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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0일
전현주
남편이 설거지를 한다. 그는 오늘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미역국을 끓이고, 마트에서 사 온 동그랑땡과 손수 만든 샐러드로 내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한참 동안 주방을 어지럽히며 공들인 것에 비해 식탁은 초라했다. 그래도 나는 어린아이처럼 재잘거리며 맛있게 음식을 비워냈다. 매년 남편이 장만해주는 어설픈 생일상을 내가 굳이 마다하지 않는 까닭은 생일에 관련된 슬픈 기억 때문이다. 나는 음력 2월 30일에 태어났다.
내가 생일을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날짜가 정말 있느냐고 묻는다. 컴퓨터나 휴대폰도 2월의 음력일은 29일로 끝이나 있으니 당연한 질문이다. 몇 년에 한 번 생일이 돌아오는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도 있다. 더러는 무슨 기막힌 사연이라도 있으면 말 좀 해 보라는 듯 나를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저 2월 30일이라는 해괴한 날짜가 마침 내가 나던 해에 있었고, 하필 그 날 내가 태어났을 뿐이라고 하면 슬쩍 실망하는 기색이다. 있다 없다 하는 날짜를 생일로 둔 나는 그럴 때마다 마치 불행한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풀이 죽었다.
어릴 때는 주워온 아이라고 놀림을 많이 받았다. 부모님을 닮지 않은 외모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별난 생일 탓으로 돌리며 남모르게 고민했다. 해가 바뀌면 부모님은 새 달력에 한 해의 여러 행사들을 기록하셨다. 아버지는 그 해 음력 2월에 30일이 없으면“이런, 올 해는 둘째 생일이 없구나.”하시며 2월의 끝 날이나 3월 초하루 칸에 내 생일을 적으셨다. 생일이 없다는 말은 나를 항상 울적하게 만들었다.
고모는 내 고향이 베트남이라고 했다. 그 증거로 커다란 바나나 나무 앞에서 찍은 서너 살 무렵의 사진을 내밀었다. 흑백사진 속에서 반바지만 입은 여자아이가 웃고 있었다. 막내 삼촌은 내 친부모님이 한강다리 밑에 살고 계시다고 했다. 당장 보여 줄 수도 있다면서 손바닥으로 양쪽 귀를 눌러 잡고 높이 들어올렸다. 삼촌과 내가 옥신각신 실랑이를 할 때면 엄마와 아버지는 건성으로 말리는 시늉을 하면서 웃으셨는데 나는 그런 부모님의 모습이 영 수상쩍어 보였다.
학년 초에 새로 사귄 친구들과 생일에 대해 얘기 할 때가 가장 난감했다.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는 엉겁결에 3월 28일 이라는 가짜 생일을 만들어 낸 적도 있었다. 그 날이 생일이 되기 위해선 내가 먼저 그 날을 진짜 생일이라고 믿어야 했다. 가짜 생일의 가장 큰 단점은 아무리 축하를 받아도 기쁘지 않다는 것이다. 하고많은 날 중에서 왜 꼭 태어난 날이어야 특별한 것일까. 머리로는 진짜든 가짜든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해도 마음은 점점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만 느껴져 후회가 되었다.
1년에 한 번 생일이라며 미역국을 먹는 날이 있기는 있었다. 엄마는 음력 2월 16일인 오빠 생일 한 보름쯤 뒤에 갑자기 생각난 듯 허겁지겁 딸의 생일을 챙겨주곤 하셨다. 미역국 말고 특별히 맛있는 것을 얻어먹지는 못했던 것 같다. 따로 축하를 받은 기억도 없다. 가족들로서도 늘 제멋대로인 내 생일을 함께 기뻐해 주기가 당최 긴가민가했었던 모양이다. 다만 장손인 오빠만을 끔찍이 생각하시던 할머니가 그 날 만큼은 학교에 가는 나를 불러 세워 용돈을 주셨다.
버려진 아기가 생존이 가능하도록 만든 베이비 박스라는 것이 있다. 섭씨 36도로 온도가 유지되는 상자에 아기를 뉘이면 건물 내부에 벨이 울리고, 담당자가 나와서 아기를 데리고 들어가 보호하는 장치다.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지만 아무 곳에나 놓아둔 아기가 저체온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소중한 아기의 생명을 구하자는 취지로 생겨났다고 한다. 베이비 박스에는 아무런 조건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감시 카메라도 아기만을 비추게 되어 있다. 단 하나‘아기의 출생일을 꼭 적어주세요’라는 문구만이 붙어있을 뿐이다.
버려지는 아기에게도 생일은 필요하다. 출생신고와 예방 접종 등에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생일은‘내가 이곳에 있다’는 좌표인지 모른다. 허공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은 아무런 장치 없이 제 무게를 견디며 그 자리를 지킨다. 한자리에 붙박인 채 비바람과 눈보라를 버텨낸 나무들은 속살에 새겨 놓은 테로 전부를 기억하면서도 의연하게 침묵한다. 그러나 무시로 자신의 존재를 잊고 헤매는 우리 인간들은 일 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자기의 자리를 다시 확인 시켜 줄 기준점이 필요한 모양이다.
문득 검색창에 음력 2월 30일이라는 내 좌표를 쳐 보았다. 우선 지금까지 몇 번이나 진짜 생일이 있었는지가 제일 궁금했다. 결과는 의외였다. 뜬금없이 찾아오던 생일은 10번이 채 안 될 것이라는 짐작과 달리 49번 중에 28번이나 되었다. 나는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 분명하다. 달력에서 쫓겨난 그믐날처럼 내 운명도 그렇게 캄캄할 것이라고 넘겨짚었었다.
내 고향 베트남의 바나나 나무는 오래전에 살던 집 마당에 있던 파초로 밝혀졌다. 사진 속의 내가 꽃고무신을 신고 있었던 것을 진즉 알아챘더라면 그렇게까지 쓸쓸해하지는 않았을 텐데…….
내 결혼 날짜가 잡히자 할머니는 손녀 사윗감에게 음력 2월에 30일이 있든 없든 생일을 잘 챙겨 줄 것을 따로 부탁 하셨다고 한다. 이제 내 생일은 무조건 음력 2월의 마지막 날이다. 비록 그중 절반이 가짜라 해도 지금은 다 괜찮다. 일일이 칸을 세어 보지 않아도 쉽게 자리를 찾을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일까. 나로 인해 생겨난 좌표의 점들과 내 점 사이에 인력이 작용하여 서로 길을 잃지 않도록 끌어당겨 주는 것일까. 그렇지만 5년 만에 찾아온 올 해의 진짜 생일이 반가운 것은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수상소감
전현주
어느 해 여름, 밤낚시를 하다가 아름다운 빛을 내며 떨어지는 유성을 보았습니다. 평소 유난히 느린 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리는 별똥별을 향해 소원을 비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정신없이 소원을 빌고 난 후에 깨달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는지……. 이상하게도 그날부터 행복해졌습니다. 간절한 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만으로도 하루하루가 선물이었습니다.
글 어머니 반숙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은 한결같은 열정과 애정으로 ‘멈출 수 없는 이유’와 ‘작가가 지녀야할 향기’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수요일이면 어머니 곁에 모여 앉아 함께 울고 웃으며 공부하는 음성창작교실 문우님들 고맙습니다. 그리고 늘 서로에게 용기와 힘을 주며 자신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준 남편과 세 아이들에게도 사랑을 전합니다.
부끄러운 글을 뽑아주신 ‘월간문학’과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벅찬 기쁨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따뜻한 글을 쓰며 살겠습니다.
심사평
글이 사람이라고 한다면 글을 고르는 일은 사람을 고르는 일과 다르지 않다. 나름대로 조건을 정하여 고르게 되지만 딱히 이것이다 하고 정하기가 망설여지기도 안다. 그래서 이모저모 살펴보게 된다. 우선 문장이 되어야 하고, 주제가 분명하며 생각이 깊고 진솔하여야 한다. 그러나 조건이란 쉬운 것이 아니다. 문장이 다듬어져도 빛이 바래면 제철이 아니고, 빛깔이 신선해도 신맛이 지나치면 아직 이르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전현주의 ‘2월 30’일을 당선작으로 골랐다. 2월 30일은 작가의 음력 생일이다. 가끔 거르는 생일의 소외감으로 우리네 전통 가족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무엇보다 필자 자신의 애환을 구김살 없이 그려내고 있는 점이 명암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문장의 짜임이 견고하고 흐름에 무리가 없으며 표현이 진솔하다. 그만큼 내공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으로 안주한다면 일상이라는 우물 속에 갇히게 된다. 그것을 벗어나는 치열한 노력을 기대한다.
전현주 프로필
2015 월간문학 수필 등단
한국 문인협회 회원, 한국 수필가협회 회원
음성 문인협회 회원, 음성 수필가협회 회원
감시카메라
전현주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다. 책상 위에 책은 펼쳐놓았지만 자꾸 창밖의 풍경으로 눈길이 간다.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것에 시선을 빼앗기는 것일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나 급히 뛰어 길을 건너는 고양이를 쳐다보게 된다.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노인이 폐지를 실은 수레를 힘겹게 끌고 간다. 나는 그가 어린 손자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노인은 집에 돌아가 고단한 몸으로 아이의 저녁을 준비할 것이다. 나는 지금 객관적인 시각으로 이 모든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
이상하다. 사무실에는 분명 혼자뿐인데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내가 설치한 감시카메라다. 그것 역시 내가 움직일 때 반응한다. 나는 당장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이 건물에 있는 사람들을 다 들여다 볼 수가 있다. 물론 그 화면 속에는 나도 있다. 카메라를 설치할 때만 해도 내심 전지전능해질 것을 기대했지만 나 또한 감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무심히 지내다가도 문득 카메라의 존재가 거북해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아주 곤욕스럽다. 그럴 땐 슬금슬금 사각지대로 숨어드는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자외선을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자동차의 유리를 짙게 선팅 했다. 안에서는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데 밖에서는 차 안이 검게만 보일 뿐인지 사람들이 나를 못 본 채 그냥 지나간다. 커다란 감시카메라가 생기고 나니 뜻밖의 쏠쏠한 재미가 생겼다. 차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일삼아 동네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다. 점잖기로 소문난 분이 길 바닥에 거리낌 없이 침을 뱉고는 방귀를 뀌며 지나간다. 삼삼오오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저기에 쓰레기를 던지고, 금슬이 좋다고 자랑하던 부부가 차 옆에 멈춰 서서 한바탕 싸움을 한다. 급기야 이웃집 남자는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더니 후미진 곳으로 들어가 벽을 향해 선다. 이쯤 되면 차라리 고개를 돌려 버려야 한다.
우리는 왜 서로를 감시하게 된 것일까? 나 외에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불안과 걱정이 감시카메라를 만들어 냈다면 자기 자신은 정말 믿어도 되는 것일까? 하긴 나부터도 남의 눈이 미치지 않으니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늘 내가 먼저 하던 인사는 물론이고 차에 타면 안전벨트부터 매던 습관도 어느 틈엔가 사라져 버렸다. 타인의 시선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기에, 의지가 박약한 우리들이 오히려 감시카메라에게 도움을 청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젠 도가 지나쳐 사람이 되레 감시카메라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하는 처지다. 우리의 모든 사생활은 당사자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저장되어 제멋대로 이용되고 있다. 나도 모르게 카메라에 찍히는 숫자가 하루 평균 83회에 이른다지만 도로나 자동차에 설치된 블랙박스까지 합한다면 온 종일 감시카메라에 노출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지 오웰의‘1984’를 읽었던 1988년만 해도 감시세계의 심각성을 크게 실감하지는 못했었다. 그 때는 이미 1984년에서 4년이나 지난 후였는데도 전에 비해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머릿속의 조그마한 공간을 제외하고는 자기만의 세계는 없다고 절규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빅 브라더’의 통제에 맞서 저항하다가 파멸해가는 과정을 허구라고만 믿고 싶었다. 놀랍게도‘1984’는 너무도 가까운 길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감시에 익숙해져 버렸다.
며칠 전 아는 사람이 휴대폰으로 다른 도시에 있는 남의 집을 훔쳐보는 장면을 목격했다. 휴대폰의 버튼을 이용해 그 집에 설치된 카메라의 렌즈를 상하좌우로 움직여서는 집안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액정화면 속의 방과 거실은 아이들의 장난감과 옷가지 등으로 온통 어질러져 있었다. 그 사람은“다 나갔나? 아무도 없네?”하고 일상인 듯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였다. 그녀는 아이 둘을 돌봄이 에게 맡기고 출근해야 하는 딸의 부탁으로 멀리서나마 외 손주들을 수시로 살펴봐주는 친정엄마였던 것이다. 감시카메라의 또 다른 이름, 그것은 사랑이었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폐쇄회로 텔레비전의 화면을 되돌려 결정적인 장면을 다시 찾아 볼 수가 있다. 어쩌면 그 능력은 태초부터 신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 일이 안타깝고 슬픈 사고였다면 냉정하게 반복 재생되는 화면 앞에서 가족들은 억장이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방심하면 안 된다. 대부분의 감시카메라는 기록을 따로 보관해놓지 않으면 저장용량에 따라 녹화된 순서대로 삭제되어 버린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기록들이 정말 그렇게 쉽게 사라져 버릴까? 위급한 소리를 감지하여 알려주는 인공지능카메라까지 출시가 됐다지만 세상에서 가장 성능이 우수한 감시카메라는 여전히 가슴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각자의 양심에 녹화된다. 양심에는 한 사람의 일생이 모조리 저장된다. 그것은 용량이 방대하여 순차로 화면이 지워지는 일도 없고, 만질 수도 다시 꺼내 볼 수도 없어 기록을 조작하거나 삭제하기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미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감각이 무뎌져 감시카메라 앞에서 잘못을 저지를 때조차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니 허울만 찍어 대는 그깟 기계 따위에 더는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지금 나를 지켜보고 있는 카메라가 자꾸 거슬린다면 조용히 내면을 들여다보자. 나로 인해 마음이 아픈 사람이 있는지, 그래서 미안하거나 부끄러운지를 살펴보자.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나와 지금을 살고 있는 내가 서로 아무것도 감출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만약 스스로 돌아보아 떳떳하지 못하거든 마음속에 있는 감시카메라를 의식해야만 한다. 나의 전 생애가 녹화된 양심카메라의 재생버튼을 내 손으로 직접 눌러야 하는 순간이 불시에 닥쳐 올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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