만 거기에는 나와 그와의 우정이 큰 몫을 하였다. 오래 사귄 것은 아니다. 한 오륙 년 함께 하였다. 그동안 하루도 통화를 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사이가 되었고 그의 선박 건조 계획에는 언제나 내 생각이 넓고 깊게 반영되었다. 엄청난 돈을 투자해야 하는 해운회사의 주인으로서 모험을 시작하기 전 의논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친구로서 나를 선택했던 것이다. 한편 나는 평생 직장이라 생각했던 조선소를 떠나 조선 관계 자문회사를 시작했다. 새로 시작한 나의 비틀거리는 일상을 유지하는데 그는 튼실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비즈니스에 관한 일이건 사소한 일상사이건 우리는 마치 옆집에 사는 사람들처럼 시도 때도 없이 소통했었다.
그의 배 한 척이 말레이지아의 말라카 해협에서 해적의 습격을 받은 것은 그해 9월말이었다. 해적이랄 것도 없는 바다의 허접쓰레기 깡패들이 평화스럽게 운항하고 있던 배에 올라 항해실 담당자들을 순식간에 사살하고 배위에 있던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털어 도망 친 사건이었다. 항해사를 잃은 선박은 좁은 물목의 말라카 해협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근처에서 항해 중이던 비슷한 크기의 컨테이너 선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두배가 갈아 앉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배에 화물은 싣지 않아 해상 오염등의 골치 아픈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엄청난 가치를 지닌 배들이 사라졌다. 무엇보다 선원들이 전원 목숨을 잃었다. 잔돈푼을 털기 위한 바다 위 깡패들의 갓잖은 습격이 천억원이 넘는 배를 바다 밑으로 갈아 앉히고 수십명의 선원들 목숨을 앗아 간 것이다. 사고 뉴스를 듣고 다음 날 내가 위로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그는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괜찮아. 걱정 마. 이 까짓 거, 나 이겨낼 수 있어.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전해줘. 내가 아무렇지도 않더라고.”
괜찮다고 괜찮다고 되풀이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힘이 없었다. 그리고 이틀 뒤 마른 하늘에 날 벼락 같은 그의 부음을 들은 것이다. 잠자는 동안 심장이 박동을 멈추었다고 했다. 나는 백화점에 가서 검은 양복 한 벌과 검은 넥타이를 사서 입고 바로 뱅쿠버로 날아왔다.
장례식 전날 나는 그의 회사 간부들과 만났다. 나와 카알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던 그들은 나를 장례 위원으로 참여시키려 했지만 나는 사양했다. 나는 그들이 하는대로 아무 생각없이 따라다녔다. 아무것도 생각 할 수 없었다. 나이 쉰에, 인생의 정점에서, 그렇게 허망하게 스러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우리는 계획한 일도 많았고 같이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았다.
그의 관은 열려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를 보러 먼 길을 왔다. 그러나 숨쉬지 않는 모습을, 웃지 않는 그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내겐 없었다. 그래 이렇게 간단 말인가?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휘황찬란하던 그의 인생이란 것이 그래 이 정도였단 말인가? 나는 속으로 울고 다녔다.
장례식날 뱅쿠버의 하늘은 낮은 구름으로 덮여 춥고 무거웠다. 영구차는 대여섯대의 버스와 많은 승용차들을 거느리고 성당을 떠나 시내 고급 주택가를 지나 시립 공원 묘지에 도착했다. 공원 한 구석에 평장을 하기로 되었다. 땅에 묻은 검은 묘석에는 그의 배 한 척의 그림과 그의 이름이 실렸다. 장례식장을 가고 오는 동안 어느 유명한 영화 배우보다 잘생긴 그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미소는 더욱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에 관한 어느 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던 것처럼 그의 삶도 그려낼 수 없었다. 나의 온몸은 써늘한 눈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행기를 타고 서울을 떠나는 순간부터 뱅쿠버로 와서 장례식을 따라다니던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밤에 잠을 자도 마치 깨어 있는 것 같았고 낮에 눈을 뜨고 있어도 꿈속이었다. 호텔에서의 아침은 뷔페 식으로 먹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무엇을 먹었는지 얼마나 먹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장례식을 마친 뒤 점심을 먹었던지 그냥 건너 뛰었던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헛개비처럼 허청허청 사람들의 뒤를 따라다녔다. 장례식이 마무리되고 오후에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호텔방은 답답했다. 침대에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금방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 짓을 되풀이하는 동안 시월의 짧은 해가 창밖으로 내려 앉았다. 나는 더 이상 방에 혼자 남겨져 있을 수가 없었다. 통곡이 터져 나올 것 같아 나는 방에서 뛰쳐나왔다. 지하에 있는 바(bar)로 내려갔다. 넓은 바는 만원이었다. 대부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이었다. 뉴욕, 동경, 런던 그리고 스칸디나비아로부터 모였다. 그의 선박 건조 프로그램에 자금을 댄 은행 사람들, 그와 거래를 하던 화주(貨主)들, 그의 배를 짓는 조선소 관계자들과 그의 고향 친척들이었다. 모두 알만 한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카알의 죽음에 대한 아쉬움, 앞으로 카알이 남겨 놓은 회사의 진로에 대한 걱정, 자신들의 회사가 입을 피해 가능성, 그리고 인생의 덧없음을 술로 풀어 내고 있었다. 모두들 상당히 취해 있었고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 대었다. 나는 누구와도 인사하지 않았다. 비좁은 틈을 비집고 한쪽 구석 자리에 앉아 스카치 온더락 더블을 시켰다. 첫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러자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눈물이 조금 마르고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독주를 목구멍으로 들이 부었다. 악다구니는 구정물처럼 넓은 바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와 이혼 한 첫번째와 두번째 부인들의 목소리가 그 소란속에 떠올라 나의 귀에 와 닿았다.
“카알은 임포야, 그는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어. 내가 알아. 현재 그의 아내가 임신했다는 것은 말도 안돼. 그의 핏줄일 리 없어.”
그런 미치광이 같은 소리도 몇 십리 밖의 닭 울음처럼 들어야 했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독주를 마시며 고개를 숙이고 나 혼자의 상념에 빠져 있었다.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독한 술만 마시고 있구먼. 이래도 괜찮은가? 남의 일처럼 혼자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자네는 한국에 올때마다 저녁 먹는 자리에서 알코올 농도 50도가 넘는 러시아 순수 보드카 (Pure Russian Vodka)두 병을 비워야 직성이 풀리는 폭음을 계속했다. 두번의 결혼에 실패한 뒤 따라온 정신적 황폐를 그렇게 풀고 있었다. 자네의 소중한 생애가 결단 나게 생겼어. 그 버릇을 고쳐 보려고 어느 날 내가 자네에게 술 마시기 내기를 제안했지. 요정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은 뒤 우리는 작은 도시의 술집거리를 휩쓸었다. 다닥다닥 붙은 술집마다 들러 스카치 원 샷을 마셨지. 아니 그건 마신 게 아니야. 그냥 목구멍에 들이 부은 거지. 우리는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윗 속에 든 모든 오물을 길가의 하수도 맨홀에 토해 내고 한길에 큰 대자로 널브러졌다. 정신줄을 놓고 있으면서도 자네는 물었다. “우리 무슨 내기 한거지? 내가 이기면 무슨 상 주는 거지?” 내가 대답했지. “술 끊기.” “그러면 자네가 이기면 어떻게 되나?” 같은 대답이었다. “술 끊기.” 자네는 온몸을 오물로 뒤집어쓴 채 나를 껴안았지. 우리는 껴안은 채로 한동안 사람들의 불편한 통행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기 누워 있었다. 그 뒤로 최소한 내가 보는 데서 자네의 그 보드카 마시는 버릇은 중단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형제가 되었다. 아니 형제보다 더 끈끈한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이렇게 훌적 떠나다니. 그래 이걸 자네의 그 잘난 인생이라고 내게 내 보이는 거야? 그 수많은 약속과 함께 가꾼 꿈들은 다 어쩌라는 거야? 엉,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나의 옆자리에 비집고 들어 앉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 그를 무시하고 찬 독주를 목구멍으로 들이 부으며 혼자의 상념에 빠져 있었다. 나를 밀치고 좁은 자리에 들어 앉은 친구가 나를 불렀다.
“성규야. 한성규.”
나는 화들짝 놀랐다. 외국인들이 떠들고 있는 구정물 속에서 청량한 내 한국 이름이 들려온 것이다. 한동안 멍했다. 한국 말 같은데 그것이 영어였던지 한국어였던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친구를 보았다. 죽은 나의 친구 카알을 빼 닮은 뽀얀 둥근 얼굴이 거기 있었다. 취한 눈에 카알이 환생한 것인가 착각했다. 소름이 등골을 스쳤다.
“내다. 철우. 박철우.”
“철우, 철우라꼬?”
그래 오래 전에 사라진 내 불알 친구, 박철우가 지금 내 곁에 앉아 있다꼬? 죽은 카알과 똑 같은 모습을 하고 이 자리에 나와 앉았다꼬?
“자네 얼굴이 영 아이다. 너무 상심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자리를 옮기자. 이야기나 좀 하자.”
그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내 손을 꽉 움켜쥐고 나를 부추겨 일으켰다. 나는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 일어섰다.
2.
우리는 내 호텔방에서 작은 탁자를 마주하고 안락의자에 앉았다. 나는 냉장고 문을 열며 물었다.
“스카치 괜찮제?”
그는 일어나 커피 포트에 물을 채우고 스위치를 올렸다.
“독한 술은 인자 그만해라. 우리 홍차나 한잔 하자.”
그는 물을 끓이고 방에 준비된 홍차를 우려 내었다. 뜨거운 홍차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독한 술로 녹초가 된 몸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철우가 말문을 열었다.
“그래 망자하고는 우떤 사이고? 이 먼 곳까지 조문을 다 오고.”
나는 머뭇거렸다. 그러나 곧 입이 열렸다.
“복잡하다. 사업 파트너보다 더한, 친구보다 더 가까운, 형제 같았다고 할까? 정말 피붙이 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
“역시 니 답구나. 우째 외국인과 그리 가까운 인간 관계를 만드노.”
그의 남을 칭찬하는 버릇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아주 어릴 적부터 남을 칭찬할 줄 알았다. 상대방의 좋은 점을 골라 내어서 적절하게 칭찬하던 것이다. 그의 칭찬을 듣는 사람은 기분이 좋았다. 나는 국민학교 시절 그의 칭찬을 기억한다. 무슨 말끝이었던지 그는 말했다.
“성규 니는 수학을 잘 하잖아. 니는 과학자로 성공할끼다.”
그의 어른스런 말은 지금도 나의 귓전에 울리고 있다. 내가 공과대학으로 진로를선택한 것은 그때 그 칭찬이 한몫 했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래 우찌 죽었노?”
“말레지아 해협에서 좀 도둑들이 그의 배에 올라타고 배의 항해사들을 몰살했다. 항해사 없는 배가 좁은 물목에서 좌충우돌하다가 다른 배와 정면 충돌해서 함께 갈아 앉아 삐맀다. 그 일이 내 친구 심장을 잡아 빼 삐린기다.”
“경제적인 손실이 컸겠구나.”
“그 친구는 백 척도 넘는 배를 운영하고 있고 그 배들은 모두 보험에 들어 있으니 한 척 잃었다고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배에 타고 있던 선원이 한 명도 구조되지 못했다. 그게 그 사람 심장에 큰 부담을 준 것 같다.”
“아 그랬구나. 그 사람은 우리 나이 또래라고 캤제?”
“응, 나하고 동갑이다.”
“뭐 술 한잔 할래?”
끓여 놓은 홍차를 다 마신 뒤 내가 다시 물었다.
“응 맥주나 한잔주라. 저녁도 늦었고 목도 마르다.”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 깡통을 꺼냈다. 두개의 잔을 채웠다. 냉장고에 있는 안주 될 만한 것들을 모두 늘어 놓았다. 땅콩도 있고 비스케트도 있었다. 나의 울적함도 많이 갈아 앉았다. 그러자 철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마지막 본 것이 십여년 전인데 그의 희고 통통한 귀하게 생긴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얼굴에 빠다 기름이 좀 끼었다.”
“카나다에 온지 벌써 십년도 넘었잖나? 빠다 기름이 낄만 한 정도가 아이라 빠다 덩어리가 돼 삐맀다.”
철우가 한국을 떠난 것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서울에서 소아과 병원을 운영했다. 한편으로 대학에 강의를 맡으며 명망을 쌓았고 돈도 제법 모았다. 그러던 그가 하루 아침에 사라졌다. 가족 모두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던 것이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누구도 그의 행방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래 우찌 지내노?”
철우가 나를 위로 하려 만난 자리지만 어느덧 내가 철우의 삶을 캐묻기 시작했다.
“그냥 편안하게 지나고 있다. 서울에 있으나 여기 있으나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아, 병원을 열었구나. 그래 병원은 잘 돼나?”
“아니 그 말이 아이다. 한국 의사 면허는 여기서는 전혀 인정을 못 받는다.”
“같은 일을 한다며.”
“응, 서울에서나 여기서나 저울을 가지고 묵고 산다. 서울에서는 약을 저울에 달아 묵고 살았는데 여기서는 캔디를 달아 묵고 산다.”
알 사탕 가게를 열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의 느긋한 말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몸을 가쁜하게 하는 웃음이었다.
“사람도. 그기 우째 같은 일이고? 하긴 저울을 쓰니까 그리 말할 수도 있겠구나. 세상 편한 마음은 서울에서나 여기서나 매 한가지구나.”
그의 생활에 대한 나의 궁금증은 끝이 없었다.
“낯선 곳에 정착하는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
“니처럼 국제적 비즈니스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편하게 묵으니 외국 생활도 견딜만 하다. 또 여기는 처가 집 친척들이 오래전부터 정착을 하고 있었거든. 도움을 많이 받았다.”
카나다 이민이 하루 밤 사이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두고두고 준비한 결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동안 평양에는 한번 다녀왔나?”
입 밖에 내기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나왔다. 그의 한국에서의 생활은 6.25 전쟁 이전 월북한 아버지에 얽힌 연좌제의 족쇄에 묶여 있었다.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 속에서 제일 먼저 생각한기 그거였다. 내가 남의 눈치 안보고 살아도 되는 입장이 되자 본능적으로 ‘평양부터 갔다 오자’ 라는 생각이 들더라. 평양 가서 아부지 만나자, 형을 만나자. 그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여기 정착하고 나서 생각이 금방 바뀌더라. 북한이라는 실체가 느껴지지가 않아. 북한이 내 한테 무엇인가? 무엇을 줄 수 있나? 라는 생각이 드는거야. 아부지나 형의 생사도 모르고, 또 살아있다 하더라도 혈육의 정은 이미 다 끊어졌다 말이다. 평양에 간다는 것이 나의 앞으로의 삶에 또 하나의 족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라고 북한에 관한 일은 다 잊었다. 북한의 아부지도 하늘 나라 어무이도 마산 할무이도 다 잊기로 했다. 어제와는 인연을 끊었다. 내일은 안 믿기로 했다. 그냥 오늘을 사는 거다. 그리 마음 묵으니 산다는 기 얼마나 편한 지 모른다. 여기 뱅쿠버가 낙원이다.”
그의 얼굴은 가식 없는 편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일 골프 치자. 뱅쿠버는 아메리카 대륙의 런던이라 칸다. 안개도 끼고 비도 자주 와서 생활 패턴이 영국 같거든. 좋은 골프장도 여러 개 있다.”
“아니, 서울에 일정이 잡혀 있어서 내일 저녁에는 비행기를 타야 된다. 다음에 와선 한판 붙자.”
나는 그와 헤어지기가 아쉬워 시덥지 않은 대화를 제법 진지하게 이어갔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 골프는 좀 늘었나?”
친구들과 골프를 치면 내기를 했다. 작은 내기 이기는 했지만 한국에서 그는 늘 지는 편이었다. 승부에 아둥바둥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골프라는게 그리 잘 느는기 아이드라. 그냥 걷고 좋은 공기 쏘이고 그러는 거지 뭐. 니는 인자 싱글 치제?”
“나도 그렇다. 연습장엘 가나, 자주 치기를 하나, 잘 치기를 바란다면 도둑놈이지.”
몇 개의 맥주 깡통이 열렸다. 정신은 점점 맑아졌다.
“그래 내가 여기 오는 것은 우찌 알았노? 급작스레 오게 되어서 서울서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아 철현이 않있나? 여행사 하는 친구. 그 친구 하고는 조용히 연락을 하고 있다. 그 친구한테서 들었다. 듣자마자 뱅쿠바 시내 호텔을 몽땅 뒤져서 니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
“참 세상에 숨을 데가 없구나.”
“그러니 니를 여기서 이레 보게 되는기다. 안 그렇나?”
철우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의 위로는 효과를 보았다. 내 몸속의 써늘한 눈물이 따뜻해지는가 싶더니 새벽녁에는 깨끗이 말랐다. 그러자 내가 철우에게 질문을 쏟아 붓기 시작했고 내가 그를 걱정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래 한 십년 고향 떠나 살았으니 이제 돌아올 때도 안됐나?”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니 안 돌아 간다.”
“인제 그 지긋지긋한 연좌제도 없어졌고 니를 괴롭히던 사회적 속박이 말끔히 사라졌는데 여기서 고생하고 있을 이유가 없잖나? 돌아와서 병원도 다시 열고 죽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니가 좋아하는 삶을 누릴 수 있지 않겠나?”
“아니 나는 여기 있을끼다.”
“북한도 안가다면서.”
“그냥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다. 어느 쪽도 가고 싶지 않다. 이 나라는 내가 가진 가치를 존중하지 않지만 나의 행동을 속박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나의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그저 나를 그냥 편안하게 놔 두고 있다.”
“아아들은 어쩔거고?”
“아아들은 음악 공부를 하고 있다. 가아들은 다르다. 학교 끝나면 귀국하겠다고 한다. 아아들의 장내는 가아들의 뜻에 따라야지. ”
“아주머니는 우짜고? 십년이면 향수병이 도질만도 한데.”
“마누라는 그저 여기를 극락으로 생각하고 있다. 기후도 좋고 어떤 일에도 간섭 받지 않는 두 사람만의 삶, 한껏 즐기고 있다.”
“그래 자네는 고향에 고국에 눈꼽만 한 미련도 없다 말이가?”
“없다면 거짓말이지. 있으니 뱅쿠바 시내를 다 뒤져 이 밤중에 자네를 찾아오지 않았나?”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맥주만 홀짝거렸다. 다행이 호텔방 냉장고에는 맥주가 충분히 준비 되 있었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 하늘이 훤해질 때까지 함께 있었다. 아침에 그의 아들이 차를 가지고 와서 그를 태워갔다.
“뱅쿠버는 골프치기 좋은 곳으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아쉽다.”
떠나며 그가 남긴 말이었다.
아침 잠을 자고 오후 일찍 짐을 챙겨 선주 사무실로 갔다. 간단히 인사들을 나누고 그날 저녁 비행기를 탔다. 뱅쿠버로 오는 비행기 속에서 나는 죽은 친구 밖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비행기 속에서 나의 마음은 살아 있는 철우의 생각으로 가득 찼었다. 그와의 어린 시절 함께 지나던 일, 기구한 그의 가족 역사, 연좌제로 인한 핍박, 그의 결혼과 그의 아내에 대한 인상에 이르기까지 나는 꼼꼼히 따져보았다. 일제 시대에 태어나서 대한 민국이 건국되고 육이오 남침, 산업화, 민주화의 격랑을 잠재우며 살아남은 우리 세대이다. 그 어려운 고비들을 가장 비극적으로 겪어낸 가장 슬프고 험한 삶을 살아온 철우, 그러나 스스로 고난을 극복해낸 용사이다. 나는 비행기 속에서 다짐을 했다. 철우의 이야기를 파헤치자, 그것을 세상에 알리자, 우리 세대에게는 장엄한 역사적 회고록이 될 것이고, 젊은이들에게는 세상을 열어가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3
그의 아버지 이야기부터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는 부자집 아들로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해방 직후 마산으로 돌아왔다. 일본 사람이 남기고 간 큰 회사의 사장을 맡기도 해서 잠간 그 지방 유지 행세를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잠적했다. 그때 지식인들 사이에 붙어 있던 빨갱이 딱지가 아버지에게도 달려 있었다. 철우는 대낮에 아버지를 집에서 본 적이 없었다. 철우는 아버지의 살아 있는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머니가 대청 마루에 덩그렇게 걸어 놓은 까만 교복에 사각모를 쓴 사진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온갖 구설을 들으면서도 그 사진을 떼어 내지 않았다.
우리는 가끔 신마산과 구마산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던 불교 포교당에 놀러 갔었다. 넓은 마당이 있어서 뛰어 놀기 좋았고 편안한 법당에서 스님의 설법도 들었다. 철우의 외할머니가 착실한 공양주였고 포교당이 운영하는 유치원에는 철우의 누나가 보모로 아이들을 돌보고 있어서 철우는 편하게 들락거렸다. 국민학교 삼사학년 때로 기억한다. 육이오 나기 한두 해 전이었다. 철우는 놀다 말고 유치원 옆 헛간 같은 초라한 집을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우리 아부지가 저게 산다.”
나는 잠깐 깜짝 놀랐다. 부자이고 잘난 철우 아버지가 절에 붙은 초라한 헛간에 살다니. 그는 눈을 꿈뻑하며 시시덕거렸다.
“저게 꼭꼭 숨어 있다.”
숨어 살던 아버지는 육이오 사변 전 해에 월북했다. 북한에서 장관인가 뭔가 고관이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집안을 북새통으로 만들어 놓았다. 자신의 월북으로 집안은 늘 경찰서의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모든 가족들에게 북한으로 가야 한다는 아버지를 따라 가야 한다는 종교와 같은 끈질긴 집념을 심어 놓았다.
어머니는 강인한 여인이었다. 아버지가 일본 유학으로 집을 떠났을 때 홀로 집안을 다스렸다. 귀국해서 좌익 운동을 한다고 바깥에서 맴도는 아버지 수발을 거뜬히 해냈고 자라는 이이들을 혼자 반듯하게 키워 냈다. 부자 집 딸이었다. 외할머니가 부자였다. 조 과부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마산 요지에 땅을 많이 가진 외할머니가 눈에 띄지 않게 어머니의 생계를 많이 도왔다. 철우 아버지도 물려 받은 유산이 있어서 철우 가족이 사는 데는 큰 불편이 없었다. 어머니는 잡화 가게를 열어 놓았다. 그 동네에서 가장 큰, 없는 것이 없는 만물상이었다.
아버지는 남한에서 숨어 살 때 밤에 눈에 띄지 않게 집에 들러 자고 갔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존재로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월북을 하고 거기서 장관을 지낸다는 소문을 듣고 나서부터 어머니는 달라졌다. 자나깨나 아버지를 따라 월북을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다른 생각이 없었다. 철우나 다른 식구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실성한 사람처럼 월북을 해야 한다는 집념에 매달렸다.
거기에 밀항을 주선하는 브로커들이 끼어 들었다. 해안 경비가 어수선할 때였다. 남해안은 밀항, 밀수선으로 바글거렸다. 일본으로의 밀항, 일본으로부터의 밀수, 북한으로의 월북 등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생활용품들이 부족해서 밀수를 한번만 잘하면 평생 팔자를 고친다는 시절이었다. 일본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부르는 대로 값을 내고 밀항선을 탔다. 어머니에게도 월북하라는 유혹의 손이 뻗어왔다. 그렇게 사리가 분명하고 당당하던 어머니가 넋이 빠진 사람처럼 꾐에 빠져 들었다. 가게며 아이들이며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다 팽개치고 큰 딸과 함께 월북선을 탔다. 배는 마산을 떠나 칠흑 같은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 밤새 항해를 하더니 새벽녘에 작은 포구로 들어왔다. 심한 멀미 끝에 땅을 밟았다. 북한이라고 했다. 그런 줄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북한이 아니고 마산의 바로 이웃 작은 포구였다. 사기꾼들이 밤새 칠흑 같은 앞바다에서 빙빙 돌다가 새벽 녘에 이웃 마을에 그들을 내려 놓은 것이다. 경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유치장으로 끌려 갔다. 어머니의 간난신고가 시작되었다. 경찰에서는 외할머니가 손을 써서 풀려났다. 그러나 경찰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보도 연맹에 강제로 가입을 하였다. 누나도 어머니와 함께했다. 그때 전국에서 수십만명이 보도 연맹에 가입하였다. 좌익 사상을 가졌던 사람을 전향시켜 자유대한의 국민으로 선도한다는 조직이었다. 사상적인 어떤 색깔도 없는 농민들도 심지어는 중학생들도 가입되었다. 지방단체들이 할당된 수자를 채우기 위해 마구잡이로 이름을 올렸다고도 했다. 철우가 국민학교 사학년 시절이었다. 일상을 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가게는 계속됐고 어머니는 어머니로 돌아왔다. 철우는 어지러운 주위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았다. 천성이 그랬다.
다음해 육이오 전쟁이 터졌다.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남한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전쟁이 시작된 지 나흘만에 서울이 점령되고 북한군은 일주일 만에 한강 이남으로 밀물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온 세상이 아수라장이었고 남해안 포구는 난장판이었다. 북한군에 점령되지는 않았지만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가나오나 피난민 천지였다. 모든 학교는 병원이나 군시설로 접수되었다. 군인들, 무기들, 심지어 시체들을 실은 자동차들이 길을 메웠다.
어느 날 어머니와 누나에게 구마산의 가장 번잡한 거리에 있던 시민 극장으로 나오라는 통보가 왔다. 시국 강연이 있으니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꼭 들어 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 사이 시집을 간 누나는 만삭이었다. 시민 극장에 갈 수 없었다. 어머니는 하라는 대로 하였다. 경찰은 시민 극장에 가득 모인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그물에 들어온 물고기들처럼 몽땅 잡아 형무소로 옮겼다. 형무소는 사람으로 넘쳐났다. 감방에 있는 기결수들은 호강하는 편이었다.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영문도 모르고 형무소 마당에 내 던져졌다. 먹을 것도 잠잘 곳도 없었다. 마당에서 자고 거기서 자라는 풀을 뽑아 먹었다. 근처에 있던 나무 껍질이 사라졌다. 모두 벗겨 먹어 치운 것이다. 버려진 사람들끼리 짐승 같은 온갖 참혹과 추잡이 자행되었다. 며칠 뒤 하루 아침에 그들은 학살되었다.
삼팔선만 뚫어 놓으면 남한은 남한에 살고 있던 이북 동조 세력들에 의해 스스로 괴멸할 것이라고 북한은 공언했다. 북한 군이 들어 오기전 남로당원들이 봉기해서 마을을 접수하고 북한군을 맞아들인 곳도 있다고 했다. 한번 빨간 물이 든 사람들은 언제든 빨갱이가 될 수 있다는 논리로 보도연맹 가입자들에 대한 학살은 합리화되었다. 총살되고, 우물에 폐광에 묻어버리고 바닷물에 쓸어 넣었다. 마산의 형무소에 있던 사람들은 배로 끌려 나왔다고 했다. 열 명씩 밧줄로 묶어 뱃전에 세우고 마산 근처의 바다물에 밀어 넣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외할머니도 손쓸 겨를이 없었다.
며칠 뒤부터 바닷가에 시신이 떠 오르기 시작했다. 철우는 누나에 이끌려 바닷가로 나갔다. 해변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사람들을 헤집고 바닷가로 나갈 수 없었다. 시체들이 떠올라 해변으로 밀려오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꼼짝 못하는 어름 덩어리들 같았다. 떠 오르는 시체들에서 눈을 떼지 않았지만 다가가거나 시체를 식별해서 피붙이를 찾아보겠다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목숨을 잃은 피붙이들에 대한 애통함과 그들을 찾아보려는 열망, 한편으로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두려움으로 그들은 꼼짝달싹 않고 바다와 거기 떠오르기 시작한 시신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왜 거기 떠 있는지 정말 죽은 것인지도 모를 고혼들이었다.
누나는 철우를 끌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피해 한없이 걸었다. 만삭인 누나는 헐떡거렸지만 괴롭다는 말 한마디 않고 철우를 끌고 갔다. 철우는 누나를 생각해서 입을 떼었다.
“누우야, 여게 쯤에서 구경해도 안되겠나?”
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철우의 손을 잡고 사람들을 피해 멀리멀리 걸어 갔다. 누나가 입을 열었다.
“무섭다.”
“뭐가 무섭노?”
철우에게 누나는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고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사람들이 무섭다.”
누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임신을 하지 않았으면 그녀도 지금쯤 바다에 떠 다니는 주검이었다. 누나가 무서워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왜 무서워할까? 철우는 묻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한참 떨어진 한적한 해변 바윗돌에 앉았다. 멀리 물에 불은 옷가지들 몇이 공기 주머니처럼 부풀어 잔물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누우야, 우리가 여게 나와 있는 것 알모 어무이가 이리로 안 오겠나?”
누나는 철우의 손을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누나는 철우의 손을 그녀의 두 손바닥 사이에잡은 채로 거기서 서너 시간을 앉아 있었다. 바다는 맑고 잔잔했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 쬐고 있었다. 어둠이 깃들 때까지 아무 생각없이 앉아 있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허둥지둥 자리를 떠났다. 무서웠다. 무엇 때문에 거기 나왔는지, 몇 시간을 꼼짝 않고 뭘 생각했던지, 기억 나지 않았다. 그 자리를 뜨자 그들의 걸음이 빨라 졌다. 누구인가 그들의 옷자락을 뒤에서 끌어 댕기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김종원이, 백두산 호랭이 그 새끼가 다 쥑인기라.”
철우는 뒷날 남의 일처럼 말했다. ‘백두산 호랑이 나타났다’ 고 하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그는 곳곳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거침없이 죽인 살인마로 이야기되었다. 철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
“우리 어무이 손가락이 대마도에서 잡힌 갈치 배때기에서 나왔다는 기라. 손가락에 낀 반지 때문에 알았다는 기라.”
그는 남의 일처럼 말했다.
4
그는 겉으로 평온한 생활을 이어갔다. 육이오를 겪은 국민학교 시절과 온갖 사회 변혁이 있었던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한결 같았다. 뽀얗고 통통한 얼굴에 중키, 누가 보아도 부자 집 막내 아들이었다. 아무도 그가 가정적 참변을 당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 참담한 역사를 그의 곁에서 보아 온 사람도 세월이 흐르면서 잊어버렸다. 무엇보다 그의 덤덤한 태도와 남의 말 하듯 하는 어투 때문이었다. 빨갱이로 숨어 지내던 아버지가 숨어 있던 절 옆의 헛간을 향해 ‘우리 아버지는 저기 산다.’ 라고 했다. 보도 연맹으로 학살당한 어머니에 대해 ‘우리 어무이 손가락이 대마도에서 잡힌 갈치 배때기에서 나왔단다’ 라고 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는 공부를 잘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이 어수선할 때 형이 서울 공대에 입학을 했다. 한해가 지나지 않아 월북했다고 했다. 그리고 김일성 대학에 입학했다고 전해왔다.
고등학교 때까지 담을 맞대고 살았던 승균은 철우와 평생 단짝이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고 같은 학년이었다. 철우의 집에는 오래된 백목련 한 그루가 있었다. 가지가 승균이네 집 담 너머로 뻗어 있어 흰 목련 꽃은 이른 봄 양쪽 집 마당을 화사하게 밝혔다. 중학 시절 어느 일요일이었다. 선녀의 날개 같이 두 집에 환한 그늘을 드리웠던 백목련이 그 순결하고 향기로운 꽃잎을 미련없이 뚝뚝 떨어뜨려 양쪽 마당을 덮고 있었다. 그 꽃이 금방 바나나 껍질처럼 칙칙하게 변한다는 것이 아쉬워 그들은 각자 자기 마당에 떨어진 꽃잎을 주어 철우의 집 마당에 쌓았다.
“이렇게 깨끗한 꽃이 하루 아침에 누렇고 거무칙칙하게 찌그러 든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가?”
철우가 중얼거렸다.
“맞다 맞다. 우리 이걸로 뭘 좀 만들어 보자. 아직 꽃잎 깨끗할 때 멋있는 것을 만들어 보자.”
승균이 맞장구를 쳤다. 철우는 입이 넓은 유리병 여러개와 면도날을 준비했다. 면도 날로 깨끗한 꽃잎을 반듯하게 잘라 소금을 뿌리며 병 속에 차곡차곡 쌓았다. 어디서 났는지 철우는 백반을 가져와 있는 대로 뿌렸다. 그리고 그늘에 늘어 놓았다. 색갈이 변하는 것을 막아보자는 노력이었다. 승균이 물었다.
“이래하모 천사 같은 목련 꽃 색갈이 좀 오래 갈랑가?”
“모르지, 그냥 생각해 봤다. 효과가 안 있겠나? 소금이나 백반이나 썩는 거 방지하는데 특효가 있다 안카나?”
목련 꽃놀이가 시들 해질 때쯤 철우가 딴청을 부렸다.
“균아, 목련꽃을 한문으로 북향화(北向花)라고 부른단다. 니 아나?”
“아니, 와 그렇노?”
“이 꽃이 북쪽을 향해 피거든.”
철우는 아무런 감동도 없이 대답했다.
“아 목련 꽃이 북쪽을 행해 피나? 나는 전연 몰랐다.”
“이 꽃이 북한의 국화라 카더라.”
나이가 들어 승균은 철우와의 느닷없는 대화를 회상했다. 겉으로 평온을 유지하던 철우의 복잡한 속 마음이 헤아려 졌다.
철우와 승균은 성격도 비슷해서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늘 붙어 다녔다. 고등학교 입학하며 그들은 클라식 음악에 빠졌다. 음악회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격심한 대학입시 공부 중에도 오페라 아리아, 이태리 칸조네를 배워 동네가 떠나가라고 함께 불렀다.
누나가 와 있었다. 시집 가서 아이까지 낳았지만 병원을 하던 자형은 아버지 어머니 일을 들먹이며 누나를 구박했다. 결국 소박을 맞고 집에 돌아와 단 하나 남은 혈육인 철우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철우가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을 때 누나가 죽었다. 아파도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견뎌내다가 누운 지 며칠만에 세상을 떠났다. 착한 여인이었다. 일찍 좋은 학교를 나와 유치원 보모를 하던 멋쟁이였다. 어머니 따라 월북을 시도했다. 그녀가 하려던 일이 아니었다. 착한 심성이 어머니를 혼자 보낼 수가 없어 따라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잘 나가던 병원장과 결혼을 했다. 임신을 했던 덕으로 학살은 피했다. 그러나 남편으로부터 소박을 맞았다. 그 뒤 집으로 돌아와 단 하나 남은 피붙이 철우를 어머니가 하듯 돌보았다.
철우는 조용히 누나의 장례를 치르었다. 풍비박산이 된 집안의 아이들 초상이었다. 조금도 떠벌릴 일이 아니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친구들 몇 명이 와서 서성이는 쓸쓸한 장례였다. 장례 기간 동안 철우는 담담했다. 장례를 치른 몇 주일 뒤 철우가 청주와 안주를 준비했다. 승균은 하자는 대로 철우를 도왔다. 철우는 승균과 함께 산으로 가서 누나의 산소에 술을 붓고 잠깐 앉아 있었다. 갑자기 철우가 미쳐버렸다. 철우가 미쳤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침착하던 철우가 갑자기 무덤위에서 뒹굴기 시작한 것이다. 목이 터지도록 고함을 질렀다.
“누우야, 누우야.”
피를 토하는 절규였다. 철우는 울고 뒹굴며 소리 지르며 한 나절을 보냈다. 승균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기진맥진한 철우가 일어섰다.
“가자.”
철우가 말했다. 승균이 기어드는 목소리로 물었다.
“철우야, 니 괜찮나?”
철우는 담담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인자. 다 끝났다. 인자 내 인생에 울 일은 더 없다.”
철우는 평생 그를 돌보아 주던 누나와 그렇게 헤어졌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그에 딸린 모든 가족과의 결별이었다. 승균과 철우는 함께 공부해서 학교는 다르지만 서울에 있는 일류 의과 대학에 입학했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고향 친구들 중에는 가정 교사를 한다든지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자금을 버는 어려운 친구들이 많았지만 철우와 승균은 서울 한 가운데 종로에서 하숙 생활을 하며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누렸다. 교통이 편리하고 무엇보다 좋은 음악실이 주변에 있었다. 대학 생활을 즐길 시간적 여유도 있었다. 철우의 대학 생활은 겉으로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아버지의 그림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철우가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을 뿐이다.
서울 올라온 뒤 한두 해 동안 철우는 남산에 자주 올랐다. 주말에는 답답한 하숙집을 나와 걸어서 남산에 올랐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 다니는 큰길보다 오솔길, 그 보다 길도 없는 숲 속을 거닐다 아무데나 주저 앉아 한참을 멍하니 앉았다가 오는 날이 많았다. 고향의 바다 같은 시원함은 없어도 숲속 감추어진 구석의 안온함은 고향처럼 포근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그에게 접근했다. 얼굴이 곱상하고 말씨도 부드러웠다. 철우 마음의 빈 곳을 건드렸다. 자기도 시골 출신이라고 했다. 시골 사람이 서울에 와서 느끼는 소외감을 이야기했다. 첫눈에 철우도 같은 처지라는 것을 알아보았다고 했다. 몇 번 만나면서 서로 마음을 트기 시작했다. 시간이 제법 지나 그가 본색을 드러내었다. 자기는 철우의 아버지 지시를 받고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이다, 철우의 아버지가 철우의 월북을 도우라고 지시했다 라고 했다. 철우는 펄쩍 뛰며 처음에 말도 못 붙이게 했다. 더 이상 아버지의 그림자가 그의 삶을 갉아먹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 이상 어머니와 누나의 뒤를 따라가기 싫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를 계속 만났다. 두려우면서도 점점 끌려 들어갔다. 결국 철우가 지고 말았다. 월북하는데 동의한 것이다. 며칠 뒤 철우는 백지장 같은 얼굴로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학교로 중앙 정보부 요원이 찾아와 그를 남산으로 끌고 갔다. 철우를 꼬득였던 사람은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던 것이다. 결국 철우의 모범적인 학교 생활, 그동안의 단정한 몸가짐등을 고려해서 벌은 받지 않고 엄중한 경고만 듣고 풀려나왔다.
한동안 그 일은 잊었다. 공부에 몰두했다. 공부가 잘 되었고 일상 생활도 안정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학교를 마치고 하숙집 방문을 여니 덩치가 커다란 장정이 팔 다리를 큰 대자로 벌리고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처음에는 고향에서 올라온 친척인가 했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겁부터 났다. 집밖에 세워 둔 몽둥이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동네 사람들을 부르기 전 우선 그 사람의 정체부터 알아 두어야 했다. 여차하면 다리 몽뎅이부터 부러뜨려 놓고 따지겠다는 생각이었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자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왜, 놀랬어? 나 이런 사람이야.”
그는 신분증을 철우의 코앞에 갖다 대었다. 종로 경찰서 사상계 형사라고 했다.
“아버지한테서 온 편지 같은 것 지시문 같은 것 있는대로 내놔.”
방안은 그가 이미 들쑤셔 놓아 난장판이었다. 나올 게 없었다. 철우는 평정을 되 찾았다.
“이미 남산에서 다 조사한 것인데 뭘 또 조사할 게 있습니까? 아버지한테서 올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벌써 다 뒤집어 보셨네요.”
그는 종이쪽지 하나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고 달랑거렸다. 아차 했다. 서울 공대 다니는 친구가 군사 분계선을 따라 무전 여행이라는 것을 하면서 그려 놓은 군사 분계선 근처의 지형 스케치였다. 그 친구는 미국에 연고가 있어 미국으로부터 오는 학자금으로 학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의 집안에도 월북해서 자리 잡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도 북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군사 분계선 지역을 다니며 별 목적없이 이런 저런 지도를 그려 두었다. 그리고 한 장을 철우에게 남긴 것이다. 형사는 철우의 멱살을 잡고 으르렁거렸다.
“바른대로 말해, 이 새끼야. 어물어물하면 너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어.”
철우는 흔들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했다.
“이것 놓고 말하이소. 다 뒤져 보고도 내가 의심스럽다는 말입니꺼?”
“그럼 이 그림은 뭐야. 월북할 루트만 살살 찾아 다닌 증거잖아?”
“나는 그기 어디서 굴러 들었는지 모릅니더. 나는 삼팔선 근처에 가본적이 없습니더.”
형사의 주먹이 철우의 턱으로 날아왔다. 철우는 좁은 방 벽에 부딪히며 쓰러졌다. 철우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울 공대 다니는 친구의 말은 더더욱 꺼낼수가 없었다. 그런대로 그날 저녁은 넘어갔다. 형사도 철우에게서 더 밝혀 낼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뒤로 형사는 철우의 방에 무시로 드나들며 낮잠을 자고 갔다. 철우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의 옆에 누워 함께 낮잠을 자기도 했다. 모든 것을 참아 내었다. 참는 것이다. 오직 참아 내는 것이다. 그는 잘 버텨 내었다. 그리고 그 형사를 형님이라 불렀다.
5
신중한 철우의 몸가짐이 더욱 무거워졌다. 중앙정보부에서 받은 수사도 그렇고 종로 경찰서 형사와의 동거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얼마나 예민하게 그의 일생에 투영될 것인지 깊이 자각하게 하였다. 그런 현실이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 지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는 그 참담한 현실을 누구에게도 스스로 말하지 않았고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의 생활은 겉으로 순탄했다. 승균과는 잘 어울렸다. 의사가 되기로 그것도 소아과 의사가 되기로 작정 된 삶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인생을 준비해 갔다. 그의 내면적인 갈등은 잘 포장되었다.
대학에서 학년이 올라 갈수록 앞날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우의 앞날에대해 승균이 오히려 조바심을 쳤다. 철우의 앞날을 가로막는 여러 장벽들이 눈에 뚜렷이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철우는 아무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일상이 덤덤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자. 그러면 됐지 뭐 지금 더 생각할 것이 있나? 복잡한 것 생각하지 말자. 단순하게 살자. 열심히 지금을 살면 내일은 따라오는 것이다. 어제는 오늘을 만들고 오늘은 내일의 삶을 열어줄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아무리 느긋하게 보이려 해도 문득 문득 터지는 봇물처럼 마음속으로 밀려드는 걱정은 막을 수가 없었다.
열심히 한다고? 그래서 무엇이 되는 거야? 의과 대학 6년을 마치면 의사 국가 시험을 치르고 졸업 후 수련의 과정을 거친다. 수련의를 마치면 군대에 가야 하고 군대를 마치면 병원으로 들어가 의사로서의 생애가 시작된다. 국립의료원일 수도 있고 대학 병원일 수도 있고 큰 개인 병원일 수도 있다. 그것이 일반적인 의대 졸업생들의 인생 행로이다. 그런데 내게도 그런 정상적인 인생 행로가 허용될 것인가? 의사 시험 합격하고 수련의를 거친다고 하자. 군대는 어찌 할 것인가? 남들 하듯 군의관으로서의 내 생애가 순탄하게 시작될 수 있을까?
그의 미래에 대한 설계는 거기서 꽉 막혀 버렸다. 장교 임관이 그에게는 그는 허용되지 않는 꿈이었다. 참을성으로 미래에 대한 걱정을 걷어내려 했다.
다른 생각하지 말자. 곁눈질하지 말고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말고 오직 나의 길, 오늘 일어나는 나의 일에 몰두하자. 나는 의과 대학을 다닌다. 다니고 싶다고 다닐 수 있는 대학이 아니다. 입학 시험도 시험이지만 비싼 학비를 대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나는 행운아다. 이 주어진 행운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앞만 보고 나가자. 그리고 결과를 기다리자. 길이 열릴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일상을 어지럽히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결혼 문제였다. 대학 입학해서부터 그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남학생이었다. 장래가 보장된 의과 대학생이다. 잘 생겼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완벽한 남편감이었다. 여자 대학생들과의 그룹 미팅에서 그가 점 찍기만 하면 좋은 여학생을 그의 파트너로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여학생들이 접근해 올 때 마다 어머니와 누나를 생각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일생을 떠올렸다.
여자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도록 나는 만들어 졌는가? 나는 어머니나 누나의 인생을 거덜 낸 아버지의 비정상적인 유전자를 물려 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잘라 낼 수 없었다. 거기다 그의 집안 내력이 실질적인 문제가 되었다. 상대가 그를 사랑하고 그를 인생의 반려로 결정한다 하드라도 이루어 질 수 있는 꿈이 아니었다. 월북한 아버지,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사형된 어머니, 연좌제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본인에게 딸을 하락할 부모는 없었다. 그 생각만 하면 여학생들과 가까워질 수 없었다. 여성과의 사귐은 그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택도 없는 일이었다.
승균은 시골서부터 알고 지내던 소녀가 있었다. 집안 어른끼리도 가까웠다. 장래가 결정된 한 학년 아래 소녀가 서울로 공부하러 왔다. 그들은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그러나 철우의 곁에 짝이 없다는 것이 늘 거북했다. 승균의 애인이 끊임없이 여자 친구들을 소개했지만 철우와 오래 사귀는 여자가 없었다. 철우는 누구에게나 하듯 겉으로 부드럽고 너그러웠지만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축복받은 일생이 보장된 승균은 언제나 철우가 걱정이었다.
“니 결혼 안 할 끼가?”
“해야지. 안하고 살 수 있나?”
“그라모 상대를 잡고 슬슬 결혼 준비를 해야 할 거 아이가?”
“앞날이 창창한데 서두를 거 머 있노?”
“그리 무심하게 있다가 좋은 세월 다 지나 간대이. 니 아나? 금방이다. 청춘이 마냥 계속될 줄 아나?”
“좋은 사람 나타나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철우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과를 끝내고 이 년쯤 지나자 여인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접근해 왔다. 그들은 사 년제 대학생들이고 졸업하기 전에 짝을 잡아 두려 했기 때문이다. 승균은 의과대학 6년이 끝나가는 시절에 약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철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연좌제의 꽉 막힌 벽 속에 갇혀 있었다.
연좌(緣坐)는 범죄인과 친족 관계에 있는 자에게 연대 책임을 지우는 제도이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조선시대에 대명률(大明律)에 따라 통용되었지만 조선시대 후반 폐지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이 터지면서 한국 정부는 사상범, 부역자, 월북 인사 등의 친족에게 연좌제의 족쇄를 씌웠다. 해외 여행이 허용되지 않았고 공무원 임용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이것은 형법상의 자기 책임의 원칙에 반할 뿐만 아니라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기본권과도 상충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북이 대치하고 형제간의 살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이 제도는 관련자들을 물 샐 틈 없는 벽으로 가두어 두고 들 볶았다. 아버지는 철우를 들볶는 자들의 구실이었다. 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철우에게 어떤 짓을 해도 그들은 떳떳했다. 아버지는 철우의 앞길을 막는 강철 같은 벽이었다. 그리운 아버지였다. 지긋지긋한 이름이기도 했다.
예과 이년을 마치고 본과 일학년 오르던 해에 대학가에는 4.19 열풍이 휘몰아쳤다. 학생들은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였고 모이면 3.15와 4.19 무용담이 화제였다. 그러나 그 빛나던 날들도 철우에게는 털끝만 한 추억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길거리에 나서지 않았다. 병원에 남아서 헌혈 받고 부상자들에게 수혈하는 일을 도왔다. 허드레 일이었다. 그는 친구들의 무용담을 열심히 들어주었지만 내세울 어떤 일도 없었다.
철우의 눈에 띄는 여인이 있었다. 명문대 영문과 재학중인 선화라는 학생이었다. 한 학년 아래였다. 어디서나 돋보이는 여인이었다. 그 여인의 대학과 과별 모임이 제일 잦았다. 여학생들이 적극적이었고 철우네 쪽도 잘 호응을 하였다. 선화는 여학생들의 리더였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노래도 잘하고 게임도 잘 이끌었다. 철우는 늘 팔짱을 끼고 뒷줄에 서서 선화의 기특한 행동들을 건너다보기만 했다. 훌륭한 여인이지만 그와는 동떨어진 세상에 사는 사람이었다. 선화는 모든 남학생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철우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남학생들에게 하듯 스스럼없이 철우를 대했다. 철우는 여학생들과 적극적인 교제는 없었지만 모임에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게임의 파트너와 어울리기도 하고 흔한 데이트도 가끔 했지만 한번도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승균이 철우에게 집적거렸다.
“니 선화한테 관심 없나? 정말 남자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여자다.”
“선화 공주님처럼 말이가? 그러자면 서동 왕자님이 있어야 될 거 아이가?”
“니가 서동 왕자 한번 되 삐리라. 니그들 잘 어울릴 것 같다.”
철우는 펄쩍 뛰었다.
“내가? 택도 아이다. 나는 아이다. 전혀 안 맞는다. 더구나 선화 공주님은 내한테는 전혀 관심이 없다.”
승균에게 택도 아니라고 잘라 말한 뒤 철우는 선화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정말 매력이 넘치는 여인이었다. 결혼의 상대로 더 바랄 것이 없는 상대였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택도 아닌 상대였다.
철우가 하듯 선화도 철우를 먼 곳에서 건너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선화의 시선은 철우의 것과 달랐다. 그녀의 눈에 철우는 가공되지 않은 노다지로 다가왔다. 그녀는 속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모임에서 두 사람이 짝이 되었다. 전혀 부담되지 않는 의미없는 짝이었다. 선화가 장난치듯 철우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늘 철우씨와 짝 했으면 좋겠다.”
철우는 건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나도. 선화씨가 내 짝이면 딱 좋겠다.”
선화가 진지해졌다.
“그럼 우리 진짜 짝 하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철우가 쩔쩔매기 시작했다.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선화씨에 비하면 너무 부족한 점이 많다. 택도 아닌 상대다.”
“왜 그런데?”
“모든 것이 그렇다. 나는 모자라는 것이 너무 많다.”
철우는 어물 거리다 그 자리에서 도망을 치고 말았다.
예과 2년을 거치고 본과 2년 올라 가던 해 봄이었다. 의사 국가 시험을 치를 준비를 시작했고 철우도 어느덧 의사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마침 형사 형님이 하숙방에 죽치고 있었다. 한방 식구이기나 하듯 철우는 그를 허물없이 대했다. 그의 방을 뒤집어 놓거나 책갈피를 훑어본 기색은 없었다. 그때쯤 그 형사 형님도 철우와 죽이 맞는 형제가 되어 있었다. 철우가 막 씻고 들어와 앉았을 때였다. 바깥에서 철우를 찾는 기척이 들렸다.
방문을 여니 놀랍게도 선화가 거기 있었다. 선화가 하숙방을 찾아오다니. 그것도 형사 형님이 떡 버티고 앉은 좁은 방에. 철우가 영문을 모르고 쩔쩔매는 동안 선화는 마치 자기 방이기나 하듯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학생증을 꺼내 형사 앞에 내밀었다.
“저는 철우씨 약혼자입니다. 철우씨가 졸업하는 대로 결혼할 계획입니다.”
형사는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짓이냐는 표정으로 철우를 건너다보고 있었고 철우는 전혀 상상도 못한 일에 갈팡질팡이었다. 선화는 철우를 무시하고 또박또박 분위기를 이끌었다.
“이제 이 방은 제가 치울 거예요. 가끔 와서 철우씨와 자고 갈 거예요.”
철우가 하얗게 질렸다. 선화가 지금 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건가 도시 종잡을 수가 없었다. 허우대가 장승 같은 형사는 등을 벽에 기댄 채 선화의 거동을 멀거니 지켜보고 있었다. 선화는 형사를 빤히 건너다보았다. 이쯤 되면 자리를 비키는 것이 도리가 아니냐는 표정이었다. 형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부시럭거리며 일어서더니 밖으로 나갔다.
“철우, 재미 많이 보시게.”
형사의 말에 철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선화가 냉큼 형사의 말을 받았다.
“이방은 이제 제 방이예요. 앞으로는 함부로 흐트러 놓지 마세요.”
형사는 우두커니 서서 선화의 모습을 지켜보더니 스적스적 떠났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 선화는 잘라 말했다.
“이제 저 형사는 다시는 이방에 범접하지 않을 거야.”
철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급작스레 나타난 선화, 그녀의 돌발적인 언동, 범 같은 형사의 이해할 수 없는 순종, 모두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화가 나타난 뒤부터 형사가 떠나기까지 일어난 일들을 밖에서 엿보고 엿들은 하숙집 아주머니는 저녁으로 겸상을 들여왔다. 오랜만에 보는 진수 성찬이었다. 그리고 상머리에 앉았다.
“그래 약혼을 한 거예요?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
그녀는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철우가 그 집에 하숙을 정한지도 너댓 해가 되었다. 철우는 가족 같은 존재가 되어 갔지만 하숙집 주인에게 고맙고도 한편으로 미심쩍은 데가 많은 사람이었다. 제법 비싼 하숙비를 한번도 미룬 일 없이 꼬박꼬박 제때에 내었다. 들어가기가 최고로 어렵다는 대학교의 학생이다. 동산만 한 덩치의 종로 경찰서 사상계 형사가 시도 때도 없이 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함께 딩굴었다. 도대체 정체를 알아 내기 어려운 존재였다. 철우는 하숙집 아주머니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날 철우가 나서서 할 말은 전혀 없었다. 선화가 나섰다.
“여태까지 철우씨 돌보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철우씨는 제가 보살피겠습니다.”
선화는 당돌했다. 밥상을 들여 놓았으면 이제 나가 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머니는 알고 싶은 일이 많이 남았다는 얼굴이었지만 엉덩이를 들었다. 둘만 남자 철우의 밥 시중을 들며 선화가 헤헤거렸다.
“철우씨 깜짝 놀랐지? 내가 음모를 좀 꾸몄어.”
“이기 우찌 된 일이고, 약혼은 머시고, 형사는 또 우찌 된 일이고. 당최 뭐가 뭔지 여엉 머리에 안 들어온다.”
“한국 최고의 수재가 이해 못할 일이 어디 있어. 내가 차근차근 설명할 게.”
저녁을 먹고 양치질하고 손발 씻고 선화는 그 좁은 방이 제방이기라도 한 것처럼 들락거렸다. 도무지 갈 생각이 없었다. 철우의 책상 정리까지 하고 나서 제손으로 이불을 깔았다. 그리고 불을 껐다. 철우는 ‘고만 가라’ 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랐지만 결국 내뱉지 못했다. 그녀가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허겁지겁 어설프게 엉겨 붙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각할 할 사이도 없이 일은 끝났다. 그들은 빨가벗은 채로 꼭 붙어 누웠다. 차츰 선화의 실체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 따뜻한 몸뚱이가 철우에게 밀착되어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그래 왔다는 듯이 상대의 몸을 마치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어루만졌다. 철우의 남성이 다시 무거워졌다. 선화의 여성이 채워졌다. 방이 흔들리고 그들의 숨소리로 동네가 시끄러웠다.
둘은 땀으로 흥건히 젖은 채 서로 끌어안고 있었다. 철우는 무슨 말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도대체 오늘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청천 하늘에 무지개처럼 선화가 나타났다. 스스로 약혼자라 불렀다. 철우의 몸에서 몽달귀신처럼 찰떡 같이 붙어 있던 형사를 떼어내고 하숙방을 제집처럼 차지하더니 겸상을 하여 저녁을 먹고는 이불 깔고 들어 누워 이제 철우를 진실한 남자로 만들어 주었다. 숨을 고르고 한참이 지났다. 결국 철우가 입을 열었다.
“선화 공주님.”
선화는 코맹맹이 소리를 하였다.
“네, 철우 왕자님.”
철우는 풀이 죽었다.
“미안하다.”
그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선화는 철우를 꼭 껴안았다.
“인자 부모님 한테 머라칼끼고?”
“걱정하지마. 다 생각이 있어. 깊이 오래 생각하고 오늘 여기 온 거야.”
“나는 이해가 안된다. 윙크 한번만 하면 잘난 남자들이 줄을 지어 졸졸 따라 올낀데 선화 공주님은 와 내 한테 와서 이 고생을 자초하노?”
“나는 만들어져 있는 것을 가지는 것 보다 내가 만드는 것을 좋아하거든.”
“니 내가 누군지 아나?”
“누군데?”
“아부지가 월북한 빨갱이고 어무이는 보도 연맹 사건으로 사형당했고 나는 연좌제에 묶여서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라 말이다. 이 사회에 섞여 살기 어려운 존재라 말이다.”
“나는 다 알고 있어. 그래서 온 거야.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 하고 결정한 뒤부터 속속들이 알아 보았어. 철우씨 친구들, 기자들, 경찰, 심지어 중앙정보부를 통해 철우씨의 사정을 알아 보았어. 나는 이래 봐도 발이 넓다고. 마당발이야. 철우 왕자님은 진짜 왕자님이지만 왕자님이 되기 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진실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내가 철우 왕자님 곁에서 그 어려움을 함께 풀고 왕자님으로 만들어 드려야 한다. 나 밖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결심한 거야. 오늘 일은 그 첫걸음일 뿐이야.”
“말은 쉽지만 그것이 실천하기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하는 말이가?”
선화는 어른스러웠다.
“세상에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특히 철우씨가 뒤집어쓴 멍에는 철우씨가 저지른 잘못이 아니잖아. 나도 말못하는 고민이 있었다고. 우리 집안의 위대한 할아버지는 나라를 들어 엎은 매국노였대. 나도 요즘 알게 되었어.”
철우는 선화를 격렬하게 껴안았다.
“정말 내 곁에서 내 이 처절한 인생을 함께 받아들이겠다는 거가? 그기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 알고 있나?”
선화가 안겨 들었다.
“나는 철우 왕자님의 수호신이 될 거야. 될 수 있어. 그래서 철우 왕자님을 진짜 왕자님으로 만들어 놓을 거야.”
철우는 다짐을 했다. 그렇다면 나도 선화를 공주님으로 만들어 놓고 말겠다. 나의 여왕님으로 만들어 놓겠다.
“나는 니가 하자는 것이면 뭐든지 다 할께. 맹세한다.”
“아니 철우씨가 원하는 것이면 내가 다 해야지. 나의 왕자님을 위해서.”
“아아, 선화, 나의 영원한 수호신, 나의 여왕. 나의 사랑. 어떤 일이 있어도 선화를 울지 않게 만들께, 절대 울리지 않을께.”
그 뒤 그들은 공개적인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나갈 필요가 없었다. 그들 둘만의 앞날을 꾸렸다. 철우가 본과 3학년이 될 때 선화는 졸업하였다. 그리고 철우의 졸업 준비와 졸업후의 삶을 준비했다. 선화는 철우의 몇 남지 않은 친척들과의 통로를 여는 횃불 든 천사였다. 친척이라지만 남 보다도 서먹한 사이였다. 그런 철우의 친척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철우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남긴 부정적인 기억을 씻어 내는데도 한 몫을 하였다. 선화가 나타난 뒤 종로 경찰서 형사는 더 이상 철우의 하숙방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철우로서는 엄청난 족쇄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부모님 설득하는 것이 선화의 첫번째 문제였다. 완강하던 부모님도 선화의 계획에 늘 그렇듯 결국 끌려왔다. 선화에게는 그런 설득력이 있었다. 철우의 졸업이 가까워 오면서 결혼을 준비했다. 의대 본과 4학년때 의사 국가 시험을 쳤다. 집중을 하지 못하던 철우를 선화는 다그쳤다. 마지막 몇 달 사력을 다해 준비했다. 그 덕이었는지 의사 시험에 순조롭게 합격해서 수련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수련의를 마치면 군의관으로 임관 되는데 철우는 거기서 주저앉았다. 걱정했던 대로 연좌제 때문에 장교가 될 수 없었다. 의무병으로 근무하게 되면 그 기간동안 의사로서의 경력이 주어지지 않았다. 선화가 나섰다. 집안의 모든 연줄을 동원해서 철우를 군 면제자로 만들었다. 대학교 의과 대학 부학장인 삼촌을 통해 바로 의사 생활을 시작하도록 하였다. 전화위복이었다. 동기들 보다 일찍 의사가 된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두어 해 뒤 정식 의사로 임명될 때쯤 그들은 결혼했다. 잘 준비된 한 쌍이었다.
6
선화와의 결혼은 철우에게 하늘이 내린 축복이었다. 늘 가슴을 채우고 있던 불안과 불만이 선화가 곁에 있어서 많이 줄어 들었다. 흔들리던 마음도 진정되었다. 방관자적인 자세가 참여하는 자세로 바뀌었고 부정적이던 마음 한구석도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선화는 어머니 같았고 누나 같았다. 아버지 같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이년 터울로 아이들 셋이 태어났다. 철우는 소아과 개인 병원을 열었다. 병원은 잘 되었다. 철우의 침착함과 겸손한 자세가 손님들을 몰아왔다. 선화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철우를 가다듬고 쓰다듬어 누구보다 돋보이는 모습으로 만들었다.
대학 졸업하고 나서 십여 년이 흘렀다. 삶은 평화로웠고 모든 일은 순조로웠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연좌제의 그늘이었다. 일상 생활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지만 공직과 관련된 업무에서 그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외국 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내 병원이 잘되고 내 가족이 건강하고 내 집이 따뜻하면 그것으로 되었지 공직을 맡는 것, 외국 나가는 것이 무슨 대수냐고 했었다.
70년대중반 국제 소아과 학회의 초청장이 왔다. 가끔 오는 초청장이었지만 좀 달랐다. 대만에서 열린다고 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동경에서 하는 학회 모임도 유럽에서의 학회도 그렇게 마음을 끌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안정된 뒤에 축적되어 온 열망이 터진 것일까, 그는 그 열망을 자제할 수 없었다. 그는 하지 않던 일을 했다. 초청장을 선화에게 보여주었다. 철우의 간절함이 그녀에게 옮겨졌다. 그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 주고 싶었다. 그녀는 초청장을 가지고 장태용 박사와 만났다. 철우와 고등학교 동기이며 그때 법조계에서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판사였다. 청빈한 몸가짐과 뛰어난 법에 대한 이해, 대쪽 같은 판결로 법조계에서 이미 무시하지 못할 젊은 거인이 되었다. 선화는 그를 찾아보고 학회 초청장을 내 밀었다.
“꼭 다녀왔으면 좋겠습니다. 판사님도 아시다시피 철우씨는 연좌제의 질곡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마음속으로 참아내고 있습니다. 너무 오래 참았습니다. 그만큼 마음속으로 골병이 들고 있는 겁니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태용은 씩 웃었다.
“서울 사람도 골병이라 말을 씁니까?”
선화는 자기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남편 따라 가나 봐요.”
태용은 우물쭈물하지 않았다. 바로 직원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금방 서류 한 장이 장 판사에게 전달되었다.
“제가 보증을 서지요. 다녀오게 하십시요. 그것은 박철우 박사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역사가 지어 놓은 사회적인 메듭입니다. 하나씩 풀어 나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언제나 자신 만만하고 밝기만 하던 선화가 얼굴을 발갛게 상기시키더니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했다. 보증을 서 달라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저 법률적으로 헤쳐 나갈 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이었을 뿐인데, 이런 것이 우정이라는 것이구나. 경상도 사나이들의 우정이라는 것이구나. 철우의, 태용의 마음의 깊이이구나.
비행기를 탈때까지 철우는 조심스러웠다. ‘출국 승인’이 떨어졌다. 꿈에도 그리던 것이었다. 그러나 조마조마했다. 비행기를 탈때까지 어느 순간에도 취소될 수 있는 문서였다. 그는 온 세상을 살피며 다녔다. 비행기 탈 때 까지만 참아 다오. 무슨 트집거리가 있더라도 비행기 탈 때 까지만, 비행기가 우리나라 영공을 벗어 날 때 까지만 기다려 다오.
대만까지는 세시간 남짓한 비행이다. 자동차로 대구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이것을 위해 나는 평생을 걸었다. 이것을 위해 생명까지 걸 생각이다. 밖으로 나가보고 싶었다. 나의 나라 밖에서 숨을 쉬어 보고 싶었다. 나의 나라라고. 그래 거기서 태어났지. 손발을 다 묶인 채 우리에 가두어 져 곰처럼 씩씩거리며 그 우리의 바깥으로 나가는 날을 꿈꾸어 왔다. 그렇지 않은 것처럼, 그 우리가 낙원이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살았다. 그 가식과 오욕의 시절, 한 순간도 편한 날이 없었다. 불편하고 죽기보다 껄끄러운 생활을 마치 천국에서의 생활 인 것처럼 위장했었다. 한번도 자신에게 떳떳하거나 진실 된 적이 없었다.
그는 예정된 비행기를 탔고 대만에 무사히 내렸다. 대만에서의 회의에는 예정된 일정에 빠짐없이 따라다녔다. 회의를 시작할 때, 끝날 때, 식사 모임에 참가할 때마다 그는 동행한 회원들과 빠짐없이 필요한 인사를 나누고 열심히 자리를 지켰다. 겉으로 보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회의가 시작되면 일행과 떨어져 외국인 사이에 앉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그의 공부를 하였다. 회의는 뒷전이었다. 어떤 논문이 발표되는지 어떤 토론이 전개되는지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만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와 런던으로 간다. 거기서 숨을 곳을 찾는다. 그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는 대학 다닐 때 영어 공부를 충실히 해 두었다. 일상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대화가 가능했다. 돈도 충분이 숨겨 나왔다. 무조건 도망 가는 것이다. 다시는 그 우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다시는 그 족쇄를 차지 않는다.
내일은 반드시 결행한다. 매일 결심했다. 핫바지 방귀 새듯 공항으로 나가 브리티쉬 에어웨이 비행기를 탄다. 브리티쉬 에어웨이라, 아 얼마나 듣기 좋은 이름인가? 그것을 타는 순간 나는 자유스러워진다. 내 전생애에 걸쳐 나를 묶고 있던 족쇄로부터 풀려나는 것이다. 자유 자유 자유. 원초적으로 내게 주어진 나의 자유를 되찾는 것이다. 나의 실체를 스스로 되찾는 것이다.
그는 가방에 소중하게 모셔 두었던 장박사의 신원 보증서 사본을 꺼내 호텔 방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결코 이루지 못할 것 같던 그의 꿈을 이루어 준 소중한 친구의 귀중한 선물이었다. 그는 서류를 테이블 위에 눌러 폈다.
이것 덕택이다. 이것이 나를 여기에 나오게 하였다. 그리고 영국으로 도망칠 궁리를 하게 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그는 그 종이 조각을 그의 손아귀에 넣어 움켜 쥐었다.
그래 이 종이 조각 하나가 나의 존재, 나의 삶, 내가 가진 모든 것 보다 소중하다는 말인가? 나의 인생이란 것이 고작 이 따위 종이 쪽 한 장보다 쓰잘데가 없었다는 말인가? 그는 종이를 조각조각 찢어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씹어서 그의 내장 속으로 집어넣어 녹여 없애고 싶었다. 이 따위 보잘 것 없는 종이 쪽지가 나의 소중한 삶에 끼어 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이따위 종이는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는 곧 손아귀에 잡혀 있는 구겨진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 놓고 펴기 시작했다. 천천히 정성 들여 펴기 시작했다. 눈물이 흘렀다.
“태용아 고맙다. 내가 어디로 가던 내가 무엇이 되건 태용이 자네는 내 가슴 한복판에 있을 거다.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야. 잊지 않겠다. 저승에 가서라도.”
그러면서 시간은 지나갔다. 내일은 여행사에 간다. 호텔 앞에 브리티쉬 에어웨이 항공사 사무실을 보아 두었다. 영국은 입국 비자가 필요없다. 비행기표만 사면 되는 것이다. 내일은 가서 비행기표를 산다. 내일은 꼭 산다. 그런데 그날이 오면 다시 내일이 있었다. 내일은 꼭 간다. 결심은 하루하루 미루어 졌다.
사흘이 지나면서 아이들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크는 아이들이 아버지 없이 한동안 고생하겠지? 내가 영국에서 자리 잡는 대로 불러 내면 되지. 잠깐 동안 고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선화가 있잖아. 그녀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어. 내가 아이들 돌보는 것보다 훨씬 잘 키울거야. 아 그런데 선화는 어쩌지? 선화에게 한마디 귀뜸이라도 하고 나왔어야 하는데. 그녀가 받을 나에 대한 배신감을 어떻게 메꾸지? 철썩 같이 믿었던 남편에게 배신당한 아내의 심정을 어쩌나? 아니야. 선화는 물러 터진 나보다 백배 강한 여인이야. 그녀는 이겨 낼 수 있어. 그리고 이 어려운 시기가 지나면 나는 그녀에게 백배 짙은 사랑으로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
장박사가 무엇이라고 할까? 그 거룩한 친구.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는 친척들이 친척들 보다 더 가깝다는 승균까지 때로는 철우를 거북한 눈으로 보았다. 그들은 가슴을 열고 그를 끼워주지 않았다. 그래 내가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말하지. 내가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은 결국 그들이 내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기 때문이야. 그런데 태용만은 달랐지. 늘 한결 같았다. 한번도 철우의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오직 그들의 젊음을 이야기했고 그들의 미래를 꿈꾸었다. 친구들 중 가장 성공한 축에 드는 그들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드라도 나에게 신원보증을 하다니. 철우는 신원 보증서를 다시 한자한자 읽었다. 철우의 마음에 깊이 응어리져 있는 탈출 의지를 알고 있으면서 그는 그 서류를 만들어 준 것이다. 이제 막 피어나는 그의 법조인으로서의 장래를 건 것이다. 내가 배신을 하면 태용의 장래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다. 내가 태용을 배신할 배짱이 있는가? 아니야, 그것은 배신이 아니야. 따지고 보면 그도 나를 배척하는 세상 잡것들 중의 하나다. 아니 그 핵심 멤버이다. 나 같은 것 하나 때문에 그의 장래에 흠집이 생길 리 없지. 그는 그걸 알고 있다. 그래서 그 현명한 친구가 모험을 한 것이다.
그럴까? 그럴까? 하루하루 결심과 자책과 자위가 반복되었다. 그래도 괜찮을까? 걱정할 것 없어. 내일은 결행해야 된다. 결행한다. 전혀 걱정할 것 없어. 모든 것은 잘 되도록 되어 있어.
7
내일은 한다. 내일은 반드시 결행한다. 내일은 런던 행 비행기표를 구입하고 대만을 떠난다. 한국으로부터의 탈출, 아니 이 구정물 속 같은 세상으로부터 탈출한다. 내일은 결행한다 결행한다고 거듭 다짐을 했지만 속절없이 하루가 지나고 또 다른 내일을 허송했다. 그러다 보니 귀국하는 날이 다가왔다.
철우는 동행들과 별도로 대만 국제공항으로 나가서 탑승수속을 마치고 비행기 좌석에 앉아 안전 벨트를 채웠다. 주변에는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비행기가 이륙했다. 설익은 감을 씹은 듯 입안이 온통 텁텁했다. 귀국하는 것이다. 잘난 대만 구경하자고 그 조바심을 쳤단 말인가? 내게 신세계는 그저 허망한 신기루였던가? 그래 그게 신기루일 뿐이었던가? 그는 금방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래 런던이 아니라 집으로 가는구나. 그것도 나쁠 것은 없지. 그것이 운명이라면. 거기 내 가족이 있잖아.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왔다.
“여러분을 모시고 갈 기장입니다. 이 비행기는 세시간 뒤 평양 순안 국제 비행장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이건 또 뭐야. 평양 비행장이라니. 아니 그럼 이 비행기는 북한 비행기란 말이잖아. 어떻게 이런 비행기를 타게 되었지? 평양이라니, 생뚱맞게 평양이라니. 그러나 그는 늘 그렇듯 마음을 갈아 앉혔다. 애라 모르겠다. 평양이면 어때? 그렇다면 평양으로나 가보자. 런던이나 평양이나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래 아버지도 만나 보자. 살아 있다면 형도 만나보자. 그리고 그 다음일은 그때 생각하자. 그러나 그의 마음은 금방 바뀌었다. 평양이라고, 거긴 왜 가? 아버지는 형은 왜 만나? 내가 왜 그들을 만나? 내가 왜 그 똥물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그는 그의 주머니에 든 묵직한 쇠뭉치를 손에 움켜 쥐었다. 권총이다. 그는 안전 벨트를 풀고 일어나 뚜벅뚜벅 조종실로 걸어갔다. 승객 좌석과 구분을 지은 커튼을 열자 건장한 남자 승무원이 조종석 입구에서 그를 막아섰다. 남대문 경찰서 형사를 닮은 친구였다. 철우는 그가 손쓸 틈을 주지 않고 권총의 손잡이로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피를 쏟으며 그가 쓰러지자 철우는 조종실의 문을 열었다. 권총을 조종사의 머리에 갖다 대었다.
“서울로 기수를 돌려라.”
철우의 당당한 모습에 조종사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순순히 기수를 서울로 돌렸다. 그 다음은 뒤죽박죽이었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는데 철우가 아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아니 남대문 경찰서 형사도 선화도 언뜻언뜻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게 전혀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는 서울에 도착해서 영웅이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처럼 외면당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런던으로 도망치려고 한 내 속마음을 모두 눈치 챈 것일까? 그래도 나는 북한 비행기를 납치해서 서울로 끌고 왔는데. 북한으로 가지 않고 남한으로 왔는데.
그는 공항에서 수갑을 찬 채로 유치장에 갇혔고 재판에 끌려 다녔다. 재판이 끝나는 날 그의 눈에는 두꺼운 안대가 씌워졌고 그의 두 손과 팔 그리고 두발은 밧줄로 묶였다. 그의 입에는 자갈이 물려졌다. 그리고 자동차에 태워서 한참을 달린 뒤 배에 실리는 기색이었다. 가끔씩 들리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종합하면 그는 예인선이 끄는 작은 보트에 실려 북한으로 간다는 것이다. 국제 비행협정에 따라 납치범인 철우는 비행기의 원적지인 북한에 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배에 흔들리며 끝없이 끌려갔다. 그는 멀미를 하며 딩굴었다. 그의 처지를 누구에게든 하소연하고자 했지만 그가 들을 수 있는 반응은 한결 같은 파도 소리뿐이었다. 그는 청소를 끝낸 걸래처럼 널브러 졌다. 나는 죽는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가운데서 총살을 당한다. 그래 수많은 총알들이 내 몸뚱이에 박히겠지. 그래 그것으로 끝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든 친척들도 우리의 인연은 거기서 끝이다. 나의 삶은 끝난다. 나의 의미 없었던 삶은 그렇게 끝나는 것이다.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 선화가 나타났다. 아아 선화가 있었지. 아이들이 있었지.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선화야 선화야 미안하다. 나는 이렇게 떠난다. 눈물은 끊임없이 넘쳐흘렀다. 내 몸에는 얼마나 많은 눈물이 저장되어 있는가? 얼마나 울어야 이 눈물은 말라 없어질까?
그런데 갑자기 천둥이 치고 거대한 파도가 배를 순식간에 뒤집어 엎었다. 그의 몸은 공중으로 떠 올랐다가 차거운 바다로 떨어졌다. 그는 눈을 번쩍 떴다.
길고 긴 꿈이었다. 그가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 지며 그의 길고 긴 처참한 꿈은 막을 내렸다. 그의 베개는 눈물로 흥건히 젖었다. 머리맡 시계는 아침 여덟 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늦었다. 귀국하는 날이다. 그는 아침밥도 거르고 부리나케 행장을 수습해서 호텔 프런트로 내려가 체크아웃 수속을 마치고 일행들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결국 귀국을 하는 것이다. 깊이깊이 생각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 가는 수밖에 없었다. 선화에게 돌아 가는 수밖에 없었다. 장박사의 우정에 파묻히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내 삶의 한계였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채워진 족쇄로부터 헤어 날 길은 없었다.
공항 출구에 선화가 아이들을 데리고 환히 웃으면서 서 있었다. 선화를 보자마자 눈물이 나오려 했다. 그러나 철우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 내었다. 이제 참아야 한다. 결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 나는 충분히 강한 사람이다. 나는 그것을 보여 주어야한다.
아이들은 아빠의 손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고 약간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선화는 언제나 재빨랐다.
“아빠가 바쁘셔서 선물을 못 사오셨나 보다. 우리 이번 일요일 백화점에 가서 아빠한테 좋은 선물 사달라고 하자. 너희들이 최고로 갖고 싶은 선물을 사는거야.”
아이들은 깡충깡충 뛰며 좋아했다. 그렇게 철우의 십년 같았던 한주일의 대만 여행은 끝났다. 선화는 풍성한 잠자리를 마련하였다. 철우가 집에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하고도 남을 만큼 따뜻하고 향기로운 잠자리였다. 선화가 입을 열었다.
“공항에서 나오는데 눈이 퉁퉁 부어 있었어. 자칫 못 알아볼 뻔 했잖아.”
철우는 한참 꼼지락거리다가 대답했다.
“나 못 돌아올 뻔했다.”
“왜 무슨 일이 있었어?”
“안 돌아 올려고 했거든.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내가 아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도망쳐 숨어 버릴려고 했지.”
“왜 안 했어?”
철우의 눈물샘이 다시 터지려고 했다.
“선화 때문에, 아이들 때문에 결국 마지막 순간에 멈추었어.”
선화는 몸을 철우에 밀착시키며 속삭였다.
“나는 철우씨가 결행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철우가 헐떡거렸다.
“뭐라꼬? 내가 도망칠 줄 알고 있었다꼬? 내가 느그들을 다 내삐리고 혼자 도망칠 줄 알았다꼬?”
철우의 사투리가 터져 나왔다. 선화가 울고 있었다.
“철우씨의 일생에 처음 다가온 기회였잖아? 철우씨가 마음 편한 곳에 가 있으면, 그런 곳이 세상에 있다면 거기가 천국이지. 거기가 세상의 어느 구석이건 내가 아이들 데리고 천천히 찾아가게 되겠지. 철우씨 있는 곳 내가 못 찾아 낼 줄 알아?”
철우는 선화를 조용히 그러나 따뜻하게 껴안았다.
“선화 내 사랑.”
뜸을 들인 후 선화가 입을 떼었다.
“사십 년, 우리가 산 세월이야. 묻어 버려야 할 시간이었지. 이제 천천히 앞으로 살아갈 사십 년을 꾸며야 되.”
“이번에 나가서 도망칠 궁리만 하다가 도망치면 안된다는 하나님의 꾸중만 듣고온 셈이야. 앞으로 사십 년 선화 말 잘 듣고 편안하게 살꺼다.”
선화가 누가 듣기라도 한다는 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정부에서 연좌제법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나 봐.”
또 하나의 놀라움이었다.
“뭐라꼬. 어디서 들었노?”
“다 알아보는 곳이 있어. 곧 풀린다는 이야기야. 확실한 것 같아.”
“아아, 선화, 나의 천사.”
철우는 으스러지도록 선화를 끌어안았다.
8
“한 사장. 그동안 잘 있었오? 나 태용이요.”
언제나 그렇듯 느긋한 목소리로 장태용 박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81년 4월이었다.
“아니 해가 서쪽에서 뜰라나? 장박사가 내한테 전화를 다 걸고.”
나는 나의 놀라움을 그렇게 표현했다.
“내가 전화도 안 걸고 뜸했다고 너무 나무라지 마소.”
“너무 반가버서 엉뚱한 소리가 나와 삐릿네. 그래 무슨 좋은 일이 있소?”
고향 친구에게는 사투리가 자연스러웠다. 태용은 잠깐 뜸을 들인 후 입을 떼었다.
“철우 말이다. 소식 들었나?”
나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아니 전혀. 왜 무슨 일이 있었소?”
“그래, 철우가 사라졌다. 소아과를 운영하며 잘 나가던 철우가 4월 들어서면서 감쪽같이 사라져 삐맀다.”
“아니 그럴 수가. 가족들은 우짜고?”
“그게 더 수상하다. 가족, 재산 모두 감쪽같이 사라져 삐맀다. 깨끗이 사라진기다. 마치 우주인에게 납치된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래 장박사한테 귀뜸도 안했다 말이가?”
“사라져야 할 일이라면 사라질 방법을 찾았다면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옳은 방법이지. 단지 그 친구가 살고 싶은 곳에서 마음먹은 대로 살 수 있어야 할낀데 그기 걱정이다.”
“정말 철우가 무슨 천형처럼 뒤집어쓰고 있던 그 마음 고생으로부터 벗어 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데.”
“좌우지간 철우가 한 사장 자네에게도 알리지 않았구만. 그렇디면 우리 조용히 있으면서 그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 보세. 머지 않아 연락을 하겠지.”
나는 태용과의 전화를 끊자마자 부리나케 승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나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운을 떼었다.
“철우 이야기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기 무슨 청천하늘에 날벼락이고. 나는 도통 모르겠다. 소아과는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계속 돌보는 홈 닥터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여러 집안과 친척처럼 지내고 있었는데 지금 난리들이 났다. 내 전화에 불이 났다. 내가 마치 철우를 숨겨 놓은 것처럼 되 삐맀다. 철우가 하루 아침에 감쪽같이 사라져 삐맀으니 말이다.”
“그래 니 한테도 귀뜸이 없었나?”
“그랬으모 섭섭치나 않지. 이리 서운 할 수가 없다.”
전화기는 한동안 우리의 숨소리만 전하고 있었다. 승균이 입을 떼었다.
“집히는 데가 있기는 있다. 연좌제 말이다.”
“왜 또 연좌제 타령이가?”
“3월 25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폐지를 선언했잖아. 연좌제가 폐지되자 마자 철우가 연기처럼 사라진기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렇게 감쪽같이 하루 아침에 사라질 수가 있나?”
“이 사람아, 하루 아침이 아이디. 1980년 연좌제 폐지를 헌법에서 합법적 요청으로 규정했잖아. 철우의 입장에서는 그때부터 한국을 떠날 준비를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제. 아니 그 이전부터 인지 모르지. 원래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고 규정하고 있었지. 그런데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배경에서 사상범, 부역자, 월북인사 등의 친족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 된 것이제. 철우의 가슴에 피멍을 들이면서 말이다.”
“걱정이다. 제발 좋은 곳에서 안전하게 살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정말 지가 저지르지 않은 일 때문에 핍박받지 않고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세상에서 기를 펴고 있기를 빌어야제.”
“그리 안되겠나? 철우뿐 아니라 철우의 처가 또 어떤 사람이고. 철우가 인내의 화신이라면 그의 처는 변화와 실천의 여신이라 할 수 있지. 그들을 믿고 기다려보자. 무슨 소식이 있을끼다.”
철우는 누구에게도 그의 거처를 알리지 않았고 한국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첫번째로 들어 낸 것이 1992년 10월 뱅쿠버에서 나를 만난 때였다.
카알 트레비스의 죽음에 넋을 읽고 찾아간 곳에서 철우가 마치 무덤으로부터 걸어 나온 것처럼 나타났던 것이다. 언제나 곁에 있었다는 듯이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서 황폐한 내 마음에 넋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그의 삶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귀국한 뒤 마음 놓고 친구들에게 그의 소식을 널리 알렸다. 사탕장사를 하면서도 넉살 좋게 그것이 한국에서의 의사 생활과 같다고 우기는 것이며 그의 아이들이 음악 교육을 받고 있고 아이들은 한국에 와서 대학 교수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도 전했다. 선화에 대한 소식이 모두들에게 가장 궁금한 일이었다. 내가 조금씩 알아 낸 바에 의하면 뱅쿠버에서의 정착은 선화의 발상이었고 그녀의 계획에 의한 것이다. 그녀의 오빠가 뱅쿠버에서 살고 있었고 친척 몇 명도 캐나다에 이민 와서 잘 정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카나다 이민은 그녀에게 가장 안전한 선택이 되었다. 한국에서 연좌제 폐지가 검토되면서 선화는 캐나다 이민을 준비했고 연좌제가 폐지됨과 동시에 그들은 이민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병원을 정리한 돈으로 캐나다에서 궁색하지 않은 생활을 꾸려 나갔다. 청천 하늘에 날벼락 같이 보일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선화의 오랫동안 착실하게 준비한 작전이었던 것이다. 그 뒤 철우와 친구들 간의 자연스런 교신이 있었다. 장태용 박사나 승균은 당연히 철우의 귀국과 한국에서의 병원 개업을 권유하였지만 철우의 대답은 당연히 단 한마디로 “노” 였다. 그는 뱅쿠버를 가족의 요람으로 그의 파라다이스로 그의 무덤으로 작정하였다.
9
2002년 10월 나는 다시 뱅쿠버에 갔다. 겉으로의 일정은 카알의 10주기 추도식에 참여한다는 것이었지만 십년이 지난 카알의 별세가 수만리 먼 길을 찾아가게 할 만큼 절실한 것은 아니었다. 철우를 보겠다는 속셈이었다. 철우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의 삶을 보고 싶었다. 그동안 변화된 그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의 가족을 보고 싶었다. 캐나다 방문 일정이 잡히면서 철우가 내 마음에 절실한 존재로 박혀 있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시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보고 싶었다.
철우는 제법 큼직한, 나이가 든 미국제 승용차를 공항에 끌고 나왔다. 짐을 챙겨 차에 싣고 느긋하게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빠다 냄새가 폴폴 풍긴다.”
내가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입을 열었다.
“20년이 안 지났나? 빠다 냄새 정도가 아니라 인자 빠다 덩어리가 되어 삐릿다.”
십년 전 했던 이야기가 그대로 반복되었다.
“캔디 가게가 잘 되는 모양이제? 차도 번듯하고 사람도 기름기가 빤질빤질 하네.”
“캔디 가게야 머 잘 될 기 있나? 그래도 그것 덕으로 그동안 먹고 살고 아이들 공부시켰으니 정말 고맙제.”
호텔은 10년전 묵었던 시내 한복판에 있는 호텔이었다. 그는 나를 호텔에 내려 놓고 떠나며 물었다.
“이번에 일정은 우찌 잡았노?”
“내일 10주기 모임이 있고 그것 말고는 특별한 일정이 없다.”
“며칠이나 있을끼고?”
나는 그를 장난스럽게 건너다보았다.
“니하고 지낼끼다. 골프도 치고 카나다 구경도 하고. 니가 가라고 내 쫓을 때까지 있을 끼다.”
“잘 됐다. 모레 골프장 갈 준비해 둘께. 그 다음날 저녁에는 뱅쿠버에 한인 모임이 있다. 거기 니 대학 동창도 있고 옛날 니 직장 동료들도 있어서 니를 아는 사람들이 제법 되더라. 거기 참석하면 재미 있는 일이 많을끼다.”
나는 속으로 기뻤다. 거기에 내가 아는 친구들이 있어서가 아니고 철우가 뱅쿠버에 와서 이제 마음의 문을 열고 교민들과 어울린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추모 집회는 교회에서 시작되어 카알의 묘지에서 끝났다. 묘지에는 생시에 카알과 가까웠던 몇 사람이 모였다. 공원의 끝자락에 있는 묘지는 10년전 모습 그대로였고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시월의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는 갔고 우리는 남았다. 카알은 거기서 십년 전처럼 세상을 내다보고 있었다.
호텔에 돌아와 조용한 저녁을 마치고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방에 돌아오자 나는 카알을 잊었다. 다음날 철우와의 골프를 생각하며 깊이 잠들었다.
“사람들은 뱅쿠버를 북미의 런던이라 칸다. 날씨 예측이 안되는게 뱅쿠버 일기의 특징이다. 늘 구름이 끼고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린다. 그러나 뱅쿠버를 런던에 비교하는 것은 런던 사람들 이야기고 뱅쿠버 사람들은 자기들 동네가 런던과 비교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성규 니가 런던에 살아 봤으니 알겠지만 여기 삶의 질은 런던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끝내준다. 물가가 싸지 공기가 깨끗하지 무엇보다 골프 치는데 전혀 비용이 안든다. 골프는 언제나 칠 수 있는 필수 운동이다. 그러니 특히 나이든 사람에게 뱅쿠버는 천국일 수밖에 없다.”
철우는 골프장 가는 길에 차를 천천히 몰아 느긋하게 뱅쿠버의 이곳저곳을 내게 보여주었다.
“뱅쿠버란 내한테는 일거리를 많이 베풀어 주는 사업장이었다. 늘 즐겁고 바쁘게 다녔다. 그러다가 갑자기 카알이 세상을 떠나면서 여기는 나에게 삭막한 시베리아 같은 곳이 되었다. 그럴 때 철우 니가 나타났다. 인자 뱅쿠버는 내 한테 뭐가 뭔지 완전히 알 수 없는 땅이 되어 삐릿다.”
내가 대답했다.
“니한테는 그럴끼다. 그러나 지내보면 도시 자체가 나름대로 매력을 갖춘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될끼다. 여기는 북위 49도에 있다. 시베리아의 끝 블라디보스토크가 43도니까 여기가 얼마나 북극하고 가까운지 알겠제? 그러나 해양성 기후 덕에 겨울에도 평균 영상 10도 정도의 푸근한 날씨를 보이는 거다. 그러니 일년 내 골프 칠 수 있는 곳이지. 어떤 사람들은 여기 와서 골프 한번 치고는 반해 삐리 가지고 이민을 결심했다 안 카나.”
그저 골프 타령이었다. 그의 자동차는 느긋하게 골프장에 도착했다.
바쁠 것이 없었다. 아침 열 시쯤 도착해서 골프장에서 아침을 먹었다. 주문받으러 온 여인에게 나는 계란 프라이와 토스트를 주문하며 똑 부러지게 ‘해뜨는 쪽을 위로(Sunny side up)’ 라고 일렀다. 철우는 싱긋이 웃었다.
“여게 사람들도 그렇게 멋지게 계란 프라이를 주문하지 않는다. 국제 신사가 역시 다르구나.”
나는 씩 웃었다.
“자네 남을 칭찬하는 버릇은 여전 하구나. 그저 잘난 척 해본 거다.”
골프장에서는 우리 앞뒤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둘 만을 위해 만들어진 놀이터 같았다.
“이리 손님이 없어 가지고 골프장 유지가 되나?”
“여게는 돈 벌자고 골프장을 만드는 기 아이다. 동네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 걸어 다닐 수 있게 열어 놓은 공원이다. 또 비도 적당히 오고 햇볕도 충분해서 잔디 관리하는데 그리 비용도 안 든다.”
키 큰 침엽수들이 코스와 코스 사이에 보기 좋게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아름답구나. 자연속의 자연이다.”
“자연속의 자연이라니?”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의 있는 그대로를 살린, 자연과 인생이 함께 하는 공간 아이가?”
“잘 봤다. 그래서 여기 골프장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거다.”
진행이 느리다고 타박하는 사람도 없고 점수를 적자고 다그치는 사람도 없었다. 치고 싶은 대로 치고, 걷고 싶은 대로 걷고, 보고 싶은 대로 주변을 둘러보며 노닥거렸다. 그는 골프를 잘 쳤다. 골프채를 휘두르는데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몸의 리듬으로 쉽게 쉽게 볼을 날렸다. 그런데도 볼은 똑바로 멀리 갔다.
“여러 친구들과 골프를 쳐 보았지만 니 맹키로 잘 치는 사람은 처음 본다. 그라고 보니 니가 못하는기 머 있노? 노래 모 노래, 공부 모 공부, 인자는 골프까지. 니는 골프를 참 신선처럼 치는구나.”
“신선 골프라. 그래 오래 치다 보니 채를 휘두르는데 힘이 들어가지 않고 골프채가 마치 신체의 일부 인 것처럼 되고 공도 말 잘 듣는 머슴처럼 날라 간다. 인생도 안 그렇나? 하자고 악을 쓰모 안되고, 순리대로 설렁설렁 하모 세상은 쉽게 뜻대로 안 굴러가드나?”
“골프란 아니 인생이란 니처럼 다루어야 하는 거라고 나는 지금 내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그는 쓸쓸하게 대답했다.
“별거 아이다. 외톨이로 숨어서 지내는 도망자의 은신술이라 칼까? 그런 거 아니겠나?”
골프장은 널찍했고 장애물도 함정도 적었다. 편안했다. 절반쯤 돌았을 때 내 볼이 흉측스런 시퍼런 새똥에 박혔다. 철우는 준비해 온 걸레로 익숙하게 똥을 닦은 뒤 내 볼을 깨끗한 잔디위에 내려 놓았다.
“이 잔디밭은 말이다, 사람들만 즐기라고 만들어 놓은 기 아이다. 먼 길을 날라온 기러기에게 이 툭 터진 잔디 밭은 편안한 안식처가 된다. 수만리 하늘길을 날아와 지친 날개를 접고 하늘이 주신 이 안식처에서 쉬는 거다. 그라고 근처의 바다에서 물고기들을 잡아 묵고 아무데나 똥을 갈긴다. 그러니 사람들은 불평할 수 없지. 아니 불평해서는 안되지. 이곳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고 모든 지상의 창조물이 함께 나누어야 할 휴식 공간이니까.”
한번 당하고 나니까 기러기와 기러기의 똥이 자주 눈에 띄었다. 골프공에 기러기의 똥이 묻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철우가 마련한 걸레로 닦고는 계속했다.
“니 코요테라고 들어 봤나?”
“인디안 추장 이름이가?”
“아이다. 짐승 이름이다. 늑대같이 생겼지만 늑대보다 좀 작은 야생 짐승이다. 그 놈들도 여기 같이 산다. 그 놈들은 이 근처 바위 속 동굴에서 산다 칸다. 밤에 슬슬 페어웨이에 나타나서 쉬고 있는 기러기들을 습격한다는 거야. 아침에 나와보면 코요테들에 먹힌 기러기의 털이나 뼈들이 풀밭에 흐트러져 있다. 그 놈들은 여기서는 귀족 대접을 받는다. 음산한 늑대 울음과 달리 그 놈들의 울음은 낭만적인 ‘밤의 세레나데’로 불린다. 그 놈들은 가끔 가축들을 습격하는 탓으로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살육을 당하지만 멀리 도망치지 않고 늘 인간들 가까이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왔다. 이제는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퍼져 거의 멸종된 늑대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는 골프를 치며 집요하게 코요테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의 끈질긴 설명 탓에 나는 골프 치는 동안 코요테가 내내 내 주변을 어슬렁거렸던 같은 기분이었다.
“샤워 할래?”
나는 금방 대답했다.
“아니.”
골프장 18홀을 돌았지만 땀이 나지 않았다. 더구나 서양 골프장에는 한국 같은 푸짐한 목욕탕이 없다. 썰렁한 샤우워가 있을 뿐이다. 써늘한 물을 뒤집어쓴 뒤 쌀쌀한 대기에 나설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호텔에 가서 뜨거운 물로 목욕할란다.”
“그러면 여기서 맥주나 한잔하고 우리집으로 가자.”
나는 하루 종일 그 말을 기다렸다. 그의 사는 모습을 보고 선화와 만나고 싶었다. 철우가 집에 가자는 말을 하지 않으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던 참이다.
“조오치.”
“좋아하는 맥주가 있나? 니가 골라 봐라.”
“물론 칼스버그.”
“와?”
“내 죽은 친구가 덴마크 사람이잖아. 그 사람들은 어딜 가나 그들의 억양으로 ‘배쉬트 비어 인더 월드 (Best beer in the world)’를 찾지. 못 알아들으면 소리를 빽 지르는거야. 칼스버그 (Carlsberg). 그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맥주에 대해서는 철저한 국수주의자들이야.”
“놀랠 것도 없다. 나도 칼스버그를 제일 좋아한다. 그 삽삽한 맛은 정말 세계 제일이지.”
우리는 칼스버그를 천천히 마셨다. 안주는 ‘피쉬 앤드 칩스(Fish and chips), 생선 튀김이 감자 튀김과 함께 나왔다.
“이거 무슨 생선이고?”
“송어 아이가. 여기 강에서 많이 잡힌다 카드라.”
“우째 맛이 기가 막힌다 했다. 영국 골프장에서도 최고의 맥주 안주는 송어 튀김이다. 골프장 안을 흐르는 냇물에서 잡은 팔뚝만한 송어를 툭툭 잘라 튀겨서 내놓는 기다. 그 맛은 진짜 일품이다.”
“여게도 마찬가지다. 송어를 최고로 친다. 값도 헐타.”
우리는 감자는 제쳐 놓고 송어 튀김에 빠졌다. 살은 깊고 부드럽고 고소했다. 점심을 거른 늦은 오후의 간식으로 더 없이 알맞은 메뉴였다.
“니 옛날에 잘 부르던 슈벨트의 ‘송어’나 한번 불렀삐라.”
“참말로 부를까?”
그는 정말 부를 기세였다. 클럽에 있던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나는 호들갑을 떨고 말리는 시늉을 했다. 오후도 늦어 지고 있었다.
“나는 뱅쿠버가 참 좋다.”
맥주가 뱃속으로 들어가자 철우의 뱅쿠버 예찬은 계속되었다.
“뱅쿠버에 내 뼈를 묻기로 정한 것은 신의 한수였던 것 같다.”
“멋이 그리 좋노?”
“내 고향 같다. 내가 새로 태어난 곳이다. 주위에 있는 모든 낯선 사람들이 동족인 것 같다. 내 몸과 마음이 이곳의 바람과 물에 딱 맞게 만들어 진 것 같다.”
나는 그의 균형을 잃은 뱅쿠버 예찬이 듣기 싫어 졌다.
“말도 안된다. 고향이라면 마산 아이가. 니가 뼈와 몸 그리고 정신까지 받은 곳이 마산 말고 또 어데 있노? 또 마산 친구들은 우찌되노? 우찌 뱅쿠버를 니 고향이 라 칼수 있노?”
“물론 다르다. 이곳이 가진 풍토 여기 사는 사람들이 가진 생각들은 마산하고는 다르다. 모든 면에서 다르다. 그런데 그 다른 것이 지금 내 한테는 딱 맞는다.”
그는 강변했다. 나의 머리에도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고향 고향 하는데, 니가 이곳을 고향이라 강변할수록 고향은 여기가 아니고 마산이다 라고 우기는 것으로 내한테는 들린다. 니가 아무리 아니라 해도 ‘피 속을 흐르는 내 근본은 내 속 알맹이는 마산에 있다, 영혼을 나눌 친구들은 모두 마산에 있다’ 이리 강변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 들리나? 니 한테 그리 들렸다면 내 숨겨진 마음을 니 한테 들킨 셈이 된다. 나도 와 그리움이 없었겠노? 그러나 나의 과거와 그에 얽힌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내 몸은 오그라든다. 거기로부터 헤어 나오고 싶은 거다. 그래 내가 여기가 고향이라고 할 때마다 ‘내 고향 마산’ 이라는 울림이 되돌아오는 거는 사실이다. 뱅쿠버의 이 기후는 마산과 너무 닮았다. 뱅쿠버의 개인주의적인,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는 생활은 어쩌면 꿈에도 잊히지 않는 내 고향 친구들에 대한 살가운 그리움의 역설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래 내 한테 보여주는 니 얼굴 그것은 그리움이다. 온통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다. 니가 여기서 만족하고 있다고 큰소리 치는 것만큼 고향을 고향 친구들을 못 견디게 그리워하고 있다고 외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천천히 동의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우리 나이도 인자 환갑이 넘었잖아? 모두 모이자. 같이 살자.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이래 먼 곳에 떨어져서 외톨이로 사노? 니가 사랑하는 친구들, 니를 그리워하는 친구들과 인자 함께 모여 살자. 니 아나? 외로움이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가장 큰 범인이라는 것을. 니가 의학적으로 더 잘 알겠지만 그 스트레스가 사람을 병들게 하고 늙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주범아이가?”
그는 점점 차분해져갔다.
“안다. 하모, 다 안다. 그러나 나는 안된다. 이래 니를 볼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더는 안 바란다.”
“와. 멋 때문에 안된다는 것고?”
내 목소리가 좀 높았던 것 같다. 클럽 하우스에서 맥주를 마시던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모였다.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철우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내가 이 땅에 발을 들여 놓은 날 나의 몸과 피와 뼈는 몽땅 용광로에 들어가 녹아서 완전히 다른 틀에 맞춰 새로 태어났다. 그 순간 나는 과거와 단절되었다. 나는 보상받을 과거가 없을 뿐 아니라 내가 과거에 진 빚도 소멸되었다. 나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할 사람도 나에게 고통을 줄 사람도 다 없어졌다.”
나는 거칠게 그를 몰아 부쳤다.
“그기 말이나 되는 소리가? 니가 마치 이 신세계를 창조하기나 한 것처럼, 이 신세계의 바닷가 조개 껍데기에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큰소리 치고 있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다. 니가 여기서 누리고 있는 여유있는 삶부터 따져 보자. 이것이 신세계가 준 것이라고? 택도 아이다. 그건 몽땅 고향으로부터 가지고 온 거다. 그러고도 고향과 관계없는 인생이라고 우기면 니는 진짜 어리광을 부리는 철부지 밖에 아무것도 아이다.”
철우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성규야, 니 내캉 싸움 할라고 이 먼 길을 왔나?” ‘
“그래 진짜 한판 붙어 볼라꼬 작심하고 왔다. 껍데기를 활짝 벗어 버리고 뜨거운 속마음으로 한판 뜨자.”
나는 곧 목소리를 낮추었다.
“물론 아이다. 내가 와 니하고 싸우노? 니가 느끼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 가까운 사람들에게 끼친 미안한 감정을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니가 남에게 고통을 준기 뭐 있노? 니가 헤꼬지 하자고 다른 사람을 괴롭혔나? 아이다. 전적으로 이 세상이 니한테 그런 고통을 앵겼던 거다. 니는 다 이겨 내었다. 세상이 바뀌었다. 인자 니도 그런 자의식에서 해방될 때가 되었다. 보상 받아야 된다. 인자 마산 와서 편한 마음으로 함께 살 때가 됐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반복했다.
“아이다. 아이다. 나는 안된다. 나는 이대로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그 순간이 지나가면 다시 기화가 오지 않는다는 듯이 격하게 그의 아픈 곳을 헤집었다.
“니가 여기서 하는 일이 머꼬? 캔디에 목 메 달고 사는 것이 니 인생이라고?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 말아라. 니 고귀한 인생은 그리 허송하라고 주어진 기 아이라 말이다. 특히 니처럼 많은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죄악이다. 마산이 답이다. 돌아가자. 마산으로 가자.”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던 철우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니 말대로 캔디 가게가 내 인생의 전부 일수는 없지. 나도 발버둥을 쳐 왔다. 내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꾸준히 한일이 있다. 나는 매일 밤 자료를 모으고 글을 써 왔다. 아부지, 어무이, 내 가족 그리고 우리 민족의 참혹한 역사를 되돌아보는 작업이다. 상처를 아물게 하고 증오를 사랑으로 바꾸는, 헤어진 사람들과 다시 만나 보듬는 방법을 생각해 왔다. 사실 나는 그 작업을 통해서 모든 사람과 화해했다. 나와 끈질긴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과의 원한을 풀었다. 나는 이미 용서했고 용서받았다.”
나는 울컥했다.
“그랬구나. 그랬겠지. 니는 결코 인생을 허송할 사람이 아이다. 인자 일겠다. 자네의 그 편안한 얼굴은 참고 인내하는 지어낸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이겨낸 부처님의 해탈한 모습이다. 내가 어리석었다. 니가 인생을 부질없이 소진하고 있었다는 내 생각은 정말 말도 안돼는 것이었구나.”
“별거 아이고 단지 내가 누구이고 나의 실체가 무엇인지 혼자 궁리해 보았을 뿐이다.”
“그건 진짜 잘 읽힐 대하 소설이 되겠다. 출판 준비를 해야겠다.”
그는 손사래를 쳤다.
“아이다. 남에게 보일 생각은 전혀 없다. 혼자 정리해서 내 가슴에 담아 무덤까지 가지고 갈 생각이다.”
그는 나의 귀향 권유를 그렇게 완강하게 거부했다.
10
“집사람이 교회 간 모양이다.”
철우는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뱅쿠버 교외의 그의 집은 넓었다. 이층집인데 방이 여덟 개나 된다고 했다.
“자제분들은 분가했나?”
집이 너무 조용해서 내가 물었다.
“다 한국 가 있다. 고등학교를 여기서 졸업하고 대학은 모두 한국서 다니고 있다.”
“아니 남들은 한국서 고등학교 나오고 미국서 대학한다고 아둥바둥하는데 니그 집은 완전히 까꾸로 아이가?”
“우리집은 좀 그렇다. 아이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했고 나도 그기 좋을 것 같다고 동의했다.”
“참말로 이상한 집안이네. 아부지는 카나다가 좋다고 고집을 피우고 나와 있는데 아이들은 한국이 좋다고 돌아 가고. 무슨 집안이 이렇노?”
그는 씨익 웃었다.
“우리집은 좀 그렇다. 그 비정상이 우리집의 정상이다.”
그는 화제를 바꾸었다.
“우리 집사람이 집을 고를 때 내가 언젠가 병원을 개업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넉넉하게 자리를 잡은 거 같다. 집이 도심으로부터 떨어져 있지만 숲 속에 이만큼 넓고 편한 저택 구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철우는 아래층 북쪽으로 향한 구석 방문을 열었다. 나는 오싹했다. 그 음습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등을 켜며 말했다.
“놀래지 마라. 여기가 내 아지트다.”
방은 짐승의 사진으로 덮여 있었다. 개 같기도 하고 늑대 같기도 한 코요테라고 했다. 한 장도 같은 모습이 없었다. 코요테가 한장 한장 다른 모습으로 거기 모여 있었다. 우리가 방에 들어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화가 들어섰다.
“또 이방이야?”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고는 그 미소가 더욱 밝아졌다. 철우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의자에 앉혔다.
“나의 여왕님이시다.”
나는 영국 여왕에게나 하듯 허리를 깊이 숙이고 그녀의 손등에 내 입술을 얹었다. 진심에서 우러난 존경과 사랑의 표시였다. 그녀는 영국 여왕이기라도 하듯 스스럼없이 나의 경의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작은 탁자를 가운데 두고 둘러 앉았다.
“나는 때때로 코요테와 함께 사는 꿈을 꾼다. 나는 전생이 코요테였던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에게 쫓겨 다니면서도 사람 곁을 떠나지 못하는.”
선화가 철우의 편을 들었다.
“그렇게 쫓기면서도 코요테는 이 대륙에 퍼져 나갔잖아요. 늑대들이 멸종되어 가는 동안 코요테는 번성해서 늑대의 자리를 완전히 채워 놓았어요.”
내가 심드렁하게 끼어들었다.
“마치 한 쌍의 코요테 같구만.”
“맞다. 우리는 코요테처럼 살고 있다. 이집은 사람들로부터 격리된 우리만의 안락한 동굴이다.”
선화는 정색을 하고 반박했다.
“이제 코요테 이야기 그만해요. 우리를 어떻게 야행성 짐승과 비교를 해요? 결코 비교해서는 안될 대상이예요.”
철우가 우물거리며 떼를 썼다.
“코요테 만한 동물이 어디 있노? 코요테는 최소한 평생 짝을 바꾸지 않고 살 잖아. 밤마다 사랑의 세레나데를 주고받으면서.”
그녀는 철우의 어깨를 쥐어 박은 뒤 내게로 향했다.
“철우씨가 요즈음 코요테 사진을 떼어 내기 시작했어요. 듬성듬성 하잖아요? 전에는 온 벽에 온갖 모습의 코요테 사진으로 도배를 해서 빈틈이 없었어요.”
부부의 대화가 듣기 좋았다. 두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선화의 태생적인 밝음과 솔직함, 철우의 유연함과 지어낸 듯한 어눌함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다음날 철우가 교민들의 모임에 가자고 했지만 나는 저녁 비행기를 탔다. 철우에게서 보고 싶은 것을 다 보았다. 더 이상 뱅쿠버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귀국한 뒤 우리는 편지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그는 흔한 이메일을 쓰지 않고 또박또박 손으로 쓴 편지를 우편으로 보내왔다. 철우의 편지에 가끔 사진도 들어 있었다. 그의 생활에는 큰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누구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세상으로 그는 그의 주변을 만들어 가겠다는 끈질긴 고집을 보였다. 그러나 철우 자신도 모르는 변화가 편지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의 사진에 뱅쿠버의 교민들 모습이 자주 나타났고 골프를 함께 치는 사람들의 숫자도 많아지고 다양해졌다.
그의 편지는 때로는 일방적인 일기 형식이기도 했고 때로는 살갑게 나누는 대화 형식이기도 했다. 코로나 역병이 시작된 뒤 삼년 동안 철우에게서 온 편지들을 모아 보았다.
2020년 3월에 카나다 정부는 코로나 역병에 대한 비상 사태를 선포했다. 골프장도 폐쇄되었다. 한동안 집에 박혀서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아야겠다. 역병은 급격하게 번지고 있다. 정부와 사회단체들이 발버둥을 치고 있지만 이 역병에 맥을 못추고 있다. 벌써 반년이 지났다. 내가 팔장을 끼고 이 어려운 세상을 건너다 보고만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집사람이 캐나다 오면서 품었던 꿈이 현실이 되고 있네. 진실로 하고 싶었던 일, 꼭 해야 할 일을 손에 잡았네. 집을 개조해서 코로나 역병에 맞서 요양원을 열자는 계획을 세웠네. 집에 있는 방들을 개조하고 병원에 가기 어려운 노인들, 주로 아시아 혈통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계획하고 있지. 골프를 치는 대신 큰 운동거리를 얻은 셈이네. 몸을 탄탄하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리라 예상하네. 집을 개조하는 것은 집사람이 맡고 나는 정부 허가를 받는 일에 주력했지. 캐나다는 의료법이 엄격해서 외국의 의사면허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네. 그러나 시술하는 데는 관대해서 코로나 예방 주사를 약방에서도 맞을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거든. 내가 관련 공무원한테 가서 내 옛날 한국의 의사 경력을 이야기하고 우리집 구조를 설명하자 요양원 설립허가가 쉽게 나왔다네. 거기다 그들로부터 적극적인 도움을 받게 되었네. 자원봉사 간호원도 세명이나 배정 되었다네. 사실 의사 부족 현상은 카나다가 안고 있는 큰 문제 중에 하나 거든. 그런 시점에서 의사가 자진해서 나타났으니 그들도 반가웠을 수 밖에. 이 역병이 기저 질환이 있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에 요양원으로서 그들을 위해 갖추어야 할 것을 모두 갖추려 한다네. 특히 면역력을 높이는 환경을 만들고 환자들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시설을 준비하고 있네.
개조된 집의 사진에서 보았겠지만 현관에 요양원의 이름이 붙었네. ‘코요테의 동굴’. 그 이름을 붙이는데 집사람의 통 큰 양보가 있었지. 집사람은 나의 지금 모습을 아주 자랑스러워 한다네. 내 얼굴에서 빛이 흘러 넘친다고 추켜 세우고 있네.
시작할 때 걱정이 와 없었겠노. 우선 괜히 안하던 짓을 해가지고 아픈 사람들 더 아프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보다 나 자신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남 생각하기 전에 내가 먼저 감염되면 우짜나. 우리 가족이 감염이 되면 우짜노 하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시작하고 나니 별 것 아니더라. 집사람의 철저한 준비로 그런 걱정이 싹 날라갔다. 요양원 환자들의 체온을 재고 감염 여부를 검사하고 감염된 환자들 돌보고 하는 것이 마치 매일 해왔던 일처럼 스스럼없게 되었다. 왜 이 일을 일찍 시작하지 않았나 하고 후회까지 하고 있다. 하루 열두시간 어떤 때는 그보다 더 일을 한다. 갑작스럽게 증상이 악화되는 환자가 있을 때는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고. 그러나 환후가 회복된 나이든 환자가 미소 지으며 불쑥 던지는 땡큐 한마디에 나의 피로가 녹아 든다. 이 세상이 이토록 따뜻한 곳이구나 느낀다.
요양원을 개원한지 어언 일년이 지났다. 모든 것은 다 제자리를 잡았다. 심지어 방호복까지도 내게는 일상적인 의복이 되었다. 방호복이 주는 제일 큰 스트레스는 갑갑함이며 상대와의 직접적인 소통의 단절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얼굴을 맞댄 대화보다 방호복을 통한 소통이 훨씬 간절하고 인간적이라는 것을 느낀다. 일상으로부터 차단된 사람들이다. 외롭고 쓸쓸한 소통이 절실한 영혼들이다. 얼굴을 맞대었을 때 열리지 않던 내 마음이 방호복 안에서 활짝 열리는 것을 느낀다. 더운 날 방호복속에서 땀도 엄청나게 흘렸다. 평생 흘린 땀보다 많이 흘렸다. 이 나이에 땀띠를 달고 살았다. 그러나 이 생활이 일상이 되면서 방호복 벗었을 때 오히려 거북 해진다. 집사람도 “매일 공짜로 사우나 한다”며 농을 친다. 나보다 몇배나 고된 일을 해내는 집사람이 느긋하니 나도 느긋할 수밖에 없다. 땀을 흘리고 잠을 못 자며 스트레스에 싸인 나를 돌보는 것도 집사람 몫이다. 집사람의 보살핌 덕으로 체중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체력도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집 사람없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나? 살면서 한번도 고맙다는 말을 못했지만 집사람이 없었으면 나는 무엇이 되었을까? 내 인생, 장가 한번 잘 갔제? 마누라 자랑하면 팔불출이라 켔제? 그래 나는 원래 팔불출이다. 그리 생겨 묵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이 역병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깜깜한 터널에 희망의 빛은 한 올도 없다. 그런데 괴로우면서도 이 역병이 끝났을 때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엉뚱한 걱정도 한다. 나는 지금의 극한적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느님이 내리신 이 성스러운 일에 선택받은 것이 괴롭기만 한 일인가 하는 질문이다. 나의 죄와 빚을 땀으로 씻어 내리도록 허용하여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 내게 필요한 만큼 체력을 주시고 무엇보다 충분한 시간을 주셨다. 내가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였다는 것을 확인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는 죽지 않을 만큼 열심히 일했다. 밤과 낮이 없었다. 우리 요양원에서 드디어 완치되어 퇴원한 환자가 있었다. 무덤에 들었다가 되살아 난 사람을 맞아들이는 것처럼 가족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생명의 환희를 나와 함께 나누었다. 죽어 나간 사람은 아직 한사람도 없다. 앞으로도 결코 없을 거다.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
22년 말 선화에게서 한 줄 짜리 이메일이 들어왔다.
“박철우의 고귀한 영혼 귀천, 코로나 감염 후유증.”
하루 뒤 철우의 편지를 받았다. 한달 전에 쓴 편지였다.
인자 팔십네살의 나이에 나도 사람 구실을 했다고 자네에게 보고 할 수 있게 되었네. 코로나는 잡혔다. 카나다 정부는 코로나 사태의 종식을 선언했다. 우리 요양원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떠났다. 나의 동굴에서 코요테 사진을 모조리 떼 내었다. 이제 코요테들도 그들의 동굴로 돌아갔다. 내가 마지막으로 불태웠던 육신과 영혼도 이제 고요한 나만의 안식처로 돌아왔다. 이 넓고 휑뎅그렁하던 집이 옛 친구들로 북적거린다. 이집 한가운데 있는 방을 성규 자네 방으로 정했다. 태용이 방도 있고 승균이 방도 있다. 이 집은 마산 갯내음과 내 소중한 친구들의 체온으로 채워졌다. 나는 이제 친구들에 쌓여 지내고 있다. 아아 조용하다. 참으로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