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삼례 교조신원운동
전봉준이 단자 전달
공주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일단락지은 동학지도부는 1892년 10월 25일경 전라도 삼례(參禮)에다 동학도회소를 설치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해월은 11월 1일로 날짜를 정하고 10월 27일 밤에 삼례집회를 알리는 경통(敬通)을 발송하였다. “우금 30년이나 지목의 혐의로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두려워 숨어 살아왔으니 이 또한 천운이라 하리라. 이번에 충청감사에게 신원을 호소하고 전라감사에게 의송하게 된 것은 역시 천명이다. 각 포의 여러 접장들은 일제히 이곳에 모이도록 하라. 알고도 오지 않는 사람은 어찌 수도하고 오륜을 익혔다 하겠는가. 명색이 사람으로 선생의 원통함을 풀어줄 줄 모른다면 어찌 금수와 멀다할 것인가?” 하여 강경한 어조로 참석을 촉구하였다.
11월 1일이면 양력 12월 19일이므로 추운 겨울이다. 이런 시기에 수 천명을 동원하자면 양식과 잠자리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이다. 삼례집회에는 공주 때보다도 많은 수 천명의 도인들이 모였고 지도자들도 거의 총동원되었다. 그리고 모든 비용과 숙식은 각 포별로 해결했다.
해월은 이번 집회에도 참석하려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 말에서 떨어져 참석하지 못했다. 66세에 이른 해월은 길을 떠났다가 낙상하여 그후로도 오랫동안 고생했다.
삼례에서도 서인주와 서병학이 전면에 나서서 지휘하였다. 전라도 출신의 쟁쟁한 지도자들도 많이 나섰다. 눈길을 끈 것은 고부접주 전봉준(全琫準)이었다. 그는 남원접주 유태홍과 함께 의송단자를 전라감사에게 제출하였다.
각도 동학유생 의송단자
황공하오나 완영(完營)은 살펴보소서. 신등은 바로 동학의 선비들이다. 동학을 창도, 팔도에 편 것은 지난 경신년(1860)부터이다. 경주 최선생 제우께서 상제의 명교를 받아 유불선 삼도를 합해 하나로 만들어 지성으로 한울님께 섬기게 하였다. ...
동서의 사이는 빙탄(氷炭;얼음과 석탄 즉 불)의 관계인데 지성으로 천주를 공경한다는 이유만으로 선생을 도리어 서도로 무함하였다. ...[동학이] 설사 성학(聖學)이 아니라 하더라도 서도의 무리가 아닌데도 구별하지 않고 같은 무리로 취급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서학의 여파로 지목하는 열읍(列邑)의 수령들은 빗질하듯 잡아가두고 매질로써 전재(錢財)를 토색하니 연달아 죽어나간다.
....우리는 양묵(楊墨)을 거부하는 자는 성인의 제자라는 말은 들었지만 양묵을 거부한다면서 재물을 취하는 자가 성인의 제자가 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어찌 열읍의 관리들은 동학을 재물로 보고 떠돌이가 되게 하며 살아갈 수 없게 만들고 있는가?
...우리도 열성조의 백성으로 성현의 글을 읽었고, 임금님의 땅에서 먹고 살고 있다. 동학에 뜻을 두게 된 것은 사람으로하여금 스스로 허물을 고쳐 새사람이 되어 천지를 공경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스승님과 어른을 높이 받들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화목하고 이웃을 서로 도와주며 친구들간에 신의를 세우고 부부의 직분을 지키게 하여 자손을 가르치는 도리를 다하자는데 있었다. 하늘에 머리를 둔 사람이라면 이것을 버리고 딴 무엇을 학하랴.
지금 서양의 학과 왜놈 우두머리들의 해독은 외진에 들어와 제멋대로 날뛰고 있으며, 도리를 어기고 거술리는 짓을 임금님 수레 밑에서 벌이고 있다. ... 저희들은 성심껏 수도하며 한울님께 축원하는 바는 광제창생과 보국안민의 대원(大願)이다. 어찌 털끝만치라도 바르지 못한 이치가 있겠는가.
...순상에게 원하는 것은 광대한 덕을 특별히 베푸시어 상감께 장문을 올려 참 된 도라는 것을 나타나게 하여 주시고 각 읍에 시달하여 빈사 상태에 있는 백성을 구제케 한다면 소부두모(召父杜母;백성이 원님의 선정을 칭송하는 말)의 칭찬보다도 오히려 만족하고 고마울 것이다. ...저희 선생님의 원한을 씻게 해주기를 엎드려 빌며 하늘같은 나라의 은혜를 널리 베풀어 주시기를 천만번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임진년 11월 2일
전라감사 이경직은 정치적 수완을 발휘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동학도를 초장에 제압할 궁리만 하였다. 이경직이 6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동학지도부는 이경직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글을 보냈다.
이경직은 9일에야 제사(題辭)를 보냈다. 이단의 무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 즉시 물러가 새사람이 되라고 하였다. 이경직은 청주사람으로 1876년 동몽교관이 된 이후 1885년에 문과에 급제하면서 요직에 나갔다. 종6품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정3품 참의내무부사를 지냈다. 1892년 전라감사로 부임하였다. 워낙 정치적 수완이 없었다.
제음(題音)
너희들의 학은 바로 나라에서 금하고 있다. 사람의 본성을 갖추었으면 어찌 정학을 버리고 이단에 쏠려 스스로 금법을 불러들였는가 이번 소장에서는 그것을 널리 펴기를 바라고 있으니 말이 되지 않으니 심히 놀라운 일이다. 곧 물러가서 모두 새사람이 되어 감히 미혹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초 9일
동학도들은 이 글을 받아보고 계속 싸우기로 하였다. 감사는 영장 김시풍에게 300명의 군졸을 동원하여 해산시키도록 명을 내렸다.
전라감영군 출동
감영군을 이끌고 삼례 남쪽 한천까지 온 김시풍은 전령을 보내 대표자를 나오라고 불러냈다. 그러나 지도부는 만나보려 온 사람이 찾아와야 한다며 불응했다. 김시풍은 300명의 감영군을 도열시키고 나서 동학도소로 들어와 서인주를 만났다.
김시풍은 “어찌 무리를 모아 태평성세를 어지럽히려는가”고 일갈하였다. 서인주는 “관리배들이 도인들을 상해하므로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여 감사에게 의송을 올리려고 모였다, 어찌 이 일을 민심을 현혹케 하는 일이라 하겠는가?” 대꾸하였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한 시간을 째려보며 대치하다가 60세의 김시풍이 드디어 칼을 뽑아들고 허세를 부렸다. 서인주는 예의를 다하여 대해주었다. 김시풍은 자신의 허세가 먹혀들지 않자 그 자리에 앉으며 “동학이 난당(亂黨)인줄 들었는데 와서 보니 관대한 것을 알겠다. 윗사람에게 알려서 해결해주겠다”며 호의를 보였다. [『남원군동학사』참조]
김시풍은 군대를 이끌고 전주로 돌아갔다. 감사에게 해산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하였다. 이경직도 별 수 없이 11월 11일자로 감결(甘結)을 각 군현에 내려보냈다. 모든 사람이 감결의 내용을 알 수 있게끔 번역하여 요소요소에 붙이도록 명했다. 충청에서와 같이 “각 읍에 속해 있는 관리들은 [동학] 금단을 이용하여 빈번히 전재를 약탈하니 어찌 재물을 탈취할 줄 알았으랴”, “감결이 도착하는 즉시 경내에 명하여 미혹하고 괘오된 백성이 있으면 그로 하여금 마음을 고쳐서 정학을 닦게 할 것이며, 관속배들의 토색은 철저히 금하도록 하여 비록 한 푼이라도 탈취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11월 12일 동학 지도부는 감결 내용을 확인한 다음 해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감사의 명에 각 고을 수재들이 따른다는 보장이 없어서 사후 대책을 논의하였다. 충청. 전라 감영이 정부의 명에 따를 뿐이라는 변명이 사실이므로, 내친 김에 정부를 상대로 교조신원운동을 벌이자는 의견이 나오고, 앞으로 각 고을 관리들이 감사의 명을 따르는지 감시하고 불법을 재차 저지르면 도소에서 감영에 단자를 올려 고쳐나가도록 하였다. 해월은 이러 내용을 경통(敬通)에 담아 각 접으로 보냈다.
관찰사가 동학탄압을 금하라는 명을 내린 후 어떤 지역은 오히려 더 나빠졌다. 충청도 보다 전라도가 더욱 심하여 전라도 도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삼례와 원평으로 몰려들었다. 결국 지도부는 서울로 올라가 왕궁 앞에서 평화적 신원운동을 펴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전라관찰사는 책임을 느껴서 각 군현에 감결을 다시 발송하고 “동학 여류들이 편안히 자리잡게 해줄 것”을 재차 강조하였다.
첫댓글 전교조가 단협 체결하자는고 하면서 집단행동 하는 것과 비슷한 내용이네요. 동학은 대오가 질서 정연하네요. 진퇴를 결정함에 있엇 지도부의 지도를 잘 따르고 있네요. 아주 정교하고 정비가 잘 된 조직임을 확인할 수 있네요.