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
영국의 식민지에서 각 벗어난 가난한 나라에서 매춘과 가난한환자의 돌봄은
나라님도 하지 못했는네
어느성당에서 빈센시오를 하는 형제가 그당시 물자의 도움보다 정신적인 도움이 더 필요함을 느낀 그는
레지오모임을 시작했으니 그가 바로 더프형제였다
그는 독서를 좋아했으며 성모신심에 젖어 성루도비꼬 마리아 가 쓴 성모영성서적의 영향을 받아서
레지오단원들의 교과서인 핸드북을 만들었습니다
레지오의 영성은
아프리카에 전파한 에델퀸과 남미에 알려준 알폰스램의 도움으로 세계전역에
퍼지게 되었으며
성골롬반수도원이 광주교구를 담당하고 있을때에
수도원사제인 미국인 현 하놀드신부님에 의해 1953년도 목포 신정동성당에 레지오를 도입한다
한국전쟁직후라서
특히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던 전라남도는 봄벼 가을보리를 심어서 근근히 연명을 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원조식량인 옥수수와 가루우유가 들어와서
가난한이들에게 천주교회를 통해서 배포되었으니
이를 주기위해서는 천주교회에 등록되어야 한다고 알려져서
원조물품을 받기위한 소위 나이롱신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선교받는 국가이기에
제가 견진을 받든 1980년대에도 교구장이신 주교님이 일년중
반은 외국에 모금하러 다니셨다고 합니다
주교님은 미국이나 유럽등지에서 지금 지방신부님이 서울에서 올라오셔서 모험하듯이
그나라 천주교회를 다니시면서 모험해 오셔서
관할 교구내 본당과 신학교를 운영하셨다고 하십니다
저희 어릴적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던 것은
수도원마당에서 큰면에다 흑백영사필름을 틀어주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머니는 불교신자이지만 매주와 물비누만은
수녀원에 가셔서 사오시곤 하셨습니다
저는 1990년대에 많은 서울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주말이면
특히 토요일에는 대학로에 갓었지요
대학로 혜화역에 주위에는 한쪽은 서울의대쪽이고 반대쪽은 구서울문리대자리이고 공연장이
많았지요
구물리대자리에서 혜화4거리방면으로 올라가면
동성고등학교와 가톨릭대학이 있습니다
동성고등학교후문에는 혜화성당이 이어지고 혜화성당 뒷문으로
나오면 가톨릭대학교가 나오고 그 뒷쪽에는 사제들이 사는 아파트형태의 사제관이 있었습니다
혜화동4거리로 쭉올라가면 서울에서 보기가 힘든 산길이 나오고
그길은 성균관대학 윗길을 통해 경복궁위시길을 거쳐서 지금은 어느길인지 모르지만
빠져나오면 사직터널로 해서 지금의 부천 가톨릭대학교(구 성신여대)로 교구차로 다녔던 생각이 납니다
혜화동4거리를 낀 허름한 건물 지하에 있는 중국집은
너무 가격이 싸서 다른곳을 가더라도 멀리걸어서라도 그곳에 가서 양껏 먹고 돌아가기도 했지요
그 안 골목길에는 지금은 많이 보편화되었지만
곱창순대와 갖은야채를 불판위에서 볶아먹는 요리가 참으로 유행되었지요
신부님과 젊은 청년들과 함께 갔지요
그때에는 주로 신부님이 돈을 내셨지요
지금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만
그때에는 컴퓨터로 된 성경이 없었나봅니다
천주교신자들 모임인 하늘나라의 회원들이 조금씩 나누어서 성경을 컴퓨터로 작성해서
왜관수도원인가하는 곳에 보내기도 했지요
많이 치는 사람은 창세기를 맡아서 입력했지만 저는 치는 속도가 느려서인지
여호수아기를 쳤던 기억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