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폭에서 시를 읽다(19)
바르셀로나: 호안 미로 미술관, 가우디 건축
김철교(시인, 배재대 명에 교수)
6월 22일(토)
오늘은 카탈루나 지역의 중심도시인 바르셀로나의 예술을 집중탐구하는 날이다. 카탈루나 지역은 현재 스페인의 북동부의 자치지방으로 북쪽으로는 피레네 산맥을 사이로 프랑스와 맞대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은 지중해와 접해 있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펠리페 5세(Felipe V)가 중앙집권의 스페인 제국 전체의 왕이 되었을 때, 1714년 카탈루냐는 고유의 자치권을 빼앗겼다. 20세기에는 자치권을 획득하였으나 1939년 등장한 프랑코 정권에 의해 다시 자치권을 상실하고 카탈루냐어의 공식 사용도 금지 당했다. 1975년 프랑코 총통이 암살되고 1977년 스페인이 민주화가 되자 다시 자치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현재는 카탈루냐 공용어로 스페인어와 함께 이 지방의 독자적인 언어인 카탈루냐어가 통용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와 풍토적인 특징의 영향으로 카탈루냐 지방은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고 있으며 이곳 주민들은 독립 정신과 민족의식이 대단히 강하다.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 지방의 중심도시로, 현재 스페인의 제2의 도시이며 지중해에서 가장 큰 도시다. 지중해가 보이는 완만한 비탈에 자리 잡고 있는 바르셀로나는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하며 미로, 가우디, 달리가 카탈루냐 출신이며, 피카소도 청년시절을 바르셀로나에서 보냈다.
바르셀로나는 FC바르셀로나 축구팀으로 유명한데, 스페인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쌍벽을 이루고 있다. 바르셀로나 현지 여행사 ‘자전거나라’ 가이드에 의하면, FC바르셀로나에는 유소년팀이 있어 어릴 때부터 축구 꿈나무를 기르고 있기 때문에 유럽에서 강팀이 되었다고 한다. 그 F 바르셀로나 유소년팀에는 우리나라 청소년도 세 명이나 축구교육을 받고 있는데, 앞으로 우리나라 축구의 대들보가 될 것이란다. 또한 바르셀로나에도 싸이의 강남스타일 열풍이 불고 있어서, 금년(2013년) 1월 1일에는 광장에서 많은 시민들이 모여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부르면서 새해를 맞이하여 교민들의 가슴이 벅찼다고 한다.
예술과 스포츠는 국력을 알리는데 경제력 못지않게 중요하다. 유럽에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이 2002년 월드컵때였다. 내가 교수들과 유럽여행을 하고 있을 때가 마침 결승전, 준결승전, 4강전이 열리고 있을 때 였는데 가는 곳마다 코리아에서 왔느냐고 묻고는 대 환영을 받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가 준결승까지 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영국공항과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썬그라스를 쓰고 있는 나를 보고 외국인들이 ‘강남스타일’하면서 손을 들어 환영의 표시를 하곤 했다. 그만큼 축구와 강남스타일이 우리나라 이름을 널리 알리는 홍보 효과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어 우리나라가 유럽에 진출하는 발판을 튼튼히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스포츠와 음악이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까.
오전에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지하철과 푸니쿨라를 타고 호안 미로 미술관(Fundacio Joan Miro)에 들렸다. 초현실주의 화가인 호안 미로의 그림에 연방 감탄하다가 미술관 가까이에 있는 몬주익성(Castell de Montjuic)까지 가는 케이블카를 탔다. 지중해와 항구가 한눈아래 보인다. 몬주익성 부근에서 버스를 타고 스페인 마을(Poble Espanyol)에 들려 Fran Daurel 미술관도 둘러보았다. 걸어서 스페인 분수(Font Magica Fountain)에 이르러 보름달 아래 펼쳐지는 화려한 분수 쇼를 감상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1. 호안 미로 미술관
(1)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
‘카탈루냐가 낳은 천재 예술가’이자 ‘동심을 간직한 예술가’라고 칭송받는 미로(1893~1983)는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조각가, 도예가이며 바르셀로나의 예술혼을 작품에 잘 구현시킨 작가이다. 미로는 바르셀로나에서 시계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원하는 장사를 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화가의 길로 나선다.
1907년 바르셀로나의 미술학교에 입학하고, 1912년 이후 갈리 아카데미에서 미술공부를 하였다. 1918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때의 작품에는 야수파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1919년 파리로 나와 피카소와 알게 되었으며,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단순하고 강렬한 화풍을 확립한다. 1924년 브르통, 아라공, 엘뤼아르 등과 친교하면서 초현실주의 예술가의 일원이 된다. 1925년 개최한 제1회 초현실주의 전시회에도 출품하였다. “미로는 초현실주의적 환상에 장식성을 가미한, 유머감각이 넘치는 곡선과 색채에 의한 독자적 화풍을 형성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미로의 예술세계는 고향인 카탈루냐에서의 성장과정과, 초현실주의를 접하게 된 파리에서의 경험이 두 축을 이루면서, 강렬한 색조로 나타낸 상징과 기호로 무의식을 표현했다. 1930년대부터 콜라쥬(Collage: 신문 스크랩, 극장의 포스터, 광고 메시지 등을 작품 속에 활용하는 기법)와 판화 등의 작품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입체작품제작에 관심을 보였다. 미로의 조각은 오브제(object: 추상적인 물체의 모양으로 표현된 작품)와 브론즈(bronze)로 제작한 작품이 주를 이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가족과 함께 파리로부터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작품제작에 몰두하였으며, 주로 바르셀로나와 파리를 왕래하면서 회화, 판화, 조각, 도자기 등 다방면에 관심을 보였다. 1954년에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제전에서 판화대상을 받았다.
(2) 호안 미로 미술관(Fundacio Joan Miro)
바르셀로나 남서쪽에 있는 ‘마술의 산’이라는 이름의 몬주익 언덕(Montjuic)은 가파른 절벽에 위치해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평생 동안 카탈루냐 사람으로 살았던 예술가, 호안 미로가 1975년 사재를 털어 세운 미술관이 있다. 친구였던 건축가 조세프 루이스 세르트(Josep Lluis Sert)에게 의뢰해 설계한 카탈루냐 고딕 양식의 미술관에는 미로가 기증한 그림 200점, 조각과 태피스트리 150점, 스케치 5000점 등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미로가 이 미술관을 세운 목적은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보다 젊은 예술가들의 창조적인 실험 장소로 차세대 예술가를 육성하는 데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기획 전시 공간이 많아서 개인전시회, 현대미술전, 건축전 등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미술관 입구에 있는 조각 <형상(Figure, 1970, 구리, 200 X 120 X 100Cm, 호안 미로 미술관, 바르셀로나)>은, 몸통은 아몬드를 확장해 놓은 것 같은 이상한 모양이며, 머리는 역시 조약돌을 확장해 놓은 것 같다. 짧은 손과 짧은 성기가 단지 사람모습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각 부분들은 동질성이 의심되는 서로 다른 것들이지만, 여러 부분들을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하나의 완성품이 되어 있다. 미로의 설명으로 미루어 보면, 이 작품은 신화 속에서 고대 문명의 성스러운 성격을 부여받은, 신에게 봉헌되는 형상물을 암시하고 있다.
<호안 미술관 앞에 있는 조각 형상 (Figure)> <시 3(Poem III, 1968, 캔버스에 아크릴, 204.7 X 173 Cm,
호안 미로 미술관, 바르셀로나)>
미로는 “나의 작품은 음악에 맞추어진 시(詩)다.”고 말한 바 있다. 시적인 글이 주로 1920년에서 1930년대 그림과 그림 제목에 나타나 있고, 특히 1968년부터 제작한 시(Poem)라는 명시적인 제목이 붙은 세 개의 그림에서 그러한 의도를 잘 읽을 수 있다. 이 세 작품들은 공통요소를 가지고 있으나 색깔과 배열과 선 등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다. <Poem III>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림의 공백은 시가 있는 빈 페이지의 메타포이며, 화가의 시적 언술은 꿈틀대는 붓질, 명확한 시각적 표식, 두 서너 개의 글자를 스텐실(글자나 무늬, 그림 따위의 모양려 낸 후, 그 구멍에 물감을 넣어 그림을 찍어 내는 기법)한 것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미로에게 있어서 시는 분명한 시각적 형태로 제시된다. 사실적인 모습에 개의치 않고, 시는 마음의 상태를 보여 주는 창의적인 그림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새의 애무(The Caress of a Bird), 1967, 청동에 채색, 311 X 111 X 38Cm,
호안 미로 미술관, 바르셀로나)>
1967년에 미로는 그의 조각에 색깔을 칠했다. 각 구성부분은 각기 다른 색깔로 칠해졌다. 그 결과 조각은 더욱 비현실적이 되었고, 거칠고 조악하고 한편으로는 부드럽게도 보인다. 각 구성 부분들은 어떤 특정 대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의도하는 다양한 색채를 나타낼 뿐이다. 이러한 구성은 조각이라기보다 그림에 가깝다. 우리가 호안 미술관의 옥상에서 만날 수 있는 <새의 애무>도, 각기 다른 형태의 색깔 있는 부분들로 이루어졌으며 새가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2. 몬주익성
몬주익성은 바르셀로나에서 지중해와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몬주익은 ‘유대인의 언덕'이라는 의미로 한때 유대인들이 살았던 지역이었으며 1640년 펠리페 4세에 맞섰던 반란군들에 의해 세워진 요새였다. 이후 18세기에 개조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한때는 감옥으로도 사용된 적이 있으나 현재는 군사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카탈루냐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 몬주익성과 아름다운 정원>
몬주익 언덕에는 로마네스크 벽화의 보고인 국립 카탈루냐 미술관(Museu Nacional d’Art de Catalunya)이 있다. 1929년 바르셀로나 박람회 때 전시관으로 건설된 건물을 1934년부터 미술관으로 개조해서, 카탈루냐 지방에 흩어져 있던 프레스코화(fresco: 소석회에 모래를 섞은 모르타르를 벽면에 바르고 수분이 있는 동안 채색하여 완성하는 그림)를 모아 전시하고 있다. 로마네스크 미술은 유럽 중세 미술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고 있다. 중세 때에는 많은 카탈루냐 인들이 문맹이었기 때문에 교육목적으로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들을 교회 벽에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스페인 마을 입구>
3. 스페인 마을과 스페인 광장의 분수쇼
스페인 마을은 1929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만든 곳으로 스페인 각 지방의 특색있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우리나라의 민속촌과 비슷한 곳으로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점 등이 있다. 스페인 전통 건물과 다양한 민속 문화를 만날 수 있으며, 마을 안쪽에 스페인 전통 춤인 플라멩코 공연을 하는 타블라오(Tablao)가 있다. 또한 피카소 그림과 도자기를 많이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는 <Fran Daurel 미술관>도 마을 안에 있다.
스페인 마을 부근 스페인광장은 1929년 만국 박람회를 개최했던 곳이다. 우리나라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금매달을 획득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에는 여러가지 문화 축제가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매년 다양한 국제박람회가 개최되고 있으며 저녁에는 ‘마법의 분수' 공연으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이다. 국립 카탈루냐 미술관 아래 스페인 관장에서 펼쳐지는 분수쇼는 화려한 조명과 함께 음악에 맞춰 분수의 고저가 맞춰지는 매혹적인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겨울시즌(10월~4월)에는 매주 금, 토요일 19:00부터 30분 간격으로 네 번, 여름시즌(5월~9월)에는 매주 목, 금, 토, 일요일 21:00부터 30분 간격으로 5회가 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다행히 보름달이 휘엉청한 스페인 광장에서 분수쇼를 볼 수 있었다.>
6월 23일(일): 가우디의 작품을 찾아서
가우디의 작품을 체계적이고 자세히 감상하기 위해 현지 한국인 여행사가 주관하는 ‘자전거나라 가우디투어’에 참여하였다. 오전 10시 바르셀로나 지하철 까탈루나 역에서 내려 카탈루냐 광장에 있는 카페(Hard Rock Cafe) 앞에 이십여명이 모였다. 일인당 서울 예약금 2만원, 현지 지불 30유로.
까사밀라(Casa Mila), 까사바뜨요(Casa Batllo), 구엘공원(Park Guell), 성 가족성당(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ilia), 구엘저택(Palau Guell), 레알광장(Place Reial)을 둘러 보았다.
스페인이 낳은 탁월한 건축가 가우디(Antoni Gaudí i Cornet, 1852-1926)는 새로운 건축 세계를 구현한 천재 예술가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을 응용한 그의 건축 방식에는 자유로운 선의 흐름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가우디의 대표작인 <성 가족성당>과 <구엘 공원>을 소개한다.
1. 가우디의 출생과 작품세계
1852년에 스페인 레우스에서 태어난 가우디는 1926년 6월 7일 전차에 치여 3일후에 사망하였다. 초라했던 행색 탓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해 너무 늦게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말년에 오직 성당 건축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청이 특별히 배려하여 성자들만 묻힐 수 있는 ‘성 가족 성당’의 지하에 묻혔다.
가우디는 건축공부를 위해 바르셀로나에 가서 시립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직물업계의 거장 구엘 백작이 가우디의 후원자였다. 구엘의 이름이 붙은 별장, 궁전, 공원에 가우디의 재능이 잘 나타나 있다. 가우디는 색채를 중시하여, “건축은 색깔을 거부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형태와 부피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색깔을 사용해야 한다. 색깔은 형태를 보완해주는 동시에 가장 분명하게 생명을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자연미와 조형미의 조화를 색감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2. <성가족 성당>
<성 가족성당: 아직도 공사중이다>
1882년 빌랴르(Frances de Paula Villar)가 네오 고딕 양식으로 건축을 시작한 <성 가족성당>은, 1884년 젊은 나이에 가우디가 이어서 총감독을 맡았다. 가우디는 자신의 재능을 신을 위해 사용한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1926년 6월 사고로 목숨을 잃기 전까지 40여년을 이 성당 건축에만 몰두하였다. 성가족(聖家族)은 아기 예수, 성모마리아, 요셉을 말한다. 가우디의 사망 100주기가 되는 2026년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특히 생의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현장 사무실에서 인부들과 동고동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우디가 건축한 ‘예수의 탄생’: 부드럽고 상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가우디 후대에 건축한 ‘예수의 수난’: 단순한 현대적 감각으로 조각되어 있다.>
<정문쪽에서 좌측에 있는 문에, 각 나라의 언어로 새겨진 ‘주기도문’. 맨 윗부분에 작은 글씨로 우리말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새겨진 문구가 보인다.>
성당에는 '정면'을 의미하는 파사드가 세 개 있는데, 그중 두 개만 완공되었다. 각각의 파사드에는 옥수수를 연상시키는 탑이 각각 4개가 호위병처럼 세워진다. 탑 12개는 12사도를 암시한다. 건물의 중심부에는 예수를 상징하는 170m 높이의 돔이 들어선다. 이와 함께 성모마리아에게 바치는 첨탑과 4대 복음서의 저자에게 봉납되는 탑 4개도 건설된다.
가우디가 감독한 파사드는 예수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탄생의 파사드'뿐이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주 자세하게 ‘예수 탄생’ 이야기를 조각한 부분이 가우디 생전 완성된 부분이다.
한편, 후대에 제작된 부분은 현대식으로 단순하게 ‘예수님 수난’ 이야기가 조각되어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건축되고 있기 때문에, 건축 당시의 시대적 감각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 또한 이 건축물의 특징이다.
지하 예배당은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교회 건축에 관한 도면, 모형, 사진 등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가우디의 묘도 이곳에 마련되어 있다.
3. 구엘 공원(Park Guell)
도심에서 떨어진 조용한 공원으로 가우디의 경제적 후원자였던 카탈루냐 실업가 에우세비 구엘(Eusebi Guell, 1846~1918) 백작이 영국 런던의 정원을 모델 삼아,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에, 이상적인 전원도시를 조성하기 위해 가우디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1900년경 새로운 주거지 60호를 건설해 분양할 계획이었으나, 1914년까지 가우디가 기거하는 집(현재 가우디 박물관으로 사용)을 포함한 건물 두 채와 중앙광장, 타일 벤치 등만 지은 채 중단되었다. 1922년 바르셀로나 시의회가 매입하여 시립 공원을 조성하고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하였다.
<구엘 공원 정문에 있는 건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가우디 작품 중 가장 색상이 화려하다. 입구에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건물이 두 개가 서있는데 하나는 경비실이고 하나는 사무실이다. 외관이 독특해 '과자의 집'이라고도 불린다. 입구에 들어서면 계단 중앙에 화려한 색상으로 모자이크한 2개의 분수대가 있는데, 도롱뇽과 뿔 달린 뱀 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계단 끝 1층 홀은 유리와 세라믹으로 만든 수십개의 도리아식 기둥이 지붕을 받쳐 주고, 천장에는 아름다운 타일 조각을 비롯한 돌 등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든 4개의 태양 모양의 장식이 눈에 띈다. 경사진 통로로 올라가면 2층 중앙 광장이 나온다.
광장에는 형형색색의 부서진 타일을 이용해 뱀처럼 돌아가며 설치된 벤치가 있다. 광장 주위에 길게 둘러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 있으면, 멀리 시가지와 지중해가 시야에 들어온다. 구엘 공원의 특징은 형형색색의 타일 모자이크를 이용해 만든 건축물이 자연과 완벽하게 조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공원안에는 가우디가 살았던 집이 보존되어 있는데, 현재 가우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가우디가 디자인한 가구, 사용했던 침대 등 가우디의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광장 2층에 있는, 모자이크로 된 야외벤치에서 스페인 미녀와 환담>
<광장 1층에서. 기둥과 천정 장식이 화려하다.>
4. 레알 광장(Place Reial)
하루 내내 ‘자전거 나라’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가우디가 세운 대표적인 건축물을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레알 광장에서 일행들과 헤어졌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광장 중앙에는 야자수가 심어져 있어 이국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특히 가우디의 첫 작품인 가로등으로 유명한 곳으로 가우디의 가로등을 보러오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광장 주위에는 식당, 플라멩코장, 째즈바 등이 자리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