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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뿐인 세계를 위한 윤리
이 강연에서 나는 산업화된 사회가 그 나머지의 세계에 관련하여 범한 두 가지의 중대한 윤리적 실패로 본 것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인류 발생학적 기후 변화의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전 지구적 빈곤의 문제에 관한 이러한 국가들의 대응이다. 이것들이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라 할지라도, 이들 모두는 우리의 도덕 공동체들의 경계들을 그리는 방법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국가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우리 지구의 전체 인구들을 포함하는 경계들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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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인간 활동들이 우리 지구의 기후를 변화시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어떠한 심각한 논쟁도 하지 않는다. 기후 변화는 세계의 모든 부분에 대해 나쁜 것이지는 않다. 그것은 러시아와 캐나다 북쪽 동토를 더욱 살기에 좋고 생산적이게 만들어 줄 것이다. 하지만 세계 수십억의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불규칙적인 강우 방식에 의해 그들의 삶이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즉 건조 지역을 사막으로 바꾸고, 방글라데시와 이집트 같은 나라들에서 수천만 명의 가난한 노동자들의 안식처인 비옥하지만 저지대인 델타 지역을 침수시키는 해수면의 상승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지구 온난화는 더 많은 산불을 일으키고, 허리케인은 현재 그 영향권에 해당하는 적도에서 멀리 있는 도시를 강타하고, 열대의 질병은 그 영향권을 넘어 확산되고, 더욱 따뜻해진 기온에 적응할 수 없는 종들이 멸종하고, 빙하가 줄어들고 극지의 얼음층이 녹으며, 해수면이 높아져 해안가 지역을 침수시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더욱 나쁜 시나리오는, 얼음층이 녹으면서 온난화를 더욱 가중시키는 거대한 양의 메탄가스를 분출시킬 수 있으며, 이와 더불어 아주 두터운 구름층을 형성하여 태양으로부터 오는 열을 차단하여 지상에서의 생명을 멸종시키는 심각한 빙하기에 빠져들게 한다고 몇몇 과학자들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기후 변화에 대한 대중적 논의는 일반적으로 과학적, 경제적 및 정치적 측면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기후 변화는 윤리적 문제이며,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윤리적 문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지구 온난화가 얼마나 윤리적인 문제인가를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닌 희소 자원을 어떻게 가장 잘 분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희소 자원이란 대기를 말하며,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해로운 방식으로 지구의 기후를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우리의 배기가스를 흡수하는 대기의 능력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대기의 상황을, 중요한 식량 공급원인 물고기를 잡기 위해 호수에 의존하고 있는 200개의 서로 다른 마을에 둘러싸인 호수의 그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 마을들 각각은 호수에 쓰레기를 버리지만, 호수에 버려진 쓰레기의 양은 마을마다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그 총량은 꾸준히 증가하게 되고, 만약 오물의 양이 감소하지 않는다면, 호수의 생태계는 변화될 것이며, 상당한 양의 혹은 거의 모든 물고기들이 죽게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견한다.
분명한 것은, 마을들이 호수에 버리는 쓰레기의 적절한 양에 동의할 필요가 있고, 일단 그 정도가 합의된다면, 호수에 버릴 수 있는 쓰레기의 양에 있어서 할당량을 각 마을에 분배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할당량을 분배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한 가지 방법은 어떤 마을이 현재의 문제를 일으켰는지를 묻는 것이다. 만약 역사적으로 어떤 마을이 다른 마을들보다 더 많은 쓰레기를 호수에 버렸다면, 미래를 위해 그 마을에는 가장 적은 할당량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을들은 호수에 쓰레기를 조금 버리거나 전혀 버리지 않는 마을들에 대해 감소된 물고기 수확량으로 인한 손해 배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환경법에서, 이것은 “오염자 부담 polluter pays”의 원칙으로 알려져 있다. 시장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모든 내용이 “내면화”되어져야―즉 생산 원가에 포함되어져야― 한다는 것은 경제 이론의 기본 사항이다. 이것은 만일 어떤 생산자가 어떤 다른 제3자를 해롭게 하는 오염을 방출한다면, 생산자는 오염을 정화하고/혹은 오염에 의해 피해를 입은 자들에게 보상을 하는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가능한 원리는 과거를 무시하고, 모든 마을에 동일하게 쓰레기 처분 할당량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인구 규모에 있어서 마을들이 동일하지 않다면, 이것은 더 큰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는 불공평하게 될 것이다. 보다 공정한 해결은 호수가 처리할 수 있는 쓰레기의 총량을 호수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수로 나누어, 1인당 허용할 수 있는 오염의 양을 구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각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수에 1인 할당량을 곱하게 되면 호수에 버릴 오물의 양에 대한 마을의 할당량이 산출될 것이다. 다른 관련된 요소가 없다면, 공동의 자원을 나누는 자명하게 공정한 방식으로, 여기에 대해서는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들보다 더 강력한 요구를 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적어도 1/4조각의 파이를 원할 만큼 배가 고프지만, 어느 누구도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파이를 가질 권리가 없는 열 명의 사람들이 파이를 나눌 때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규칙이다.
만약 호수를 둘러싼 마을들 사이에 빈부 격차가 크다면, 세 번째로 가능한 원리를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좀 더 큰 희생을 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어떤 사람들은 주장한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그들의 출생, 물려받은 능력들 혹은 그들이 책임질 수 없는 어떤 환경들에 기인한다면 그렇다. 만약 이 원리가 건전하다면, 부유한 마을은 가난한 마을들보다 훨씬 더 엄격한 할당량을 받아들여만 한다.
나는 우리가 지구 온난화에 관련해서 현재 직면하고 있는 것과 같은 환경에서 희소 자원의 배분을 지배하는 것으로 타당하게 주장되어질 수 있는 세 가지 원리들을 밝혔다. 이러한 원리들 가운데서 어떤 것이 적용되어져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규범 윤리학의 논쟁적인 영역 깊숙이 우리를 끌고 간다. 하지만 실천적 조건에서, 그 원리들 사이에서의 선택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덜 적절한 것이다. 왜냐하면 세 가지 모두가 동일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세기 동안, 최초로 산업화된 국가들은 거대한 양의 이산화탄소를 대기 중에 방출하였다. 그 대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지구의 기후에 변화를 주지 않고서 온실 효과 가스를 더 많이 흡수할 수 있는 대기의 능력이 고갈되어버린 원인이다. 오염자 부담의 원칙을 사용한다면, 개발도상국보다는 오히려 선진국들이 지구 온난화 문제를 다뤄야 하는 부담을 현재 져야 한다는 것은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과거를 잊고 파이를 나눌 때 사용한 동일 분배 규칙으로 전환하더라도, 우리는 역시 선진국들이 바로 방출량을 매우 급격하게 줄일 필요가 있는 국가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선진국들은 세계 인구의 1/4에 불과하지만, 세계의 온실 효과 가스 방출의 3/4에 책임이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은 평등한 1인 분담 체계 하에서 가질 수 있는 국가 할당량의 최소한 다섯 배를 사용한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많이 희생해야 한다는 제 3원리로 바꾼다하더라도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 즉 부유하기 때문에 기후 변화를 피하는 부담에 대한 가장 큰 부분을 담당해야만 하는 국가가 바로 선진국들이다.
우리의 배기가스를 흡수하는 대기의 능력에 대한 그들의 공정한 몫 이상으로 사용함으로써, 부유한 국가들이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농부들―강우량이 줄거나 해수면이 상승함으로써 발생한 결과를 누그러뜨릴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황폐화된 미래의 손해를 주고 있다. 재임 초기 G. W. 부시 대통령에게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그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했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는 우리의 경제를 해롭게 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할 사람들은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기후 변화에 관련된 보다 높은 관심에 직면해서, 비록 부시가 오늘날 동일한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미국 우선주의” 철학에서 떠난 것으로 보이는 어떠한 일도 그가 실제로 행한done 것은 없다. 그의 행정부에서 준비된 최근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방출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2002년부터 2012년까지 11%가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제한된 양의 음식을 분배하는데 타당한 공정성의 원리가 온실 효과 가스 방출 상황에 적용될 수 없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이한 공정성의 원리를 제시할 책임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그리고 부유한 국가들이 재앙적인 기후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서도 온실 효과 가스를 흡수할 수 있는 우리 대기의 제한된 능력의 그토록 큰 부분을 사용하는 현재의 관행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타당한 공정성 개념을 나는 알지 못한다.
미국이 교토 의정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을 때, 지구 온난화 문제를 다루는 데로 첫 걸음을 내딛는 부담을 다른 국가들로 하여금 안게 만들었다. 물론 교토 의정서는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지만 그것은 첫 걸음이다.
부유한 국가들의 국민들은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원할 때마다 자동차를 몰고 에어컨을 틀면서 현재의 높은 수준의 안락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높은 수준의 온실 효과 가스 방출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미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알아차리듯, 대부분의 건물들이 겨울에는 지나치게 난방을 하며 여름에는 과도하게 에어컨을 틀어놓는다.―과도하게 낭비되는 에너지 사용이라는 국가적 습관을 보여주는 과도한 증상이다. 에너지 절약에 대해 훨씬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현 상황은 별로 변화가 없다. 지난 여름 뉴욕에서 내가 지구 온난화에 관련된 알 고어의 영화인 [불편한 진실 An Inconvenient Truth]을 보기 위해 어느 따뜻한 저녁에 외출했을 때, 극장은 너무나 추워서 겉옷을 입어야만 했다.
오늘날 몇몇 부유한 국가들은 모든 국가들에 속한 희소 자원을 불공정하게 전유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그 국가들이 어떤 다른 국가들보다 더 큰 요구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약소한 비용이 부과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수억 명의 사람들의 삶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어떤 이들은 미국이 온실 효과 가스 방출을 현재보다 1/5로 삭감한다면―평등한 1인 할당량 원리가 주장한 것처럼 해야만 한다는―상당한 경제적 위기가 오게 될 것이라고, 특히 이러한 일이 말하자면 10년 만에 이루어져야 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것이 모두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그렇게 될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결과들을, 특히 가난하고 특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치를 대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예측 가능한 미래에 미국이 전 지구적인 공정한 1인 할당량에 근접할 정도로 방출을 축소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평등한 1인 할당량이라는 관점이 함축하는 바를 괴롭히는 점은 미국의 현재 입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미국은, 파이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조각을 가질 수 있도록 그 파이를 잘랐을 때, 한 조각 대신 다섯 조각을 가지고 가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남아 있는 파이를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탐욕스러운 사람과 같다. 더욱이 이 탐욕스런 사람은 이미 과식을 한 반면, 파이 한 조각을 원했던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
어쨌든 평등한 해결이 전체 비용을 증가시킬지 모른다는 염려에 대한 분명한 해결이 있다. 교토 의정서는 선진국들에게 그들이 사용할 필요가 없는 온실 효과 가스를 방출하는 권리를 팔도록 이미 허용하고 있다. 개발도상국들은 교토 의정서에 따른 제한 분량의 일 단계에서는 의무적인 할당량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교토 의정서가 평등한 1인 할당량에 근거한다면, 개발도상국은 선진국들과 동일한 규칙에 속하기로 동의함으로써 잃어버릴 것은 없고, 얻는 것은 많게 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양을 팔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도는 십억에 가까운 인구에 비례하는 할당량을 가지게 되겠지만 현재 방출량을 고려해 볼 때 그 할당량의 1/3정도만 필요할 뿐이다. 그래서 육억 명이상의 1인 할당량을 방출할 권리를 세계 시장에 팔 수 있을 것이다. 미국과 다른 선진국들은 그러한 권리의 입찰에 응찰할 것이며, 다른 개발도상국이 제공한 다른 권리들에도 그러할 것이다. 현재 지구적 방출에서 전 지구적 할당량이 주목할 만하게 감소되고 있는 한, 이러한 체계는 모든 국가들에게 방출량을 감소하는 동기를 제공할 것이다.- 선진국들은 다른 국가들로부터 아주 많은 양을 사들일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개발도상국은 자신들의 할당량을 자유롭게 판매하기 위해서이다. 결과적으로 선진국은 판매 가능한 할당량 없이 평등한 1인 할당량에 근거한 체계가 요구하는 방출량에 있어서 급격한 감소와 같은 것을 피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 국가들은 자신들의 부의 일부를 개발도상국에게 양도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양도에는 불공정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진국의 부가 그들이 소유하고 있지 않은 자원을 사용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임대료를 지불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방출 할당량 무역의 지구적 체계를 제도화하는 것은, 온실 효과 가스의 조건에서, 평등한 1인 할당량이 비효율적인 생산에로 나아갈 것이라는 반론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무제약적 방출이라는 현 체계가 미국과 같은 선진국이 자신을 위한 경제적 이익을 얻도록 허용하는 반면, 오염원의 높은 생산성의 이익을 공유하지 않는 제3자에 대해 비용을 부과하고 있다. 방출 할당량 시장과 결합되어 있는 평등한 1인당 권리 체계는, 생산의 실제 비용을 내면화함으로써, 경제적으로 보다 효과적인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체계를 형성하는 것은 현존하고 있는 전 지구적 제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될 것이다. 그것은 각 국가들의 방출량을 측정하여 할당량을 넘어서는 국가들에게 어떤 형식의 제재를 가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도전은 응해져야만 할 것이다. 기후 변화는 전 지구적 문제이며, 효과적인 전 지구적 제도를 요구하지 않는 어떠한 해결책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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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전 지구적 빈곤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이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풍요로운 수준에서 십억 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반면, 하루에 미화 1달러도 채 못 되는 정도의 구매력을 가지고 살아남기 위해 대략 수십억의 다른 사람들이 격렬하게 애쓰는 세계에 살고 있다.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 대부분은 영양부족 상태이며, 안전하게 마실 수 있는 물이나 심지어 가장 기본적인 의료 지원조차 부족하며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수조차 없다. 유엔 아동 기금인 유니세프에 따르면, 천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매년―하루에 삼만 명 정도― 회피 가능한 빈곤과 연결된 이유로 죽어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유한 국가들이 가져야 하는 의무는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매일 1달러만이 아니라 보통 더 많은 달러를 실제 필요한 물건이 아니라 사치품이나 사소한 물품을 사는데 쓰는 부유한 국가들에 거주하는 사람들― 가져야 할 의무는 무엇인가?
지난 6월 투자자인 워렌 버핏은 게이츠 부부 재단(Bill and Melinda Gates Foundation)에 삼백십억 달러를, 그리고 다른 자선 재단에 육십억 달러를 기부하였을 때 그러한 죽음을 감소시키는데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게이츠 부부가 이 재단에 준 거의 삼백억 달러와 함께, 버핏의 기부는 21세기 최초 십년이 새로운 “박애의 황금시대”임을 분명하게 해주었다. 게이츠와 버핏의 기부금은 이제 개발도상국들에서 나타나는 빈곤, 질병 그리고 어린이의 죽음을 감소시키기 위한 활동에 주로 사용될 것이다. 세계 건강 조사 포럼(Global Forum for Health Research)에 따르면, 세계 건강 연구 예산의 10% 정도가 전 지구적 질병 부담의 90%를 일으키는 조건과 싸우는데 쓰인다고 한다. 지금까지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주는 질병은 제약 산업에 어떠한 상업적 이익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약품을 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이츠 재단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는 GAVI(the Global alliance for Vaccines and Immunization)는, 자신들이 개발한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백신 수백만 개의 매입을 보장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GAVI는 또한 현재 있는 백신의 사용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면역력을 갖도록 개발도상국들을 돕고 있다. 구천구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현재까지 추가적으로 접종을 받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GAVI는 거의 백칠 십만 명의 미래의 죽음을 이미 막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규모의 박애는 사실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그것이 어떤 선을 행하는 것인가? 우리는 부자들이 그렇게 많이 기부하였다고 해서 칭찬해야 하는가 아니면 여전히 더 기부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해야 하는가? 그러한 중대한 결정이 소수의 극도로 부유한 개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실은 거북하지 않는가? 그리고 재벌에 속하지 않는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가져야 하는 의무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부자가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면, 그들은 돈을 가질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그들 스스로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의 원인이 되지 않았다면,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 의무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부자가 되는 데에는 수많은 행운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유리한 사회적 환경에서 살고 있을 때에만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며, 그들 스스로가 그러한 환경을 만들지는 않는다. 워렌 버핏은 자신의 부의 상당 부분에 대해 사회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만약 당신이 나를 방글라데시나 페루의 한가운데에 놓아둔다면, 당신은 이 재능이 척박한 땅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는지 보게 될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허버트 사이먼은 “사회 자본”이 미국이나 북서부 유럽과 같은 부유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벌어들이는 것의 최소한 90%에 책임이 있다고 추정하였다. 사이먼에 의하면 사회 자본은 천연 자원뿐만 아니라 공동체 내의 테크놀로지와 조직적인 기술들, 그리고 좋은 정부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것들이 부자가 자신들의 일을 시작할 수 있는 토대이다. 사이먼은 덧붙여서 “도덕적 토대에서 우리는 일률적인 90%의 소득세를 주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사이먼이 무리한 세율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경제성장을 방해하는 영향들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추정은 부자가 그들의 부가 모두 열심히 일한 결과이기 때문에 유지해야 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의 근거를 공격하고 있다. 만약 사이먼이 옳다면, 그들의 주장은 기껏해야 10% 정도만 참일 뿐이다.
어쨌든 우리가 사람들이 벌어들인 모든 돈을 가질 만한 자격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그 돈을 가지고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의 대답은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사치스러운 파티, 개인 비행기, 그리고 비싼 요트에 돈을 사용하거나 혹은 그런 것들을 위해 돈을 변기에 쏟아버릴 권리가 있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예방할 수 있는 질병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동안 그들이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여전히 생각할 수 있다. 현재 방글라데시가 된 지역이 인도주의적 위기에 처해 있었던 때인 삼십 여 년 전에 쓴 논문에서, 얕은 연못가를 거닐던 내가 그 연못에 빠져 익사의 위험에 처한 작은 어린이를 발견하게 된 예를 사용하였다. 비록 우리가 그 어린이가 연못에 빠지는데 원인을 제공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최소한의 불편이나 어려움을 감수하고서 어린이를 구할 수 있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그 밖의 것은 냉정하고 부당하며, 한마디로 말해서 잘못이다. 예를 들어 어린이를 구하는데 있어 우리가 새 신발을 더럽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어린이가 익사하도록 허용하는데 좋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만약에 신발 한 벌 값으로 우리가 한 어린이의 생명을 구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개발도상국의 건강 프로그램에 기여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마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우리의 의무가 이러한 예들이 함축하는 것보다 더 강력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린이가 연못에 빠지도록 어떠한 원인도 제공하지 않은 지나치는 사람들보다 덜 결백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의 풍요로움의 일부가 가난한 사람들을 희생시킴으로써 온 것이라고 토마스 포기는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유럽과 미국이 개발도상국으로부터 농산물을 수입하는 것에 대해서 유지하고 있는 장벽에 대한 통상적인 비판에 근거할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과의 무역이라는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측면도 근거한다. 예를 들어, 그 정부가 어떻게 권력을 장악했던지 간에, 국제적인 기업이 어느 정부로부터도 천연 자원을 사들이도록 기꺼이 거래를 하고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이것은 현 정부를 타도하려고 하는 집단들에게 커다란 재정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성공적인 반역은 그 국가의 석유, 광물 혹은 목재를 매각할 권리를 갖는 것으로 보상받게 된다.
개발도상국들에서 부패한 독재자를 다룸에 있어서, 훔친 상품들을 고의로 사는 사람들보다 국제적인 기업이 도덕적으로 더 나을 것이 없다고 포기는 주장한다.―국제법 및 정치 질서가 기업을 훔친 물품들을 소유하고 있는 범죄자로 여기지 않고 자신들이 구매한 물품들의 법적 소유자로 인정한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말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산업 국가들에게는 이익이 된다. 왜냐하면 이 상황은 우리가 우리의 번영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원자재들을 획득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상황은 자원이 풍부한 개발도상국에게는 재앙이 되는데,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할 부가 쿠데타, 내란 그리고 부패라는 순환으로 이어지며 전체 국민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저주로 빠뜨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이방인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 의무일 뿐 아니라 우리가 야기하였으며 여전히 야기하고 있는 해악에 대해 보상해야 할 의무이다. 우리의 풍요로움이 실제로 그들에게 이롭기 때문에,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상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부유하게 사는 것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며, 부가 조금씩 흘러가서 원조보다 더 효과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업화된 국가에서 부자는 매우 가난한 사람들이 만든 것을 실제로 하나도 사지는 않는다. 경제적 지구화가 이루어진 지난 20여 년 동안, 무역 팽창이 세계의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빈곤으로부터 끌어올리는데 도움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극빈층에게 이익을 주는 데는 실패하였다. 대부분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아래쪽에 살고 있는 극단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이 살 만한 것을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품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산업 토대가 결여되어 있다. 비록 그들이 자신들의 농작물을 항구에 내놓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유럽과 미국의 보조금 때문에 부유한 국가들에게 보조금을 지원받고 있는 생산자들에 비해 낮은 생산 비용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예를 들어 광범위하고 부유한 미국 목화 생산자들과 경쟁하는 서아프리카 목화 생산자들의 경우에서―, 종종 그들이 농산물을 팔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구제책은 사적 박애로부터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나와야만 한다고 합리적으로 주장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원조가 정부를 통해서 나오게 된다면, 지불 능력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나온 기부금과 함께 면세 한계점 이상의 수익이 있는 모든 사람이 무엇인가 기여하게 된다. 게이츠와 버핏이 한 일을 칭찬하는 것만큼, 우리는 수억 명의 사람들의 운명을 두세 명의 사적 시민들의 결정에 매달아 놓는 체계에 의해 거북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선진국에 의해 주어진 외국 발전 원조의 양은 끔찍하게도 부적절한 상태에 있다. 미국은 절대적인 수치에서 최대의 정부 원조 제공자이지만, 총 국내 생산의 비율로 볼 때, 미국은 거의 바닥에 가까운데 외국 원조에 총 국민 소득의 0.22%만을, 즉 국민 소득 백 달러 당 22센트만을 제공하고 있다.(OECD 웹사이트에서 입수할 수 있는 가장 최근의 정보로, 2005년의 상황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총 국민 소득의 0.25%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은 조금 많은 0.28%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기록은 훨씬 더 나쁘다. 2005년 한국의 외국 원조는 총 국민 소득의 0.10% 정도인데, 이는 1%의 1/10로, OECD 개발 원조 위원회 국가들 가운데 가장 낮은 상태이다.(그리스는 OECD개발 원조 위원회 국가들 가운데 최하위이지만, 총 국민 소득의 0.17%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 산업 연합 부회장 조근호가 지난 10월에, “한국의 현 외국 원조는 그 경제력이 세계 12위임을 감안한다면 전혀 충분하지 않다. 해외 원조가 급격하게 증가하지 않는 한, 한국은 국제 위원회의 인색한 구성원으로 여겨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의 원조가 2004년과 2005년 사이에 아주 급격하게―거의 60%에 가깝게― 증가하였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며 그 궤도가 상승세를 지속하기를 사람들은 바랄 것이다.
최근 몇 년에 걸쳐서, UN이 권장한 목표인 총 국민 소득의 0.7%를 초과한 국가들은 스웨덴,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그리고 룩셈부르크였었다. 그 국가들은 모든 다른 국가들에 비해 훨씬 나았지만, 그 국가들조차 소득의 1%가 안 되게 제공했다. 이것은 늘 일어나고 있는 회피 가능한 빈곤과 연결된 죽음을 막을 만큼은 여전히 충분하지 않으며, 더욱이 기부 국가들에 대한 어떤 주목할 만한 어려움도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현재로는 개인 기부금이 전 지구적 빈곤을 구제한다는 주장에 대해, 정부가 이 문제를 처리해 왔다는 주장으로 논박할 수 있는 나라는 이 세계에서 단 하나도 없다.
원조에는 항상 비판이 뒤따랐다. 신중하게 계획되고 지성적으로 방향잡한 사적 박애라면, 원조가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한 최상의 답변이 될 지도 모른다. 비정부기구(NGOs)는 외교적 고려사항들이나 UN에서 투표를 좌지우지하려는 욕구에 의해 구속을 받지 않기 때문에, 부패하거나 낭비하는 정부 다루기를 더 쉽게 피할 수 있다. 그들은 직접 현장에 나가서, 지역 마을들 및 민간 기구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 물론 어떤 대규모의 인간의 계획과 마찬가지로, 몇몇 원조는 비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원조가 정말로 반생산적이지 않다면,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인 원조조차 부자가 사치품을 사는 것보다 인간의 복지를 증진시키는데 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부자는―단지 부유한 국가만이 아니라 부유한 개인들이― 제공해야만 한다. 그러나 누가 “부자”이며, 또 얼마나 많이 제공해야 하는가? 빌 게이츠는 거의 삼백억 달러를 주었다고 하지만, 오백삼십억 달러를 소유한 채 포브스(Forbes)의 미국인 갑부 목록 맨 위에 그는 올라가 있다. 시애틀 근교에 있는 그의 66,000 제곱 피트의 하이테크가 갖추어진 호반 부동산은 일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재산세는 약 백만 달러이다. 그의 소유물 가운데는 레이세스터 코덱스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남긴 유일한 육필 서적이지만 여전히 개인 소유로 남아있다. 그는 이것을 1994년에 삼천팔십만 달러를 주고 구입하였다. 빌 게이츠는 할 만큼 했는가? 더욱 신랄하게 당신은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게이츠 부부 재단이 웹사이트에서 선언한 것처럼― 모든 생명은 평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이처럼 비싼 집에서 살고 레오나르도 코덱스를 소유하면서 그는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더욱 검소하게 살면서 모은 돈을 그가 이미 기부한 금액에 보탬으로써 구할 수 있는 생명이 더 있지 않는가?
하지만, 게이츠가 제공했던 재산의 비율로 판단해본다면, 그가 세계의 대부분의 다른 극단적인 부자들과 잘 비교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게이츠의 이전 동료이자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공동 설립자인 폴 앨런을 생각해보자. 1983년에 회사를 떠난 앨런은 평생 동안 박애적인 이유로 팔억 달러 이상을 제공하였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대략 그만큼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포브스지는 알렌을 순 가치 백육십억 달러로 다섯 번째로 부유한 미국인으로 목록에 올렸다. 그는 Seattle Seahawks,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즈, 그리고 두 개의 헬리콥터와 60피트짜리 잠수함을 탑재한 413피트짜리 대양 항해용 요트를 소유하고 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전 재산의 5%만을 제공하였다.
앨런이 제공하였던 5%와 게이츠가 기부하였던 대략 35% 사이에는 도덕적 타당성의 선이 존재하는가? 게이츠는 충분한 기부를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개인적 모범을 보여준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런 예를 보인 한 사람은 젤 크라빈스키이다. 몇 년 전, 40대 중반이었던 크라빈스키는 필라델피아 근처에 있는 젠킨타운에 자신의 소박한 집 한 채,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의 생활비를 치르기에 충분한 정도만 남겨놓은 채, 사천오백만 달러 가치의 부동산을 건강과 관련된 자선 단체들에 기부하였다. 매년 신장 기능이 중지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식을 기다리는 동안 죽어 간다는 것을 알고 난 뒤, 그는 필라델피아 병원과 접촉하여 전혀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신장 하나를 기증하였다. 크라빈스키의 견해에 따르면, 신장 기증을 하지 않으면 죽게 되는 사람에게 신장을 주지 않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타인의 생명 보다 4000배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크라빈스키가 “음란하다”고 생각한 비율이다.
우리와 크라빈스키가 구별되는 것은, 모든 인간의 평등한 가치라는 것을 단지 멋진 수사로서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지침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버핏은 자신의 자녀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만큼 많은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그의 판단으로, 그것은 한 사람에 대해서 “몇 십만 달러 정도”를 의미한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대부분의 미국인이 자녀들에게 남길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이며, 크라빈스키의 기준에 의하면, 그것은 분명히 너무 많다. 그러나 버핏이 자신의 세 자녀들에게 각각 백만 달러씩 남겨 준다고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재산의 99.99% 이상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 정도를 할 때―특히 당신 재산 대부분을 자녀에게 남겨주는 것이 규범인 사회에서―, 그들이 제공할 수도 있었던 수십만 달러 때문에 트집을 잡는 것보다는 그들을 칭찬하는 것이 더 낫다.
프린스턴 대학에 있는 리암 머피와 K. A 아피아와 같은 철학자들은 우리의 의무가 전 지구적 빈곤을 구제하는 부담에 대한 우리의 공정한 몫을 실행하는 정도로 제한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가지도록 하는데 얼마나 필요한지를 계산해서, 이 총액수를 부유한 사람들에게 나눌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기부해야 할 양이 나오게 되며, 이를 제공한다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는 게 될 것이다.
공정한 양은 얼마인가? 그것을 계산하는 하나의 방법은, 2000년 유엔 밀레니엄 선진국 수뇌 회의에 의해 제정된 밀레니엄 발전 목표인 최소한 향후 9년 동안을 우리의 목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때 역사상 최대의 세계 지도자 모임에서 연대하여 다음의 일련의 목표들을 2015년까지 실행하기로 서약하였다.
● (1일 미화 1달러 상당의 물품 구매력보다 적은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규정된) 극단적 빈곤 상태에 있는 세계 인구의 비율을 절반으로 줄일 것.
● 굶주림의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비율을 절반으로 줄일 것.
● 모든 곳의 어린이들이 초등 교육 전 과정을 이수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
● 교육에 있어 성적 차별을 없앨 것.
● 5세 이하의 어린이들의 사망률 2/3을 줄일 것.
● 임산부 사망률 3/4을 줄일 것.
● H. I. V./AIDS의 확산을 멈추고 줄어들게 하며, 말라리아와 기타 주요 질병들의 감염을 멈추고 줄일 것
● 안전한 식수를 지속적으로 공급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율을 절반으로 줄일 것.
지난 해, 콜롬비아 대학 경제학자인 제프리 삭스가 이끌었던, 유엔 특별팀은 이러한 목적들에 부응하기 위한 1년 예산을 2006년에는 천이백십 억 달러이며, 2015년에는 천팔백구십 억 달러로 증가할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우리가 현존하는 공식적인 개발 원조 약속을 고려했을 때, 이 목적에 부응하기 위해 매년 필요로 하는 부가 예산은 2006년에 겨우 사백팔십억 달러, 그리고 2015년에 칠백사십억 달러이다. 이것은 실제로 매우 약소한 금액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만 최소한 오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납세자들이 14,400명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이는 총 천팔백사십억 달러에 달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1년 소득의 1/3을 제공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도 여전히 최소한 연소득 삼백삼십만 달러가 그들 각자에게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기부금 총액은 삭스가 2006년에 필요하다고 계산했던 추가 원조액보다 더 많은 금액이다.
이제 세계 도처에 있는 매우 부유한 다른 사람들이―비록 앞서 말한 이들만큼 덜 부유하다 하더라도―밀레니엄 개발 선진국 수뇌 회의가 세운 목적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들의 소득의 상당한 부분을 제공할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이백만 달러 이상 오백만 달러 이하를 벌어들이는 사람들은 자신의 수입의 1/4를 제공하고, 백만 달러와 이백만달러사이로 벌어들이는 사람들은 1/5를 제공한다는 등 수입에 비례한 기부율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비율을 사용하되 미국의 소득권 상위 10% 이하의 사람들에게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미국에 사는 부자들은 재정적으로 매우 안락하게 지내면서도 매년 사천억 달러 이상을 기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계산한다. 만약 우리가 이 그림을 전 세계에 걸쳐 있는 부자들을 포함하여 확장한다면, 우리는 이 액수의 두 배를 쉽게 얻을 것이다. 그것은 삭스가 이끌었던 특별팀이 추정했던 것으로, 밀레니엄 개발 목적에 부응하기 위한 궤도에 오르기 위해서 2006년에 필요했던 것의 여섯 배 이상이며, 필요 총액과 기존의 공식적 개발원조 약정액 사이의 차액의 열여섯 배 이상이다.
만약 우리가 전 지구적 빈곤을 제거하는 데 대해 단지 우리의 공정한 몫만을 의무로 진다면, 부담은 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의 전부인가? 공정이 하나의 좋은 것이라는데 우리 모두가 동의하기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역할을 다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더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에, 공정한 몫이라는 견해는 매력적이다. 그렇지만 결국 우리는 그것을 거절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얕은 연못에 빠져 죽어가는 어린이의 문제로 되돌아가보자. 연못에 빠진 작은 아이가 한 명이 아니라 50명이라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그 어린이들과는 무관한 50명의 어른들 사이에 있고, 그 연못 주변 잔디밭에 소풍을 나왔다. 우리는 손쉽게 연못에 들어가서 그 어린이를 구할 수 있으며, 무릎 깊이의 흙탕물 속을 절벅거리며 가는 것이 춥고 불쾌하다는 사실이 아이를 구하지 않는데 대한 정당화가 되지 않는다. “공정한 몫” 이론가들은, 만일 우리가 각각 한 아이를 구한다면 모든 아이들은 구출이 될 것이고, 따라서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한 아이 이상을 구출할 의무를 갖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소풍을 나온 사람들 가운데 절반이 아이를 구하는 것 보다는 그냥 깨끗이 있고 싶어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만일 나머지 절반의 사람들이 오직 한 명의 어린이만을 구하고 나서, 절반의 아이들이 그냥 빠져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춰 버린다면 이는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인가? 자신들의 공정한 몫을 행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정당하게 분노하게 되겠지만, 그들에 대한 우리의 분노는 그들이 어린이를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다. 칭찬과 비난을 중심으로 보자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아주 강하게 비난하는 것이 옳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자신들의 공정한 몫을 행하고 나서 그만 둔 사람들에게 그러한 비난을 보류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은 어린이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때 그 어린이들을 빠져 죽게 했고, 따라서 그것은 잘못이다.
마찬가지로, 현실 세계에서는 충분한 소득을 가진 사람들이 전지구적 빈곤을 구제하기 위한 자신들의 공정한 몫을 수행하지 않을 때 그것은 심각한 도덕적 실패로 간주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공정한 몫으로만 기부를 제한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더 많은 양을 쉽게 기부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의 그들의 몫을 하지 않기 때문에 좀 더 기부함으로써 절망적인 필요에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때, 그들에 대해 어떤 접근을 할 수 있을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사적인 판단으로는, 더 많이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믿어야만 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공정한 몫을 행하면서 그 이상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실제로 비판해야만 하는지의 여부는, 그러한 비판이 그들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게 될 심리학적 영향력에 달려있다. 그리고 이는 또 다시 사회적 관행에도 달려있을 것이다. 만약 다수가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전혀 하지 않는다면, 공정한 몫의 수준보다 높은 기준을 설정하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일이 되어 결국 공정한 몫의 기여를 기꺼이 하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조차도 하지 않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공정한 몫의 수준을 달성한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우리 사회의 기준을 발전시키려면, 우리는 한 번에 한 걸음씩 나아가야만 할 것이다.
30여 년 동안 나는 우리의 지구에서 엄청난 풍요와 생명을 위협하는 빈곤의 공존이 제기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해 읽고, 쓰고 가르쳐왔다. 그런데 미국의 상위 10% 소득자가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를 계산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세계의 부자들이 전지구적 빈곤을 얼마나 쉽게 제거할 수 있는지 혹은 실제로 제거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부자가 상당할 정도로 더 부유하게 되어온 것만큼, 그 일은 지난 30년 동안 훨씬 더 쉽게 되어왔다. 우리의 역량에 비추어 측정했을 때, 밀레니엄 개발 목적들은 부당할 정도로, 놀라울 만큼 약소한 것이다. 만약-현재 우리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우리 스스로 세워야만 하는 목표는 극단적인 빈곤에서 살고 있으며,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들의 비율을 절반으로 줄이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사실상 단 한사람도 그러한 열악한 조건에서 살 필요가 없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치 있는 목표이며, 그것은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김선욱, 윤은주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